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26)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25화. 병약한 소금쟁이(26/92)
#25화. 병약한 소금쟁이
2024.05.25.
한여름에도 산맥에서 눈발이 날리는 북부와 다르게 동부는 대부분이 따사로운 봄날이었다.
초록이 만연하고 화사한 꽃 정도는 널리고 널린 그런 지역. 그러나 언덕 위의 낡은 고성은 오랜 시간 동안 비어 있었고, 정원을 가꾸는 사람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단조로운 색의 넝쿨이나 초록 식물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정원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저 여자는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벚꽃 머리가 하늘을 바라보며 양손을 모아 하트를 만들면서 해사하게 웃었다.
뭐 하는 거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하늘로 따라 올린 에던의 한쪽 입꼬리가 비웃듯이 올라갔다.
“유치하긴.”
하늘에 하트 모양 구름이 떠 있었다.
잠시 동안 그러고 있던 그녀는 무언가 떠오른 듯 퍼뜩 손을 내리더니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때마침 에던의 머릿속에도 스치듯이 듣고 잊어버렸던 루벤의 말이 떠올랐다.
‘근로 계약서는 서랍에 넣어 두었습니다.’
곧장 몸을 틀어 지금껏 한 번도 열어 보지 않았던 협탁 서랍장을 열었다.
“라티에나 메리골드…….”
조곤조곤,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드르륵 트레이가 끌리는 소리가 복도에 들렸다. 별생각 없이 문을 열려던 찰나에 다시금 루벤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주인님께 방해될까 봐 방문은 열지 말라고 적어 두었어요. 아무래도 모습을 보이면 귀찮아질 수 있잖습니까.’
그렇지. 하녀니까. 지금까지의 경험상 에던의 얼굴을 보고 쓸데없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몹시 귀찮고, 짜증 나게 들러붙는 일이.
그건 수많은 귀족가 영애들의 선망을 받으면서도 에던이 사교계의 파티에 잘 참석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에게 있어서 여자에 관련된 일은 좋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평민 주제에, 쓸데없이 아름다워서 황제와 결혼해 자신을 낳고 일찍 죽어 버린 어머니를 포함해 말이다.
어릴 적 자신을 쓸데없이 매만졌던 황실의 시녀들도, 과거의 스킨십으로 인한 거부감을 일으키게 한 성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걸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루벤이 어째서 여자 하녀를 뽑았느냐면.
‘왜 여자야?’
‘지원한 사람이 그 여자 한 명밖에 없었어요.’
‘아.’
‘마을에서 떨어진 아무도 가지 않는 어두운 분위기의 고성이니까요. 충분한 대처는 해 두었으니 신경 쓰이실 일은 없으실 겁니다.’
에던은 손에 든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방문을 열지 말 것.]이게 대안인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계약서다.
근로 조건은 다른 곳보다 훨씬 좋았지만, 얼굴 한 번 보여 주지 않은 주인과 이런 계약서에 사인을 하다니. 사기당하기 딱 좋겠어. 어디서 이미 당한 걸지도 모르고.
“와, 다 먹었네.”
빈 그릇을 확인했는지 밖에서 들떠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뭐 그리 좋은 일이라고.
달그락거리며 그릇을 교체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 이만 돌아갈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이어졌다.
“주인님 아침밥 앞에 두었어요. 꼭 챙겨 드세요. 그리고 저 마을에 다녀올게요. 앞치마 사러요!”
목소리가 너무 발랄해서 조금 전 그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에던은 다시금 근로 계약서를 훑었다.
‘착실하다고 해야 하나.’
일일이 행적을 보고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툭, 종이를 이만 내려두었다. 그리고 어쨌든 자신이 궁금한 걸 해결하기 위해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줄어든, 속삭이는 듯한 라티에나 메리골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오늘도 잘 살아 있어 주세요.”
……뭐?
에던의 손은 그대로 멈춰 버렸다. 살아생전 이렇게 어이없는 말을 들어본 건 처음이다.
아무리 이능력의 부작용으로 고통 속에 시달렸다고 한들 지독한 괴로움에 시달릴 뿐이지 죽음은 별개의 문제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 이상 이능력자들은 절대 쉽게 죽지 않는다.
그런데 잘 살아 있어 달라고? 오늘도?
잘못 들으면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사람인 줄 알겠네.
말을 마친 라티에나가 복도를 후다닥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고성의 문을 양손으로 밀어 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에던은 가벼운 갈색 로브를 걸치고 그녀를 뒤따랐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고성. 성문을 열고 나가면 저 아래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에던의 걸음으로는 아무리 여유롭게 걸어도 10분이면 내려갈 거리.
‘키가 작아서 다리가 짧은 건가, 체력이 없는 건가.’
라티에나는 20분이 넘도록 언덕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보다 더 황당한 건 바람이 부는 뻥 뚫린 언덕에서 대놓고 따라오는 자신의 기척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라티에나는 웨이브가 들어간 벚꽃잎 머리카락을 바람 따라 팔랑이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어갔고, 에던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뒤를 유유히 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기당하거나 납치당하기 딱 좋은 상대였다.
마음만 먹으면 아이비 성녀에게 가져다주는 건 한 손가락 끝으로도 할 수 있을 만큼.
‘좀 더 지켜볼까.’
오랜만의 산책이었다. 상쾌한 공기에 살랑거리는 바람.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고통 속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몸 상태.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솟구쳐오를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느려터진 라티에나의 걸음에 맞춰 따라가면서도 에던은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한참 후에야 겨우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마을로 들어간 라티에나는 우체국으로 향했다. 그다음은 은행. 일을 다 보고 드디어 앞치마를 사러 가는가 했는데 중간에 잠시 길거리 노점상에서 액세서리 구경을 하기도 했다.
그 후에야 상점가의 한 가게로 들어갔다. 앞치마와 여자 옷들이 걸려 있는 소박한 작은 천 가게였다. 그녀가 나오길 기다리며 가게 옆 골목에서 팔짱을 끼고 대화를 엿듣던 에던의 눈가가 구겨졌다.
“그러니까…… 저희 주인님요. 완전 방구석 폐인인 데다가 너무너무 병약한 것 같아요. 제가 없으면 혹시 큰일 날지도 몰라서 잘 간호해 주려고요. 불쌍하잖아요.”
“오메. 그려? 생긴 거는 어뗘?”
“얼굴은 못 봤지만 아마 소금쟁이처럼 아주 마르고 힘이 없는 사람일 거예요. 근데 도서관에는 책이 아주 많아요! 그래서 심심하지 않아요.”
“에구머니나. 책 많고 마른 인간이면 괴짜네, 괴짜.”
병약…… 소금쟁이…… 힘이 없…….
누가? 내가?
***
11시, 포털로 북부에 이동한 에던의 검은 망토가 바람에 휘날렸다.
쾅! 쾅! 이능력 기사들이 마물들과 전투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에던을 확인한 루벤이 뛰어왔다.
“대공님 늦으셨습니다.”
“루벤. 날 뭐라고 한 거야?”
“예?”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루벤이 고개를 기울였다.
“고용한 하녀가 나를 병약한 소금쟁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데, 왜지?”
루벤은 속으로 되물었다. 병약한 소금쟁이, 라는 단어는 어디서 가져온 거지?
“몸이 약해 시골로 요양 온 부자…… 정도로 설명해 두었습니다만.”
“그래?”
그래서 나를 병약한 데다 힘이 없는…… 어쩌고, 라고. 어처구니가 없네.
피식 웃는 에던의 시야 너머로 어둠 속에서 거대한 마물이 나타났다.
에던이 아니면 처리할 수 없는 크기의 마물이었다.
제국의 마물이 가장 위협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북부의 산맥이다.
오래전 큰 전쟁을 치르며 많은 피해를 입었던 제국은 마법을 이용해 긴 얼음 산맥을 따라 벽을 지었다. 그곳이 무너지지 않는 벽.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될 곳이었다.
벽과 산맥 사이에는 틈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었다. 오롯이 마물과의 전투를 위해 만든 공간이었는데 전투는 주로 마법 트랩을 이용해 마물이 나타나면 틈을 열어 그것을 유인한 후 그곳에서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늦으셨습니다. 빨리 가서…….”
“앞으로 매일 늦을 거야. 틈을 여는 시간을 한 시간 늦춰.”
“갑자기요? 왜요?”
“우리 집 하녀가 10시에 자거든.”
영문 모를 소리를 한 에던은 활짝 웃으며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 북부의 대공성에 사제가 방문했다.
“알아냈습니다. 이름.”
“뭔가.”
“라티에나 메리골드입니다.”
이름을 확인한 그 순간 에던의 붉은 눈동자에서 이채가 돌며 매끄러운 입술이 올라갔다.
“치유력은? 별것 아닌 게 확실하고?”
“네. 확실합니다.”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 건가?”
“성녀 후보들을 찾으러 갔을 때 확인한 사제의 말로는 아이비 성녀 쪽은 아티팩트에서 강한 빛을 냈는데, 라티에나 메리골드 쪽은 희미한 빛만 감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군.”
에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사제를 돌려보냈다.
‘그럼 저건 뭘까.’
부엌에서 라티에나가 머뭇거리며 손가락 끝에 치유력을 발현시켰다.
혹 자신이 그러고 있는 걸 누가 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이다.
한눈에 봐도 맑은, 그 어떤 치유력보다 깨끗해 보이는 분홍빛의 힘이었다.
성녀 후보가 신전으로 가면 죽게 된다는 것은 일반인들은 모른다. 그런 사실이 드러나면 아무도 치유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 테니 신전에서 철저히 막고 있었다.
마차에서 떨어진 게 사고가 맞는 건가? 아니면, 신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도망이라도 친 건가? 무슨 이유에서든 에던은 라티에나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대공님 요즘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요즘 밥을 잘 먹거든.”
그 대답에 루벤이 뿌듯하게 말했다.
“하녀가 요리를 잘합니까?”
“아니. 못해. 더럽게 맛없어.”
“예?”
“그런데, 루벤. 하녀 이름이 그 라티에나 메리골드다.”
자신이 뽑아 놓고도 별 관심이 없었던 루벤은 당황했다.
“……뭐라고요?”
루벤이 뽑았다고는 하지만 대리인을 시켜 처리한 일이기 때문에 그녀가 벚꽃잎 색 머리카락을 가진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었다.
에던의 말을 듣고 상황 파악을 마친 루벤은 더더욱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치유력이 보잘것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죠?”
“모르지. 그러니까 한동안은 지켜볼 생각이야.”
“데리고 있겠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라티에나의 치유력은 완벽하거든. 그러니 한동안은 병약한 소금쟁이가 되어 볼까 하고. 해답이 나올 때까지.”
그러나 비밀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이런, 들켜 버렸네.”
무너지지 않는 벽의 틈이 고장 나 수습이 늦어진 그날, 20시간이 넘게 꼬박 이어진 전투를 마치고 돌아왔더니, 겁에 질린 라티에나가 눈앞에 얼어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