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23)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23화. 힘 빼(23/92)
#23화. 힘 빼
2024.05.23.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흠칫, 손끝을 떨었다.
그러자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에던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좀 전과 너무 달라진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손가락 끝을 가볍게 매만지며.
“씻는다며, 씻고 와.”
달래듯이 조용히 말을 마친 그는 잡았던 손을 놓아주며 세면실을 까딱 턱으로 가리켰다.
“그, 그럼…….”
무서워. 심장 조여서 살겠냐고. 심한 욕설도 아닌데 한순간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에던의 적이 된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나한테 저런 말 내뱉으면 위압감 때문에 기절해 버릴지도 몰라.
조금 전까지 나에겐…… 아주 조금, 마음 한구석 끄트머리에 힐스타인이 어떻게 되었는지 호기심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젠 정말 힐스타인이 어디로 끌려가서 무슨 짓을 당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자업자득이다, 이 자식아! 무슨 짓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울면서 후회해라!’
에던이 날 소중하게 여겨서 지켜 준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에던이 아이비 외에 누군가에게 호감을 품을 리가 없으니까.
엉망으로 꾸깃꾸깃 종이처럼 접혀 있는 힐스타인을 상상해 보며 나는 빠르게 돌아서서 원래의 목적지로 뛰었다.
조금이라도 더 에던과 마주하고 있다가는 왠지 내 새로운 도망 계획을 들켜 버릴 것만 같았다.
심장이 계속 쿵쾅쿵쾅 시끄럽게 뛰었다.
***
‘이제 좀 살 것 같아!’
끈적이던 피를 말끔히 씻어내니 복잡했던 머리도 정리가 되며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잠옷으로 갈아입고 천천히 손목의 상처를 확인했다.
힐스타인의 손톱으로 짓눌렀던 손목 안쪽에 긁힌 피부가 보였다.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능력자는 정말 괴물들이다. 손목에 이렇게 쉽게 시퍼런 멍이 든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오랜 시간 밧줄로 감았다 풀려난 것처럼 멍은 점점 보랏빛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말,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아.’
옷을 갈아입고 머리에 감아 두었던 수건을 풀자 긴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힐스타인에게 잡혔던 왼손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 다른 한 손으로 몇 번 물을 짜다 말고 포기한 후, 수건으로 꾹꾹 긴 머리카락을 감싸 눌렀다.
거울 속에 아이비가 좋아하던 내 머리카락이 보이고, 문득 무심코 지나쳤던 힐스타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런 짓을 해서 얻는 게 뭐예요?’
‘아이비 님을 갖는 거지.’
이상해. 그 말 그대로 이해하면, 아이비는 날 데려오라는 조건으로 자기를 내걸었다는 건데.
그렇게까지 나를 찾는다고?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아이비. 정말이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에던이 미치는 걸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치유력도 강하지 않은 내가 언제까지고 에던의 치유를 책임져 줄 수는 없다.
‘매번 내 목숨을 걸고 에던을 구할 수는 없잖아.’
결론적으로 에던은 오늘 아이비로부터 나를 도와주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는 대성녀의 치유력이 필요해질 테고….
아이비의 치유를 받아 매료되면 망설임 없이 날 그녀에게 날 가져다 바칠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에던은 기억 못 하지만 나도 자기 목숨 한 번은 구해 줬는데.
만약 이번 계획이 실패하면 그 일을 빌미로 도와 달라 부탁이라도 해 볼까.
궁지에 몰리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대충 정리한 후 나는 약과 붕대를 찾아 1층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널드가 상처 보고 기겁할지도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치료해 놔야지.
그런데 내가 막 문 앞에 서자 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야, 문 열어.”
깜짝이야. 심호흡을 하고 빼꼼 문을 여니 제복 재킷을 벗은 탓에 드러난 하얀 셔츠에다 단정한 크라바트를 매고 있는 에던이 보였다. 와중에 머리는 또 감았는지 물기를 머금고 있었고 깨끗한 비누 향이 났다.
“무슨 일이에요?”
“다친 곳 치료하게. 들어간다.”
“네? 아니! 잠깐만!”
에던이 다짜고짜 안으로 들어오려는 걸 막으며 필사적으로 문을 붙들었다.
당연히 막을 수 있을 리 없지만 에던은 순순히 멈춰 주었다.
“뭐.”
“제, 제가 할 수 있어요.”
“누구 마음대로?”
“……에?”
아니…… 당연히 내 마음이지.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뒤로 덜컹 물러났다.
에던이 불쑥 발을 내밀어 문을 가차 없이 열어 버렸기 때문이다.
손에 약을 몇 개 쥐어 든 에던이 망설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약 발라 준다고 하잖아.”
“…….”
“내가, 친히.”
“…….”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말하는 에던은 한 번 더 거절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알았어, 미친놈아. 치료해 주겠다는 인간이 왜 협박질이야. 우이씨.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럼 서서 해 주세요.”
“뭐?”
제 할 말만 마치고 침대 옆 협탁으로 자연스럽게 발길을 옮기던 에던이 그대로 멈춰 섰다.
돌아보는 그의 시선이 싸늘했다.
“머, 머리가 덜 말라서요. 침대에 물기 떨어지는 거 싫으니까.”
어처구니없다는 듯 에던의 잘생긴 미간이 찌푸려졌다.
창문에서 뻗어 나온 달빛이 반짝반짝 에던의 실루엣을 따라 내려앉았다.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있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에던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난 정말이지. 에던의 저 밝은 금발과 달빛이 어우러지는 건 사기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얼굴부터가 사기지만 밤의 에던은 그 어떤 별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거 같아서 정말 신이 빚은 완벽한 조각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러니까 더 경계해야 하는 법이다.
침대에서 치료받으면 또 지난번처럼 이상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잖아. 더 이상 제널드에게 양심의 가책이 느낄 만한 짓은 아무것도 하기 싫어. 내 의지가 아니라고 해도.
“언제부터 그렇게 까탈스러웠어?”
툭. 에던이 붕대와 약병, 그리고 가위를 협탁 위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약병을 열더니 내게 다가와 망설임 없이 멍든 손목을 붙잡아 올렸다.
“공주님이라서 그런가?”
피식, 놀리듯이 내뱉는 그의 말에 고슴도치처럼 날카롭게 세우고 있던 내 경계심이 조금 무너져 버렸다.
“그거 말인데요.”
“뭐. 공주.”
“…….”
으아악! 손발이 오그라든다. 내장이 꼬여 가는 기분이 들어! 그때의 나를 때려 주고 싶다.
과거로 돌아가서 에던에게는 수치심이나 창피 같은 건 없으니 차라리 아침밥으로 만족하라고 소리치고 싶다.
“다른 걸로 바꿀게요.”
나는 에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에던의 시선은 여전히 내 손목에 향해 있었다.
한 손으로 내 손목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약을 자신의 손가락에 묻혀 내 피부를 문질렀다.
훅 들어온 힘에 내가 팔을 움찔거리자 멈칫하더니 힘을 빼고 전보다 더 느슨히 움직였다.
“내가 후회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했어요.”
고민 없는 빠른 나의 인정에 무미건조하게 약을 펴 바르던 에던의 입가가 재밌다는 듯 부드럽게 올라갔다.
“책은.”
약병을 협탁에 내려놓고 붕대를 집어 올리며 에던이 느릿하게 시선을 내게로 옮겨왔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내려 손목에 집중하며 물었다.
“읽었어?”
왜 얘기가 갑자기 거기로 튀어? 갑자기 지금 그걸 물어본다고?
“혹시 소원권 말하는 거면 여기다 쓰려는 거 아니에요.”
“그래? 어디다 쓸 건데?”
에던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지금 말하면 무슨 부탁이든 들어줄 것처럼.
“말하면 들어줄 거예요?”
“응. 책 읽었으면.”
“읽었어요! 줄거리도 말할 수 있어요.”
“그럼 말해 봐. 소원.”
붕대를 감는 것에 집중한 듯한 에던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 보내 주세요.”
“수도?”
“네.”
“거긴 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이때다 싶어서 나는 에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주 활짝 웃었다.
“제널드 생일이거든요. 축하하러 가고 싶어요.”
그 순간, 에던이 붕대를 감던 손을 그대로 멈춰 버렸다.
“……그래서.”
“……?”
“그러니까.”
혼잣말을 하며 재빠르게 붕대를 잘라낸 에던이 가차 없이 가위를 협탁 위로 내던졌다.
그리고 느릿느릿, 어이없다는 얼굴로 날 향해 서서히 다가섰다.
아니. 얘 왜 또 이래?
“저기…….”
에던은 잡은 사냥감의 숨통을 조여 가듯 내 등에 벽이 닿을 때까지 밀어붙였고, 나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또 어디에서 신경이 거슬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당황스럽게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에던이 매끄럽게 입술로 호선을 그리더니 핏줄이 돋은 단단한 팔을 들어 내 등 뒤의 벽을 짚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내 턱을 잡아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들어 올렸다.
조금 강압적이지만, 그렇다고 아프지는 않게, 제멋대로 구는 와중에 충분히 날 배려하고 있다는 힘 조절이 느껴졌다.
“주인님, 뒤로 좀…….”
그렇다고 내가 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몸의 간격이 너무 가까워서 거리를 두기 위해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에던은 커다란 돌덩이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으니까.
“다른 남자 생일 축하하러 가는 일에 내가 준 소원권을 쓰겠다고?”
짜증 섞인 목소리.
“우리 공주, 요즘 참 용감해졌어.”
“뭐, 뭐가요?”
“내가 소원권을 그딴 곳에 쓰라고 준 줄 알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미친놈아! 소원권 정도는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너무 황당해서 흔들리는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숨을 꿀꺽 삼켰다.
“그럼 어디다 써요? 소원권은 내가 원하는 거…….”
“라티에나.”
“네?”
“…….”
아니 뭔데! 말을 해.
에던은 말없이 내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빨리 그에게 갇힌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돌렸는데, 그가 다시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아파서 진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버텼다.
“힘 빼.”
“시, 싫어요.”
“버틴다고 될 일 아닌 거 알잖아. 부러진다.”
알고 있지만, 힘 빼면 끌어당길 거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결에 아랫입술을 이로 질끈 깨물었다.
그러자 그가 잡고 있던 내 손목을 놓고 그대로 허리를 끌어안아 제 쪽으로 당겨 버렸다.
“꺅!”
이렇다 할 반항을 할 새도 없이 넓고 단단한 가슴에 이마를 부딪쳤다.
“귀엽긴 한데 까불지 좀 마.”
부딪힌 머리를 신경 쓰는 듯 에던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토닥거렸다.
그리고.
“덮쳐 버리고 싶으니까.”
미친 소리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