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12
악녀는 마리오네트 11장. 격동(12/33)
11장. 격동
햇살이 눈꺼풀을 간질였다. 침대라면 커튼을 쳐 놓기 때문에 보통 이렇게 햇살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러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게 느껴졌다. 누구일까?
카예나는 눈을 뜨기 전, 무심결에 라파엘로를 생각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생각과 다르게 카예나의 곁에 있는 사람은 레제프였다.
“레제프……?”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온몸이 욱신거렸다. 특히 상반신 전체와 손목, 발목이 쓰렸다. 그녀는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좀 더 누워 계십시오.”
레제프는 쓰라림에 잠깐 인상을 찌푸린 누이를 다시 눕혔다. 부드럽지만 강압적이었다.
카예나는 다시 누우며 짤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황녀궁 침대에서 눈뜬 걸 보니 라파엘로가 자신을 구하러 왔던 게 꿈이 아닌 모양이었다.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그가 저를 구하러 왔다는 사실도, 그 점을 곱씹는 자신도 다 혼란스러웠다. 라파엘로는 그저 황녀가 납치되었으니 책임을 다한 것뿐일지도 몰랐다.
“납치범들은 어찌 되었니? 특히…….”
그녀는 잠깐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헨버튼 길리안은?”
“납치범들은 체포하여 황궁 뇌옥에 가뒀습니다. 헨버튼도 같이요. 길리안 자작가에 이 사건의 책임을 묻고자 길리안 자작과 키드레이 공작도 소환할 예정입니다.”
카예나는 약에 절어 자신을 탐욕스럽게 원했던 헨버튼을 떠올렸다. 그는 지난 삶과 마찬가지로 여차하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형태는 바뀌어도 일어날 일은 그대로 일어난단 말인가? 순식간에 섬뜩해졌다.
‘아냐. 난 죽지 않았잖아.’
애써 침착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두려워할 것 없었다. 지금 그녀가 누운 곳은 너무나도 익숙한 황녀궁 처소이지 않은가? 모든 게 다 잘 풀렸다는 뜻이 아닐까?
“이제 괜찮습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빛과 함께 나타났던 라파엘로가 떠올랐다. 미세하게 떨리던 손에 다시금 온기가 돌았다. 그 과정을 레제프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헨버튼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어야 했나.’
카예나가 뭔가에 이토록 선명한 공포감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잠든 카예나를 곁에서 내내 지켜보며 다스렸던 분노가 다시금 치솟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것이다. 어떻게든 그 집안까지 다 갈가리 찢어 버릴 것이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는 노기에 젖어 있다가 카예나가 창을 힐끗 보며 던지는 물음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니?”
활짝 열린 커튼 밖으로 노릇노릇한 햇살이 보였다. 곧 노을이 질 때인 모양이었다.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어요. 누님은 더 쉬셔야 합니다.”
카예나의 안색은 여전히 평소보다 창백했다. 의원도 체기와 스트레스, 외상 등 황녀의 컨디션이 엉망이라며 휴식을 강조하기도 했다.
똑똑.
그때 노크가 울리고 베라가 들어왔다.
“전하!”
그녀는 일어난 카예나를 발견하고는 곧 눈물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했다.
“깨어나셨군요! 시장하지는 않으신가요? 몸은 괜찮으신가요?”
베라는 달리다시피 카예나 곁으로 다가왔다.
“난 괜찮아. 그러니 진정하렴.”
카예나는 문득 뭔가 생각났다.
“올리비아는?”
베라는 목이 멘 소리로 대답했다.
“올리비아는 무사합니다. 방금까지 침실을 지키다가 잠깐 자릴 비웠어요.”
그녀는 전날 올리비아가 괴한의 습격을 받은 것과 황궁에 달려와 황녀의 납치 소식을 알렸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전날 레제프 황자를 설득해 군대를 움직이자는 의견을 내놓은 것은 올리비아였다.
베라는 그것도 설명하려고 했으나 레제프가 말을 끊었다.
“누님.”
레제프는 한숨처럼 카예나를 부르며 시선을 붙들었다. 일어나자마자 제 몸은 고사하고 남이나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았다.
“잡다한 일에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내가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카예나는 레제프를 보며 의아하게 말했다.
“그런데 근신이 풀린 거면 부황을 찾아뵈어야지 이러고 있으면 어떡하니?”
게다가 차림새도 이상했다. 왜 제복에 붉은 망토까지 두르고 있지? 그녀의 시선이 벌어진 망토 사이에 닿았다. 허리춤에 찬 것은 분명 총이었다.
“너, 설마!”
그녀는 레제프가 제 납치 소식에 근신 중 방에서 뛰쳐나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마지막 날이었고 황녀에게 변고가 있었다는 사실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
황제의 명령은 황손의 안위보다 중요하다. 부황은 상황의 특수성은 이해해 주지 않고 또 레제프를 벌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레제프는 그런 부황을 가만두지 않겠지.
“괜찮습니다, 누님.”
그는 여차하면 황제를 바로 죽여 버릴 게 틀림없다. 카예나는 그렇게 둘 수 없었다. 피를 묻힌 황좌에 앉은 자가 멀쩡할 리 없다. 다시 비극이 반복될 뿐이었다.
“내게 변고가 있더라도 황제 폐하의 명이 우선이야. 지금이라도 돌아가.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쓰라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괜찮다니까요, 누님.”
카예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침실을 나가려고 했다.
“누님!”
레제프는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카예나를 붙잡았다.
“아!”
밧줄에 쓸린 손목은 붕대로 감아 놓긴 했어도 고작 하루 된 상처가 멀쩡할 리 없었다.
카예나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짤막한 비명을 지르자 레제프가 움찔 떨었다. 그는 얼른 누이의 손목을 놓았다. 대신 여전히 표정을 구긴 채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버렸다.
“레제프!”
“제발 내 말 좀 들어요.”
그러자 카예나는 자신이 할 말이라며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말했다.
“너야말로 내 말 좀 들어.”
둘은 기묘하게 대치한 채로 시선을 부딪쳤다.
“레제프,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누님은 제가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애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야 고작 열여덟 살인데 대체 뭘 한다는 말인가?
물론 레제프가 나이에 맞지 않게 훨씬 영악하고 가진 힘도 강력하긴 했다. 그렇게 치자면 카예나의 신체 나이도 고작 열아홉 살이었다. 그녀는 네가 당연히 어리니까, 라고 하려다가 말을 바꿨다.
“내 동생이니까 그렇지.”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날카로웠던 레제프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래도 누님은 쉬어야 합니다.”
이게 정상적인 걱정이라는 건 카예나도 잘 알았다. 당장 어제 납치당했던 사람에게 일하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트라우마가 될 만한 일이고 충분히 쉬어야 함이 마땅했다. 그녀가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말이다.
애석하게도 카예나는 보통의 귀족 영애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의 앞에 놓인 가시밭길은 스스로 부지런히 가시를 치우지 않으면 결국 찔려 죽는 건 자신이 될 터였다. 앞으로 예정된 것들이 어제의 납치극만큼 혹은 더욱 험난할 것이다.
“부황은 냉혹하시다. 너도 알고 있잖니.”
그건 누구보다도 레제프가 가장 잘 알았다. 그는 비죽 웃었다.
“예, 잘 압니다.”
레제프는 약간 못마땅한 심기를 얼굴에 드러내며 말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그 부분은 라파엘로 공작이 이미 해결해 줬습니다.”
갑자기 라파엘로가 언급되자 카예나가 멈칫했다.
그녀가 의아하게 물었다.
“그가 어떻게?”
그러자 레제프는 자기도 모른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침에 입궁했을 때 부황과 독대하더니 잘 협의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공작에게 빚을 하나 져 버렸지만요.”
그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쨌든 그럭저럭 조용히 넘어가게 되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입궁했었구나.’
카예나는 그에게 과분한 도움을 자꾸 받게 되는 것 같았다. 그가 순수하게 레제프를 위해서 그랬을 것 같지 않았다.
‘자의식 과잉인가 했는데.’
라파엘로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게 분명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호감에서 비롯한 것인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좋은 감정인 건 확실했다.
‘공작위를 계승한 것도 그래.’
그렇게 사실을 인정하니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공기처럼 조용히 있던 베라가 문밖을 확인 후 카예나에게 공손히 아뢰었다.
“전하, 올리비아가 알현을 요청하였습니다.”
카예나는 잠깐 고민했다. 다름 아닌 레제프 때문이었다.
‘황궁으로 불렀을 때 둘이 마주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미 생각하긴 했지만.’
차라리 카예나의 시야가 닿지 않는 밖에서 마주쳐 사달이 나는 것보단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계속 피할 수도 없을 테니 카예나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들어오라고 해.”
그러자 곧 문이 열리고 초췌한 모습의 올리비아가 들어왔다.
레제프는 무심한 눈으로 올리비아를 힐끗 보더니 침대 옆의 소파에 앉았다. 올리비아는 한쪽 무릎을 꿇고 카예나에게 절을 올린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카예나는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나는 괜찮아.”
하루 사이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모양인지 올리비아의 얼굴이 영 좋지 않았다. 눈가가 짓무른 것도 보였다.
카예나는 올리비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오렴.”
그녀의 부름에 올리비아가 조심스레 침대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카예나는 올리비아가 아직 스무 살이라는 사실을 깊게 생각한 적 없었다. 그녀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라고만 여겼다.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 무서웠을 게 분명한데. 트라우마는 자신이 아니라 올리비아에게 생겼을지도 모른다.
카예나는 올리비아의 손을 끌어 품에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무서웠지?”
그리고 자신도 위로받았던 말을 건넸다.
“이제 괜찮아.”
그 말에 올리비아가 무너지듯 카예나를 마주 안았다. 몸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네 덕분이지.”
올리비아는 카예나가 자신을 일부러 빼돌려 줬단 걸 알았다. 그러니 덕분이라는 말은 자신이 해야 했다.
레제프는 바로 곁에서 눈을 휙 치켜뜨고 이 광경을 보았다.
“하.”
그러고는 남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견제해야 할 게 하나 더 있었네?
그는 카예나에게 올리비아가 보통 의미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눈치챘다. 자꾸만 이상한 것들이 누이에게 꼬이고 있었다.
카예나는 레제프의 심기가 뒤틀린 것도 모르고 올리비아를 다독이며 말했다.
“며칠 휴가를 줄 테니 집에 다녀오렴. 그래도 마음 편한 곳에서 좀 쉬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올리비아는 안겨 있던 몸을 살짝 떨어뜨리며 카예나의 다정한 배려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전하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카예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살짝 놀라다가 이내 빙긋 웃었다.
“고마워.”
이번 사건이 그들에게 어떤 유대감을 형성한 것이 틀림없었다.
올리비아는 다시금 단단해진 눈으로 카예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좀 쉬렴. 의원에게 진찰도 받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레제프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카예나를 불렀다.
“누님.”
그 부름에 카예나만이 아니라 올리비아의 시선도 레제프를 향했다.
올리비아는 깜짝 놀랐다.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오직 카예나만 바라보느라 레제프가 있는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른 레제프에게 예를 갖췄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레제프는 올리비아가 마치 투명 인간인 것처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올리비아를 지나쳐 카예나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얼굴에 원래 없던 홍조가 생겼다 싶더니 열이 오르고 있었다.
“누님, 이제 정말로 좀 쉬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레제프는 그제야 올리비아를 보았다.
“누님께서는 쉬셔야 하니 넌 당장 나가라.”
올리비아는 레제프가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것을 느꼈다. 썩 이해되지는 않았으나 원래 망나니로 소문난 황자이니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한편 카예나는 제 동생이 하는 행동을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올리비아에게 첫눈에 반하는 건 아니었나? 분명 처음부터 호기심을 느꼈다는 식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나 레제프는 올리비아가 나가는 순간에도 카예나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는 일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그녀는 순순히 자리에 누웠다.
‘…다행인 일이지, 뭐.’
카예나는 눈을 감았다.
* * *
줄리아는 전날부터 계속 하인을 닦달해 오라비를 찾았다. 그러나 제논은 계속 황궁에 없었다. 간신히 그가 입궁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당장 제논의 방으로 찾아갔다.
“대체 어디에 계셨어요, 오라버니!”
제논은 대꾸도 하지 않고 타이 핀을 풀어 집어 던지듯이 테이블에 놓았다.
줄리아는 그를 졸졸 쫓아다니며 닦달했다.
“정말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어제는 정말로 무서웠다.
갑자기 황녀가 납치되었다며 나타난 올리비아와 순식간에 살벌해진 황궁 분위기는 그녀를 위축시켰다. 거기다 베라는 궁정인을 끌어모으더니 황자의 침소를 막고 있는 기사를 몰아내야 한다며 줄리아를 끌고 갔다.
그녀는 칼을 빼 들지도 모르는 기사를 상대해야 한다는 말에 기겁하고 말았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생각을 한다는 말인가!
“황궁에는 중앙군도 있고 황녀를 지키는 호위 기사도 있으면서 대체 왜 납치를 당한다는 말이에요? 이럴 줄 알았다면 황녀궁 시녀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제논은 줄리아를 향해 벌컥 짜증을 냈다.
“황궁은 원래 그런 곳이다!”
그의 호통에 줄리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오, 오라버니?”
“여기가 소꿉장난하는 곳인 줄 알았단 말이냐? 곧 성년이 되는 아이가 어찌 이렇게 어리석을 수 있단 말이냐!”
그녀는 냉소적이긴 해도 항상 여유로웠던 제논이 이렇게 화내는 걸 처음 보았다. 그녀는 너무 놀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오라버니가 제게 어떻게…….”
줄리아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제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저는 무서웠단 말이에요…….”
제논은 가뜩이나 예이스터 때문에 한껏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줄리아가 찾아와 계속 무섭다며 징징거리자 노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네가 황녀 전하와 같은 연배라는 사실이 난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구나.”
그는 동생을 냉정히 뿌리치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줄리아는 서럽게 눈물 흘리다가 울음을 꾹 참았다.
자신이 황궁에 버려졌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곳은 친구도 없고 하나밖에 없는 가족은 자신을 냉대했다.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집에서 데려온 시녀가 전부였다. 못생긴 남자만 가득할지라도 차라리 동부에 있었을 때가 행복했다.
줄리아는 제논의 방에서 나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황녀궁으로 힘없이 터덜터덜 걸었다.
‘난 이제 어쩌면 좋지?’
모든 용기를 잃은 기분이었다.
턱!
“아야!”
줄리아는 모퉁이를 돌다가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그녀는 머리를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아…….”
그녀는 멍한 얼굴로 자신과 부딪친 남자를 보았다.
화려한 금발과 청명한 파란 눈동자, 온건한 인상의 정석적인 미남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부드러운 인상이 분명한데도 눈빛은 조금도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위험한 느낌이 줄리아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했다.
“흐음.”
남자가 자신을 의아하게 보았다. 줄리아는 그제야 정신 차렸다.
“어머, 미, 미안해요.”
“…미안?”
남자는 줄리아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 미소는 또 얼마나 근사한지 줄리아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네?”
“금발에 파란 눈이라. 네가 줄리아 에반스겠군.”
그녀는 약간 상황이 재빨리 이해되지 않아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뭐지, 이 남자는……?’
그러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화, 황자 전하?”
줄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녀는 설마 이 믿기지 않는 미남이 황자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사실 지금까지 자신보다 한 살 어리단 말에 관심도 없었다. 초상화로 얼굴을 익혀 두라는 말에도 건성으로 나중에 그러겠다고 하고 보지도 않았다. 연하의 황자보다는 라파엘로가 온통 마음을 뒤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큰 키와 다부진 몸, 세련되면서도 화려한 미남인 레제프를 힐끔거렸다. 그 시선을 레제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줄리아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호오, 이것 봐라.’
레제프는 자신이 호감 사기 쉬운 외모란 사실을 잘 알았다. 예나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미모를 지닌 거지, 그도 어딜 가나 눈이 휘둥그레질 미남이었다. 그는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었다.
“기운이 없어 보이네?”
줄리아는 홀리는 듯한 미소를 정면으로 목격하고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사실 그녀는 잘생긴 남자에게 면역이 없었다.
“아, 아니에요. 그냥 조금…….”
레제프는 에반스 가문의 금지옥엽을 하찮게 보았다.
궁중 예법이라고는 조금도 배우지 못한 것인지 아까부터 말과 행동이 자유분방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비하면 어제오늘 보았던 밀빛 머리에 녹안의 재수 없는 여자는 가난한 집안 출신 주제에 궁중 예법이 탁월했다.
비단 궁중 예법만 탁월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보기엔 남다른 처세술도 있었다. 침실 앞을 막고 있던 기사를 밀어내고 자신을 찾아온 계책도 그녀의 작품이라 했다.
‘알면 알수록 별로야.’
올리비아 그레이스는 이상하게 라파엘로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 여자가 누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둘 다 재수 없었으며 싫다는 게 공통된 감상이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 마주친 얼굴만 화려하게 예쁜 줄리아 에반스는 레제프에게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그는 이런 어리석은 여자를 손에 넣고 휘두르는 일에 일가견이 있었다. 지금은 반강제로 관두게 되었지만, 일찍이 카예나로 그랬던 전적이 있었다.
“울었나?”
레제프의 커다란 손이 줄리아의 자그마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줄리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지금 울어서 눈도 퉁퉁 부었을 텐데!’
그녀는 너무나 속상했다. 이게 다 제 오라비 때문이었다.
“아니에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던 줄리아는 손을 꼬물거렸다. 레제프가 자신에게 이상하리만큼 다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건 당연한 대우였다. 그녀는 항상 이런 애틋한 관심과 다정한 배려를 받아 왔다.
그런데 수도에 올라오고 나서는 수잔을 비롯해 제논까지 그녀를 계속 속상하게 만들었다.
레제프의 낮은 웃음이 귓가로 내려앉았다.
“기운 내도록.”
그 독려에 마음이 설렜다.
그녀가 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레제프는 곁을 지나쳤다.
줄리아는 아쉬움이 진하게 담긴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레제프는 제 침실로 돌아와 망토를 풀어 휙 던졌다.
“제논은 어디에 있지?”
바닥에 떨어진 망토를 줍던 하인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침소에 계시지 않은 걸 확인하더니 따로 언질 없이 나갔습니다.”
그는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제논이 어제부터 계속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마음이 해이해진 건가? 특히 어제처럼 큰 사건을 두고 레제프를 막으러 나타나지 않았단 것이 이상했다.
‘누이에게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납치 같은 중대한 사건에 그다지 개입하지 않는 걸 보니 썩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오히려 주제도 모르는 길리안 그 자식이 누이를 탐냈지.’
납치를 떠올리니 다시금 서릿발 같은 분노가 내렸다.
헨버튼 길리안은 분명히 이중 납치를 계획한 범인을 알고 있다. 그를 어서 심문해야 하지만 귀족이기에 황제의 명이나 재판 없이 섣불리 손댈 수 없었다.
라파엘로와 그의 귀족 사회 재적에 대해 논의하며 길리안 자작을 황궁에 소환하려 했으나 불발되었다. 공작위를 임시로 계승한 상태라 가문 내에서 마무리 지을 일이 있다는 것이다.
레제프는 라파엘로의 손을 빌려야 하는 이 상황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인내해야 한다. 주범은 현장에서 검거했으나 다른 범인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제 그것들을 괜히 다 죽이라고 했군.”
그는 짜증스럽게 재킷 단추를 풀어냈다. 그리고 허리춤에 매단 총집을 풀었을 때였다.
“…….”
총이 없어졌다.
그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떨어진 건가?’
그러나 총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 망토 말고 다른 건 떨어진 게 없느냐?”
하인은 망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했다.
이상했다. 어디서 떨어뜨린 건가? 하지만 총집에 보관한 총이 어디서 어떻게 떨어진단 말인가?
“쯧.”
그는 혀를 차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총을 함부로 쓰는 모습을 들키면 좋을 게 없었다. 어쨌든 레제프는 아직 부황의 눈치를 봐야 하는 위치였다. 게다가 하필이면 잃어버린 총이 황실에 신고하지 않은 개인적인 물건이었다. 그걸 들키면 확실한 귀책 사유가 되었다.
“대체 총이 어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선이 황녀궁 통로 쪽으로 향했다. 그가 오늘 대부분을 머문 곳이 황녀궁이었다. 그곳에 있나? 레제프의 발걸음이 다시 잠든 누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카예나는 한참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방 안에는 베라만 머물고 있었다.
그녀가 베라를 불렀다.
“베라.”
바느질하던 베라가 손을 멈췄다. 어쩐지 카예나가 뒤척임 없이 너무 조용하다 했더니 잠든 척했던 것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전하.”
“납치범을 처리할 때까지는 황궁 뇌옥 근처로 순찰 인원을 늘려 경계를 강화하라고 하렴. 오늘부터 당장.”
베라는 카예나가 납치된 일 때문에 심약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베라는 자신이 나가는 대신 하급 시녀라도 들이려고 했다. 어쨌든 카예나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보살필 이가 상주하는 편이 좋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예나가 거부했다.
“몸은 괜찮아. 그냥 납치된 기억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있는 게 더 불편할 것 같아.”
“그럼 한 번씩 살피라고만 하겠습니다.”
“그래.”
베라는 침대 커튼을 내리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닫혔다.
“…….”
카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불 속에 감춰 둔 총을 꺼냈다.
레제프에게 안겼을 때 몰래 드레스 주머니로 총을 옮겼었다.
그녀는 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예술품처럼 아름다운 몸체를 가진 총이었다. 이미 총알도 장전도 되어 있었다.
카예나는 망설임 없이 침대를 벗어났다. 실내용 외투 중 모자가 달린 것으로 입고 총을 챙겨 태피스트리 앞에 섰다. 그것을 걷어 미닫이문을 옆으로 밀었다.
문은 기름칠이 잘되어 소리도 나지 않고 부드럽게 밀렸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전에 레제프가 이용했던 그 통로였다.
초를 밝힌 램프를 든 카예나는 비밀 통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마침내 1층으로 내려간 그녀는 램프를 그곳에 숨겨 두었다. 그다음은 기억을 더듬어 황궁 뇌옥을 찾아갔다.
걸음은 점차 조급해졌다.
‘분명 오늘 내로 도망칠 거야.’
헨버튼 길리안의 집안은 평범한 자작가가 아니었다. 또 그가 저질러 온 온갖 더러운 일들이 그냥 이뤄진 것도 아니니 오늘 안으로 그가 탈출할 것은 자명했다. 카예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침내 황궁 뇌옥에 도착했다. 역시나 문지기는 이미 매수된 자들로 바뀌었는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덕분에 그녀는 손쉽게 뇌옥으로 들어갔다.
어수선한 소리가 들렸다.
카예나는 몸을 숨겼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몸을 빼는 걸 보았다. 헨버튼을 가둔 뇌옥 문을 열어 준 자들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헨버튼 길리안이 보였다.
찰칵. 그녀는 장전을 확인 후 헨버튼의 뒤통수를 향해 총구를 들이밀었다.
“헨버튼 길리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헨버튼이 휙 뒤돌아보았다. 카예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횃불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팔을 길게 뻗어 당장에라도 방아쇠를 쏠 것 같은 그 모습은 심판자처럼 고결해 보였다.
“하, 하하!”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헨버튼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약 기운이 모두 사라져 꽤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광기는 여전했다.
“전하께서 먼저 저를 찾아 주시다니요.”
헨버튼은 비소하며 카예나가 든 총을 보았다.
“영광스럽게도 저를 쏘려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그는 카예나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리라고 확신한 듯 건들거렸다.
카예나는 냉정하게 일갈했다.
“죗값을 치르지 않고 쥐새끼처럼 도망치리라고 예상했거든. 정말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구나.”
헨버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 발짝 다가갔다. 그녀는 무심결에 한 걸음 물러나며 총을 다시 고쳐 쥐었다.
“죄를 지어도 꼭 벌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전하.”
“그럴 수도 있겠지.”
카예나는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그게 넌 아니야.”
그녀는 방아쇠를 천천히 당겼다. 이대로라면 탄환이 저 머리를 뚫어 버리겠지. 그럼 헨버튼은 즉사한다. 지긋지긋한 과거의 망령을 떨쳐 내는 것이다.
헨버튼은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것이 뭔지 모르는 사람처럼 태평하게 굴었다.
“그래서 그 총으로 저를 쏘시려는 겁니까? 아무리 황족이라고 해도 귀족을 즉결 처분하는 건 꽤 부담스러운 일일 텐데요.”
헨버튼은 양팔을 벌렸다.
“그런 쓸데없는 객기는 접어 두시고 이왕 저를 찾으셨으니 같이 나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때 여러 사람의 발걸음이 이곳으로 다가왔다. 헨버튼을 빼내러 온 이들이었다.
“이봐요, 귀족 양반. 왜 이렇게 미적대는…….”
그들은 카예나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뇌옥에 총을 든 천사가 나타나 있었다.
“황녀 아닌가……?”
헨버튼은 카예나를 가엽게 바라보았다.
“그 총에 탄피는 넉넉한가요? 여기 남자들이 감히 전하를 붙들기 전에 다 처리할 만큼 사격 실력도 좋으시겠지요?”
그럴 리가 없었다. 카예나는 태어나서 총을 처음 쥐어 보았다. 누군가를 태연하게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살인에 무감각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에게 총을 쏠 수 없었다. 그래서 순순히 인정했다.
“자네 말이 맞아.”
카예나는 총을 든 손이 아닌 반대편 손으로 로브 주머니에서 작은 막대기를 꺼냈다. 그것을 이로 물고 뚜껑을 뽑자 날카롭게 빛나는 작은 칼날이 드러났다.
그녀는 칼날을 제 얼굴에 갖다 댔다. 당장 제 얼굴을 그어 버릴 것처럼 말이다.
“그럼 이건 어때?”
여유로웠던 헨버튼의 얼굴이 악귀처럼 돌변했다.
“그만둬-!”
카예나는 헨버튼이 자신의 무엇을 사랑하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얼굴이다. 그저 아름다운 얼굴뿐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것을 수집하는 수집가다. 아름다운 것엔 상당히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은밀한 수집품이 바로 사람이었다.
헨버튼이 카예나를 그토록 학대했던 때에도 절대 얼굴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내가 왜 너 같은 것을 두려워했을까? 이렇게 별거 없는 인간이었는데.”
고작 얼굴에 빗금 하나 그으려는 것으로 저렇게 벌벌 떠는 남자를 왜 두려워했을까? 진작 알았다면 첫 번째 삶에서 얼굴을 망가뜨리지 않았을까?
‘아니. 그때의 나는 내 외모를 망가뜨릴 용기가 없었어.’
그것은 제 존재 이유였기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순간에조차 놓지 못했다.
카예나는 자신이 무력하기에 이런 하찮은 남자도 그토록 위협적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웃음이 났다. 망령에 사로잡혔다가 제정신이 든 기분이었다. 동시에 자신의 무력함이 저주스러웠다. 헨버튼 길리안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겠지. 두 번째 헨버튼, 세 번째 헨버튼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겠지. 그렇게 방어하고 방어하다가 언젠간 또 같은 결말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괴한들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카예나를 제압하려고 슬슬 다가왔다.
“저들이 다가오면 뺨을 그어 버릴 거야, 길리안.”
“멈춰!”
헨버튼은 카예나의 협박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고용인들에게 소리 질렀다.
“뭐? 미쳤소?”
그들은 황당했다. 상대는 고작 힘없는 여자다. 총을 들고 있는 게 좀 위협적이긴 해도 여긴 남자 머릿수만 여섯이다. 게다가 제 얼굴에 칼을 들이밀며 하는 협박이라니.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찼다.
그러나 헨버튼은 고용인이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빼 들었다. 그의 눈은 이미 반쯤 뒤집힌 상태였다.
“저 얼굴에 흠 하나라도 나면 너희 사지는 멀쩡하지 못할 거다. 명심해!”
“이런 미친…….”
그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본인 얼굴을 인질로 잡은 황녀 때문에 모두 발이 묶여 버렸다.
헨버튼은 이를 빠드득 갈며 카예나를 노려보았다.
“원하는 대로 할 테니 칼은 좀 치워 주시죠, 전하.”
참으로 간절한 목소리였다. 그가 이토록 애원하는 모습을 또 볼 일이 있을까?
카예나는 사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 집착하는 헨버튼을 역겹게 보았다.
“이렇게 싫어하는 줄 알았다면 진작 내 얼굴을 난도질해 버리는 거였는데. 내가 화상이라도 입으면 기절하겠구나.”
“카예나 황녀!”
“무엄하구나.”
그녀는 냉엄한 눈으로 명령했다.
“무릎을 꿇어라.”
헨버튼의 시선은 온통 그녀가 쥔 칼에 집중한 채로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카예나는 총구를 괴한들에게 돌렸다.
“너희도 다 꿇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황녀가 얼굴은 천사 같으나 단단히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카예나는 칼날을 뺨에 바짝 붙였다. 그러자 헨버튼이 발작하며 소리쳤다.
“꿇으라고, 이 머저리들아!”
“이 미친 새끼…….”
그들은 헨버튼의 뒤통수를 갈겨 기절시키고 카예나를 제압할까도 고민했다. 그러나 총구는 이제 헨버튼이 아니라 자신들을 향하고 있었다.
“뇌옥 열쇠는 돌려주어야지?”
카예나는 헨버튼이 나오느라 활짝 열린 뇌옥을 가리키며 말했다.
괴한 중 하나가 욕설을 내뱉으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던져 주었다.
카예나는 자신을 인질로 삼아 여섯 남자를 바닥에 무릎 꿇렸다.
그래도 시간을 조금 더 끌면 그들이 유리했다. 이곳의 간수는 그들에게 매수되었다. 황녀를 발견하게 된다면 어떻게든 입막음하려 들 것이 뻔하다.
그러나 카예나는 이 대치를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천장을 향해 총구를 들어 올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굉음이 뇌옥을 강타했다. 무시무시한 소음이었다.
괴한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소음을 들은 기사들이 몰려들 것이다. 얼른 도망쳐야 했다.
“황녀를 인질로 잡아!”
그들은 헨버튼이고 뭐고 살아야 했기에 그녀를 덮치려고 했다. 그러나 헨버튼이 그들을 밀쳤다.
“미쳤느냐! 저 얼굴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생기면 너희를 끓는 기름에 집어넣어 버릴 것이다!”
카예나는 헨버튼이 탈출한 뇌옥에 스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다음 손에 들고 있던 총과 열쇠를 밖에다 던졌다.
“여기다! 이곳에서 소리가 났다!”
밖에서 기사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카예나는 이곳 근처로 기사들이 순찰하는 시간은 이미 알았다. 베라를 따돌리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이 순간을 위해 순찰 인원을 더 늘리라고 명령한 것도 있었다. 때마침 순찰 중이었던 중앙군 기사들이 뇌옥으로 달려왔다.
“탈옥이다! 잡아라!”
기사들이 순식간에 괴한과 헨버튼을 체포했다.
“살려 다오!”
카예나가 비명을 질렀다.
중앙군 기사들은 황녀가 감옥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저, 전하? 황녀 전하께서 여기 계시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총을 가리켰다.
“저들이 나를 쏘려고 하였다!”
“뭐, 뭣?”
괴한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카예나가 소리 지르는 걸 보았다. 그녀는 기사들을 더욱 정신없게 만들었다.
“저 끔찍한 물건을 어서 없애! 궁에서 안 보이게 없애란 말이다!”
“예, 옙!”
기사들은 얼른 총을 치우고 뇌옥을 열어 카예나를 보호했다.
“너무나 무섭구나…….”
그녀는 애처롭고 가녀린 모습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 저 미친 여자가……!”
기사들은 무엄한 소리를 하는 괴한들을 창끝으로 찍어 누르며 바닥에 모두 엎드리게 했다.
카예나는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뇌옥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두 손으로 가리고 있던 얼굴을 살짝 드러낸 채로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피식하고 옅은 비웃음이 입가를 스쳤다가 사라졌다. 괴한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했다.
완전히 당한 것이다.
카예나는 힘없이 걸어 뇌옥을 나왔다.
“누님!”
레제프는 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황녀궁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카예나가 사라진 걸 발견했다. 촉이 이상했다.
그는 당장 밖을 뛰쳐나와 그녀를 찾아 헤매다가 총성을 듣고 이곳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레제프!”
카예나는 얼른 레제프에게 달려가 그에게 안겼다. 그는 자연스럽게 카예나를 보호하듯 안으며 기사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추궁했다.
그들은 총성을 듣고 뇌옥을 습격했으며 헨버튼 길리안이 탈옥하려는 걸 검거했다고 말했다. 또한, 카예나 황녀를 향해 총을 쏘았고 그녀는 뇌옥에 갇힌 채 발견되었다고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엉망진창인 이야기인가?
그는 기사가 내민 총을 보았다.
“…….”
그것은 그의 총이었다.
카예나가 그를 붙든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총은 네 것이 아니다, 레제프.”
카예나는 저 총이 신고하지 않은 불법 총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부황에게 레제프가 불리할 그 어떤 빌미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그것까지 이미 생각하고 일을 치른 것이다.
“내가 얼른 치우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무 두렵고 무섭구나.”
그러자 기사가 아차 하며 얼른 총을 감추었다.
“처리는 어떻게 했는지 보고할 필요도 없다. 아니, 레제프 황자에게 보고해라. 나는 알고 싶지도 않으니.”
“명을 받듭니다, 전하.”
레제프는 그녀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연기하는 걸 보며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확실히 저 총이 자신의 것이라는 보고가 부황께 들어가면 골치 아프다. 가뜩이나 바로 어제 명령 불복종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그는 누이의 장단에 맞췄다.
“내가 누님을 모시고 갈 것이니 잘 수습해 두어라. 감히 탈옥하려 한 헨버튼 길리안은 내일 당장 심문에 들어갈 것이다.”
헨버튼에게 손댈 수 있는 좋은 빌미까지 생겼다. 이 정도면 역모로 몰아붙여도 귀족 사회에서 감히 누구도 토 달지 못할 것이다.
그는 누이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방으로 가시죠, 누님.”
역시 카예나는 남다르다. 거기다 여전히 레제프에게 헌신적이기까지 했다. 하나뿐인 누이답게, 의지할 곳이라고는 서로뿐인 남매답게 행동했다.
그는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영원히 이 유대감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카예나가 그의 곁에 있어야 한다.
역시 초상화를 뿌리라고 지시하길 잘했네. 아예 황녀 조각상을 마을 단위로 세울까?
레제프는 카예나를 부축하며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