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52)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52화(52/350)
보름달이 떴다.
태양의 빛을 가득 담아 세상을 다시금 비추는 대보름달이다.
기숙사 근처에 있는 넓은 정원의 한구석에서.
나는 그 찬란한 세례를 받으며 마력을 단련하고 있었다. 고독한 방 안에서 몰입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이렇듯 밖의 정취를 즐기며 단련하는 게 마력의 정처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마력의 흐름을 건드리자 변화가 느껴진다.
‘마나 총량이 늘어나면서 동시에 저주 마법의 수준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마법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계위로 나뉜다.
가장 낮은 계위인 저위.
다음 단계인 중위.
정상에 가까운 고위.
여기까지는 아카데미아를 졸업할 때가 되면 대부분 이들이 지나가는 관례다.
바르간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던 성취는 대부분의 마법이 고위. 몇몇 전투에 불필요하거나 성향에 맞지 않는 마법은 중위에 머물렀지만 억지로 발전시킬 필요는 없다. 가성비가 떨어지니까.
마법이 고위에 닿으면 비로소 해당 분야 마법의 대략적인 형체를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의 계위에서부터 본격적인 개인의 연구와 발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조금이면 저주 마법이 「해득(解得)」의 계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고위의 다음 단계이자, 마법의 새로운 경지.
신세계에 문이 열리고 기존에 체감되던 세상의 모든 인지가 다시금 정리되는 계위.
막 해득 계위에 들어선 이를 초입자. 그 이후의 깨달음에 순서를 매겨 세밀하게 나누는 이도 있지만, 정확히 말해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해득의 계위에 오르고, 개인의 깨달음을 수치상으로 순서를 매겨 표시하는 건 통계를 위한 왜곡을 발생시키게 된다.
그만큼 섬세하고 정교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한낱 수치와 어설픈 계층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뭐, 정말 격이 다른 수준에 오른 이를 초월(超越)의 계위에 이르렀다고 표현하는 건 일반적이긴 하나, 이는 나중의 이야기이며 정말 소수에 해당하는 일이다.
아무튼.
최근 내가 마법에서 목표로 잡는 고유술식을 완성하기 위해선 적어도 하나의 분야에서 해득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본래 바르간의 저주 마법이 해득의 계위에 이르는 건 지금으로부터 대략 8개월 뒤. 빙의하고 난 7개월간의 성과가 무시할 만한 건 아니라는 기분 좋은 소리였다.
“…….”
근처에서 나를 주시하는 한 인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최대한으로 마력을 감추려 들지만, 아직 서툰 감이 있다.
있었다는 건 꽤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방해하지 않기에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집중이 깨지는 게 싫었으니까. 훈련을 일시적으로 멈춘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지만.
“프리다.”
내 음성이 그녀를 부르자, 근처에 있는 풀숲의 잔가지들이 흔들렸다. 풀숲 뒤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프리다가 난감하게 웃으며 모습을 보였다.
나오기 전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으로 보아 내면에서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하, 엿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산책 나왔다가 어쩌다 보니….”
달빛 아래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프리다는 평소와 생김새가 달랐다. 주황빛이 도는 연갈색의 머리칼이 길게 늘어져 있는 건 똑같지만, 머리에 달린 뾰족한 귀와 치마폭 안에 숨긴 폭신한 꼬리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 이 모습은 말이죠….”
“알고 있다. 너는 아인종이 아니더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나라에 존재하던 할렘가. 그곳에서 살아온 프리다는 본래 아인종이 가득한 다렉 연합국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낯선 할렘가에 버려지지만 않았더라면, 어쩌면 같은 지역 출신인 디피엘리아나 그 외의 인물들과 친구 사이를 맺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네, 맞아요….”
설마 자기 종족을 알고 있는지는 몰랐다는 눈치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별 희귀하지도 않은 걸 숨기려 든다며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카데미아에 널린 게 아인이다. 네가 살아왔던 할렘가에서는 그 꼬리나 귀 때문에 표적이 되었겠으나 여기서는 아니라는 소리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귀찮은 짓을 하더구나.”
“…버릇이 되어서 그런지 숨기게 되더라고요.”
프리다는 신기하다는 눈동자를 하고 있다. 어떻게 거기까지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는 것 같다.
프리다의 치마 아래 툭 하고 복슬복슬한 꼬리가 떨궈졌다. 무의식적으로 경계하느라 숨겼던 꼬리가 떨어진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말거라. 오늘은 대화에 많은 시간을 부었다. 더는 입을 나불거리는 데 아까운 재원을 사용하고 싶지 않으니.”
“…혹시 저주 마법을 극도로 깨닫게 되면 사람 심리를 훤히 볼 수 있는 건가요… 거기까지 보시니 뭔가 무섭네요.”
프리다는 자기 몸을 감싸 안으며 두려움에 떠는 시늉을 보였다. 그러다 내가 무시하고 떠날 기미를 보이자 급하게 말을 잇는다.
“바르간 님이 시키신 대로 연구회 서류 정리를 다 했어요. 청소는 당연히 먼지 한 톨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깔끔히 했고요.”
“그 말을 뱉은 목적이 뭐냐.”
“제가 이런 말을 꺼낸다는 게 무슨 의도인지 아시지 않나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노골적인 태도에 다소 어이가 없었으나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확실해서 편하다고 할까.
품 안에 있는 은화 주머니에서 두 닢을 던져 주자, 공중에서 캐치한 프리다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항상 감사합니다!”
밖에서 할 만큼의 단련은 끝냈다. 이만 돌아가야겠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니 프리다가 졸졸 따라붙었다. 원하는 건 이미 줬건만 붙는 걸 보아 아직 부족하다는 신호일까 생각하자, 말을 잇는다.
“바르간 님은 수련에만 매진하시네요.”
“필요한 일이니 말이다.”
“매일 그렇게 몰두하시는 거예요?”
나는 빤히 프리다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을 둘러서 하는 것만 같다.
“뭐가 궁금한 것이냐.”
“아, 역시… 눈치가 굉장히 빠르시네요.”
프리다는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곤, 곧 그 눈을 지그시 떠 나를 올려다봤다. ‘이런 걸 묻는 게 실례라는 건 알지만, 여쭤볼게요.’라는 말로 돌다리를 세운다.
“여자에게는 흥미가 없으신 건가요?”
그 뜬금없고 당돌한 물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남색이라도 즐기는 것 같으냐.”
“그건 아니지만, 항상 단련이나 서적만 읽으시고. 알리시아 같은 아름다운 시종을 두고는 손끝 하나 건들지도 않으셨잖아요?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고 생각해요.”
“발로 밀쳐서 잡벌레로 가득한 구덩이 속에 던져 놓기는 했다만.”
“…으엑. 그건 좀.”
질색하던 프리다는 풉? 하고 웃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의미로 대꾸하지는 않을 텐데 특이하다는 사족을 붙였다. 자신이 바라는 대답과는 다르다고 한다.
“아, 그렇다는 건….”
히히거리며 웃던 프리다는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작은 탄성을 지르더니 분위기를 바꿨다.
선천적으로 지닌 명랑한 기운이 온전히 가시지는 않았으나 어딘가 차분해지고 농염한 기운이 엿보였다.
간을 보는 행위이기도 했다.
“바르간 님이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라는 정보를 얻었으니 이건 희소식이네요.”
누가 여우 아니랄까 봐, 프리다는 살금살금 다가와 의미심장한 눈매로 나를 바라봤다.
바람을 타고 달콤한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저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치마 아래로 살랑거리는 꼬리 끝이 보인다.
그녀의 당당하면서 어딘가 도발적인 눈매를 보고 있자니 문뜩 소설을 읽고 있을 당시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지.
“네가 알게 되었다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그거야 아직 모르죠. 저는 두 번째 여인이든 세 번째 여인이든 상관하지 않거든요.”
“결국 돈이 최고다 이거냐.”
“순전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가장 큰 까닭인 건 확실하죠?”
원작에서 프리다는 잘 쳐줘 봐야 자주 나오는 조연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주인공이었던 리암에게 있어서 그랬을 뿐. 바르간과 에리카와는 제법 밀접한 연이 있었다.
“돈이 목적이라면 숨겨야 하는 게 기본이거늘 그런 태도로 내가 잘도 퍼 주겠구나.”
“숨긴다고 모르실 분도 아니잖아요.”
에리카와의 약혼 기념일.
원작에서 에리카의 데이트 제안을 받은 바르간은 당일 해당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에리카를 바람맞힌 이유는 명확하다.
자세한 내막에 관해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았으나 언급은 있었으니, 독자가 알 수 있었다.
“저의 매력을 아직 모르셔서 그래요.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는 시간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요? 그래, 다음 주에 같이 어딘가에 놀러 가는 거예요. 그럼 분명….”
알리시아와 함께하지 않았던 바르간에게 돈 냄새나 출세 냄새를 맡은 인물들이 몇몇 붙었었는데 그중 유독 눈에 띄었던 인물이 ‘프리다’였다.
프리다는 당시에도 바르간에게 접근해 데이트를 제안했고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하게 에리카의 약속 날짜와 겹쳐졌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바르간의 선택은 에리카가 아닌 프리다였다. 바르간의 심리에 대한 묘사는 없었으나 확언하건대 프리다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은 아닐 터이다.
당시의 바르간은 모종의 사유로 에리카를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으며, 그 일이 에리카에게 모욕감을 주기에 적합했기 때문에 이용한 것이다.
이후로도 프리다를 통해 바르간은 에리카에게 적지 않은 치욕을 줬다. 오죽하면 에리카가 내연녀에게 밀린 불쌍한 귀족이라고까지 불렸겠는가.
“…….”
에리카….
에리카라….
“바르간 님?”
깊은 곳에서 묘한 불쾌감이 꿈틀거렸다.
장난을 치려는, 받아 주려는 마음도 싹 사라진다.
받아들일 수 없는 그것이 니글거리는 속을 기어 다니는 듯하다.
나는 프리다를 옆으로 밀어내곤 앞으로 걸어갔다.
잡념이 많아진다. 산책도 이만하면 되었다.
…방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밤이 늦었다. 너도 이만 들어가거라.”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더는 1분이라도, 1초라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건 그저 핑계인가.
“선약이 있다.”
프리다를 내버려 둔 채, 방으로 들어섰다.
유독 길었던 오늘의 달밤 아래의 순간도 이것으로 끝이 났다.
그렇게 다소 당혹스럽게 홀로 남게 된 프리다는 골똘히 고민하더니 혼잣말을 뱉었다. 그녀의 눈은 빠르게 계산하고 있다.
“…에리카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은 역시 거짓이었나 보네.”
프리다 또한 몸을 돌려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갔다.
***
다음 날 오후.
사역마 실습 교육을 마치고 연구실로 향하려던 나는 같은 수업을 들었던 디피엘리아와 마주쳤다. 암울한 표정이던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보아하니 이제 말을 제법 나눴다고 매번 인사를 할 요량인 것 같은데, 저리 귀신 보듯 대하니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녀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나에게 편지 한 통을 줬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 내가 봉투를 잡자마자 빠르게 달아난다. 그녀의 사고대로 움직이는 휠체어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다.
편지를 곧바로 읽어 볼까 하다가 집어넣었다. 곧바로 어떤 이와 눈이 마주쳤기에.
“…….”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에리카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를 떴다. 언제나와 같은 차갑고, 새침한 표정이었다.
괜히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이상하다… 클래스전 말고는 한 게 없는데. 아니면, 디피엘리아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상정 이상으로 무른 녀석이다.
터벅?.
걸음을 옮겼다.
연구회에서는 복귀한 핀까지 해서 모두가 모여 있었다. 프리다는 어제의 일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능청스럽게 행동했다. 자연스럽게 나에게 말을 걸고, 에밀리에게 장난을 치는 등 평소와 같았다.
소란스러운 현장을 함묵시키고 나는 말을 꺼냈다.
“아르볼 프루탈 신입 회원 선발이 끝났다. 이것으로 총 33명의 대형 연구회가 되었지.”
아직 신입들은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통과한 이들에 대한 리스트는 게시판을 통해 남겨 두었지만, 그들의 활동은 정확히 말해 연구실을 옮기고 나서부터다.
“따라서, 그것에 맞게 연구실을 바꾸게 되었다. 이미 새로운 곳을 구해 둔 상태다. 대부분의 연구회 물품은 아카데미아의 관계자들이 옮겨 줄 것이나, 개인의 물품은 개인이 옮기도록 해라.”
연구회 이동과 관련된 이외의 사항들을 멤버들에게 알린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는 앞으로 아르볼 프루탈의 기본 토대가 되어 지탱하는 기둥 역할을 할 것이다.
“전에 말한 대로 아르볼 프루탈은 네 개의 그룹으로 나눠지게 될 것이다.”
간부들이 포진하는 ‘뿌리’.
엘리트 그룹인 ‘목대’.
범인 수준의 ‘줄기’.
덜 떨어지는 ‘가지’.
“뿌리에 속하는 멤버들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프리다를 제외하곤, 추가로 맡아야 하는 직책이 있다.”
본 소속은 뿌리이나, 이들은 각 그룹의 책임자를 맡을 것이다. 해당 그룹의 인원들이 별 탈 없이 성장하고 있는지를 관찰·보고하며, 그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도움을 준다. 그 외의 일들도 도맡겠으나 중요 임무는 저것이다.
“목대의 책임자는 나다. 나 이외에 여기서 이들을 이끌 인재가 없어, 안 그래도 바쁜 내가 맡게 되었다.”
목대에 속한 엘리트들은 총 넷.
1학년 벨리아르 트로아 밴틀로.
2학년 오셀 빅토리아 프란체스카.
4학년 알렉세리아.
4학년 브락키움.
전에 잠깐 언급했던 주요 인물 넷이다.
밴틀로야 더는 설명할 필요 없을 듯하고.
2학년 프란체스카는 1학년 당시 입학 성적 2위로 학생회 출신이었다. 2학년이 되면서 학생회를 나가 무소속이 되었는데 이번에 우리 연구회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2학년은 쓸 만한 놈들이 몇 없는데 프란체스카, 그녀는 제외다.
4학년 알렉세리아도 프란체스카 못지않은 인재이며 학생회와 연이 있는데. 알렉세리아는 무려 재작년 학생회장이다.
3학년에 학생회장이 된 그녀는 1년간의 임기가 끝나고, 휴학을 하여 세상을 여행했다. 그러다 이번에 그의 약혼자 브락키움과 함께 복학했다. 알고 있는 설정으론 브락키움은 그녀가 홀로 여행하는 게 걱정되어 함께했다고 한다.
알렉세리아가 흥미로 아르볼 프루탈에 들어오고 그 뒤를 브락키움이 따른 것인데, 경위가 어찌 되었든 이왕 들어온 거 내 입맛대로, 유용하게 사용해 주도록 하자.
“…이어서 줄기의 책임자는 알리시아와 세레나다.”
줄기의 인원들은 전부 열여섯.
가장 인원이 밀집된 그룹이기에 책임자를 두 명 배치했다. 알리시아는 검술, 세레나는 궁술을 주로 다루니 필요하다면 적절하게 분야를 나눠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마지막으로 덜떨어지는 그룹, 가지는 에밀리가 맡는다.”
“내가 맡는 그룹만 그렇게 부르는 건 무슨 심보인데….”
가지는 여덟 명으로 구성된다.
재능이 있긴 하지만 아직 싹조차 트이지 않았거나 약간의 여실만 보이는 정도의 인물들을 종합해 놓은 집단.
에밀리에게 맡기자니 다소 불안하기도 하지만 내 도움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에밀리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으니 그녀를 임명했다.
그리고 에밀리가 의외로 사람을 분석하는 걸 나름 잘하기도 한다. 정말 의외로.
“잠깐. 왜 여덟이야? 내가 알기론 일곱이었는데. 그리고… 핀은 책임 구역이 없어?”
“…….”
에밀리와 눈이 마주친 핀은 옅은 웃음을 보이며 내 대답을 대신했다. 에밀리의 표정이 점차 얼어붙는다. ‘설마…’와 같은 말을 입에 머금고 나를 허망한 눈으로 바라본다.
“핀을 연구회에서 퇴출한 거야?”
아니라고 부정해 주길 원하는 에밀리를 무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것 봐라. 사람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중간에 끊어 버리니 오해와 분란이 발생하는 것이다.
“기존 멤버였던 핀은 뿌리가 아니라 가지에 속한다. 에밀리, 너처럼 책임자를 맡는 게 아니라 그 일원으로 말이다.”
“그런…!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에밀리, 괜찮아. 내가 부탁드린 거야.”
핀의 말에 멈춰선 에밀리의 떨리는 눈매가 핀을 향했다. 당사자인 핀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클래스전으로 내가 얼마나 약해 빠졌는지 뼈저리게 느꼈어. 기존 멤버라는 이유만으로 뿌리에 속하기에는 내가 너무 부끄러울 것 같더라.”
“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연구회를 나가는 것도 아니고,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핀은 웃어 보였다.
자신만만하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는 걸 보이며 선언한다.
“반드시 뿌리까지 갈 테니까.”
가지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목대로, 목대에서 뿌리로.
아르볼 프루탈의 그룹 멤버는 유동적으로 변한다. 전체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그중에서도 유독 성장이 빠른 인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조건을 충족한 인물들은 더 높은 그룹으로 재배치된다.
핀은 이야기한다.
현재 가장 아래 등급이라 부를 수 있는 ‘가지’에서 종점인 ‘뿌리’까지 가고야 말겠다고.
에밀리는 핀의 얼굴에서 슬픔이나 섭섭한 부정적인 감정을 읽어 내지 못한다. 핀은 그 순간이 너무나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늦게 오기만 해 봐.”
“금방 쫓아갈게.”
클래스전을 준비하면서도 느낀 거지만 두 사람은 나름의 경쟁심 따위를 느끼는 듯했다. 실력 면으로는 에밀리가 우세하나 에밀리는 그 옆에서 핀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직접 지켜봤다.
핀은 에밀리의 경지를.
에밀리는 핀의 열정을.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 모습에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이들은 원래라면 라이벌은커녕 인사도 하지 않았던, 서로 남남과 마찬가지인 사이였다.
그런데 내가 빙의되고 나서, 이 둘의 관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앞으로 1년이 조금 남지 않은 시간.
아카데미아의 비극이 도래하는 날.
본래라면 퇴장하고 말 이 두 인물은 과연 어떻게 될까.
“뭘 그렇게 보고 있느냐.”
“아 죄송합니다. 도련님… 그저….”
나를 몰래 바라보고 있던 알리시아는 기분 좋게 눈웃음을 지었다. 봄바람처럼 따스한 웃음을.
“도련님께서 즐거워 보이시기에. 저도 행복한 기분이 들어 그런 것 같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로구나.”
“네, 도련님 말씀이 옳습니다.”
“…….”
나의 말을 긍정하는 알리시아.
한데, 짓고 있는 미소가 상당히 거슬린다. 마치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어미의 눈빛.
…무시하도록 하자.
“자, 그럼 오늘의 연구회 활동을 시작하자.”
작은 연구실이 다시 분주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