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88)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88화. 쓸쓸하고 비참하게(88/92)
#88화. 쓸쓸하고 비참하게
2024.07.27.
쾅! 사람이 아니라 마치 돌덩이가 부딪힌 것처럼 엄청난 소리가 났다.
푸른빛에 속박당한 아이비의 몸은 경련을 일으키는 듯 파드득 떨렸고, 나는 얼굴을 구기며 그녀를 외면했다.
곧이어 쾅! 쾅! 쾅! 쾅! 거침없이 사람을 내리찍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지 않아도 장면이 충분히 상상되었다. 신음 소리 한 번 내뱉지 못하고 이리저리 내던져지는 아이비의 모습이.
고요해진 정원, 마지막으로 털썩하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킬리언과 대사제를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아이비에게 향해 있었다. 특히 가장 충격을 많이 받은 듯한 대사제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고 입까지 벌린 채 굳어 있었다.
아무도 에던을 말리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 나도 사람들을 따라 서서히 아이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하얗던 드레스는 형편없이 찢어져 피로 물들어 새빨갛게 변해 있었고, 엉망이 된 몰골의 아이비는 정신을 잃고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흐느적거리며 쓰러져 있는 것이 마치 온몸의 뼈가 산산조각이 난 것 같았다.
주, 죽은 것 같은데…….
나는 에던을 바라보았다. 에던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느슨한 눈꼬리로 킬리언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데려가서 처벌하시죠. 숨은 붙어 있으니.”
그 후의 상황은 순식간이었다.
쓰러진 아이비는 성기사들이 가져온 마법구에 몸이 묶였고-.
“지하 감옥에 가두어라.”
킬리언의 명이 떨어지자, 성기사들은 솜인형처럼 완전히 축 늘어진 아이비의 몸을 짐짝 들 듯이 잡아 들었다.
피와 고름이 묻어 난장판이 된 드레스 자락 아래로 신발이 벗겨진 한쪽 다리가 보였다.
새하얗던 허벅지가 까무잡잡한 피부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발악하며 잔디를 뭉개서 그런지 흙으로 시커메진 발바닥까지. 거짓으로 만들어 냈던 아이비의 어여쁜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 아이비는 그저 흉측한 마녀일 뿐이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눈을 뜨면 컴컴한 지하에 있겠지.
고성에서 맥시엄과 마법서를 뒤적거리며 들은 말이 있었다.
그가 잠시 갇혀 있었던 지하 감옥에 대해서.
빛이 들어오지 않아 자신의 손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가끔 벌레가 지나가는 소리라도 들리는 때면 불쑥 무언가가 튀어나와 덮칠 듯한 착각이 일어나는 괴로운 곳이라고 했다.
자신은 에던이 손을 써서 몰래 신전의 하녀가 물품을 챙겨다 준 덕분에 버틸 수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면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거라고.
그런 지하 감옥에서 죽겠지, 아이비는.
오직 어둠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홀로, 쓸쓸하고 비참하게.
잘 어울리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마저 고마워해야 해, 아이비. 네가 그동안 다른 성녀 후보들과 내게 한 짓에 비하면 곱게 죽는 거니까.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후회하길 바라, 아이비.”
나는 아이비가 건물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세상에…….”
좀 떨어진 곳에서 나처럼 아이비를 응시하고 있던 대사제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이마를 짚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듯 하얀 얼굴은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상황 어쩌지? 내가 봐도 좀 기가 막힌 상황이긴 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신전의 성기사들과 황실 소속의 기사들, 북부 에던의 부하들까지.
새벽이 깊어가는 시간에 절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모조리 다 모여 버렸다.
아이비를 잡느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기사들이 절도 있게 움직여 제자리를 찾아가고, 나도 그제야 에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내가 보여?”
이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에던은 이리 오라는 듯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에던!”
“응. 이리 와.”
나는 냉큼 그에게 뛰어가 손을 붙잡았다.
아까까지는 멍 때문에 걸을 때 다리를 절뚝거렸는데, 에던이 눈앞에 있으니 지금은 아픈 줄도 모르겠어.
에던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 온기가 너무 따스하고 다정해서 주위 사람들만 아니었더라면 온 힘을 다해 그를 와락 끌어안고 싶은 기분이었다.
서러운 눈물이 올라오는 것을 꾹 참느라 시큰거리는 코를 훌쩍이고는 에던을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의 옷엔 마물의 피가 생각보다 훨씬 많이 묻어 있었다.
머리칼 한쪽을 쓸어 넘겨 드러난 이마와 눈썹부터 시작해 콧대와 뺨을 지나 턱까지 세세하게 관찰했다.
다행히 상처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아마 이능을 사용했으면 부작용 때문에 힘들겠지.
벽이 무너진 상황에서 에던은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싸웠을 거야.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몸속은 타들어 가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몰라.
“괜찮아요?”
걱정스럽게 묻는 내 말에 에던이 픽-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누가 누굴 걱정해, 지금.”
“벽은요? 잘 해결됐어요? 또 몸으로만 싸운 거 아니죠? 제대로 이능 사용했어요?”
“아까 봤잖아.”
“아이비에게 한 거 말고, 무너지지 않는 벽에서요. 마물들하고 제대로 싸웠어요?”
“잘했으면, 칭찬해 주게?”
칭찬뿐이야? 뭐든 다 해 주지!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에던이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슥슥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손길이 멈췄다.
“뭔데.”
“뭐가요?”
“이거.”
에던은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스윽 매만졌다.
킬리언의 이능에 압박당했을 때 본능적으로 흘렀던 눈물이 마른 자국이었다.
부드럽던 에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울었어?”
울었지. 진짜 너무 서러웠거든. 몸도 상처투성이인 데다가 진실을 말하는데도 아무도 쉬이 믿어 주지 않아서.
하지만 나보다 더 고생하고 온 사람에게 아픈 척하기 싫었다.
“조금요. 그런데 이제 다 괜찮아요.”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에던의 시선은 날카로워졌다.
“라티.”
“응?”
“그대로 있어.”
에던이 느릿하게 시선을 내렸다.
작은 문제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 상태를 살폈다. 세밀하게 나를 스캔하던 에던의 눈동자가 붉어진 목덜미에 한 번, 그리고 팔목으로 한 번 눈이 멈췄다.
굳게 다문 입술로 가만히 팔목을 응시하던 에던이 내게 바짝 가까이 붙었다.
팔목이 살짝만 드러나 있던 구겨진 옷소매가 천천히 올라가고, 피멍이 든 팔이 보였다.
“괜찮다고?”
나는 재빨리 옷을 내렸다.
“이건 아이비가…… 근데 괜찮아요! 당신이 대신해서 엄청 때려 줬잖아요.”
뼈가 작살이 날 정도로! 에던은 내가 맞은 걸 모르고 한 거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해.
“장난해? 알았으면 저렇게 쉽게 기절 안 시켰어. 제정신인 상태에서 살을 조각조각…….”
깜빡하고 있었던 에던의 미치광이 기질이 나왔다.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에던이 실수했다는 듯 쯧, 혀를 차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어쨌든.”
시선을 팔에 둔 채로 낮게 말을 내뱉으며 눈썹을 구긴 에던의 시선은 다시 위로 올라왔다.
이글거리는 붉은 눈동자가 다시 내 목덜미에 닿았다.
에던은 손을 들어서 내 뺨에서부터 귀 뒤로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이 완전히 뒤로 넘어가고 목덜미에 킬리언에게 목이 졸려 남아 있던 흔적이 드러났다.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으며 에던의 눈빛이 조금 전보다 더욱 싸늘해졌다.
“……형님이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킬리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거울이 없어서 확인해 볼 수는 없지만 만약 손자국이 남았을 정도면 아이비의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말없이 상처를 매만지던 에던이 으득, 턱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상황 정리를 위해 자신의 기사들과 잠시 얘기를 나누던 킬리언이 우리에게 돌아왔다.
에던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킬리언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매너가 없으셨습니까?”
가까이에 있으니 킬리언은 에던보다 아주 살짝 키가 컸다.
이렇게 나란히 있으니 미묘하게 닮았지만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을 한 채 너른 어깨를 펴고 선 킬리언은 에던의 손이 닿아 있는 내 목덜미를 응시하며 말했다.
“글세.”
부정은 아닌, 그러나 미안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목소리.
킬리언은 픽, 웃더니 말을 이었다.
“뭐, 실수였다고 해 두지. 그나저나 쥐새끼를 심어 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신전에 함부로 발을 딛다니, 죄를 물어야겠군. 약삭빠르게 진짜를 숨겨 둔 죄까지 붙여서 말이야.”
아이비가 그동안 나를 힘들게 한 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비가 신전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에던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비가 없어진 지금은…….
‘이럴 줄 알았어.’
그러니까 신전으로 가지 않는 해결책을 찾기 전까지는 아이비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았던 건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라티에나 메리골드, 아이비가 줄곧 찾았던 이유가 이거였어.”
“…….”
“소중한 가족이라 운운하면서 성녀 후보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신전으로 데려온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 그런데 설마 이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킬리언은 금방이라도 날 낚아챌 것처럼 매섭게 바라보았다.
에던이 옆에 있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조금 전 그의 이능에 붙잡혔던 숨 막히는 감각이 되살아나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신전 출입을 금지시켜 에던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 지금까지 쉽게 내 편으로 돌아섰던 힐스타인과 단테와는 다르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시선을 피해보려 나는 고개를 돌렸고, 때마침 커다란 그림자가 앞을 가려 주었다.
“라티, 내 뒤로 와.”
에던이었다. 그가 내 앞으로 와 킬리언과의 사이를 막아 주었다. 그의 넓고 커다란 등이 거대한 방패처럼 보였다. 절대 부서지지 않는 최고의 방패.
안도감에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나온 순간이었다.
“커억! 컥!”
“크허억!”
갑자기 주변에서 괴로워하는 신음 소리가 나더니 킬리언의 주변에 서 있던 그의 기사들 열댓 명이 한꺼번에 기절해 버렸다. 상황 파악을 하며 킬리언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에던에게로 날 선 시선을 보냈다.
“너…….”
“이런, 형님께서 아끼시던 부하들이던가요? 늘 항상 데리고 다니던?”
킬리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에던 디트리히!”
“네.”
덤덤히 답한 에던은 삐딱한 자세로 주머니에 손을 꽂고 말을 이었다.
“너무 화내지 마시죠. 저도 실수니까요. 형님 목을 조를 수는 없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