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75)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75화. 찢어진 입술(75/92)
#75화. 찢어진 입술
2024.07.14.
말을 마친 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조금 열린 창가에서 바람이 들어와 머리에 꽂힌 깃털 장식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에던의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줄곧 머금고 있던 가식적인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황제께서는 동제국과 호의적인 관계를 원하시고 계세요.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죠?”
황후는 대답 없는 에던을 아랑곳하지 않고 잔잔한 미소를 띠며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다행인 일이죠. 동제국에서 마침 시엘라 공주를 데리고 있었고, 그녀를 결혼 상대로 내세웠다는 것도요.”
공주의 이름이 나온 순간 에던의 이마가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황후는 창밖을 바라보며 에던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직접 보지 않아도 그의 반응이 예상되어 더욱더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볼모로 붙잡혀 있던 패왕국의 공주이긴 하지만 대공의 상대로 나쁘진 않죠.”
사생아나, 패왕국의 볼품없는 공주나.
작게 중얼거리는 황후의 혼잣말이 에던의 귀를 때리듯 스쳤다.
“이제는 대외적으로 황녀의 자리에 올랐으니 아쉬운 것 없는 조건입니다. 그러니 대공이 시엘라 황녀와 혼인을 해 주어야겠어요.”
거절 따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을 내뱉으며 황후가 뒤돌아섰다.
에던의 굳은 얼굴을 보고 그녀는 시녀에게서 두루마리 서신을 건네받았다.
또각또각, 에던의 앞에 당당히 선 그녀가 서신을 내밀었다.
“지금껏 키워 주었으니 이렇게라도 보답을 해야지.”
환희에 가득 찬 보라색 입술이 역겹게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
에던의 시선이 곱게 말아진 두루마리 서신서에 닿았다.
짙은 밤색 두루마리는 붉은 리본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보답이라면 이미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삽시간에 눈빛이 싸늘해진 황후가 부채를 탁, 소리 내어 접었다.
그 신호에 시녀와 시종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몸을 숙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쿵. 문이 굳게 닫히자마자 두루마리가 땅에 떨어지고 뒤이어 날카로운 소리가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퍼억-!
황후는 부채 손잡이로 에던의 뺨을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흠집 하나 없던 에던의 뺨이 붉어졌다. 그럼에도 에던은 미동도 없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서 있었다.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어미를 닮아서 그런가. 역겹기 짝이 없군.”
황후는 새빨개진 에던의 뺨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에던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무감각하게 서서 입을 열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외교면 제가 아닌 형님에게 맡기는 편이…….”
“어디서 감히 형님이라는 말을 입에 올려!”
말이 끝나기도 전 황후의 부채가 또다시 에던의 뺨을 강타했다.
에던은 피하지 않았고, 그의 입술 끝이 부채 손잡이에 달려 있던 장식에 맞으면서 피가 터져 나왔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난 네게 선택권을 준 게 아니야. 네 처지를 깨달으라고 한 말이지.”
“네. 그러시겠죠.”
늘 그래 왔던 일이었다. 에던은 텅 빈 눈동자를 내려 황후의 손톱 끝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황궁의 구석으로 쫓겨나던 날에 보았던 손톱이 떠올랐다.
단 한 번도 물 한 방울 묻혀 본 적 없을 만큼 뽀얗고 예쁘게 치장된 손. 진짜 금을 붙인 화려한 장식들. 그때도 생각했었다.
정부인 엄마와 달리 태어났을 때부터 귀족인 진짜 황후는 손톱마저도 오만하다고.
황후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곧 시엘라 황녀가 올 것이야. 형식적인 방문이지만 제대로 맞이하도록 해.”
“…….”
“오랜만에 만난 그녀가 여전히 너와의 혼인을 원한다고 하더군. 이제는 동제국의 황녀니 허튼 곳에 시선이 가지 않도록 신경 써.”
황후는 짜증스럽게 부채를 내던지며 에던을 뒤돌아섰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부채 장식이 짤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갔다.
동제국의 황녀…….
헛웃음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어이없는 거짓이었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동제국에서의 그녀는 그런 위치가 아니다.
왕국이 패한 뒤 볼모로 잡혀갔다가 이런 일에 쓰이려고 양녀가 된 것일 게 뻔했다. 이번 일도 그녀가 원해서 청한 결혼은 아니겠지. 제국 간의 교류란 그런 것이다. 결혼으로 맺는 외교도 특별할 건 없었다. 흔한 방법 중 하나였으니까.
‘차라리 다 버리고 도망을 가.’
잊고 있었던 시엘라와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에던이 그녀에게 해 준 말이었다. 물론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엘라가 그러지 못할 거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은 했다. 하지만 설마 다시 이런 식으로 얽히게 될 줄이야.
이 소식을 들으면 킬리언 형님은 이번에야말로 날 죽이려 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그제야 헛웃음이 나올 것도 같았다.
“거절하면.”
스윽, 손등으로 피를 닦아 낸 에던이 미소를 거두고 황후를 바라보았다.
“그때처럼 또 협박하실 겁니까?”
그 말에 황후가 에던을 향해 몸을 되돌려 세웠다.
“뭐?”
일그러진 얼굴에 잡힌 눈가의 주름을 바라보며 에던이 가볍게 조소를 흘렸다.
“황녀는 폐하 덕분에 더 이상 잃을 게 없는데 이번에는 무엇으로 협박하실 생각이십니까?”
황후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평정을 찾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두루마리를 툭 발로 찼다.
“네 눈으로 직접 읽어라. 황녀가 무슨 선택을 했는지.”
에던은 두루마리를 집어들었다.
끝까지 펼친 마지막에는 시엘라 헤스티나의 이름이 있었다. 에던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름 옆에 청혼에 동의하는 시엘라의 사인이 있었다.
“내 아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무슨 짓이든 못 하겠니. 멍청한 황녀나, 너 같은 버러지 같은 것들 뒤처리하는 건 어렵지도 않지.”
하, 헛웃음을 흘린 에던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북부에 간 덕분에 제국의 영웅 자리에 올라간 것도 내 덕이라는 걸 잊지 마라.”
“…….”
“넌 죽어 마땅한 쓰레기,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야.”
“…….”
밑도 끝도 없는 폭언을 듣는 에던의 얼굴은 익숙한 듯 무미건조하게 메말라 있었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눠 봤자 통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을 것이다.
황후가 북부로 자신을 파견한 것은 이능의 고통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길 바라며 보낸 곳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말없이 두루마리를 붙잡은 에던의 손등에서 두꺼운 핏줄이 도드라지게 올라왔다.
***
똑똑.
노크 소리에 킬리언이 들고 있던 펜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 신호에 황태자 궁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한 킬리언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복면을 쓴 채 나타난 킬리언의 부하가 들어서자 곁에 서 있던 시종들이 빠르게 밖으로 물러났다.
이른 새벽이었음에도 킬리언은 흐트러지지 않은 제복 차림으로 올곧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펜을 쥐고 쌓인 서류에 사인을 하는 그의 표정은 차갑고 무미건조했다.
“알아냈나?”
“네. 전하.”
킬리언은 사각이던 펜을 멈췄다.
“보고해.”
아이비와의 대화를 마치고 킬리언은 부하에게 그간의 일을 알아 오라 명령했다.
에던이 신전으로 들어온 게 확실한지, 아이비와의 접촉이 있었는지, 라티에나 메리골드가 왔다가 대공에게 끌려갔는지 하는 것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시켰던 일을 발 빠르게 알아 온 부하는 입을 뗐다.
“신전에 에던 전하께서 침입했던 일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첫 단추부터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보고였다. 킬리언은 툭, 펜 끝을 종이에 찍어 눌렀다.
“확인이 안 되었다고?”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목격자가 나오지 않았을 뿐, 에던 전하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남몰래 신전에 침입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뿐인가?”
“성기사 한 명이 힐스타인 경께서 벚꽃색 머리카락의 여자를 데리고 끌고 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건 힐스타인 경이 직접 입막음을 해 두었습니다.”
톡톡. 킬리언이 펜을 두어 번 두드렸다.
“힐스타인이 직접?”
“네.”
무슨 속셈이지. 훗날 황위에 오를 것을 대비해 킬리언은 1년에 한 번 근처 제국들을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다. 이번에는 남제국이었다. 함께 이동하는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얼굴을 몇 번이나 마주쳤는데도 힐스타인은 라티에나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어머니인 황후가 곁에 있어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인지.
힐스타인의 여우 같은 눈을 떠올리던 킬리언은 메마른 눈빛으로 펜을 내려두었다.
기회주의자인 데다가 약삭빠른 사내다.
아이비의 황실 무도회 날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어깨가 박살이 나 있었다.
단순한 사고였다고 능글맞게 둘러대기나 하고.
강하고 충실한 개처럼 행동하고 있어 황후에게 예쁨받고 있긴 하지만 때로는 그게 거슬리기도 했다. 까탈스러운 황후인 제 어머니의 마음을 그 정도로 사로잡은 자가 제대로 된 인간일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욕심이 많으니 대성녀의 특권을 차지하려다가 실패해서 비밀로 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다음.”
“에던 황자의 숨겨 둔 성을 찾았습니다.”
숨겨 둔 성 한 두 개쯤이야 킬리언도 가지고 있었으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는 깃펜 끝에 잉크를 찍었다.
“위치는?”
“중부 바로 옆, 동부에 있는 시골입니다. 인구수가 많지 않은 한적한 마을입니다.”
킬리언이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라티에나 메리골드는 에던 황자와 그 성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 말에 펜이 잠시 멈췄다가 이내 스슥 움직여 사인을 마쳤다.
서류를 한쪽으로 이동시키는 킬리언의 입가에 불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지가지 하는군.
“아이비가 라티에나 메리골드를 데려오면 어떤 특권을 주는지 알고 데리고 있는 건가?”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복면을 쓴 부하가 잠시 숨을 돌리고 보고를 이었다.
“성 주위에 북부의 기사들이 쫙 깔려 있었습니다. 은밀히 숨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최소 스무 명 남짓입니다.”
탁. 킬리언이 깃펜을 내던지듯 놓았다.
북부의 기사들의 실력은 제국 내에서도 평균 이상이다.
수도의 기사들이 아무리 훈련을 잘 받았다 한들 실전에서 마물과 싸우는 일이 많은 북부의 기사들에 비하면 차이가 난다.
그런 기사들을 한적한 시골에 두었다니.
그것도 스무 명 남짓이나.
마치 라티에나 메리골드를 보호하고 있는 것 같군.
킬리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오늘따라 심한 두통이 유난히 신경에 거슬렸다.
머리가 조여 오며 관자놀이가 지끈거려 도저히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눈을 감고 가볍게 손짓을 하자 부하가 물러나고 시종이 뒤이어 들어왔다.
“전하, 황후 폐하께서 아침 식사를 함께하자고 청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