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73)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73화. 눈치가 없네(73/92)
#73화. 눈치가 없네
2024.07.12.
달칵. 문을 열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고성에서 가장 화려한 내 방.
아이비를 만나고 쓰러져서 북부에서 머물고 있었을 때 에던이 날 위해 꾸며 준 곳이다.
의외로 방과 방 사이에는 소음 차단이 완벽히 되어 있어서 에던이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벽 하나를 둔, 이전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인데도 며칠 사이에 우리 관계는 아주 멀어진 느낌이었다.
몸을 웅크리고 누우니 온갖 생각이 밀려들었다.
이상해. 확실히 이상해.
대마법사의 비밀 공간에서 나온 정확히 그때부터였다.
그날 이후로 에던은 내게 단 한 번도 먼저 치유력을 부어 달라고 얘기하질 않았다.
‘그날 어땠더라.’
잘까, 그런 농담을 했었다. 에던이 뭔가 신경 쓰이는 것처럼 망설이는 모습이 있었지만 우린 손을 잡고 잠이 들었었다.
말 그대로 손을 잡고 잤다.
그러니까 그 순간까지는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가 입맞춤을 시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에던은 날 함부로 만져 대다가도 적당한 선을 지켰다.
최근 들어서는 선을 넘을까 말까 한 적도 있었지만, 내가 원치 않으면 기꺼이 멈춰 주었으니까.
하지만 난 요즘 에던을 거부한 적이 없다.
‘갑자기 왜지?’
웅크린 몸을 펴고 팔을 뻗어 올려 에던이 잡았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로 은은히 들어오는 달빛이 손등에 내려앉았다.
내민 손을 잡았으니, 스킨십을 피하는 건 아닌데…….
‘혹시 그 푸른 알약에 뭔가 있었던 건가?’
똑똑해지는 약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 약이 있으면 대마법사는 도박을 일 년 내내했어도 파산하지 않았을 거야.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을 테니까.
에던은 가끔 고백 금지 구역이라던지 그런 헛소리를 하니까 다른 약을 먹고 들키기 싫어서 대충 얼버무린 걸지도 몰라.
하지만 그 알약의 정체가 뭐라고 한들 나와는 별 상관이 없을 텐데.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나?
그날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내느라 눈가가 찡그려졌다.
맥시엄이 가져온 아티팩트로 내 힘을 확인했고, 신전에 가지 않지 않을 방법을 찾는다고 말했었다.
‘설마?’
혹시, 혹시 이건 정말 나쁜 예감이지만…….
내가 신전에 가지 않고 치유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럼 내가 없어도 치유가 가능할 테니까.
‘미리 멀어질 준비를 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치유력이 사라지면 나는 쓸모가 없으니까, 굳이 옆에 두고 있지 않아도 되잖아.
난데없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충격받아 몸이 굳어 버렸다.
내가 생각했지만 그건 정말 잔인한 가설이었다.
“싫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깊숙이 몸을 감추었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정말 그런 거라면 좀 서럽잖아.
***
마법서를 가지고 나와 도서관에서 읽고 가져다주기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비밀 공간에 들락날락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래서 나는 대마법사의 책상에 아예 자리를 잡았다.
요즘 들어 다시 꽃을 들고 찾아오는 힐스타인이 있었기 때문에 마법서가 도서관에 나와 있는 게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내게 호의적으로 바뀌긴 했지만 힐스타인은 황실의 기사단장이었고, 에던을 미워하는 황후의 직속 기사이기도 하다.
그러니 마법서를 보고 있다는 걸 힐스타인에게 들키고 싶진 않았다.
“이 책도 아니야.”
다 읽은 마법서의 표지에 작은 스티커를 붙였다.
맥시엄이 서고의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거라면서 가져다준 핑크색 곰돌이 스티커였다.
책을 집어넣고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인 마법서들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흘리는데 응접실 통로가 열렸다.
“에던?”
손잡이가 달린 작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었다.
통로가 닫히는 사이 에던은 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두었다. 그러곤 내 손에 들려진 스티커를 바라보고 피식 웃었다.
“비현실적이네.”
“네?”
“세상에 핑크색 곰이 어딨어?”
그러는 당신은 쓸데없는 곳에서 현실적이네. 이건 스티커잖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스티커를 내려두었다.
그러자 에던이 스티커를 집어 들더니 하나를 떼어 내 내 볼에 꾹 눌러 붙였다.
재밌다는 듯 슬쩍 올라간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오늘쯤이면 치유해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끝내 말하지 않는다.
나는 스티커를 떼며 휙 돌아서서 잡히는 대로 마법서를 꺼냈다.
“어쩐 일이에요?”
서운한 마음에 조금 퉁명스럽게 말이 나갔는데 에던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내 팔목을 잡았다.
“이쪽으로 와.”
그가 잡아끄는 대로 책상 앞에 섰다.
가져온 케이크 상자였다. 음식…….
“여기에 치유력을 넣어 달란 말이에요?”
내 말의 의도가 이상하다는 듯 에던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 먹으라고 가져온 거지.”
“케이크를요?”
“케이크는 아니야.”
에던은 케이크 상자를 열자 동그란 호밀빵 같은 게 있었다.
“빵?”
굳이 이걸 상자에 넣어서까지?
의아하다는 듯 그를 올려보자 포크를 쿡 찔러 넣어 잘라 낸 에던이 빵을 내밀었다.
“북부에서 올해 처음 수확한 밀로 만든 빵이야.”
아! 그제야 나는 빵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렇게 상자에 담아 가져왔구나.
“고마워요. 의미 있는 빵이었네요.”
“응. 가져오지 말라고는 하는데, 영지민들의 관습 같은 거야. 매해 내게 가져오거든.”
무심코 빵으로 손을 뻗으려던 나는 멈칫했다.
“그런데 왜 이걸 저한테 주는 거예요?”
“내가 일 년에 한 번 받는 특별한 거니까.”
축제 때도 생각했지만 에던은 북부 사람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는 것 같다. 척박한 땅에서 나온 첫 밀로 만든 빵. 그걸 나한테 가져오다니.
이걸 내게 주는 것이 당연한 듯 말하는 에던의 모습이 기분이 좋아졌다.
“잘 먹을게요.”
빵을 입 안에 넣자 부드럽게 녹았다.
사계절이 뚜렷하지도 않고 추운 땅이라서 이렇게 좋은 밀을 만들어 낼 줄은 몰랐는데.
“맛있어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먹었지만, 객관적으로도 빵은 정말 맛있었다.
에던은 내가 오물오물 먹고 있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안 먹어요?”
“난 괜찮아.”
그 말에 나는 툭 포크를 내려두었다.
“요즘 참 괜찮은 게 많은가 봐요?”
하는 말마다 모두 괜찮아, 괜찮아.
“왜 또 까탈스럽게 구실까?”
능글맞게 내 말을 맞받아치며 에던은 바지 속으로 손을 쑤셔 넣더니 책상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마법서들을 하나하나 훑기 시작했다.
“이 책을 다 보려면 시간 좀 걸리겠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 내가 신전에…….”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는지 에던이 말을 멈췄다.
“왜 그래?”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뭔데.”
에던은 몸을 일으켜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내가 앉아 있는 의자를 끌어당겼다.
날 앞에 두고 다시 책상에 몸을 살짝 기대어 앉았다.
에던을 올려다보았다.
거리감조차 미세한 차이로 멀어져 있었다.
손을 뻗으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딱히 가까이 붙은 것도 아닌, 한 뼘만큼 애매한 거리.
구체적으로 이 서운함을 말하라고 하면 어렵겠지만…….
“내가 뭐 잘못했어요?”
내가 아는데, 에던이 모르고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어.
그러니까 대답해. 나한테 왜 이러는지.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장난스럽게 올라가 있던 에던의 입매가 차분히 내려가는 게 보였다.
느리게 눈을 한 번 깜빡이며,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가 내리면서 목덜미를 쓸었다.
“눈치가 아주 없는 공주님은 아니었네?”
고개를 든 에던의 눈동자가 번뜩이며 이채가 스쳤다.
“몰랐었어.”
“뭐를요?”
“내내 불쾌했었다는 거.”
에던이 얼굴을 찡그리며 나지막이 한숨을 덧붙였다.
“무슨 말이에요?”
“나는 줄곧 당신이 신전으로 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단지 죽기 싫어서라고 생각했는데, 비밀 공간에서 말했잖아. 생각만으로도 토할 것 같다고.”
자, 잠깐만. 그런 이유였다고?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그날 맥시엄한테 한 말 때문에 일부러 치유력을 달란 소리를 안 했다는 거야?
그건 에던 말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에던과의 치유에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미칠 정도로 기분 좋은 쾌락이 느껴져서 이질감이 있었던 거지.
처음부터 생각만으로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상대들은 에던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야.
“하, 하지만 그날 아무 말 없었잖아요. 평소처럼 손도 잡았고…….”
에던이 몸을 숙여 의자를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잠도 잤지.”
의자 손잡이에 올려두었던 내 손끝이 에던의 손가락과 닿았다.
“그러니까…….”
“누가 옆에서 새근새근 잘 자는 동안 참느라 더럽게 힘들었고. 응?”
슬며시 입술을 끌어올린 에던의 시선이 느릿느릿하게 내 목덜미를 스쳤다.
“나는!”
에던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제자리를 찾았다.
“괜찮아요.”
“뭐가 괜찮은데?”
“다.”
전부 괜찮아.
“치유해 줄게요. 원한다면 언제든지.”
순간 에던의 눈빛이 돌변했다. 하지만 곧 차분히 가라앉았다.
“됐어. 하지 마.”
그가 뒤로 몸을 물리며 손가락이 떨어졌다.
나는 덥석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멈춘 에던의 눈길이 맞잡은 손에 닿았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놔.”
“싫어요.”
“후회할 텐데?”
“안 해요.”
“그래 놓고서 매일 하잖아.”
윽. 하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 안 해. 난 당신을 돕기로 했어. 괴로운 거 보기 싫다고.
“라티.”
“네.”
“사실 마물 토벌이 거의 끝나가서 괜찮아. 당신이 직접 치유해 주지 않아도 후추도 있고, 뭐 그게 아니라도 분무기도 있고.”
“그거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몰라? 그렇게 강한 치유력이 머리 위로 뿌려지는데. 멍청이가 아닌 이상 다 알지.”
어쩐지 좀 머쓱해졌다.
그랬구나. 나한테 치유력을 얘기하지 않아서 혼자 아파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내가 만들어 두었던 것들을 이용하고 있었구나.
“그, 그럼 다행이네요.”
나는 에던의 손을 놓았다. 아프지 않은 거면 됐지.
그런데 에던이 몸을 숙이며 훅 내 앞까지 다가왔다.
“그래서, 어디까지 괜찮은 건데.”
“네?”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슬며시 감싸 왔다. 워낙 고요한 공간이라서 그런지 그의 손에 머리카락이 엉키는 감촉이 소리까지 세세하게 들려왔다.
“손잡는 건 괜찮고, 이 정도도 괜찮은 건가?”
“그게…….”
짜릿한 감각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아랫입술을 꾹 짓누르며 눈가를 찡그리자 에던이 매끄럽게 웃었다.
“아니면 더한 것도 괜찮고?”
서서히 올라간 손가락은 귓불을 만지작거리다가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여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순간이었다.
“라티에나 님!”
덜커덩, 책장이 움직이며 맥시엄이 나타났다.
에던의 손끝에 순간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서서히 얼굴을 떨어트리며 에던이 고개를 돌렸다.
“사제는.”
화살 같은 날 선 눈초리가 맥시엄의 얼굴에 꽂혔다.
“눈치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