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51)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51화. 욕심(51/92)
#51화. 욕심
2024.06.20.
처음엔 그저 라티에나가 곁에 없는 바람에 부족한 치유력을 채우려 했던 행위였다.
성녀 후보들은 그런 존재니까.
고귀하고 완벽한 치유력을 가진 나와는 전혀 다른, 작은 바람에도 보잘것없이 날아가 사라져 버리는 한없이 하찮은 것들 말이다.
어차피 자신이 아니더라도 보잘것없이 죽어 버릴 운명이었다. 차라리 대성녀인 자신에게 미약한 힘이라도 보태어 희생하는 편이 나은 일이 아닌가.
처음은 그런 이유였고, 그다음은 불안해서였다.
다른 이들이 약해진 자신의 힘을 알아챌까 봐서.
다행히도 얼마 전 라티에나의 힘을 또다시 흡수해 왔다.
그러니 당장은 치유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이비가 오늘 밤 또 성녀 후보들의 치유력을 가져온 것은…….
“즐거워.”
그저 쾌락을 위해서였다.
헐벗은 아름답고 고운 피부 위로 달빛이 성스럽게 쏟아져 내렸다.
아이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별다를 것 없는 처지의 같은 고아였다.
라티에나가 조금 더 눈에 띄었던 것 빼고는.
시골 촌구석.
작은 도시 정도가 아니라 돌길도 깔려 있지 않고 인구수도 별로 없는 정말 조그마한 시골 마을.
아이비와 라티에나가 살던 곳은 오래된 학교를 수리해 만든 보육원으로, 수도의 아주 자비롭고 돈 많은 귀족 몇몇이 지원하는 지원금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곳이었다.
귀족들이 돈을 얼마나 지원하는지는 모르나 탐욕이 많은 원장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여름에는 벌레 때문에 온몸이 가려워 힘들고, 겨울에는 추위 때문에 얼어 죽을 것 같았다.
그런 곳에서 아이비와 라티에나는 함께 자랐다.
열 명 남짓한 아이들 속에서 유일한 동갑내기 친구였다.
‘라, 라티에나 어디가?’
‘나 마을 애들이 불러서. 너도 갈래?’
‘아, 아니. 나, 난 괜찮아.’
동갑이었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라티에나는 보육원보다 마을 아이들에게 자주 불려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이비는 라티에나보다 자신이 인기가 많은 줄 알았다.
왜냐면 마을 아이들이 라티에나를 부른 이유는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함께 놀자는 권유를 거절하긴 했지만 몰래 뒤따라가서 멀찍이 지켜보면 라티에나는 항상 놀림당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야! 라티에나! 네 머리 위에 애벌레 있다!’
‘꺄아악! 도와줘!’
‘푸하하. 거짓말이지. 멍청이 또 속냐!’
남자애들은 거짓말로 놀라게 하거나 라티에나의 벚꽃색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비웃곤 했다.
얌전히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를 고정해 놓은 몇 개 없는 머리 끈도 일부러 벗겨 내 끊어 먹곤 했다.
그때마다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어여쁘게 흩날렸다.
아이비는 그걸 사납게 올라간 눈초리로 노려보곤 했다.
‘괴롭힘을 당하는 주제에 뭐가 좋다고 만나서 노는 거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티에나가 멍청한 계집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들이 자신에게 놀자고 요구하지 않는 건 자신이 똘똘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이 한 행동은 라티에나가 좋아서 그랬다는 걸.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것은 저를 불편해했기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그런데 아까 걔 봤어?’
‘누구? 그 보육원 여자애?’
‘난 걔 좀 싫어.’
‘왜?’
‘지난번에 우연히 봤는데, 죽은 비둘기를 막대기로 쿡쿡 찌르며 웃고 있더라고. 소름 돋잖아.’
‘그러고 보니 나도 기억나는 거 있어! 걔 친구 있잖아. 좀 착한 애. 핑크색 머리. 가위를 들고 쫓아가더라고. 그러다 나랑 눈 마주쳐서 도망쳤어.’
‘으와, 정말 소름이다!’
그늘 속에서 대화를 훔쳐 듣던 아이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여자애들이 지어낸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비둘기는 개미들의 먹이로 주려고 밀어 주고 있었던 거고, 가위는 괘씸한 라티에나의 치마를 좀 잘라 혼내 주려고 했을 뿐이다.
그 계집애가 자꾸 보육원이 아닌 다른 애들과 시시덕거리니까 말이다.
고아인데 평범한 아이들처럼 구는 게 꼴 보기 싫었다.
때마침 생각난 김에 아이비는 라티에나의 치마에 가루로 만든 숯을 잔뜩 흩뿌려 두었다. 지워지지도 못하게 아주 잔뜩. 그건 라티에나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깨끗한 옷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날 다른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날이었다.
상처받은 라티에나의 눈에서 서럽게 눈물 차올랐다.
아이비는 푸석거려 엉킨 머리카락 뒤로 표정을 감추고 소리쳤다.
‘누, 누가 대체 이, 이런 나쁜 짓을 하, 한 거야?’
마치 라티에나를 대신해 역정을 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범인은 나오지 않았다. 아이비는 흡족하게 웃었고 다른 아이들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웃고 있는 거 봤어?’
‘봤어! 그거 분명 아이비 언니가 한 짓일 거야. 라티에나 언니, 내 말이 맞다니깐?’
뒤뜰에서 당근과 무를 수확하며 아이들은 라티에나에게 큰소리쳤다.
‘라티에나 언니! 언니는 화도 안 나? 매일 언니 뒤만 따라다니고, 훔쳐 보고! 뭐라고 좀 해.’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아이비가 이상하다는 건 라티에나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제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하며 웃는다는 것도. 혼잣말로 라티에나 짜증 나, 짜증 나, 짜증 나. 그런 말을 반복하는 것도.
처음엔 소름이 끼쳤지만 마땅한 해결책은 없었다.
아이비는 싫은 소리를 들으면 분이 풀릴 때까지 고함을 질러 대곤 했는데 심보 나쁜 원장님도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 어느 날은 밤새 몸을 바닥에 데굴데굴 굴리면서 괴물처럼 악을 지르다 목소리가 나가 버린 적도 있었다. 또 다른 날은 도끼를 들고 하루 종일 나무를 계속 내리찍어 손에서 피가 난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이상한 행동이 고쳐지는 것도 아니다. 지적을 받으면 아이비는 복수라도 하듯 그보다 더한 짓으로 되갚았다.
그래서 라티에나가 선택한 건 무시였다.
어차피 아이비는 남들과 다르고 바꿀 수 있는 애가 아니다. 그러니 그 이상함에 반응하지 않는 것.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해도 그러려니, 친한 척을 해도 그러려니, 질투에 못된 짓을 해도 그러려니. 일일이 반응해 봤자 뒷일이 더 커져 피곤해질 뿐이었다.
또 라티에나는 성인이 되면 보육원을 떠나 먼 곳으로 갈 생각이었으니 결국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국은 넓고 여길 떠나면 아이비와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을 테니까.
그러던 얼마 후였다.
‘라티에나. 그거 뭐야?’
‘아, 이거? 어때? 예쁘지?’
포니테일로 높게 묶어 올린 라티에나의 머리에 나비 모양의 머리끈이 있었다.
작은 큐빅이 박혀 있어서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마을에서 꽤 부자였던 남자애가 줬다고 했다.
‘걔가 맨날 내 머리 끈을 빼앗고 끊어 먹었잖아. 화냈더니 미안하다며 선물해 줬어.’
해사하게 웃는 라티에나와 빛나는 큐빅은 아주 잘 어울렸다.
‘나보다 못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비는 숨을 씩씩거려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질투심이 억제되지 않아 머리끝까지 솟아오르는 화산 같은 화를 참을 길이 없었다.
고심하던 아이비는 그날 밤, 아무도 몰래 그 머리 끈을 발로 짓밟고 가위로 갈기갈기 조각내 잘라 버렸다.
그리고 숲속 타 버린 나무 아래에 끈과 큐빅을 파묻었다. 아무도 찾지 못하게.
‘앞으론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자랑 따위 하지 못하겠지?’
다음날 머리 끈을 잃어버린 라티에나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고, 더 이상 다른 선물을 받아오지 않았다.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라티에나는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렸지만 아이비는 그걸 몰래 지켜보기만 했다.
‘넘어져라. 뼈라도 부러져 버려. 이번 주 설거지 담당이니까 손목이 망가지면 딱 좋겠다. 원장님은 그런 사정 봐주시지 않을 테니 아픈 팔로 고생하게 될 거야. 어서 넘어지라고!’
가끔 그런 아이비를 눈치채고 마을의 다른 여자애들이 흠칫거리며 눈초리를 주었지만 상관없었다.
아이비는 라티에나를 저주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음침한 아이비는 자랄수록 말수가 더 적어졌고, 그 탓에 말도 더 많이 더듬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거울도 제대로 보지 않고 세수와 빗질도 잘 하지 않았다. 원래도 까무잡잡했던 피부는 햇빛에 그을려 더 까매지고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해졌다.
반대로 라티에나는 타고난 흰 피부였다. 거기에 빗질을 열심히 한 덕에 예쁜 머리카락은 더욱 윤기가 흘렀다.
‘지긋지긋해!’
뒷마당에 심어 놓은 채소를 거두러 가는 날이었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뒤늦게 보육원 뒷마당으로 향하던 아이비는 반짝이고 멋진 마차가 건물 앞에 있는 걸 발견했다.
매일 바라보던 보육원 앞마당인데 마치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아이비는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마차를 응시했다.
문이 열리고 고급 천으로 만든 제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와 공주님처럼 무척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부인이 나오고 있었다.
드레스 가슴에 꽂힌 브로치 하나를 훔쳐다 팔면 꽤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장이 버선발로 나가 부부를 환영했다.
돼지처럼 두터운 손을 싹싹 비비며 말이다.
부부는 원장실로 향했다.
‘여자아이를 입양하려고 해요.’
‘예? 여기서요? 진심이십니까!’
‘수도의 다른 곳들도 추천을 받긴 했지만 아무래도 오랜 기간 후원을 해 온 곳이라 이곳에 조금 더 정이 가는군요. 괜찮은 아이가 있나요?’
‘물론입니다! 혹시 아이의 나이는…….’
‘너무 어린아이 말고 큰아이가 좋을 것 같아요. 어린아이들은 아직 다른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르니까요. 가장 입양이 안 되는 나이대가 13살 정도라고 들었는데, 그 나이의 여자아이가 있나요?’
‘마침 딱 있습니다!’
부인의 말대로 13살은 더 이상 입양을 기대하기에는 어려운 나이였다.
귀염성도 사라진 나이인 데다가 관계 적응이 쉽지 않은 성장기라는 점 때문에 여러모로 까탈스럽다는 말들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려 깊은 부부는 다른 아이들을 위해 가장 입양이 되지 않을 나이를 원했다.
‘여기서도 보이겠군요.’
원장은 창문을 활짝 열고 뒷마당에서 채소를 뽑고 있던 아이들 중 한 명을 가리켰다.
‘저 아이 어떠십니까? 라티에나 메리골드. 순하고 예쁘장한 여자애입니다. 마음에 드실 겁니다.’
‘어머. 너무 예쁜 머리카락을 가졌네요. 마치 봄날의 꽃잎 같아요. 그렇죠, 여보?’
‘그렇군. 아이들을 돕는 손길도 착해 보이고.’
창문 너머로 라티에나를 바라본 부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13살은 저 아이 한 명인가요?’
‘아, 네. 뭐……. 그렇습니다.’
원장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부부는 망설임 없이 결정을 내렸다.
‘라티에나를 데려가도록 하죠.’
모든 대화를 들은 아이비는 흉악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아니야! 내가 있어! 나도 있잖아! 왜 라티에나를 선택하는 거야? 어째서?’
꽉 쥔 주먹으로 부들부들 몸을 떨던 아이비는 벌컥 문을 열고 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원장님이 거짓말을 해서 그래! 내가 있다는 걸 몰라서일 거야. 내가 있다는 걸 알면 라티에나가 아니라 날 입양하고 싶어 할 거야!
그렇게 잔뜩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귀족 부부는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비를 보고 기함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사납게 올라간 눈과 어떻게든 웃으려 애쓰는 입가, 파르르 떨리는 삐쩍 마른 몸.
아이비의 모습은 굉장히 기괴해 보였다.
‘미, 미안하구나. 갑자기 놀라서 그만.’
뒤늦게 아이가 상처받을 것을 걱정한 부부가 사과했지만 아이비의 얼굴은 독 사과처럼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