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84)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84화. 실패(84/92)
#84화. 실패
2024.07.23.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몇 번이나 깜빡였지만 정말로 맥시엄이었다.
“라티에나 님!”
맥시엄은 눈알이 떨어질 듯 크게 뜨면서 서둘러 날 향해 달려왔다.
“맥시엄!”
건물 옆으로 발 디딜 곳을 찾아 다리로 더듬거리던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떨어지지 않게 양팔로 창틀을 꽉 붙들었다.
“팔 잡을게요!”
“윽. 아, 아파요…….”
“죄송해요, 조금만 참으세요!”
맥시엄을 내 양팔을 잡아 위로 끌었고, 나는 거의 바다에서 물고기가 건져지듯 당겨 올려졌다.
창틀을 넘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픈 몸이었던 데다가 긴장 상태로 창틀에 매달렸던 것이 에너지 소모가 컸는지 숨이 찼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통증을 느끼고 양팔을 모아 상체를 보호하듯 감싸며 웅크렸다.
“아으…….”
아이비가 때린 것 때문에 멍이 들어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게다가 맥시엄이 날 들어 올릴 때 잡은 팔과 창틀에 쓸린 배 안쪽이 아파 왔다.
망할 마녀 계집애! 티 안 나게 보이지 않는 곳만 골라서 때리다니.
눈물이 고일 정도로 아팠지만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숨을 돌리며 꾹 참았다.
그사이 숨을 몰아쉬던 맥시엄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내가 창에 매달려 있는 걸 보고 많이 놀랐는지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설마 창문으로 도망치려 하신 거예요?”
“문으로 도망칠 수는 없잖아요.”
맥시엄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휙 돌려 창밖을 살피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건물 외벽에 조각상들이 군데군데 붙어 있어서 발 디딜 곳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안 무서우세요?”
왜 안 무섭겠어. 단지.
“아이비의 손에 미라가 되는 것보다는 나아요.”
그게 더 무서운 것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형평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 마녀인 아이비는 내 힘을 가져갈 수 있는데, 나는 그걸 방어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게. 치유력을 가지고 있으면 뭐 해. 오직 남을 위한 힘일 뿐인데.
맥시엄은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그제야 고개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내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세요? 어디 다치셨어요? 설마! 혹시 또 힘을 빼앗겼다거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어색하게 만들어 낸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옷 속을 보면 멍 때문에 상태가 난리도 아닐 거야.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욱신거리니까. 하지만 지금 상처를 보이면 맥시엄이 더 걱정하겠지. 도주에 방해될 정도로 아프진 않으니까 버텨 보자.
“그보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맥시엄이 먼저 몸을 일으키고, 내가 일어날 수 있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낮에 고성으로 갔었어요. 지난번에 가져온 대마법사님의 책에서 힌트가 될 만한 걸 찾았거든요. 사실 치유력에 관련된 거라기보다는 마물과 관련된 거지만…… 어쨌든 관계가 있을 것 같아서 그걸 라티에나 님께 알려 드리려고 했어요.”
“마물과 관련된 마법이라고요?”
“네. 그랬는데 성문과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고, 라티에나 님이 안 계시잖아요. 점심시간이었으니까 분명히 계실 시간인데.”
“아침이었어요. 킬리언 황태자님께서 고성에 찾아왔던 시간이.”
먼저 방문으로 향해 걸음을 옮기던 맥시엄이 깜짝 놀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예? 설마 킬리언 황태자님께서 라티에나 님을 여기로 납치해 온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맥시엄의 미간이 찌푸리며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 여자가 기어코 황태자님까지 이용한 거군요.”
“그런데 내가 북부로 갔거나 잠시 마을로 외출했다는 생각은 안 한 거예요?”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대공님의 부하가 와서 라티에나 님을 찾는데 상황이 이상하더라고요. 북부의 벽은 무너지고, 때맞춰 라티에나 님이 고성에 안 계신다는 자체가요. 그래서 혹시나 그 마녀가 무슨 짓을 했나 싶어서 신전으로 온 거에요. 계속 사건들이 있었잖아요.”
복도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밖을 살피던 맥시엄이 내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일단 여기서 나가요. 제가 사용하는 비밀 통로를 이용하면 몰래 고성으로 갈 수 있어요.”
“그전에 잠시만요, 맥시엄.”
“네?”
“비밀 공간에서 챙겼던 나비초, 혹시 가지고 있어요?”
“아! 물론이죠!”
사제복 안쪽을 더듬거리던 맥시엄이 나비초 잎사귀가 든 작은 유리병을 내밀었다. 우리가 처음 발견했던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여기요. 계속 가지고 다니긴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직 기회가 없어서 사용을 못 했어요.”
“괜찮아요. 혹시 모르니까 지금은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네.”
맥시엄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밖으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 행동이 너무 당당해서 무심결에 따라가려던 나는 멈칫했다.
창문을 뛰어내리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한 방법이지만 밖에 기사들이 있지 않나?
“따라오세요. 이쪽이에요.”
그러나 우려와 달리 맥시엄은 몹시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문손잡이를 부수고 들어왔었지? 맥시엄을 따라 복도로 나가자마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밖을 지키고 있던 성기사들이 전부 벽에 기대어 잠든 것처럼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목소리를 낮춰 묻자 맥시엄이 웃었다.
“마법이요.”
“……?”
고개를 갸웃거리자 맥시엄이 설명을 덧붙였다.
“대마법사님의 비밀 공간에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을 잠들게 할 수 있는 종이 피리가 있었어요.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죠. 대마법사님의 마법 도구를 내 손으로 직접 사용해 보다니!”
대마법사의 마법을 사용한 게 만족스러웠는지 맥시엄은 히죽, 눈을 반달로 휘며 웃었다.
“그런 걸 언제 봤어요?”
“지난번에요. 아, 그때 가져온 건 아니고요. 오늘 챙겨온 거예요. 일회용이고 하나밖에 없어서 더 이상 사용하진 못하겠지만 30분 정도는 괜찮을 것…… 라티에나 님?”
뿌듯한 얼굴을 하고선 슬금슬금 앞서 걸어가던 맥시엄이 말을 멈추고 날 돌아보았다.
“뭐 하세요?”
나는 쓰러져 있던 기사의 옆구리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길이가 좀 있어서 무겁긴 하지만 얇은 외날 검이라서 신전을 빠져나가는 동안까지는 충분히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도, 혹시 몰라서요.”
검 같은 거 사용해 본 적 없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으으…….”
복도 왼편 끝의 계단으로 향하는 도중 잠들어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머리를 감싸 쥐고 눈을 떴다.
“……어? 뭐, 뭐야?”
“으헉!”
고개를 들자마자 맥시엄과 눈이 딱 마주친 기사는 당황하는 듯싶더니 곧장 검 손잡이를 붙잡았다.
“이런 젠장! 움직이지…… 커헉!”
빠각! 나는 기사의 정수리를 온 힘을 다해 검으로 내리쳤다. 물론, 검 뒷날로.
“눈 뜨지 마!”
퍽! 퍽! 두어대 더 머리를 치니 기사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놀라서 안색이 창백해졌던 맥시엄이 기사를 한번, 나를 한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방금 두개골이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하아. 진짜로 부서지진 않았으니까 괜찮잖아요. 빨리 가요.”
“라티에나 님.”
“왜요.”
“아, 아니…… 저도 검을 챙길게요.”
대마법사를 사랑하는 것치곤 맥시엄의 마법 실력은 영 꽝이었다.
30분은 버틸 거라는 수면 마법은 빠르게 풀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기사들의 목덜미와 정수리를 사정없이 퍽퍽 치며 계단에 도달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면 마법의 효과 덕분에 비몽사몽인 기사들이 손쉽게 기절해 준 것이다.
1층에 도달해 문을 나서자 나온 곳은 신전 뒤에 위치한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신전을 둘러싼 암석을 떼어다 만든 것 같은 하얀 원형의 거대한 분수대가 물을 뿜어 내고 있었다.
밤중인데도 분수대 옆으로 환하게 불빛들이 켜져 있어서 주변의 초록의 잔디와 풍성한 꽃들이 잘 보였다.
우린 정원의 가장자리로 건물 벽을 따라 슬금슬금 이동하기 시작했다.
맥시엄이 앞서고, 나는 절뚝거리며 그의 뒤를 쫓았다.
평범한 내가 건물 밖으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진 못했는지 다행히 성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무사히 건물 벽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맥시엄이 비장한 눈빛으로 날 응시했다.
“라티에나 님, 달리기 잘하세요?”
응? 갑자기? 평소에도 잘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이 몸으로 달리기는 전혀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몸에 힘이 들어간 상태로 검까지 휘두르며 움직인 탓인지 점점 상처의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사실 지금은 걷는 것도 힘들었다. 티 내지 않고 버티고는 있었지만 멍 때문에 온몸이 욱신거렸으니까. 아무래도 아이비에게 맞은 부위에 피멍이 든 거 같았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더라면 잔디밭이라도 좋으니 당장이라도 눕고 싶은 상태였다.
“달리기는 왜요?”
“저기 저 돌 사이의 틈새 보이시죠?”
맥시엄은 정원을 가로질러 보이는 암석 사이를 가리켰다.
하얀 암석 사이에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틈이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깜빡였다.
“보여요.”
“정원을 가로질러서 저 사이로 들어가야 해요. 돌 틈 안에 있는 샛길을 지나야 제가 사용하는 비밀 포털이 나오거든요.”
나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스윽 살폈다.
정원 외각을 따라 걸어가면 좋겠지만, 거대한 정원의 크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지체될 것 같았다.
“노출될 위험이 있긴 하지만 빨리 통과하는 편이 훨씬 나아요. 먼 거리는 아니니까 힘껏 뛰어가면 들키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달리기가 좀 빠른 편이긴 한데 조금만 맞춰 주시면…….”
이 상태로 달리기라니.
나는 슬쩍 다리에 힘을 줘 봤다. 그리고 밀려오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눈가를 찌푸렸다.
다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저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라티에나 님?”
하지만 아프다고 망설일 때가 아니다. 할 수 있어.
“가요, 맥시엄. 달릴게요.”
내가 막 고개를 끄덕인 때였다. 갑자기 기사들이 소란스럽게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은 없습니다!”
“이쪽도요!”
맥시엄과 나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서로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튀어요!”
우린 약속이나 한 듯 무거운 검을 내던지고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꺄악!”
정원의 절반도 채 달리지 못했을 때 내 몸은 이능의 푸른 빛에 휩싸여 허공으로 떠오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