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21)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21화. 남의 것을 함부로(21/92)
#21화. 남의 것을 함부로
2024.05.21.
이대로 꼼짝없이 끌려갈 거라고, 신전에 갇혀서 죽을 거라고 생각한 순간에 에던이 나타났다.
뭘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어느 순간 갑자기 힐스타인의 어깨에서 뭔가가 터지며 잡혔던 손이 편해졌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재빨리 힐스타인에게 떨어져 에던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어딜 가.”
힐스타인이 덥석 다시 내 손을 붙잡았다.
질펀하고 기분 나쁜 피의 촉감이 여과 없이 피부를 타고 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아파!’
조금 전 에던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날 잡고 있던 힐스타인의 손톱은 진작 내 손목을 꿰뚫었을지도 모른다.
아까부터 힐스타인은 날 대할 때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손목이 끊어질 것 같은 힘으로 다시 쥐고 있었다. 내 사정 따위 알 바 아니라고 한 남자니, 손목 하나쯤 부러지는 건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기껏 멈췄던 눈물이 한가득 다시 고였다. 진짜 너무 아프단 말이야!
강한 힘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운데에 서 있는데 에던의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놔.”
뒤이어 힐스타인의 조롱 섞인 대답도.
“말 한마디에 쉽게 놓을 거면 다시 잡지도 않았습니다.”
그 말에 에던이 손을 올려 자신의 제복 소매의 단추를 풀더니 한 번 접어 올렸다.
“설마 실수라고 생각한 건가?”
힐스타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쪽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무슨 말씀이실까요? 못 알아듣겠네요.”
“네 어깨, 실수였다고 생각한 거면 잘못 짚었어.”
그 사이 반대쪽 소매 깃의 단추를 풀어 접는 에던의 목소리에 점점 더 무게감이 실리고 있었다.
낮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위압감이 도서관 안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실수라니. 황자님께서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힐스타인은 나를 다시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지난번에 팔을 달라고 하셨죠. 그땐 안타깝게도 거절했지만, 오늘은 한쪽 어깨 정도는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아주 강한 힘으로.
“으윽…….”
“가져가고 싶은 걸 찾았거든요.”
버티려고 했지만 내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나는 그대로 힐스타인 쪽으로 거칠게 끌려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뚝- 내 손목을 잡고 있던 힘이 사라졌다.
‘뭐, 뭐야……?’
당황했지만 기회였다.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재빨리 잡힌 손을 빼낸 후 에던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때마침, 포털에서 루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쪽입니다.”
루벤이 날 보자마자 자신의 옆자리로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에던을 지나쳐 루벤의 옆으로 향했고, 그는 몸을 틀어 북부에서 그랬던 거처럼 나를 자신의 등 뒤로 감췄다.
힐스타인의 소름 끼치는 얼굴이 넓고 탄탄한 등에 의해 가려졌다. 이제야 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 있는 이상 힐스타인이 다시 날 붙잡지 못할 거라는 안도감이 들었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을 어찌할 수 없어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러자 조금 느슨해진 에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이 뭘 착각한 모양이군.”
그런데 이상하게 힐스타인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궁금한 것에 대해 알려 준다고 했지, 내어 준다고 한 적은 없는데.”
“크…… 커헉!”
갑자기 힐스타인의 신음이 들렸다.
저벅. 에던의 묵직한 발소리가 힐스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이 들리자 나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확장했다.
맙소사.
힐스타인이 푸른빛을 내뿜는 두꺼운 줄에 목이 졸린 채로 허공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검은 손은 에던의 그림자로부터 뻗어 나와 있었다.
에던은 느긋하게 평소와 같은 발걸음으로 힐스타인에게 다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감히 함부로 내 공간에 들어와.”
“……컥, 커컥……!”
“마음대로.”
에던이 툭툭 말을 내뱉을 때 마다 힐스타인의 목을 쥐고 있던 그림자의 힘이 강해지는 듯 신음이 커졌다.
“남의 것을 훔쳐 가려 하면 안 되지 않겠나. 힐스타인 경.”
그 순간 숨을 쉬지 못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힐스타인의 몸에서도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다.
에던으로부터 뻗어 나온 다른 힘이 힐스타인의 몸을 옭아매자 그의 빛은 순식간에 사그라져 버렸으니까.
힐스타인은 절대 약한 남자가 아니었다.
22살의 젊은 나이에 오로지 힘과 실력으로만 위로 올라가 기사단장 자리를 차지한 남자.
다른 남주들이 이능력을 사용해 마물들과의 싸움에 집중하는 사이, 황실에 일어나는 모든 트러블과 분쟁들은 대부분 힐스타인이 처리하고 있었다.
이능력은 마물과의 싸움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황실을 지키는 일에서도 이능력은 사용되었는데, 원작에서 힐스타인은 황후를 노린 자객을 처리한 능력자로 서술되었다.
헨젤라 황후가 여름에 서부의 별장으로 잠시 외출을 갔을 때였다. 그때 제국은 이웃 왕국과 광석 유통 문제로 트러블이 있었다. 그 트러블이 생긴 이유는 황후의 가문 때문이었는데 이미 충분한 광석값을 받고 있음에도 낙찰 가격을 올리기로 한 것이다. 의견 충돌이 생겼던 왕국에서는 황후를 직접 알현해 값을 조율해 보겠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숨겨 놓은 병사 백 명을 서부 별장 주위에 포진시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황궁 근처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황후의 사인만 받아내고 조용히 물러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힐스타인을 대동한 황후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뒤돌아섰고, 그날 황후의 서부 별장에는 백 명의 시체가 쌓아 올려졌다. 그들을 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도 되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에던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긴 하지만 그만큼 힐스타인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런데 저 정도로 맥없이 당해 버린다고……?’
이건 충격을 넘어서 그냥 공포 그 자체였다.
쾅! 괴로워하던 힐스타인이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좀 더 정확히는, 떨어졌다는 것보다 힘에 의해 인정사정없이 바닥에 처박힌 모습이었다.
“쿨럭……! 커허억……!”
보통 사람이라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힐스타인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저 쓰러진 상태로 기침을 토해 냈다.
에던이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몸을 강제로 절반쯤 끌어올렸다.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솜인형을 집어 들듯 아주 수월하게 말이다.
‘아니. 대체 얼마나 힘이 센 거야.’
미간을 구기고 둘을 바라보고 있는데 루벤이 몸을 틀어 내 시야를 가렸다.
“지금부터는 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익- 직.
에던의 발걸음 소리에 맞춰 힐스타인의 몸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에던은 그대로 포털 앞까지 힐스타인을 끌고 갔고, 이내 함께 포털 안으로 사라졌다.
소란이 사라지고 주변이 고요해졌다.
한순간에 천국과 지옥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장 난 듯 부들거리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것이 아닌 새빨간 피가 잔뜩, 손바닥과 손목에 흥건히 묻어 있었다.
오싹거리는 전율과 함께 온몸으로 소름이 퍼져 나갔다.
힐스타인에게 붙잡혀 궁지에 몰렸던 그 끔찍한 순간이 그대로 떠올라 두려운 마음이 차올랐다.
정말로 조금만 있었더라면 신전에 끌려갈 뻔했다.
아무도 날 지켜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나 자신을 지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에던이 내 존재를 모르니까, 여길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날 찾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에던만 미치지 않으면 될 줄 알았는데.
무던히 계약된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고 있었는데 여기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어…….
아니. 원래부터 제국 어디에도 내게 안전한 곳은 없었지.
“괜찮습니까?”
벌벌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몇 번을 반복하고 있는데, 루벤이 책상 위에 있던 냅킨을 몇 장 가져다가 손에 올려 주었다.
“……고마워요.”
나는 손에 묻은 피를 천천히 닦아 냈다.
점점 피가 지워지고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나는 그제야 힐스타인에게 잡혔던 손목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너무 어이가 없는 게, 아직도 공포심이 가득 차 있어서 아프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게 내 손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정도로 나는 지금 혼돈의 상태였다. 날 지켜보던 루벤이 냅킨을 몇 장 더 가져와 내밀었다.
“고맙…….”
그리고 톡톡,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 근처를 가리켰다.
“……?”
정신이 없는 상태라서 무슨 의민지 머리 회전이 빨리 되지 않았다.
닦아 달란 말인가? 고개를 기울이자 루벤이 말했다.
“얼굴에도 묻어 있습니다.”
“아…….”
새로운 냅킨으로 스윽 뺨을 문지르자 소량의 피가 묻어 나왔다.
힐스타인의 어깨가 찢어질 때 튀긴 피인 것 같았다.
“괜찮습니까.”
“……아니요.”
친절히 묻는 루벤에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물었다.
“루벤 경.”
“네. 말씀하시죠.”
“주인님은 어디로 갔어요? 북부로 간 거예요?”
“대답, 해 드려야 합니까? 궁금해하지 않는 편이 마음이 편하실 텐데요.”
“…….”
그런가. 그럼 더 이상 물어보지 말아야지.
난 지금 정말로 괜찮지가 않거든. 힐스타인의 행방에 대한 것보다 다른 정리해야 할 문제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이비가 왜 날 찾고 있는지. 힐스타인이 아닌 다른 남주들도 날 찾고 있는 건지.
오늘 무도회에서 에던은 아이비의 축복을 받았는지.
그래서 그녀의 힘을 느꼈는지.
조금 전 에던은 힐스타인이 왜 날 데리고 가려는지 모르는 듯해 보였지만 만약 이미 아이비의 축복에 조금이라도 매료되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내가 신전으로 끌려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저…… 먼저 가서 쉬어도 될까요?”
나는 다시금 떨려 오는 손을 감추려 주먹을 꽉 쥐고 루벤에게 웃어 보였다.
평소처럼 평범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상황에서 이게 더 이상해 보일 거라는 것도 모르고.
루벤이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러운 듯 물어 왔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가져다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조금만 혼자 있을게요.”
터덜터덜. 다리가 풀리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나는 도서관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가 도착한 내 방 커튼을 닫으려다 말고 기함하고 말았다.
“힐스타인, 변태 놈이 문 놔두고 무슨 짓을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