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11)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11화. 사고였어요(11/92)
#11화. 사고였어요
2024.05.11.
알케다니아 제국 수도의 가장 동쪽.
하얀 암석들로 이루어진 산 중심부에 거대한 신전 리베던이 있다.
몇몇 사제들이 깨어 있긴 했지만 허락 없이 함부로 드나들기에는 늦은 시간. 신전의 입구에서 포털이 열리고 붉은 망토를 두른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힐스타인 단장님!”
예고 없이 열린 포털이었기에 경계하며 검날을 세우던 병사 둘은 상대를 확인하고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이 신전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높은 위치의 귀족도 황실과 신전에서 정해 놓은 시간에만 드나들 수 있었으며, 특히 이능력을 가진 기사들은 더더욱 허가 없이는 들어올 수 없었다.
전대 성녀가 힘을 잃은 후부터 일어난 변화였다. 수많은 성녀 후보들이 신전으로 들어온 후에 죽어서 나가는 일이 빈번해졌던 터라 그를 막기 위해 특별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래서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신전을 드나드는 시간에 대한 규칙이 더욱 엄격히 개정되었다.
그러나 딱 세 명은 제외였다.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될 강인한 이능력자 세 명.
황태자 킬리언 디트리히, 황실의 기사단장 힐스타인 마티어스. 그리고 남부의 사막에서 마물을 토벌 중인 단테 이안 공작. 세 남자였다.
원래라면 네 명이어야 맞지만 몇 년 전 모종의 사건이 일어난 후, 킬리언이 에던을 끔찍하게도 증오하게 된 탓에 현재 대공은 접근 금지 상태였다.
능력이 제일 강한 만큼 가장 많은 치유력이 필요했던 에던이었기에 신전 출입을 막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목숨을 위협하는 끔찍한 일이었다. 갈수록 북부의 무너지지 않는 벽에 나타나는 마물들이 늘어나고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킬리언은 절대 에던에게 성녀들의 치유력을 나눠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대 성녀가 힘을 잃어 죽고 난 후에는 그 핑계로 그를 더 막았다.
‘강한 이능력만큼 에던 황자는 많은 성녀 후보들의 목숨을 앗아갈 것입니다. 그리하면 뒤를 감당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치유력이 필요한 수많은 기사의 목숨도 중요하게 여기셔야죠.’
얼핏 그 말은 성녀 후보나 다른 이능력 기사들을 위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사실 그건 에던에게 고통 속에서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직 제국에는 에던의 힘이 필요했고, 다행히 황제의 권한으로 성녀의 치유력이 담긴 물약을 하사받고 있었다.
에던과 달리 그런 것들에 대한 제약이 전혀 없는 힐스타인은 거대한 신전 문을 앞에 두고 서서 병사들에게 여유롭게 명령했다.
“문을 열어라.”
“예!”
끼이이- 병사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신전의 거대한 하얀 문이 열리며 드넓은 초록의 화려한 정원이 나타났다.
“충성! 들어가십쇼!”
병사들의 각 잡힌 경례를 받으며 힐스타인은 성큼성큼 여러 개의 건물 중 가운데에 위치한 가장 큰 건축물 쪽으로 향했다.
잘 가꾸어진 나무들과 잡초 하나 없이 말끔히 관리된 대리석 길을 걸어 하얀 계단을 지났다. 그러곤 그곳을 넘어 신전 건물 안으로 들어간 힐스타인은 가장 은밀하고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곳을 가기 위해 새하얀 복도를 걸어갔다.
그의 목적지는 건물 최고층에 있는 대성녀의 방. 아이비가 있는 곳이었다.
“성녀님.”
방 앞에 도착한 힐스타인은 예의상 문을 똑똑 두들겼다.
아직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말 그대로 자신이 왔다는 걸 알리는 노크였기 때문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문을 활짝 열었다.
만약 그녀가 잠들었다면 깨우는 재미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아이비는 시중드는 하녀들과 함께 모여 수다 떨고 있었다.
“어머. 힐스타인 님!”
인기척을 듣고 깜짝 놀란 아이비는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힐스타인을 발견하자 그녀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왔다.
나풀거리는 핑크빛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제게로 뛰어오는 그녀를 본 힐스타인은 눈매를 휘며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아이비 바이올렛 대성녀님을 뵙습니다.”
그 사이 아이비는 그의 눈앞까지 다가가서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시골에서 막 올라왔을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뽀얗던 피부는 훨씬 더 새하얘졌고, 진주알처럼 부드러운 빛을 내뿜었다. 아이비는 긴 속눈썹이 풍성하게 달린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힐스타인의 손을 붙잡았다.
“매번 그렇게 예를 갖추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제는 대성녀가 되셨으니 더욱 깍듯이 모셔야지요.”
그 말에 기분이 좋은 듯 아이비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힐스타인 님과 거리가 생긴 것 같아서 신경이 쓰이는걸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문가에 서 있던 힐스타인은 방 안으로 성큼 들어가며 가벼운 손짓으로 하녀들을 내보냈다.
달칵. 문이 닫히고, 힐스타인은 곧바로 아이비의 허리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이비 님 곁엔 제가 항상 있겠다고. 원하는 건 뭐든 해 드리겠다고요.”
강한 손힘에도 아이비는 저항하지 않았다. 순순히 제 허리를 내준 그녀가 쑥쓰러운 듯 뺨을 붉히더니 예쁜 입술로 소곤거렸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오시는 날이 아니시잖아요.”
힐스타인이 아이비의 치유력을 받기 위해 방문하는 날은 보통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이나 화요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금요일. 힐스타인이라면 요일 상관없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어떠한 예고도 없이, 심지어 늦은 시간의 방문은 아이비에게도 의아한 일이었다.
이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날에는 부작용으로 인한 통증도 거의 없었으니 치료받기 위한 방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뭔데요?”
힐스타인이 아이비의 허리를 끌어당겼던 팔에 힘을 풀어 놓아주었다.
그리고 곧장 질문을 던지는 대신 하녀들이 정리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드레스 더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축하 무도회에서 입을 드레스를 고르던 중이셨나 보군요.”
“네. 아차!”
아이비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재빨리 침대 위에 올려져 있던 드레스를 하나 집어 자신의 몸에 대 보았다.
“힐스타인 님 이거 어때요? 어울리나요?”
파스텔 톤 푸른빛 천에 다이아몬드 보석들이 별처럼 박혀 있는 아주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한눈에 봐도 최고급이었다. 누가 보낸 것인지 확실히 알 만한.
‘킬리언 님의 선물이군.’
화려한 디자인은 자신의 취향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힐스타인은 기꺼이 웃으며 답해 주었다.
“예쁘네요.”
“정말요? 그럼 이건요?”
아이비는 신이 난 듯 다른 드레스를 또 몸에 대어 보여 주었다.
그러기를 서너 번, 몇 발자국 떨어져서 그녀의 행동을 응시하던 힐스타인이 아이비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쓸어내렸다.
“뭘 입어도 아름다우십니다.”
그러자 아이비가 주눅이 든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왜요?”
“전 시골에서 온 촌스러운 여자애인걸요. 갈색 머리카락도 다른 분들 모두가 예쁘다고 칭찬해 주시지만 전 하나도 예쁘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세요. 아이비 님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없습니다. 제국 최고의 미인이세요.”
“그렇지만…… 걱정되어요. 무도회에는 저 같은 평민이 아닌 귀족 부인이나 영애들도 많이 오는 자리잖아요. 아무리 꾸며도 제가 예뻐 보일지…….”
걱정 어린 말을 내뱉으며 아이비는 정말로 근심이라는 듯 눈시울을 붉혔다.
힐스타인은 그런 아이비의 뺨을 쓸며 그녀가 원하는 답을 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 그 누구도 아이비 님이 아닌 다른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칭찬을 하는 자들은 없을 겁니다. 만약 있다면 제가 없앨 테니까요.”
청순가련한 아이비의 눈이 반짝이며 얼굴엔 미소가 가득 차올랐다.
“정말요?”
단순한 칭찬 한마디에 자신의 팔에 매달리듯 손가락을 얽혀 오는 아이비를 향해 힐스타인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드디어 가장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아이비 님.”
“네!”
집어 들었던 드레스를 내려놓으며 아이비가 예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찾고 있다던 그 친구, 이름이 뭐였죠?”
멈칫. 드레스를 정리하던 아이비의 손길이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면서 힐스타인을 바라보았다.
“설마…… 찾으셨어요?”
힐스타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이지만, 본격적으로 찾아볼까 싶어서요.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요?”
아이비가 기대에 찬 눈으로 대답했다.
“라티에나 메리골드요. 지난번에 황태자님께도 설명했지만…… 아주 예쁜 벚꽃색 머리카락을 가졌어요. 키는 작고…… 어…….”
“네. 계속 말씀하시죠.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시면 찾을 때 더 도움이 될 테니.”
“이런 말은 조금 조심스러워서…….”
아이비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머뭇거렸다.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잠시 침묵했으나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눈에 띄게 예쁘거나 특별한 곳은 없어서 달리 무슨 설명을 해야 할지…….”
“그럼 정말 이름과 머리카락만으로 찾아야겠네요.”
친구 험담이 될까 봐 망설였던 것 같은 아이비는 힐스타인의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다시금 미소를 되찾았다.
“네. 정말 흔치 않은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에요. 제가 너무너무 부러워했거든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힐스타인에게 아이비가 애원하듯 다가왔다.
“꼭, 찾아 주시는 거죠?”
“네. 그래야죠. 아이비 님이 내건 약속을 차지하고 싶으니까요.”
“물론이죠. 라티에나를 찾아만 주시면 제 약속은 힐스타인 님의 차지가 될 거예요.”
화사하게 웃는 아이비를 향해 상체를 숙인 힐스타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 위에 입맞춤했다.
그러자 그늘 하나 없는 예쁜 얼굴로 아이비가 행복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힐스타인은 약속에 대한 일을 떠올려 보았다.
아이비 바이올렛은 신전으로 온 후, 적응이 끝나자마자 황태자 킬리언에게 엄청난 치유력을 부어 주었다.
킬리언은 그녀의 치유력으로 인해 고통에서 벗어나 평온을 찾았고 아이비에게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겠다고 했다.
시골에서 자라 가난하게 살아온 그녀가 당연히 값진 보석이나 고급 드레스, 혹은 물질적인 것들을 요구할 거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러나 아이비는 그 모든 예상을 뒤엎는 부탁을 했다.
‘제 친구를 찾아 주세요! 제발요!’
함께 왔던 병사들에게 알아보니 원래 신전으로 오기로 한 성녀 후보는 두 명이었다고 했다.
지역이 워낙 시골이라 오는 길에 포털이 있는 곳까지는 마차로 이동했어야 했는데, 갑자기 한 명이 마차에서 떨어져 버렸다고.
문이 열려 있었거나 고장이 난 것도 아닌데 이상하다고 했다.
‘사고였어요. 제 친구는 그저 바람을 쐬려고 했을 뿐인데…… 실수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