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61)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61화(61/350)
“저, 저기요 에리카…!”
학생회 회의가 끝나고.
디피엘리아는 오늘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에리카를 붙잡았다. 정확히는 오늘이 아니라 요새였으나. 어찌 되었든 어색한 건 매한가지였다.
“어?… 어.”
디피엘리아의 어색함이 전염된 것처럼, 한겨울의 벌판처럼 냉랭하던 에리카의 표정이 변모했다. 부르니까 멈추기는 했는데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서로 이도 저도 못 하는 모습이다.
우물쭈물하던 디피엘리아가 용기를 냈다.
“…이후, 시간 괜찮나요?”
그녀의 물음에 에리카가 입을 벌릴 틈도 없이, 디피엘리아는 급하게 말을 쏟아붓는다.
“시간이 된다면, 제 방에서 함께 과제를 풀었으면 해서요…!”
디피엘리아의 주먹이 앉아 있는 나무로 된 휠체어를 강하게 쥐어 잡는다. 여기까지 말하는 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간절한 모습에, 굳어 있던 에리카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던 표정을 풀었다.
“그래. 같이 하자.”
“에리카…!”
디피엘리아가 환호로 가득한 얼굴을 보인다.
다시금 관계를 복구시킬 기회를 준 에리카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듯하다.
에리카는 그녀의 반응을 보곤 쑥스러운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괜한 죄책감도 들었다. 자신이 먼저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을 이렇게까지 하도록 내버려 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둘은, 감도는 어색함을 온전히 떠밀어 내진 못했지만, 천천히 말을 이어 가며 기숙사로 향했다.
둘의 기숙사는 같은 B동이었다.
디피엘리아의 방은 각종 식물로 가득했다. 창문의 유리도 다른 방들보다 커 빛이 잘 들어온다.
꽃향기와 풀 내음이 방 냄새와 섞여 독특하다.
“차를 내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괜찮은데….”
“별로…인가요?”
“아, 아니… 좋아.”
디피엘리아의 목소리가 풀이 죽은 사람처럼 사그라들자, 에리카는 다급하게 부탁한다고 말을 바꿨다. 디피엘리아는 다시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고,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티 세트를 준비한다.
에리카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봤다. 거동이 불편한 디피엘리아였기에 도와줄 게 없나 물색하는 것이었는데, 그녀가 들고 다니는 지팡이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옆에서 그녀를 보조했다.
에리카가 도울 만한 일은 없었다.
“에리카는 레몬티를 좋아했었죠?”
“응…. 잘 마실게.”
티 세트를 들고 온 디피엘리아가 찻잔을 내밀었고, 에리카는 이를 받았다.
“각설탕도 준비해 놓았어요. 여기요.”
“아, 고마워.”
에리카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단 음식을 좋아하는 에리카는 항상 차를 마실 때마다 설탕을 넣어 먹었다.
휘적휘적.
설탕이 뜨거운 차에 잘 녹도록 티스푼으로 휘저어 준다. 에리카는 조심스레 완성된 차를 입에 가져다 댔고, 무감정해 보이던 그녀의 눈에 별똥별이 스치며 반짝였다.
“맛이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아.”
에리카는 뒤늦게 자신의 표정이 풀어져 있음을 인식했고, 차의 맛을 칭찬하며 주의를 돌리려 들었다.
이를 지켜본 디피엘리아는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에리카가 이런 또 다른 면모를 숨기려는 때가 가장 귀여웠다.
“…….”
그런 생각도 잠시.
디피엘리아는 고민에 잠겼다. 할 말이 있는데 쉽게 나오지 않는다.
분위기를 읽은 에리카는 찻잔을 내리며 그녀의 말을 기다린다. 디피엘리아는 조금 돌아가기로 했다.
“…우선, 파비안 교수님의 과제부터 하도록 할까요? 그게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래, 그렇게 하자.”
좀 더 분위기가 풀어진 뒤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에리카는 그렇게 느끼곤 그녀의 흐름을 따라 주었다.
파비안 교수의 과제는 사역마에 대한 내용이었다.
책을 꺼내 참고가 될 만한 사항들을 찾아보던 두 사람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갔다.
두 사람 다 꾸준히 공부하는 수재들이라, 과제 하나만으로도 말의 꼬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게 가능했다.
그러다 각자의 사역마를 소환했다.
디피엘리아는 항상 꺼내 둔 작은 새 말고 하얀 토끼를 불렀고, 에리카는 검은 까마귀를 보였다.
둘이 주목하는 대상은 사역마 자체보다, 그 사역마를 부른 소환진이었다. 그 형태는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내부에는 온갖 수식이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다.
에리카가 소환진을 유지시키며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이 식 때문에 이동할 수 있는 거야. 내 워프 마법이랑 비슷하지만, 실체가 존재하는 상태에선 옮길 수 없다는 점이 다르지.”
“아, 그렇군요…! 역시 에리카예요. 덕분에 이해가 단번에 됐어요.”
디피엘리아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밝은 미소를 보였다. 에리카의 설명은 정확하고 군더더기가 없어 이해하기 쉬웠다.
에리카가 살짝 몰려오는 묘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까딱이며 소환진을 바라보던 그녀의 사역마에게 손을 뻗는다.
사역마는 자연스럽게 그 위로 올랐다.
“귀여운 사역마예요…! 이름이 뭔가요?”
“…….”
분위기가 풀어졌다고 생각해서 물은 디피엘리아는 에리카가 말하기 꺼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다지 밝히고 싶어 하는 거 같지 않다.
“이름이 없군요. …그렇죠?”
괜히 찔러봤지만, 아닌 모양이다.
잠자코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까막이.”
“와아, 까막이! 좋은 이름이네요! 이 아이는 윤기 있게 빛나는 검은 깃털이 매력인데 딱 짚은 거 같아요.”
“…그…래?”
“네! 잘 지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어딘가 애매한 웃음을 짓는 에리카였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은 듯하다. 손가락으로 까막이의 목을 만지며 교감한다.
이를 바라보던 디피엘리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듯 말을 꺼냈다. 본격적으로 주제를 언급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에리카의 약혼자분의 사역마도 거의 다 검은색이었죠?”
“그렇지. 슈겐하르츠의 사역마는 대부분 암속성이니까.”
에리카는 흘깃 디피엘리아를 살폈다.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디피엘리아가 자신을 부른 가장 큰 이유를 이제부터 밝히려는 듯하다.
그게 슈겐하르츠와 관련이 있는 일인 줄은 몰랐지만, 두 사람의 접점은 거의 없었으니 그렇게 큰일은….
?불현듯 떠오르는 지난번의 기억.
디피엘리아가 슈겐하르츠에게 편지로 보이는 무언가를 건네고 황급히 달아났던 장면이 재생된다.
별다른 접점은… 없었을 텐데….
“그… 이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결코 이상한 의미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 줘요. …알겠죠, 에리카?”
사전 작업을 거하게 벌여 두는 디피엘리아.
그녀가 붙이는 미사여구가 길면 길어질수록 오히려 그 반대 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아래로 감추며 말을 잇는 디피엘리아. 다소 달뜬 숨은 더욱 상황을 묘하게 만들었다.
에리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이 흘러가도록 두었다. 디피엘리아는 침까지 삼켜 가며 힘들게 묻는다.
그렇게 그녀의 입에서 겨우 나온 말은.
“바르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요…!”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이런 사고가 들 틈을 주지 않고 추가 타격을 날리는 성녀.
“아, 바르간에게는 말하면 안 돼요…! 알겠죠?! 절대로 말하면 안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흔들림의 결정체를 맞이한 에리카의 머리가 하얗게 비워진다.
‘…음?’
***
『20시 17분. D-23 경기장. 승자,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승자,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반복적인 기계음을 뒤로하며, 나는 알리시아와 함께 기숙사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아직도 경기장에 남아 있는 남성이 오열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더는 나와 연관이 없는 일이다.
“도련님, 경하드리옵니다. 이번에 추가로 10카티아를 획득하게 돼, 60카티아로 부동의 1위를 유지하시는 게?.”
“당연한 걸 가지고 일일이 축하하려 들지 말거라.”
자기 일처럼 좋아하는… 그 이상으로 좋아하는 알리시아의 호들갑을 멈추게 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을 끊어 버려 기분이 나쁠 만도 하건만 알리시아는 뭐가 그렇게 행복한지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못한다.
그럼 확인해 봐야지.
“조금 전의 승부는 잘 관찰했겠지? 채 5분밖에 되지 않는 전투였으나, 배울 점은 있었다.”
“네, 확실히 지켜봤습니다. 펠릭스 님의 검술은 검술 명가 하이오드의 검. 저와 다른 점, 보다 효과적이라 판단되는 점을 중점으로 분석했습니다.”
“그깟 검술이 명가라니 우습구나. 과대 포장된 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냐?”
“분명 제 검술 선생이신 브람 님의 검보다는 못하였지만, 입학 성적 10위로 들어온 건 그런 까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찌르기는 특화되어 있어 주목할 만했습니다.”
오, 이젠 이 정도의 함정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는구나.
확실히 실력의 본질을 파악하는 법도 깨달아 가고 있어.
“제법이구나.”
“분에 넘치는 말씀, 감사합니다.”
고상하게 예를 보이던 알리시아를 내버려 두고 나아가기를 계속하자, 알리시아는 빠른 걸음으로 쫓아왔다.
그대로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상냥하게 웃어 보인다.
…뭐, 최근 떨어지고 있던 자존감과 자신감도 이 정도면 확실히 되찾은 거 같다.
“도련님, 궁금한 점이 두 가지 있는데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너무나도 익숙한 상황인지라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이 잠깐. 내가 차고 있는 팔찌로 향했다 돌아갔다. 마치 보지 않았다는 것처럼.
“그… 팔찌 말입니다. 혹시 에리카?.”
“?가 아니라, 멘토인 헤일리온에게 받았다. 단순한 치장구가 아니며 마나의 출력을 막는 유물이지. 모레부터 사용할 예정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알리시아에게 잠깐 눈길을 주곤 거뒀다. 뜸 들이지 말고, 다음 물음을 이으라는 표시였다.
“아, 예…! 그리고… 오늘이 벌써 27일입니다. 머지않아 이번 달이 지나고 마는데 저도 이른 시일 내에 등급전을 치러 카티아를 버는 편이 낫지?.”
“?않다. 적어도 30일까지는 기다려라. 곧 ‘적당한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그때까지도 마땅히 반응이 없다면 내가 허락할 터이니 내가 지시할 때까지 등급전은 금지다.”
“알겠습니다. 그럼, 도련님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알리시아는 내가 어떤 반응이 나타나기를 관망하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내 눈치를 살피곤 물어도 이야기하지 않을 걸 알아차린 건지, 내 지시에 아무런 의심 없이 따르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순백의 표정으로 혼자서 고개를 끄덕인다.
?끼익.
기숙사 방문 앞에 도착하자, 알리시아는 나보다 빠르게 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다. 그러곤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닫는다.
그러곤 평소와 같이 알리시아의 수준을 파악하고자 검토를 진행했다.
“모든 저항을 해제했으니 걸어 보거라.”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마나 출력으로 나에게 환각을 걸었다.
저번에 아르텔리온과 대결을 할 때는 시각을 이용한 검은 연기만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어느새 발전해 후각과 청각, 촉각을 건드는 저주도 가능했다.
고오오?.
마나의 진동이 울리고.
새벽안개가 물기를 가득 머금은 냄새가 나며 주변의 형상이 바뀐다.
고요한 숲속에 있는 호수. 나뭇잎에 달린 깨끗한 물 한 방울을 만지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이내 똑? 하고 손가락에서 떨어져 파문을 일으킨다. 그 소리를 들었다.
확실히 그녀는 저주에도 재능이 있다.
저주란 게 사용자를 많이 타는 마법 중 하나라, 적성이 없다면 기본적인 것도 사용하지 못하는데 알리시아는 가능하다.
물론, 가능하지 않았더라면 가르치지도 않았겠지만 이렇게 어느 정도 틀이 잡혀 가는 모습을 보니 다시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저주의 특성 중 하나가 또… 혈연관계면 사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게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 슈겐하르츠 본가에서 차남과 어머니를 빼고는 모두 저주를 사용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파고든 건 나와 장남뿐이지만 말이다.
“됐다. 이쯤 하면 충분하다.”
지시가 떨어지자, 알리시아는 환각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다소 안절부절못하는 눈으로 나를 살핀다.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아앗!”
“아무런 이상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위협적인 저주를 건 것도 아니면서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녀석이다. 설령 걸었다고 한들, 내가 가만히 있었을 리도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텐데.
“다음.”
“아, 네…!”
…그렇게 한동안 알리시아의 발전을 확인하고 그녀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허리를 깊게 숙인 알리시아는 인사를 마치고 문을 닫는다.
“그럼, 도련님.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내일은 4월 28일.
매년 4월 28일은, 바르간에게 있어 주의를 요하는 날이다. 최대한 충돌을 자제하고, 차라리 일찍 잠들어 살며시 흘려보내는 편이 낫다.
“그래, 가거라.”
문이 닫히는 동안.
줄어드는 틈새에서도 알리시아는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적어도, 문이 완전히 닫혀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저 모습을 유지하겠지.
겉으로 생각하는 바가 티 나기로 소문난 알리시아의 일이다. 티끌만큼의 우려감이나 걱정이 없는 저 표정을 보면 분명,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잘되었다.
그녀가 이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게 나로서도 귀찮은 일을 회피할 수 있도록 하니까.
4월 28일에는 마법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헤일리온의 단련을 시작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평소에 하던 수련도 해선 안 된다.
특히 밖에서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쓰지 못하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왜냐하면.
?끼익.
악역 바르간이 피를 토하는 걸 보여 줄 순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