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76)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76화. 나도 네가 가진 것을(76/92)
#76화. 나도 네가 가진 것을
2024.07.15.
“어서 오세요, 황태자.”
헨젤라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킬리언을 맞았다.
킬리언은 제 어머니가 내민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하나뿐인 아들, 킬리언을 바라보는 황후의 눈에 만족감이 넘쳐흘렀다.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든든한 체격에 제국민들의 칭송을 받는 강한 이능력, 황제를 꼭 닮은 새카만 흑발은 카리스마까지 보여 주고 있었다.
킬리언은 황후의 자랑이자 완벽한 아들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 따라 주었고, 큰 일탈 없이 모범적인 황태자로 자라나 주었다.
어릴 적에는 연약한 마음씨 때문에 걱정했던 나날도 있었지만 잘 교육시킨 덕에 이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황후가 자리에 앉자 킬리언도 맞은편에 앉았다.
“폐하께서는 아침 일찍 사냥을 나가셨답니다.”
“네. 오는 길에 시종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스프를 한 입 머금고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린 황후가 가볍게 미소를 띠었다.
“에던 황자에게 혼담이 들어왔어요.”
굳이 이런 얘길 아침부터?
평소와 다르게 이해되지 않는 황후의 언질에 킬리언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기를 썰었다.
“그게 저와 관계있는 일입니까.”
황후는 킬리언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냅킨을 내려 두며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상대가 시엘라 공주랍니다.”
굳게 차가웠던 표정은 무너지는가 싶더니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칼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퍽, 소리를 내며 접시가 두 동강 났다.
“치워라.”
그러나 짧은 순간에 정신이 돌아온 듯 킬리언은 무섭도록 낮은 음성으로 명령했다.
그러며 칼과 포크를 얌전히 제자리에 내려 두었다.
“그녀는 이제 공주가 아니지 않습니까.”
킬리언의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매섭게 관찰하고 있던 황후가 빈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공주의 왕국이 망했으니 그녀가 천민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즐거운 기색으로 묻는 황후의 말에 킬리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큰 오해를 하고 있네요. 그러고 보니 황태자는 그동안 시엘라 공주의 안부를 몰랐죠. 그녀는 이제 황녀의 자리에 올랐답니다.”
그 사이 킬리언의 자리에는 새로운 음식이 놓이고 황후의 잔에는 붉은 와인이 부어졌다.
“동제국의 황제가 시엘라 공주를 앙녀로 들였답니다. 예쁜 아이니까 가능했겠죠.”
“그래 봤자 볼모로 잡혀 있던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동제국의 황녀가 되었으니 공주에게도 다행인 일이지요.”
와인이 보랏빛 입술을 타고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제 어머니의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킬리언이 스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모르는 척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글쎄요.”
새로 나온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킬리언이 물잔을 집어 들었다.
“거절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동제국의 황녀라고 해도 볼모나 다름없는 여자입니다. 대공과 혼인은 계산이 맞지 않는 결혼이잖습니까.”
원래 동제국은 왕국이었다. 시엘라 공주의 왕국과 전쟁이 있었고 거기서 승리한 후 동제국이 된 것이다.
몇 년 사이에 세력이 커졌다고 해도 알케다니아 제국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많았다.
동제국과의 교류를 원한다면 정략결혼 말고도 방법은 얼마든지 많았다.
그리고 진짜 황녀도 아닌 패왕국의 공주를 황자의 상대로 내걸다니.
순간 킬리언의 눈가가 구겨졌다.
그럴싸한 가짜 황녀와 사생아 황자의 정략결혼.
제 어머니인 황후의 머릿속 계산쯤이야 뻔했다.
대외적으로는 에던을 그런 식으로 대우한다는 것에는 킬리언도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시엘라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시엘라 헤스티아.
킬리언의 첫사랑이자 그가 유일하게 결혼을 생각했던 여자.
그녀와 에던이 결혼이라고?
그딴 일은 세상이 뒤집혀도 절대 성사되지 않아.
기필코 반대할 것이다. 그리고-.
“대공도 생각이 있다면 거절할 겁니다.”
그 탓에 내게 미움받고 있으니.
앞으로라도 맨정신으로 살아갈 생각이 있다면 거절하겠지.
아버지인 황제가 몰래 물약을 보내 주고 있긴 해도 반은 맹탕인 가짜인 데다가 대성녀의 치유력을 원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킬리언이 잔을 들고 눈짓하자 시녀가 다가와서 와인을 채웠다.
꿀꺽, 그의 목울대를 타고 붉은 와인이 차갑게 넘어갔다.
말이 없던 황후는 그런 킬리언을 응시하다가 잔을 내려 두었다.
“아뇨. 에던 황자는 이미 청을 받아들였어요.”
황후의 말에 와인을 바라보던 킬리언의 눈빛이 무섭도록 싸늘해졌다.
***
집무실로 돌아온 킬리언이 입구 근처에 있던 커다란 화병을 집어 들어 벽을 향해 사정없이 내던졌다.
꽂혀 있던 꽃들이 날아가 떨어지고 값비싼 화병은 와장창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부서졌다.
파편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그중 하나가 킬리언의 턱 끝을 스쳤다.
쓰라린 감촉과 함께 턱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킬리언은 분을 삼키지 못하고 파편 조각을 꽉 쥐어 잡았다.
날카로운 파편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검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빌어먹을.”
분을 참지 못한 푸른빛의 이능이 킬리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탓에 지끈거리는 두통이 밀려오자 킬리언은 파편을 휙 집어던지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숨 쉬기가 버거웠다.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킬리언의 시선이 크리스털 샹들리에로 향했다.
오전 햇살이 들어와 반짝반짝 눈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시엘라와의 첫 만남도 샹들리에 아래에서였지.’
눈을 감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그녀와의 추억은 사라지지도 않고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
침략 위협을 받고 있던 엘드몬 왕국에서 제국과의 연합을 위해 공주를 보내 왔다.
‘시엘라 헤스티아입니다.’
풍부한 자원도, 많은 수의 기사도, 특출난 능력자도 없는 그저 그런 작은 왕국.
시엘라는 보잘것없는 왕국의 유일한 공주였다.
동왕국과의 전쟁에서 질 것을 예감한 헤스티아 왕은 하나뿐인 딸을 볼모로 보내서라도 왕국을 지키려 했다.
그것이 통할지 안 통할지는 후의 문제였고, 어떻게든 제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황태자님 곁에서 정원을 거닐어도 될까요?’
당시 갓 스무 살을 넘긴 그녀는 왕국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라 순수하고 티 없이 맑았다.
그럼에도 예의범절은 모두 갖추고 있어서 품위까지 있었다.
사내라면 누구라도 탐내할 만했다.
이슬비 내린 새벽 숲의 하얀 꽃망울 같은 여자.
‘그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화려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단아하고 우아한 매력을 지닌 시엘라는 단숨에 황제와 킬리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황제는 킬리언의 마음만 괜찮다면 시엘라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킬리언은 처음으로 누군가를 마음에 품었다.
지끈거리던 두통도 그녀 곁에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대가도 한도도 없는 배려까지 베풀었다.
‘내게 마음이 없다면 생길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어.’
‘하지만 저는…….’
‘왕국에 대한 지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킬리언.’
놀란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눈동자에 고마움과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자신을 보던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다.
어느 순간부터 눈이 마주치면 양 뺨부터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평생을 이 여자와 함께 살고 싶었다.
시엘라가 에던을 만나기 전까지는.
‘죄송해요. 에던 황자님이 좋아졌어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 약속을 취하해 주세요. 저는 황태자님과 결혼할 수 없어요.’
빌어먹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시엘라와 에던은 공식 행사에서 잠깐 스쳐 지나갔던, 그것뿐인 사이다.
그런데 한 달 내내 함께 추억을 쌓은 나보다 더, 에던이 좋다고?
‘제가 전하께 마음이 없어도 이해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에던을 택한 마음까지 이해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부탁드려요, 전하. 에던 황자님과 결혼하고 싶어요. 황자님도 제가 원하면 그렇게 해 주신다고 했어요.’
능멸이었다.
사랑해서 배려했고, 사랑해서 전부 이해하려고 했지만 그 사랑의 보답이 에던에게 가는 것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차라리 내 눈앞에서 사라져.’
분노에 찬 킬리언은 왕국으로 지원하던 병력을 모두 철수시켰고, 시엘라의 왕국은 패했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그때는 배려 따위는 없이 강제로라도 옆자리에 앉힐 생각이었다.
대성녀가 나타나 이능의 부작용도 옅어지고 있으니 황위에 오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에던을 택한 것을 후회하게 할 것이었다.
왜 내가 아닌 에던을 택한 거냐고. 네가 선택한 에던은 이능의 부작용으로 미쳐 가고 있다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할 생각으로 에던의 신전 출입을 금지하고,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다시 시엘라를 만나면 에던을 보고 눈물을 흘리게 할 작정이었다.
결국 내 옆으로 돌아오지 않았느냐며. 죽을 때까지 후회하라며 그렇게 곁에 둘 생각이었다.
더 이상 배려 따위는 없이.
“시엘라 헤스티아…….”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감겨 있던 킬리언의 눈이 서서히 열렸다.
크리스털은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시엘라의 안부를 몰랐다고? 그럴 리가.’
킬리언은 그 누구보다 시엘라의 행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왕국이 패한 후 그녀가 동제국에 볼모로 잡혀간 것도, 황녀가 없던 동제국의 황제가 그녀를 볼모로 삼기 위해 양녀로 들인 것도.
그 제안을 거절한 시엘라를 강제하기 위해 그녀의 아비와 어미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한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
샹들리에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크리스털에 반사되어 무지개색으로 빛났다. 그 중 언뜻 보이는 연초록빛이 시엘라의 눈동자 색을 연상시켰다.
제게 뒤돌아서 에던의 품으로 향하던 시엘라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순간 킬리언의 몸에서 푸른빛 이능력이 솟아 나와 샹들리에를 휘감더니 그대로 창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박살 난 크리스털들이 찬란한 보석비가 되어 궁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들어와.”
나지막한 한마디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의 부하가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난장판이 되어 있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부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명을 기다렸다.
“무너지지 않는 벽을 부숴라.”
킬리언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명령을 했다.
‘네가 내 것을 가지겠다면, 나도 네가 가진 것을 가져야지.’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