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Went Crazy Over Me RAW novel - chapter (91)
악역이 내게 미쳐버렸다 91화. 책임져(91/92)
#91화. 책임져
2024.07.30.
그 말을 듣고 순간 멈칫한 나는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을 슬금슬금 끌어 올렸다.
에던은 그런 내 모습에 사뭇 진지해진 태도로 다시 말했다.
“벗겨 줘?”
흠칫. 나는 또다시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춰 버렸다.
“잘못 말한 거 아니었어요?”
“아닌데.”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하지만 농담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듯 에던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왜.”
“아니…….”
왜냐니. 그건 내가 할 말이잖아? 갑자기 다짜고짜 벗으라고 하면 당연히 이상한 생각이 드니까.
나는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보는 등 깊이 고민하다 해답을 찾았다.
뭐, 좋아. 난 에던을 좋아하니까 못할 건 없지. 싫지 않아! 오히려 좋아!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아픈 것도 아프지만 피부가 멍 때문에 엉망진창이란 말이야. 중요한 순간에 이런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잖아.
“에던 정말로 미안하지만 오늘은 몸 상태가…… 꺅!”
아직 말을 하는 중인데 에던이 나를 가뿐히 안아 들었다. 신전에서 넘어올 때처럼 오늘만 두 번째 공주님 안기다. 에던은 작은 장작 몇 개가 타고 있는 벽난로 앞의 긴 베드 소파에 날 내려놓았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슥슥 헝클어뜨리듯 매만지더니 상체를 숙여 눈을 맞췄다.
새로 갈아입은 튜닉에서 나는 비누 향과 미처 닦지 못했는지 피가 살짝 묻어 있는 머리카락에서 비릿한 향이 섞여 풍겨 왔다.
“이 쪼끄만 게,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그야…….”
당연히 뭐. 그런 거 아니겠어? 내가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진 않은데. 그걸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해.
“…….”
그런데 잠시 후 달칵. 에던이 약 케이스 뚜껑을 열었다.
민망함으로 온몸이 배배 꼬였다.
약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런 거라고 얘기를 해 주란 말이야. 괜히 혼자서 이상한 생각을 해 버렸잖아!
그리고 눈치 빠른 에던은 내 생각을 전부 알아챈 거 같고.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이대로 기절해 버리고 싶다. 아니면 에던의 기억을 딱 5분만 지워 버리고 싶다.
“벗긴다.”
등 뒤에서 내 머리카락을 잡고 앞으로 넘겨 준 에던이 슬립의 뒤쪽에 달린 지퍼를 붙잡았다.
그리고 지퍼가 지익- 내려가려던 순간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소리쳤다.
“자, 잠깐만!”
“왜.”
“부, 불 조금만 꺼 주면 안 돼요?”
상처가 팔이 안 닿는 곳이 있으니까 에던의 도움을 받아 약을 바르긴 해야 하는데.
역시 이대로 내 몸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건 창피하단 말이야.
조금 전 욕실에서 본 몸의 상태가 심각하기도 했고…….
“그래.”
까탈스럽게 군다고 한 소리 할 줄 알았던 에던은 자리에서 순순히 일어나더니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전등의 빛만 빼고 불을 껐다.
그래도 커다란 창에서 들어오는 달빛과 벽난로의 장작불이 있어서 작은 전등만으로도 충분했다.
“아프면 말해.”
“네.”
오일처럼 매끈거리는 약을 바르는 에던의 손끝이 피부에 스칠 때마다 약간의 쓰라림과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에던은 중간중간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다가 다시 약을 바르는 것을 반복했다.
“젠장. 내 손으로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그의 혼잣말에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무서운 말인데도 에던이 그만큼 나를 소중히 생각해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
그래도 사람을 죽여 버리겠다는 말인데 그가 무섭기는커녕 웃다니.
에던의 곁에 있다 보니 나도 미쳐가는 것 같다.
근데 그래도 좋아.
엉망인 피부 상태가 창피한 것도 잠시였다.
상처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에던의 온기에 기분이 좋아질 무렵.
“어?”
내가 깜짝 놀라자 에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었다. 약을 바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욱신거리던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약에 강한 진통제가 들어 있어. 북부에서 기사들이 쓰는 거 가져온 거야. 상처 때문에 몸이 아프다고 전투를 멈출 수는 없어서 이 약을 자주 사용해.”
“와. 신기해요.”
깜짝 놀랄 정도의 진통 효과였다.
“뭐, 가끔 우리도 놀라긴 해. 이 약이 제국 마법사들이 이룬 최대 업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팔 이리 줘.”
나는 옷이 흘러내리지 않게 가슴 쪽을 붙잡고 소매에서 팔을 꺼냈다.
팔뚝의 상처를 확인한 에던의 얼굴에 또 한 번 짜증이 묻어났다. 무어라 더 한마디 내뱉으려던 에던은 나지막이 한숨만 작게 내뱉었다.
“그런데 북부는요? 벽은 잘 수습됐어요?”
“단테 공작을 불러왔어.”
“공작님을요?”
“지난번에 남부의 성벽 보호 아티팩트가 꽤 쓸모 있어 보였거든.”
“정말요? 그럼 도움이 된 거예요?”
“응. 괜찮았어. 내게 도움이 되는 걸 알았으니 이젠 죽을 때까지 부려 먹어야지.”
“…….”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번에 도움받았으니 지난번의 잘못은 좀 잊어 주겠다, 라는 쪽으로 방향이 흘러가야 하는 거 아닌가. 도움이 되었으니 죽을 때까지 부려 먹겠다니.
이 타이밍에 좀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해도 에던의 성격은 좀 많이 더러운 것 같다.
하긴 처음부터 그랬지.
“그럼 공작님은 괜찮…….”
일순 에던의 손길이 뚝 멈췄다.
“쓸데없는 질문하지 마.”
……쓸데없는 질문이라니.
이 정도 걱정은 할 수 있는 거 아냐? 하지만 에던은 공작을 걱정하는 내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대화를 칼 차단해 버렸다.
그리고 반대쪽 팔과 다리, 허벅지까지. 마지막에는 열린 지퍼 사이로 팔을 집어넣어 배까지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약을 발라주었다.
분명 옷을 잘 챙겨입고 있었는데 온몸이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곳도 있었는데.”
상황이 다 끝나자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해져서 중얼거렸다.
“까분다.”
에던은 툭,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 씻고 올게.”
약 발라 주는 거 때문에 급하게 상의만 갈아입고 왔구나.
“에던 잠깐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던을 향해 성큼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리고 에던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그의 큰 체격을 모두 덮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랗게 치유력을 발산시켜 몸 안으로 흘려보냈다.
곧 끌어안은 에던의 체온이 조금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에던은 나를 밀어냈다.
“뭐해.”
“치유요.”
“내가 그걸 몰라서 물어?”
말하는 에던의 한쪽 눈살이 구겨졌다.
“해 달라고 한 적 없어. 하지 마.”
“해 주고 싶어요.”
나는 다시 그에게 손을 뻗었고, 에던은 고개를 비틀더니 미간을 찡그리고 한쪽 머리를 쓸어 넘겼다.
“치유해 달라고 약 발라 준 거 아니야. 그건 내가 부탁할 때만 해.”
“언제 할 건데요?”
“필요하면 할 거야.”
“그러니까 언제?”
“그걸 네가 왜 신경 써?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말을 마친 에던은 그대로 돌아섰고, 나는 성큼 발을 내디뎌 다시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싫어요.”
그를 더욱더 힘껏 끌어안고 치유력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낮은 한숨이 들리고, 에던은 다시 날 밀어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고집 피워? 하지 말라고 하잖…….”
“에던.”
난 그의 말을 잘랐다.
“나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빨리 했어야 했던 말. 조금 부끄럽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말.
나는 에던을 똑바로 올려보며 말했다.
“당신한테는 토할 것 같은 그런 기분,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어요. 오히려 당신을 치유해 줄 때는 온몸이 떨릴 정도로 좋았어.”
날 내려다보는 에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음 말을 내뱉기가 두려울 정도로 차가운 얼굴. 왜 그러지? 반응이 이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내가 큰 실수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근데 그래도 말할 거야.
“나 당신이 좋아요. 그러니까 날 거부하지 마요. 내가 해 주고 싶어서 하는 거고, 치유 같은 거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꺅!”
집요하게 나를 응시하는 에던이 조금 무서워지려던 찰나, 그가 내 어깨를 눌러 소파에 앉혔다.
양옆으로 팔을 뻗어 등받이를 짚고, 그 사이에 날 가둬 놓은 채 그는 굳은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해 봐.”
낮은 음성. 뭔가를 꾹 눌러 참는 듯한 목소리.
“그러니까…… 그런 기분 당신한테는…….”
“말고.”
서늘하게 굳어 있던 에던의 눈이 무섭게 날카로워졌다.
“그다음에 했던 말.”
“좋아한다고…….”
그 순간이었다. 단단히 다물려 있던 입매가 긴장을 놓은 듯 흐트러졌다.
“다시.”
그럼에도 여전히 목소리는 낮았고, 나는 뜨거운 그의 시선을 마주 보며 말했다.
“좋아해요.”
말을 내뱉자마자 나도 모르게 에던의 입술에 시선이 닿았다.
그의 한쪽 입매가 올라가며 입술이 작게 벌어지더니 그 사이로 혀가 입꼬리를 가볍게 훑고 들어갔다.
“하-.”
동시에 나지막이 흘러나온 조소가 섞인 작은 숨소리.
에던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린 듯 얼마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불안함에 가슴이 조여 오기 시작했다.
잠깐만…… 이거 뭐지. 이 반응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나 괜한 말 해 버린 건가? 그냥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런 건데…….
긴 시간은 아니었다. 내 체감상 긴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찰나였는데 별의별 생각이 파도처럼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에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저 당신이 내게 잘해 주는 게 고마워서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거라고 말을 돌려 볼까, 하던 찰나였다.
에던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휙 나는 얼굴을 재빨리 옆으로 돌렸다. 터질 것 같은 심장에 숨을 크게 들이켜자, 에던이 커다란 손으로 내 턱을 움켜잡더니 얼굴을 천천히 자기 쪽으로 당겼다.
“라티.”
다시 마주한 에던의 얼굴. 아무리 봐도 잘생겼다. 근데 지금은 차라리 아무 말 안 해 줬으면 좋겠는데.
대답 듣기가 너무 무서워.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시선에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금색 머리카락 위로 달빛이 쏟아지고, 보석을 박아 놓은 듯한 붉은 눈동자가 날 보고 반짝였다.
“책임져, 그 말.”
느리게 목덜미를 쓰다듬는 그의 손의 감촉에 등골이 오싹해지며 희열이 돋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 거친 숨과 함께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