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17)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17화. 찾았다(17/92)
#17화. 찾았다
2024.05.17.
“아침밥이 뭐 어때서.”
수저로 수프를 뒤적거리며 에던이 물었다.
“싫어요. 이제 전 주인님 아침밥을 만들지도 않잖아요.”
“그럼 후추라고 불러 줘?”
저기요. 우리 좀 평범하게 살아 보지 않을래? 세상에는 타인을 부르기 위해 태어나자마자 지어 주는 단어라는 게 있단다.
“이름으로 부르면 되잖아요.”
“글쎄. 그건 좀.”
대체 왜? 어이가 없네.
“굳이 별명을 붙여야겠어요?”
“응.”
뻔뻔하기 짝이 없어. 남이 들으면 별명이 아니라 멋진 이름을 새로 선사한 줄 알겠다.
“수프 안 먹을래요. 아침밥은 수프 따위 먹지 않거든요.”
내가 시비조로 말하며 쉬익쉬익 노려보자 에던이 하, 짧은 한숨이 섞인 혀를 차더니 물었다.
“그럼 뭐.”
“뭐가요?”
“뭐라고 불리고 싶은데?”
나는 가는 실눈으로 영혼이 나간 듯 그를 바라보았다.
말했잖아. 평범하게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같은 대화가 반복되겠지. 잔머리를 굴릴 때였다.
에던이 부르기 싫어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뭔가 지독하게 짜증 나는 단어를 골라야 차라리 이름을 부르는 게 낫겠어. 라는 말이 나올 텐데.
“말해 봐. 원하는 거. 내 마음에 들면 불러 줄 수도 있으니까.”
뭐라고 하지? 광년이? 차라리 정떨어지게 광년이라고 할까? 재수 없어서 그딴 걸로는 안 부른다고 저리 꺼지라고 할 수도 있잖아.
“그럼…… 광년이요.”
나는 에던이 짜증 내길 바라며 눈치를 살폈다.
“그래? 그걸로 불러 줘?”
이런 데서 배려심 부리지 마…….
재수 없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나 보다. 에던의 눈빛은 기꺼이 그렇게 부르겠다는 듯한 진심이 가득했다. 젠장.
“아뇨! 방금 건 취소. 농담이었어요.”
“그럼 뭐.”
에던은 휘휘 수프를 계속 휘저었다.
뜨거웠던 수프 온도가 내려가며 수증기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뭐가 있을까. 저 남자가 나한테 정떨어질 만하고 부르기 짜증 나는 단어가.
지난번 허당 캐릭터는 안 먹혔고 광년이에도 평범히 반응하는 거 봐선 미친년 콘셉트도 안 먹힐 거 같고…….
고심하던 나는 힘든 결정을 내렸다. 그래. 결국 남은 건 하나인가……. 후.
“주인님. 라티에나눈요. 아침밥 말고 공주라고 불러 주시묜 조케써요.”
받아라. 스무 살 먹은 여자의 오글오글 공격을.
“…….”
이거다. 드디어 효과가 나타났다! 이걸 참긴 쉽지 않지.
무던히 수프를 휘젓던 에던의 손동작이 멈췄다. 에던은 고개를 움직이지 않은 채 눈만 치켜뜬 채로 날 바라보았다.
“바꿀 기회 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우우웅. 시로요. 라티에나눈 공주가 조아요.”
“후회하지 마.”
“라티에나눈 후회 가튼 거 모루눈데여?”
“하.”
민망함은 내 몫이고 뭔가 이상하지만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하녀가 자길 공주라고 불러 주라는 거 자체가 미친 콘셉트잖아. 자, 이제 차라리 이름으로 불러 주겠다고 말해. 어서! 지껄이라고!
“그래. 알겠어. 존중하지.”
그런데 간절함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버렸다. 지독하게 화내며 이름으로 부르겠다는 선언을 할 줄 알았던 에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저에 수프를 담아 떴다.
그리고 그걸 내게 내밀며 말했다.
“먹어, 공주.”
……아니. 이거 아니잖아. 뭔가 착각한 거 아니야?
적당히 잘 식은 수프가 눈앞에 있었다. 내가 먹으려 하지않자, 이번엔 진짜 귀찮다는 듯한 에던의 시선이 꽂혔다.
“먹으라고.”
수프가 입술 끝에 닿았다. 적당히 먹기 좋게 식은 온도였다.
“많이 먹어. 공주님.”
피식, 에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넌 딱 걸렸어, 하는 듯한 눈빛으로.
……짜증 나네.
***
에던이 루벤과 함께 포털 앞에 섰다.
“다녀올게.”
제복 소매를 각 잡히게 정리하면서 에던이 날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공주.”
일부러 텀을 두고 말하고,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휘이휘이 엉망으로 휘저었다.
예쁜 얼굴로 환하게 미소 지으면 다 넘어가는 줄 아나 본데, 난 안 넘어가.
저건 명백한 비웃음이다. 도망가지 않을 거라는 신뢰를 얻고, 이름을 잃다니. 비참하다.
“시킨 일 잘하고 있어. 소원권 줄 테니까.”
“네.”
에던은 루벤보다 한걸음 먼저 포털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루벤.
“…….”
루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았지만, 난 읽을 수 있었다.
안타깝다는 그의 시선을. 그리고 이제는 아침밥이 아닌 공주로 날 불러야 하는 그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다시 얘기해 볼 거예요.”
“대공님께 통할 것 같습니까?”
“…….”
“후회하지 말라고 기회 주셨던 것 같은데.”
“…….”
루벤은 대체 왜, 라는 마지막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내 잘못이다. 에던이 상상 이상으로 미친놈이라는 것을 간과했어.
“그래도 말해 볼 거예요.”
“부디 잘 해결해 주시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친 나머지 퀭한 눈으로 손을 흔들었다. 루벤은 가볍게 끄덕인 후 에던의 뒤를 따라 포털 안으로 사라졌다.
푸른빛이 사라지고 고요한 시간이 찾아왔다. 대낮에 이렇게까지 고요한 적은 오랜만이었다.
평온하고 한가로운 시간. 그러나 지금의 나는 손발이 오그라들어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진짜 너무너무 짜증 나지만 에던이 돌아오면…… 빌어야지.
그 별명 취소라고. 두 번 다시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 비겁해 보이겠지만 눈물 콧물 다 쏟으며 빌면 한 번쯤 취소해 주겠지. 아니면 차라리 아침밥이라고 불러 달라 해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에던이 시킨 일을 해야 했다.
몇 시간 전, 루벤이 가져다준 수프를 다 먹어갈 때쯤 에던은 내게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내가 무도회에 다녀올 동안 책 읽어.’
‘갑자기 책은 왜요?’
‘아무거나 읽고 줄거리 말해.’
‘……왜요?’
‘명령이야. 잘하면 소원권 줄게.’
‘소원권이라니… 설마 소원 들어주는 쿠폰 같은 거예요?’
‘뭐, 그런 거지. 네가 뭘 말하든 무조건 들어줄게.’
‘내가 애예요?’
‘안 할 거야?’
‘물론! 합니다!’
자기 편할 때만 명령질이야! 라고 그땐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말은 아무것도 할 생각하지 말고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으라는 말을 돌려 한 것이었다.
이유가 뭐든 들어주는 소원권을 준다고 했으니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물론 그걸로 별명 취소를 요구할 생각은 아니다.
내가 요구하려는 건, 수도에 다녀오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아무래도 근로 계약서를 다시 훑어봐야겠어. 휴가에 대한 조항이 있는지 확인해야지.”
아무래도 없을 것 같지만 말이다.
왜냐면 난 여기가 휴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땐 아무 생각 없이 룰루랄라 사인해 버렸거든. 역시 인생은 실전으로 깨우치는 게 최고다.
어쨌든 나는 소원권을 이용해 다음 주에 있을 제널드 생일을 축하해 주러 수도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지난번 마지막으로 온 편지에 제널드가 생일이 오면 만나자는 약속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각 잡고 읽어 볼까?”
에던은 잘 모르겠지만 사실 평소의 나는 낮에 여기서 책을 가져다가 꽤 읽었었다.
에던의 정체를 알고 난 후에는 하지 못했지만.
고성의 도서관에는 엄청난 양의 책이 있었다.
원래부터 있었던 건지 일부러 책을 가져다 놓은 건지 확실치 않았다.
에던은 책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도서관만큼은 바닥에서부터 거의 천장까지 서적이 채워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놀랍게도 이 안에는 로맨스 책이 백여 권이나 있었다.
“<몰튼 부인의 외출>, 지난번에 3권까지 읽었었지. 오늘은 4권 읽어야지. 어디 있을까나.”
정략결혼을 해 버린 탓에 결혼 후,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몰튼 부인의 외출.
사랑과 전쟁을 책으로 옮겨 담아 놓은 듯한 불륜물이었다.
제목과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은 몰튼 부인의 남편이었고 3권에서 몰튼 부인의 남편은 아내의 바람을 목격하게 된다.
4권을 바로 읽고 싶었었는데 에던과의 일이 터졌었지. 그다음이 어떻게 될지 엄청 궁금했는데 드디어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없잖아?”
하지만 책은 3권에서 끊겨 있었다. 그리고 바로 5권.
“이어 보고 싶은데…….”
나는 아쉬워하며 대충 5권을 열었다. 그리고 못 볼 것을 봐 버린 듯 바로 첫 장을 닫았다.
불륜남과의 사랑에 정신이 나가 남편에게 매몰차게 굴던 몰튼 부인이 남편의 다리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뭔데! 대체 4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보고야 만다.
나는 <몰튼 부인의 외출> 4권을 찾아 책장을 차근차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장을 따라 시야를 도서관 위쪽으로 올려봤는데 이상한 게 보였다.
“뭐지?”
구석에 있던 책장용 긴 사다리를 끌어와 천천히 그 위로 올라갔다.
천장에 닿는 마지막 위치 맨 끝에 아주 새카만 책이 하나 있었다.
벨벳으로 만들어진 양장 책이었다. 그 책은 몹시 두꺼운 데다가 제목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나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걸 가지고 내려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이건……!”
탁! 열었던 책을 다시 닫았다. 이건 흑마법에 대한 주술이 적힌 책이었다.
원작에서 에던이 사용했던 흑마법…….
설마 이 책을 보고? 잠시 그걸 노려보고 있던 나는 용기 내어 다시 책을 열었다.
아닐 수도 있잖아, 라는 생각으로.
그러나 책에는 확실히 흑마법에 대해 적혀 있었다.
오래전 제국에서 쫓겨난 마녀들이 사용했다던 주술.
흑마법은 어둠의 씨앗과 계약을 맺고 강인한 힘을 얻는 대신 인간의 모습을 잃어 간다.
계약 내용과 사용한 주술에 따라 다르지만 아주 강력한 주술을 사용했을 때는 거의 백 퍼센트 괴물이 된다. 그 외에 약한 주술에 대한 이런저런 것들도 적혀 있었다.
으음. 그런데…….
“흑마법을 사용하면 피부가 까맣게 썩어 나가는구나. 끔찍하네.”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읽어 버렸다. 오래된 책이라 글씨가 중간중간 지워져서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3분의 1쯤 읽어 갔을 때, 갑자기 성벽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책을 다급히 책상 서랍장 맨 아래에 숨겼다.
내가 막 서랍장을 닫자마자, 달칵거리며 도서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틀었다.
올 사람이 없는데…….
“찾았다.”
돌아본 그곳엔 붉은 망토를 두르고 날 보며 웃음 짓는 힐스타인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