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58)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58화(58/350)
에리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오랜 잠이었다.
하루에 이 정도의 숙면을 한 건 아주 어릴 적 이후론 처음이다.
여린 밤하늘의 빛을 받고 있는 남자의 형태가 보인다.
그가 말을 걸었다.
“일어났나.”
“…여긴.”
“보다시피 아카데미아로 돌아가는 비공정이다. 이미 통금 시간은 훨씬 지났지만 말이다.”
“…….”
교수들은 사건이 발생한 현장에서의 조사를 이어 가고 바르간과 에리카만이 별도의 비공정으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옆에는 관계자 한 명이 있었지만, 피곤에 찌들었는지 잠을 자고 있다.
상황을 대강 파악한 에리카의 눈이 커진다. 다급하게 바르간을 부르며 전말에 관해 묻는다.
“알티프는… 그 녀석은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너는….”
바르간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녀석은 죽었다. 또한, 내 걱정도 할 필요 없다.”
“…….”
에리카의 눈꺼풀이 나비가 앉듯 가라앉는다. 잠시 정적을 유지하더니, 네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고 하며 뒷말을 덧붙인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무사한 건가. 관객으로 가득했었는데.”
바르간은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부터 관중도, 다수의 배우도 없었다. 무대에 있는 건 오로지 한 마리의 괴물이었지.”
“입구부터가 함정이었다는 건가.”
“그렇지.”
“그래… 하지만 왜 우리를….”
바르간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며, 어쩌면 단순히 운이 좋지 않아서 휘말린 걸 수 있다고 넘긴다.
“포트레트가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없었다. 하긴, 있었다면 네가 위험에 처할 일도 없었겠지만.”
“…악운이 겹쳤다는 거네.”
에리카는 그의 말의 진의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가 전달하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매우 정신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보내 주신 티켓.
그 극장에 잠복해 있던 주교급 알티프.
오늘따라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 가문의 관계자.
이 모든 게 ‘악운’ 하나로 연결되었다.
“하아….”
에리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안도감, 자괴감 따위가 담겨 있었다.
바르간은 알티프의 함정을 깨닫고 녀석을 처치했다.
반면, 자신은 어떤가.
포트레트가의 영애라는 자가 한심스럽게도 괴물이 설치한 덫에 걸려 허우적댔다. 그럴 뿐만 아니라, 원망스러운 남자 슈겐하르츠에게까지 큰 빚을 지고 말았다.
“…….”
“짐이 되어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다면 나중에라도 하면 된다. 앞으로 얼굴 볼 날도 많으니 말이다.”
“…….”
에리카는 안하무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어이가 없기도 했다. 알티프의 주교를 상대한다는 큰일을 겪고 나서도 이렇게 태평할 수 있다니.
어떤 의미로는 존경심마저 들어, 더욱 자기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에리카는 마음에도 없는, 아니 어쩌면 약간은 있을지 모르는 그런 말을 뱉었다.
“…버리고 가지 그랬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에리카는 고개를 숙였다.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함정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를 버리고 가지 그랬냐고.”
그녀는 입술을 작게 깨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감은 이미 바닥으로 치닫고 있다.
만약 그가 자신을 버리고 갔더라면, 이 지독한 관계가 쉽게 정리될 수 있었다. 그도 자신도 바라지 않는 약혼.
마침 티켓은 포트레트가에서 준비한 물건이었다.
바르간이 함정임을 깨닫고 자신을 버리고 갔더라면 무난하게 파혼은 물론, 정당성도 확보할 수 있었다.
포트레트가에서 준비한 장소에 알고 보니 알티프가 있었고, 간신히 도망쳐 나왔지만 부득이하게 약혼녀까지는 챙기지 못했다.
이렇게만 입장을 발표했다면 말끔하게 끝났을 텐데.
다소 수군거릴지 몰라도 대부분 화살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
“에리카.”
바르간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리카는 고개를 올리지 않는다. 복잡한 여러 감정이 그녀가 고개를 드는 걸 거부했다.
그러자, 그녀의 귓가에 긴 한숨 소리가 들린다.
당연히 바르간의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물었다.”
“…….”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바르간은 꼬리를 이었다.
“너를 버리고 가면 내 입맛대로 이야기를 조합할 수 있으니 그 점을 짚는 건가 너는?”
“……응.”
에리카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진다.
다시금 들리는 그의 기나긴 한숨.
들리는 소리로, 그가 다소 화가 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내가 그런… 아니,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랬다면 이 약혼도 손쉽게 끝낼 수 있었겠지.”
“…….”
“아니지, 어쩌면 나는 이번 사건을 이용했을지도 모르겠구나. 네가 비참하게 죽어 거름이 되었을 때. 나는 사랑스러운 약혼자를 죽이고 나를 위험에 빠뜨리게 한 포트레트가에 책임을 물을 수 있었겠지.”
“…….”
“악착같이 달려들어 포트레트의 명예는 땅으로 꺼지게 만들고, 배상금까지 두둑이 받아 내려 닦달했을 수 있다. 그 돈을 물 새듯이, 방탕하게 낭비하며 말이다.”
“…!”
이어지는 폭언을 참지 못한 에리카는 기세 좋게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에는 소량의 눈물이 올라와 있었다.
바르간은 그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웃음 짓는다.
“이제야 고개를 드는구나.”
“…너는… 너는…!”
에리카는 급하게 눈가에 맺히려는 눈물을 닦아 낸다.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선수를 치는 건 바르간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그럴 수 있었지. 모든 걸 한순간에 끊어 낼 수 있었어.”
“그럼?!”
“하나, 그러지 않지 않았느냐.”
바르간은 그녀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전한다.
“그런 가정의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 지금 너는 이렇게 내 눈앞에서 숨을 쉬고 있지. 어디 그뿐인가, 오른 눈물을 숨기며 옅게 떨리는 손을 꽉 쥐고 있다.”
에리카, 지금의 너는 이렇게 살아 있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굳이 모진 말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들지 말거라.
바르간의 눈을 바라본 에리카는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모르겠다.
슈겐하르츠, 너를 모르겠어.
왜 살려 준 거야. 왜 끊어 내지 않은 거야.
왜… 왜….
왜 다시 다가오는 거야….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바르간은 그녀를 쏘아붙였다. 에리카가 장막으로 자신을 가리는 꼴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아니면, 정말 그런 말을 뱉고 싶었던 거냐.”
“…….”
그녀는 숨과 함께 떨리는 동공을 바로잡으려 들며 바르간을 직시했다.
아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부정적인 가정으로 자신을 스스로 옭아매고 싶었던 게 아니다. 이런 순간조차 솔직하지 못한 건 자신의 나쁜 점이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방 안에 든 벌레를 밟듯 죽여 버린 이 녀석에게 숙이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 맞불을 피웠다.
…….
에리카는 숨을 고른다.
지금의 자신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조금의 발전도 없을 것이다.
?이래선 안 된다.
그녀는 다짐을 마친다.
에리카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바르간이 담겼다.
“나는 아직도 너를 원망해. 앞으로도 그럴 거야.”
아마 평생을, 너를 증오하며 살겠지.
“너에게 긍정적인 감정 따윈 느끼지 않아.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뭐, 그렇겠지. 이 정도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했?.”
“?하지만!”
그 짧은 단어 하나에 공기의 흐름이 뒤바뀐다.
“하지만… 포트레트가의 차녀로서… 가문의 대표자로서… 너에게 감사를 표할게.”
에리카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인다. 다리 한쪽은 뒤로 빼었고, 양손으론 드레스 자락을 잡고 있다.
깔끔한 동작. 그녀를 비추는 미세한 불빛.
그 그림 같은 광경은 보는 이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날 구해 줘서… 홀로 두고 가지 않아 줘서… 고마워.”
에리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유지한다.
바르간은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슬픔이나 분노에 잠겨 있지는 않을 거란 걸.
?달달달.
비공정이 얕게 떨렸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린다.
?달달달.
그 작은 진동을 체감한다.
***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내일, 날이 밝으면 귀찮은 과정을 거쳐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야 한다. 학생이라는 신분은 이럴 때 참 불편하다.
에리카와 함께 걸어가다, 그녀는 자신을 데려다줄 필요 없다고 하면서 곧바로 들어가 버렸다. 평소의 날이 선 목소리가 아니라, 기세가 약했다.
“음?”
그렇게 내 방문 앞에 도착하자,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고개가 돌아가며 시선이 교류한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알리시아가 옅은 웃음을 보인다.
단아함을 한껏 감싸 안은 그녀는 나를 반긴다.
“…그래. 계속 그 상태로 기다리고 있던 것이냐.”
“도련님이 언제 오실지 몰라,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략 4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그녀는 방문 앞에 서서 일말의 미동도 없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미련한 녀석.”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긴 했지만, 대충 시간을 보고 너무 늦었다 싶으면 돌아가는 게 정상일 텐데… 아, 하긴 이 녀석에게 상식을 기대하는 건 맞지 않지. 내 실책이다.
“마나 총량을 확대하거나, 내부의 불순물들을 제거하면서 기다렸기에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건 잘했구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려는 듯, 알리시아는 요점을 정확히 짚어 나에게 전했다.
솔직히 말해, 알리시아의 발전을 염려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이 기가 막히는 상황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지만. 그녀는 내 반응을 오해한 모양이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알리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레 나의 전신을 훑었다.
그녀의 세심한 눈길이 곳곳에 닿는다.
“다치신 곳은 없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당연한 말을.”
그딴 수준 떨어지는 괴물에게 피를 볼 수는 없지. 지금의 나는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이렇듯 말끔하게 주교급을 퇴치할 수 있다.
“…….”
그대로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내 발치를 본다. 단순히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진중하게 묻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다소 불안하고 어두운 모습이다.
그녀가 운을 뗀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고, 도련님께서 피곤해 보이시니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으고 있는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다시 깊게 허리를 접는다.
원래 그녀의 성장을 확인하는 시간대에서 지난 건 맞지만, 내가 피곤해 보인다고? 전혀 티가 나지 않을 텐데….
아니, 그건 그렇고 이 녀석 보소. 뭐 하는 거야.
“도, 도련님…?!”
나는 강하게 알리시아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끌고 왔다.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의자에 던져 버린다.
영문도 모른 채 의자에 앉혀져 당황스러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잡아 살핀다. 잡은 얼굴이 붉고 뜨겁다.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고, 시선은 이리저리 방황한다.
병이나 외상 때문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딱밤을 날렸다.
“앗?!”
오랜만에 손가락이 아리다.
“누가 멋대로 꿍해져서는 검사도 맡지 않고 돌아가도 된다고 했나. 어처구니가 없이!”
“예, 예…? 하, 하지만… 이미 너무 날이 늦었고… 도련님께서도 피로가 누적되신 듯하여….”
“그럼 뭐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냐.”
“그거야… 도련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시는 걸 확인하기?아앗!”
두 번을 같은 곳을 강타하자, 알리시아의 눈에서 방울진 눈물이 올라왔다. 이런 명연기를 보니 더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살피는 눈이 좋아졌다는 건 내 인정하마, 하나, 정작 최근 네 스스로의 상태는 전혀 모르는 듯하니 오늘은 그 교육을 할 것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도저히?.”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힘들게 자존감을 올려 주었더니, 최근부터 도로 내려가고 있지 않으냐! 이 한심한 녀석아!”
?따악!
같은 곳을 세 번째.
이마가 시뻘겋다. 내 손가락도.
“도, 도련님… 너무 아픕니다….”
“그게 지금 네 상태다. 어딘가 정신적으로 아프지. 하나,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확실히 고쳐, 곤두박질치고 있는 자존감을 강제로 잡아 올려 주마.”
“그 말씀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새빨갛던 알리시아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한다.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일은 앞머리로 이마를 꼼꼼히 가려야 할 듯하구나.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도, 도, 도련님…!”
그렇게.
남자 기숙사에서 울리는 청명한 소리는.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