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48)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48화. 절대 놓지 않아(48/92)
#48화. 절대 놓지 않아
2024.06.17.
진심이었다.
힐스타인을 내려다보는 에던의 눈에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한테 이 정도로 느껴질 정도니 힐스타인도 눈치챘는지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렇게 적대적으로 나오시면 맥시엄을 죽여 버릴 겁니다?”
힐스타인은 말꼬리를 올리며 싱긋 웃었는데, 누가 봐도 비꼬는 어조였다.
“맥시엄이 나한테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 거라 생각하나?”
에던 역시 네 맘대로 하라는 듯 답했다.
나는 기함했다.
당연히 가치가 있지! 아무리 에던의 스파이라고 해도 나 때문에 지하 감옥에 갇혔는데 죽으면 안 되잖아!
나는 불안하게 두 남자를 번갈아 살폈다.
걱정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나와 다르게 두 사람은 여유롭게 미소로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미소 속에 살기가 담겼다는 게 문제지만.
“그날 일이 밝혀지면 황후께서도 가만히 있지 않으실 텐데요. 제가 황후 폐하의 최측근이라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잘 되었군. 어차피 황후께서는 날 좋아하지 않으시니 이참에 더 미움받아 보는 것도 좋지.”
어떻게 해도 에던은 타협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돼. 당연히 안 되는 일이다. 이러다가는 다 죽을지도 몰라.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우선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은, 힐스타인을 내 편으로 만드는 거다. 어차피 힐스타인도 원하는 건 내 치유력이니까.
“줄게요!”
나는 황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에던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뭐라고 했어?”
“주인님, 저 힐스타인 경에게 치유력 나눠 주고 싶어요.”
힐스타인은 오히려 당황해하는 눈빛이었다.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오히려 이렇게 쉽게 주냐는 듯한.
“꼼짝 말고 기다려요.”
나는 벌떡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안 될 것 없다. 힐스타인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이득이야.
이대로라면 에던은 진짜 힐스타인을 죽일지 몰라. 지난번에도 맥없이 당했었고, 힐스타인도 그걸 알지만 치유력을 원하니까 온 거야.
그럼 일이 전부 꼬여 버리겠지.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는 내게 유리하게 움직여야 해. 방법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나는 바나나 대신 남은 사과와 후추를 들고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이게 뭐…….”
이번엔 힐스타인의 표정이 구겨졌다.
뭐, 좀 이상한 조합이긴 하다.
나는 깎지 않은 사과 위에 후추를 톡톡 뿌렸다.
힐스타인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장난하나? 라는 표정.
“먹어요.”
난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사과를 내밀었고, 에던이 무표정으로 죽어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힐스타인은 얼결에 그걸 받아먹었다.
아삭, 아삭. 후추가 뿌려진 사과의 맛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힐스타인의 표정은 끝내주게 변해 갔다.
사과를 반쯤 먹었을 때, 힐스타인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마를 짚었다.
“젠장. 미쳤어.”
에던이 띠껍다는 듯 날 흘겨보았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결국 나와 당신을 위한 거라고.
기가 막힌 듯 헛웃음만 내뱉던 힐스타인이 고개를 들었다.
냉소적이던 얼굴이 굉장한 환희에 차올라 있었다.
“이게, 가능한 겁니까. 어떻게 이 정도로 완벽한 거죠? 네?”
힐스타인은 여우처럼 가는 눈을 활처럼 휘면서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신전 놈들 완전히 바보들이었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힐스타인이 덜컥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라티에나 님. 당장 신전으로 가시죠.”
“에?”
“진짜 대성녀이지 않습니까.”
한순간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태도와 호칭이 바뀌었다.
힐스타인은 반짝이는 눈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원작에서 보았던 힐스타인 특유의 샅샅이 살피는 듯한 야릇한 눈길이 덮쳐 왔다.
“이거 놔요!”
“제가 뭘 해 드릴까요? 어떻게 하면 제게도 계속 치유력을 주실 겁니까.”
“그러니까 이 손 좀……!”
옆에 에던이 있잖아. 이 멍청아!
아니나 다를까, 에던이 힐스타인의 멱살을 붙잡아 일으키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풀려나자마자 나는 후다닥 에던의 옆으로 가서 섰다.
힐스타인에게 붙잡혔던 손의 감촉이 기분이 나빴다.
볼품없이 쓰러져 버린 힐스타인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어떻게 이렇게 완벽할 수가 있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는 진짜 미친놈 같았다.
에던이 없었더라면 이대로 내게 와서 이상한 짓을 해도 망설임이 없을 정도로.
솔직히 나도 후추에 넣어 둔 치유력 정도로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지는 몰랐다.
물론……. 에던과의 스킨십을 했을 때 어마어마하게 기분 좋은 강한 쾌락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가벼운 치유력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원작에 나온 아이비의 치유력을 생각해 보면 가능한 일이긴 했다.
완전히 사기적인 힘이었으니까.
그게 내 힘이라는 게 문제지만.
은발 사이로 치켜뜬 힐스타인의 시선과 마주하자 나는 소름이 돋았다.
힐스타인이 변태라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나는 에던의 소매를 붙잡았다.
“신전에는 가지 않아요. 내가 가진 치유력에 대해서 비밀로 해 주세요. 만약 나보다 더 먼저 신전에 사실을 밝힌다면 그땐 두 번 다시 경에게 내 치유력을 사용하지 않겠어요.”
“그러죠.”
“맥시엄도 당장 풀어 줘요.”
“그럼 다시 와도 됩니까? 가능하면 직접적인 치유도…….”
“아뇨! 그건 절대 해 주지 않을 거예요.”
힐스타인의 입이 다물렸다. 순간 차가워진 낯빛에 조금 겁이 나기도 했지만, 지금은 내가 갑이야!
이 타이밍에 핑계를 댈 차례였다. 옆에서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있는 듯한 에던의 기를 세워도 줄 겸.
“주, 주인님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하긴 그렇군요.”
다행히 힐스타인은 그 말에 납득한 듯했다.
에던이 내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던도 내가 자기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에 꽤나 만족스러워한 듯했다. 정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갑인데. 에너지 소비가 장난이 아니다.
“대신 그 후추 줄게요. 가져가요. 내 치유력을 담아 둔 거니까 식사 때마다 잘 뿌려 먹어요. 들키지 말고.”
끄덕.
한순간에 힐스타인은 완전히 눈빛이 달라져 버렸다.
***
고성에서 쫓겨나듯 빠져나온 힐스타인의 발걸음은 춤추는 것처럼 가벼웠다. 그는 언덕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에던의 부하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까지 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길을 막는 자는 죽여 버리겠다.’라며 으름장을 놓았던 사람이었다.
‘대공님의 명입니다. 초대 없이는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초대하셔서 가는 길이라고.’
‘증명해 주시죠.’
‘네놈들을 당장 죽이지 않고 곱게 말로 설득하는 거 보면 이해 안 가?’
‘…….’
어이가 없지만 황실의 개나 다름없는 힐스타인이 에던과 얼마나 사이가 나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하들은 그 말에 납득하고 말았다.
어쨌건 고성은 부서지지 않았고 큰 소란이 없이 나온 걸 보니 다행이었다.
잠깐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끊임없이 웃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미친놈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에던의 부하들이 보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힐스타인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손에 쥔 작은 후추통을 세상 그 어떤 보물보다 더 소중하게 꽉 쥐었다.
‘이래서 에던 황자가 라티에나에게 미쳐 있었던 거야.’
힐스타인이 이능력을 사용하는 때에는 때때로 황후의 호위를 하는 일도 있었지만, 매일 새벽 황실에서 키우는 이능력자 기사들을 훈련시키며 소모하는 것이 가장 컸다.
에던만큼은 아니더라도 매일 일정하게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가 아이비를 가장 자주, 꾸준히 찾아갔던 이유였다.
물약 따위보다는 직접 피부로 맞닿아 받는 축복이 훨씬 쾌락적이고 부작용을 가라앉혀 주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비밀은 생각보다 엄청난 소득이었다.
이토록 맑은 정신으로 있어 본 적이 언제더라.
“라티에나 메리골드. 라티에나 메리골드…… 라티에나 메리골드!”
하하. 웃음이 터졌다.
첫 만남에서도 예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제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라티에나의 벚꽃색 머리카락과 커다랗고 맑은 물빛 눈동자를 곰곰이 떠올리던 힐스타인이 중얼거렸다.
“갖고 싶다.”
아이비의 치유력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치유력의 양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전 대성녀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치유를 받아도 늘 항상 머릿속 한쪽엔 지끈거림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라티에나의 치유력은 완벽하게 없애 주었다.
사과를 입에 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끗한 힘이 파도처럼 밀려와 온몸에 채워지던 그 순간의 벅차오르는 행복감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에던 황자가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라티에나를 덮쳐 버렸을 것이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완벽한 힘.
아이비의 힘이 깊은 어둠 속에서 찾아낸 한 줄기 빛이라면, 라티에나의 힘은 초원 위의 태양이었다.
이질감이 없는 완벽한 치유로 인해 힐스타인의 입가는 환희로 가득 찼다.
“절대 놓지 않아.”
그녀의 축복을 받을 수만 있다면, 다리 사이를 기어서라도, 발을 핥아서라도 곁에 있을 것이다.
힐스타인이 눈매를 휘며 웃었다.
***
“맥시엄, 맥시엄!”
한밤중에 콜이 지하 감옥 쪽으로 내려갔다.
횃불이 없으면 빛 하나 볼 수 없는 어둡고 습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시간이 아침인지 낮인지 알 수도 없어서 몸을 웅크리고만 있던 맥시엄이 고개를 들었다.
“콜?”
“맥시엄!”
“콜! 나야! 여기야!”
빛이 걸어오는 쪽을 향해 맥시엄이 벽을 더듬거리며 창살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