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43)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43화. 몰랐던 이야기(43/92)
#43화. 몰랐던 이야기
2024.06.12.
재촉하는 그의 질문에 에던이 더욱더 낮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내 것, 이라고 말한 걸로는 설명이 부족한가?”
“그저 소유욕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힐스타인의 집요한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장 속에서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힐스타인 님! 뭐 하고 계시는 거예요? 어서 붙잡……!”
다시 한번 아이비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을 때, 에던이 날렵하게 움직여 창가로 뛰어올랐다.
돌아보자 힐스타인은 우리를 바라보고 음흉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
경고 아닌 경고를 날리고 에던은 그대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숨을 참다가 그 상태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
촤라락- 필름이 돌아가는 듯한 소리에 눈을 떴다.
주위가 안개로 뒤덮인 듯 온통 뿌옇다. 눈을 비비고 다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자, 허공에서 책이 넘어가고 있었다.
‘뭐지?’
의아하게 눈을 깜빡인 것도 잠시, 책에서 찢긴 듯한 페이지 몇 장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한 장 한 장 파노라마처럼 장면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이건 내가 모르는 진짜 라티에나와 아이비의 이야기였다.
푸석푸석한 머리칼의 아이비가 보였다.
머리카락 색이 아니었더라면 아이비인 줄 모를 정도로 볼품없는 소녀였다.
곧 스무 살을 앞두고 있는 아가씨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빼빼 마르고 체구가 작았다.
마른 데다가 시골 햇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아이비는 내가 알고 있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먼지투성이에 새카만 재가 묻은 촌스러운 옷을 입은 아이비는 긴장했는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진짜 라티에나가 있었다.
낡은 보육원 건물 뒷마당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서 있었다.
‘라, 라, 라티에나. 오, 오늘 있었던 일은 이, 잊어버려. 이, 이건 너, 너와 나의 비밀이야.’
말을 더듬긴 했지만 아이비는 정확하게 라티에나의 눈을 보고 말했고, 초점을 잃은 라티에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자, 잘했어.’
아이비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장면이 바뀌고, 화면에 다시 비친 아이비는 어쩐지 조금 예뻐져 있었다. 주근깨가 사라지고 피부가 깨끗해진 것이다.
까맣던 피부도 조금 하얘져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천천히 아이비는 더욱더 예뻐지기 시작했고, 반대로 라티에나는 조금씩 초췌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보육원 뒷마당에서 손을 잡았던 그날, 라티에나의 생기가 아이비에게로 옮겨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예전보다 부쩍 예뻐진 모습에 만족해하는 아이비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촤라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빠르게 바뀌었다.
마을이 온통 부산스러웠다.
신전에서 성녀 후보들을 찾아 마을을 찾아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라, 라티에나! 이쪽이야.’
아이비는 다시 한번 라티에나를 뒷마당으로 불렀다.
‘무슨 일이야, 아이비? 너 아직 원장님 말 못 들었어? 빨리 모이래.’
‘아, 알아. 그래서 말인데 라, 라티에나. 소, 손 좀 줄래?’
‘손은 왜?’
‘자, 잠깐이면 돼.’
‘아이참. 시간 없는데.’
아이비의 손을 붙잡자 라티에나는 금세 초점을 잃었다.
아이비의 몸에서 크고 선명한 검은색의 줄이 핏줄처럼 번져 나오더니 곧 나무뿌리처럼 라티에나를 향해 뻗어 나갔다.
정체 모를 검은 줄기가 라티에나의 몸을 뒤덮자 핑크빛 치유력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그 힘은 줄기를 타고 점차 아이비 쪽으로 이동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비는 라티에나의 힘을 대부분 흡수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주위가 다시 고요해졌을 때 라티에나는 지난번처럼 멍한 상태였다.
‘라티에나, 눈 떠. 이 일은 너와 나의 비밀이야.’
‘으응.’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방금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라티에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친 기색의 라티에나는 휘청거리며 건물 뒷벽에 몸을 기대며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아이비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름다워져 있었다.
말을 더듬던 불안한 말투도 없어졌고, 자신감 없이 주눅 들어 움츠렸던 어깨도 곧게 펴졌다.
‘이런 힘은 너 따위보다 내게 더 어울려. 내가 가져야 할 힘이었어. 네게 잘못 간 거니까.’
아이비는 쓰러진 라티에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괜찮지? 라티에나?’
싱긋 웃는 얼굴로 아이비는 머리카락을 와락 잡아당겼다.
햇살을 받아 부드럽게 찰랑이던 분홍색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생기를 잃었다.
‘어, 엄청난 힘입니다!’
얼마 후 마을을 방문한 신전의 사제들은 아이비를 향해 감탄을 내뱉었다. 누가 봐도 남들과 확연히 다를 정도로 아티팩트는 밝게 빛났다. 아이비의 권유에 라티에나도 아티팩트에 손을 올렸다.
라티에나의 희미한 힘은 흔한 성녀 후보들보다 더 적다고 해도 좋을 만큼 빛이 적었다.
‘이쪽은 데려가도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금방…….’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사제들의 얘기를 들은 아이비가 다급히 그들에게 말을 꺼냈다.
‘제 친구도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저 혼자서는 너무 외로워요!’
‘그렇다면야…….’
사제들은 그렇게 두 사람을 마차에 태웠다.
그 장면을 끝으로 촤르르르- 여러 장의 책이 한 번에 넘어가고, 한참 후에야 다시 화면이 나왔다.
한밤중의 신전이었다.
아이비는 라티에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라티에나.’
아이비는 볼품없이 마르고 안색이 어두워진 라티에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누운 라티에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비, 나한테 어떻게 이런 짓을…… 대체 왜…….’
메마른 입술을 겨우 달싹이는 라티에나의 목을 아이비가 감싸 쥐었다.
‘네가 멍청하니까 속은 거야. 오늘부터 진짜는 나야. 잘 가.’
아이비는 부드럽게 웃으며 라티에나의 모든 힘을 빼앗았다.
라티에나가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움과 반짝이는 빛은 모두 아이비의 것이 되었다.
검은 줄기가 라티에나를 순식간에 뒤덮고 다시 모습이 드러났을 때, 라티에나는 미라로 변해 있었다. 생기를 잃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색이었던 벚꽃색 머리카락은 먼지처럼 푸석푸석해졌다.
마치 보육원에서 아이비의 머리카락처럼.
꽉 쥐면 바스러질 것처럼 건조하게 말라 버린 머리카락을 응시하던 아이비는 만족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와주세요! 제 친구가 죽었어요!’
소리치는 아이비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우르릉- 쾅쾅!
“헉!”
세상이 무너질 듯 거세게 내리치는 천둥소리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창문 밖으로 번개 빛이 번쩍 떨어졌다. 눈을 찡그리며 감았다 뜨니 환한 샹들리에 불빛이 환히 켜진 방 안이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나는 다급히 내 손을 매만졌다.
“다행이다…….”
미라로 바싹 말라 변해 버렸던 오른손이 멀쩡하게 돌아와 있었다.
“공주님께서 일어나셨어요!”
예? 공주님이라고? 누가요? 제가요?
다급히 주위를 살펴보니 처음 보는 낯선 방이었다.
불꽃이 피어오르는 벽난로에 어둡지만 고급스러운 가구들 몸을 감싸고 있는 적당한 무게의 두꺼운 이불.
그 이불 속에 누워 있는 나를 메이드 복을 입은 하녀 서넛이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공주님?”
뭐야, 이 패턴. 낯선 천장에 낯선 호칭에…….
“자, 잠시만요. 머리가…….”
정신없이 몰아치는 현실에 이마를 짚었는데, 내가 일어나길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때맞춰 하녀들이 동시에 물러났다.
“일어났어, 공주?”
고개를 들자 사근사근한 눈웃음을 치는 에던이 있었다.
제정신이야? 날 공주로 만든 범인이 나타났다.
“이만 나가 봐.”
에던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하녀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표정이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에던이 문을 달칵 닫았다.
“뭐예요?”
“뭐가.”
에던은 성큼성큼 너른 보폭으로 날 향해 다가와 손등을 툭 내 이마에 가져다 댔다.
정신을 잃었던 사이에 열이 났던 모양인지 침대 옆 작은 콘솔 위엔 얼음이 담긴 주머니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힐스타인 경은요? 아이비는? 신전에서 어떻게 빠져나왔…….”
“천천히 하나씩 질문해.”
에던은 나와 시선을 맞추더니 가만히 뺨을 쓸어내렸다.
나는 입을 뻐끔거리는 모습으로 멈춰 버렸다.
아, 그래. 하나씩. 조금 흥분되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우리 어떻게 빠져나온 거예요?”
차분해진 내 목소리에 에던은 잘했다는 듯 머리를 톡톡 두드리더니 창가 아래의 콘솔로 향했다.
그가 물잔을 집어 들자 때맞춰 후두둑- 창밖에서 비가 거칠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멈춰 서서 밖으로 시선을 던지던 에던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가에서 뛰어내렸고, 맥시엄이 이용하는 포털을 사용해 빠져나왔어.”
“힐스타인 경이 뒤쫓진 않았어요?”
“아쉽게도.”
아쉽다고? 다행인 거잖아.
“쫓아왔으면 이때다, 하고 죽여 버렸을 텐데.”
에던은 정말로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놓쳐 버린 것처럼 아쉬운 기색이었다.
미쳤어. 아무리 에던이라고 해도 쉽게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힐스타인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어쨌든 우리를 놔줬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그 눈빛은 정말이지. 다신 보고 싶지 않아.’
끈적하게 달라붙는 매서운 시선을 떠올리니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에던이 달그락거리며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의사가 따듯한 걸 마시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괜찮지?”
“네. 괜찮아요.”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그러나 우아한 에던의 몸동작. 한 번씩 저렇게 반듯하게 움직일 때면 그가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홀린 듯 에던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던 나는 불현듯 다시 내 손을 바라보았다.
손을 폈다 쥐었다 하며 이리저리 살폈다. 우려와 다르게 손은 완전히 정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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