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9)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9화. 대가를 치러야지(9/92)
#9화. 대가를 치러야지
2024.05.09.
남주들 중 가장 예의 없고 싸가지 없는 은발의 힐스타인.
원작에서 내가 죽었을 때,
-오늘 밤 제게 안기면 위로가 되실 겁니다.
저따위 소리를 내뱉었던 바로 그 남자다.
말이 되냐고! 친구가 죽어서 울고 있는 사람한테!
언뜻 보면 목소리가 미성인데다가 무쌍의 눈웃음이 부드러워서 서글서글해 보이지만 힐스타인은 웃지 않을 때와 웃고 있을 때와의 온도 차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매력이 인기의 비결이었는데, 얘는 에던과는 다른 의미로 미쳐 있었다.
치유력의 쾌락 중독자. 밤에 이런저런 시도를 가장 많이 하고 아이비를 가장 적나라하게 괴롭히는 변태였다.
아무튼 힐스타인은 루벤의 인사도 받지 않고 다짜고짜 제 할 말만 내뱉었고, 나는 몸을 더욱 움츠리며 루벤의 등 뒤에 숨었다.
그 사이 루벤은 힐스타인의 질문에 덤덤하게 대응했다.
“숨기는 것 없습니다.”
그러자 힐스타인이 픽 웃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검을 꺼내 드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긴 검이 허공에서 휘휘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해지잖아.”
힐스타인은 저벅, 우리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아주 짧은 어느 순간에 루벤의 등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로 미세한 움직임이어서 내가 루벤의 등에 딱 달라붙어 있지 않았더라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그런 작은 반응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루벤의 목덜미 사이로 날카로운 검날이 들어와 있는 게 보였다.
목을 찌르고 있는 건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조금 전 루벤의 반응을 보아서는 조금 찔렸던 게 확실해 보였다.
온몸이 떨려왔다. 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이 끌어다 버텼다.
그럼에도 입술이 바짝 말라 갔고 나는 깃발을 꽉 쥐어 잡았다.
‘여긴 왜 다 미친놈들밖에 없어! 말로 하면 어디가 덧나냐고!’
남의 목에 칼을 들이밀어 놓고 힐스타인은 여유롭게 작은 웃음소리까지 덧붙여 가며 명했다.
“등 뒤에 그거 내놔.”
“죄송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명령인데도?”
“불복합니다.”
그때였다.
힐스타인의 검이 루벤의 턱으로 올라가더니 그의 피부를 천천히 그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일순 숨을 멈춰 버렸다.
“재수 없는 자식 밑에서 일하니까 같이 재수가 없어지는 건가. 안 그래, 루벤? 언제부터 이렇게 싸가지가 없었나?”
키득키득 웃으며 힐스타인은 비아냥거렸다.
에던을 목숨보다 더 중요시하는 루벤의 심기를 건드리려 일부러 자극적인 말만 골라서 하고 있었는데 루벤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심지어 칼 때문에 아플 텐데도, 통각을 잃어버린 듯 전혀 아무렇지 않게 목석처럼 서서 내 앞을 가리고 있었다.
‘루벤…….’
루벤은 절대 힐스타인에게 검을 겨눌 수 없다.
힐스타인은 황실의 기사단장이었고, 황태자의 오른팔이었다. 그러니 까딱 잘못하면 반역이라는 오명 쓸 수도 있는 예민한 문제였다. 에던이 사생아 황자였고, 황태자인 자신의 형과 척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걸 잘 알고 있는 힐스타인은 유리한 제 위치를 항상 이용했고 다시 말했다.
“비켜.”
“불복합니다.”
“명령이라고 말했을 텐데. 몇 번이나 말해야 하지?”
“몇 번을 물으셔도 제 대답은 하나입니다. 비킬 수 없습니다.”
팽팽한 줄다리기 신경전이 이어지자 결국 루벤의 턱에서는 피가 새어 나왔다.
살살 피부 결만 긁고 있던 힐스타인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줘 버린 것이다.
‘미친……!’
루벤의 상처에 내 양심도 같이 긁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힐스타인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숨어 있는 게 맞나?
이를 악물고 숨을 죽이던 나는 숨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 발자국 옆으로 내딛으려는 순간이었다.
내 움직임을 감지한 루벤의 팔에 힘이 들어갔고, 동시에 검과 검이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
힐스타인과 루벤과 나는 동시에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힐스타인의 검이 피가 가득 묻은 다른 검과 함께 저 멀리 돌벽까지 날아가 떨어져 있었다.
그걸 확인한 우리 세 사람은 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검이 날아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엔 마물의 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에던이 있었다.
“인사.”
에던은 힐스타인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곤 자기 뒤를 따라오는 다른 부하에게 수건을 받아 들더니 쓱쓱 손을 닦았다.
질퍽질퍽한 피가 손수건 가득 묻어났다. 대충 손의 피를 닦아 낸 에던은 뺨에 튄 혈흔까지 대충 더 닦아 낸 다음 수건을 병사에게 넘겼다.
그리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제야 힐스타인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나, 그리고 루벤의 턱, 그다음에 힐스타인이었다.
“인·사.”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에던은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해 내뱉었고 그제야 힐스타인이 어깨에 손을 얹고 상체를 숙여 예를 갖췄다.
“힐스타인 마티어스, 제국의 별 에던 디트리히 황자님을 뵙습니다.”
보통은 이런 때라면 같이 인사를 받아 주어야 하는데 에던은 말이 없었다.
기다리던 힐스타인이 고개를 들었고, 때맞춰 에던이 말했다.
“경.”
“네, 전하.”
“누가 고개를 들라 했나?”
갑작스러운 트집에 힐스타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경의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 다시.”
에던은 보란 듯이 주머니에 한쪽 손을 집어넣고 삐딱하게 다리를 짝다리 짚고 섰다.
말투가 우아해진 것과는 반대로 하는 태도는 말도 안 되게 제멋대로였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힐스타인은 에던에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에던은.
“더.”
마음에 드는 인사를 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투로 요구했다.
힐스타인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조금 머뭇거리는 듯했지만 힐스타인은 이내 숙였던 어깨와 머리를 더욱더 깊이 숙였다.
일부러 수치심을 줄 생각인지 얼마간 그를 그렇게 세워 둔 에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북부에 올 일이 없는 걸로 아는데, 무슨 일이지?”
힐스타인보다 더 예의 따위는 밥 말아 먹은 언행이었다. 다행히 그의 질문은 이만 고개를 들어도 좋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힐스타인은 그제야 몸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고개를 든 힐스타인은 굴욕감으로 인해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공성으로 몇 번이고 초대장을 보냈는데 답변이 없으셔서 킬리언 황태자께서 확답을 듣고 오라 하셨습니다.”
“무슨 초대장?”
“못 받으셨습니까? 제국 내에 소문이 자자한 내용입니다만.”
에던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할 것이지 뭘 되묻느냐는 듯, 오만하기 짝이 없는 시선으로 힐스타인을 깔아 보았다.
“경. 내가 그걸 물었나?”
“죄송합니다. 대성녀 축하 무도회에 대한…….”
차분히 대답을 이어 나가는 힐스타인을 향해 에던이 턱 끝을 움직였다.
“가져와.”
말을 자른 것도 모자라 밑도 끝도 없는 명령.
눈썹을 찌푸린 힐스타인이 에던의 턱 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떨어진 검 두 자루가 있는 곳이었다.
‘정말 열 받았나 봐.’
에던은 힐스타인이 루벤을 건든 것에 몹시 빡돌았고, 제멋대로인 태도로 그를 굴리고 있었다.
분노를 꾹꾹 누르며 인내심을 가지고 검이 떨어진 쪽으로 간 힐스타인은 하나는 자신의 검집에 넣고, 하나는 에던에게 가져다주었다.
“성의를 봐서 참석하도록 하지.”
성의가 아니잖아. 아이비 만나러 가는 거잖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한 힐스타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띄워졌다.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무도회 날 뵙지요.”
에던이 고개를 까딱이자 힐스타인이 이만 뒤돌아섰다.
그런데 포털이 열리고 안으로 향하던 힐스타인이 갑자기 다시 이쪽을 되돌아보았다.
“전하, 실례지만 루벤의 뒤에 뭘 숨겼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 인간아! 그냥 가! 제발 가! 호기심 따위 접어 둬! 넣어 둬!
다시 내게 돌아온 관심에 나는 바들거리는 손으로 깃발을 더욱 꽉 붙잡았다.
에던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내 옆의 방어벽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러곤 보란 듯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재밌는 장난감이 있다는 듯 웃었다.
루벤에게 가려져 힐스타인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을 게 분명하니 그를 놀리거나 약 올리는 게 틀림없었다.
“물론, 물어볼 수야 있지.”
“그럼 알려 주…….”
“대신 대가를 치러야지.”
“……대가라니요?”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에던의 시선을 피해 몰래 힐스타인을 훔쳐봤다.
힐스타인은 애써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미묘한 불쾌감은 숨길 수 없어 보였다.
“팔 한쪽 정도 마물의 밥으로 내어 준다면.”
말도 안 되는 거래 조건이었다.
말하느라 살짝 벌어졌던 힐스타인의 입매가 다물렸다. 어느덧 웃고 있던 눈매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런 조건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그럼.”
힐스타인은 포털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돌아가자 나는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버려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제야 몸이 아파 오며 잊고 있던 추위가 밀려왔다.
어느새 하늘에서 새하얀 눈송이가 팔랑이며 떨어지고 있었다.
“예쁘다…….”
감상 따위 할 타이밍이 아닌데 피로가 쌓여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도망치기 위해 사직서를 써 대던 것부터 여러 일이 있었으니까…… 뭐, 결국 실패해 버렸지만.
순간 시야가 핑글 돌며 나는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
도망도 실패했지, 에던은 미치광이가 되기 직전이지, 힐스타인을 만나 버리기까지- 모든 게 엉망이었다.
또다시 악몽이다. 꿈속에서 나는 진흙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허억……!”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그런데 잠이 덜 깼는지, 아니면 다른 꿈속으로 들어왔는지.
“에던……?”
반짝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눈앞에서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봐도 모공도 안 보이는 깨끗한 피부에 잘 정리된 눈썹, 오뚝한 콧날…… 적당히 기다란 속눈썹과 부드러운 눈꺼풀, 입술도 어쩜 완벽한지. 외모로는 절대 깔 수가 없는 에던. 저 턱 좀 봐. 옆으로 누워 있어도 턱선이 이렇게 날렵할 수 있다니.
게다가 목선을 따라 솟아오른 굵은 핏줄에, 섹시함이 가미된 쇄골, 넓은 어깨에 굵고 탄탄한 팔뚝…… 그리고 그의 웅장한 가슴에 얹힌 내 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