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34)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34화. 버릴 거야(34/92)
#34화. 버릴 거야
2024.06.03.
그 말에 에던은 손을 올려 내 머리를 위로하듯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랬어?”
잘 말했다는 듯,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
“네.”
내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에던은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려 예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서 빙글, 몸을 돌리더니 제널드를 보고 턱을 치켜세우더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널드 요한?”
“에…… 어? 예?”
바보 같은 제널드. 겁에 질려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름은 진짜였던 건가?”
“아, 아니. 뭐요?”
“밟아 죽일까 했는데 마침 잘됐네.”
가볍게 툭툭 말을 던지고 있었지만 에던의 등에서 살기가 전해졌다.
“유언은?”
“유, 유언이라니…….”
장난이 아니라 순간 제널드가 진짜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제널드도 본능적으로 그걸 느꼈는지 손사래를 치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 와중에 눈동자를 굴려 날 바라보았지만 나는 차갑게 외면했다. 대화할 가치도 없는 남자와 더 이상 말도 섞기 싫었다.
얼음장처럼 싸늘한 내 시선에 제널드도 상황 파악을 했는지 에던을 향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게 더 어처구니가 없다. 내 앞에서는 온갖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더니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는 이렇게 나오다니.
“저, 저기 잠깐만. 오, 오해예요. 잠깐만 내 얘기도 좀 들어 주…….”
겁에 질린 표정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게 유언이야?”
“라, 라티에나! 오해야! 내가 잘못했어!”
그제야 제널드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나왔다. 하지만 난 이미 제널드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에던은 느릿느릿 제널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루벤. 라티 데려가.”
말이 끝나자마자 어디선가 루벤이 나타났다.
“가시죠.”
나는 미련 없이 그대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두어 발자국 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라, 라티에나? 나랑 얘기 좀 해! 제발!”
제널드가 한 줄기 빛을 발견한 듯 돌아선 내 모습에 희망을 가득 담은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제널드.”
“어! 응! 나야!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이제서야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는 제널드를 향해 나는 한쪽 입꼬리를 비열하게 끌어올렸다.
“엿 먹어, 이 나쁜 새끼야.”
***
다시, 또 고성으로 돌아와 버렸다.
익숙한 방문 앞에 서서 차마 손잡이를 잡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복도의 커다란 창을 바라보니 어느덧 달이 차오른 한밤중이었다.
평소라면 혼자였을 시간이었는데 에던은 아직 오지 않았고 나는 루벤과 함께였다.
“사람을 정말로 밟아서 처리하진 않으셨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벤은 한숨을 푹푹 내쉬는 날 향해 위로인 듯한 말을 건네고 포털로 돌아갔다.
표정이 좋지 않은 내가 제널드를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사기 정도로 죽는 건 너무 한다고 생각을 해서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난 제널드 걱정을 하고 있지 않다.
루벤의 위로의 말은 고마웠지만 나도 알고 있다.
에던이 이런 일로 제널드를 죽이진 않을 거라는 걸.
뭐…… 머지않은 미래에 아이비 때문에 학살자가 된다 한들 아직은 아니니까 말이다.
지금 내가 아는 에던은 또라이긴 해도 인간미 정도는 있었다.
그리고 에던이 제널드를 없앨 거라 했던 건 내가 제널드와 파혼하지 않았을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파혼이고 나발이고 그냥 사기당한 건데.”
결국 또 여길 벗어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됐다니.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풀썩,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말끔히 정리해두었던 침대 시트 위로 몸을 내던졌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상황에서 침대가 무척 포근하게 느껴졌다.
피곤한 하루를 보낸 탓이겠지. 행복이란 건 이렇게나 소소하다. 정말.
많은 욕심 부리려던 거 아닌데. 미라로 죽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진짜 어쩌라는 거야! 나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 잡았다.
“윽……!”
힘을 준 손목이 이마에 닿자 잊고 있었던 통증이 밀려왔다.
느슨하게 풀어져 엉망이 된 손목의 붕대가 보였다. 고개를 돌리자 에던이 올려두었던 붕대와 연고가 눈에 띠었다.
“정신 차리자.”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샤워를 마치고 돌아왔다.
다친 손목에 붕대를 감고,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고 있으니 에던이 자꾸만 생각났다.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거기서 바로 북부로 갔을까? 제널드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괘씸하니 감옥에 50년 정도 처박아 달라고 부탁할 걸 그랬나. 그렇게 말해도 에던은 들어줬을 것 같은데.
괜히 붕대를 만지작거렸다.
제널드가 아닌 사람에게 의지한 적은 처음이다. 그게 에던이 될지는 몰랐지만.
에던은 확실히 내 편이 되어 주었다. 다정하고, 따듯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에던의 하녀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의지가 되었다.
내내 도망칠 생각에 빠져있던 나였는데,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 순간 캄캄한 미로 속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에던이 와 줘서였다.
가장 도망치고 싶었던 사람의 품이, 유일하게 숨을 곳이었다.
‘그랬어?’
모조리 일러바친 내 말에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던 미소. 다정한 목소리.
언제부터 에던이 나한테 그런 식으로 웃었지?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봤다.
잘은 모르겠다. 에던은 계속 무서웠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지난밤에는 확실하게 그렇게 웃었다.
자꾸만 피식피식 웃던 에던의 예쁜 얼굴. 그 뜨거운 시선이 닿았던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넌 아무 데도 못 가. 내가 갖기로 결정했거든.’
어째서 그런 소릴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에던이 그런 말을 내뱉어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었다.
‘덮쳐 버리고 싶으니까.’
그런 말도 아이비에게 했어야 맞다. 왜 나한테 집착하는 거지?
이런저런 의문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기억은 한 곳에서 멈췄다.
힐스타인과 에던이 만났던 순간이었다.
‘남의 것을 훔쳐 가려 하면 안 되지 않겠나.’
마치 내가 자기 소유물인 것처럼 말했었지. 그러니까 나도 그때는 에던이 나를 자신의 소유물 정도로 생각해서 집착하는 줄 알았다. 가끔 사이코들은 사람을 물건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제 물건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강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날 그런 소유물로만 본다기에는 앞뒤가 좀 이상하다.
에던은 날 아주 소중히 대해 주니까.
말을 툴툴거려도 이곳을 떠나는 것만 아니면 결국 하고 싶은 대로 해 주고 딱히 제지하는 것도 없다.
물론 내가 온 뒤로 두통이 가라앉았다고 하니 그것 때문에 집착하는 걸 수도 있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후추 정도는 그냥 본인이 구해다 먹으면 되는 일이잖아.
“이번에야말로 도망에 성공할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계획에 실패했다.
젖은 머리가 어느 정도 말라 갈 때쯤 나는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직원이 분명 돈으로 서왕국의 시민권을 살 수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가장 중요하게 챙겨야 할 건 바로 돈밖에 없어.
나는 통장이 든 가방을 손에 쥐고 방을 나섰다.
제널드와 이야기하던 중에 에던이 내가 제국을 온전히 떠날 생각을 했었다는 걸 눈치챘을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에던에게 있어서는 푼돈이나 다름없는 내 돈을 함부로 빼앗거나 하진 않겠지만. 주의해서 나쁠 건 없지.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 성벽 아래로 향했다. 힐스타인인 부숴 놓은 성 주변으로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밤중이지만 날이 맑았고 구름 한 점 없이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어서 시야가 트여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성벽 구석 작게 구멍이 난 곳을 찾아냈다.
“여기면 되겠어.”
나는 통장이 든 가방을 구멍에 넣고 부서진 성벽에서 돌을 가져다가 꼭꼭 눌러 감췄다.
이리저리 훑어봐도 얼핏 봐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완벽한 은신이었다.
좋아. 일단 가장 믿을 수 있는 내 전 재산을 잘 숨겼다.
그리고 남은 문제는…….
고개를 들어 부서진 성벽 사이로 자리 잡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전과 달리 마음만 먹으면 쉽게 넘어갈 수도 있어 보이는 벽.
하지만 지금 이런 식으로 도망가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문제의 원인이 있으니까.
“아이비 바이올렛…….”
그녀가 날 찾고 있다.
갑자기 힐스타인이 여기까지 쳐들어왔을 때는 에던 덕분에 잘 넘어갔지만 다음에 또 그렇게 운 좋게 구해질 거라는 보장은 없다.
힐스타인은 내가 성녀 후보였다는 걸 알고 있다.
에던이 그때 힐스타인을 끌고 가서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곧 알게 되겠지.
후추가 아니라 내가 치유력을 썼었다는 걸.
아니면…….
툭, 툭. 나는 괜히 바닥에 놓인 돌멩이 부스러기를 발로 찼다.
만에 하나, 정말 어이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에던은…….
‘내가 성녀 후보라는 걸 알고도 모른 척했을 수도 있어.’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가설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쉬워진다.
내게 집착하는 이유도 이해가 가니까.
하지만 그건 에던이 아이비의 치유력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몰라서 일어난 일이다.
알지 못하니까 나한테 집착하고 있는 거야.
아이비의 치유력을 알게 되면 그래서 내가 정말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면, 미련 없이 날 버릴 거야.
힐스타인이 날 아이비에게 끌고 가려 했던 것처럼 에던도 기꺼이 날 아이비에게 데려다주겠지.
날 찾는 아이비를 위해,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에던은 절대 날 책임져 주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아이비의 치유력은 그 어떤 힘보다 권력이니까. 마지막에는 그녀를 선택하게 되어 있어.
결국 난 이대로 있어도 죽고, 도망도 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지금껏 계획해 왔던 것과 방법은 다르지만, 성공한다면 더 이상 도망 따위 다니지 않아도 될 거야.
잘만하면 그 어떤 것보다 손쉽게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제널드에게 받았던 편지도 전부 없애야지.”
망할. 갈기갈기 찢어서 전부 불태워 버릴 거야!
순간 앞으로 당할 일에 대한 걱정으로 잊고 있었는데 다시 떠오른 제널드의 얼굴 때문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아니. 불쾌한 정도가 아니다. 내가 이곳에서 평온한 미래를 꿈꾸며 일하고 있을 때, 제널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끔찍했다.
돈을 뜯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날 팔아넘길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니.
울컥, 목 끝까지 서러움이 차올랐다.
원래라면 이 시간에 난 제국을 벗어났어야 했는데.
“뭐해?”
깜짝이야!
발소리도 없이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유가 뭐든 한밤중에 에던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심장이 떨어지는 충격이 오는 것 같다.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 역시 에던이 서 있었다.
평소라면 이 시간의 에던은 피를 잔뜩 묻히고 서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아까 그 차림 그대로 멀끔했다.
“공주님, 여기서 뭐 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