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7)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7화. 도서관의 비밀(7/92)
#7화. 도서관의 비밀
2024.05.07.
쿠-웅.
심장이 지구 내핵까지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머리털이 곤두섰다.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는 그동안의 다정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너무 큰 공포심에 휩싸이면 사람 몸의 온도가 이 정도로 급변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내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져 갔다.
도망치느라 긴장으로 뜨거웠던 체온이 삽시간에 식었고 입술이 바짝바짝 메말라 왔다.
고장 난 목각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뒤를 돌아보자 역시나 에던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래된 고성의 성벽, 달빛 아래에서 검은 망토를 휘날리는 에던은 싸늘히 내리 깐 눈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내내 별 탈 없이 잘해 줘서 잊고 있었는데 단번에 정신이 들었다. 눈앞의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이 남자는 역시 악역이었다.
“라티에나.”
높낮이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그가 처음 내 이름을 불렀다.
“묻잖아, 내가.”
그가 또 한 번 힘주어 말을 내뱉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주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어디 가냐고.”
대답 대신 나는 에던의 왼손에 쥐어진 물건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눈이 돌아갔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날카로운 긴 검날에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무언가를 베고 온 듯 선명하고 붉은 피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오른 것처럼 소름이 돋아나고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매일 밤 대체 무슨 짓을 하다 오는 거야.’
나는 돌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그게…… 이건…… 오, 오해예요.”
에던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되물었다.
“무슨 오해?”
“저는…… 그러니까, 그저 달이 밝아서 달밤에 체조를 좀 하려던 것뿐인…….”
“핑계하고는.”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말을 자르는 에던의 미소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손끝이 땀에 젖어 가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가방끈을 꽉 쥐었다.
“너가 뭐 하려던 건지 알아.”
“네?”
“사직서 안 받아 줘서 많이 화가 났던 모양이네. 이런 식으로 나갈 생각을 한 거 보면.”
마치 내 머릿속에 들어온 사람처럼 정확하게 맞췄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절대 그런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는 듯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정말로…….”
“괜찮아.”
에던은 다시 내 말을 잘랐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의해 내 눈은 커다랗게 떠졌다.
“도망가도 돼.”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도망이 이렇게나 희망적인 말이었다니!
나는 그때까지도 다리를 붙이고 어정쩡히 붙어 있던 성벽에서 완전히 떨어졌다.
“저, 정말요?”
이 순간 나는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질문을 하고 있는지 인식도 하지 못했다.
도망치려고 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었는데.
희망으로 반짝이는 내 눈빛에 에던이 기꺼이 그러라는 듯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얼마든지.”
살았다! 조금 전까지 저승사자로 보였던 에던이 갑자기 천사로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매끈한 입술이 더 아름답구나. 여기서 나가면 더 이상 이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게 아주 조금은 서운할 정도로 예쁜 에던. 하지만 안녕. 난 정말 살고 싶어.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나는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가방을 단단히 부여잡고 그대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힘차게 걸음을 막 내딛는데 에던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대신 잡히면 죽어.”
……예?
이번에 나는 정말로 고장 나 버렸다. 겨우겨우 몸을 뒤로 틀어 그를 바라보자 에던은 목덜미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까딱까딱 움직이고 있었다.
눈꺼풀이 느릿하게 한 번 감아졌다 떠졌다. 어느덧 입가엔 미소가 사라지고 언뜻 나른해 보이기도 한 살기 가득한 붉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내게 꽂혔다.
“……가라고 하셨잖아요?”
“응. 대신 죽일 거야.”
그건 가지 말란 소리랑 똑같잖아.
“그래도 뭐, 일단 계속 도망쳐 봐.”
“주, 죽인다면서요……?”
“응. 그래도 용기를 내.”
“…….”
절로 입이 꾹 닫혔다.
무슨 용기? 여기서 생을 마감할 용기? 그런 목소리로…… 그런 무자비한 표정으로…… 용기를 내라고 하면…….
이런 상황에서 감히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허공을 방황하던 내 눈동자는 다시 그의 왼손으로 향했다.
뚝뚝, 잘 갈아진 검날을 타고 붉은 피가 한 방울씩 바닥으로 떨어질 때마다 수명이 한 달씩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앞으로 내디뎠던 발을 그대로 들어 뒤로 옮겼다.
“무, 무슨 소리이신지 모르겠네요.”
“안 갈 거야? 도망?”
“아유. 주인님도 참. 누가 도망을 간다고 그러세요? 말씀드렸잖아요. 달밤에 체조하던 거라고요.”
그러며 나는 팔을 휙휙 돌렸다.
뻔뻔해야 한다. 살기 위해서 무조건 우기고 보자.
창피함을 무릎 쓰고 나는 팔을 엉망진창으로 휘젓고 허리 스트레칭도 앞뒤 좌우로 좀 해 주고 무릎 굽혔다 펴기도 시전했다.
조용히 날 바라보고 있던 에던은 내 우기기에 넘어가 줄 심산인지 다시 확인했다.
“정말 안 가?”
“안 가요.”
“용기가 부족하네.”
에던이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다고 무섭지 않은 건 아니지만 무표정보다는 훨씬 나았다.
“일단은 그럼 급하니까 이리 좀 와.”
“……네?”
성큼성큼 다가온 에던은 한 손으로 내 허리를 훅 끌어안더니 그대로 어깨에 뒤집어엎어 맸다.
“꺄악! 뭐, 뭐예요?”
시야가 빙글빙글 도는 기분에 정신을 차리기도 전 에던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망토를 꽉 쥐어 잡았다.
“더 놀아 주고 싶긴 한데 오늘은 내가 좀 여유가 없어.”
떨어질까 봐 무서운 마음에 딱 달라붙어 있다 보니 잠깐 사이에 우리는 도서관 앞에 와 있었다.
“여긴 왜…….”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도서관 내부에서는 수상쩍은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순간 망토를 꽉 쥐고 있던 내 손은 맥없이 힘이 풀려 버렸다.
매일 밤 에던이 드나드는 곳. 일부러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었지만 매일 그가 뒤집어쓴 핏자국은 이 안에서 나오는 거다. 오늘 이 검에 묻어있는 피 역시도…….
밤마다 도서관 안에서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짐작했지만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영원히 알고 싶지 않았다. 궁금해하고 싶지도, 답을 알고 싶지도 않았다.
도망 안 치면 살려 준다며. 왜 여기로 데려온 거야?
바싹 마른 입안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에던은 망설임 없이 도서관 문을 활짝 열어젖혔고 나는 충격으로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이…… 이건……!”
도서관 안에는 포털이 열려 있었다.
“포털 이동하는 거 익숙하지 않으면 눈 감아.”
에던은 날 데리고 망설임 없이 포털 안으로 들어갔다.
“윽……!”
쏟아지는 빛에 나는 질끈 힘주어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순간 바람이 바뀌었다.
따스하고 살랑한 동부의 바람에서 차갑고 건조한 겨울바람으로.
눈을 뜬 곳은 어둠과 안개가 자욱한 곳이었다.
콰앙! 쾅! 시끄러운 소리와 피비린내가 주위에 가득했다.
“여긴…….”
어리둥절한 내 혼잣말에 에던이 대답과 동시에 날 바닥에 내려 주었다.
“무너지지 않는 벽.”
맙소사. 무너지지 않는 벽은 제국 끝에 위치한 북부 경계 지대였다.
제국 북부에는 거대한 설산이 산맥을 이루고 있었는데 마물이 가장 먼저 침입을 시도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산맥을 따라서 지어 놓은 성벽이 바로 무너지지 않는 벽, 바로 내가 서 있는 곳이었다.
찬 바람이 온몸을 스쳐 내가 몸을 으스스 떨자 에던이 옆에 세워져 있던 깃발을 아무렇게나 끌어 내려 내 위에 덮어 주었다.
커다란 깃발은 머리부터 무릎까지 내 온몸을 가렸고, 에던은 손가락으로 성벽 건너편을 가리켰다.
“저거, 보여?”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춰 버렸다.
성벽 아래 멀지 않은 곳에서 거대한 크기의 마물과 병사들이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얼핏 도마뱀으로 보이는 마물은 두텁고 긴 꼬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병사 서넛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인형처럼 날아가 떨어지는 병사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겁이 나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이질감이 들어 등 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끔찍한 전투가 일어나는 성벽 앞과 달리 성벽 뒤쪽은 아주 평온한 초원이었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은하수를 이루어 반짝이고 있었고 드넓은 초원 한가운데에는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벽 하나로 너무나 상반되는 초원을 보는 순간 알아챘다.
에던이 아이비를 만나기 전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전쟁을 하던 곳이 여기였다는 걸.
모든 게 짜 맞춰졌다.
설마하니 성안에 포털을 열어 놨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지만…… 에던은 밤마다 이곳에서 마물과 전투를 치르고 포털로 이동해 동부에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멀리 도망쳐 취직한 곳이 미친 악역의 아지트였다니.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데 이 정도면 안면 골절당한 수준이잖아.
“라티에나.”
“네, 네? 왜요?”
에던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경고하는데 마물은 화려한 색을 좋아해. 그러니까 그거 덮고 얌전히 기다려.”
에던이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블론드 머리가 내 머리카락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주인님은요?”
“나 뭐.”
아, 이 남자는 상관없겠구나. 마물이 덤비면 그 즉시 죽여 버릴 테니까.
그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기사 한 명이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올라왔다.
지난번의 에던처럼 피를 뒤집어쓴 기사는 우리를 발견하더니 숨을 몰아쉬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을 쏟아 냈다.
“대공님! 전투하다 말고 대체 어디를 갔다가 오시는 겁니까? 병사들을 다 죽게 만드실 작정이세요?!”
에던이 가볍게 혀를 찼다.
“루벤.”
“예! 변명이라도 해 보시죠.”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했잖아.”
“대공님께 마물을 죽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딨습니까! 최전방에서 싸우다가 갑자기 사라지셔서 다들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세요? 대체 이런 비상 상황에……!”
에던과 같은 검은 망토를 두룬 기사가 지치지도 않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다 말고 멈칫했다.
나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봐선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기사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더니 이내 눈가가 구겨졌다.
“설마…… 라티에나 메리골드?”
이번에는 내 미간이 구겨졌다.
“절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