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22)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22화. 씻겨 줘?(22/92)
#22화. 씻겨 줘?
2024.05.22.
그 높던 성벽 담장이 처참히 무너져 있었다. 들어올 수 없는 벽을 억지로 깨부수고 온 것처럼.
오늘따라 보름달이 훤히 떠 있어서 엉망이 된 정원이 아주 잘 보였다.
‘꼭 지금 나처럼 망가져 버린 것 같아.’
나는 커튼을 닫고 지친 눈으로 책상에 걸터앉아 제널드에게 받은 편지를 모아둔 서랍을 열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다.
편지는 대부분 내가 먼저 보냈었고, 제널드는 몸 쓰는 일을 하는 탓에 바빠서 답장을 자주 하진 못했다.
처음 우리가 떨어져 지낼 때 매주 한 번씩 날아오던 편지는 그다음 달에는 2주에 한 번. 세달째 되었을 때는 한 달에 한 번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지난번 우체부 아저씨가 전해 준 편지였다. 이렇게 모아두고 보니 열 개도 되지 않았다.
나 역시 최근 들어서는 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을에 내려갈 때마다 대여섯 개씩은 열심히 보냈었는데.
나는 가장 마지막에 제널드에게 받은 편지를 펼쳤다.
[라티에나! 돈 얼마나 모았어? 내 생일 알지? 그때 만나서 같이 계산해 보자! 오랜만에 만나네. 그날 기대할게!]많이 바빴는지 처음에 받은 편지에 비하면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짧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도 감추지 않고 솔직한 게 제널드의 장점이니까.
편지 속에서 제널드의 밝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나머지 편지들도 차례로 펼쳐보았다.
“처음엔 내용을 꽤 많이 썼었네.”
[라티에나. 동부에는 잘 도착했어? 일자리는 잘 찾은 거야? 난 잘 정착했어. 우리 미래를 위해 열심히…… 중략.] [라티에나. 오늘은 비가 왔어. 너랑 처음 만났던 날에도 비가 왔었는데, 생각이 나서 편지를 써. 그런데 월급을 그렇게 많이 주는 직장이라니 정말 행운……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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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티에나. 일하기 너무 힘들다. 그래도 열심히 벌어야지. 넌 얼마나 모았어? 나는 생각보다…… 중략.] [라티에나! 돈 많이 모았다고 하니 정말 기분이 좋다! 건강 조심해!]이다음 편지가 생일 때 만나자는 내용이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렇게 한꺼번에 보니 최근 들어서 제널드가 돈 얘기만 묻는 거 같았지만, 그건 제국을 떠나기 위한 경비를 체크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나 또한 제국을 떠나 살 미래를 꿈꾸며 돈 모으는 재미로 여기서 지냈으니까.
멍하니 편지를 바라보며 나는 제널드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아이비에게 인사를 하고 마차에서 뛰어내린 그날 나는 정말로 다리를 접질려 버렸다.
그래도 한쪽 다리만 다친 게 어디냐 생각하며 가까운 동네로 걸어가는 도중 비가 오는 바람에 길을 잃었는데.
‘괜찮아요?’
제널드가 나타났다.
‘세상에. 심하게 다치셨네. 어? 열도 나는 것 같은데…… 잠시만요.’
까만 피부에 순한 인상을 지닌 제널드는 냉큼 내게 등을 내주었다. 내 옷은 비에 젖어 엉망인 상태였는데도.
짜증 한 번 안 부리고.
‘업혀요! 병원 가요, 당장.’
그렇게 난 제널드에게 구해졌다.
알고 보니 아팠던 다리는 접질린 정도가 아니라 뼈가 부러져 있었다.
그때 제널드는 통나무 집을 짓는 현장 일 때문에 그 동네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인데, 갈 곳이 없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현장 숙소 아주머니 집에서 머물게 해 주었다.
많은 급여는 아니었지만 아주머니가 날 고용해 줘서 잘 지낼 수 있었다.
의지할 곳 하나 없었던 나는 그때 제널드에게 한없이 마음을 열었던 것 같다.
마치, 갓 태어난 새끼 오리가 처음 본 상대를 엄마로 인식하는 것처럼. 낯선 곳에서 처음 내게 도움을 준 제널드를 나도 모르게 무한정 신뢰하게 된 거다.
왜냐면 전생에서 죽기 전에도 이 정도로 내게 다정했던 사람은 없었으니까. 온통 날 만만히 보고 이용하려는 사람들 천지였을 뿐. 그래서 제널드의 다정함은 내게 아주 큰 의미였다.
그리고 이제 와 생각하면 그때 나는 착한 척을 좀 했다. 좋은 사람으로 잘 보이고 싶어서 이상한 말투도 쓰지 않았고, 좀 요소 숙녀처럼 굴었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제널드도 유독 내게 다정히 굴어 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래. 좋아.’
‘그러자.’
‘네가 좋을 대로 해.’
‘네 생각이 옳아.’
‘나도 그게 맞는 것 같아.’
무조건 내 편이 되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뭐 이렇게 착한 남자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그랬다.
가끔 너무 영혼 없이 대답하는 거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제널드가 들꽃이라도 꺾어서 가져오는 날에는 입에 발린 다정함이라도 마냥 좋았다.
그렇게 2개월이 넘어갈 즈음, 신전에서 성녀 후보들을 찾아 근처 마을을 뒤지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직 아이비가 대성녀로 발표되지 않은 때라서 여전히 후보들을 찾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제국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했다.
마침 제널드가 참여한 통나무 집 공사도 끝나가던 시점이었다.
‘제국을 떠나겠다고?’
‘응. 돈이 얼마나 필요할까?’
난 곧바로 제널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푼돈이었지만 모아 놓은 돈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다른 왕국으로 가서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알아볼까?’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응. 그럼 우리 같이 떠나자.’
‘……뭐? 진심이야?’
‘물론. 진심이야. 널 위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사실 이때는 조금 당황했다. 갑자기 같이 떠나겠다는 말을 해 줄 줄이야. 그런데 제널드는 정말로 며칠 후 다른 왕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 왔다. 아직 다리가 완전히 낫지 않은 나를 대신해서 먼 거리를 걸어서 다녀와 준 것이다.
‘가는 건 어렵진 않은데, 시민권을 받는 건 쉽지 않은가 봐. 그래도 방법이 있어.’
‘뭔데?’
‘결혼하면 돼.’
‘……결혼?’
깜짝 놀란 나와 달리 제널드는 여전히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약혼 기간을 거친 신원이 확실한 신혼부부에게 시민권을 주는 제도가 있나 봐. 대신 약혼 증서가 필요해.’
‘증서? 그건 어떻게 받아?’
‘우리 둘이 서류에 사인해서 시청에 내면 돼. 돈은 좀 필요하겠지만 그 정도는 있지?’
‘돈…… 얼마 없는데. 낼 수 있을까?’
내가 걱정하자 제널드가 환하게 웃었다.
‘라티에나. 걱정하지마. 내가 있잖아. 너 혼자 내는 거 아니야. 반반씩 내자. 음. 그리고 이사 비용이랑…… 시민권 받을 때 내는 세금이랑…… 우선 6개월 약혼 기간을 채워야 하니까 그동안 열심히 일해서 모으는 거 어때?’
제널드의 계획은 정말 자연스럽고 완벽했다.
하지만 나는 고백도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제널드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괜찮아? 제널드?’
‘응? 뭐가?’
‘그건…… 너랑 나랑 약혼한 후 결혼까지 한다는 말이잖아.’
‘응. 그게 왜?’
‘너 나 좋아해?’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제널드에게 이성적으로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사랑이라기보다 정이나 우정 같은 감정일 뿐,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 컸다. 그리고 냉정히 말해 제널드도 날 이성으로 생각하는지 확신이 없었다. 우린 가끔 손잡는 것 빼고는 아무런 진도도 나가지 않았으니까.
그런 내 물음에 제널드는 평소처럼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좋아하지. 넌?’
지금껏 보아 왔던 중 가장 밝은 웃음을 지으며 되묻는 말에 나도 웃으며 말했다.
‘응. 좋아해.’
사랑, 까지는 아니지만 사랑에 가장 가까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제널드가 아닐까? 앞으로 노력한다면 더 좋아질 테고. 이렇게 다정한 남자와의 미래가 불행할 리가 없다.
다른 무엇보다 제널드와 약혼하면 제국을 떠날 수 있다.
‘라티에나, 우리 돈 많이 모으자!’
‘응!’
그 후 난 약혼 증서에 사인하고 지갑을 털어 돈을 제널드에게 건넸다.
제널드는 곧장 시청에 가서 확인 증서를 가져왔고, 우린 그 후로 지금까지 떨어져 지냈다.
‘아직 기간이 남기는 했지만 약혼 증서가 있으니까, 나머지 기한은 왕국으로 가서 채워도 될 것 같은데.’
나는 머릿속으로 약혼 기간과 고성의 근로 계약서에 남은 날짜 계산을 하며 편지를 정리해 가방에 담았다.
그다음 은행에 맡겨 둔 월급 내역을 적은 메모를 훑었다.
더 많이 모으지 못한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이 정도면 적은 건 아니야.
‘이번에 가면 제널드에게 전부 얘기하고…… 곧장 떠나야 해.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갑작스럽겠지만 제널드는 언제나 내 의견에 따라 주었으니까 이번에도 분명 알겠다고 해 주겠지?
어차피 우리가 돈을 모으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으니까. 날 위해, 라고 했으니까.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는데 이 암담한 상황 속에서 나에게 제널드가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문득 머릿속으로 에던과의 입맞춤이 지나가 죄책감으로 가슴이 찌릿했지만…….
변명이라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내가 덮친 건 아니었어.
‘미안해! 제널드! 내가 평생 잘할게! 진짜 정말이야! 돈도 이만큼이나 모았으니까!’
수도에는 다른 왕국들로 향하는 포털을 모아둔 거대한 터미널 같은 곳이 있다고 들었다.
거기서 움직이면 에던도 남주들도 날 쉽게 찾을 수 없을 거다.
머리를 써서 그런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힐스타인에게 기 빨려서 몽롱했던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잊고 있던 손목의 통증이 시작되었다.
현실이 자각되자 점점 화가 났다.
아이비는 왜 날 찾는 거야? 대성녀가 됐으면서 다른 성녀 후보들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건가?
헤어지면서 찾지 말라고 말을 해야 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날 찾을 이유가 없는데.
아이비의 귀에 대고 소리치고 싶다. 나 안 가! 신전으로 가고 싶지 않다고! 찾지 마! 네 인생에나 집중해!
‘허무해. 혼자 소리치면 뭐하냐. 씻기나 해야지…….’
힐스타인 그 인간의 소름 끼치는 피를 묻히고 자는 건 생각만으로도 토할 것 같아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는 복도로 나갔다.
그런데, 히익! 언제 돌아왔는지 에던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주, 주인님?”
방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걸 들킨 것만 같아서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그보다 나도 모르게 막 혼잣말로 중얼거리거나, 계획을 누설해 버린 건 아니겠지?
별별 걱정이 들어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디 가려고.”
“씨, 씻으려고요.”
평소처럼 말해 놓고 나는 에던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비랑은 무도회에서 잘 만났을까? 힐스타인이 날 데려가려고 했던 이유…… 알아 버렸을까?
“씻겨 줘?”
“……사양할게요.”
힐스타인한테 아무 말 못 들었나 보다. 에던은 평소와 같았다.
혹시 모르지. 아까 힐스타인 머리고 몸이고 엄청 세게 바닥에 처박혔으니까 끌려가는 도중에 기절했을지도. 그래. 다행이다. 일단 오늘 밤은 무사히 넘기겠어.
“그럼 안녕히 주무…….”
“손.”
“……네?”
“줘 봐.”
아직 대답도 안 했는데 에던은 힐스타인에게 붙잡혀 시퍼렇게 멍든 내 손을 부드럽게 쥐어 들었다.
그리고 아직 피가 묻어 있어 엉망인 손목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짓이기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하, 그 XX 새끼가.”
처음이었다.
에던의 입에서 욕설이 나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