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20)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20화. 이리 와(20/92)
#20화. 이리 와
2024.05.20.
한껏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지만, 비꼬는 것이 명백한 에던의 말에 킬리언이 성큼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네가 감히 황태자인 내게…….”
그리고 그 순간, 황후의 시종이 무도회장 반대편에서부터 다급히 뛰어오더니 킬리언에게 허리를 숙였다.
“전하.”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킬리언이 낮게 한숨을 흘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황후의 시종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킬리언이 휙 돌아서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황후 폐하께서 잠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킬리언이 무도회장의 저편에 서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공작 부인들 사이에서 헨젤라는 부채로 입을 가리고 눈웃음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젊은 영애 한 명이 쑥스러운 듯 발그레한 뺨을 하고 힐끗 킬리언을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영애는 다급히 시선을 옮겼다.
요즘 들어 킬리언의 부인을 물색하고 있는 황후가 찾아낸 새로운 차기 후보감인 모양이었다.
“……알겠다.”
마지못해 대답을 한 후, 킬리언이 에던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맞붙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한 번만이다. 난 앞으로도 한동안 네 신전 출입 금지 명령을 풀어 줄 생각 없어.”
“형님, 혹시 어젯밤 제 얘기 못 들으셨습니까?”
에던의 질문에 킬리언이 한쪽 입꼬리를 비웃듯 올렸다.
“물론. 전해 들었지. 그러니 더 풀어 줄 마음이 사라졌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러니 고통 속에서 차라리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지. 네가 신전에서 치유받는 것보다 그쪽이 더 빠를지도 모르니까.”
“이런,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아쉽게 되었군요.”
“다음엔 부고 소식을 기대하지.”
칼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한 번 대화를 나눌 때마다 서로에게 비수가 꽂히는 날카로운 대화였다.
킬리언이 에던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그대로 스쳐 지나갔고, 에던은 무심한 시선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따위 기대에 부응하고 싶진 않은데.”
조소를 흘리며 에던은 크라바트를 단정히 정리한 후, 뒤에 있던 아이비를 향해 다가섰다.
그때까지 아이비는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도회장에는 다른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이리저리 섞여 가까이 있지 않으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대화 내용을 전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한눈에 봐도 사이좋은 형제로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가 어떻든지 간에 아이비는 에던의 얼굴에 꽂혀 버린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 킬리언을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내처럼 바라보고 있던 아이비의 눈은 에던을 보자마자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대성녀님을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에던의 자연스럽게 눈웃음 섞인 인사에 아이비가 조금 전 킬리언에게 했던 것처럼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가슴골이 훤히 보이도록.
“제국의 별, 에던 디트리히 황자님을 뵙습니다.”
일부러 느릿하게 어깨를 바로 세운 아이비가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며 에던에게 말했다.
“대공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너무 궁금했어요.”
“저를요.”
“네. 얘기 정말 많이 들었거든요. 무너지지 않는 벽에서 남들보다 애써 싸우고 계신다고.”
“뭐, 그렇긴 합니다.”
에던이 단조롭게 대답했다.
이때부터 아이비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눈썹을 움찔거렸다.
아직 치유력을 사용하지 않아서일까? 에던은 다른 이들과 반응이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무도회에 오기 전 신전의 하녀에게 들은 말로는 에던은 뛰어난 이능력을 가진 탓에 그 누구보다 성녀의 축복을 바라고 있다고 했다.
특히 지난밤에 북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귀띔까지 해 주었다.
어쩌면 북부 대공이 아이비의 발밑에서 치유력을 위해 애원하는 일까지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런 기대를 하고 있는 아이비였기에 처음 에던이 들어오는 순간에 그를 본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저렇게 아름다운 사내가 자신의 발밑에서 비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그것보다 더한 쾌감을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에던은 전혀 그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정상적인 컨디션? 그런 것의 문제가 아니다.
날 부담스럽게 하지 않으려고 참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 봤지만 애초에 부작용의 통증은 참을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되려 에던은 그저 이 상황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랬다면 자신에게 이렇게 호의적으로 다가와 미소를 띨 리가 없으니, 아이비는 그가 피곤한 것일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하고 싶어 미리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에던 님을 만나면 꼭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뭡니까.”
“들어주실 건가요?”
“내용에 따라서 생각해 보죠.”
거절은 아닌, 그러나 딱히 다정하지도 않은 적당히 예의 있는 말투로 답하며 에던이 근처의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또 한 번 아이비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뭐야. 정말로 아직 내 치유력을 몰라서 이러나? 됐어. 그렇다면 날 갖고 싶게 만들면 돼.’
굳이 유혹할 필요도 없다. 단 한 번이면 킬리언이나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힘에 중독될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가져다 바치려 하겠지.
아이비가 에던의 팔을 잡고 테라스 쪽으로 끌어당겼다.
당연히 그런 시답잖은 힘으로 에던이 끌려갈 리는 없었지만, 그는 기꺼이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주었다.
풍성한 커튼으로 가려진 뒤편,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쪽으로 들어간 두 남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이렇게까지 비밀스럽게 해야 하는 얘깁니까?”
에던의 질문에 아이비가 손끝을 모아 속삭이듯 말했다.
“중요한 얘기예요.”
하늘에서는 달빛이, 커튼 뒤에서는 조명이 쏟아졌다. 은은하게 내려온 빛이 그녀를 감싸며 아름다움을 한층 더 강조해 주었다. 사내라면 그 누구도 이 분위기에서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정도였다.
스스로 그걸 알기라도 하듯 아이비가 요염한 눈빛으로 예쁜 입술을 열었다.
“저…… 사실은 제 친구를 찾고 있어요.”
“친구, 말입니까.”
“네. 황태자님과 기사단장님과 남부의 공작님께도 말씀드려 놓았지만…… 아직 진전이 없어서요.”
“어떤 친구입니까.”
“제 하나뿐인 친구예요.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아주 소중한, 제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친구요.”
에던이 들고 있던 잔을 빙글 돌렸다.
“이런. 그런 소중한 친구와는 어쩌다가?”
“마차 사고였어요. 함께 신전으로 오는 길이었는데…… 마차 문이 열리는 바람에 그만……. 그 친구를 꼭 찾고 싶어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렇군요. 친구에 대한 정보를 좀 주시면 찾는 데 도움이 될 텐데요.”
말하는 에던의 눈동자에 일순 싸늘함이 지나갔다.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잠깐의 순간이었다.
“이름은 라티에나 메리골드. 예쁜 벚꽃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을 텐데…… 너무 걱정이 되어요. 그러니 최대한 빨리 좀 알아봐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네?”
흥미롭게 얘기에 집중하던 에던이 뚝, 잔을 돌리던 손짓을 멈추더니 아이비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그녀를 찾아 주면 뭘 주시는 겁니까.”
거래에 관심을 가지는 에던의 모습에 아이비의 입술이 예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저요.”
“성녀님을요?”
“그거 아세요? 전 원하는 사람을 선택해 아무 때나, 그 어느 순간에나 다른 이들보다 먼저 치유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그러니 전 분명 대공님께 쓸모가 있을 거예요.”
그러며 아이비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에던의 팔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붉은색의 치유력이 강하게 터져 나와 에던의 팔을 타고 몸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걸 느끼는 에던의 표정은 미묘하게 웃을 듯 말 듯 해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아이비는 이대로 조금 더 에던에게 치유력을 부어 주려고 했는데, 에던이 이만 그녀의 팔을 떼어 냈다.
“이런.”
“……?”
“정말로 축복을 바라고 인사를 한 게 아닌데.”
“……네?”
아이비는 당황했다. 예상했던 반응과 너무 달랐다.
이 정도로 치유력을 부어 주었으면 당장이라도 라티에나를 찾아오겠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친구를 찾는 일은 생각해 보죠.”
하지만 에던은 제 궁금증이 모두 사라졌다는 듯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테라스를 벗어나려다 말고 다시 뒤돌아서서 물었다.
“성녀님. 그거 알고 있습니까?”
“어떤…… 걸요?”
에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금 당황해하고 있던 아이비의 눈이 의아하다는 듯 커졌다.
“보통 성녀 후보들은, 신전에 가면 죽어야 나올 수 있습니다.”
“……네?”
“혹은 치유력을 빼앗겨 죽습니다. 살 수 있는 확률은 극히 낮죠.”
“그…… 그게 무슨…….”
에던의 고개가 삐딱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여전히 입가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모르고 계셨습니까.”
아이비가 당혹스럽게 얼굴을 붉히더니, 머뭇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그리고 제 친구는 제가 지켜 줄 수 있어요.”
“……그렇습니까.”
“네!”
얼핏 봐선 순진하기 짝이 없는 얼굴의 성녀였다.
이번에 에던은 입매를 딱딱하게 내리고 웃음기를 싹 지운 후,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친구가 원하지 않을 때는요?”
“네?”
“그때도 친구를 신전으로 데려다줘야 합니까.”
“……제 친구도 저와 만나길 원하고 있을 거예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확인한 후, 에던은 그대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 듯 빠르게 무도회장을 벗어났다.
포털을 이용해 고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에던은 전에 없이 살벌한 표정으로 다짜고짜 이능력을 발휘했다.
콰앙!
엄청난 소리를 내며 라티에나의 팔을 힘주어 잡고 있던 힐스타인의 어깨에서 폭탄 같은 것이 터트려졌다.
“크윽……!”
힐스타인이 라티에나의 손을 놓고 그대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찢어진 어깨뼈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라티, 이리 와.”
싸늘한 표정과 다르게 에던의 입에서 나온 건 너무나 다정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