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89)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89화. 아직 검날 끝은(89/92)
#89화. 아직 검날 끝은
2024.07.28.
짧은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던이었다.
“그리고 형님께서 제게 죄를 물으실 수 있을까요? 저도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 온 것인데.”
“이유가 뭐든 신전에 출입하는 건 금지라고 말했을 텐데.”
“글쎄요. 이유를 듣고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실지 궁금하군요.”
“뭐?”
에던이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데려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은 망토를 두른 에던의 부하들이 두 사람의 목덜미를 잡고 나타났다.
짙은 보라색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기절한 상태로 바닥에 다리가 질질 끌리며 킬리언의 발밑으로 내던져졌다. 털썩, 털썩. 넘어지는 반동 탓에 로브가 흘러내리며 얼굴이 드러났다.
무, 무슨 짓을 당한 거야?
남자들은 많은 양의 피를 토해 낸 건지 입 주변이 피범벅이었고, 혈흔이 턱과 목까지 흘러내려 가슴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다. 찢어진 로브 사이로 드러난 손과 발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피까지.
우욱. 손발톱이 다 뽑혀 있잖아!
에던의 등 뒤에서 상황을 살펴보던 나는 충격적인 광경에 입을 틀어막았다.
“아시겠지만, 황실의 마법사들입니다.”
“…….”
“북부의 벽이 무너진 곳에 황실의 마법사들이 건드린 흔적이 있더군요.”
말도 안 돼! 황실의 마법사가 벽을 건드렸다고?
무표정하게 남자들을 내려다보던 킬리언이 낮은 조소를 터트렸다.
“웃기지도 않는군. 벽이 무너진 것은 너의 실책 아닌가? 비열하게 황실의 잘못으로 몰아가고 싶은가 보지?”
나도 모르게 불끈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다.
비열한 건 너잖아! 그래서 타이밍이 딱 맞았던 거였어. 마물 토벌이 끝나간다고 한 상황에서 왜 갑자기 벽이 무너졌나 의아했는데, 이 남자가 한 짓이었나 봐.
에던하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건 아니잖아.
이렇게까지 하면 안 되는 거잖아. 지금까지 에던이 북부의 벽을 얼마나 최선을 다해 지켰는데.
벽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어떻게 그걸 건드려?
조금 전까지 킬리언은 내가 진짜 대성녀였다는 걸 몰랐다.
그러니 에던이 강한 이능을 사용한 후에 내게 치유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거야.
그렇다는 건, 일부러 벽을 부수고 에던을 지옥 속으로 밀어 넣었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는다.
내가 병에 치유력을 담아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에던은 부작용 때문에 이렇게 서 있지도 못했을 거야.
정말로 에던을 고통 속에 빠트릴 생각으로 그런 거야?
아니면…….
문득 원작에 나왔던 킬리언이 에던을 끔찍하게 싫어하게 된 계기가 떠올랐다.
몇 년 전에 두 사람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뻔뻔한 킬리언의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에던은 익숙하다는 듯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뭐, 백 번 양보해서 마법사들이 제멋대로 저지른 일일 수도 있죠. 한데 마법사들이 형님의 이름을 배후로 불더군요.”
킬리언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요즘 집무만 보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진실을 말하게 하는 고문의 종류는 꽤 많습니다. 마법사들은 훈련받은 기사들도 아니니 까짓것 자백을 받아 내는 것도 어렵지 않죠.”
“……그래서, 내가 마법사들을 시켜 벽을 건드리기라도 했다는 건가?”
“제 의견이 아닙니다. 이자들이 그렇게 말했다는 거죠.”
에던은 가벼운 턱짓으로 마법사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밖으로 말이 새어 나가면 큰 타격을 입겠죠. 형님께서 벽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우기신다 해도, 황실의 마법사가 벽을 건드려 제국이 위험할 뻔했던 건 사실이니까요.”
말을 마친 에던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에던의 말은 자신이 신전으로 들어온 것과 킬리언이 벽을 건드린 것 모두, 서로 조용히 처리하자는 암암리의 조건처럼 들렸다.
벽에 손을 댄 것을 덮어 줄 테니 자신이 그냥 돌아가는 것도 묵인하라는.
그저 신전에 들어온 것뿐인데, 평범히 돌아가기 위해 이렇게 킬리언의 음모를 덮기까지 해야 한다니.
얼마간 에던과 시선을 마주하던 킬리언이 바닥의 마법사들을 내려보았다.
그리고 몇 남지 않은 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치워.”
킬리언의 부하들이 순식간에 그들을 데려가고 그는 태평한 얼굴로 말했다.
“황실의 마법사들이 실책을 저지른 것 같군. 이번만큼은 넘어가 주지. 돌아가도 좋다.”
넘어가 주는 게 아니잖아. 자기가 저지른 일이면서 아닌 척, 킬리언은 큰 은혜라도 베풀어 주는 것처럼 말했다.
뻔뻔하고 재수 없어. 그러나 에던에게 집중하느라 내게는 크게 집착하지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단, 라티에나 메리골드는 여기에서 못 나가.”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진짜 대성녀를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안 그런가, 대사제?”
킬리언이 고개를 돌려 어느새 곁으로 와 있던 대사제에게 말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대사제는 망설임 없이 킬리언의 편을 들었다.
“네. 그 여자가 정말로 대성녀의 자질이 있는 거라면 절대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는군.”
킬리언이 턱을 치켜들었다. 계속 에던을 자극하려는 것 같은 그 오만한 태도에 내가 앞으로 나섰다.
“싫습니다. 아무리 강요하셔도 전 신전으로 가지 않아요.”
사실 강제할 수 있다는 건 안다. 성녀 후보와 대성녀는 전혀 다르니까.
자의든 타의든 대성녀의 힘을 가진 사람은 무조건 신전으로 들어가 그 자리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전대 대성녀가 죽을 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이비가 그랬던 것처럼.
평생을 신전 안에서 이능력자들을 치유하고, 본능적인 욕망에 몸을 맡겨 지내는 것이다.
그걸 확인시켜 주듯 킬리언이 말을 이었다.
“그건 네가 성녀 후보일 때의 이야기다. 대성녀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거라면 말이 달라져. 선택권은 없다.”
“……황태자님께서는 큰 치유도 필요 없으시잖아요. 신전으로 오지 않아도 제가 물약 정도는…….”
“필요가 있든 없든 어떻게 이용할지는 내 마음이고.”
혹시나 해서 말을 꺼내 봤는데 제안도 해 보기 전에 말이 잘렸다.
“맞습니다!”
또 대사제가 맞장구쳤다. 저 할아범 뭐야, 자꾸!
눈에 힘을 주고 대사제를 노려보는데 킬리언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아, 이참에 법을 고칠까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군.”
뭐?
“대성녀의 치유력을 제국의 모든 이능력자 기사들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말이야. 방법이 방법이니만큼 처음에야 수치심이 좀 일겠지만, 대성녀의 일은 그런 것이니 익숙해지면 괜찮아지지 않겠나.”
미, 미친 자식! 어떻게 그런 말을! 말만으로도 수치심이 일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대사제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히려 좋습니다! 기사들도 기뻐할 테니까요.”
저 인간이 또……!
망할 치유력 같으니라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에던에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다행이지만, 날 위해 쓸 수 있는 건 없다. 이능력자들을 치유하면서 발생하는 쾌락. 그딴 거 원치 않아. 물론 원하지 않아도 몸은 느끼겠지만, 내 정신은 아니잖아. 대성녀가 되어 사람들 부리는 거? 값비싼 드레스? 보석? 그런 사치 난 필요 없어.
“어디 해 보시죠.”
그때 에던이 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손을 빼내며 나를 보호하듯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부하의 허리춤에서 칼을 빼내고 휘릭, 한 바퀴 돌려 잡았다.
킬리언의 시선이 에던의 손에 잡힌 반짝이는 검날에 닿았다. 눈가가 가늘어지며 번뜩이는 이채가 스쳤다.
“이럴 줄 알았지. 결국 네가…….”
“이렇게 하라고 함부로 말을 내뱉으신 것 아닙니까?”
“네가 그렇게 들은 거겠지. 에던 디트리히. 내게 검을 겨눈 그 순간부터 너는 제국의 반역자가 된다.”
나는 에던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직 검날 끝은 땅을 향해 있었고, 핏줄이 선명이 솟아오른 손등에는 마물의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킬리언 형님이 황제가 되길 바라.’
에던이 북부를 지키는 목적.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매일 밤 고통에 시달리고 마물의 피를 뒤집어쓰며 홀로 버텼던 이유.
‘난 형님을 싫어하진 않아.’
에던은 지금도 그 생각이 변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킬리언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에던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에, 에던…….”
망토를 붙잡자 에던이 날 내려다보았다.
“생각만으로도 토할 것 같다며.”
그래, 맞아. 당신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해 주는 치유도, 스킨십도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하지만.
“그런 짓 당하게 안 둬. 네가 신전으로 간다고 해도 내가 보낼 생각도 없고.”
하지만…….
“대공님, 대성녀는 저희의 소관입니다. 치유가 필요하시니 이해는 하지만 겨우 대성녀 하나 때문에 반역이라니요! 정신 차리십시오!”
대사제가 또 눈치 없이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인상을 팍 쓰고 그를 돌아보았다.
아니, 근데 아까부터 저 망할 할아범이! 짜증 나게 왜 이 사람 저 사람 번갈아 가며 부추기고 난리야!
하, 씨. 내가 싫은 건 싫은 거고, 에던이 반역자가 되게 할 수는 없어. 내가 살겠다고 에던을 죽게 만들 수는 없잖아!
일단 저 할아범부터 처단하자.
입술을 꽉 깨문 나는 열받는 표정을 감추고 앞으로 나섰다.
“저, 대사제님과 단둘이 대화하고 싶어요.”
킬리언과 대사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직접 나설 줄은 몰랐나 보지?
“괜찮죠?”
조금 당황한 것 같지만 대사제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게 가려던 나를 에던이 붙잡았다.
“뭐해.”
짜증이 조금 섞인 목소리. 시선을 내리자 에던의 손끝이 내 옷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팔의 상처 때문에 내가 아플까 봐…….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이렇게 다정한 에던이 뻔히 죽는 길을 가게 할 수는 없잖아.
“괜찮아요. 잠깐 대화만 할게요.”
나는 에던의 손을 밀어낸 후 대사제에게 씩씩하게 다가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따라오라는 건방진 신호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대사제는 내 뒤를 따랐다.
인적이 없는 정원 구석으로 걸어간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대사제의 입가가 꿈틀거려 그 탓에 수염까지 움찔거렸다.
긴 오이형 얼굴에 수염이 달려 있어서 그런지 하얀 옥수수 털 같네. 저게 진짜 옥수수였다면 맛은 더럽게 없겠지, 퉤.
“대사제님.”
“뭐냐.”
대사제에게는 치유력의 힘 따위 통하지 않는다. 일반인이니까.
처음 고성의 치유력을 사용한 것도 정말 효과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인을 위한 작은 성의 표시로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치유력이 아니더라도 대사제에게 협박할 건수는 하나 알고 있지.
나는 목소리를 깔고, 천천히 눈을 치켜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냐? 방금 저에게 뭐냐, 라고 하셨어요?”
“……뭐?”
“대성녀가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저한테 뭐냐, 라고요? 아이비한테는 예의를 갖춰 말씀하셨잖아요. 제게도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