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90)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90화. 여우 같은 눈꼬리(90/92)
#90화. 여우 같은 눈꼬리
2024.07.29.
대사제의 동공이 흔들렸다.
뭐 이런 미친년이? 라는 눈빛이지만, 알 게 뭐야. 나도 이제 몰릴 대로 몰렸거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도 갑질 좀 해 보게.
“뭐, 뭐라고? 허어! 벌써부터 대성녀로 확정이라도 된 것처럼 구는……!”
“제가 진짜 맞아요.”
“그……!”
“황태자님과 대공님께서 하는 대화 들으셨잖아요.”
얇고 긴 콧잔등이 움찔거렸다.
“지금 당장 아티팩트를 가져와 확인해 봐도 좋아요. 몸 상태가 안 좋으니 치유력이 평소보다는 좀 약하겠지만 충분히 보여 드릴 수 있어요. 제힘은 아이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주 강하거든요.”
자신만만한 내 태도에 대사제는 고민하는 듯 미간을 구겼다.
킬리언과 에던이 나누던 말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치유력을 체크하는 데에는 아티팩트도 큰 역할을 하지만 그것보다 더 정확한 건 이능력자들의 감각이니까,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
“흠! 흠! 대성녀가 아니라고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우선은 확인을 해 보겠다는 말입니다. 신중해야 하니까요.”
“알겠어요. 다 알겠는데 오늘은 보내 주세요. 자꾸 킬리언 황태자님 편 들지 말고.”
“뭐라고요?”
“오늘은 제가 돌아가고 싶다고요.”
허. 탄식을 흘리는 대사제의 입술을 따라 흰 옥수수 수염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뽑아 버리고 싶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인지 모르겠군요. 대성녀가 없어진 지금 제국은 위기 상황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신전으로 와서……!”
“이럴 때고 나발이고 지금은 싫다고 말씀드리잖아요.”
“뭐, 뭐라고……?”
“오늘은 우선 돌아갈게요.”
“이 무슨……!”
아니, 진짜 말 안 통하네.
“대사제님.”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뜨며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아이비가 저한테 말해 준 게 있어요.”
“……?”
대사제가 의아하게 눈가를 찌푸리자 얼굴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귀족들에게 비싼 알약을 제조해 파신다면서요. 뭐, 효과 없는 걸 있는 것처럼 속여서 파는 건 그렇다고 쳐도. 저는 결국 대성녀 자리에 앉게 될 텐데, 도와 드리지 않아도 되겠어요?”
물론 대성녀 자리에 앉겠다는 건 거짓말이고, 아이비가 아니라 맥시엄에게 들은 거지만 말이다.
“금액이 꽤 크다고 들었는데, 그 돈줄 없어져도 괜찮으시겠냐고요.”
“돈줄이라니 감히 나를 능멸하는 말을!”
“능멸이고 나발이고. 제가 대성녀가 된 후에 귀족들에게 나는 그런 약을 만든 적이 없으니 사지 말라, 라고 한다면요?”
“……!”
대사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럼에도 답이 없자 나는 미련 없이 휙 돌아서는 척했다.
“아. 제 도움은 필요 없으신 거군요? 네. 알겠어요.”
“아! 아니!”
대사제의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가만히 있자 대사제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노인네가 기운도 좋지.
“왜요? 제 도움 필요하세요?”
내 말에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거리던 대사제가 결국 항복했다.
“오늘만입니다. 꼭 다시 돌아오신다고 약속하십시오!”
“네. 당연하죠. 그럴게요.”
나는 싱긋 웃었다.
대사제는 내가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제국 최고의 이능력자 둘이 내게 집착하고 있으니, 대성녀인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
나비초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던 사람인 데다가, 아이비가 날 계속 찾았다는 것도 모를리 없으니.
걔가 흑마법으로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대충 눈치챈 것 같고 말이야.
“황태자님 설득도 그렇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대사제는 거만한 표정으로 수염을 한 번 쓸었다.
“꼭! 알약 때문은 아니지만! 대성녀가 되실 분이 이렇게까지 부탁을 하시니 제가 한 번 힘 좀 써 보겠습니다.”
우리는 대화 아닌 대화를 마치고 킬리언과 에던의 옆으로 돌아왔다.
“흠! 흠!”
주먹 쥔 손을 입에 대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대사제가 킬리언에게 말했다.
“전하, 신전이 소란스럽고 성녀 후보들이 불안해할지 모르니 오늘은 라티에나 양을 우선 돌려보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대사제가 나를 보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니 정말로 대사제가 아이비를 이용해 돈을 얼마나 벌어먹었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태세 전환이 장난 아니네. 나중에 뒤를 한 번 캐 봐야지.
“누가 대사제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했나? 라티에나는 여기서 못 나가.”
“예, 당연히 그렇…… 예?”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아니! 그런……!”
힘은 개뿔! 큰 소리 뻥뻥 치더니 중요한 순간에 허접이었네. 나는 대사제를 찌릿 노려보았다.
목소리만 커 가지고 도움이 안 돼!
일단 대사제는 조용해졌지만 킬리언은 절대 양보할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다시 말하지. 라티에나 메리골드는 포기해. 그럼 너 하나쯤은 용서하고 보내 주지.”
킬리언의 명령에 에던은 비소를 흘렸다.
“말씀드렸는데요. 라티에나를 두고는 못갑니다.”
“결국 황실에게 검을 겨누겠다?”
“네. 못할 것 없죠.”
단호한 대답에 킬리언의 입매가 딱딱히 굳어졌다. 에던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고-.
“안 돼!”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분위기에 내가 그와 킬리언 사이를 막아서며 소리를 지르던 그때.
“그럼요, 안 되죠.”
익숙한 사람이 정원을 가로지르고 나타났다.
우리는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히, 힐스타인 경?”
“안녕하세요, 라티에나 님.”
여우 같은 눈꼬리를 휘며 힐스타인이 싱긋 웃었다.
붉은 망토를 날리며 난리 통인 정원을 여유롭게 걸어온 힐스타인은 망설임 없이 내게로 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손 키스, 는 안 되겠죠?”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싫어.
힐스타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작게 까딱거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경이 무슨 일이지?”
킬리언의 물음에 힐스타인이 주위를 휘이 한 바퀴 훑더니 마법사들이 끌려간 구석에서 시선을 멈췄다.
“황실 마법사 둘이 사라졌다고 해서요. 뒤쫒아왔는데 재미난 일이 벌어져있지뭡니까. 오랜만에 두 분이 나란히 선 모습도 보고.”
황실의 마법사들을 발견한 그의 눈빛이 반짝 빛나고, 킬리언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마법사의 일은 해결되었다. 돌아가도록 해.”
“아니. 그럴 수는 없죠.”
에던의 눈치를 슥 살핀 힐스타인이 내 옆으로 걸어와 섰다.
킬리언의 반대편에. 마치 내 편인 것처럼.
“황태자님께서도 이제야 아셨나 봅니다?”
근데 이거 진짜 미친놈이. 황태자인 킬리언한테 비꼬는 듯 말을 툭 내뱉는다.
킬리언은 그의 태도가 익숙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알고 있었나 보군. 그래서 최근 아이비에게 무관심했던 거였어.”
“네. 뭐.”
킬리언은 능글맞게 미소 지었다.
“두 분, 오늘은 그냥 보내 주시죠.”
“내가 경에게 의견을 물었던가?”
“제가 좀 충신이라서요. 조언입니다. 대성녀로 책봉되어 신전으로 온다면 저야 좋지만, 신전에서 쾌락을 즐겼던 마녀랑 라티에나 님은 다르잖아요?”
힐스타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위아래로 날 스윽 훑어보는 그의 뱀 같은 차가운 눈빛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라티에나 님은 그런 걸 즐기시는 타입이 아니니까요. 뭐. 저야 워낙 기술이 끝내 줘서 시간만 있으면 라티에나 님이 저에게 정신없이 빠져들게 만들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능력자 기사들이랑 나눠 갖는 것도 싫어서요.”
저게 진짜! 내 편을 드는 거야, 마는 거야?
나는 힐스타인에게 소리 없이 입을 또박또박 벙긋거렸다.
“후·추 뺏·기·고 싶·어·요?”
아랫입술을 깨물며 흘겨보자 힐스타인은 날 놀리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더니 변태 같았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이쯤에서 타협하시죠. 보는 눈도 많고, 마법사들이 벽을 건드린 일이 밝혀지면 전하께서도 난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차기 황제께서 실수나 장난으로 그랬다, 라고 쉽게 넘겨 드릴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이윽고 힐스타인의 시선은 에던에게로 향했다.
“게다가 대공님께서 반역자가 되면 저희 또한 곤란합니다. 북부를 지킬 사람이 없어지니까요. 오늘은 이쯤에서 양보해 주시면 벽이 무너진 마법사의 일은 저도 비밀로 해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황태자님이라 하셔도 이 일에 대해 파헤치겠습니다. 저도 제 역할이 있으니.”
힐스타인은 끝까지 싱긋 웃었고, 잠시 후 에던이 먼저 검을 바닥에 내던지자 킬리언도 차갑게 굳은 얼굴로 되돌아섰다.
“대공님을 위해서 한 일은 아니니 고맙다는 말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입 찢어버리기 전에 닥쳐.”
“네, 네. 그러죠.”
싱글싱글 웃는 힐스타인을 향해 에던은 차갑게 쏘아붙이고 돌아섰다.
그리고 내 어깨를 잡고 무릎 뒤로 팔을 넣어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렸다.
그러곤 그가 고개를 까딱이자 타이밍에 맞춰 북부의 부하들이 달려왔고 포털이 열렸다.
에던과 내가 그대로 포털을 넘어가려는데 힐스타인이 말했다.
“라티에나 님, 저 후추 주실 거죠?”
저 여우 같은 인간.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힐스타인 덕분에 상황은 정리됐으니까.
***
북부, 대공성 가장 최상층에 있는 에던의 침실. 고성을 얻어 생활한 이후부터 거의 사용하지 않는 곳이다.
나는 나이가 지긋한 하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옷은 이걸 입으세요. 사이즈는 조금 크지만 불편하진 않으실 거예요. 욕조 물은 준비되어 있으니 편히 사용하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하녀는 내게 욕실 위치와 여분의 옷을 둔 곳을 알려 주고 나갔다.
곧장 방 옆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밝은 곳에서 보니 몸의 상처는 난리도 아니었다. 팔, 다리, 어깨 그리고 등. 아이비가 때리는 동안 내가 웅크리고 있었는지 가장 상처가 심한 곳은 등이었다.
피가 뭉친 것 같은 붉은 점들이 있고, 보랏빛으로 변한 멍은 아픈 만큼이나 보기 싫었다.
이 상처가 다 없어지긴 할까? 한숨을 내쉬며 씻고 나온 나는 에던을 기다렸다.
잠시 어딜 다녀온다고 했는데, 바로 오겠지?
하고 싶은 말도, 해 주고 싶은 일도 있는데.
사이즈가 커서 어깨가 흘러내릴 만큼 헐렁한 면 슬립으로 갈아입은 나는 창밖을 응시했다.
새카만 밤하늘, 그래서 더욱 빛나는 별들. 북부의 밤은 아름답다.
오늘 있었던 많은 일들이 거짓말인 것처럼 고요하고 평온한 새벽이었다.
욱신거리는 몸을 양팔로 감싸고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데 문이 열렸다.
“라티.”
휙 돌아보자 상의만 겨우 갈아입은 튜닉 차림의 에던이 서 있었다.
“에던!”
나는 양팔을 활짝 벌리고 달려가 에던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런데 에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자 그는 한쪽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옷을 왜 그렇게 입고 있어?”
이거 언젠가 들었던 말 같은데.
“아, 옷이 조금 커서요. 어깨 쪽이 흘러 내렸…….”
“잘됐네. 벗어.”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