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52)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52화. 썩어 가는 피부(52/92)
#52화. 썩어 가는 피부
2024.06.21.
‘나, 나가라! 어서!’
원장은 아이비를 못된 들개를 내쫓듯 밀어냈다.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어떻게 날 보고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어? 내가 괴물은 아니잖아!’
머리끝까지 차오른 아이비의 분노는 전부 라티에나에게로 향했다.
‘전부 너가 있는 탓이야! 죽어 버려! 라티에나! 널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두고 볼 것 같아?’
우아한 차림을 한 귀족의 등장에 모두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라티에나의 입양 사실이 알려지고 모두가 축하의 인사를 건낼 때, 아이비는 마부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창고에서 공구를 가져와 마차로 향했다.
***
‘예쁜 아이였죠?’
‘네. 똘똘해보이기도 하고.’
부인의 말에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방은 분홍색이 좋겠어요. 그 아이와 잘 어울리겠죠? 침대에는 하얀 레이스 캐노피를 설치하고요. 또…….’
‘여보, 천천히. 시간은 아직 일주일이나 있잖소.’
‘무슨 소리예요? 일주일밖에 없는 거예요. 여자들은 필요한 게 많으니까요. 드레스며 주얼리며 준비해야 할 것투성이라고요.’
‘알겠소, 알겠어.’
‘그런데 내 취향이 그 아이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떡하죠?’
‘당신 센스는 사교계에서도 알아주니까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정말! 그럼 좋겠어요.’
귀족 부부는 수도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라티에나의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마을을 벗어나는 동안 내내 라티에나 이야기뿐이었다.
부부는 준비를 마치고 일주일 후에 라티에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오랜 기간 노력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터라 라티에나의 입양은 두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이었다.
‘많이 사랑해 줄 거예요. 우리 그 아이 예쁘게 키워요.’
그때였다. 포털이 있는 도시로 넘어가는 산길의 절벽 근처에서 마차는 갑자기 중심을 잃었다.
‘꺄악!’
‘여보!’
덜커덩! 크게 휘청이는 마차에서 부부가 서로를 끌어안는 찰나에 바퀴 나사가 완전히 풀렸다. 마차는 중심을 잃고 삽시간에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아이비가 나사를 풀어 놓은 탓이었지만 아무도 이유를 알아내진 못했다.
부부가 사망함으로 라티에나의 입양은 무산이 되었다.
라티에나는 또 서글프게 울었고, 아이비는 이불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스무 살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원장의 심부름으로 식료품을 사러 돌아오는 길, 근처에서 들린 대화에 아이비는 귀를 쫑긋 세웠다.
‘봤어? 머리카락 굉장히 예쁘지?’
‘임마, 그걸 누가 몰라? 머리카락뿐이냐. 라티에나는 얼굴도 끝내주잖아.’
‘내가 찜했으니까 건드릴 생각하지 마.’
‘치사하기는. 먼저 말하는 쪽이 승자 아니냐? 걔가 그렇게 좋아?’
‘아무튼 고백은 나부터야.’
몇 년 사이에 마을은 꽤 커졌고, 또래의 남자들도 늘어났다.
문제는 라티에나에게 호감을 표했던 그 남자가 아이비가 남몰래 좋아하던 남자라는 데에 있었다.
‘라티에나를 좋아한다고? 내가 아니라?’
남들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아이비의 마음에는 또 다른 증오가 피어올랐다.
얼마 후, 또다시 원장의 심부름으로 마을에 잠시 볼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이번에는 라티에나와 함께였다.
보육원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서자 눈앞에 키가 훤칠한 사내가 붉은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나타났다. 아이비가 짝사랑하는 그였다.
‘받아, 라티에나.’
‘이런 건 네 여자 친구한테나 주지 그래?’
‘그럼 네가 내 여자 친구 해 줄래?’
‘뭐? 그런 농담 재미없어. 장난이지?’
‘맞아. 장난이야. 장난.’
장난일 리가 없다. 라티에나가 싫어하는 듯하니 그렇게 넘어가 주는 것뿐이지.
장난 같은 고백에 진심이 담겼다는 걸 아이비는 알고 있다.
하나같이 멍청하기 짝이 없다. 난 이렇게 눈치가 빠른데!
어깨를 잔뜩 굽히고 눈을 흘깃거리며 상황을 바라보던 아이비는 얼굴을 절반쯤 뒤덮은 머리카락 사이로 아득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뚝뚝 흘러나올 정도로 아주 강하게.
곧 성인이 될 나이었지만, 아이비의 마음은 어릴 적 그대로 멈춰 버린 듯 삐뚤어졌다.
그 누구도 라티에나와 아이비를 비교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비교하며 자격지심에 빠졌다.
라티에나를 향한 질투심이 강해질수록 마음은 완전히 왜곡되어 갔다.
제어하지 못한 화 때문에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라티에나에게 고백했던 남자는 그제야 아이비를 발견했다.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구기며 뒤로 물러났다.
‘라티에나, 그럼 다음에 보자.’
‘응, 잘 가.’
짝사랑하는 그가 라티에나에게만 웃고, 인사하며 돌아섰다. 내가 옆에 있는데! 모르는 척을 했어!
아이비는 라티에나의 고운 손에 들린 붉은 장미꽃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라, 라티에나. 그, 그 꽃 예, 예쁘다.’
‘어? 그래? 아이비 너 가질래?’
‘그, 그래도 돼?’
‘응. 그 장미꽃 너랑도 잘 어울린다.’
라티에나가 내민 붉은 장미꽃을 아이비가 빼앗듯이 낚아챘다.
‘끅, 크윽, 큭.’
잇새로 이상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 사실은 이걸 나한테 주려던 것 아니었을까? 나한테 이렇게 잘 어울리는 꽃이잖아. 그 남자가 모를 리가 없어. 나한테 주는 게 부끄러워서 라티에나에게 주는 척한 거 아닐까? 내가 너무 아름다우니까?
맞아! 원래 내 것이었는데 라티에나가 빼앗은 거야. 사실 이건 내 꽃이었던 거야!
겉으로는 말더듬이에 조용한 아이비였지만 푹 숙인 고개와 빗자루처럼 푸석푸석한 갈색 머리카락 뒤에 숨겨진 눈빛은 음험했다. 생각은 제 좋을 대로 흘러갔고, 하염없는 강한 질투는 원망이 되었고 결국 멈추지 않는 저주가 되었다.
‘라티에나 죽어 버려. 빨리 죽어 버려. 너 같은 건……!’
새벽녁에 아이비는 언제나처럼 자다가 일어나서 라티에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라티에나의 몸에서 핑크빛의 너무나 아름다운 빛이 솟아오르는 걸 봤다.
‘저, 저게 뭐지?’
의아함도 잠시 저주를 퍼붓던 아이비의 입술이 그대로 멈췄다.
‘……!’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에 힘이 빠졌다. 얼굴에 절망이 덮쳤다.
저 빛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성녀들이 가지는 치유의 힘이었다.
점점 밝아지는 그 빛을 바라보고 있기가 힘들어진 아이비는 그대로 보육원을 뛰쳐나갔다.
‘왜? 왜? 왜? 대체 왜? 어째서? 어째서냐고!’
맨발과 잠옷 차림으로 정신없이 뛰어간 아이비는 오래전 라티에나의 머리 끈을 조각내어 버려 둔 곳에 도착했다.
발길이 닿는 대로 달리다 보니 온 곳이었다. 처음으로 라티에나의 것을 빼앗아 망쳤던 날, 그 결과물을 감춰 둔 곳이었다.
불에 타 버린 나무는 반쯤 썩은 채로 여전히 그대로 죽어 있었다.
가쁜 숨을 버겁게 몰아쉬는 아이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투둑, 투둑. 어느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고 아이비는 질퍽한 흙을 미친 듯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손끝이 순식간에 상처투성이가 되고, 눈물이 빗물에 섞여 정신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라티에나가 성녀 후보라니! 그럴 리가 없어!’
반짝. 흙구덩이 속에서 파낸 큐빅은 여전히 새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비는 피가 가득한 손으로 그 큐빅을 손에 꽉 붙잡고 엉엉 울었다.
‘왜 나는 안 돼? 왜냐고!’
턱이 부서지라 이를 까득까득 갈았다. 눈앞에 수분기 하나 없이 비쩍 마르고, 창살처럼 날카로운 나무가 있었다.
‘이걸 꺾어다 찔러 버릴까.’
그런 생각이 스쳐 간 순간이었다. 아이비의 발끝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흰자위가 점점 새카맣게 변해 갔다.
‘커헉!’
몸이 활처럼 뒤로 휘어졌다.
빗물이 눈과 코와 입에 사정없이 흘러들어 오고, 몸속이 뒤틀려질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주, 죽을 것 같아……!’
그 생각을 한순간 아이비는 자신이 파헤쳐 놓은 흙 위로 철퍼덕 기절하듯 쓰러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이비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침착해져 있었다.
처음 알게 된 정보들이 머릿속에 가득 채워졌다.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처럼 말이다.
‘내가 진짜가 될 수 있어.’
라티에나의 힘을 빼앗을 주술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맴돌았다.
***
과거를 떠올려 보던 아이비가 번쩍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흰자위는 금방이라도 핏줄이 터져나갈 듯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힘을 어찌나 주었는지 이마와 턱에까지 핏줄이 솟아올랐다.
“빌어먹을 라티에나.”
정말이지 죽여 버리고 싶은 계집애.
아이비는 라티에나를 구하러 왔던 에던을 떠올렸다.
강한 데다가 화려한 외모로 소문난 사내였지만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
킬리언과 힐스타인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그들도 제국에서 둘째가라 하면 서러운 멋진 사내들이었다.
그러나 무도회장에서 에던을 본 순간 아이비는 그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었다. 모든 귀족이 우러러보는 저 아름다운 남자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라티에나와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중요한 순간에 라티에나를 구하러 왔다.
결국 가장 손에 넣고 싶은 사내는 또 라티에나를 보고 있었다.
다물린 입술 끝이 경련이 일어나듯 파르르 떨렸다.
에던 대공이 라티에나와 무슨 관계인지 상관없어.
그 망할 머리카락을 전부 불태워 없애 버릴 거야! 결국 그렇게 될 거야.
라티에나. 너의 그 아름다운 피부도, 전부, 아무도 널 칭찬하지 못하게 할 거야.
그건 내 것이니까. 내가 가져야 마땅한 거니까.
우러러보는 선망의 눈길도, 아름답다는 질리지 않는 찬사도, 제국 최고의 사내들도 전부 내 것이야.
아이비는 과거와 달리 윤기가 흐르는 부드러운 제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아, 안돼……!”
숨이 넘어갈 듯 말을 내뱉더니 갑자기 온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보석이 반짝이는 손끝에서부터 팔을 타고 피부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허억, 헉.”
잠깐 사이에 식은땀이 비 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아이비는 붉은 치유력을 한가득 뿜어 냈다.
성녀의 치유력은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다. 온전히 이능력자들을 위한 힘이다.
그럼에도 아이비는 라티에나에게서 빼앗아 온 치유력으로 흑마법의 대가를 덮으려 감추려 어떻게든 애쓰고 있었다.
바닥에 웅크린 채로 붉은 치유력을 온몸에 뒤엎으며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썩어 가던 피부가 흐릿하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안도하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아이비가 허공으로 눈을 치켜떴다. 검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중심 없이 흔들렸다.
‘하루 빨리 라티에나의 힘을 완전히 가져와야 해. 완전히 내 것으로.’
다음날 아이비는 여느 때처럼 태연히 온몸을 치장했다.
“킬리언 황태자께서 공국으로 떠나셨다고?”
“네. 대성녀님.”
“얼마나 걸리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황후께서 동행하셨고 국정에 관련된 사항이라서 시일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휙 몸을 돌린 아이비가 잘근잘근 손톱을 깨물었다.
“힐스타인 님은?”
“기사단장님 역시 함께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알겠어. 나가 봐.”
“예.”
안 돼. 이러면 안 된다고.
한시가 급한 이 중요한 시기에 힐스타인까지 떠나 버리다니.
당장 라티에나의 치유력은 온몸에 충분히 채워져 있지만, 그와 별개로 흑마법의 부작용으로 몸이 썩어 가고 있다.
아이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난번 기회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 사제와의 알현을 위해 복도를 이동하는 아이비의 낯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힐스타인이 최근 내게 왔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