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41)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41화. 네가 필요한 이유(41/92)
#41화. 네가 필요한 이유
2024.06.10.
아이비의 작은 입술이 벌어졌다가 굳게 다물렸다.
“그럼 네 말은…… 도망? 그날 일부러 마차에서 뛰어내려서 도망을 쳤다는 거야? 왜?”
“그건…….”
“라티에나, 우리 같이 신전으로 오기로 했잖아. 여기서 그동안의 서러웠던 생활은 잊고 서로 돕고 잘 지내보기로 약속했잖아.”
그런 약속을 했었나?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라티에나와 아이비의 과거의 일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애타게 날 찾았던 그녀는 내 말이 무심하게 들렸는지 복숭앗빛 입술을 짓이겼다. 그리고 아이비가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날 버리고 간 거였어…….”
“버린 게 아니야.”
“방금 네 입으로 혼자 도망쳤다고 했잖아.”
“그…….”
더 변명을 해 보려던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여러모로 오해하게 했다면 미안해. 네가 왜 날 그렇게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찾지 말아 줘. 이미 넌 대성녀님이 되었고, 우리 서로 입장이 너무 다르잖…….”
그 순간 난 말을 멈추고 말았다.
“하!”
우는 것처럼 어깨를 말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아이비가 난데없이 웃으며 얼굴을 치켜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비?”
눈빛이 돌변한 아이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 잡았다.
힘은 강하지 않았지만, 아이비의 시선이 너무 돌변해서 엄청난 이질감이 느껴졌다.
“라티에나.”
기분이 언짢은 듯 미간을 구기면서 입술로는 웃고 있는 아이비의 표정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그래 맞아. 네 말대로 우리 너무 달라.”
“아파. 이것 좀 놔.”
잡힌 어깨를 빼내려고 손을 쳐 냈는데 아이비는 놓치지 않고 다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절대 못 놔!”
분노를 목 끝까지 꾹꾹 눌러 참는 듯한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아이비?”
조금 전보다 더 강한 힘으로 내 어깨를 짓누르는 아이비 힘에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나랑 비슷한 체구인데 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거야?
눈알을 번뜩이며 아이비가 말했다.
“난 그동안 마차에서 떨어진 네가 실수로 죽어 버렸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어.”
“그러니까 걱정하게 한 건 미안해. 하지만…….”
“소중한 네가 죽어 버리면 안 되잖아. 네가 살아 있어야 나한테 쓸모가 있으니까.”
“뭐?”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키웠는데, 아이비의 입술이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날 제대로 들었어. 나더러 행복하게 살라는 말, 내가 귀머거리도 아니고 설마 말이 헷갈려서 널 찾았을 것 같아?”
“무슨 말이야? 다 알고서 나를 찾았다는 거야?”
“당연하지. 네 주제에 감히 나한테서 도망을 치려 하니까.”
아이비가 턱을 치켜들고 날 내리깔아 보았다. 아랫사람을 하대하듯 대하는 아이비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당황한 것도 잠시였다.
“으윽.”
나는 잇새로 신음을 내뱉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내 어깨에 파고들었다.
여전히 아이비는 환히 웃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껏 거칠게 그녀의 손을 쳐내며 뒤로 물러섰다.
“이거 놔! 난 너한테서 도망친 게 아니야. 난 신전으로 오기 싫었을 뿐이야! 어차피 대성녀는 네가 될 테고 나는 죽게 되니까!”
거리를 두고 숨을 몰아쉬며 아이비를 바라보았다. 아픈 것보다 당혹스러웠다. 조금 전까지 성스럽고 아름다웠던 아이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말을 잇기 어려울 정도로 당황스러운 상황에 절로 아이비의 손톱으로 시선이 갔다.
보석이 화려하게 붙어 있는 손톱 끝에 내 피가 고여 있었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잠시 그걸 응시하던 나는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내가 죽게 된다는 말을 듣고도 아이비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이비. 너 설마 신전의 성녀 후보들이 미라가 되는 거 알고도 날 찾은 거야?”
아이비가 싱긋 웃었다.
“아아, 너도 알고 있었구나. 어떻게 알았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아이비도 알고 있었다.
내가 신전으로 오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날 찾은 거야. 힐스타인은 그래서 내게 그렇게 함부로 굴었던 거고.
그래. 상식적으로 대성녀가 친구를 찾는다는데 그런 식으로 예의 없이 찾을 리가 없지.
내가 신전으로 오면 죽는다는 걸 알고도 아이비가 찾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무자비했던 거야.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그럼 날 죽이려고 찾았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잖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너, 속셈이 뭐야. 왜 날 찾은 거야?”
차가운 내 말투에 아이비가 콘솔 위에 놓여 있던 새하얀 손수건으로 손톱을 닦아 냈다.
우아한 손짓이었다.
“말해 주면 기억이나 할 수 있어?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무슨 말이지? 뭘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야? 내가 진짜 라티에나가 아니라는 걸 아이비가 알 리는 없다.
“라티에나, 넌 어디로도 도망 못 가. 내 곁에 있어야지. 내 옆에서 죽어야지. 그러기로 했잖아.”
대체 뭐라는 거야. 충격으로 동공이 흔들렸다.
어느새 아이비의 주변으로 붉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치유력이 아니었다. 붉은 기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검은 안개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려 그것이 무언인지 확인하기도 전, 아이비의 가슴골에서부터 검은 핏줄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붉은 기운은 아이비의 근처에서 일렁거리던 안개에 잡아먹히듯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태어나서 이런 불쾌한 감각은 처음이었다. 내 안색이 창백해지던 그때, 덥석- 그녀가 내 양손을 붙잡았다.
“라티에나, 네 힘은 내 것이야.”
순간, 뱃속이 뒤집히는 느낌과 함께 나에게서 강제로 치유력이 터져 나왔다.
“커헉!”
검은 핏줄이 내 손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이건 한 번, 느껴 본 적이 있던 감각이었다.
에던을 치유했을 때, 순간이지만 그가 내 치유력을 강제로 가져가려 했을 때의 그 오싹한 느낌이었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소름 돋는 감각. 하지만 에던을 치유해 줄 때와 전혀 다른 것은 내가 지금 그저 죽음의 감각만이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숨이 막혀!’
두 번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지 못할 것처럼, 아주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아이비는 내 치유력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아, 아이비…….”
아이비의 얼굴은 어느새 검은 핏줄로 뒤덮여 있었고, 검은 기운이 점점 강해질수록 그녀는 입이 찢어진 것처럼 웃고 있었다.
빼앗은 치유력의 힘이 온몸에 차오르는 게 기쁜지 아이비는 한 손을 뻗어 내 뺨을 천천히 쓸었다.
“이거야. 내가 원하던 게 이거야.”
“커헉……!”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는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흰자위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변한 그녀는 더 이상 성녀가 아니었다.
“쓸모없는 성녀 후보 년들하고는 비교도 안 돼. 그깟 계집년들은 수십 명을 가져다 써도 채워지지 않았어. 너밖에 없어. 라티에나, 네가 있으면 난 진짜가 돼. 넌 정말 최고야……!”
말도 안 돼. 이것 때문에 나를 찾았다고? 내 힘을 빼앗아 쓰기 위해 나를 찾았다는 말이야?
내가 미라가 되어 죽을 거라는 걸 알고도! 아니. 날 미라로 만든 사람이 아이비였어.
악마처럼 허공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아이비의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원작에서 계속해서 죽어 나가던 성녀 후보들의 죽음은 라티에나가 사망한 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날을 계기로 달라졌었다.
남주들과 아이비와의 관계가 더욱 진해진 것도 에던이 아이비를 납치하는 시기도 전부 내가 죽고 난 후의 일이었다.
내가 미라가 되었던 게 아이비의 짓이었어.
그랬으니까 내가 죽고도 쉽게 남주들의 말 한마디에 날 잊고 즐겁게 지냈던 거야.
아니. 처음부터 내 존재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진짜라서 힘을 빼앗을 생각만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 모든 게 내 힘을 가지고 한 짓이었다니!
‘젠장, 아이비…….’
바짝 긴장되었던 몸은 어느 순간 힘이 빠지고 있었다. 아이비의 팔을 붙잡고 버텨보던 내 몸은 점차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뿌옇게 시야가 흐려지고, 가느다랗게 이어 가던 숨조차 어딘가 막혀 버린 듯했다.
수분이 전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점차 말라 가는 내 손가락이 보였다.
내 몸은 손톱에서부터 차근차근 미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빼앗기는 내 힘을 붙잡으려 했지만 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보내는 것만 할 수 있었지 내 힘을 끌어당기거나 잡아 두는 것은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창백해진 얼굴로 겨우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맥시엄이 밖에 있는데…….’
도와달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을 뻗어도 소용이 없었다.
미라가 되어 가는 몸으로 나는 허공에서 허우적댈 뿐이었다.
그때였다. 이젠 정말로 앞이 캄캄해진 순간, 익숙한 체온이 손에 닿았다.
동시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꺄악-!”
날카로운 아이비의 비명이 귓전을 때리고, 날 끌어안는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익숙한 향, 익숙한 체온. 내가 아는 사람의 품에서 다급히 숨을 몰아쉬자 어두웠던 시야가 빠르게 돌아왔다.
눈앞에 아이비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붉은 기운은 온데간데없었고, 아이비의 몸을 채우고 있던 검은 핏줄 자국도 사라지고 없었다.
“괜찮아.”
날 끌어안고 지탱하는 탄탄한 가슴 위로 에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문형이 아니었다.
안심하라는 듯, 아무 걱정 말라는 듯 에던은 다시 천천히 말했다.
“괜찮아, 라티에나.”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