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85)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85화. 가증스러운(85/92)
#85화. 가증스러운
2024.07.24.
“라티에나 님!”
그사이 무장한 성기사들이 정원을 빙 둘러 우리를 에워싸고, 차분한 발걸음 소리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신전 안에 쥐새끼가 숨어 있었을 줄은 몰랐군.”
맥시엄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능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손에 붙잡혀 허공에 떠 있던 나도 상대를 바라보았다.
킬리언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아이비까지.
킬리언은 끝이 살짝 올라간 눈매를 나른히 내리떴다. 그러곤 날카로운 시선으로 맥시엄을 스치듯 훑고 날 쳐다보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무표정한 얼굴.
이마 뒤로 쓸어 넘긴 머리카락은 낮에 봤던 것과 똑같이 어떤 흐트러짐도 없었다.
에던보다 조금 짙은 눈썹과 에던보다 조금 짙은 붉은 눈동자 색.
그리고 에던과 똑 닮은 콧대와 에던보다 좀 더 짙은 턱선.
단정히, 아주 바른 자세로 서서 날 응시하는 것뿐인데 킬리언의 눈빛은 날 찍어 내리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싸늘하다 못해 소름이 끼치는 눈빛으로 날 응시하던 킬리언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러자 그의 발끝에서부터 뻗어 나온 이능의 빛이 내 몸을 단단히 조여 왔다.
강한 힘에 아이비에게 맞은 상처가 사정없이 짓눌러졌다.
“쿨럭!”
가슴을 옥죄는 고통에 기침과 함께 숨을 토해 내듯 내뱉었다.
입을 열어 숨을 들이켜 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고, 내 눈에는 삽시간에 눈물이 고였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공포심에 휩싸였지만 킬리언은 차가운 얼굴로 더욱더 내 갈비뼈를 조여 왔다.
싸늘하게 식어 가는 내 얼굴을 바라보는 맥시엄의 이마에서부터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맥시엄은 빠르게 몸을 돌려 킬리언을 향해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황태자님 부탁드립니다! 라티에나 님을 놔주십시오! 제발요!”
“이해가 안 가는군, 저 여자가 뭐라고 사제가 무릎을 꿇고 애원을 하지?”
“절 위해서가 아닙니다! 라티에나 님이 잘못되시면 분명 황태자님께서도 후회하실 겁니다! 그러니……!”
킬리언이 눈썹을 구겼다.
“후회?”
픽- 킬리언이 짧게 비웃음을 흘렸다.
“웃기지도 않는군.”
킬리언은 이능의 빛을 거둬 나를 그대로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털썩!
성인 키만 한 높이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나는 그대로 쓰러지듯 잔디 바닥에 몸을 부딪쳤다.
온몸을 꽉 옥죄였던 이능의 힘이 사라지자 버겁지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컥! 쿨럭, 쿨럭!”
다급히 숨을 들이켠 탓에 거친 기침이 쏟아지고, 그런 날 보고 맥시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향해 뛰어오려던 순간이었다.
“꺄악! 라티에나!”
한 템포 늦게, 아이비가 걱정이 담긴 가냘픈 목소리로 내 이름을 외쳤다. 내내 킬리언의 옆에서 안색 하나 안 바뀌고 날 보고 있었던 주제에, 맥시엄의 어깨를 치고 내게 달려왔다.
“세상에, 라티에나! 괜찮아?”
와락 나를 끌어안은 아이비는 쓰러진 내 몸을 반쯤 일으키더니 어깨를 잡고 이곳저곳 살폈다.
정말로 친구를 걱정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어디 자세히 좀 봐. 어떻게 해…….”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 하지만 사람들을 등진 채로 날 내려다보는 아이비의 눈은 웃느라 반달로 휘어져 있었고, 입은 찢어질 듯 웃고 있었다.
고통으로 어깨를 떨며 숨을 겨우 내쉬는 내가 웃긴다는 듯이, 이 상황이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말이다.
나에게만 보이는 아이비의 얼굴은 일부러 만들어 내려 해도 낼 수 없는, 흉내조차 어려운 기괴한 표정이었다.
“놔!”
가까스로 진정한 나는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아이비의 손을 쳐 냈다.
“아얏……!”
아이비는 내가 무척 강한 힘으로 떠민 것처럼 뒤로 털썩 밀려났다.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을 에워싼 성기사들이 동시에 칼을 뽑았다.
“대성녀님!”
“대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아이비는 어깨를 파르르 떨더니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전 괜찮아요. 제 친구가 무서워하니 검은 거두어 주세요.”
“그런…….”
“부탁해요.”
서로의 눈치를 보던 기사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을 거뒀다.
아이비는 천천히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왜 그래. 라티에나. 킬리언 님께서 화가 나시면 나도 네 편을 들어주는 거 힘들…….”
“그 가증스러운 연기 좀 집어치워.”
“라티에나.”
“네가 부탁한 일이잖아? 날 이런 꼴로 만들려고 했던 거 아냐?”
“어떻게 그런 말을…….”
내 말에 아이비는 잔뜩 상처받았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울먹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킬리언을 돌아보았다.
“너무하세요, 킬리언 님! 이렇게 거칠게 다루시겠다는 얘긴 없으셨잖아요. 저것 보세요. 제 친구가 절 원망하잖아요…….”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아이비를 바라보던 킬리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와 마주친 시선은 조금 전과 똑같이 차가웠다.
“정말이지 너무 하세요. 아무리 라티에나가 뺨을 때렸다고 한들 제 친구잖아요. 저 서운하단 말이에요…….”
진짜 구토가 나올 것 같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한 연기를 할 수가 있지?
몸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이 있었지만 나는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맥시엄이 재빨리 날 부축해 일으켰다.
날 돕는 맥시엄을 바라보는 아이비의 시선이 서늘해졌다.
“사제님, 제 친구에게서 떨어지세요.”
아이비가 손짓을 하자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성기사 두 명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맥시엄을 멀찍이 끌고 갔다. 중죄인처럼 맥시엄의 양팔을 옭아맨 그들의 행동은 몹시 거칠었다.
아이비는 다시 허공에 손짓을 했고, 그걸 본 하녀 한 명이 펜과 종이를 가져다 바쳤다.
“라티에나, 여기에 사인하면 신전에서 내가 널 잘 보살펴 줄게.”
하녀를 물리고 환한 미소를 지은 아이비가 내게 서약서를 내밀었다.
“…….”
두세 발자국 떨어진 아이비와 나의 거리.
“어서 사인하자. 응?”
아이비의 내게 한 발자국 다가오며 목소리를 줄였다. 나에게만 들리도록 아주 작게.
“그래야 널 가둬 두고 하루라도 빨리 힘을 흡수해 죽이지, 이 빌어먹을 계집애야.”
아이비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죽고 나면 진심으로 우는 척해 줄게. 다른 사람들 눈에 사랑하는 친구가 죽어 슬퍼하는 내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가여워 보이겠어. 그러니까 쓸데없이 버티지 말고 사인이나 해.”
아이비가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내 팔을 강제로 붙잡아 들었다.
손목이 아니라 그 위쪽, 옷 속의 멍이 난 곳을 짓누르는 아이비의 손길을 버티며 나는 맥시엄을 바라보았다.
“라티에나 님…….”
눈이 마주친 맥시엄이 걱정스럽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좋아. 그럴게, 아이비.”
아이비가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말. 아이비는 내 대답에 망설임 없이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날 와락 끌어안았다.
“드디어 포기가 돼? 쓸데없이 버텨 봤자 소용없다는 걸 이제야 깨닫다니. 멍청하기는.”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고 떨어진 아이비는 내게 펜과 종이를 쥐여 주었다.
“자, 어서 해.”
아이비는 턱을 치켜들고 오만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기운이 빠진 모습으로 펜과 종이를 내려보며 아이비에게 말했다.
“근데, 네 앞에서 말고.”
“뭐?”
“서약서에 사인을 하라고 한 건 황태자님이시잖아. 황태자님 앞에서 할게.”
고개를 들자 아이비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게 무슨 엿 같은 소리야?”
“나 때문에 사제님이 붙잡혔어. 난 어쩔 수 없지만 사제님을 지하 감옥에 가게 둘 순 없잖아.”
“그런 거라면 나도 막아 줄 수 있어!”
“네가?”
난 헛웃음을 흘리고 말을 이었다.
“곧 날 죽일 네가, 날 도운 사제님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너 같으면 믿겠어?”
아이비는 내 표정을 읽으려 애썼지만 나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네 부탁 때문에 황태자님께서도 내가 신전에 오길 누구보다 바라는 것 같으니, 직접 말할 거야. 사인할 테니 사제님은 처벌하지 말아 달라고. 비록 날 집어던졌지만, 평생 나를 괴롭혀 온 너보다는 황태자님을 더 신뢰할 수 있으니까.”
“웃기지 마. 혹시 허튼 생각하는 거라면 안 통해.”
“주위를 봐, 아이비. 여기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네 말대로 나도 이제 포기야.”
나는 점점 목소리를 줄였다. 정말로 지쳐서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듯 입술까지 파르르 떨며.
“결국 이렇게 될 거 더 이상 애쓰고 싶지 않아.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어. 그러니까 사제님만 살릴 수 있게 도와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만약 들어주지 않으면 난 절대 사인 안 해.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그래도 괜찮겠어?”
“미친, 라티에나. 쓸데없는 고집 따위를…….”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짓이기던 아이비는 휙 몸을 돌려 맥시엄을 바라보더니 결국 한 발자국 물러섰다.
“고마워.”
나는 더욱더 주눅이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맥시엄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사제님. 죽어서도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라, 라티에나 님……? 왜 그러세요. 예? 저, 저 괜찮아요! 하지 마세요!”
소리치는 맥시엄을 뒤로 하고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나는 킬리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따라올 줄 알았던 아이비는 다행히 멈춰 서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점점 킬리언과의 간격이 좁혀지자 나는 주머니에서 유리병을 꺼내었다.
왼손에 서약서와 펜을 한꺼번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쉽진 않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뚜껑을 열었다.
나비초 잎사귀를 오른손에 쥐고 병은 그대로 툭, 잔디밭에 내버렸다.
그리고 킬리언의 시선이 내 손으로 가지 않게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잎사귀를 힘껏 으스러트렸다.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마른 나비초 잎은 손안에서 순식간에 가루가 되었다.
아무리 힘껏 쥐어도 아무렇지 않은, 흔하디흔한 나뭇잎 같은 나비초.
하지만 아이비에게 닿으면 말이 달라지지.
원했던 타이밍은 아니었다. 가능하면 신전으로 오지 않을 방법을 먼저 찾아내고 아이비를 처리하고 싶었다.
내가 진짜 대성녀라는 것을 들키면 분명 신전과 황실에서는 날 원할 테니까.
어떻게 해서든 내게 이능력자들에 대한 희생을 강요할 테니까.
그럼 나는 힐스타인이나 단테가 날 강제로 덮쳐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아무리 내가 싫어도 대성녀는 치유를 위해 자신과 힘을 희생하는 자리니까.
에던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그런 짓을 할 생각 따윈 없었다. 아이비처럼 그딴 것에 쾌락을 느끼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가능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 해결하고 싶었다.
그랬는데…….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 넌 오늘 뒈졌어. 아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