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86)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86화. 마녀(86/92)
#86화. 마녀
2024.07.25.
나는 킬리언을 향해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섰다.
체격까지 에던과 비슷한 킬리언. 그런 그가 비소를 띠고 눈을 내리깔자 더더욱 에던과 닮아 보였다.
“결정을 내렸나 보지?”
“황태자님.”
나는 서약서와 펜을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킬리언의 눈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뭐 하는 거지?”
불쾌함이 담긴 저음. 평소라면 무서워서 당장 돌아서고 싶었겠지만, 모든 걸 각오한 지금은 조금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손을 펼쳐 가루가 된 나비초를 내보였다.
“믿거나 말거나 황태자님의 마음이지만 진실은 아셔야 할 거 같아서요. 이건 나비초라는 잎사귀예요. 보시다시피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닿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죠.”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쓸데없는 걸로 시간을 벌 셈이라면…….”
“하지만.”
나는 말을 자르고 고개를 들어 킬리언의 붉은 눈을 마주 보았다.
“마녀에게 닿으면 발진을 일으켜요.”
킬리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그래서 이따위 것을 나보고 어쩌라고. 네가 마녀가 아니라고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역시 황태자 자리는 아무나 앉는 게 아닌가 보다. 눈빛만 미세하게 날카로워졌을 뿐인데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놔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인내심이 바닥난 아이비의 목소리와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라티에나! 너 뭐 하는 거야?”
킬리언의 시선이 뒤에서 다가오는 아이비에게 향했다가 다시 내게 꽂혔다.
“의도도, 재미도 없는 대화로군. 시간 낭비는 그만하지.”
“아니요. 잘 보세요.”
나는 킬리언에게서 돌아섰다.
“누가 마녀인지.”
빠르게 다가온 아이비는 바로 내 등 뒤에 있었다. 나도 주먹 속에 꽉 쥐고 있던 것을 아이비의 얼굴로 집어 던졌다.
“너 뭐 하는…….”
아이비가 당황하며 눈을 키웠지만 이미 늦었다.
산산이 부서진 나비초 잎사귀가 작은 가루가 되어 자석처럼 아이비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뺨과 목, 어깨까지. 나비초는 아이비의 피부에 닿자 끈적거리는 액체로 변했다.
아이비가 손으로 털어내려 했지만 아무리 애써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곧.
“꺄아아악!”
날카롭게 비명을 내지른 아이비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비초가 닿은 피부에서 하얗게 연기가 피어오르며 붉은 발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아악!”
신경질적인 소리를 지르면서 아이비가 손톱으로 얼굴과 목을 사정없이 긁기 시작했다.
“아아악! 악! 아악!”
“대성녀님!”
새하얀 드레스가 엉망이 되도록 잔디 위에서 버둥거리며 미친 사람처럼 몸을 쥐어뜯는 아이비를 향해 성기사들이 달려오고, 나는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아아악! 아아아악!”
미친. 나비초가 이렇게 강력한 거였어?
책에는 발진이 일어난다고만 되어 있어서 효과가 이렇게까지 강할 줄은 몰랐다.
이 상황에서 나야 오히려 이득이지만.
마치 독극물에 닿은 것처럼 붉은 점들이 아이비의 온몸을 가득 덮어 가고 있었다.
고왔던 피부가 오염된 것처럼 순식간에 징그럽게 변하며, 부풀어 오르는 물집까지 만들어 냈다.
그리고 툭! 뺨에서 가장 크게 부풀어 오른 물집 하나가 비눗방울 터지듯 터져 버렸다. 그리고 상처에서 샛노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윽. 징그러운 걸 넘어서 흉측스럽다.
나는 입을 가리고 점점 뒤로 물러났다.
“끄, 끄허어억! 아아악!”
아이비는 거의 괴성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이성을 잃고 몸을 박박 긁어 댔다.
그때 무거운 저음이 내 귀에 꽂혔다.
“라티에나 메리골드.”
단조로운 톤이었지만, 분노가 가득 담긴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 고개를 들자 킬리언과 눈이 마주쳤다.
킬리언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꽤 먼 거리임에도 두 발자국 만에 내게 다가와 내 목을 조였다.
“윽……!”
“감히 제국의 대성녀를 건드려?”
진짜 짜증 난다. 킬리언, 진작 다 설명했잖아!
내 손에서 멀쩡했던 잎사귀가 아이비에게 닿으니 저렇게 된 게 이상하다는 생각도 안 해?
쉽게 믿어 줄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이렇게 보여 줘도 여전히 킬리언은 아이비의 편이었다.
서러움이 몰려와 질끈 감은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라티에나 님!”
내 발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자 멀리서 기사들에게 잡혀 있던 맥시엄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양손으로 목을 쥐어 잡은 킬리언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치유력을 발현시켰다.
몽글몽글한 핑크빛으로 발현한 치유력은 작은 별을 응축시켜 놓은 것처럼 밝게 빛이 났다.
“하.”
강한 빛의 강도에 눈가를 움찔거리는가 싶던 킬리언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디서 잔재주를 부려? 대성녀의 치유를 받고 있는 내게 이깟 게 통할 거라 생각한 건가.”
킬리언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그 순간 나는 치유력을 그대로 그의 몸으로 흘려보냈다.
에던은 내 치유력이 두통을 말끔히 없앴다고 했어. 이능의 부작용이 적은 킬리언은 작은 치유력만으로도 힘을 제대로 느낄 거야.
핑크색 빛이 빠르게 손을 타고 스며들어 갔다.
그러자 당황했는지 킬리언의 손이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
치유력은 팔을 타고 올라가 그의 가슴 안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자 내 목을 조이던 킬리언의 손이 풀어졌다.
“쿨럭!”
땅에 발이 닿은 나는 크게 심호흡하며 기침을 내뱉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대체 어떻게……?”
순식간에 킬리언의 눈빛은 뒤바뀌어 있었다. 지금껏 단테와 힐스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 두 사람보다 훨씬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킬리언이 입을 열려고 하자, 아이비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라티에나!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아아악! 아악!”
잠깐 사이에 완전히 모습이 뒤바뀌어 버린 아이비는 얼굴을 감싸고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괴물처럼 변해 버린 그 모습에 성기사들도 차마 어떻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흐윽, 흑. 으흐윽. 킬리언 님…….”
아이비는 킬리언을 향해 울긋불긋 난장판이 된 손을 뻗었다.
하지만 킬리언은 그런 아이비보다 내게 더 관심이 쏠려 있었다. 아이비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던 킬리언의 시선이 집요하게 다시 내게 닿은 순간이었다.
“대성녀!”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정원의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그는 황금 무늬가 박힌 긴 모자를 쓰고 있어서 누가 봐도 대사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아이비는 더욱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대, 대사제님. 도와주세요……. 으흑!”
대사제는 어두워진 낯빛으로 성기사들에게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느냐! 어서 대성녀를 보필해라!”
“예!”
넋을 놓고 있던 기사들이 그제야 서둘러 아이비를 부축했다.
아이비가 내게서 조금 떨어지자 대사제는 킬리언에게 인사도 없이 바로 영문을 물었다.
“전하. 이 새벽에 대체 무슨 소란이십니까!”
나는 하얗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피부를 가진 대사제를 응시했다.
성녀 후보들을 찾아내 치유력까지 관리하는 자.
대사제는 이능력자들이 꼭 필요한 제국에서 그는 강한 권력을 가진 자 중 하나였다. 성녀들이 없으면 이능력자들은 부작용으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에 시달릴 테니 말이다. 하지만 상대는 황태자인데. 미친 거 아닌가? 킬리언은 미래의 황제가 될 사람이잖아.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무엇을 말입니까!”
내게 꽂혀 있던 킬리언의 시선이 대사제에게로 넘어갔다.
“아이비 대성녀가 마녀라는 의심을 받았는데, 아는 바가 있는가.”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십니까! 대성녀가 마녀라니요! 누가 그런 음모를……!”
대사제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내게로 향했고, 그 순간 킬리언이 대사제에게 다시 말을 내뱉었다.
“대답해라. 여부에 따라 황실을 능멸한 죄를 물을 것이다.”
“죄라니요. 대성녀가 어떻게 마녀란 말입니까? 이 여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아닙니다. 대성녀가 책봉될 때 사제 열두 명이 모여 힘을 확인했습니다!”
“그럼 저건 뭐라 할 텐가?”
대사제의 눈길이 아이비에게로 향했다. 간지러움은 가라앉은 것 같지만 아이비의 피부는 계속해서 물집이 솟아나며 노란 고름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마녀를 분별한다는 나비초라는 것에 저리 되었다.”
“나, 나비초요?”
아무래도 대사제는 나비초에 대해서 알고 있던 모양이다.
순간 미간을 움찔거린 대사제는 나를 사납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게 나비초인 것이 확실합니까! 일 년동안 이능력자들을 위해 신전을 지켜온 대성녀입니다! 신분도 모르는 이런 여자의 말을 어떻게 신뢰하십니까!”
그는 완벽히 아이비의 편이었다. 지난번 스치듯 들었던 맥시엄의 말이 떠올랐다. 대사제는 아이비가 대성녀가 된 덕분에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이라고 했는데 틀린 말이 아닌 모양이다. 나비초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이렇게 아이비를 감싸는 것 보면…… 뒤가 구려도 한참 구린 인간이야.
“제가 봤습니다!”
킬리언과 대사제, 그리고 나는 동시에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맥시엄이었다.
“대사제님! 제가 봤습니다! 대성녀, 아니 저 마녀가 성녀 후보들의 치유력을 흡수해 미라로 만든 것을요!”
그 말에 얼굴이 일그러진 대사제가 맥시엄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게 무슨 망언인가! 사제! 신전 소속으로 대성녀를 누구보다 보호해야 할 자가 어찌!”
“하지만 제가 직접 봤다고요!”
“사제! 입조심하게!”
둘의 대화를 듣던 킬리언은 신전 건물 벽에 서 있던 자신의 부하인 황실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대성녀를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전하!”
놀란 대사제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지만 킬리언은 그를 무시했다. 황실 표식이 그려진 망토를 휘날리며 킬리언의 부하들이 아이비를 향해 다가섰다.
“싫어…… 싫어! 아무도 날 건드리지 마! 그럴 수 없어!”
아이비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솟구쳐 올랐다.
울컥! 모래를 쏟아내듯 튀어나온 검은 기운은 바람을 날려 부축하던 성기사들을 밀어내고, 다가서던 황실의 기사들까지 타격했다.
“아무도 내 몸에 손대지 마. 그 누구도 날 감히 건드리지 못해!”
또렷하게 소리치는 목소리와 반대로, 아이비의 피부는 고름을 쏟으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충격적인 모습에 대사제가 흠칫거렸다.
아이비는 검은 안개를 더욱더 짙고 크게 만들어 냈다.
“빌어먹을 라티에나아악!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버려! 네까짓 게 나를! 어떻게 나를! 감히 나를!”
내게만 보였던 아이비의 본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흰자위가 새카매지고 목소리조차 두껍고 서너 갈래로 갈라져 언뜻 사람이 아닌 괴물처럼도 보였다.
모든 게 평소의 그녀가 아니었다.
불빛으로 환했던 정원이 다 뒤덮일 정도로 아이비의 검은 안개는 크게 부피를 키웠다.
그러곤 아이비는 곧장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죽어 버려! 이 쓰레기 같은 계집애! 죽어!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죽어!”
그때였다. 아이비와 내 사이의 허공이 세로로 갈라졌다. 순식간에 포털이 열리고, 길고 잘 갈아진 검이 튀어나와 아이비를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