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69)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69화. 진짜 대성녀(69/92)
#69화. 진짜 대성녀
2024.07.08.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루벤도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처음 그 책을 발견했을 땐, 성의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으니까 그냥 호기심에 보고 덮어 두었죠. 그러다 아이비를 만나 돌아온 뒤 다시 책을 살폈었어요.”
“왜? 봐야 하는 이유가 있었어?”
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비가 내 손을 미라로 만들었던 순간, 그녀의 손이 새카맣게 썩어 있는 걸 봤어요. 그때 흑마법 책에 적혀진 글귀가 생각났거든요.”
“무슨 글?”
손끝을 가볍게 매만지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흑마법을 사용한 사람은 피부가 썩어 들어간다고요.”
에던의 한쪽 눈가가 구겨졌다. 대화를 통해 대충 상황을 파악한 듯한 루벤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아이비 대성녀가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겁니까?”
“아마도요. 그리고 그 책 뒤편에 아이비가 사용한 것과 비슷한 주술이 있었는데 그곳에 마녀에 대한 글귀가 적혀 있었어요.”
“마녀라고요?”
루벤이 많이 놀랐는지 목소리를 좀 높였다.
“책에는 주술의 정확한 방법이 나와 있지 않았어요. 대신 마녀의 피로만 이어진다고 되어 있었어요.”
“방법이 나와 있지 않은데 대성녀가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주술이라는 겁니까?”
“네.”
루벤은 기가 찬 표정으로 헛웃음만 내뱉다가 에던을 쳐다보았다.
“대공님. 이건…….”
“알아. 마녀의 피로 이어지는 주술을 사용했다면 한 가지 결론밖에 없지. 아이비 대성녀가 마녀라는 거잖아.”
“그래서 마녀에 관한 책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도서관에 없어서 난감하던 찰나에 맥시엄이 왔고 이 성이 대마법사의 성이라는 걸 알았죠. 그래서…….”
타이밍을 맞춰 맥시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숨겨진 비밀의 공간이 있을 거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에던이 고개를 들어 책장을 다시 살폈다.
“여기서 마녀에 대한 책을 찾아야 한다는 건가.”
“네.”
“신전의 서고에는 자료가 없는 건가?”
“네. 신전의 서고에는 마녀나 흑마법에 대한 것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루벤이 말했다.
“대성녀가 흑마법을 사용했다면 일이 심각해질 겁니다. 단순히 넘어갈 일이 아니에요. 만에 하나 대성녀가 마녀가 아니라고 해도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신전의 명성은 땅에 추락할 겁니다. 또.”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루벤이 에던을 바라보았다.
“그런 여자를 대성녀 자리에 올린 황실의 위엄도요.”
틀린 말은 아니니 부정하지 않겠다는 듯 에던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겠지. 마녀라고 밝혀지는 날에는 더더욱.”
맥시엄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어, 사실은…….”
에던과 루벤의 시선이 동시에 맥시엄을 향했다.
“라티에나 님께 말씀드리긴 했지만 사실 제가 봤습니다.”
“뭘 말이지?”
“아이비 대성녀가 성녀 후보를 미라로 만든 것을요.”
맥시엄은 그 순간이 생각났는지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에던은 가볍게 조소를 흘렸다.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야. 이미 라티에나를 미라로 만들려 했었고, 내가 직접 목격했으니까.”
말하면서도 에던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이제야 조금 의문이 풀리는군. 그렇게 생각해 보면 신전에서 성녀 후보들이 계속해서 죽어 나갔던 이유도 설명이 되잖아. 자네가 설명하지 못했던 그 의문스러운 일이.”
“맞습니다.”
루벤이 난감한 기색으로 목뒤를 쓸었다.
“여러모로 곤란하게 되었군요. 대체 어쩌다 그런 여자가…….”
“치유력을 측정했을 때 분명 엄청났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라티에나 님,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대로 치유력을 확인하려고 아티팩트를 가져왔는데요…….”
세 남자가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검은 책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가죽으로 만들어진 갈색 책 표지들뿐이었다.
그러다가 원형의 책장을 빙 한 바퀴 거의 돌아볼 때쯤 맨 아래에서 붉은 책을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손이 갔고, 흑마법서처럼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붉은 책을 열었다.
책은 마물에 대한 그림과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 페이지로 넘어갈 때쯤, 마녀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찾았다! 여기 있어요.”
루벤과 맥시엄의 시선이 날 향했다.
책장 높은 곳으로 손을 뻗던 에던도 나를 돌아보았다.
“정말요? 저도 보여 주십시오!”
맥시엄이 내게 달려오고, 나는 책상 위에 책을 펼쳐서 함께 마녀에 대한 정보를 읽어 나갔다.
<인간의 심장을 갈취하다가 쫓겨난 마녀들. 초대 황제가 불에 태워 죽인 이후로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들은 지금도 실존하며, 대대로 아주 조금이라도 마녀의 피를 물려받은 자라면 스스로 각성할 수 있다.
마녀의 피를 물려받은 자가 힘을 자각하는 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아주 강한 증오와 살심.
그녀들은 태생적으로 음란하며 나태하고 허영, 교만, 질투, 시기, 욕심, 분노가 가득하다.>
맥시엄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름 끼치네요.”
“뭐가요?”
“아이비 대성녀의 겉모습만 보면 전혀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래 놓고 속으로는 이런 엄청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성녀들의 치유력을 빼앗아 가서 미라로 만들어 놓고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정도니까.”
소름끼치도록 영악한 여자이긴 하다. 겉보기에 아이비는 굉장히 아름답고 순진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완벽하게 감추고 있는 거겠지.”
어느새 뒤에 서서 함께 책을 읽어 내린 에던이 말을 덧붙였다.
“거기 봐.”
에던이 손끝으로 책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그녀들은 흑마법을 누구보다 잘 사용할 수 있으며, 배우지 않아도 주술을 알 수 있다.
특히 영원의 주술을 사용해 다른 이들의 목숨을 훔칠 수도 있다.>
흑마법서에서 봤던 내용과 이어지는 글귀였다.
<영원의 주술은 마녀의 피로 이어지리라.>
그동안 아이비에게 당했던 일들이 차례로 머릿속에서 스치듯 떠올랐다.
크게 추측하지 않아도 아이비가 이 주술을 교묘히 이용한 게 틀림없었다.
목숨을 훔치는 주술을 치유력을 훔치는 주술로 바꿔 사용한 걸 테다.
책장은 한 장 넘겨 살피던 맥시엄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했다.
“이 주술을 교묘히 바꾼 거네요. 라티에나 님의 치유력을 처음부터 훔치려고 했고…… 또, 그때를 생각해 보면 거의 마녀임이 틀림없고요.”
그때였다.
덜커덩 소리가 나더니 왼편의 책장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린 책장 옆에 서 있던 루벤을 바라보았다.
“루벤?”
“아, 책을 꺼내려던 것뿐이었습니다만…….”
루벤도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가 무심코 건드린 책장이 양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장 사이에 또 다른 공간이 드러나고 있었다.
“세상에…….”
대마법사는 부지런하고 특이한 괴짜가 틀림없다.
새롭게 드러난 공간은 그가 모아 놓은 여러 마법 재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유지 마법이라도 걸어 놨는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이 보관되어 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안쪽으로 들어가 선반 위에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유리병을 하나하나씩 살펴보았다.
노래하는 식물의 씨앗, 악몽을 꾸게 하는 사탕, 오염된 새의 피, 올빼미의 발톱 등등.
“마물의 첫 니? 이런 걸 왜 보관해 둔 거야?”
신기하긴 했다. 대마법사치고는 꽤나 악취미인 것 같은 것들을 차근차근 구경하는데, 맥시엄이 갑자기 소리쳤다.
“이거다! 이거에요!”
우리들은 맥시엄에게 집중했다.
맥시엄이 들고 있는 건 평범한 갈색 나뭇잎 몇 장이 들어 있는 유리병이었다.
“그게 뭔데?”
“나비초입니다!”
에던의 질문에 답하는 맥시엄에게 나는 가까이에 다가가 유리병을 살폈다.
“나비초? 그냥 와인에 담가 말린 약초라고 적혀 있는걸요.”
약초를 와인에 담근 게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그냥 알코올이 조금 들어간 것뿐 아닐까? 다른 재료들에 비하면 몹시 평범한 쪽이라고 생각하는데 맥시엄은 더욱 크게 소리쳤다.
“그러니까요!”
그는 조금 전 마녀의 페이지가 적힌 책을 가져오더니 자신이 읽고 있던 다음 장으로 넘겼다.
“여기 나와 있어요. 마녀는 나비초에 알레르기가 있다. 나비초는 나비 나무 잎사귀를 와인에 담가 말린 약초이다. 마녀를 구분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요.”
“정말로요?”
“나비초를 가루로 만들어 마녀의 피부에 뿌리면 붉게 반응한다고 적혀 있어요. 대성녀에게 이걸 뿌렸을 때 피부 발진이 올라오면 마녀인 걸 밝힐 수 있죠!”
그 말에 흥미가 일었는지 에던이 책을 빼앗아 들고 쭉- 빠르게 내용을 읽어내렸다.
“사제.”
“네?”
“내가 평소 자네에게 내리던 금화의 백배를 주지.”
“……예?”
이 상황에서 갑자기 무슨 말이야?
뜬금없는 소리에 맥시엄도 나도 어리둥절하는데 에던이 더없이 냉정한 눈을 한 채 미소 지었다.
“대성녀에게 이걸 실험하고 와.”
“예에?”
“뒷일은 내가 책임져 주지.”
“진심이십니까?”
“이 상황에서 내가 농담 같은 걸 하는 걸로 들리나?”
“아닙니다!”
불과 얼마 전에 에던의 명령으로 날 돕다가 지하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니 거절할 줄 알았는데 맥시엄의 눈은 또렷해졌다.
평소 스파이 짓을 시키는데 얼마를 줬길래 저렇게 눈이 빛나는 거야?
그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수락하려는 듯했다.
“그럼 한 가지 확인하게 해 주십시오!”
맥시엄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아티팩트를 꺼냈다.
“라티에나 님의 치유력을 측정해 보고 싶습니다.”
이제 와서 무슨, 에던은 시큰둥하게 중얼거렸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전에 확인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일도 있고, 이참에 나 역시 제대로 확인해 보고 싶었던 바였다.
조금 긴장된 상태로 아티팩트 위에 손을 올려 두었다.
그리고 대마법사의 비밀 공간은 아티팩트가 뿜어내는 빛으로 한가득 차올라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해졌다.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태양을 옮겨다 놓은 듯한 아주 강하고 밝은 빛이었다.
손을 떼고 빛이 사라졌을 때 맥시엄은 내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
요즘 들어서 주변 남자들의 무릎이 아주 가벼워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