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10
악녀는 마리오네트 9장. 원치 않은 방식의 자각(10/33)
9장. 원치 않은 방식의 자각
“제레미는 지금 어디에 있지?”
라파엘로는 별저로 돌아오자마자 제레미의 행적부터 물었다. 헨버튼 길리안 뒷조사 진척을 알고 싶었다.
“아직 출타 중입니다.”
‘아직도 조사 중인 건가.’
라파엘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로 향했다. 곁을 따르던 바스턴이 물었다.
“주인님, 혹시 또 평소처럼 인간미 없이 전하를 대하신 건 아니죠?”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아까 응접실에서…….”
그의 무심한 물음에 바스턴이 곧장 대답하려다가 말하던 것을 멈췄다.
주변에 귀가 많았다.
그는 라파엘로의 곁에 바짝 다가갔다. 그는 라파엘로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까 응접실에서 나올 때 전하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시던데요?”
라파엘로는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자연스럽게 몸을 조금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 또 호들갑 떨며 경거망동하지 마.”
“제가 또 언제 경거망동했다고요……?”
바스턴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 착각인가? 분명 주인님이 평소랑 달라 보였는데.’
지금 이러는 걸 보면 또 평소랑 똑같은 것 같았다. 하긴, 라파엘로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항상 이랬다. 제레미에게 듣기로는 더 어릴 때부터 성격이 똑같았다고 했다.
‘근엄하고 위엄 넘치는 어린이이라니. 소름 끼치잖아.’
원래 용병대를 떠돌았던 바스턴은 우연하게도 키드레이 공작가의 종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공작가는 조금 이상했다.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날카로웠지.’
지금은 덜하지만, 그땐 기강이 서다 못해 숨 막힐 정도였다.
바스턴은 라파엘로의 첫인상이 떠올랐다.
‘재수 없었지.’
라파엘로는 어린 시절부터 잘생기고 키도 컸고 뭐든 쉽게 해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말수가 적었고 잘 웃지 않았다. 그게 멋있다며 바스턴이 짝사랑하던 하녀가 연심을 비쳐서 더 재수 없다고 느낀 건 아니었다.
…아마도.
‘주인님을 연모하는 이가 수두룩했지.’
누군가는 그를 두고 첫사랑 제조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심지어 황녀 전하도 그렇잖아.’
그는 다시금 혼자 촉촉한 생각에 젖어 눈을 빛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계단을 오르는 중인 제 주인의 옆모습이 오늘따라 더 근사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추천한 크림색 셔츠 때문인 것 같았다.
“바스턴.”
그는 화들짝 놀라며 라파엘로를 보았다.
어느새 상의를 탈의한 라파엘로가 셔츠를 내밀고 있었다. 다른 생각에 잠긴 채로 걷다 보니 어느새 침실에 도착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이쿠, 얼른 주십시오.”
그는 라파엘로의 셔츠를 받고 시종이 가져온 실내복을 펼쳐 라파엘로의 팔에 끼웠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한 번 크게 움직였다.
완벽하게 단련한 몸매도 몸매지만, 그의 등에 크게 난 긴 상흔 때문이었다. 그건 바스턴 때문에 전장에서 입은 상처였다. 아직도 비처럼 피를 쏟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에게 말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정신 차려, 바스턴 데보라.”
항상 재수 없다고 느꼈던 그 건조한 목소리가 그때만큼은 눈물이 핑 돌만큼 든든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틀림없이 야만족 손에 죽었을 것이다.
‘주인님은 이 상처를 신경도 안 쓰시는 것 같지만.’
이내 상흔은 검은 셔츠에 삼켜지듯 가려졌다.
공작령은 다른 나라와 국경선이 닿아 있다. 또한, 야만족이 자주 침탈하려 들었다. 야만족은 서부 국경선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라파엘로는 전장에 나갈 나이가 되었을 때, 충분히 전쟁을 치를 준비를 마치자마자 야만족을 쓸어버렸다. 단숨에 서부 국경선을 재정비한 것이다.
‘수도에서야 전쟁이 뭔지도 모르니 주인님이 얼마나 냉혹한지 모르지.’
라파엘로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손속에 자비가 없다. 상대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냥 해야 하는 일이기에 하는 사람처럼 처단했다.
바스턴은 그 이후로 라파엘로의 심장은 얼음으로 되어 있다고 속 편하게 결론 내렸다.
‘이런 우리 주인님에게도 드디어 봄이 찾아오다니!’
바스턴의 콧김이 거세졌다.
그때 라파엘로가 냉랭한 눈으로 바스턴과 시선을 마주쳤다.
“숨결이 불쾌하구나.”
“커험, 환절기 비염이 조금…….”
셔츠를 걸친 라파엘로는 보석 상자에서 익숙하게 루비로 된 커프스단추를 집어 들었다가 멈칫했다. 평소에는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던 시리게 파란 다이아몬드가 눈에 띄었다.
카예나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하는 파란색이었다.
똑똑.
시종이 침실 문을 두들기고 들어왔다.
“제레미 보좌관이 도착했습니다. 바로 보고드릴 사항이 있다는데 어찌할까요?”
라파엘로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
* * *
제레미는 오랜만에 의욕이 불타고 있었다.
‘주인님이 이렇게 뭔가를 궁금해하시는 일이 대체 몇 년 만인지.’
그는 그림자처럼 라파엘로의 곁에 붙어 다녔다. 거의 모든 일정을 같이 소화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제레미가 오늘 일정은 같이 소화하지 않고 헨버튼 길리안 뒷조사에 열을 올렸다. 라파엘로가 뭔가에 관심을 드러낸 것이 그만큼 기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서 꽤 변하신 것 같기도 하는군.’
라파엘로는 딱히 의욕적인 사람도 아니고 뚜렷한 욕구도 없다. 궁금해하는 것도 없고 사는 게 영 재미없어 보였다. 마치 살아 있으니 사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게 제레미의 눈에는 한없이 안쓰러워 보였다.
둘이 나이 차가 많이 나기도 했지만, 라파엘로가 방치된 채 자라는 걸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공작 부인은 어렸을 때부터 라파엘로를 흠결 없는 후계자로 길러 내려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부친인 레오 공작은 언제부터인가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실의에 빠져 술을 퍼마시기 일쑤였다.
또한, 술기운에 종종 난폭해졌는데, 유독 라파엘로에게 거칠게 굴었다. 라파엘로가 고작 열 살이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지긋지긋한 그 까만 머리카락! 빨간 눈! 제발 좀 꺼져 버려!”
고사리 같은 손에 부친의 생일 선물을 꼭 쥐고 있던 라파엘로의 텅 빈 눈동자는 아직도 꿈에 나타나곤 했다.
제레미는 그때도 그의 보좌관이자 호위 기사였기에 바로 곁에서 공작의 패악을 보았다. 라파엘로를 저주스러운 무언가처럼 보는 눈빛과 독설을 내뱉는 입, 어린 아들을 향해 물건을 집어 던지는 손. 무엇 하나 정상적이지 않았다. 제 아들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나 할 법한, 아니 원수에게나 할 행동이었다.
거센 불길처럼 화가 치밀었다. 어떻게 오랜만에 보는 아들을, 그것도 아버지의 생일이라고 직접 용돈으로 선물을 준비해 온 어린 아들을……!
그는 라파엘로가 가여워 대신 나서서 한마디라도 하고 싶었다. 처벌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라파엘로가 제레미를 막아서며 담담히 말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라파엘로는 슬퍼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건 체념이 아닌 확인이었다.
그는 선물로 준비했던 밝은 파란색 토파즈 단추를 화단에 버렸다. 부친의 눈동자 색과 닮았다고 고른 것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물었을 때 라파엘로는 아이답지 않게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키드레이가 끔찍하게 싫으신 모양이야.”
그 뒤로 라파엘로는 부친을 찾지 않게 되었다.
제레미는 그게 왜 그렇게 가슴이 미어지는지 몰랐다. 어떻게든 어린 후계자를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맛있는 걸 좀 먹으면 기운이 날 거라고 괜히 호들갑 떨며 라파엘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데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며 속을 게워 냈다.
그건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로 라파엘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종종 몸 상태가 나빠지며 속을 게워 내기 일쑤였다. 의원들은 하나같이 라파엘로가 멀쩡하다고만 말했다.
“건강하십니다.”
“잠이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들은 후계자의 문제점을 찾지 못해 진땀을 흘렸다.
공작 부인은 아들에게 이상이 생긴 걸 두고 보지 않았다. 후계자에게서 이상 증상이 계속 나타나니 의원도 고용인도 계속 바뀌었다. 라파엘로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공작가의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상당히 험악해졌을 때였다.
어느 날 라파엘로가 멀쩡해 보이는 안색으로 말했다.
“저 이제 괜찮아요. 그냥 갑자기 좀 예민해졌었나 봐요.”
그 뒤로 라파엘로가 더는 토하지 않고 정말 괜찮아 보였다. 살얼음판 같았던 분위기에 지쳤던 사람들은 금방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제레미는 그의 안색이 종종 창백해지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주인님은…….’
“제레미 보좌관님.”
잠깐 옛 생각에 잠겼던 제레미가 고개를 들었다.
“……아. 조사는 어떻게 됐지?”
“헨버튼 길리안의 주변인을 포함해 최근 행적을 조사한 결과입니다.”
심각한 얼굴을 한 수행원이 서류를 내밀었다. 처음 그를 알아보기 시작했을 때는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이니 뒤가 좀 더러울 것이라고만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딱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서류를 확인한 제레미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다른 조사원들의 보고를 총합해 당장 서류를 준비해라. 소가주님께 보고할 것이다.”
제레미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라파엘로의 침실로 향했다.
“전에 말씀하셨던 일의 1차 취합 보고서입니다.”
라파엘로는 자주 사용하는 루비 커프스단추를 셔츠에 채운 뒤 보고서를 받았다.
“모두 나가 있도록.”
라파엘로는 보고서를 내용을 훑었다.
헨버튼 길리안은 수도 생활을 한 지 5년쯤 되었다. 그간 왕성한 사교 활동을 했고 얼마 전 약혼을 깼다는 것까지는 특별할 것 없었다. 어울려 다니는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질이 좋지 않으며, 그들과 비밀스러운 신사 클럽을 하나 만들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런데 그 신사 클럽이 문제였다.
“수도에서 마약 거래가 가장 활발한 곳이라…….”
제국에서는 마약 유통을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위법 시에 처벌 수위도 상당히 높았다.
제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한 양의 마약이 들어올 만한 해외 수입 경로를 살펴보았으나 이 신사 클럽과는 연관이 없었습니다.”
해외 수입이 아니라면 답은 뻔했다.
“그렇다면 국내의 어딘가에서 마약을 재배하고 있단 뜻이겠군.”
“출처를 추적해 보라고 지시는 해두었습니다.”
마약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인신매매, 불법 도박장, 불법 콜로세움이 다 이 신사 클럽과 연계되어 있었다. 심지어 살인도 빈번한 모양이었다.
키드레이 공작가의 수사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 짧은 시간에 이만큼이나 알아냈다는 건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이건 다 숨기지 못할 만큼 일을 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국에서는 이런 일을 까다롭게 단속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귀족이 만든 신사 클럽을 손대는 게 어렵기도 했다.
라파엘로는 보고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카예나의 반응이 마음에 걸려서 뒷조사했더니 온갖 더러운 게 줄줄이 엮여 있었다.
이를 조사해보았던 제레미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어쨌든 길리안 자작가는 가신 가문이며 군마 사업으로 축적한 부도 대단하다. 그 사업이 띠는 성질 때문에 섣불리 건드리기도 어렵다. 서부 공작령의 핵심 중 하나가 기마병이다.
제레미는 특이사항을 한 가지 더 직접 언급했다.
“최근 황녀 전하께 강한 집착을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라파엘로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눈빛에 어린 온기가 평소보다 더 차갑게 식었다.
제레미가 말을 이었다.
“부마가 될 방법을 물색하느라 두 황위 계승권자의 지지자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증거도 잡았습니다.”
레제프나 하인리히는 반드시 길리안 자작가의 군마 사업에 관심을 보일 것이다. 그것은 상당히 먹음직스러운 파이니까.
“어찌할까요?”
라파엘로는 그날 황립 도서관에서 헨버튼의 눈에 깃든 음험한 욕망을 보았다. 황녀를 향한 축축하고 더러운 집착이었다. 기분 나쁘고 역겨워서 당장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충동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라파엘로는 사태를 해결할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쓰레기는 미리 제거하는 게 좋지 않을까?”
고쳐 쓰지도 못할 인간이라면 미리 제거하는 게 좋다. 그래야 후환이 없다.
제레미는 그의 입에서 나온 제거란 말에 멈칫하다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예? 어떤 제거를 말씀하시는지……?”
라파엘로는 쓰레기가 하나밖에 더 있느냐는 식으로 태연하게 말했다.
“헨버튼 길리안.”
그의 무감한 눈동자가 제레미를 향했다.
“그자를 제거해라.”
“주인님.”
제레미는 머리가 약간 지끈거렸다.
“물론 이자의 무도함은 상당합니다만, 이 정도로는 귀족을 처분할 수 없습니다.”
간곡한 만류에 라파엘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몰래 죽이면 되잖아.”
“길리안 자작가의 후계자가 갑자기 죽으면 누구나 의심할 겁니다. 게다가 그 가문은 공작가의……”
라파엘로는 손을 내저었다.
“그냥 해 본 말이었다.”
‘거짓말.’
누가 봐도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 주인은 금방 모른 척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이상하게 좀 얄미웠다.
제레미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명이 줄어든 기분이었다. 그래도 실행에 옮기진 않을 모양이라 안심이었다.
‘원래도 좀 냉정하시긴 한데 뭔가 평소랑 좀 다른 느낌인데…….’
설마 황녀와 엮인 문제라 그런 건가?
그는 묘한 눈으로 라파엘로를 보았다.
“헨버튼은 계속 감시해.”
“예, 주인님.”
* * *
카예나는 최근 제 성년식 준비를 시작했다.
“성년식 초대장은 나왔니?”
장미가 가장 흐드러지게 피는 시기가 바로 그녀의 생일이다. 그래서 항상 장미 정원을 개방해 야외 파티도 하고 그랜드 홀에서 무도회도 열었다.
‘규모를 축소하고 싶지만, 이미 다 준비 중인 일정을 줄일 수도 없고.’
성년을 맞이해 무도회와 사냥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궁정 화가가 초대장으로 쓸 카드에 그림을 모두 그렸다고 합니다. 물감이 다 말랐으니 금일부터 시녀들이 초대장을 작성하면 됩니다, 전하.”
베라가 그렇게 말하며 초대장 샘플을 건넸다.
그녀는 각 저택으로 보낼 카드를 확인했다. 장미가 탐스럽게 그려진 카드였다.
“괜찮네. 내용을 다 작성한 후에 전령을 보내렴.”
“예, 전하.”
그 밖에도 공수된 식자재 리스트, 연회에 동원할 하인 수, 오케스트라의 연주곡 종류와 순서 등을 확인했다. 어느 것 하나 실망스러운 구석 없이 압도적이어야 한다.
‘그게 바로 황실이지.’
카예나의 생일은 항상 사교 시즌 오픈을 알리는 중요한 행사 같은 것이었다.
연회가 성공적일수록 자연스럽게 카예나의 부마 자리를 놓고 경쟁도 더 치열해진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런 반응이었다.
‘내 부마 자리를 놓고 경쟁하도록 부추겨야 해.’
그들이 쓸데없는 곳에 시선을 빼앗겨 경쟁하는 동안 카예나는 가상의 남자를 만들어내 내뺄 생각이었다.
똑똑. 그때 새로운 상급 시녀들이 카예나의 침실에 도착했다.
줄리아, 수잔, 올리비아가 나란히 서서 카예나를 향해 절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이들은 금일부터 실무 교육에 돌입하게 되었다.
“수잔.”
“말씀하십시오, 전하.”
카예나는 바로 할 일이 있었기에 수잔 먼저 불렀다.
“라파엘로 경에게 편지할 것이니 준비하거라.”
“네, 전하.”
이어서 올리비아를 불렀다.
“올리비아는 편지를 전달할 채비를 하렴.”
올리비아는 코를 살짝 찡그렸다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공작가의 후계자에게 전달할 편지라면 전속 시녀가 가는 것이 마땅했다.
“준비하는 대로 다시 오겠습니다.”
곧 수잔이 테이블 위 편지지에 문진을 대놓고 펜에 잉크까지 적셔 깔끔하게 준비를 마쳤다. 이제 라파엘로에게 편지를 쓸 차례였다.
⌜키드레이 경.⌟
‘거리 두려는 게 너무 티 나나?’
자신을 피하지 말라고 했던 라파엘로의 말이 떠올랐다.
카예나는 저도 모르게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평소에 그에게 하던 편지대로 할 수는 없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지.’
연인에게도 보내기 민망할 정도로 낯간지러운 사랑의 밀어로 꽉 채운 연서들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그걸 떠올리면 조금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담백하게 쓰고자 했던 것이 너무 삭막한가 싶기도 했다.
그녀는 앞에다가 글자를 욱여넣었다.
⌜친애하는 키드레이 경.⌟
‘친애하는’이 좀 몰린 듯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나는 지난번 황립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할 겸 아카데미에 내 이름을 붙여 지을 건물 위치를 확인해 볼 참이야.
그 건물이 부디 제국의 어린 인재들에게 유용하게 쓰이길 바라고 있어. 다만 내가 그 일을 잘해 낼 수 있을까 염려되는 건 사실이라네. 난 아카데미에 재학한 적도 없고 학생들과의 교류도 당신만큼 해 보지 않았거든.
서류를 공증받는 김에 내게 그대의 고견도 같이 들려주었으면 해. 그럼 서두르지 않고 답장을 기다리겠네.
-카예나.⌟
아주 적절히 용건으로 간결하게 채운 편지라고 생각하며 잠깐 몸을 의자에 기댔다.
‘이건 아주 사무적인 편지일 뿐이야.’
카예나는 도서관과 응접실에서 그에게 안겼던 기억을 애써 털어 냈다.
몇 가지 업무를 처리하고 있으니 외출 준비를 마친 올리비아가 침실로 왔다. 그녀는 감색 외투에 리본 장식만 달린 단순한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황녀의 시녀라기엔 비교적 볼품없는 차림이었다.
“어머나…….”
줄리아는 조용히 탄식하며 올리비아의 차림새를 못마땅하게 보았다.
올리비아와 수잔, 두 사람도 줄리아의 탄식은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현명하게도 그냥 무시했다.
“키드레이 경이 저택에 있다면 일정을 묻고 가장 가까운 날짜로 약속을 잡고 와 주겠어?”
“알겠습니다.”
카예나는 편지를 넘겨주다가 제 드레스에 장식한 브로치를 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올리비아의 모자에 달아 주었다. 보석으로 된 나비 브로치가 동그란 모양의 모자 위에서 빛났다.
올리비아는 모자를 살짝 쥐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카예나는 거창한 말 대신 심심한 감상만 전달했다.
“그 녹색 모자에 노란 나비 브로치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이로써 올리비아의 차림새가 암만 수수하다 해도 황녀에게 직접 하사받은 선물을 착용하고 있으므로 그 격이 떨어지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다정하고 따뜻한 호의였다. 무심한 듯, 관계에 초연한 듯하지만, 사실은 참 따뜻한 사람인 카예나를 복잡한 눈으로 보았다.
“조심해서 다녀오렴. 오늘 업무는 그걸로 끝이니 서두를 것도 없어.”
그러니 라파엘로의 저택에서 충분히 머무르다 오라는 뜻이었으나 올리비아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무탈하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전하.”
올리비아는 곧장 키드레이 저택으로 출발했다.
* * *
마차는 키드레이 저택 앞에서 멈췄다. 올리비아는 발판을 밟고 내려와 입구 앞에 섰다.
‘여기가 그 소문 자자한 키드레이 저택이구나.’
그때 문지기가 황실 문양이 박힌 마차를 보고는 공손하게 고개 숙였다.
“사전에 방문 일정을 잡으셨는지요?”
“그건 아니지만 황녀 전하의 서신을 전달하러 왔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인이 저택 안에 그녀의 방문 소식을 전달할 동안 올리비아는 소문 자자한 정원을 구경했다. 최근 수도에서 유행하는 전원풍인 척하는 화려한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귀족들은 먹을 수 있는 과실이 열리는 나무나 허브를 심으면 전원풍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꽃만 있는 정원보단 훨씬 보기 좋네.’
알록달록한 과일이 열리는 나무는 꽃과는 다른 다채로움이 있다.
키드레이 별저는 그것을 아주 적절히 배합해 내었다. 이런 싱그러운 저택에 그 삭막한 남자가 살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올리비아 님.”
저택의 집사가 나와 올리비아를 안내했다.
“마침 주인님이 계셔서 응접실로 바로 안내하라십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죠.”
올리비아는 저택의 사람들이 은근한 호기심을 품고 자신을 힐끗댄다는 사실을 알았다. 황녀가 단 넷만 뽑은 전속 시녀이니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특별히 선호하시거나 기피 하시는 다과가 있을까요?”
집사는 응접실로 올리비아를 안내 후 공손히 물었다.
“뭐든 괜찮아요.”
집사는 금방 다과를 준비해 왔다.
“곧 주인님께서 오실 겁니다.”
집사의 말대로였다.
올리비아가 폭신한 수플레를 한 입 맛보았을 때 라파엘로가 등장했다. 앞머리는 걸음에 뒤로 살짝 넘어가서 반듯한 이마가 보였다. 어딘가 서둘러 온 눈치였다.
그가 올리비아를 향해 격식을 갖춰 인사했다.
“제 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올리비아 양.”
올리비아도 그와 마주 보며 드레스 자락을 잡고 인사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환대 감사합니다, 키드레이 경.”
그들은 동그란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자리에 앉았다.
올리비아는 날씨를 묻는 대신 황녀의 서신을 그에게 건넸다. 상대가 그러는 편을 더 좋아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하께서 직접 쓰신 서신입니다.”
라파엘로는 금빛 봉투를 건네받았다. 붉은 촛농에 찍힌 황실 엠블럼이 오늘따라 특별하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내게 연서를 보냈던 시절도 있었지.’
그게 마치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연서가 생각나자 입가로 엷은 미소가 맺혔다. 그걸 올리비아가 곁눈질로 보았다.
‘흐음.’
아무리 봐도 저건 어떤 징조인 것 같은데.
그녀는 조용히 웃음을 삼키며 차를 마셨다.
“전하께서 경이 만남 가능한 가장 가까운 날짜로 약속을 잡으라 하셨습니다. 언제가 좋을까요?”
곁에서 그림자처럼 조용히 있던 제레미 보좌관이 일정을 이야기하려 했다.
그 전에 라파엘로가 먼저 말했다.
“이틀 후에 뵈면 되겠군요.”
제레미는 입을 떡 벌렸다.
‘아니, 그날은 대사원을 방문하기로 한 날인데요…….’
공작 부부의 이혼 소송 문제로 대사원에 가는 날이었다. 그런데 라파엘로는 그런 일정 따위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듯이 무시하고 황녀와 약속을 잡았다.
“그럼 이틀 후에 황립 아카데미에서 뵙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근처에서 정찬을 같이 드시는 게 어떨까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식당은 제가 예약하겠습니다.”
제레미는 이젠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떡 벌렸다.
“그럼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라파엘로는 잠깐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뭔가 이것으로 충분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올리비아에게 양해를 구했다.
“전하께 드릴 답장을 작성할 생각인데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레미는 잠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다가 간신히 제정신을 차렸다.
“네, 얼마든지요.”
그녀의 대답에 시종에게 편지지를 준비해 오라고 말한 제레미는 조심스럽게 라파엘로를 보았다.
‘바스턴이 헛소리한 줄 알았더니.’
라파엘로는 편지를 봉하여 키드레이를 상징하는 문양의 도장을 찍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올리비아는 편지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 사랑의 메신저가 된 건가?’
* * *
⌜친애하는 카예나 황녀 전하.
마침 저택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편지를 받으니 기쁘군요. 그렇지 않아도 건물을 공사하기 시작한 참입니다.
제가 전하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기회를 받았다는 것이 영광일 뿐입니다. 올리비아 양에게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이틀 뒤 황립 아카데미에서 뵈었으면 합니다.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라파엘로 키드레이 드림.⌟
그녀는 전날 올리비아에게서 전달받았던 편지를 다시금 훑어 내렸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지만 좀 믿기지 않았다.
편지의 내용은 딱히 의미심장한 구석 하나 없이 간결했다. 아주 담백했고 적절했다. 그러나 내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라파엘로가 내게 답신을 보내다니?’
카예나는 편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침음성을 삼켰다.
‘내가 바뀌었으니 날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당연히 바뀌는 거겠지.’
다만 이런 낯간지러운 기분을 유지한 채로 내일 그를 보기가 좀 그랬다.
카예나는 스스로 주책이라고 여기며 마음을 다스렸다.
‘내일이면 레제프의 근신 마지막 날이구나.’
어쩐지 레제프가 연금되었던 열흘이 길게 느껴졌다. 그만큼 워낙 사건이 많았던 탓일까?
‘내명부 기강을 세운 공으로 부황께 라파엘로의 서부 군사 통치권자 임명서를 받아야겠어.’
그리고 내일 아카데미에서 그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베라, 폐하께 알현을 좀 요청해 줄래? 수잔은 예복을 준비해 주고.”
“네, 전하.”
그들은 초대장을 작성하다가 카예나의 명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리아의 부러운 눈빛을 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줄리아는 초대장을 열 장이나 작성하느라 손이 아팠다. 잠깐 쉴 겸 잠깐 펜을 내려놓았다. 황녀의 성년식 자체가 무척 기다려졌다. 그러나 그 사실과는 별개로 이런 잡무는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올리비아가 저리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녀가 미적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 네 명의 시녀 중 줄리아가 초대장을 가장 적게 썼다. 우아한 수도 생활, 황궁 생활은 어쩐지 점점 멀어지고 업무의 연속이었다.
대체 황녀가 왜 이렇게 일을 많이 한담?
줄리아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자는 갇혀 있고 오라버니는 요즘 좀 이상하고.’
황궁은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제 오라비도, 황녀도, 시녀들도 모두!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잉크통에 펜을 푹 담갔다가 뺐다.
“꺅!”
그런데 그 잉크가 펜에서 묻어 나오며 사방으로 튀었다.
“어머, 어떡해!”
파스텔색의 드레스에 검은 잉크가 튀어 버렸다.
줄리아는 당황해 잉크를 문질렀으나 크게 번지기만 했다.
올리비아는 자신이 작성한 초대장 몇 장에 잉크가 튄 것을 보고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니?”
카예나가 물으니 줄리아는 울상을 지었다.
“잉크가 드레스에 튀어 버렸어요!”
“저런. 옷을 갈아입어야겠구나.”
그러다 카예나의 시선이 올리비아에게 향했다.
“올리비아, 네게도 잉크가 튄 거니?”
그 말에 줄리아의 시선이 그제야 올리비아에게 향했다.
“제 드레스는 괜찮습니다.”
그때 줄리아는 올리비아가 쓴 초대장에 잉크가 튀어 있는 걸 발견했다. 조금 미안하긴 했어도 초대장이야 어차피 또 쓰면 그만이지 않은가? 자신의 드레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줄리아는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잉크가 이렇게 튈 줄 몰랐어요.”
“괜찮아요.”
올리비아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초대장을 썼다.
줄리아는 조금 황당해졌다. 자신에게 괜찮으냐고 물어볼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일어났다.
“저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전하.”
“그러렴.”
줄리아가 집무실에서 나갔다.
카예나는 올리비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잉크가 튄 초대장을 발견했다.
“흠, 두 장은 글씨에 잉크가 튀어 버렸구나. 그래도 나머지는 여백에 잉크가 튀었으니 이 위를 그림으로 덮으면 되겠어.”
올리비아는 그제야 초대장을 다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금방 떠올렸을 해결책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올리비아는 입술을 달싹였다가 가만히 다물었다.
‘키드레이 공작가에서 후원이 끊겼다고 말씀드릴 수도 없고.’
황녀궁 시녀가 되었을 때 우려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오늘 오전에 가문에서 결국 후원이 중단되었다는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는 괜찮지만, 동생들은 어쩌지?’
가문엔 막대한 빚도 있었다.
‘빚이 생긴 것도 그렇고 이자도 너무 이상해.’
채무 관계에 놓인 거대 상단은 그레이스 자작가를 상당히 배려하는 방향으로 이것저것 편의를 봐주었다. 보통 귀족가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상단이 많으니 부모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뭔가 이상해.’
빚은 그녀의 급여로도 이자 이상을 갚기 어려울 만큼 점점 커졌다. 그러나 숫자만 커질 뿐이고 빚 독촉은 조금도 없었다. 돈이 아니라 다른 게 목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엠마도 뭔가 이상한 것 같다며 빚이 어디서 생기고 있는지 알아보고 있는 것 같은데…….’
엠마는 올리비아의 동생 중 하나였다.
입술 새로 야트막하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느낌이 좋지 않은 빚을 어서 청산하고 싶었다.
* * *
제논은 최근 카트린 린드버그와 관련한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카예나는 황궁을 한바탕 엎어 버리기도 했다. 그녀의 행보에는 정의가 있으니 반발하는 쪽이 자연스럽게 악이 된다. 기세는 카예나에게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그녀는 레제프의 사람을 천천히 하나씩 제거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에반스 가문과 연루된 이들이었다.
‘카트린을 하멜 백작가에 앉히면 황제의 호의는 사겠지. 그딴 게 얼마나 가치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레제프는 아니라고 하지만, 카예나는 레제프의 견제책으로 황제의 정부와 그의 아들을 끌어들인 것이 분명했다.
‘린드버그의 아들에게 아무런 세력이 없다고 해서 방심할 게 아니야.’
현재 중립을 지키는 세력 중 가장 위협적인 곳이 하나 있질 않은가?
‘키드레이 공작가가 그 손을 들어 주면 사태를 수습하기가 골치 아파져.’
그때 수하가 곤란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에반스 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지?”
“헨버튼 길리안이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저번처럼 무시할까요?”
최근 길리안 자작가의 후계자가 황녀의 부마 자리를 놓고 교섭을 시도했다. 우습지도 않았다. 군마 사업이 꽤 탐나긴 해도 부마라니.
그는 마찬가지로 무시하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요즘 건방지게 구는 황녀를 제 손을 대지 않고 처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제논은 비릿하게 웃었다.
“아니. 이야기는 한번 들어 봐야겠다. 약속 잡아 둬.”
* * *
제논은 오랜만에 황성을 나와 수도의 개인 저택에서 휴식했다. 그의 저택은 훌륭한 장점이 있었다. 저택의 위치나 내부 구조가 은밀한 만남을 주선하기 좋다는 점이었다.
저택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들어서니 먼저 도착한 손님이 보였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헨버튼 길리안입니다.”
헨버튼은 눈을 둥글게 휘며 악수를 청했다.
제논은 잠깐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맞잡았다.
“제논 에반스입니다.”
그는 헨버튼과 어울린 적은 없으나 상대를 잘 알기는 했다. 특히 그가 제 친구들과 비밀리에 운영하는 신사 클럽은 암암리에 유명하다.
‘비밀이라고 말하기엔 알 사람은 다 아는 클럽이지만.’
“말씀하신 이야기는 수행원을 통해 잘 들어 보았습니다.”
제논이 운을 뗐다.
“길리안 자작가와 황실이 결합한다면 레제프 황자 전하께 더없이 큰 힘이 되겠지요.”
정확하게는 황실이 아닌 에반스 후작가와의 결합이다.
헨버튼은 길리안 자작가의 후계자다. 그는 자신이 물려받을 군마 사업의 영향력을 에반스 가문에게 좀 나눠 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대가는 카예나였다.
“제가 원하는 건 카예나 황녀 그 자체이지 부마 따위가 아닙니다.”
그는 당장 카예나를 손에 쥐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부마 자리엔 조금도 관심 없었다. 가장 빠른 방법으로 카예나를 손에 넣고 싶을 뿐이었다.
헨버튼은 열정적인 수집가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아름다운 보석, 조각상, 그림 등을 모으길 좋아했다. 그리고 그의 생에 가장 아름답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게 바로 카예나였다.
황녀의 아름다움은 그가 수집한 수많은 것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었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집착과 소유욕이 끓어올라 맨정신으로 살아가는 게 힘들 정도였다. 그의 눈 속에 깃든 광기를 카예나는 도서관에서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그렇게까지 마음이 확고하시니 오늘의 대화가 상당히 유익할 것 같군요.”
제논은 미치광이나 다름없는 헨버튼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내일 황녀가 황립 아카데미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키드레이 경과 만난다더군요.”
“…….”
헨버튼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라파엘로 키드레이를…… 말입니까?”
그는 황립 도서관에서 자신을 방해한 라파엘로를 떠올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다시금 이가 갈렸다. 감히 카예나를 품에 안았던 그를 난도질해 없애 버리고 싶었다.
그의 눈이 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제논이 말을 이었다.
“오늘 만남 전에 사원 하나를 수배해 두었습니다.”
사원에 일정 금액 이상의 기부금을 내면 별채가 제공된다.
별채는 참으로 유용한 점이 있었다. 바로 불가침 영역이란 것이었다. 사원의 허가 없이는 범죄자가 숨어 있다 할지라도 외부인이 별채에 침입할 수 없다.
그의 설명에 헨버튼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 말씀은…….”
“황녀를 그곳으로 데려가십시오. 마차는 다른 곳으로 빼돌려 시선을 교란할 테니.”
혹시 카예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들키더라도 엉뚱한 마차를 따라 이목이 집중되었을 때 그녀를 완전히 숨기라는 뜻이었다.
“마부나 호위 기사는 이야기된 이들로 바꿔치기해 놓을 겁니다.”
헨버튼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완벽하군요.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그들은 몇 가지 사안을 더 짚어 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이 기다려지는군요.”
제논이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들은 다시금 악수한 후에 자리를 파했다. 홀로 남은 제논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한 놈.”
카예나를 손에 넣는다고? 말도 안 되는 망상에 젖어 간단한 계산도 못 하는 그런 머저리가 어떻게 그녀를 품는단 말인가!
“정말 완벽한 희생양이지.”
내일 카예나를 손에 넣는 건 자신이며, 이 모든 일을 독박으로 뒤집어쓸 사람은 헨버튼 길리안이 되리라.
* * *
오늘은 라파엘로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또한, 레제프의 근신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오늘 폐하께서는 알현이 가능하시다는 의원의 소견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침마다 황제의 상태를 전달받았다.
그날 부황의 몸 상태가 괜찮으면 오전 중으로 알현을 요청했다. 그렇게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것이 새로운 일정이 되었다.
카예나는 바로 외출할 수 있도록 몸단장을 한 상태로 시녀들을 대동하여 황제의 침소를 방문했다.
“부황께 인사 올립니다.”
“바쁠 텐데 문안 인사하겠다고 매번 하인을 보낼 필요 없다.”
무심한 듯했으나 카예나의 성과를 완전히 인정하는 말이었다.
카예나는 웃으며 황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걱정되어 한시도 마음이 놓이질 않는걸요.”
황녀의 지극한 효성에 지켜보던 이들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황제는 딸의 차림새를 보더니 말했다.
“외출하려는 모양이구나.”
“네. 황립 아카데미에 지을 건물 위치를 좀 확인해 볼 생각이에요.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 필요한 시설이 뭔지도 직접 확인해 보고요.”
그도 라파엘로가 카예나에게 건물을 생일 선물로 줬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라파엘로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진 않았을 텐데…….’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든 시종장이 가죽 파우치를 카예나에게 건넸다.
“전하께서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서부 군사 통치권자 임명서다.’
카예나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제 어리석은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이걸 네가 유용하게 쓰리라 믿는다.”
그녀는 잠깐 황제와 담소를 나누고 곧 밖으로 나왔다.
“황자궁 쪽은 어떠니?”
베라가 바로 대답했다.
“여전히 조용하다고 합니다.”
오늘이 지나면 레제프와의 문제로 한동안 또 바빠질 것이다.
“일찍 아카데미로 가서 새로운 건물 위치를 알아봐야겠다.”
카예나는 올리비아를 데리고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마차가 준비되고 곧 황궁을 떠나 황립 아카데미로 향했다.
그녀는 라파엘로와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했다. 수행원은 기사 하나와 올리비아만 대동한 채로 아카데미 내부로 진입했다. 아직 수업 중인 학생들도 있다고 했기에 소란 피울 생각은 없었다.
“새로 건물을 지을 곳이 저곳인가 봅니다, 전하.”
카예나는 올리비아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건물을 짓기 전 사전작업을 해 놓은 흔적이 보였으나 인부는 없었다. 아직 학생들이 수업 들을 시간이라 그런 듯했다.
카예나는 아무도 없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건 카예나의 착각이었다. 근처로 다가갈수록 묘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둔탁한 탁음이었다.
“건방진 자식!”
갑작스러운 큰 욕설에 그들의 걸음이 잠깐 멈췄다.
카예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호위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혹시 모르니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전하.”
카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멈춰 섰다.
기사가 건물에 가려진 뒤편으로 가더니 소란이 뚝 멈췄다.
“학생들끼리 싸운 모양이네.”
올리비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재학 중에도 이런 일이 흔치는 않아도 종종 있었다. 곧 호위 기사와 함께 꼴이 엉망인 남학생 몇몇이 나왔다. 그들은 씩씩거리다가 카예나 쪽을 힐끗거리더니 얼른 자리를 피했다.
‘흐음?’
우격다짐은 당연히 부끄러운 일이 맞지만 저렇게 껄끄럽게 피하는 건 뭔가 이상했다.
곧 호위가 다가왔다. 그는 좀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아이들이 학생 하나와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따돌림이란 말인가? 그녀의 표정이 더욱 좋지 않아졌다. 호위가 곤혹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상대 학생이 이델 린드버그입니다.”
이델 린드버그란 말에 카예나가 멈칫했다.
“레이디 카트린의 아들 말인가?”
“그렇습니다.”
카예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직접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은발의 소년이 주저앉은 채 씩씩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과연.’
그녀는 회귀 전에도 이델 린드버그는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접점도 없었고 레제프가 싫어했기에 굳이 만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실물은 지금 처음 보았다.
이델은 부황과 같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은발이었다. 그 아래로 시리게 빛나는 파란 눈동자도 에스테반 황제를 닮았다.
‘나와 꽤 닮았네.’
소년은 카예나와 남매로 보일 정도로 닮아 있었다. 다만 뾰족하게 치뜬 눈이나 엉망이 된 꼴이 그의 만만치 않은 성정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했다.
이델도 카예나를 발견하고는 소매로 입가를 닦다가 멈칫했다. 그의 미간이 와락 구겨지는 게 보였다. 적대감 어린 시선이었다.
카예나가 보기엔 단순히 자기방어를 위해 고슴도치가 가시를 바짝 세운 것으로만 보였다.
‘부황이 병상에 눕고 나서 제법 고생하고 있다고 본 것 같은데.’
소설에서 이델 린드버그를 중요하게 다루는 건 그가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이다. 키드레이 공작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레제프를 밀어내 다음 대 황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꽤 험난한 유년 시절을 겪는 걸 직접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집단 폭행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데.’
카예나는 얼굴을 가린 망사를 앞만 살짝 걷었다.
적대감 가득했던 이델의 얼굴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자신과 닮았으면서도 믿기지 않게 아름다운 외형에 놀란 것이다.
그녀는 이델을 향해 산뜻하게 인사했다.
“안녕?”
“……?”
이델은 이 미친 여자는 뭐지? 라는 얼굴을 했다.
카예나는 이렇게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사람을 참으로 오랜만에 상대했다. 어쩐지 유쾌한 감상이 들 정도였다.
“이델 린드버그, 맞니?”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억지로 인사했다.
카예나는 속으로 웃으며 그를 일으켜 주었다. 이델은 그 손길을 냉랭하게 뿌리치며 스스로 일어났다. 황제의 총애를 믿어서 나오는 건방짐은 아니었다. 그는 아직 처세하는 방법을 몰라 날을 세우기만 하는 어린아이였다. 키도 카예나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친구들과 사이가 썩 좋지 않은 모양이구나.”
이델은 이를 드러내며 반박했다.
“친구가 아닙니다.”
“고관대작의 자식들인 거면 친하게 지내는 편이 네게도 좋을 텐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죠?”
그 건방진 말투에 호위 기사가 몸을 움찔 떨었다. 카예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내가 네 누나잖니.”
“……허!”
이델은 말만 숱하게 들어 왔던 황녀와 생각지도 못한 장소와 타이밍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상황 자체도 황당했으나 그녀의 태도는 말문마저 막힐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누나라고? 그래. 그들은 절반이지만 같은 피가 흐른다. 사실관계만 따진다면 그녀는 제 누나가 맞았다. 그러나 이 관계를 그렇게 간단히 정의할 수 있을까?
이델은 혹시 모를 상황 때문에 레제프 황자와 하인리히 대공자의 세력이 그와 모친을 철저히 따돌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나마 부황이 거동 가능했던 시절엔 다들 살살 눈치만 살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아까처럼 유력 가문의 아들들은 툭하면 시비를 걸었다. 이델이 유망한 검사의 자질을 갖췄기에 그들을 같이 흠씬 두들겨 팰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싸우고 나면 꼭 집안에 불이익이 돌아왔다.
모친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드레스가 3년째 바뀌지 않는 것만 봐도 상황이 나쁘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맞서 싸우지 않기도 해 봤다. 그랬더니 이델을 만만하게 여기는 아이들이 늘며 집단 구타가 빈번해졌다. 오늘도 그런 평범한 날 중 하나였다. 카예나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상태가 꽤 안 좋아 보이네.”
카예나는 어딘가 무심하지만, 이상하리만큼 평범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그녀는 서슴없이 이델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델이 깜짝 놀라 뒷걸음질하려고 했으나 카예나가 빨랐다. 비단 장갑을 낀 가느다란 손이 그의 턱을 쥐고 터진 입가를 쓸었다.
“윽!”
따가움에 짧은 신음을 흘렸다가 입을 다물었다. 부끄러움에 이델의 귀가 달아올랐다.
“저, 전하!”
그때 카예나의 방문 소식을 들은 총장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그는 이델이 엉망인 꼴로 그녀와 있는 걸 보더니 침을 꼴깍 삼켰다.
“아이고, 전하. 죄송합니다. 이런 단속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 드리다니…….”
총장은 황가의 자손과 린드버그의 아들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이델을 잡아끌었다.
“풍기를 어지럽힌 이 학생은 단단히 벌할 것이니 염려치 마십시오, 전하.”
이델은 어금니를 꽉 물며 분노를 삼켰다.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청명한 목소리가 그의 노기를 흩트렸다.
“그럼 상대 학생들은 어찌할 생각인가?”
총장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상대…… 학생이라니요?”
“저 아이를 두고 비열하게 여럿이서 드잡이한 학생들 말이야. 내가 그 아이들이 저기서 나오는 걸 다 지켜봤다네.”
카예나는 망사를 내리지 않아 여전히 훤히 드러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얼굴도 다 기억하는데. 내가 같이 찾아 줄까?”
총장은 사색이 되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제가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그녀는 여유로운 미소로 차분하게 말을 덧붙였다.
“꼭 교칙대로 처리하길 바라네.”
“물론이지요. 꼭…… 교칙대로 하겠습니다.”
교칙이란 말에 총장의 얼굴은 완전히 꺼멓게 죽었다.
‘교칙대로면 정학인가? 아니면 퇴학이던가?’
보나 마나 싸운 학생들은 한가락 하는 집안의 자식이 분명하다. 그러니 집안을 믿고 황제의 사생아를 건드렸겠지. 그들에게 교칙대로 조치한다면 총장도 자리 보전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알 바는 아니었다.
카예나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난 내 동생의 잘생긴 얼굴을 치료해야겠는데, 보건실이 어디지?”
“……이쪽으로 오시지요.”
총장은 카예나가 한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분명 이델을 두고 ‘내 동생’이라고 말했다.
“갈까?”
카예나는 이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이델은 엄지에 피가 살짝 묻은 장갑을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카예나가 자신을 보호해 줬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얼굴 한 번 맞대지 않고 남처럼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라고 챙겨 주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 자신에게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건 아닐까?
그때 카예나가 말했다.
“힘이 없을 땐 힘 있는 사람을 좀 이용하기도 해야 해.”
그 말에 이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카예나는 여전히 태평스러워 보였다.
“내민 손을 잡을 줄 아는 것도 살아남는 방법이야.”
그건, 자신을 이용하라는 말이 아닌가?
이델은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마치 잘했다는 듯이 카예나가 활짝 웃었다.
“가자.”
맞잡은 손이 꽉 맞물리며 다정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델은 약간 마지못해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그녀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
어쩐지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들은 보건실로 도착했다. 그러나 보건의가 없었다. 총장은 몹시 당황해 허둥거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보건의를 찾아서 데려오겠습니다!”
“됐어. 이만 가 보도록 해.”
“예, 예?”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가 보게. 집단 폭행했던 학생을 찾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하여 배려하는 것이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카예나는 이델을 앉히고 보건실을 뒤적였다. 이델은 의심스럽게 그녀를 보았다.
“뭘 알고 찾는 거예요?”
그녀는 약병을 들고 살짝 흔들었다.
“라벨은 허투루 붙여 놓는 게 아니거든.”
소독용 알코올과 솜, 연고 등을 준비한 카예나는 비단 장갑까지 벗으며 직접 치료하려고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전하.”
곁에 있던 올리비아가 말했으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녀는 이델의 상처를 직접 돌보았다. 그가 따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면 상처를 호호 불어 주기까지 했다.
이델은 쑥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저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카예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른이 아이를 보호하는 일은 너무 당연하잖니. 게다가 넌 내 동생인데.”
이델은 입술을 잘근 물더니 설움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전 서자일 뿐이에요.”
그에 비하면 카예나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적통이었다. 황제의 자식 중 유일하게 선황후 소생이니까.
“그게 네가 보호받지 못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카예나는 그가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졌단 사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속마음은 다를 수 있었다. 그녀는 연고를 발라 주던 손을 떨어뜨리며 물었다.
“혹시 내 행동이 불쾌하니?”
이델은 제게서 떠나가는 카예나의 손을 무심결에 붙잡았다. 그 다급한 손길에 카예나가 놀랄 정도였다. 그는 제 행동에 스스로 흠칫 놀라며 다시 손을 떼어 냈다.
시선을 슬쩍 다른 곳으로 피한 이델이 작게 말했다.
“……그렇진 않아요.”
카예나는 다정한 미소로 다시 연고를 발라 주며 말했다.
“다행이구나.”
모친 이외의 어른이 그를 이렇게 돌봐 주는 건 처음이었다. 카예나가 보여주는 다정한 관심과 보호가 달았다.
이델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흉 지면 안 될 텐데.”
카예나는 그의 얼굴에 연고를 다 발라 준 후에 흐트러진 머리칼도 정리해 주었다. 교복은 엉망이 되어서 새것으로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았다.
“올리비아, 이델이 갈아입을 옷을 마련해 오겠니?”
“예, 전하.”
그녀는 오늘 새롭게 호위를 맡은 기사를 불렀다.
“안셀.”
“말씀하십시오.”
“총장에게 이델의 수업을 조율하라고 말하게. 오후 수업부터 들어가게끔.”
“홀로 계시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호위 기사의 염려에 카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 혼자서 다섯을 때려눕힌 기사님도 있는데, 괜찮아.”
그 말에 이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명을 받듭니다.”
황녀의 신하들이 임무를 수행하러 떠나고 둘만 남게 되었다.
이델은 카예나가 말만 하면 이뤄지지 않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권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한 모든 걸 그녀는 조금도 어렵지 않게 해내고 있었다.
자신을 벌레 취급하던 총장은 이델에게 교칙을 들먹이며 협박하지 못했다. 그가 그렇게 쩔쩔매는 건 키드레이 공작가의 후계자를 상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보았다.
‘그런 사람이 날 도와줬어.’
이델은 다른 형제자매가 없다. 친구라고 여겼던 이들 대부분은 황제가 병상에 누우며 떠났다. 그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모친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친은 현상을 유지하기도 벅찼다. 그럴 때마다 이델은 죄스러웠다. 자신이 태어나는 바람에 어머니가 고통스러워했다.
황태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그저 작은 평화가 제 집안에 깃들길 바랐다. 초를 켠 테이블엔 어머니가 좋아하는 꽃을 놓고 식사하고 강아지도 기르고 싶었다.
아카데미로 가면 친구들과 어울리는 그런 일상을 원했다. 지금은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부서지고 무너져 내렸다. 그는 아주 조금씩, 천천히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오늘 카예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는 내리쬐는 햇살처럼 밝진 않다. 그러나 촛불처럼 위태롭지도 않았다. 꼭, 은은한 달빛 같았다. 필요한 만큼만 적당한 빛을 주지만, 언제나 그곳에 있을 거라는 기묘한 확신을 주었다.
이델이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고 있는 사이 카예나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레제프가 정신 못 차리고 폭군이 된다면 결국 이 애가 황제가 되겠지.’
그걸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들었다. 그런 모든 게 망가져 기능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지 않도록 조치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의지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았다.
똑똑.
노크가 들리고 옷을 가져온 올리비아가 들어왔다. 카예나는 옷을 이델에게 건네주었다.
“옷을 벗어 볼래?”
“무, 무슨 말이에요!”
그의 외침에 카예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야 몸에 난 상처도 있을 거 아니니. 연고를 발라야지.”
‘내가 아무리 어리고 또…… 동생이라고 해도 이건…….’
이델은 목까지 벌겋게 물들었다.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 됐어요!”
“뭐…… 그러렴.”
카예나는 ‘이 애는 벌써 사춘기인 걸까?’ 하고 태평하게 생각했다.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올리비아는 어쩐지 웃음이 날 것 같아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카예나는 종종 19살이 아니라 30살쯤은 된 귀부인처럼 거침없이 행동할 때가 있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때 호위 기사가 돌아왔다.
“말씀하신 대로 수업은 조정해 놓겠다는 확답을 받고 왔습니다. 그리고 키드레이 공작가의 마차가 들어오는 걸 보았습니다.”
“벌써?”
지금은 약속했던 것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물론 카예나도 약속한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하긴 했다.
“올리비아, 네가 우선 경을 마중해 주겠니?”
“알겠습니다.”
이델은 대화를 가만히 들으며 손에 든 교복을 꾹 쥐었다.
카예나는 약속 상대를 만나러 곧 떠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는 쌩하니 일어나서 파티션 뒤로 들어갔다. 어쩐지 짜증이 나서 엉망이 된 옷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카예나는 파티션 너머로 물었다.
“혼자 입을 수 있니? 도와줄까?”
이델이 빽 소리쳤다.
“저는 열세 살이라고요! 혼자서 입을 수 있어요!”
‘열세 살부터 사춘기가 맞나……?’
카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뜩이나 폭군 예정인 남동생도 보살피기 힘든데 사춘기 막냇동생까지 생길 줄이야.
그녀는 남들 모르게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곧 옷을 다 갈아입은 이델이 파티션에서 나왔다. 엉망이 된 옷은 보건실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
“난 선약이 있어서 그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이델은 그 말에 표정을 굳혔다. 카예나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같이 갈래?”
그녀는 이번에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고를 바르느라 장갑을 벗은 하얗고 고운 손이었다.
이델은 왠지 언짢았던 기분이 사르르 녹았다. 그가 손을 맞잡자 카예나는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우아한 행동에 이델은 그녀를 힐끔거렸다. 자신과 닮았지만, 너무나 다른 우아한 황녀. 자꾸만 기분이 들떠 일부러 미간을 찡그렸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수행원과 함께 올리비아의 안내를 받던 라파엘로가 보였다. 그는 카예나와 그녀의 손을 잡은 어린 소년을 번갈아 보았다. 어린 불청객에 라파엘로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카예나는 태연하게 이델을 소개했다.
“여긴 내 동생, 이델이라네. 우연히 마주쳐서 데리고 있었어.”
“그렇습니까.”
라파엘로는 그 소년이 누구인지 알았다. 카트린 린드버그의 아들이란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황립 아카데미에서 꽤 유명한 문제아라는 사실도 알았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비해 타고난 근력과 순발력이 좋아 검사 유망주로도 꼽혔다. 그 신체 조건으로 여러 귀족가의 자식들을 때려눕힌다는 건 그도 잘 아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델이 카예나와 같이 있다는 게 꽤 뜻밖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얌전한 태도였다.
“이델, 라파엘로 키드레이 경이시다. 인사드리렴.”
카예나의 말에 이델이 순순한 태도로 인사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이델 린드버그입니다.”
그의 그럴듯한 인사에 카예나는 잘했다는 듯이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라파엘로는 문득 지나치듯이 들었던 최근 카예나의 별칭을 떠올렸다.
‘맹수 조련사라고 했나?’
그는 가볍게 인사를 받고서 카예나의 곁으로 섰다. 에스코트하기 위함이었다.
카예나는 여전히 마음에 불편함은 있으나 이젠 제법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이델이 인사하느라 놓았던 카예나의 손을 불쑥 잡았다.
“이델?”
의아하게 부르자 이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스코트 정도는 자신도 할 수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카예나는 졸지에 양손이 저당 잡혔다.
‘뭔가 남들 보기에 이상할 것 같은 그림인데.’
어쩐지 좀 큰 아들을 둔 젊은 부부 느낌이 나기도 했다. 그녀는 묘한 기분을 떨치며 말했다.
“일단 부지부터 확인하러 가지.”
그들은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그사이 이델은 묘한 적대감을 품은 시선으로 라파엘로를 보았다. 이상하게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와 부지를 돌며 건물의 용도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기숙사로 이용하거나 특수 목적을 지닌 건물로 사용하는 게 좋겠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카예나가 이델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설마 이런 문제에 대해 제게 의견을 물어볼 줄 몰랐던 이델이 놀란 표정을 했다.
“재학생의 의견도 중요할 테니까. 완공된 시점엔 네가 이용할 수 없겠지만.”
건물을 짓는 일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아마 이델이 다 자라야 완공되려나?’
그때라면 자신은 수도를 벗어나 먼 곳으로 도망치고 없을 것이다. 제 이름이 붙은 건물이 완공된 모습을 보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그건 조금 아쉽긴 했다.
이델은 살짝 머뭇거리며 말했다.
“……전하의 말씀대로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요.”
“그러니?”
카예나는 빙긋 웃었다.
라파엘로는 이델을 보았다. 린드버그의 아들과 카예나의 관계가 꽤 묘했다. 이 친근감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확실한 건 있었다.
‘왠지 귀찮아질 것 같은데.’
그녀의 남동생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카예나는 슬슬 라파엘로와 정치적인 문제를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슬슬 오후 수업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니, 이델?”
카예나의 말에 이델은 이제 자신이 자리를 떠나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아쉬웠다. 그가 약간 기운 없어 보인다는 걸 눈치챈 카예나가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설마 우리의 만남이 여기서 끝은 아니겠지, 이델?”
“……네?”
“다음에 또 보자꾸나. 그땐 전하가 아니라 누나라고 불러 줄래?”
이델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그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누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음, 사실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좀 어렵겠지.”
카예나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불러도 돼. 여기 키드레이 경이 공증인이 되어 주시면 되겠구나.”
이델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마치 도망치듯이 자리를 피했다. 그런 막냇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카예나는 사춘기 소년은 참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린드버그 영식과 친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였는가? 어쨌든 동생이라 좀 편하게 대하긴 했네.”
‘그보단 이델 쪽의 태도가 더…….’
그는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고 화제를 전환했다.
“전하께서 이렇게 일찍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더 서둘러 왔어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아냐. 오늘 만남의 목적은 사실 이게 아니니까.”
그들은 진짜 건물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논의하고자 만난 게 아니다.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라파엘로도 그것이 만남의 구실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러나 오늘의 약속에 담긴 진짜 목적이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핑계이기는 했지만, 선물 받은 건물이니 먼저 와서 실제로 부지를 좀 확인해 볼 생각이었어.”
마침 이복동생이 패싸움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어 부지 확인은 물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시장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부터 일을 서두르느라 토마토 수프를 조금 먹은 것 말곤 먹은 게 없었다.
“경이 식당을 예약한다고 했었지?”
“아카데미 바로 근처의 레스토랑에 정찬 코스를 예약해 두었습니다.”
“그럼 일단 식사부터 하고 다시 아카데미로 와서 서류 확인을 마치면 되겠어.”
아카데미 총장이 가해 학생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지도 확인해야 했다. 레스토랑은 라파엘로가 알았기에 그의 마차를 타고 잠깐 다녀오기로 했다.
라파엘로가 끌고 온 마차는 황실의 것과 비교했을 때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커다란 마차로 카예나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한 라파엘로는 그녀의 시녀인 올리비아도 같이 에스코트했다.
카예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일이 잘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마주할 기회를 마련하면 알아서 감정이 싹트겠지.’
그러나 카예나의 생각과 달리 라파엘로는 올리비아를 마차에 오르도록 부축하는 동안 표정이 살짝 굳었다.
곧 마차는 라파엘로가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카예나는 부축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가 무심결에 신음했다.
“으음…….”
그녀는 막 올리비아까지 마차에서 내려 준 라파엘로를 보았다. 그도 막 고개를 돌려 카예나와 눈을 마주쳤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냐.”
레스토랑은 아기자기하게 잘 꾸민 새하얀 저택이었다. 색색의 꽃이 핀 로맨틱한 정원과 분수를 지나니 사용인이 그들을 향해 절을 올렸다.
라파엘로가 말했다.
“키드레이로 예약해 두었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가 안내하는 곳은 척 봐도 이 레스토랑에서 가장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카예나의 곁을 따르던 올리비아도 이 아름다운 장소에 작게 감탄하고 말았다. 레스토랑의 사용인이 다가와 수행원이 이용할 룸은 따로 있다고 알렸다.
카예나는 올리비아와 호위 기사에게 말했다.
“두 사람도 식사 들도록 해. 좀 있다가 이곳 사용인을 보낼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녀는 라파엘로와 둘이서 식사할 자리로 향했다.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 길을 따라 작은 신전처럼 지은 건물엔 하얀 커튼을 달아 놓았다. 그것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날리는 모습은 이국적인 휴양지를 떠올리게 했다.
카예나는 레스토랑에 들어선 순간부터 계속 곤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젊은 연인의 데이트 코스로 이용하는 레스토랑인 것 같은데.’
이 레스토랑은 결코 비즈니스에 고를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더불어 라파엘로가 직접 골랐을 것 같은 분위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모르고 예약한 건가?’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자연스럽게 사용인의 안내를 받았다. 카예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때 라파엘로가 물었다.
“요즘 가장 인기가 있는 곳으로 골랐는데, 마음에 드십니까?”
“참 예쁜 레스토랑이기는 한데…….”
마치 지금 데이트하러 온 연인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왜 그러십니까?”
라파엘로는 문제가 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카예나는 뭐라고 입을 열까 하다가 관두었다. 대신 한숨처럼 말했다.
“경의 안목이 감탄스러워서.”
그녀의 대꾸에 라파엘로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목격한 카예나는 더욱 난감해졌다.
하지만 이미 들어온 것을 어쩌겠는가?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겠지.’
가장 인기 있는 레스토랑이라 예약한 것뿐이리라. 카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 앉으려 했다.
라파엘로는 사용인 대신 카예나가 앉을 의자를 미리 빼 주었다.
“……고마워.”
카예나는 그가 의자를 빼 주는 걸 보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일단 앉기는 했는데, 자꾸 의식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게 데이트라는 생각이 쉽게 떠나지 않았다.
* * *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줄곧 곤란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긴, 난감할 만하다. 그가 봐도 이 레스토랑은 참 낯간지러운 모양새였다.
‘바스턴은 대체 이런 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 레스토랑을 강력하게 추천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스턴이었다.
그는 카예나 황녀와 잘 어울릴 게 분명하다며 이곳을 예약하도록 밀어붙였다. 결론적으로 바스턴의 생각이 정확했다.
녹색 덩굴을 감은 기둥과 하얀 커튼, 옅은 색의 봄꽃으로 풍성하게 장식한 화병들, 부드러운 색감의 테이블보를 덮은 라운드형 테이블. 그리고 이 공간에 강림한 여신처럼 앉은 카예나의 모습은 명화가 따로 없었다.
라파엘로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긴 카예나를 보았다.
즐거웠다.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제법 들을 만했고 생각보다 수준 높은 전채 요리도 나왔다. 날씨, 분위기, 그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이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는 상대가 카예나라는 사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와 시간을 보낸다는 즐거움이 이런 것이었나?
“이런 것도 좋군요.”
라파엘로는 입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도 힘들이지 않은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카예나는 그 미소에 전염된 듯 저도 모르게 웃으며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그러게.”
카예나는 어느새 자신이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는 다른 사람과 달리 그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카예나를 바라보다가 필요한 순간 누구보다도 먼저 손을 내밀었다. 혹시 제 것이 아닌 이 호의에 길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역시 조심할 필요가 있다. 카예나는 제 주제를 알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나도 마음에 들어. 경은 어여쁜 영애와 데이트로 오는 편이 더 나았겠지만.”
과분한 것을 원하는 순간 파멸은 예정된다. 그녀는 자신이 그다지 평화로운 상황에 놓인 게 아니란 걸 잘 알았다.
라파엘로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분과 왔으니 선택이 정확했군요.”
“……아첨할 필요는 없어.”
그가 곧장 대답했다.
“아첨이 아닙니다.”
“…….”
카예나는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단 올리비아 같은 재치 있고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여성과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지.”
그는 또 올리비아를 언급하는 카예나에게 자신의 기분을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그녀는 라파엘로의 말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는 오해받기 좋은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착각해서는 곤란했다. 자신이 특별하기에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다. 그걸 명심해야 했다.
카예나는 말을 돌렸다.
“부황께서 그대의 서부 군사 통치권자 임명서를 재가하셨어. 아카데미로 돌아가서 전달하겠네.”
“감사합니다.”
“어차피 이뤄졌을 일을 좀 당겼을 뿐이니 그런 인사는 괜찮아.”
방어적인 말이었다.
카예나는 곁을 허락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말했다. 라파엘로는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았다. 변화한 황녀는 지나치게 날카로우며 조심스럽다. 그것을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작위를 이어받을 시기를 좀 당길까 합니다.”
반가운 말이지만 뜻밖이었다. 그가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공작이 아닌 공자로서 남아 있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전하께서 서부 군사 통치권을 유효하게 해 주신 김에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라파엘로는 식기를 내리며 말을 이었다.
“역시 제 부모님이 이혼 소송 중인 걸 아시는군요.”
“…….”
그녀는 드물게도 당황했다. 알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척 감추는 건 꽤 까다로운 일이다. 특히 그것이 아주 중요한 정보가 아닐수록 더 그랬다.
“추궁하고자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건 카예나도 알았다. 그저 역시 라파엘로가 만만치 않다고 느꼈을 뿐이다.
“전하께서 꽤 안전 제일주의적이시며 평화주의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건 카예나를 상당히 온건하게 에둘러 표현하는 말이었다.
“그것을 위협한다면 꽤 과감한 조치를 하는 일에 거리낌 없는 분이라는 것 역시도.”
“날 상당히 관찰한 모양이네.”
“상과 벌도 확실하고 어떤 일을 결정하는 결단력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기도 하고요.”
그야 이미 가진 답안지를 보고 일을 행하다 보니 그랬다.
“그런 현명한 분이 왜 저를 자꾸만 올리비아 양과 엮으시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건…….”
둘은 운명적으로 이어질 사이다.
카예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키드레이 공작 부부의 이혼 소송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사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고 있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일어난 실수였다.
카예나는 자신의 행동이 과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내가 지나쳤군. 미안하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덧붙였다.
“내 말에 다른 의도는 없었어. 정말 순수하게 두 사람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그게 그에게 오지랖일 수 있다는 걸 간과했다.
그래, 어차피 잘될 인연이니 괜히 간섭하지 말아야지.
‘레제프에게서 올리비아를 지키는 일만 신경 쓰자.’
카예나는 미안함을 담아 라파엘로를 보았다가 멈칫했다.
그가 가라앉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어딘가 고요하게 식사가 진행되었다.
카예나는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실수한 것인지 되짚느라 음식 맛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올리비아 이야기를 하면 안 됐던 건가? 그래, 그게 자신의 실수일 수 있다. 잘 모르는 두 사람을 자꾸 엮으려고 한 것은 실례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들은 첫 만남에서부터 운명을 느끼는 사이다. 그는 에스코트하느라 올리비아의 손을 잡았을 때 이상하게 그 접촉이 역겹지 않다고 느낀다. 그것이 올리비아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최초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라파엘로가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불쾌하게 느낀 건가?’
이야기가 바뀌었단 말일까?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일을 모두 바꿔 버렸으니. 그럼 그 여파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변화가 생긴 건가?’
답답했다. 모든 건 명확한 답 없이 가정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대놓고 “혹시 올리비아와 손잡았을 때 소름 끼쳤나?” 하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손이 점점 더 느릿해졌다. 원래도 몸을 가꾸느라 식사량이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 회귀한 후엔 체력을 붙이고자 억지로 음식을 삼켰다. 덕분에 지금은 식사량이 좀 늘었지만, 여전히 많이 먹으면 속이 거북해졌다. 지금은 평소 먹던 것의 절반밖에 먹지 않았음에도 더 들어가지 않았다.
벌써 속이 더부룩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느라 심력을 소모한 탓이었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성의를 생각해서 계속 입안에 음식을 밀어 넣었다. 황녀인 그녀가 거의 먹지도 않고 식기를 내려놓으면 나쁜 식으로 오해 사기 쉽다.
식사가 끝나고 카예나는 사용인을 보내 올리비아와 호위를 불렀다.
“이만 아카데미로 가지.”
돌아가는 마차는 분위기가 이상했다. 올리비아는 가만히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이 다투기라도 한 건가? 그러나 둘이서 다투는 모습이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황립 아카데미로 돌아온 그들은 주요 간부와 건물의 용도에 대해 협의 후 서류를 작성하고 그것을 공증받았다.
“가해 학생들 처분은 어찌 되었지?”
카예나는 가해 학생에게 어떤 처분을 내렸는지 총장에게 물었다.
총장은 그들에게 정학 처분을 결정했다. 아카데미는 이델을 집단 구타한 학생들이 전부 정학 처분되어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그 일에 황녀가 개입했다는 사실도 금방 퍼졌다.
그들은 카예나 황녀가 아카데미를 방문한 이유가 이복동생인 이델을 보호하려는 목적인 게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카예나는 인제 그만 황궁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먹은 것이 체한 모양인지 손끝은 차가웠고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하인에게 서류가 담긴 파우치를 라파엘로의 수행원에게 넘기라고 지시했다.
“서부 공작령 군사 통치권자 임명서야.”
라파엘로는 파우치를 한 번 힐끗 보았다.
“그럼 이만.”
카예나는 그의 인사도 받지 않고 마차로 향했다.
올리비아만이 다급하게 그를 향해 인사하고 카예나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라파엘로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젠장…….”
* * *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시선이 닿는 곳을 벗어나게 되자 조금 숨쉬기 편해졌다고 생각했다.
마차 앞에서 대기 중이던 마부가 공손히 물었다.
“궁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래.”
카예나는 마차로 가려다가 멈칫했다.
뭔가 이상했다.
‘마부가 원래 저자였나?’
사실 평소에는 마부를 그렇게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옷차림은 궁정 마부의 것인데.
하나가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카예나는 모든 게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녀의 마차를 제외하고는 주변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일부러 정리한 것처럼 그랬다. 방금까지만 해도 라파엘로 때문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차분한 태도로 올리비아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황립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을 반납하는 걸 잊었구나.”
마부를 비롯한 호위 기사의 시선이 날카롭게 벼려지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 섣불리 피하려는 인상을 줬다간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카예나는 최대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로 하인을 불러 책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책을 반납하고 와 주겠니, 올리비아?”
혹시 그녀에게 무슨 변고가 생기면 올리비아가 알아챌 수 있으리라.
올리비아는 카예나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고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땐 별달리 예민하게 받아들일 구석은 없었다.
“명을 받듭니다.”
그녀는 책을 가지고 자리를 피했다.
호위가 마차 문을 열었다.
카예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겉으로는 태연한 미소를 걸쳤다.
“날도 좋으니 올리비아가 돌아올 때까지 산책이라도 해야겠다.”
“알겠습니다.”
호위는 반박도 하지 않고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자신이 예민한 건가, 아니면 정말 지금이 뭔가 이상한 건가?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카예나가 한 걸음 뗐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잡아채며 얼굴을 수면제를 적신 수건으로 뒤덮었다.
“읍-!”
그녀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올리비아는 책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가 얼마 이동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
비명을 지르려고 했으나 투박한 손이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지금 이 괴한이 그녀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려는 건 알 수 있었다.
퍽!
“아악!”
그때 괴한이 갑자기 뒤로 나뒹굴었다. 뒤를 돌아보니 라파엘로가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
그녀는 너무 놀라 손을 파르르 떨며 라파엘로의 수행원들이 포박 중인 괴한을 바라보았다.
“황녀 전하는 어쩌고 혼자 여기 계십니까?”
그 말에 올리비아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녀 전하가 마차에……!”
라파엘로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다들 일대를 수색하여 수상한 자는 모두 체포해라.”
“명을 받듭니다!”
그는 당장 마차를 대어 놓는 곳으로 달려갔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제발, 제발!
그러나 그의 간절한 생각과는 달리 마차는 자리에 없었다.
* * *
노란 불빛이 보였다. 카예나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램프의 불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긴 어디지?
멍한 정신을 억지로 일깨우기 시작하며 일어나려고 했다.
“…….”
몸이 묶여 있다.
‘납치구나.’
그때 어두운 방으로 남자가 들어왔다. 얼굴을 모르는 이였다. 그는 손에 그릇 하나와 빵을 들고 있었다.
“깨어나셨습니까, 전하?”
그녀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었다. 납치를 사주한 자의 부하일 것이다. 남자는 카예나가 울거나 화를 내기는커녕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는 게 어딘가 꺼림칙했다. 특히 눈빛이 소름 끼쳤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카예나의 근처로 다가왔다.
손에 든 그릇을 바닥에 거칠게 놓아 내용물이 지저분하게 튀었다. 빵은 더러운 바닥에 그대로 툭 던졌다.
“드십쇼.”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우치형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카예나는 두꺼운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비쳐 드는 햇살이 지닌 빛의 질감을 확인했다. 불그스름한 것을 보니 늦은 오후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램프의 빛이 닿는 곳을 모두 확인해 보았다. 내부를 보니 어딘지 추측할 수 있었다.
“사원의 별채로구나.”
남자가 멈칫했다.
“비명 지를 생각은 마쇼. 어차피 이 근처에 아무도 없으니까. 시끄럽게 하면 입에 재갈을 물려 줄 생각도 있고.”
그의 위협에도 카예나는 담담했다.
황녀는 분명 아름다웠다. 그러나 뭔가 찜찜했다. 남자는 이런 종류의 촉이 상당히 잘 맞는 편이었다.
“밤이 깊으면 날 다른 장소로 옮기겠지?”
“어이, 전하.”
“나를 퍽 조심스럽게 대하는 걸 보니 내게 흠집이 나길 원하지 않는 상대로구나. 그렇다면…….”
쾅!
남자는 위협적으로 탁자를 발로 찼다.
“지금 추리 놀이나 할 때가 아닐 텐데?”
그때 밖에서 남자 몇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예나가 말했다.
“너희 중 하인리히의 끄나풀이 있을 건 확실하니 말해 두마. 날 온전히 황궁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내 동생에게 그쪽이 꽤 곤란해질 소식이 들어가게 될 거야. 예를 들어, 은밀한 집단의 위치 같은 것.”
그러자 장정 중 몇몇의 표정이 돌변했다.
남자는 야차처럼 위협적인 표정을 지으며 카예나를 조용히 시키려 했다.
“진짜 입에 재갈이 물려야 입을 닥치……”
“난 내가 납치당할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었다.”
그녀는 무감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날 황궁에 하루 내로 되돌려 놓지 않으면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하게 될 거야.”
남자는 질렸단 듯이 뒤로 물러났다.
“……미친 황녀군.”
그녀는 납치당한 주제에 되레 그들을 협박하고 있었다. 카예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종종 들어 본 말이라 새삼스럽지 않구나.”
물론 회귀 전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