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36)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36화. 대성녀의 치유력(36/92)
#36화. 대성녀의 치유력
2024.06.05.
“대성녀를 만나서 뭘 할 건데?”
“더 이상 날 찾지 말라고 할 거예요. 솔직히 아이비가 왜 날 찾는지도 모르겠고…….”
“두 사람, 가족 같은 친구가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아이비 얘기를 꺼낸 건 오늘이 처음인데 조금 전 대화 어디에도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왜 그런 생각을 해요?”
“그냥. 대성녀가 굳이 널 찾는다니까 생각해 본 것뿐이야.”
“전혀요. 고아원에서 같이 자라긴 했지만 가족은커녕 애초에 우린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에요. 오히려…….”
원작 속에서 아이비와 라티에나는 거의 남남 같은 관계다. 용건이 있어야만 대화를 나누는 정도의 사이.
신전으로 갔더라면 미라가 되어 죽기 전까지 속내를 나누는 친구라도 되었겠지만 내가 원작을 벗어났으니 딱 거기까지의 사이야. 그래서 더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무튼! 부탁해요. 날 아이비와 만나게 해 주면…….”
난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에던이 그냥은 도와줄 것 같지 않아서 머뭇거리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들었다.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으니까.
나와 눈이 마주친 에던의 미간이 슬쩍 움찔거렸다.
“잘해 줄게요.”
순간 눈을 키운 에던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서 있더니 큭- 소리 내어 웃었다.
지금이 웃을 타이밍인가.
“뭘 얼마나 잘해 줄 건데.”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 볼게요.”
고개를 숙여 꽤 한참 웃던 에던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얼굴을 들었다. 아직 방법도 말 안 했는데 대체 뭘 상상하는 건지 기분 좋은 듯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나쁘지 않네.”
그러니까 뭐가?
***
제국 수도의 동쪽, 신전 리베던.
드나드는 존재라고는 작은 동물밖에 없는 데다 빛도 잘 들지 않아 어두운 암석 사이 아주 구석진 곳으로 누군가 다가갔다.
에던이 심어 둔 심복인 사제 맥시엄이었다.
사제복 밖으로 로드를 뒤집어쓴 맥시엄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고 곧 다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역시 맥시엄과 같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안으로 슬쩍 사제복이 보였다.
주변을 살핀 맥시엄은 그를 빛이 완전히 들지 않는 제 쪽으로 얼른 끌어당겼다.
로브의 후드를 벗자 맥시엄의 얼굴이 드러나고, 상대도 후드를 벗었다.
“콜! 왜 이렇게 늦었어?”
채근하는 맥시엄을 향해 창백한 낯빛의 사제가 콜이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또야.”
콜은 오는 도중 무척 불쾌한 일이 있는 듯했는데, 익숙한 상황이라는 듯 맥시엄이 한숨을 쉬었다.
“또? 이번엔 몇 명인데?”
“네 명.”
“네 명씩이나?”
“이해가 안 돼. 어제저녁까지 분명 멀쩡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봤단 말이지. 그런데 아침에 미라가 되어 있었다는데 말이 돼? 맥시엄 넌 이해가 가냐고.”
맥시엄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걸 제게 물어도 알 리가 없지 않나.
그는 서고 담당이었으니까 말이다.
신전 뒤를 채우고 있는 거대한 암석만큼이나 리베던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그만큼 관리할 곳이 많았고 할 일도 넘쳐났다. 청소부만 해도 수십 명이었으니까.
특히 이전 대성녀가 갑작스럽게 죽어 버린 후 신전은 특별 관리에 들어갔다.
이능력자들을 위해 성녀 후보들을 전보다 더 철저히 보호했고, 특히 대성녀가 나타난 이후로 신전은 더욱더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이곳에서 머물며 먹고 자는 사제들의 수만 해도 수백 명이었다.
그중에 콜은 치유력 체크 담당 부서였다.
치유력을 감지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이용해 매일 아침마다 성녀 후보들의 상태를 체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또 세 명의 성녀가 죽어 나간 것이다.
심지어 그녀들은 전날까지 충분한 치유력을 가지고 있던 상태였다.
힘이 부족한 성녀들은 목숨에 위협이 될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황이 되면 힘의 크기를 체크하는 아티팩트의 빛이 어두운 회색을 띠곤 했다. 하지만 콜의 기억 속에 그녀들의 빛은 밝진 않았어도 제대로 연한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정말로 이상하단 말이야.”
아침부터 미라를 목격했으니 심란하긴 할 테지만 맥시엄이 콜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빈번히 일어나는 일에 의구심을 가질 순 있지만 성녀 후보들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나.
거의 서고에 처박히다시피 지내는 맥시엄에게는 더욱 남의 일이었다. 솔직히 에던 대공에게 질문을 듣기 전까지 맥시엄은 이 일에 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치유력이 고갈되어 죽는 나약한 성녀들이었을 뿐이다.
“잊어버려. 한두 번도 아니잖아. 그래도 미라로 원인을 분석해 보고 있다니까 다행 아니야?”
“뭐가 나와야 다행인 거지. 미라에서 아무것도 안 나온다는 게 더 수상해. 젠장! 하필 거길 지나가다 봐서! 오늘 아침밥 먹긴 글렀어! 적응이 되지 않아. 토할 것 같다고!”
미라가 떠오른 듯 콜은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맥시엄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용건을 꺼냈다.
“그보다 물건은?”
콜은 구역질을 참아 내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 가슴 안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여기.”
맥시엄이 에던에게 가져다줄 대성녀의 물약이었다.
“한 병뿐이야?”
“요즘 감시가 심해. 그리고…….”
“왜?”
“대성녀님이 물약을 만들기를 꺼리셔.”
“뭐? 어째서?”
“몰라. 컨디션이 좋지 않다나.”
컨디션이? 맥시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며 손에 건네받은 물약을 내려다보았다.
그늘 속에서도 붉은 치유력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자.”
순도 백 퍼센트 물약임을 확인한 맥시엄이 콜에게 지폐를 몇 장을 건넸다. 에던은 맥시엄이 직접 물약을 훔쳐 오는 줄 알겠지만 아니다. 물약 보관 장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맥시엄도 이런 식으로 구입해서 사는 것이다.
돈을 받고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쑤셔 넣은 콜이 후드를 뒤집어쓰려다 말고 맥시엄의 어깨를 턱 붙잡았다.
“뭐, 뭐야. 왜?”
“맥시엄……. 나, 소…… 속이 안 좋…… 우우욱!”
“으악!”
콜의 입에서 뜨거운 액체가 와락 터져 나왔다.
한바탕 구토를 쏟아 낸 콜이 퀭한 눈으로 맥시엄을 바라보았다.
“맥시엄, 부탁 하나만 하자……. 나 대신 대성녀님 치유력 체크 좀 해 줘.”
이렇게 비위가 안 좋은 녀석이 매번 성녀 후보들 미라를 발견하다니. 재수도 없지.
돌아가서 서고의 책을 더 읽어 볼 생각이었지만 맥시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콜 녀석에게 신세를 지고 있으니 도와줘야지. 아이비 대성녀도 관찰해 볼 겸 말이다. 에던 대공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원하는 것 같으니 뭐라도 전해 주면 돈이 될 것이다.
물론 돈이 목적만은 아니었다.
제국은 황후 헨젤라가 자리에 오른 이후 정치 싸움에 휘말려 망한 가문이 여럿 있었는데 맥시엄의 가문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가능하면 에던 대공을 돕고 싶었다.
황후가 미워하는 사생아 황자를 돕는 것은 힘이 없는 맥시엄으로서는 황후에 대한 조금의 복수심이기도 했다. 킬리언 황태자보다 에던 대공이 더 잘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맥시엄은 주머니 깊은 곳에 물약을 집어넣고 대성녀가 머무는 건물로 향했다.
“대성녀님. 사제께서 오셨습니다.”
쿠션 위에 올려진 아티팩트를 양손으로 받쳐 든 맥시엄이 문 앞에 서자 아이비의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그의 방문을 알렸다.
그러자 별다른 대답 없이 안쪽에서 다른 하녀가 문을 열었다.
“대성녀님 들어가겠습니다.”
맥시엄은 조금 긴장된 상태로 아이비의 방으로 들어섰다.
“좋은 아침이에요. 사제님. 오늘은 다른 분이 오셨네요.”
큰 창가에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그대로 쐬고 있던 아이비가 환히 웃으며 그를 맞았다. 워낙 아름다운 외모인 데다가 연분홍색 드레스까지 입고 있어서 화사해 보였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더니, 엄청 좋아 보이는데?
콜이 했던 말과 너무 모순된 모습에 맥시엄은 이질감을 느꼈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맥시엄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아티팩트를 내밀었다.
“그럼 시작해 주시죠.”
“네.”
싱긋 웃는 아이비가 아티팩트에 손을 대자 곧 강렬한 빛이 아티팩트에서 뿜어져 나왔다.
주위에 서 있던 하녀들이 탄성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맥시엄은 아무도 모르게 쿠션을 붙잡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이게 정말로 대성녀의 치유력이라고……?’
맥시엄이 아이비 대성녀의 힘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서고의 담당이었으니 평소에 다른 성녀들의 치유력을 관찰한 적도 없었다. 에던 대공에게 보고했던 대성녀 아이비의 힘과 그녀의 친구 라티에나 메리골드에 대한 측정도 다른 사제에게 값을 주고 알아서 얻어낸 정보였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서고의 책을 많이 읽고 습득해 수많은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맥시엄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아티팩트에서 붉고 타오르는 듯한 반짝이는 치유력이 솟아오르고는 있었지만, 기록에 의하면 대성녀의 힘은 침실 정도의 공간은 가득 채우고도 남을 빛이어야 했다. 하지만.
‘약해.’
정말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건가?
아니.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해서 힘의 차이가 이 정도까지 날 리가 없다. 찝찝한 기분으로 맥시엄은 대성녀의 방을 나왔다.
웃으며 나오긴 했지만 뒤를 돌아서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자신이 봤을 때 아이비 대성녀의 얼굴이 해맑았다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객관적으로 따져 봤을 때, 아무리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한들 대성녀의 힘은 이보다 훨씬 크고 밝게 빛났어야 했다. 괜한 의심이 아니라 증인이 있었다.
‘엄청나게 강한 빛을 냈어. 아티팩트에서 뿜어낸 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제대로 뜰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했지.’
아이비 대성녀와 라티에나 메리골드를 데리러 갔을 때 치유력을 확인한 사제가 직접 그렇게 설명했다.
그렇다면…… 그때보다 약해진 거라고?
아니. 그것도 납득이 되질 않았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대성녀는 힘을 거의 쓰고 있지 않지 않다.
고작해야 세 명 정도.
물론 그 세 명에게 부어 주는 치유력은 만만치 않겠지만 그들이 매번 많은 치유를 원하는 건 아니니까.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말이 맞지 않았다.
맥시엄은 보고를 위해 대사제의 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 몸을 추스르고 온 콜이 서 있었다.
보고까지 대리를 시킬 수 없으니 눈 밑이 퀭한 상태로 애써 온 것이다.
맥시엄은 콜의 옷소매를 끌어당겨 복도 구석으로 향했다. 몸 안에 든 것을 전부 토해 낸 콜이 창백한 얼굴로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왜, 왜 그래? 뭐 문제 있었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콜. 평소 대성녀님의 빛이 이 정도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