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80)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80화. 무너진 벽(80/92)
#80화. 무너진 벽
2024.07.19.
이렇게 잘생긴 외모는 전부 망가져 온데간데없었다.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도 타고 난 재처럼 붉고 새카맣게 변했고, 트러블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도 울긋불긋한 핏줄에 뒤덮여 얼룩덜룩하게 변해 버렸다.
예쁜 입술도 검은색으로 오염되어 있었고, 눈은 흰자위 없이 새빨간 눈동자만 남아 쳐다보기조차 괴로울 정도라고 원작에 묘사되어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괴물이 되면…….”
후두둑,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예뻐해 주지 않을 거야.”
이런 협박도 아닌 게 통하지 않는다는 거 알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지.
다른 거 다 해도 흑마법은 안 돼.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농담으로라도 안 돼.
“농담 한 번 한 거 가지고. 이게 울 일이야?”
불안에 떠는 내 모습에 에던은 커다란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리고 달래듯이 몇 번이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겠어. 약속할게.”
“정말이죠.”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흑마법에는 손 안 댈게.”
그때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 닫혔던 포털이 푸른빛을 내며 도서관을 환하게 비췄다.
“대공님!”
루벤이었다. 다급하다 못해 경직된 목소리.
얼굴을 보지 않아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던은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는 다른 부하들을 데려온 루벤에게 경위를 캐묻지 않고 그들을 슥 훑었다.
“무슨 일이지?”
잠깐이지만 루벤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와 스치듯 마주쳤다.
고개를 숙인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이었다.
“벽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말을 하며 루벤은 에던에게 검을 양손으로 내밀었다.
평소 에던이 쓰던 것보다 훨씬 더 길고 커다란 검이었다. 세워서 길이를 재면 내 키보다 더 클 것 같은.
에던은 망설임 없이 그 검을 쥐어 잡았다.
“상황은.”
“초원으로 마물이 쏟아져 나가고 있습니다. 막고 있긴 하지만 뚫릴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지만 루벤은 내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놀랄까 봐 걱정하는 듯.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고 중요한 말만 골라서 전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급하게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걸려 있었다. 아직 노을이 완전히 지지 않은 시간이었다.
마물이 나올 때가 아니다.
벽이 무너졌다고 해도 틈을 열지 않으면 마물은 벽까지 올 수 없다.
그런데 마물이 쏟아져 나간다니.
“에, 에던.”
내려 두었던 망토를 걸치는 에던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날 내려보는 에던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괜찮아. 다녀올게.”
정확한 상황은 몰라도 이 상황이 불러올 결과는 알 수 있었다.
에던은 어떻게든 마물을 막을 거고, 그 후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될 거라는 거.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작은 물병을 꺼내 에던의 손에 쥐여 주었다.
“힘들면 이거 마셔요.”
병을 손에 쥔 에던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래.”
다급함이 느껴졌다.
팔을 붙잡은 내 한 손을 가볍게 밀어내며 에던은 빠르게 뒤돌아섰다.
그의 어깨에서 설명하기 힘들 만큼 무거운 짐이 느껴졌다.
토할 거 같다는 거 당신은 아니야. 몇 번이고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어.
그러니까 망설이지 말고 싸워.
말하려고 했는데 에던은 순식간에 포털 너머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
에던이 북부로 가고 12시간째, 밤새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럼에도 잠은 오지 않았고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말할 수 없는 불안함이 몰려왔다.
이능을 사용한 에던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강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뭘까 이 초조함은.
드넓은 북부의 초원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무너지지 않는 벽과 북부의 도시 사이에 펼쳐진 강이 가로지르고 있는 광활한 땅.
포털이 없었더라면 벽에서 도시까지는 도달하는 것에 며칠은 걸렸을 거리였다.
그런 넓은 땅을 가운데 두고 있지만 마물의 속도라면 순식간에 도시가 난장판이 될 것이다.
축제 때도 희미하게 보이는 거리에서부터 도시까지 순식간에 날아왔었으니까.
하늘을 날지 않는 마물이라고 해도 크기부터 다르니 달리는 속도를 기사들이 뒤쫓기는 힘들다.
어떻게 해서든 무너진 벽을 막고 그곳에서 처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피해를 입지 않는 방법일 터였다.
‘그렇긴 해도 그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벽이 얼마나 무너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쏟아지는 마물들을 막아 낸다는 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북부에서 보았던 마물과의 싸움 장면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건조한 공기와 높디높은 벽, 피 튀기는 곳에서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마물과 싸우던 기사들.
그 중심에 서 있던 에던.
‘왜 벽이 부서진 거지?’
마물 토벌은 분명 끝나 가고 있다고 했고, 에던은 겨울나기 준비에만 신경을 쏟을 수 있을 만큼 여유를 찾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서질 만한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가 의도해서 부서트렸다면 모를까.
“하아.”
마법서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책을 덮고 고성을 1층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나갔다.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가 성의 정원과 창문 사이로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잠을 자지 못했지만 컨디션은 나쁘지 않다. 아이비에게 빼앗겼던 힘도 거의 되돌아와 있었다.
나는 치유력을 발현시켜 성의 모든 곳에 흘려보냈다.
에던이 돌아왔을 때 편해질 수 있게.
한 발자국씩 느리게 걸으며 벽과 문과 천장, 모든 곳에 치유력을 쏟아부었다.
포털이 있는 도서관에는 더 많이 뿌려 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던의 침실 문을 열었다.
함부로 들어와서 미안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에던의 침실은 들어올 때마다 썰렁했다.
물건이라고 할 것도 없는 무미건조한 방을 가볍게 눈으로 훑으며 들어갔다.
‘여기도 많이.’
돌아오면 에던이 쉬어야 하는 장소니까.
도서관만큼이나 가득 치유력을 발현시켜 벽과 침대에 서서히 스며들게 했다.
그리고 이만 돌아서려던 때였다.
침대 옆 콘솔의 서랍이 조금 열려 있었다.
“뭐지?”
처음엔 그냥 닫으려고 했는데, 빨간 끈이 튀어나와 있어서 서랍을 열고 물건을 꺼냈다.
두껍고 짙은 갈색 두루마리가 말리다 만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빨간 끈은 그 위에 대충 던져져 있었다.
“…….”
보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한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동제국의 시엘라 헤스티아 황녀와 에던의 정략결혼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몇 번을 다시 처음부터 읽어도 황녀의 결혼 상대자로 지목된 사람은 에던 디트리히 2황자였다.
맥시엄이 말했던 청혼서다.
진짜였어. 헨젤라 황후가 에던을 불렀던 날, 그가 맞았던 날 이걸 받았던 거야.
심장이 쿵쿵 뛰었다. 믿기지 않아서 멍하니 두루마리를 그대로 내려다만 보았다.
에던 디트리히.
시엘라 헤스티아.
나란히 적힌 그 두 이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뒤늦게 서신의 마지막 줄을 확인한 나는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두루마리를 쥔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마지막 부분에 시엘라 황녀의 사인이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
에던의 사인도 함께 있었다.
잠을 못 자서 잘 못 본 거 아닐까? 생각하며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떠 보아도, 분명 에던의 사인이었다.
정확하게 에던 디트리히의 이름을 필기체로 갈겨 놓은.
“동의…… 한 거야?”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정말이지 세상은 계획대로 하나도 돌아가는 법이 없다.
어떻게 단 한 번도 내 마음대로 돌아가 주질 않아.
이럴 거면 차라리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게 해 주지.
맥시엄이 정략결혼에 대해 말을 했어도 크게 신경을 쓰고 있진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에던이 내게 너무 다정해서. 너무 잘해 주니까.
지켜 주겠다고 했으니까 막연히 그가 계속 내 옆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니까.
신전으로 가지 않고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그의 곁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에던 디트리히…….”
에던의 사인을 하나하나 눈으로 짚었다.
몇 번을 봐도 에던의 이름이었다.
그제야 불현듯 루벤이 에던의 방에 들어가려다가 나와 마주쳐 되돌아섰던 일이 떠올랐다.
설마 이걸 가지러 왔던 걸까.
그날 루벤은 내가 에던에게 치유력을 사용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지.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돌아선 걸까?
이걸 가지러 왔다는 걸 들키면 내가 마음 상해서 진짜로 치유 안 하겠다고 할까 봐?
툭. 두루마리를 내려놓고 시큰거리는 눈을 손바닥으로 꾹 짓눌렀다.
“바보 아냐?”
이런 거 봐도 난 에던을 치유할 수밖에 없다고.
에던을 좋아하니까.
너무 좋아하니까.
서러워서 콧잔등이 시큰해져 왔다.
나는 꾹꾹 손바닥으로 눈가를 더 누른 다음에 두루마리를 곱게 말았다.
빨간 끈까지 둘둘 말아 리본으로 꽉 묶어 콘솔 서랍에 다시 넣어 두었다.
그리고 서랍을 굳게 밀어 닫았다.
“이대로 평생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멍하니 서랍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쾅!
푸른 섬광과 함께 엄청난 소리가 정원에서 전해졌다.
어깨를 흠칫 떨었다가 다급히 창가로 다가가니 성문이 부서져 있고 그 사이로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이 유유히 들어오고 있었다.
힐스타인……? 은 아니다. 이제 힐스타인은 저런 식으로 오지 않아.
그리고 누가 되었든 저런 식으로 들어온 자가 좋은 사람일 리 없다.
나는 재빨리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응접실과 연결된 대마법사의 비밀 공간으로 숨을 생각이었다.
거긴 에던과 루벤, 나와 맥시엄밖에 모르는 공간이니까.
그런데 1층에 내려와 로비에 발을 내디딘 순간 현관문이 벌컥, 열렸고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라티에나 메리골드.”
내 이름을 부르며 커다란 체구의 남자가 검은 로브를 천천히 벗었다.
부드러운 흑발의 미남자.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