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30)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30화. 날벼락(30/92)
#30화. 날벼락
2024.05.30.
세 남자 중 한 명, 갈색 조끼를 입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가 날 빤히 응시했다.
“누구……?”
“나야!”
왜 못 알아보지? 로브 때문에 얼굴이 너무 가려졌나 싶어서 나는 재빨리 모자를 벗었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이니 크게 눈에 띌 위험은 없었다.
내 긴 머리카락이 드러나 허리까지 찰랑거렸다.
그때 왜인지 모르겠지만, 옆에 있던 두 남자의 눈이 놀라서 휘둥그레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제널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두 남자보다 제널드가 가장 놀란 것처럼 보였다.
“맙소사. 설마, 라티에나?”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널드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가와 환하게 웃음 지었다.
“젠장. 너 진짜 라티에나 맞아?”
왜 이러지?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어색해서 이러나?
“나 맞아, 제널드. 우리 오랜만에…… 윽!”
“라티에나!”
제널드가 갑자기 날 와락 끌어안았다.
술 냄새가 확 풍겨 왔다. 그래도 나는 불편한 기색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뒤에서 제널드의 지인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날 죽어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야! 라티에나! 보고 싶었어!”
“으응. 나도.”
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꽉 껴안는 제널드의 등을 토닥이며 어깨 너머의 두 남자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제널드는 은근슬쩍 내 등과 허리를 더듬거리더니 목덜미에 고개를 비비적대다가 놓아주었다.
그동안 제널드와의 추억 속에 이 정도로 스킨십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진땀이 날 정도로 당황했다.
그렇다고 약혼자인 제널드를 밀쳐 낼 수는 없어서 참아 내다가 그의 손이 허리 라인을 타고 가슴 쪽으로 올라가려 하자 나는 힘껏 상대의 가슴을 밀치며 뒤로 물러났다.
“제널드!”
“아하하. 미안,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 그래. 반가워서.”
환히 웃는 얼굴로 사과하는 제널드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술 마셨어?”
“응.”
“얼마나? 많이 마신 거야?”
“에이. 조금 마셨어. 조금.”
“일은?”
“아…….”
내 질문에 제널드가 잠시 당황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오늘 쉬는 날이야. 네가 정말로 여기까지 찾아올 줄 알았으면 일하는 척이라고 하고 있을걸.”
일하는 척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 당황스러웠다.
“미안, 미안. 라티에나. 근데 나 별로 안 취했어.”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제널드가 술에 취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해 보이려는 듯 손바닥으로 제 뺨을 툭툭 때렸다.
나는 제널드를 가만히 관찰했다.
냄새가 나긴 하지만 발음도 제대로고, 서 있는 것도 멀쩡하고 적당히 기분 좋을 정도로만 마신 것처럼 보이긴 하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햇살이 쨍쨍한 파란 하늘. 골목 끝으로 보이는 거대한 시계탑이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간에 술이라니. 원래 제널드가 술을 마셨던가?
함께했던 몇 달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는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두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여어, 제널드. 이분은 누구셔?”
“우리한테도 소개해 줘야지.”
“아아! 그래. 그렇지.”
제널드가 냉큼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인사해. 라티에나 메리골드, 내 친구야.”
당혹스러웠다. 약혼녀가 아니라 나를 친구라고 소개한 제널드 때문에.
“오호. 이 아름다운 분이 친구분이셨구나.”
“너한테 이렇게 예쁜 친구가 있었어? 이 자식 제법이네.”
나를 소개받은 두 남자는 내게 인사할 생각도 하지 않고 날 평가하기 바빴다.
“안으로 모셔!”
“그래. 같이 즐기자고 해 봐.”
“알겠어. 먼저 들어가.”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던 두 남자가 키득키득 웃으며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갈래? 라티에나? 보기보다 위험한 곳 아니야. 그냥 술집이고 안에서 포커 게임 하는 곳인데 돈 조금 걸고 하면 재밌을 거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제널드에게 순진하고 착한 여자였으므로 조신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있잖아, 제널드. 나랑 얘기 좀 해.”
다행히 제널드는 예전처럼 다정히 미소 지었다.
“그럴래? 그러자, 그럼.”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은 거지?”
“물론이지. 네가 왔잖아. 괜찮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 하고 싶은 대로 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널드는 조금 전의 그 쎄하고 찝찝한 감정이 모두 사라지도록 너무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 술집 골목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골목의 어두운 그늘을 벗어나 환한 곳으로 나오니 제널드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골든 리트리버처럼 순해 보이는 제널드는 전과 거의 달라진 곳이 없었다.
전과 같은 그를 확인하자 안도감이 찾아왔다. 바람에 술 냄새도 흩어져 불쾌한 느낌도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물어봐야 했다.
“왜 날 친구라고 소개했어?”
“응?”
기분이 좋은지 헤헤거리며 걷던 제널드가 뚝 걸음을 멈춰 섰다.
“아아, 그게……. 잠시만 라티에나!”
이마를 긁적이던 제널드가 손을 놓고 갑자기 뛰어갔다.
허겁지겁 제널드의 발길이 향한 곳은 꽃집이었다. 샛노란 히아신스와 하얀 데이지꽃이 섞인 꽃다발 구입한 제널드가 내게 그걸 내밀었다.
“이거 받아, 라티에나.”
“아. 고, 고마워?”
갑작스러운 꽃 선물이었다.
주니 받아 들긴 했지만 아까의 답은 듣지 못해서 내가 다시 물어보려 하는데 제널드가 놓았던 손을 다시 맞잡았다.
“예전에 우리 함께 지낼 때, 시골이라서 변변한 꽃 한 송이 사 주지 못했잖아. 내내 마음에 걸렸었어.”
“아냐. 들꽃 꺾어다 줬었잖아. 난 그것도 좋았는걸.”
“에이. 너처럼 예쁜 여자한테 들꽃이라니 말도 안 되지.”
예쁘다고……?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인다.”
제널드가 환하게 웃으며 내 손등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예전의 제널드는 내게 예쁘다고 칭찬한 적이 없었다. 물론 다정하게 굴어 주긴 했지만 이런 식의 스킨십도 익숙하지 않았다.
“너, 나 예쁘다는 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제널드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키웠다.
“당연하지. 라티에나 너 정말 예뻐진 거 알아?”
“내가?”
“그래! 아, 아니…… 예전에는 안 예뻤다는 게 아니고 지금 너 엄청나게 미인이야.”
제널드가 실수를 만회하겠다는 듯 오버스럽게 양손을 올려 별을 흉내 내듯 흔들며 칭찬을 이어 나갔다.
“그때도 예쁘고 지금도 예뻐. 그런데 지금은 뭐랄까. 분위기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빛이 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엄청나게 예뻐, 너.”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제널드의 입이 찢어지라 웃고 있었고, 날 향한 시선과 눈빛에서는 전과 다른 게 느껴졌다.
이전의 제널드가 날 그저 착한 여자로 보고만 있었다면, 지금 제널드의 눈빛은……. 완벽히 날 이성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문득 스미스가 나더러 예쁘다고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웃고 계시는 게 너무 예뻐서.’
힐스타인이 했던 말도.
‘생각보다 예쁘네. 예쁘잖아.’
조금 전 제널드의 지인인 두 남자도 분명 예쁘다고 했다.
뭐야. 나 진짜 예쁜가? 에던은 못생겼다고 했는데.
아니. 아냐. 머릿속에서 날 비웃던 에던의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정신 차려. 제널드와의 반가운 인사는 이 정도면 충분해.
“그런데 다음 주에 오는 거 아니었어? 빨리 왔네?”
자연스럽게 공원의 벤치로 날 끌어 앉힌 제널드가 반달처럼 눈을 휘었다.
“있잖아, 제널드. 사실 내가 오늘 너한테 온 건…….”
그때였다.
“야! 제널드 요한!”
귀가 찢어질 것 같은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널드와 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하얀 앞치마를 둘러맨 여자가 입술을 악물고 씩씩거리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놀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제널드의 손이 파르르 떨리더니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갔다.
“제널드? 너 아는 사람이야?”
“미, 미친.”
“어? 왜 그래?”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안색을 살피는데, 제널드의 얼굴은 세상이 무너질 큰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라티에나. 도, 도망쳐. 빨리!”
“뭐? 잠……!”
“여, 여관에서 봐! 저녁에 갈게! 알았지? 거기 가 있어!”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다급하게 말을 내던진 제널드가 나를 있는 힘껏 벤치 뒤로 밀어 버렸다.
나는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뒤집힌 시야로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이 보였다.
세상에. 이 상황 진짜야? 몇 개월 만에 만난 약혼자에게 밀치기를 당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당해 본 적 없는 밀치기를.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아파라…….”
나는 엉덩이에서부터 올라오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 손바닥으로 다친 곳을 문지르며 미간을 구겼다.
그러자 멀리서 시계탑의 종이 울렸다. 댕댕댕- 세 번.
번뜩 정신이 들어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안 돼!”
휙, 고개를 돌리자 제널드와 여자는 어느새 저 멀리 뛰어가고 있었다.
“제널드! 잠깐만! 같이 가!”
벌써 세시라니!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도 황급히 두 사람을 따라 뛰었다.
에던이 언제까지 돌아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그 성격상 하루 이상은 기다려 주지 않을 걸 안다.
나는 오늘 꼭 떠나야 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파혼하고 와.’
웃는 얼굴이었지만 에던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으니까. 당장 제국을 뜨지 않으면 제널드는 진짜 에던에게 밟혀 죽을지도 몰라.
여러모로 나에겐 정말 시간이 없었다.
“헉, 허억.”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멈춰 섰다.
제대로 쫓아갈 새도 없이 두 사람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마에 손을 얹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부의 시골과 전혀 다른 복잡한 낯선 수도의 길은 제널드가 어디로 갔을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때였다.
갈 곳을 잃어 방황하던 내 시야에 아주 크고 넓은 갈색 건물이 들어왔다.
제국의 커다란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시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