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31)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31화. 처음부터 없었던 일(31/92)
#31화. 처음부터 없었던 일
2024.05.31.
휘날리는 깃발을 얼마간 보고 있자니 익숙한 문양이 보였다. 약혼 증서에 찍힌 시청의 도장과 같은 월계수 잎을 물고 있는 독수리 문양이었다.
“분명 제널드가 시청에서 약혼 증서를 받았다고 했지?”
나는 뒤돌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라진 제널드가 혹여나 다시 돌아왔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품었지만 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달리느라 체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쫓아가기에도 힘든 상황이었다. 숨을 돌릴 타이밍이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멍하니 시간 낭비를 할 수는 없었다. 에던이 금방이라도 쫓아와서 제널드의 뒷덜미를 붙잡을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어차피 한 번쯤 들를 생각이었으니까 잘됐어. 여기까지 온 김에 시민권에 대해 자세히 알아 둬야지.”
나는 시청 건물로 들어섰다. 그때는 다리가 낫지 않아서 제널드에게 부탁했지만, 앞으로 타국으로 가게 되면 여러 가지로 내가 알아 두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네?”
심장이 쿵 떨어졌다.
머리를 곱게 뒤로 땋아 묶은 여직원이 창구 너머로 내가 보여 주었던 약혼 증서를 다시 내밀었다.
“이걸 누가 준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위조 서류예요.”
손이 달달 떨렸다.
위조 서류라니. 이게 가짜라고?
나는 그녀가 돌려준 약혼 증서를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몇 달 동안 월급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소중히 간직했던 종이인데. 혹 꺼내 보았다가 훼손이라도 될까 봐 고이 접어 서랍에 둔 상태로 거의 보관만 했었다.
“자, 잘 확인하신 거 맞아요?”
“네. 몇 번이나 확인했고, 중요한 보증인 란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다시 한 번만 잘 봐 주세요. 여기 제국 표식이 있는 도장도 붉게 찍혀 있잖아요. 그리고…….”
“위조예요. 애초에 시청에서는 약혼 증서를 그런 식으로 주지 않아요.”
난 더 이상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제널드와 내 이름이 적힌, 약혼을 인정한다는 글이 적힌 종이 한 장. 제널드는 분명 시청에서 발급받은 거라고 했는데…….
싸하게 핏기가 사라져 가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여직원의 눈빛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제널드가 거짓말을 한 거야.’
제널드가 날 속였다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 동안이나 내가 속고 있었다고?
피가 거꾸로 솟는 배신감에 입술을 악물자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양손으로 바들바들 붙잡고 있던 가짜 약혼 증서가 허무하게 구겨졌다.
시야가 흐려지고 그대로 몸이 굳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인 날짜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거기 적힌 남자랑은 그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예요?”
“……네.”
“이건 그 남자가 직접 준 건가요?”
“…….”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다 기어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여직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런 위조 서류 가져온 거 아가씨가 처음 아니에요. 소식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얼마 전까지 혼인빙자 사기가 여러 건 있었어요. 범인이 잡힌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사기꾼들이 있었나 보네요. 혹시 돈도 줬어요?”
돈을 준 적은 없다고 무심코 고개를 내저으려던 나는 그대로 다시 굳었다.
아니. 있었지.
손에 들린 이 약혼 증서를 받기 위해서 거금은 아니지만 2달간 모았던 적지 않은 돈을 내줬었다.
작게 한숨을 흘린 여직원은 내가 안타깝다는 듯 조심히, 그러나 확실하고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충격받았을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건 증거니까 구기지 말고 잘 들고 가서 보안관에게 신고해요. 여기서는 도울 수 있는 게 없어요. 그게 위조된 가짜 서류라는 걸 확인시켜 주는 것밖에는.”
그제야 잊고 있었던 우체부 아저씨 말이 떠올랐다.
과일 가게 아저씨 딸이 수도에서 혼인빙자 사기를 당했다고 했었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렸다고.
하지만 내가 제널드를 만났을 때는 돈이 없었던 상태다. 사기꾼이라면 돈이 있는 상대를 골랐어야 할 거 아냐?
혼란스럽다.
대체 제널드는 무슨 생각으로 날 속인 거지? 어디서부터 거짓말인 거야?
분노로 파르르 손이 떨렸다. 손끝에 잔뜩 힘을 주고 약혼 증서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그대로 돌아서려다 여직원에게 물었다.
“저기…… 그러면 혹시 타국의 시민권을 얻을 때 필요한 조건이 어떤 게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예? 시민권이요?”
“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여직원은 당황했는지 눈을 키웠지만, 곧 설명을 해 주었다.
“현재 제국에서 얻을 수 있는 타국의 시민권은 서왕국 밖에 없어요. 단순한 여행은 6개월 내라면 어느 나라든 가능하지만 완전히 이주하실 생각이라면 서왕국의 시민권을 돈 주고 사는 방법밖에는 없네요. 혹은 그 나라 남자와 결혼하는 방법도 있고요.”
“그, 그게 다예요?”
“기본적으로 범죄 기록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아가씨에게 그런 과거가 있어 보이진 않으니…… 그 외에 다른 조건은 없어요.”
그럼 시민권을 받기 위해서 약혼이 필요하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다는 거잖아!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직원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도망치듯 뛰어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와 좌우를 살폈다.
‘제널드 이 망할 자식! 사기를 쳐? 잡히면 가만 안 둬!’
난 무작정 제널드를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죽기 전에도 나는 운이 없는 편이었다.
성인이 되어 돈을 벌기 시작 이후로부터 가족들은 날 이용해 돈을 뜯어내기 바빴고, 회사에서도 귀찮은 일이나 사고 처리는 모두 내게 맡겨 두곤 했다.
그래도 버텨야 했다. 그런 무미건조한 삶이었지만 출퇴근하는 지하철이나 자기 전 이불속에서 소설을 보는 소소한 재미 정도는 있었으니까. 살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거라는 생각도 했고.
마지막이 차 사고였을 줄은 몰랐지만.
게다가 하필이면 엑스트라 중에서도 정말 하찮기 짝이 없는 라티에나 메리골드가 될 줄은 더더욱 몰랐지만 말이다.
운 좋게 마차에서 뛰어내려 생명은 건졌지만 다리를 다쳐 나무 아래에 숨어 있을 때는 정말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제널드가 아니었더라면 그때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었다.
딱 좋은 타이밍에, 내가 가장 나약해진 순간에 다가와 준 제널드는 처음으로 내게 이유 없이 잘해 준 다정한 사람이었다. 보답 없이 내게 이렇게 잘해 준 사람이 있었나. 되돌아볼 정도로 제널드는 너무 착했다. 그러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제널드에게 마음을 열었고 많은 것을 기대게 된 것은.
감정에 대한 정리를 하자면 호감, 좋은 사람. 딱 그 정도.
비록 사랑은 아니었지만, 만약 우리가 약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평생을 좋은 친구로 지낼 거라고 생각했을 만큼 나는 그를 믿고 있었다.
그랬다.
그랬는데……. 그게 전부 사기였다는 거잖아.
“……망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제널드를 찾아 한참이나 달리던 나는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크게 내뱉으며 몸을 세웠다.
넓고 복잡한 수도 한가운데에서 이런 식으로 제널드를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돌고 돌아 다시 도착한 시계탑 앞에 서자 바람이 한 바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며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제널드가 기다리라고 했던 여관으로 향했다.
***
“라티에나!”
제널드가 온 건 내가 차마 여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서 두어 시간쯤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건물 사이로 해가 지며 온도시가 노을로 물든 때였다.
여관 앞에서 쪼그려 앉아 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널드를 마주 보았다.
“어디 갔다 와?”
“미안해! 갑자기 놀랐지? 그런데 왜 여기 나와 있어? 들어가 있지. 나 여관 사장이랑 친군데!”
제널드는 아까 날 밀치고 갔던 일은 안중에도 없는 듯 해맑게 날 보고 웃었다.
나는 대답 없이 싸늘한 눈으로 제널드를 바라보았다.
“화 많이 났어? 표정 되게 무섭다. 괜찮아. 그래도 예뻐.”
“…….”
여전히 내가 말이 없자 제널드는 팔을 뻗어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나 너 이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봐. 미안해, 진짜. 정말! 너무 그러지 마. 나 곧 생일이잖아. 응? 일단 진정하고…….”
순한 강아지 같은 눈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내 손에 깍지를 꼈다가 풀었다가 손을 쓸었다가 잡았다가 난리도 아니다.
생일 같은 소리 하네.
나는 제널드의 팔을 온 힘을 다해 거칠게 뿌리쳤다. 에던과 달리 제널드의 팔은 허무하게 떨어져 나갔다.
“라티에나……?”
몇 시간 사이에 확연히 달라진 내 태도에 제널드가 눈을 휘둥그레 키웠다.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럴 만도 하지. 제널드 앞에서 난 늘 얌전한 요조숙녀인 척하고 있었으니까.
“야.”
나는 에던을 흉내 내는 것처럼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야…… 라고?”
당황한 제널드가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눈을 휘며 웃음 지었다.
“왜 그래, 라티에나. 아까 일 때문에 그래?”
나는 제널드에게 차가운 시선으로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온몸을 뒤덮은 배신감으로 인해 목소리가 떨리는 걸 꾹꾹 숨겨 가며.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날 네가 날 살려 준 건 사실이니까 한 번은 기회 줄게.”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나한테 할 말 없어?”
“응?”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제널드의 눈썹 끝이 움찔거렸다.
“기회 줄 때 지금 말해.”
나는 크나큰 선심을 쓰듯 말했다. 아니, 실제로도 당장 이 녀석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선심을 쓰고 있었다. 내 태도가 제법 당혹스러웠는지 제널드는 목덜미를 매만지며 순진한 말투로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진짜 왜 그래?”
끝까지 모른 척을 하시겠다.
“나 아까 시청에 다녀왔어.”
“……어?”
나는 가만히 제널드의 얼굴을 응시하며 차갑게 식은 눈으로 말을 이었다.
“약혼 증서가 위조라는데 어떻게 된 거야?”
부자연스럽게 목덜미를 매만지던 제널드가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