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38)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38화. 만져(38/92)
#38화. 만져
2024.06.07.
아이비는 마음이 선한 캐릭터였고 제국을 위해서, 혹은 괴로워하는 남주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19금 소설답게 나중으로 갈수록 아이비는 충분히 그런 시간을 즐겼고, 만족해했다. 남주들뿐 아니라 아이비도 충분히 쾌락을 느꼈으니까. 그러니까 다같살로 끝날 수 있었던 거다.
에던만 빼고.
그땐 몰랐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저 잘난 얼굴로 주위에 그 어떤 여자도 두지 않았던 건 지난번에 말했던 그 트라우마 때문이었나 싶다.
하지만 나한테는 분명…….
모순적인 에던의 태도를 떠올리자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더 이상하다.
치유력 때문이라고는 해도 나는 아이비가 아닌데, 별것 아닌 치유력밖에 없는 내게 그 정도까지 유혹할 수 있는 건가? 이건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아악!”
에던의 그 야릇한 눈빛과 탐욕스러운 손길이 떠올라 버렸다.
아무튼 나는 안 돼. 절대 안 되지. 응. 못 해. 몇 번은 생각해봐도 안 돼.
보는 거랑 내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잖아? 왜냐면 사랑이 없으니까! 치유력 때문에 내 몸을 내어 줘야 한다는 건 억울하단 말이야!
러브가 빠졌잖아! 러브가! 뭐, 이제 와서 러브 따위 아무짝에도 소용없지만. 그리고 맹세하는데 무조건적인 다정함도 소용없다.
다정한 남자 믿었다가 사기당한 거 아냐. 빠직, 제널드가 떠올라 버렸다.
“망할.”
두 번 다시 내 인생에 다정남은 없어. 무조건 경계할 거야.
전생에도 이런 흑역사는 없었는데, 그 자식이 나를 스토커에 멍청이로 만들었어. 나는 있는 힘껏 얼굴을 구겼다.
“라티 공주.”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뒤에서 에던이 날 불렀다. 돌아보니 곁이 아닌 현관 앞에서 날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저녁이었다.
“라티로 부르든지 공주로 부르든지 둘 중 하나만 해요.”
두 개를 합쳐 부르는 건 반칙이잖아. 오글거려서 소름 끼치니까 이름만 불러라는 의미였다. 내가 툴툴거리자 에던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그럼 공주.”
으히익! 진짜 싫어.
“이리 와.”
말 한마디에 움직여야 하는 신세라니.
오만방자한 태도에 마음 같아서는 네가 와, 하고 싶지만 철저한 계급 사회에다 에던은 내 주인이 아닌가.
어차피 난 에던을 거역할 수 없기도 하고.
“보통…… 이름 쪽을 고르지 않나요? 왜 굳이 그쪽을 고르는 거예요?”
“네가 창피해하니까 재밌잖아.”
덥석, 에던이 내 손을 잡았다. 이제 손목을 붙잡는 것 정도는 꽤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번엔 더 나아가 손이었다. 그래서 그만 움찔하고 말았다.
힐스타인에게 잡혔던 손목은 이제 다 나았는데.
“지난번에도 생각했지만 넌 손이 왜 이렇게 작아?”
“…….”
인간적으로 너 손이 크다고는 생각 안 하니? 사람 머리를 공 잡듯이 쥐어 잡아 놓고선.
부서질 것 같다는 이상한 소리나 해 대면서.
배 안 고프다면서 저녁 시간 놓쳤다고 시비 거는 건가.
난 에던을 가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런데 이 남자 왜 이렇게 잘 차려입은 거야? 열린 현관문 사이로 슬쩍 집 안에 걸린 시계를 훔 쳐봤다.
저녁 7시가 막 넘어가는 시간. 두어 시간 후면 무너지지 않는 벽에 갈 시간이다.
평소라면 기사복 차림을 하고 있을 시간인데…….
에던은 금장이 달린 제복 재킷을 걸치고 깔끔한 블랙 셔츠에 화이트 크라바트까지 하고 있었다. 중요한 자리라도 가는 것처럼 말이다. 언뜻 창가에 반사된 에던과 내 모습은 완전히 황자님과 하녀 그 자체였다.
진짜 안 어울려. 꾀죄죄한 내 옷차림만 보면 죄를 지어 황자님에게 끌려가는 죄인 같다.
에던을 따라 도서관에 가자 포털이 푸른빛이 가득 차 열려 있었다. 나는 에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우리 어디 가요?”
“응.”
눈부신 빛을 지나온 곳은 화려한 건물 앞이었는데 지난번 루벤과 왔을 때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일단 시간이 저녁때라는 것도 있었지만.
“어서 오십시오!”
뭐, 뭐야? 갑작스러운 환영 인사가 우렁차게 날아왔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슬쩍 물러났다.
그 반동으로 에던의 손을 놓칠 뻔했는데 에던이 다시 손에 힘을 주며 휙 내 손을 잡아끌었다.
“놓지 마.”
평온한 에던의 목소리.
레드 카펫 양옆으로 길게 줄지어 선 수십 명의 사람은 허리를 깊이 숙인 채 그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치 날 보면 안 되는 것처럼.
익숙지 않은 상황에 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에던은 흔들림 없이 그대로 날 데리고 레드카펫 한가운데를 걸어갔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양옆의 사람들을 살폈는데 몸을 숙이고 있어도 모두가 깔끔한 제복과 메이드 차림을 한 것은 확실했다.
문득 사람들의 신발을 본 순간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부드러운 카펫 중심을 걷고 있는 내가 가장 이곳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상황인지 말 좀 해 줘! 라는 눈빛을 잔뜩 담아 에던을 바라보았다.
“별거 아니니까 그냥 와.”
눈치 빠른 에던은 날 쳐다보지도 않고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안다는 투로 대꾸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카펫을 지나 웅장한 건물 계단 위를 오르는 동안에도 절대 숙인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건물에 들어서자 천이 깔린 둥그런 테이블이 여럿 보였다.
다짜고짜 레스토랑이라니…….
저녁을 안 차려 준 내 잘못이 있긴 하다. 배고픈 거 이해해! 그렇지만 이런 곳에 올 거면 언급이라도 좀 해 줘야 하는 거잖아!
눈이 부실 정도로 빛 반사를 일으키는 크리스털 샹들리에를 스치듯 바라본 후 시선을 내리니 벽의 한쪽에 자리 잡은 거울 속 에던과 내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망할. 울고 싶다. 이게 지금의 내 처지란 거 알지만 뭔가…… 수치심이 느껴진다.
고급 옷으로 잘 빼입은 에던의 수려한 얼굴과 끝내 주는 제복 핏을 드러내는 몸매.
그 옆에 서 있는 작은 키에 마르고 촌스러운 옷차림의 나.
고성에 따로 하녀복이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난 평소 가벼운 프릴 레이스가 달린 흰 티에 고동색 치마를 입곤 했다.
당연히 지금도 그 차림이라 당황할 수밖에 없다. 남루한 하녀 차림으로 이런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곳에 오다니.
내 사정이 어떻든 에던은 텅 빈 1층 내부를 지나 2층으로 향했다.
그제야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아 나는 에던에게 말을 툭 내던졌다.
“이런 곳에 올 거면 말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요. 나처럼 입고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심지어 아래층에서 극진히 인사를 한 직원들도 나보다는 더 멋진 차림이었다.
“신경 쓰지 마. 옷차림 따위 아무도 신경 안 써.”
내가! 당사자인 내가 쓴다고!
에던은 날 테라스로 인도했다.
울상을 지은 것도 잠시 나는 테라스 한가운데에 준비된 테이블을 보고 놀랐다.
2층에 오니 이상하게 아무도 시중드는 사람도 없었는데 덩그러니 놓인 테이블 위에 모든 게 완벽히 세팅되어 있었다.
음료부터 물, 과할 정도로 많은 고급 음식까지.
잠시 놀라서 시선을 빼앗겼는데 자연스럽게 날 의자에 앉힌 에던이 머리를 가볍게 툭 치며 웃었다.
에던이 곧장 뒤돌아서서 자신의 자리로 갔기 때문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말을 입 밖으로 내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드레스 한 개쯤 사 놨지…….”
진심은 아니었다. 드레스 같은 거 살 생각 전혀 없었고, 어차피 도망갈 텐데 짐은 적을수록 좋으니까.
에던이 빤히 날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가 날 보며 무슨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날 못생겼다고 말했으니까 이제야 내 차림이 거슬리는 걸지도 모른다.
포크, 나이프, 수저 등등 복잡한 식기류부터 시작해 이런 제대로 된 식사는 처음이라 많이 어려웠다. 그러나 헤매는 나를 지적하지도, 이상하게 바라보지도 않는 에던 덕분에 큰 무리 없이 식사는 마무리되었다.
식사 후 에던과 나는 테라스를 빙 돌아 반대편의 라운지로 향했다.
건물 밖으로 나가 있는 라운지로 가니 완전히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2층 건물인 줄 알았는데 반대편은 절벽이었고 그 아래로 강이 흐르고 있었다.
“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칼로 정갈하게 깎아내린 듯한 절벽. 그 아래 달빛을 받아 흐르는 푸른 강. 그 위로 떠 있는 작은 빛을 내는 조각배들.
미술관에 있는 아름다운 명화를 액자에서 꺼내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광경이었다.
잠시나마 모든 걸 잊어버리고 감상에 빠질 만큼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에던은 무섭지도 않은지 울타리 위에 삐딱하게 앉아 허벅지를 걸치고 앉았다.
“공주.”
또. 놀리듯 부르며 손을 내민 에던을 향해 머뭇거리다가 팔을 뻗었다.
내 손끝이 에던의 손에 닿자마자 그가 허리를 훅 끌어당겼다.
찰나의 순간에 버텨 볼 새도 없이 내 몸은 에던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너무 밀착된 몸에 놀라 뒤로 물러나며 그를 힘껏 밀어냈지만 역시나 미동도 없다. 더럽게 힘이 세.
에던은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단단히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잡은 내 손을 제 얼굴 근처로 끌어올렸다.
“만져.”
예?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너 나 예뻐하잖아.”
그…… 그게 무슨 논리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타이밍에 내가 당신 얼굴을 만져야 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어.
“……그래서요?”
“지난번에 얼굴 만지고 싶다고 했잖아. 만지라고.”
아, 손 다쳤을 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순간에 이런 말이 나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래부터 이해 따위 안 되는 남자긴 하지만.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은 건 에던인데 당황한 건 또 나였다.
심지어 에던은 무척 즐겁다는 듯 입꼬리까지 올리고 있었다.
“아니…….”
“만져도 돼.”
“아뇨! 전 그럴 생각 없어요.”
거절은 단호해야 한다.
“만지라고 할 때 만져.”
그러나 나보다 더 단호한 에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가라앉을 걸 보니 살벌하게 느껴졌다.
화났나? 그래도 만질 생각 따윈 없어.
“아니, 그러니까 싫다고…….”
“라티.”
윽. 말을 멈췄다. 에던이 내 목덜미 뒤쪽으로 손을 스윽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가볍게 머금고 있던 미소도 싹 지워 낸 에던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만지라고 하잖아,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