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14)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14화. 뜨거운 체온(14/92)
#14화. 뜨거운 체온
2024.05.14.
“하. 힘들었다.”
계획한 하루의 일을 마친 나는 노곤한 몸을 침대에 뉘었다.
커튼 사이로 달빛이 내려오는 걸 바라보며 오늘 에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지속적으로 치유력을 쏟아 줘서 그런지 아직은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이능력 부작용으로 인한 남주들의 초기 증상은 두통이다.
기분은 나쁘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닌 불쾌한 강도의 두통. 하지만 힘을 계속 사용하면 통증은 서서히 누적된다.
초기 단계에 성녀에게 치유를 받으면 고통은 사그라들지만, 완전한 치유는 아니기에 다시 작은 두통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만약 치유를 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능을 사용해 부작용이 쌓인다면, 결국 원작의 에던처럼 되는 것이다. 아니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행히 지금의 에던은 내 치유력 덕분에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처음 상태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해.’
후추에 담은 내 나약한 치유력 정도로 에던의 고통이 가라앉았다는 게 조금 아리송했다.
나는 원작에 나왔던 아이비를 만나기 전의 에던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 이미 에던은 이능력 부작용으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황제가 하사한 물약으로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었지만, 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한계에 도달했던 것인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물약은 가짜가 아닌가? 싶은 의구심이 들었다.
왜냐면 지금 내 작은 치유력으로도 에던의 두통이 괜찮아지는데 성녀의 치유력을 담은 물약이 효과가 없었다는 건 좀 이상하니까.
‘아무튼 다행이야.’
이대로만 가면 에던이 무도회 날 당장 아이비의 치유를 받고 그녀에게 미치는 일은 없을지도 모르니까.
……라고 생각했는데.
인생이 내 계획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
“마, 맙소사…… 어째서……?”
아이비의 축하 무도회가 열리기 하루 전날이었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는 평소와 별다른 것 없는 날이었다.
에던이 미치지 않게 성 여기저기 하루 종일 치유력을 담은 물을 뿌려 주고, 그의 방에 몰래 들어가 침구에도 치유력을 넣어 주는 일을 반복하던 하루.
드물게 에던이 하루 종일 북부에 가 있긴 했지만 내일이 무도회 날이라서 준비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그것 말고는 다른 점은 없었다.
그런데 새벽에 누군가 방 앞을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을 내뱉긴 했지만 그가 아니라는 걸 바로 눈치챘다.
무게감 있고 일정한 속도로 걷는 에던의 발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체를 숨기려고 조심스러워하는 발소리도 아니었다. 되려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한 기척이었다.
나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왔다.
아직 한참 새벽인 이 시간에 도서관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뒤이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신음 소리가 복도 너머까지 들렸다.
“커헉……!”
이를 악물고 숨을 한가득 참았다가 뚝뚝 끊어 조금씩 토해 내는, 듣는 것만으로도 당사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는지 추측이 가능한 그런 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렸다.
머리카락이 쭈뼛 솟아오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설마,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뒤에서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조금 전의 그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옆으로 바람이 스쳤다.
에던의 방에 들어갔다 나온 루벤이 내 옆을 빠르게 뛰어 지나가고 있었다.
“루벤 경!”
루벤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손에 물약이 든 약병 세 개 쥐고 있었다.
나도 그를 따라 도서관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그 안을 본 순간 충격과 공포 그리고 감당 못 할 불안이 온몸을 휘감았다.
‘아…… 안 돼…….’
그곳엔 처음 보는 에던이 있었다.
어둡게 가라앉다 못해 창백해진 안색과 이마와 목을 타고 터질 듯이 솟아오른 핏줄. 일그러진 얼굴에 쏟아지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데다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에던이.
항상 아름답게 빛나던 금빛 머리카락은 검은 재에 덮여 엉망이 되어 흐트러져 있었고, 망토와 제복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할 정도로 피범벅인 채 난장판으로 찢겨 있었다.
“커헉! 헉…… 크으흑……!”
에던은 눈을 뜨지도, 고개도 들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바닥을 긁어 댔다.
부러진 손톱과 손가락 끝은 피투성이였고 메말라 건조해진 입술에서 울컥 검은 피가 쏟아졌다.
너무 충격적인 광경에 비명과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대공님! 정신 차리세요! 대공님!”
루벤이 에던의 방에서 가져온 물약 세 개를 한꺼번에 열어 그의 입으로 쏟아부었다. 에던은 핏대가 솟아오른 목으로 숨을 컥컥거리며 겨우 약을 삼켜 냈다.
“대공님!”
하지만 약은 눈에 띌 만큼 큰 효과를 보이지 않았다. 가차 없이 빈 병을 내던진 루벤이 제 머리를 헝클이며 입술을 짓이겼다.
“젠장할!”
정신이 반쯤 나가 버린 듯한 에던은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고 있었다. 그 옆에 무릎을 꿇은 루벤은 자신이 더 괴로운 듯한 얼굴로 에던을 바라보다가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라티에나 양!”
“네, 네!”
“잠시 대공님 좀 지켜봐 주세요!”
“루, 루벤 경은요? 어디 가시려고요!”
루벤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성에 남겨 둔 비상약이 더 있을 겁니다. 금방 찾아오겠습니다. 그…….”
빠르게 말하면서 포털 안으로 이동하려던 루벤이 갑자기 나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얼굴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나는 왜 그러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고, 두세 번 정도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루벤은 결국 내 시선을 피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돌아섰다.
“다녀오겠습니다. 금방 올 테니 조금만 대공님 곁에 있어 주세요. 부탁합니다.”
루벤이 포털 안으로 사라졌고, 에던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러자 괴로워하는 에던의 고통이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손을 바들바들 떨며 에던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이능력 부작용 때문에 몸부림치는 에던…….
나는 대체 뭘 안심하고 있었던 걸까.
에던은 매일같이 전쟁 중이었고, 마물로 인해 언제라도 이런 모습이 될 수 있었는데.
지금 에던의 모습은 원작에 나왔던 그 모습이었다.
아이비를 만나기 전에 에던이 겪고 있던 바로 그, 고통 속에 갇힌 모습.
어떻게 하지? 이 상태로 에던이 아이비를 만나면……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는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너무나 괴로워하고 있다. 지금 에던은 불에 타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거다. 나는 잠깐 데인 걸로도 그렇게나 아팠는데, 에던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고통에 처해 있다.
“……조금만.”
나는 에던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바들바들 떨리는 양손을 그를 향해 천천히 뻗었다.
그러나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손길을 멈추며 질끈 눈을 감았다.
에던은 여기서 죽지 않는다. 죽을 것 같은 괴로움에 몸부림칠 뿐이지.
아마도 루벤이 약을 가져오면 그걸로 어느 정도 고통은 가라앉을 거다.
하지만…… 너무 괴로워하잖아. 그리고 이 상태로 내일 무도회에 가서 아이비를 만나면…….
안 돼. 막아야 해. 그걸 위해 지금껏 애썼으니까.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니까 도와주는 게 맞아.
맞지만…….
나는 다시 에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다 말고 멈추며 손끝을 움찔 떨었다.
“무서워…… 무서워, 진짜…….”
에던에게 닿으면 이다음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내가 가진 치유력으로 에던이 괜찮아질 수 있을까?
원작에서는 난 하급 기사들을 치유해 주다가 죽었다고 적혀 있었지만 뭘 얼마나 이용당한 건지 정확히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근래 나는 하루 종일 성을 돌아다니면서 치유력을 여기저기에 사용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내 보잘것없는 치유력으로 에던을 치유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었다.
아이비가 남주들에게 치유력을 전달해 주려 사용했던 방법은 거의 스킨십이었다. 너무 강한 통증을 느낄 때는 스킨십을 이용한 치유력의 전달이 가장 빨랐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이능력자들은 스킨십의 강도에 따라 치유력을 스스로 가져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즉, 내가 에던을 치유하다가 어느 순간 주도권을 빼앗기면 힘을 빼앗겨 미라가 되어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치유하는 사람보다는 치유받고 싶어 하는 사람 쪽이 더 강렬히 상대를 원하는 법이니까.
성녀 후보들이 미라로 죽어 나가는 이유 중 하나도 그거였다.
회복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도 있지만,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능력 기사들이 정신없이 성녀 후보들의 치유력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혼란스러웠다.
그때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갈라진 신음 사이로 에던이 울컥, 거친 기침과 함께 또 피를 쏟는 게 느껴졌다.
눈을 떴다. 그러자 에던이 감아 준 손의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상처도 거의 나았고,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는데도 오늘따라 꾸역꾸역 약을 발라 주던 에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어차피 에던이 미치면 이러나저러나 난 결국 죽어.
“윽……!”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에던을 향해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에던의 피부에서 감당하기 힘든 뜨거운 체온이 느껴지고, 나는 천천히 치유력을 발현했다.
손끝에서 시작된 나의 치유력이 피어 나와 점점 에던의 목과 머리와 등을 타고 그의 온몸으로 번졌다.
“제발, 제발.”
처음 만났던 그 순간처럼 에던에게서 강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에던의 뜨거운 뺨이 내 얼굴에 닿았고, 목덜미는 내 팔 안에 감겼다.
그의 고통으로 새어 나온 끈적이는 땀이 내게도 번져 왔다. 그럴수록 나는 더 온 힘을 다해 그를 끌어안았다.
어느 순간 바닥을 긁고 있던 에던의 팔이 올라와 내 등을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아프지 마. 제발 진정해, 에던…….”
나는 힘을 더 강하게 발현시켰다.
치유력이 강하게 퍼질수록 핑크빛이었던 색깔이 점점 더 옅어졌다. 치유 색이 아주 연한 핑크로 반투명하게 변했을 때 그 안에서 수많은 양의 반짝이는 펄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치유력은 넓은 도서관을 가득 채워 나갔다. 그렇게 포털의 푸른빛과 치유의 빛이 섞여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 들 때쯤 에던의 숨소리는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꺅!”
눈 깜빡할 사이에 나는 몸이 뒤집혀 바닥에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