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32)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32화. 여유로운 그림자(32/92)
#32화. 여유로운 그림자
2024.06.01.
내내 머금고 있던 미소도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널드는 억울하다는 듯 불쑥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그래? 약혼 증서가 위조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정신없이 변명을 하는 제널드의 눈동자는 멀리 시계탑을 향해 있었다.
서류가 가짜라는 걸 안 이상, 제널드의 행동은 뻔히 눈에 보이고도 남았다.
신뢰가 깨져 버렸다.
더 이상 제널드는 내게 다정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돈을 뜯어내기 위해 내게 접근한 사람일 뿐.
시계탑을 바라보는 건 시청 업무가 끝났다는 걸 확인하려는 행동이었다.
내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간 확인을 마친 제널드는 붙잡은 내 손을 당당하게 이끌었다.
“가자. 지금 당장 시청에 같이 가. 내가 가서 확인시켜 줄게. 그럼 되잖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제널드의 말에는 힘이 붙었다.
“이게 가짜라고? 위조라고? 어떤 자식이 그딴 소리를! 시청에서 제대로 확인도 안 해 주고 이래도 되는 거야? 걱정 마. 라티에나. 내가 지금 당장 가서……!”
제널드는 다시 한번 내 손목을 붙잡았고 나는 잡힌 제널드의 팔을 힘껏 뿌리쳤다.
“놔.”
“라티에나…….”
“이거 놓으라고.”
힐스타인에게 붙잡혔던 손목의 통증이 남아 있었는데 제널드가 몇 번이나 거칠게 붙잡은 탓에 참기 힘든 아픔이 전해졌다.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던 얼굴이 구겨졌다.
제널드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우리가 약혼했을 때 말했던 것처럼 ‘좋아해.’라는 감정만 있었더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방금 배려 없이 붙잡은 내 손목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는 걸.
하지만 제널드는 단 한 번도 그걸 묻지 않았다. 왜 내 손에 붕대가 감겨 있는지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상처 입은 내 손을 자신이 얼마나 세게 잡고 있었는지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까 친구들한테 왜 나랑 약혼한 사이라고 말 못 했어?”
“그건…….”
“애초에 날 약혼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 아니야? 솔직히 말해. 처음부터 이러려고 접근했어?”
어리숙한 척 연기하는 제널드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자니 인내심이 바닥나 버렸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하…… 씨.”
제널드가 고개를 숙이고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투박한 손가락으로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비위 맞추기 더럽게 힘드네.”
다시금 고개를 든 제널드의 얼굴은 인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얼굴 좀 반반해졌다고 예뻐해 줬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냐?”
전혀 모르는 낯선 얼굴로 제널드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오더니 오른손으로 어깨를 강하게 쥐어 잡았다.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을 정도로 아팠지만 꾹 참고 제널드를 바라보았다.
“이거 놔.”
“못 놓겠다면. 어쩔 건데? 때리기라도 하게?”
“왜? 못 때릴 것 같아?”
진심으로 한 말인데 제널드는 그런 내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비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때려. 때리고 돈 내놔.”
“뭐?”
“너 돈 좀 모았잖아. 고성의 주인이 월급 많이 준다며. 나한테 속아서 억울해? 그럼 한 대 맞아 줄 테니까 그동안 모은 돈 내놓으라고.”
진짜 모습을 드러낸 제널드는 깡패나 다름없었다.
“넌 양심도 없어? 적어도 미안하다고 사과는 해야 할 거 아냐!”
돌변한 제널드는 더 이상 감출 마음이 없다는 듯 한쪽 입술을 끌어올려 비열하게 웃었다.
“푸핫. 내가 왜 너 따위에게 사과를 해? 라티에나. 너 어차피 나밖에 없잖아. 안 그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천애 고아인 주제에.”
이게 본성이었나? 제널드는 내 가슴에 사정없이 비수를 꽂기 시작했다.
“잘해 줄 때 알아서 기었어야지. 왜 서류를 확인하고 그래. 그렇게 내가 못 미더웠어? 다른 나라 가고 싶다며. 오랜만에 만나서 예뻐졌길래 좀 놀아주다 버리려 했더니. 뭘 그렇게 나서, 나서기를.”
“너…… 말 다했어?”
“다 못했지. 내 생일 선물 준다며. 당장 그동안 모은 돈 내놔. 원하는 대로 다른 나라로 보내 줄 테니까. 너 정도면 값비싸게 사겠다는 노인네들이 줄을 섰…….”
말이 끝나기도 전 나는 어깨를 붙잡히지 않은 반대쪽 팔로 제널드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힘은 부족했지만 제널드의 뺨은 긁힌 손톱자국이 남았다. 일부러 상처 내려고 손끝을 세워서 때렸기 때문이다.
순간 얼굴이 휘청하며 돌아갔지만, 제널드는 곧장 얼굴을 세워 날 노려보았다.
“이게 정신이 나갔나. 때리라니까 진짜 때리네. 너 미쳤어? 내가 그동안 너한테 해 준 게 얼만데!”
버럭 소리 지르는 제널드를 나는 최대한 눈을 부릅뜨고 할 말을 내뱉었다.
“네가 나한테 뭘 해 줬는데? 서류 위조해서 속여먹으려고 내 돈 뜯어 간 거 말고 뭐 해 줬어? 아. 들꽃 꺾어다 준 거? 아니면 조금 전에 꽃 사 주고 생색낸 거? 그것도 아니면 몇 달 동안이나 나 속여서 돈 뜯어낼 생각에 근황 물어보러 편지 보낸 거? 그중에 진짜 날 위해서 한 행동이 뭔데!”
“이게 진짜!”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제널드가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제널드! 당신 여기서 뭐 해!”
등 뒤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널드와 나는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몇 시간 전 앞치마를 입고 제널드를 뒤쫓던 여자가 서 있었다.
“젠장!”
제널드가 재빨리 내 어깨를 붙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갑자기 날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마치 여자에게 보란 듯이. 비열하고 교활한 더러운 쓰레기 눈빛을 싹 지워 내고, 내가 알았던 그 강아지 같은 눈매를 연기하며 말이다.
“여, 여보! 여기야!”
뭐?
제널드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순간 번개가 머리 위로 내려치는 기분이었다. 약혼 증서가 가짜라는 것을 들었던 것보다 방금 들은 폭언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여보라니. 누가? 이 여자가?
기가 막혀서 입을 떡 벌리고 제널드와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여자는 제널드의 옆에 서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제널드는 날 노려보는 여자에게 다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마침 잘 왔어! 이 여자가 내가 말한 바로 그 스토커야!”
방금까지 날 잡아 죽일 듯 굴더니 이번엔 스토커?
믿기지 않았지만 제널드의 손가락은 확실하게 나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가 말하는 스토커는 나였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충격과 배신과 당혹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나를 여자가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진짜 이 여자가 그 스토커란 말이야? 당신 이번에도 바람났는데 숨기는 거면 가만 안 둬.”
“바, 바람이라니! 아까도 말했잖아. 이 여자가 다짜고짜 날 찾아온 거라니까. 이것 봐! 내가 바람이 났으면 이렇게 뺨을 맞았겠어? 나 아파. 자기야 나 다쳤어.”
“……뭐? 뺨을 맞아?”
제널드가 내게 맞은 뺨을 여자에게 보여 주자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순식간에 매서워졌다.
“당신 뭐야.”
“네?”
“뭔데 남의 남편 스토커 짓으로도 모자라서 뺨을 때려? 나한테 맞고 싶어?”
“…….”
아니. 이게 정말로 무슨 상황이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로 여자와 그녀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제널드를 바라보았다.
제널드의 손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복부와 팔을 껴안듯 붙잡고 있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얹고 물었다.
“남편이라는 게 제널드를 말하는 거예요?”
“그럼 여기 또 다른 사람 있어?”
“그러니까…… 당신이 제널드랑 결혼한 사이라는 거냐고 묻는 거예요.”
“뭐 이런 뻔뻔한 여자가 다 있어? 보면 몰라? 우리가 지금 결혼 몇 년 찬데!”
“……몇 년 차인데요.”
“올해로 3년이야! 3년!”
삐- 귓속에서 소리가 울리며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억울한 건 나다. 뻔뻔한 건 내가 아니라 저 제널드 자식이다.
혼인빙자 사기에, 돈을 뜯어 내고, 날 다른 나라 노인네에게 팔아넘길 생각을 한 데다가, 결혼도 했었다고?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럼 나 몇 개월 동안 뭐 한 건데? 멀쩡히 아내가 살아 있는 유부남에게 속았던 거라고? 심지어 약혼한 줄 알고 편지도 보내고 답장도 받고 그랬다고? 내가? 그러다 이젠 스토커가 되어 있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순간에 에던이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파혼하고 와.’
파혼이 아니라, 애초에 약혼 따위 없었던 일이잖아.
제널드에게 짓눌렸던 어깨가 아파 왔다. 그 아래로 손목이 욱신거렸다.
고통이 느껴지자 잊고 있던 내 암울한 처지가 싸늘한 현실로 다가왔다.
“야! 너 내 말 듣고 있어? 스토커 주제에 왜 남의 남편 얼굴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냐고 묻잖아! 너 이거 상해죄야. 절대 용서 못 해! 고소당할 준비해!”
제널드의 아내가 눈앞에서 고래고래 목이 찢어지라 소리치고 있었지만 나는 대답할 의지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모든 게 그냥 원망스러웠다. 이렇게까지 나를 속인 제널드도, 순진하게 제널드를 믿었던 멍청한 나도.
‘이제 다 틀렸어.’
상황이 이렇게 되자 너무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당한 것도 치욕스럽고 서러웠지만 제널드 따위 시정 직원 말대로 신고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짜증과 화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목 끝까지 차올랐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간절했고,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드디어 도망칠 수 있겠다고.
하지만 또, 보란 듯이 실패했다. 심지어 오늘이 가장 최악이다.
지금껏 몇 번이고 도망에 실패했던 상황들이, 그때마다 겁먹고 무서웠던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힐스타인에게 잡혔던 손목도 여전히 욱신거렸고, 아이비의 예상치 못한 행보에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가장 심각한 건 내게 집착하는 에던의 태도였다. 지금 상황으로는 절대 날 놓아주지 않을 거야, 에던은.
대체 어떻게 해야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거야? 감정이 무너지니 출구 없는 캄캄한 미로 속에 갇혀 버린 기분이었다.
시야가 흐릿해질 정도로 가득 찬 눈물이 뺨을 타고 후둑 떨어졌다.
그리고 그때였다. 등 뒤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급하지 않게 다가오는 여유로운 걸음걸이. 그럼에도 빠르게 다가오는 남자의 커다란 체격을 보여 주는 그림자가 바닥에 비쳐 시야에 들어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왜 애를 울려.”
에던의 긴 다리가 허공에 올라가더니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제널드의 배를 사정없이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