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84)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84화(84/350)
1학기 기말고사 그 이후.
아카데미아는 침울한 안개에 휩싸였다.
이번 사건으로 전사하게 된 이들을 추모하는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
교회에서 파견된 성직자들이 이를 관장했고, 그 규모가 상당했다. 이들의 집안에도 해당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식을 치러 영혼을 달랜 뒤, 각자의 고향으로 시신이 옮겨질 예정이었다.
이 장례식에는 아카데미아의 모든 인원이 참여했으며, 평소의 활기나 소란 따위는 결코 찾아볼 수 없이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리암은 여전히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아카데미아에 배치된 전문의들의 케어를 받고 있다.
불안 증세와 환각 증세를 호소한다고 한다.
꿈에서 죽은 동료가 자신을 원망하며 죽이려 들고, 그 형상이 현실에서도 이따금 보인다는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자해 행위까지 넘어가지는 않았다.
한동안 에밀리와 니켈라를 비롯한 인원들이 리암의 병실을 매일같이 방문하며 리암의 말동무가 되어 주고 힘이 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리암은 니켈라에게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사과했으며 눈물을 쏟아 냈다.
이미 용서랄 것도 없었으나 니켈라는 리암을 위해서 그를 용서한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그나마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들었다. 적어도 동료들의 환상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니켈라는 1학기가 완전히 끝나게 되면 고향으로 내려가서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더는 마법을 쓰지 못한다. 마나를 쓰지 못하면 아카데미아에서 수습 용사 생활을 이어 갈 수 없다.
다소 꽉 막혀 있어 보이긴 하나, 이는 니켈라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여러 일이 우중충하게 처리되어 가는 와중, 꾸준히 시간을 흘러갔고 방학이 찾아왔다.
방학식은 생략되었으며 학생들은 잠시 자신의 본가에 가기도 했고, 너무 거리가 멀거나 갈 곳이 없는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아카데미아에 남아 있게 되었다.
오늘은 방학이 시작된 그 첫날이었다.
“심판무구를 흡수한 건에 대한 처분이 결정됐다.”
나는 현재, 한낮임에도 먹구름이 잔뜩 끼어 어두운 학생회실에서 슈겐하르츠가의 장남인 라인카르벤과 마주하고 있다.
그의 이지적인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대주교 자간의 심판무구가 1품 유물 나이아스에 귀속된 경과는 합당한 사정에 비롯되었으며, 아카데미아는 이를 증언한다. 따라서, 현 나이아스의 소유자에게 심판무구의 권한이 귀속되며 이를 행사할 수 있다⎯라는 게 결론이다.”
양피지에 적힌 글귀를 읽던 라인카르벤은 이를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묵묵한 그 입이 계속해서 움직인다.
“해당 유물의 공동소유자인 너와 네 시종인 알리시아에게서 나이아스를 뺏어 갈 일은 없다.”
심판무구란 주요 연구 대상 중 하나로 당연히 극도로 얻기 힘들 뿐만 아니라, 극히 수가 적다.
본래라면 최초로 획득한 이에게 모든 권한이 주어지는 건 당연한 절차이나, 자간을 잡는 과정에서는 교수들이 크게 개입했으며 아카데미아의 시험 도중에 발생한 일이라 다소 소유권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었다.
하나, 결국에는 내가 추기경의 권능에 거슬러 자간의 목을 베지 않았다면 대주교 중 하나의 살해도, 심판무구의 흡수도 불가능했을 터이다.
그렇기에 이견 없이 자연스럽게 결론이 난 것이다.
뭐, 이미 종속된 힘을 빼낸다는 건 1품 유물인 나이아스를 파기해야 한다는 말인데 이 또한 말이 되지 않았기에 사실 내가 불안해할 일은 없었다.
다만 확증이 듣고 싶었을 뿐.
“그건 잘되었군요.”
“그렇다고만도 볼 수 없다.”
“이 소문이 빠르게 퍼져 검을 노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우려하고 있으신 듯하지만, 걱정할 것 없습니다.”
대주교 이상 되는 자의 목숨을 끊을 경우, 심판무구의 일정 힘이 해당 무기나 근처에 있는 무기에 종속된다.
나이아스는 이번 일로 인하여 자간의 힘을 일부 받게 되었고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중첩될 수 없다는 점은 아쉬우나, 대주교 이상의 적을 해치웠다는 것 자체가 극히 발생하기 드문 일이었으며 주어지는 힘이 막대했다.
이를 노리거나 샘을 내는 이들이 나오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저도, 제 시종도 결코 눈 뜨고 코를 베일 위인들은 아닙니다.”
만약 알리시아에게 나이아스를 빼앗고자 한다면 그녀는 단어 그대로 ‘죽기 살기로’ 저항할 것이다.
미친 듯이 성장하고 있는 알리시아의 전력과 몇 차원은 강해진 나이아스를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은 그렇게 많지 않을뿐더러, 감히 슈겐하르츠의 물건에 손을 데려고 하는 이들은 더욱 적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한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나이아스에 대한 품(品)이 재정립됐다.”
이 또한 예상했던 일이다.
공작위 정령이 깃든 나이아스의 본래 등급은 1품.
사실상 유물이 받을 수 있는 최상위의 등급이었으나, 심판무구의 힘이 추가되었으니 그 이상의 품을 받게 된다.
“나이아스는 이제부터 등외품(等外品)에 속하게 되었다.”
본래라면 등외품이라는 말은 정해진 등급에 속하지 못한 질 떨어지는 물건을 주로 일컫는 말이다.
하나, 유물에는 아무리 성능이 떨어져도 등급이 매겨져 있어 등외품이라 하면 품으론 나눌 수 없는 극상품을 의미하는 바이다.
아직까지 그 힘을 온전히 끌어내지는 못하겠으나, 나이아스의 안정화가 끝나고 함께 성장하면서 등외품에 걸맞은 능력을 보여 줄 것이다.
라인카르벤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딴말이나 잡담 따위를 즐기는 사람은 결코 아닌지라, 더 나눌 대화도 없었다.
대강 알고 있는 바로는 방학 중에도 그는 본가로 귀환하지 않고 아카데미아에 남아 학생회의 일을 이어 갈 거라는데,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중요한 일도 아니다.
이만 물러나도록 하자.
“바르간, 너는 주교와 대주교의 향수를 뿌렸다.”
라인카르벤의 목소리가 들린다.
…얘는 왜 항상 가려고 하면 붙잡는 거지.
라인카르벤의 음성은 낮고, 침착했다.
천천히 이 공간을 진동시키며 전해진다.
“그 향은 지워지지 않으며, 많은 이들을 꾀어내겠지.”
우려를 담은 것 같기도, 경고를 하는 것 같기도 한 말이다.
…아니, 라인카르벤의 일이다. 나를 걱정한다기보다는 슈겐하르츠의 명성을 위한 것이겠지.
가만히 서서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지금 당장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건 그 향을 더욱 짙게 만드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는 죽음에 가까이하는 걸 의미한다.”
그는 말한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잊지 말거라. 너는 네 동기들보다 한 발짝 죽음에 가까이 있다.”
활약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더욱 강한 개체가, 많은 적들이 나의 목숨을 노리게 된다.
라인카르벤의 말도 틀린 건 없다.
그래,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아우를 위한 형님의 애정 어린 충고로 받아들이지요.”
나는 살짝 웃음을 걸친 채 학생회실을 빠져나왔다.
***
“도련님, 말씀하신 모든 준비물을 담아 두었습니다.”
“그래. 잘했다. 확인할 필요는 없겠지?”
“다섯 번의 재확인을 마쳤습니다.”
“그럼 되었다.”
장남인 라인카르벤과의 대화를 끝내고 온 나는 알리시아로부터 손수건 형태의 사역마를 건네받았다.
안에 든 물건이 꽤 되었음에도 하얀이의 반듯한 모양은 조금의 일그러짐도 없이 원형을 유지했다.
무게도 내가 부탁한 모든 물건이 들어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가볍다. 사역마의 급이 높으면 이리도 편리하다.
“…….”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말하거라. 이제 바로 출발해야 하느니라.”
“…바르간 도련님.”
알리시아가 하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기에 먼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이름을 불렀다. 푸른 눈동자에 비친 전등의 빛이 살짝 떨리어 대신 그녀의 감정을 전한다.
“두 달간의 긴 일정입니다. 모쪼록 무탈하시고 건강하시며. 또, 도련님의 계획하신 바가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소량의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차분히 내려앉는다. 본인은 모르는 듯하나,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기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어지간히도 이별에 약한 여인이다.
자신에게 얼마나 험한 짓을 했든 익숙해진 사람과 한동안 보지 못하게 되는 것조차 슬프다는 건가.
아니면, 최근 리암의 상태를 걱정한 탓에 우울해하는 에밀리와 너무 오래 붙어 있어서 더욱 그런 건가.
“나뿐만이 아니라, 너 또한 며칠 뒤 샤를로테 일행과 함께 떠나지 않느냐.”
샤를로테는 물론이고, 리암이랑 에밀리도 함께. 이들이 향하는 곳조차 알고 있다.
리암의 상태가 제정신은 아닌지라 고난이 예상되지만, 지금의 알리시아와 에밀리라면 무난히 역경을 이겨 낼 수 있겠지.
“네… 맞습니다. 죄스럽게도 제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양해를 구하여 잠시 도련님과 떨어지게 됩니다.”
“여전히 말은 청산유수로구나. 다른 사유도 아닌 현역 용사와의 멘토링으로 인한 까닭이거늘 무엇을 그리 거창하게도 말하느냐.”
“도련님.”
알리시아는 다시금 나를 부른다.
그녀의 눈빛을 자못 간절하다.
“부디 강녕하시길… 그리고 다른⎯아앗!”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어서 딱밤으로 맥을 잘랐다. 그녀는 모으고 있던 손을 그대로 올려 이마를 감싸게 되었다.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알리시아에게 말한다.
“내 걱정하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하거라.”
“도련님….”
아파하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그대로 몸을 돌리어 발걸음을 옮기려다, 문뜩 떠오른 말을 입에 담았다.
하도 알리시아가 잡설을 이어 나가서 하마터면 잊고 그냥 갈 뻔했다.
“아, 그리고 알리시아. 멘토링이 종료되면 그대로 본가에 며칠간 머물다 오거라.”
“…예? 본가… 말입니까?”
통증보다 본가라는 말에 충격이 있는 건지, 알리시아는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마침 샤를로테의 일행이 향하는 장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알리시아가 살았던 마을이 있다. 동선도 효과적으로 가는 게 낫다.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1년에 하루를 내려보내 주겠다. 약조하지 않았느냐.”
“…네, 맞습니다. 다만 말씀하셨듯… 1년에 하루라고….”
“그냥 내 기행이라고 생각해라. 적당히 며칠 정도 있다가 도로 올라오면 된다. 또한, 단련은 게을리하지 말도록. 항시 내가 지켜보고 있다고 여기며 자신을 갈고닦아라.”
“…감사합니다. 도련님. 하온데…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내키지 않는다면 곧바로 올라와도 된다.”
“…….”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을 짓던 알리시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흐트러진 자세와 마음가짐을 바로 하더니 정중하게 예를 보였다.
“도련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히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헛된 시간이 되지 않도록 아껴서 사용하겠습니다.”
“그리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너에게 있어서는… 흠, 아니다. 나는 이만 가도록 하마.”
말을 줄이고 발걸음을 옮긴다.
알리시아는 90도로 내린 고개를 그대로 유지한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도련님.”
“그래, 두 달 뒤에 보자꾸나.”
타박⎯.
발걸음을 옮기며 밖으로 나아간다.
이것으로 아카데미아 1학년 1학기의 모든 과업을 완료했다.
이제 맞이하는 여름방학 동안 일어날 헤일리온의 사건. 이 커다란 폭풍 속에 몸을 던지는 형태가 되겠지.
하나, 상관없다.
전개를 뒤바꾸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모든 일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말이다.
확정 지어 말하겠다.
이번에 노리는 건 자간에 이은 또 다른 대주교.
영혼을 먹는 자, 「아미」.
상성에 따라 다르긴 하다만, 자간과 아미의 순수 전투력만 놓고 봤을 때 아미가 자간보다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갓 용사가 되었을 때라고는 하나, 젊은 시절 헤일리온의 한쪽 팔을 앗아 간 녀석이다. 녀석의 행동 패턴이나, 권능 따위를 알고 있다고 해서 방심은 하지 않는다.
알고 있기에 더욱 철저히 분석하여 방안을 모색한다.
지금 나에겐 녀석의 쌍둥이 동생 역인 자간의 향이 묻어 있다. 관심을 끌기에 이보다 적합한 게 있을까.
이번 방학을 통해, 나는 아미를 죽이고 성장을 이루어 내며 보상을 얻어 낼 것이다.
알티프의 향이 짙어지는 건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원하는 바다.
그 향이 아무리 독하다 할지라도. 녀석들의 뿌리를 뽑아 버릴 때까지, 전신을 그들의 향으로 뒤덮겠다.
그렇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