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13
악녀는 마리오네트 12장. 검은 정원의 꽃을 꺾다.(13/33)
12장. 검은 정원의 꽃을 꺾다.
황녀 납치 사건을 수습했던 날 밤, 라파엘로는 아직 수도에 머무는 중인 모친에게 전령을 보냈다. 길리안 자작가는 서부의 기둥 중 하나. 그곳을 해체하는 것으로 결정된 이상 최상의 이득을 도모해야 했다.
‘오늘 안으로 결단을 내려야 해. 내일이면 길리안 자작가든 황궁이든 반드시 누군가는 움직인다.’
게다가 레제프 황자의 눈빛도 심상치 않았다. 망나니로 소문난 황자가 돌발 행동을 하기 전에 억눌러야 한다. 그래야 카예나가 안전하리라.
그는 혼절한 카예나가 얼마나 마르고 가냘픈지 뼈저리게 느꼈다. 황궁이란 거센 물살에서 휩쓸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녀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서둘러 대안을 짜야 했다.
마차가 키드레이 저택에서 멈췄다. 라파엘로가 마차에서 내리자 식솔들이 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경하드립니다, 공작 각하!”
라파엘로는 상당히 무심했다. 그랬기에 그는 가신들이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가를 헤아리지 못했다.
키드레이 공작가는 사실상 공작 부인 혼자서 돌보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레오 공작은 모든 것에서 손을 놔 버리고 이미 서부 공작령을 떠나 산 지 오래되었다. 실질적 가주가 부재한 상황이었다.
라파엘로가 후계자로서 가문을 다스리는 일에 손을 보태고는 있었다. 다만 그는 부친도 부친이지만 모친과의 사이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집안과 그다지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 가신들만 이래저래 불안해하며 소가주의 눈치를 살펴 왔다.
오늘은 그들에게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모두 일어나라.”
그러나 라파엘로에게는 그다지 경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가문을 계승한 것에 특별한 유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카예나 때문이었다.
“황녀 전하께 변고가 있었던 날이다. 다들 조용히 처신하도록.”
“예, 각하!”
가신들이 흩어지고 집을 지키고 있었던 바스턴이 재빨리 다가왔다. 라파엘로는 저택으로 들어가며 바스턴이 내민 서신을 받았다.
“대부인께서 보내신 전갈입니다.”
⌜길리안 자작가라면 진즉 벼르고 있었으니 뒤집어도 상관없다. 나머지는 네가 가문의 주인이니 잘 처리해 보아라.⌟
과연 모친은 사태 파악이 빨랐다. 소식을 듣자마자 그에게 권한을 넘긴 것이다. 그녀는 최소한의 조치만 했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라파엘로에게 일임했다.
그는 촛불에 편지를 태웠다.
“황제 폐하께 독대를 신청하거라. 내일 오전 중으로 알현할 것이다.”
“예, 각하!”
라파엘로는 부모의 불화 원인이 불륜이란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는 키드레이 공작가에 데릴사위로 오기 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고, 그녀를 잊지 못하고 계속 만나 온 모양이었다. 한때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상대에 대한 흔적을 완전히 감춰 버렸다. 그것만 봐도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더 파고들면 위험할지도 모른단 직감이 들었다.
라파엘로는 그 뒤로 부친이 누구와 만났는지 알아보는 걸 관뒀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부친은 이기적이며 키드레이 가문에 큰 피해를 줬다는 것이다.
부친에 대한 정은 이미 열 살 때 버렸다. 모친을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이 없진 않지만 그뿐이다. 이제 모든 건 그의 뜻대로 이룰 생각이었다. 라파엘로는 가족과 유대감이 없었고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황제가 그토록 싫어하는 제 부친을 팔아넘길 생각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는 침상에 기대어 앉은 에스테반 황제를 바라보았다. 침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루든 시종장도 내보낸 채 황제와 라파엘로 단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황녀를 구해 준 게 자네라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황제는 잠깐 아무 말 없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카예나에게 마음이 있나?”
설마 황제가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라파엘로가 잠깐 멈칫한 사이 황제는 입가로 엷은 웃음을 머금었다. 이미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한 미소였다. 키드레이 가문에서는 제 부친에 대한 어떠한 보호도 없을 것이라고 제안해 온 것부터 이미 명확했다.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 공작.”
다시 눈을 뜬 에스테반은 황제가 아닌 딸을 둔 아버지이자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야기했다.
“이 황궁은 정말 지독한 곳이야. 이곳을 채운 이들은 처음엔 사람이었으나 다들 괴물이 되어 가지.”
라파엘로는 그의 목소리에서 전과 같은 강인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불과 몇 달 전과 비교해도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나 역시도 한때는 누구보다 강인한 괴물이었지. 내 힘, 내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다네. 하지만 아니었지.”
황제와 라파엘로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여전히 어리석고 과거의 실패한 결정에 목숨을 맡겨 두고 있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에스테반 황제는 담담하게 말했다.
“레제프 황자는 내 자식이 아니야.”
“……예?”
라파엘로는 자신이 들은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레제프 황자가 그의 자식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자식이란 말인가? 점차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에스테반 황제가 낙인처럼 말했다.
“자네 부친의 자식이지.”
황제는 참담한 말을 썩 담담하게 이어 갔다.
“자네 부친은 선황후의 정부였다네. 그녀가 카예나를 낳고 몸조리하느라 기후가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지.”
그때 레제프가 생겼단 말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 대부분은 이미 입을 막았다네. 자네 모친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거의.”
라파엘로는 한숨이라도 내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황제를 앞에 두고 그럴 수 없었기에 목구멍으로 삼켰다. 한숨은 불덩이처럼 뜨거워 속을 새까맣게 태웠다.
“나는 선황후를 용서할 수 없었지. 날 우습게 만들었단 사실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군.”
그는 섬뜩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는 마침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었지.”
“…….”
끔찍한 이야기였다.
라파엘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 폭력적인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레제프는 선황후의 부정이었다. 나는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고 내 자식으로 둔갑시켰어. 그것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황후를 그다지 닮지 않았지.”
“……제 부친을 닮았군요.”
그 선하게 둥근 눈매와 서글서글한 인상을 보고 왜 지금까지 제 부친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진실을 토로한 내가 증오스럽나?”
증오스럽냐고? 잘 모르겠다.
라파엘로는 감정에 무뎠다. 그런데도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는지, 차갑게 얼어붙었는지 헷갈렸다.
“내 자식처럼 키우지 못할 독을 품었다가 결국 그것이 이 황실을 중독시키고 말았어.”
레제프 황자가 독이 된 것도 황실이 이렇게 된 것도 모두 에스테반 황제의 실책이었다.
“카예나는 선황후를 지나치게 닮았지. 그래서 그 아이에게도 좀처럼 정이 가질 않았어.”
라파엘로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아주 익숙한 이야기였다. 그는 모친을 쏙 빼닮았다. 키드레이 가문의 특징인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을 그대로 타고나기도 했다. 부친은 그를 끔찍하게 보았다. 제 몸에는 부친의 피도 절반이 흘렀다.
그러나 그는 제 결실임에도 라파엘로를 내쳤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키드레이 공작가의 불화는 이미 들었지. 노아 키드레이도, 자네도 피해자란 사실을 알고 있네. 하지만 난 자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진 못하겠어. 난 여전히 내 복수가 정당했다고 생각하니까.”
이제야 부친인 레오가 왜 그랬는지 이해했다. 선황후가 황제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던 거다. 생각해 보니 갑자기 실의에 빠져 술을 마신 것도 선황후가 타계했던 시기와 일치했다.
“최근 들어 카예나의 변한 모습을 보고 갑자기 많은 생각이 들었다네. 나는 그 아이를 어리석은 선황후와 똑같이 보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 아이는 갑자기 눈부시게 변화했지.”
그것은 카예나가 스스로 이뤄 낸 변화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서, 안온하지 못한 이유의 변화란 말이었다.
“카예나는 레제프가 자신처럼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애정을 주고 다정하게 보살피더군. 제게 독을 먹인 동생에게 말일세.”
“…….”
“지난 파티에서 마신 독은 레제프 짓이었지. 난 카예나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네. 그런데도 그 아이는 제 동생을 용서하더군.”
이 이야기는 정말 최악이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었고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이 구역질 나는 곳에서 그녀는 침착하게 때를 기다린 것이다. 홀로, 이곳에서.
자신이 아니면 손 내밀 곳 없는 그녀가 얼마나 필사적이었을지 떠올려 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황녀 전하께 미안하지 않으십니까?”
황제가 한숨처럼 말했다.
“회한은 들더군.”
그리고 메마른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그 또한 황족의 숙명이다.”
라파엘로의 눈동자에 붉은 불꽃이 튀었다. 당장 황제의 멱살을 쥐고 저 담담한 얼굴에 주먹을 꽂아 버리고 싶었다.
‘아, 이래서.’
카예나가 이곳에서 도망치려고 그토록 발버둥 칠 만했다. 이곳엔 그녀를 숨 쉬게 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비단 황궁만이 아니었다.
‘이 세계가 마치 카예나를 죽이고자 만들어진 것 같아.’
라파엘로는 제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황제를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황제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 복수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라네.”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미소를 거두었다.
“자네가 내 딸을 사랑하게 되어서 다행이야.”
치졸하고 비열한 인간.
라파엘로는 에스테반 황제를 그렇게 평가했다.
복수를 마무리 짓는다고? 그래. 황제의 판단은 매우 정확했다.
라파엘로는 레제프 황자를 용서치 못하겠으며 그가 카예나를 휘두르는 것을 절대 두고 보지 못하게 되었다. 한 번 먹인 독, 다음엔 목숨을 거둬 가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헨버튼 길리안이 했던 말이 순간 귓가를 맴돌았다.
“이건 제가 그런 게 아니라 전하께서 하신 겁니다.”
“제가 사라지면 이제 이런 일이 없을 것 같습니까?”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레제프의 곁에 있는 한, 카예나는 계속해서 몇 번이고 위기에 빠질 것이다.
황제는 라파엘로의 손을 빌려 레제프를 억압할 생각이었다.
“두 가지 청을 들어주십시오, 폐하.”
에스테반은 다시 제국의 황제로 돌아와 그를 마주했다.
라파엘로가 원하는 것이 있기에 만들어진 자리였다. 제 아비를 팔아 치울 각오로 만들어 냈으니 평범한 부탁을 하진 않을 것이다.
“말해 보라.”
라파엘로는 바닥에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번 납치 사건에서 황명을 거역하고 군대를 통솔한 레제프 황자님께 아무런 불이익도 주지 마십시오.”
“그리고?”
“황녀 전하를 후계자로 삼지 마시되, 그분께 후계자의 권한만 내려 주십시오.”
카예나를 후계자로 삼게 되면 반드시 양측에게 집중 공격받는다. 그러나 후계자가 아닌데 후계자의 권한을 쥐게 되면 양측에서 탐내게 된다. 그 힘은 카예나를 지킬 것이다. 그녀는 현명한 사람이니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금방 터득하겠지.
라파엘로에게는 판도를 뒤집을 시간이 필요했다. 레제프가 아닌 새로운 후계자를 세울 시간이었다.
황제는 가느다랗게 웃었다.
“윤허한다.”
황제의 침실에서 나온 라파엘로는 이 순간 상당히 보고 싶지 않았던 인물과 마주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작.”
레제프였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처음부터 레제프에게 불이익을 주지 말라는 청을 할 생각이었다.
카예나를 구출해 낸 공적을 세운 황자에게 불이익을 준다면 그의 세력이 강한 불만을 품을 수 있었다. 그 불만은 곧 카예나를 공격할 빌미가 된다. 카예나에게는 그걸 방어할 힘이 부족했다.
“다행히도 폐하께서 뜻을 헤아려 주셨습니다.”
레제프는 꽤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치떴다.
“무슨 거래를 하셨기에 부황께서 저를 벌하지 않겠다는 건지 궁금하군요.”
라파엘로는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별것 아니었습니다. 황자 전하의 진의를 헤아려 주신 거겠지요.”
절대 그럴 리 없는 말이었으나 레제프는 더 캐묻지 않았다.
어쨌든 황제는 이번 일에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럼 제 세력으로부터 누이를 보호할 수 있다.
“공작님께 빚을 지고 말았군요.”
라파엘로는 굳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레제프가 물었다.
“길리안 자작가 문제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일단 제가 막 작위를 승계한 터라 가문 내부를 수습한 후에 길리안 자작을 곧바로 소환하겠습니다.”
라파엘로는 평상심을 유지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머리는 뜨거워지고 차가워지길 반복했다. 그래도 평범하게 말은 잘 마친 듯했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그는 대기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야 할 그의 보좌관이 보이지 않았다.
“제레미는 어딨지?”
수행원 하나가 보고했다.
“가신이 황궁 밖에서 급히 불러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제레미는 이렇게 자리를 비울 사람이 아니었다.
라파엘로는 1층으로 내려갔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제레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각하!”
헨버튼 길리안에 대해 보고할 때보다 표정이 심각했다. 그는 주변에 자신을 향한 눈이 많은 것을 느끼고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제레미도 그의 곁에 붙어 서서 입을 가린 채 말했다.
“클로렌스 엘리반에게 사람을 붙이라고 명령하신 이후, 방금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무슨 일이지?”
“엘리반 남작 부인이 사망했습니다.”
“이유는?”
“자살로 꾸며졌으나 타살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엘리반 부인이 황녀 전하께 쓴 답신을 입수했습니다.”
라파엘로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밖으로 나가기 전, 고개를 들어 올려 황녀궁 쪽을 보았다.
“황녀 전하께서는 아직 의식이 없으시냐?”
“그렇다고 합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자신이 타길 기다리는 중이던 마차에 곧바로 오르며 제레미에게서 편지를 건네받았다.
봉투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뭇가지에 매단 그네를 타는 금빛 머리의 여자아이와 녹색 드레스를 입고 그네를 밀어 주는 여자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건 아마도 엘리반 부인이 직접 그린 것 같았다. 그녀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형태로 카예나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라파엘로는 갈등했다.
이 편지와 함께 엘리반 부인이 타살당했다는 걸 알리면 카예나는 과연 멀쩡할 수 있을까?
그녀는 강인해 보이지만, 한없이 무리해서 단단함을 유지한다는 걸 알았다. 언제든 허물어질 수 있었다. 헨버튼을 마주했을 때처럼. 그러나 알리지 않으면 기만이지 않을까?
“어디 쪽 짓인지는 모르느냐?”
“조사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솜씨가 워낙 교묘하여 행적을 쫓기 쉽지 않답니다. 다만…….”
제레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레제프 황자 측에서 벌인 일은 확실합니다. 공석인 하녀장 자리에 레르반스 도티 부인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레르반스 도티라면 레제프의 유모였던 사람이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그녀를 하녀장으로 데려오겠다니.
“……전하께 알현을 요청해 두어라.”
제레미는 라파엘로를 안쓰럽게 보았다. 이 비보를 접할 황녀는 그보다 더 안쓰러웠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한숨이 밀려들었다.
* * *
길리안 자작가는 조사할수록 가관이었다. 헨버튼의 수집품인 박제한 시체가 여러 구 발견되며 사안이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졌다.
바깥에서 황녀를 납치한 자들을 심문하고 길리안 자작가를 뒤집고 난리가 날 동안 황녀궁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납치 사건이 이곳과 아무런 관련 없는 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카예나는 전날 총으로 헨버튼을 위협했던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 그 속은 비록 엉망일지언정 겉으로 보기엔 괜찮았다. 괜찮아 보여야 하기도 했다.
몸과 마음은 이미 지쳤다. 아주 잠시라도 제 무력함에 대해 떠올리지 않고 평범한 황녀로 있고 싶었다. 곧 다가올 성년식을 고대하고 완성된 드레스를 기쁘게 바라보는 정도만 하는 평범한 일상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화병에 꽃꽂이도 해 보았다. 마음이 어지러워서인지 솜씨가 없어서인지 괴작이 탄생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카예나의 곁을 지키던 베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전하, 정녕 샤프롱 없이 성년식을 지내실 참입니까?”
시녀들은 초대장을 대부분 작성했고 그것은 전령을 통해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카예나는 여전히 샤프롱을 두지 않았다.
“엘리반 부인이 아니면 굳이.”
‘그러고 보니 아직 답신을 받지 못했네. ……하긴, 오래 떨어져 있었는데 아직도 날 생각할 리가 없나?’
그래도 이 순간, 유모가 있었더라면 마음이 조금 덜 힘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카예나는 자신을 꾸짖었다.
‘나약한 생각은 하지 말자.’
조금만 더 견디면 성년식이다.
그녀는 사교계에 가상의 남편에 대한 소문을 퍼뜨릴 생각이었다. 라파엘로의 협력이 필요하겠지만, 어쩐지 그가 자신을 도와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툭. 카예나는 꽃대를 다듬다가 꽃송이를 잘라 버렸다. 테이블에 떨어진 붉은 꽃송이에 기분이 묘해졌을 때였다. 올리비아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황녀 전하, 라파엘로 키드레이 공작님이 도착했습니다.”
어제 라파엘로가 오후에 전령을 보내 긴히 할 말이 있다며 알현을 요청했다. 카예나는 그에게는 감사 인사도 해야 했으니 바로 수락했다.
“저번과 같은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수고했어.”
카예나는 침실에서 나가기 전, 무심결에 거울 앞에 섰다. 꽤 따뜻한 날씨에 맞게 산뜻한 연분홍빛 드레스 차림이었다. 음울한 기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제 모습을 점검하다 멈칫했다. 이래서야, 그와의 만남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지 않은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라파엘로는 응접실 중앙에 서 있었다.
카예나는 그의 모습을 보자 분명 아무 일이 없는데도 어딘지 안심되는 기분을 느꼈다. 이건 든든한 아군을 마주할 때 느끼는 그런 기분일까?
그가 고개를 돌려 카예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차갑게 식어있던 라파엘로의 얼굴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는 살 것 같다는 기분이 뭔지 깨달았다. 지금 그는 살 것 같았다. 카예나를 보는 순간 그랬다.
카예나는 그 모습을 정면으로 목격하며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무장했다고 생각했던 마음에 균열이 일어났다.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라파엘로가 카예나에게 인사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카예나도 드레스 자락을 잡고 마주 인사했다.
“작위 계승을 축하드립니다, 공작님.”
“감사합니다.”
격식을 차린, 특별하지 않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 안을 채운 묘한 분위기는 평범하지 않았다.
그녀는 라파엘로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카예나는 미소로 생각을 감추며 말을 이었다.
“그날 제가 공작님께 무례를 저질렀음에도 관용을 베풀어 주셔서 고마워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어딘가 딱딱하게 거리를 두는 듯한 투였다. 라파엘로는 그것을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마음은 이제 아주 잘 깨달았다. 카예나는 제게 특별하다.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은 아주 빠른 속도로 점점 더 짙어졌다.
“어제 약간 소란했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별일 아니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걱정됩니다.”
카예나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무심결에 탄식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라파엘로는 곧은 시선으로 카예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회피할 수 없었다.
“저는 전하를 걱정하는 걸 멈출 수 없습니다.”
“……공작님.”
“어리석은 저를 용서하십시오.”
그가 카예나를 품에 안았다.
온기를 나누는 건 참 특별한 일이다.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이 서서히 무뎌지며 불안하게 흔들리던 세상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라파엘로는 소중한 것을 대하듯 조심스러우나 강렬하게 카예나를 끌어안았다.
카예나는 멈칫하다가 그의 등을 천천히 안았다.
“괜찮아요?”
그 말에 라파엘로는 고통스럽게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카예나는 상대를 보듬었다. 라파엘로는 자신이 그녀가 보이는 호의에 깊이 중독되었음을 절절히 깨달았다.
“아니요.”
그는 유치하게 대답했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자신은 조금도 괜찮지 않다.
에스테반 황제가 폭력적으로 알려 준 진실에 꽤 너덜너덜해졌다. 목 끝까지 전하지 못할 진심이 차올랐다.
당신의 동생이 제 동생이기도 하다는 걸 혹시 아십니까? 황제는 당신과 저를 이용해 레제프 황자를 끝까지 괴롭힐 생각입니다.
왜 당신이 남을 위한 희생양이 되어야 합니까? 나와 같이 도망칩시다. 이 끔찍한 곳에서, 당장.
그때 카예나가 그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다정한 위로였다. 라파엘로는 그 손길에 몸을 웅크려 카예나를 제 품에 더욱 단단히 가뒀다.
외투 안에 든 엘리반 부인의 편지는 이대로 없애야 하나? 그는 이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고민했다. 진실을 알렸을 때 카예나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울까? 아니면 초연할까? 담담히 체념하며 받아들일까? 그렇지 않으면 좌절하고 분노할까? 속이 엉망진창으로 복잡해졌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등을 토닥여 주면서도 상당히 곤란하다는 표정을 했다. 자신을 발견하고 어두운 통로를 막 벗어난 사람처럼 구는 라파엘로를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나약한 모습을 가감 없이 보일 정도의 일이면 상당히 심각한 것 아닌가?
‘대체 누가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지?’
카예나는 라파엘로가 그녀를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안는 바람에 주책없이 마음이 떨렸다.
‘침착하자, 침착해.’
시간이 좀 지나자 라파엘로가 카예나를 살짝 놓아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품에 안고 있는 모양새였다. 라파엘로가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녀는 어색하게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다정한 거짓말과 불행한 진실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어떤 걸 택하시겠습니까?”
“진실이요.”
카예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불행은 제 몫이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며 직감했다.
“제게 뭔가 안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하는 모양이군요.”
“…….”
카예나는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이 사람의 염려와 배려가 고마울 정도였다. 새로운 불행은 새로운 생채기를 만들어 내겠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그런 인생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는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이왕이면 나를 좀 놓고 말했으면 좋겠는데.’
그의 품에 안겨 있으니 저도 모르게 몸을 완전히 기대어 안고 싶어졌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카예나는 작게 한숨을 흘렸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조금 더 떨어졌다. 그는 품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클로렌스 엘리반 남작 부인이 전하께 쓴 답신입니다.”
카예나는 순순히 편지를 건네받으면서도 의아했다.
‘유모의 답신이 왜 라파엘로에게서 나오지?’
“이걸 왜 공작께서……?”
라파엘로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엘리반 남작 부인이 사망했습니다.”
봉투를 건네받던 손이 멈칫했다.
라파엘로는 이실직고했다.
“전하께서 클로렌스 엘리반 남작 부인을 수도로 불러들였단 소식을 받고 그곳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카예나는 시선을 내려 봉투 겉면을 보았다. 그네에 탄 자신과 그네를 밀어 주는 유모가 그려져 있었다. 아득한 옛 기억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자살로 위장되었으나 편지를 포함해 정황을 살펴보니 타살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허락 없이 편지 내용을 확인한 점, 죄송합니다.”
그녀는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운 카예나 전하.
제 손으로 그네를 밀었던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어느덧 장성하셨군요. 보잘것없는 저 같은 늙은이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전하께서 저를 수도로 다시 불러들이는 일이 쉽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제법 오랜 세월을 그곳에서 지내며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까요.
제 눈으로 보아온 황궁은 전하께 온통 불리하기만 한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원망의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필요하시다면 저는 얼마든지 다시 그곳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편지가 잘 전해지길 바라며, 클로렌스 엘리반 드림.⌟
다정다감한 편지는 아니었다. 그녀는 상당히 꼿꼿한 성정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그래도 이 안에 담긴 의지와 애정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황자 전하 쪽에서 레르반스 도티 부인을 하녀장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포착했습니다.”
덧붙인 설명을 들으며 카예나는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그렇군요.”
대답은 고작 그것으로 끝이었다.
“공작이 아니었다면 이 편지는 받아 볼 수 없었겠군요. 번번이 이렇게 도움만 받아서 미안해요.”
카예나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적절하게 미소 짓기도 했고 알맞게 안타까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어느 부분도 과하거나 모자람이 없었다.
“유모의 비보를 받게 될 줄은 몰랐지만, 범인이 꼭 잡혔으면 좋겠군요.”
“제 가문에서도 계속 범인의 행적을 쫓고 있습니다.”
카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의 포옹은 저를 위로하려는 뜻이었나 보군요.”
그녀를 위로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꼭 엘리반 부인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라파엘로는 입을 다물었다.
카예나는 약간 피로한 얼굴로 살짝 웃더니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자리는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괜찮으십니까?”
“솔직히 조금 충격적이긴 하지만, 실의에 빠져 있기엔 제 처지가 녹록지는 않군요.”
그렇다 해도 이렇게 담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라파엘로는 그녀에게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욱 걱정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가려는 카예나를 잡았다.
“저는 몇 번이고 손을 내밀 겁니다.”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키드레이 공작님.”
카예나는 차분하게 인사를 고했다.
* * *
평소보다 빠른 걸음에 드레스 자락이 살짝 휘날렸다. 허리를 곧게 세운 채 걷는 모습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올리비아는 라파엘로와 독대를 마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침실로 돌아가는 카예나를 힐끗 보았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침실에 도착한 카예나는 안을 지키던 시녀를 모두 내보냈다.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다가 밖으로 나갔다.
카예나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레제프-!’
범인은 너무나 뻔했다.
도티 부인은 에반스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다. 이권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였다. 그런 그녀를 에반스 가문에서 하녀장으로 추대할 리 없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라파엘로의 앞에서 담담한 척, 괜찮은 척 표정을 관리하느라 속이 새까맣게 타 버렸다.
저 때문에 유모가 죽었다. 카예나가 그녀를 찾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제 처지를 간과하고 뭔가를 원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실책이다. 충분히 주도면밀하지 못했다.
레제프가 어떤 아이인지 알았으면서 아직 어리니까, 그는 타고나길 악인이 아니니까, 내 동생이니까, 같이 학대받았으니까.
여러 이유를 붙였다. 자신을 타일렀다.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해. 그 아이를 보듬어 주어야 해. 애정이라고는 받아 본 적 없는 그 불쌍한 아이를…….
그러나 레제프는 카예나가 한 노력을 한 번에 부쉈다.
이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카예나가 주제를 깨닫고 제 비위를 맞추길 바란 것이다. 주제 파악. 그래, 주제 파악을 하라는 메시지였다.
그녀는 여전히 종이 황녀고 여전히 그의 마리오네트다. 끊어 냈다고 생각한 실이 섬뜩하게 몸을 조여 왔다.
무력했다. 자신은 이 세상을 버텨 낼 힘이 지나치게 부족했다. 이대로라면 첫 번째 삶보다 더 일찍 요절할지도 모르겠다.
‘원래는 얼마나 살았더라?’
서른도 되기 전에 죽었다. 스물다섯이었나, 여섯이었나? 절망적인 무력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곧 수면 위로 오를 수 있을 줄 알고 열심히 발버둥 쳤던 물속이 너무 깊었다.
카예나는 그대로 침잠했다.
“대체 왜 그랬니?”
들어야 할 상대가 없는 조용한 원망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난 너의 하나뿐인 누이잖니…….”
그래서 과거도 없던 것으로 생각하려고 내가 그토록 노력했잖니. 잊으려고, 다 용서하려고 그렇게 노력했잖니. 그냥 나는 조용히 이곳을 벗어나 평온한 일상을 지내는 자유만 바랐잖니.
자신이 어리석었다. 카예나는 제 실책을 절절히 깨달았다.
아아. 이런 온건한 방법으로는 절대 나를 지킬 수 없었던 거야.
카예나는 어둠에 잠긴 눈으로 손에 든 봉투를 보았다.
“힘이 필요해.”
제게서 뭔가를 빼앗는 것에 너무나 익숙한 동생을 훈육하는 일엔 매가 필요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자꾸 내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나도 네가 가장 원하는 걸 빼앗아 줄게.”
그러면 앞으로 그런 패악을 부리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겠니, 레제프?
가장 원하는 것을 빼앗기는 고통을 알려 주기로 작정한 이상 거리낄 건 없었다. 헨버튼 앞에서 제 뺨에 칼날을 들이댔던 것처럼 레제프가 앉을 옥좌를 빼앗아 줄 생각이었다.
카예나는 곧장 부황을 찾아갔다.
“성년식을 앞두고 이런저런 일이 많으니 마음이 불안해요.”
그녀는 평소처럼 부황이 먹을 만한 간식을 만들었다. 또 평소처럼 그중 일부를 레제프에게 보냈다. 그래서 변한 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변한 것은 오직 카예나의 마음뿐이었다.
“사원을 좀 다녀오고 싶어요.”
에스테반 황제는 호박을 끓여 만든 묽은 수프를 한술 뜨다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사원?”
뜻밖의 말이었다. 이 시기에 사원이라니? 카예나는 신실한 신자도 아니다. 그녀는 여상스럽게 말했다.
“영험하다는 사원이 있다고 들어서 그곳에 헌금해 볼까 싶어요. 좋은 말씀도 듣고 말이에요.”
사원은 그런 것으로 종종 장사하곤 했다. 보통 귀부인들이 그런 힘에 기대어 순산을 기원하거나 자식의 좋은 혼처를 바랐다. 그런데 그걸 제 딸도 믿을 줄은 몰랐다.
‘최근에 확실히 이런저런 일이 많긴 했으니.’
대외적으로도 카예나가 사원을 한번 다녀오며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듯이 보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것도 좋겠지.”
카예나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황제를 살짝 그러안았다.
“폐하의 쾌유를 빌고 올게요.”
그녀의 사랑스러운 행동에 황제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딸이 똑똑한 것도 좋지만 역시 이렇게 귀염 떠는 모습을 보는 것도 큰 기쁨이었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카예나는 목적을 달성하고 우아하게 인사를 올리고는 황제의 침소에서 나왔다.
“옷가지를 미리 챙겨 두렴. 시중 하인 하나만 데리고 가볍게 다녀올 생각이야.”
“네?”
베라는 깜짝 놀랐다.
“너무 단출하게 다녀오시려는 건 아닌지요? 상급 시녀 중 한 사람은 데려가십시오.”
“아냐. 호위 기사를 여럿 데려가는 것으로도 충분해. 사원에 수행원을 너무 많이 데려가는 것도 보기 좋진 않아.”
“그래도…….”
호위 기사는 모두 남자라 그녀를 살뜰히 보필할 수 없다. 황녀가 드레스를 입고 벗는 시중을 들 수는 없으니 말이다.
“혼자 입고 벗을 수 있는 간단한 옷차림으로 갈 거란다.”
베라는 카예나가 정말 그 이상한 사원이 영험하다고 믿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런 미신을 믿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근에 일이 많긴 했어.’
충분히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어딘가 석연찮았다.
‘마법의 힘을 손에 넣어야 하는데 시녀가 있으면 곤란해.’
이 세계에는 마법이 존재한다. 올리비아가 마법의 힘으로 죽음에서 되살아나기도 했다. 그 힘을 손에 넣는 방법은 원작을 읽어 알고 있었다. 그것은 카예나의 무력함을 상당히 보완해 줄 터였다. 그러니 힘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준비할 것은 많지 않았다. 사원에 기부할 헌물, 적당한 하인 하나, 데려갈 호위 기사 정도였다.
베라는 곁에서 계속 우려를 표했지만, 카예나는 괜찮다고 타일렀다.
“좀 더 준비를 철저히 하여 내일 떠나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건 안 된다. 레제프가 소식을 듣고 그녀를 의심해 사람을 붙이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이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카예나는 후드를 쓰고 마차에 올랐다.
“밤은 쌀쌀하니 로브는 꼭 입으시고요.”
“알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렴.”
뒤에서 조용히 서 있는 올리비아를 향해서도 눈길을 마주쳐 주었다. 그녀는 자신을 배웅나온 시녀들에게 말했다.
“다녀오마.”
곧 마차가 황궁을 빠져나갔다.
카예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도에서도 외진 곳에 있는 작은 사원을 향해 달렸다. 그 사원은 빈민가 근처에 있는 곳이라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다. 다만 몇 가지 묘한 소문이 있어 귀부인들이 은밀하게 찾는 사원이었다.
‘그 사원이 영험할 수밖에.’
그곳은 마법사가 세간의 눈을 피해 숨어든 사원이다.
“도착했습니다.”
카예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눈앞의 고즈넉한 분위기의 사원을 잠시 바라보았다.
“오늘 방문을 요청하신 귀부인이십니까?”
그녀를 발견한 젊은 사제가 다가왔다.
“방문 요청은 하지 않았다네.”
생각보다 훨씬 어린 여자의 목소리를 듣게 되자 사제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로브 때문에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종종 이곳을 찾는 어느 귀부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예나는 로브의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사제와 눈을 마주쳤다. 젊은 사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 황녀 전하!”
그는 다급히 인사 올렸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반갑네.”
사제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의 인생에서 단연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곳 사원에 기부를 좀 할까 싶은데.”
잠깐 그녀의 미모에 넋을 놓았던 사제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사원의 입구로 달려갔다.
“들어오십시오, 전하.”
“고맙네.”
카예나는 젊은 사제에게 빙긋 웃어 주고 다시 모자를 깊이 뒤집어썼다. 사제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카예나가 사원 내부로 들어서자 차분한 목소리를 가진 고위 사제가 다가왔다. 인상이 인자하여 상당히 신실해 보이는 사제였다.
“이곳에 기부하고 싶네.”
고위 사제는 자연스러운 하대를 듣고는 빙긋 웃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녀는 데려온 하인에게 손짓했다. 하인이 손에 든 상자를 그에게 건넸다. 고위 사제가 미소로 물었다.
“기도를 올리시겠습니까?”
“물론이네.”
고위 사제는 카예나를 기도실로 안내했다.
“그럼, 신께서 굽어살피시기를.”
카예나는 하인과 기사들에게 로비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기사들은 이곳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순순히 로비로 물러났다.
기도실은 총 네 개가 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마지막 기도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카예나가 말했다.
“검은 정원의 주인이여, 그대와 거래를 하러 왔다.”
그러자 기도실 안의 나무 벽면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캐러멜처럼 부드러운 황갈색 머리칼과 옅은 갈색 눈동자의 미남이었다.
카예나는 마주하게 된 새로운 서브 남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바옐.”
정체불명의 상대에게 이름을 불린 바옐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카예나를 거칠게 붙잡았다. 그러자 카예나의 후드가 벗겨지며 눈부시게 밝은 금발과 파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바옐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넌 누구냐?”
카예나는 현실성 떨어지는 얼굴로 그림처럼 미소 지었다.
“그대에게서 장미를 받아 갈 사람.”
“……내가 그걸 들어주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바옐은 기가 찼다. 카예나가 장미를 맡겨 놓은 사람처럼 뻔뻔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당신도 내가 필요할 거야.”
그 뻔뻔함보다 훨씬 더 거슬리는 건, 뭐든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저 태도였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표정 그 이면에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방심하면 언제든 이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에게 집어 삼켜질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새로운 장미가 피지 않은 지 꽤 되었을 텐데?”
카예나의 말에 바옐은 흠칫 놀라며 그녀를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말았다. 아직 납치되었을 때 생긴 상처가 낫지 않았던 터라 그녀가 작게 신음했다.
“아파…….”
“아.”
바옐은 깜짝 놀라서 손을 얼른 떼어 냈다.
소매가 구겨진 걸 보니 생각보다 훨씬 강하게 잡은 모양이었다.
“……미안.”
“이 정도는 괜찮아.”
언제 인상을 찡그렸냐는 듯이 카예나는 다시 멀쩡한 얼굴을 했다. 무심히 말하는 뉘앙스가 워낙 묘했기에 바옐은 저도 모르게 카예나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이 정도는 괜찮다니.’
자신이 어느 정도 해를 입는 게 상관없다는 말인가?
비약적인 해석일 수 있지만, 바옐은 직감이 날카로운 편이다. 그는 카예나가 어쩐지 자기 파괴적인 일에 꽤 무감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위험해.’
생긴 건 아침 햇살에 이슬을 반짝이는 꽃 한 송이 같은데, 풍기는 분위기는 해가 뜨기 전의 짙은 새벽 같은 여자다.
하필 검은 정원의 존재를 이런 여자가 알고 있을 줄이야.
더불어 그녀가 말한 대로 바옐의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았다.
“이 거래는 서로에게 나쁠 것 없어. 난 마법의 힘을 손에 넣고 당신은 정원의 비료를 얻는 거잖아.”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마법의 힘을 손에 넣는 대가를 확실하게 아는 모양이었다.
바옐은 그녀를 다시금 찬찬히 살펴보았다.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만든 옷차림에 로브를 여민 브로치도 보석으로 꾸며져 있다. 귀한 집 자제일 것이 분명하다. 이런 여자가 심심풀이로 마법의 힘을 손에 넣을 리는 없다.
검은 정원의 주인과의 거래는 수명으로 등가 교환한다.
“조금이라도 쓸 만한 수준의 마법을 쓰려면 최소 수명 10년은 거래해야 한다. 그런데……”
“절반.”
“뭐?”
카예나는 빙긋 웃었다.
“내 수명 절반을 그대의 정원에 바치겠어.”
“제정신이 아니군.”
바옐의 말에 카예나는 그저 작게 웃고 말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이 제정신이었다면 레제프가 가질 황좌를 빼앗아 그의 오만을 벌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카예나는 그러기로 했다. 제정신이 아닐지언정, 이 일이 실패할 경우 자신이 파리목숨처럼 바스러질지언정.
그녀는 자신이 타고난 운명대로 살기로 했다. 악녀는 악녀답게 세상을 어지럽게 하면 된다. 어차피 상황이 원래대로 흘렀다면 그녀는 5년 이내에 요절했을 목숨이다. 성공한다면 더 오래 살 것이고 실패하면 더 일찍 죽게 되겠지.
‘그러니 이 정도면 상당히 합리적인 거래 아닌가.’
카예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 투자 대비 얻는 것이 컸다.
“당신도 그 정도의 수명을 가져야 정원을 다시 살릴 수 있을 텐데? 아니면 모자란 거야? 그럼 더…….”
“그만!”
아무렇지 않게 제 목숨을 치부해버리는 태도에 오히려 바옐이 질겁해서 말릴 정도였다.
“수명 절반은 남은 수명의 절반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았고 앞으로 남은 삶까지 포함해 절반이야.”
“알아.”
카예나의 총 수명이 70년이라면 그중 35년을 거래에 쓴단 뜻이다. 그럼 이제 20살이 될 그녀에게 남은 수명은 고작 15년이 된다. 사실상 시한부가 되는 것이다.
“더 필요한 거라도 있어?”
“지금 검은 정원의 주인에게 뭘 주겠다고 말하는 건가?”
그는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되물었다. 카예나의 머릿속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정신 마법이라도 걸어서 뒤져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부마 자리라도 줄 수 있는데. 아, 그런데 명의만 빌려줄 수 있어. 나 독신주의자라.”
카예나는 대수롭지 않게 이어서 말했다.
“…뭐라고?”
바옐은 보통 누군가를 놀라게 하는 사람이지, 놀라는 쪽의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 단 한 사람으로 인해 계속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
‘부마라면…….’
“나, 엘다임 제국의 황녀거든.”
바옐은 완전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럼 이 여자가 바로 그…….’
소문 자자한 황녀란 말인가?
죽음을 부르는 아름다움을 지닌 황녀 이야기라면 바옐도 들은 바가 있었다.
‘더 알 수가 없군.’
스스로 정체를 저렇게 밝혀 버렸는데도 오히려 그녀의 속을 더 알 수 없어졌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내 남편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남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음, 아마도.”
바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쩐지 자꾸만 이 여자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 같았다. 상대는 고작 아무런 힘도 없는 인간일 뿐인데도.
‘대체 검은 정원의 주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건지, 모르는 건지 파악할 수가 없군.’
검은 정원의 주인이 어떤 힘을 지녔는지 제대로 알고 있다면 이런 태평한 행동은 보일 수 없다.
“어떡할래? 지금 날 놓치면 향후 이런 계약을 하기가 어려울 텐데.”
심지어 마법의 힘을 원해 자신을 찾아온 주제에, 그에게 베풀어주듯 말하기까지 했다.
바옐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던 존재였다. 생과 사를 조율하는, 마법이라는 초현실적인 힘을 휘두르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며 마법은 사람들에게 잊힌 지 오래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오랫동안 계약자를 갖지 못했다. 마법의 정원은 비료를 주지 못하자 점차 힘이 약해지고 있었다.
바옐은 입술을 잘근 물고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카예나의 말에 따르기 싫었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통로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따라와.”
카예나는 바옐을 따라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걸어도 걸어도 길이 끝나지 않았다. 사원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음을 생각해본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이 사원이 이렇게 컸나.’
어쩌면 이것도 마법의 힘일 지도 모르겠다.
막다른 장소에서 바옐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통로 끝의 문이 활짝 열렸다.
카예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나타난 검은 화원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름다워…….”
검은 정원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정원에 피는 꽃이 전부 마력으로 피어난 검은 장미이기 때문이다.
카예나는 살아생전 이렇게 새카만 장미는 본 적이 없었다. 흑장미는 꽃잎이 검은 벨벳처럼 윤기가 있으면서도 완전히 새까맸다. 꽃잎 하나하나가 흑요석처럼 아름다웠다. 더 놀라운 건, 새까만 장미보다도 얼음 조각 같은 덩굴과 잎사귀였다.
“정말 마법의 화원이구나.”
카예나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광경은 마법이 아니고서야 절대 구현해내지 못할 터였다.
“여기까지 온 이상 당신은 나와 정말로 계약해야 해.”
검은 정원의 계약을 진행하면 이곳의 비밀을 발설할 수 없다.
“마법의 힘을 계승하는 과정은 상당히 고통스러울 거다.”
“그건 몰랐네.”
올리비아가 바옐의 힘을 계승한 순간에는 독으로 죽은 상태였다. 아마 올리비아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에서도 별다른 묘사는 없었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힘을 얻기 위해서이니.
“지금이라도 싫다고 하면 기억을 지우고 여기서 내보내 주지.”
카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봐야 어차피 난 이곳을 또 찾게 될 거야.”
그녀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확인한 바옐은 정원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유일하게 검은 꽃잎이 침범하지 않은 장소였는데, 바닥에 복잡한 문양이 패어 있었다.
“이곳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등을 보여. 표식을 새겨야 하니까.”
그녀는 장미 꽃잎을 사뿐사뿐 밟고 바옐이 가리킨 곳으로 다가섰다. 로브를 벗고 상의를 끌어내리자 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바옐은 시선을 슬쩍 피했다.
“마법 능력은 계약자가 가진 특성에 맞춰 개화할 거야. 자연의 힘이 될 수도 있고 치유의 힘이 될 수도 있지.”
카예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치유의 힘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건 모략에 크게 도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은신이나 자연계열의 마법이었다.
“선택권은 없을까?”
“없어. 그 사람이 살아온 생과 가진 재능은 보통 비슷한 편이니 걱정할 것 없어. 당신을 보면 누굴 치유할 사람은 아니거든.”
카예나는 피식 웃었다.
그의 눈은 놀라우리만큼 정확했다. 그녀의 모든 생은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일에 사용되었다. 심지어 회귀해 다시 돌아온 지금의 삶조차도.
“통찰력이 대단하네. 황궁에 자리라도 하나 펴줄까?”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꽤 궁금해졌다. 자신이 살아온 생에 맞춰 능력이 개화된다니.
“이제 계약을 시작하지.”
바옐이 말장난은 그만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카예나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지런히 넘겨 등을 드러냈다.
그녀는 마법진 중앙에 무릎을 꿇은 채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바옐이 뒤에서 자신도 무릎을 꿇고 카예나의 목 바로 아래쪽 등에 손가락을 대었다.
우웅!
바옐을 등진 채 정원을 멀거니 바라보던 카예나의 시선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바닥의 마법진이 빛나면서 검은 장미가 꽃잎을 우수수 떨어뜨리는 것이다!
‘마력을 잃어서 꽃잎이 떨어지는 거구나.’
처음엔 한 송이, 두 송이가 지더니 이젠 수십 송이, 수백 송이의 장미가 졌다. 바닥을 카펫처럼 메운 검은 꽃잎이 더욱 빽빽하게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고통은 없는데…….’
장미가 지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더니 이내 온전한 꽃이 드문드문 있을 때였다.
파아아-!
얼음 조각 같은 장미 덩굴이 빛을 뿜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잔잔한 호수에 인 파문처럼 검은 장미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
카예나는 생경한 고통에 숨이 턱 막혔다.
칼에 몸이 꿰뚫렸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끔찍한 통증이 전신을 난도질했다. 비명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찢기는 고통에 무너지듯 바닥을 짚었다. 확실한 건 제 몸에서 지금 사정없이 생명력을 빼앗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검은 장미는 카예나의 생명력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며 생생하게 꽃을 피워냈다. 그렇게 피어난 장미는 전보다 더 아름다운 빛깔을 내고 있었다. 마침내 그것들은 카예나가 정원에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많은 꽃을 피워냈다.
바옐은 놀란 얼굴로 주변을 보았다.
‘자, 잠깐. 뭐지? 장미가 이렇게 많이 필 리가 없는데.’
고작 2, 30년의 수명 정도로는 검은 정원의 모든 꽃을 다 피워낼 수 없다. 카예나의 수명이 몇백 년이나 될 리 없으니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여자, 설마…….’
한 사람이 피워낼 수 있는 수의 장미가 아니다.
바옐은 손이 새하얗게 변하도록 의식을 잃지 않으려 주먹을 꽉 쥐고 악쓰는 카예나를 바라보았다.
‘천명을 다하지 못한 삶이 있는 자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해.’
쉽게 말해서, 이 사람의 몸에 다른 생이 축적되어있다는 뜻이다. 그때 카예나가 더는 악으로 버티지 못하고 마법진 위에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검은 정원의 개화가 끝났다.
“허억…!”
그제야 카예나는 고통에 억눌린 숨을 토해냈다.
“끝났어.”
바옐은 카예나의 하얀 등에 피워낸 한 송이의 검은 장미를 바라보았다. 꽃은 바람결에 흔들리듯 살랑이더니 서서히 모습을 감췄다.
이 여자는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바옐은 자신이 생각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르는 사람과 계약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련하게 헛구역질하는 황녀를 애써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마법을 발현할 때는 등에 새긴 표식이 드러나니까 노출이 있는 옷은 피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나 카예나가 애처로웠다. 검은 정원을 새롭게 살려낼 정도의 수명을 빼앗기는 고통이라니, 죽고 싶었을 게 뻔했다.
카예나는 크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당신 말대로 꽤 아프네.”
생명력을 빼앗기는 감각은 끔찍했다. 밑바닥에서부터 촘촘한 칼날을 한가득 박은 빗으로 몸을 쓸어올린 듯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과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자 흐트러진 옷가지가 흘러내렸다. 바옐은 다급히 고개를 돌려야 했다.
카예나는 천천히 옷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잔류한 통증에 손이 덜덜 떨려 단추를 잠그지도 못했다.
그녀는 대충 앞섶을 여민 채로 야트막한 숨을 내쉬었다. 안일하게 생각했다. 아프다고 해도 일상생활은 가능할 정도일 거라고 멋대로 추측했다.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어.’
의식은 잃지 않았지만 두 다리로 일어서서 걸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져서 쉬어야 한다고 그녀를 비난해왔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너무 시간을 끌면 호위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곧 허물어지듯 휘청거렸다.
딱! 바옐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바닥에 깔린 검은 꽃잎이 스르르 모여 카예나를 들어 올렸다. 그것은 곧 긴 소파 모양으로 형태를 잡았다. 꽃잎은 푹신하게 카예나를 받쳐주었다.
“고마워.”
그녀는 창백한 얼굴에 부서질 듯한 미소를 걸치고 말했다.
“그런데, 능력이 뭔지 잘 모르겠는데, 나 사기당한 건 아니겠지……?”
카예나는 곧 죽을 것 같은 상태로 입은 살아 있었다.
바옐은 기가 차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그럴 정신이 있다는 게 더 놀랍군.”
카예나는 열에 달뜬 숨을 내쉬었다. 편하게 정신을 잃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수행원들에게 행적이 수상해 보여서는 안 된다. 의식이 가물가물한 카예나는 제 살을 아프게 꼬집고 손톱으로 긁으며 정신을 유지하려 했다.
바옐은 얼른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미쳤어?!”
그녀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이 손을 밀쳐내며 힘겹게 말했다.
“밖에서 내 수행원이,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 당장은 무리해야 했다.
바옐은 카예나가 더는 자해하지 못하도록 양 손목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옷소매를 늘려 손을 감싸고 그녀의 입안에 집어넣었다.
“윽!”
역시나 카예나는 입안의 살을 씹으려 했다. 바옐은 손에 피멍이 들도록 깨물렸으나 참았다.
카예나는 흐느적거리다가 이내 포기한 듯 축 늘어졌다.
바옐은 그제야 카예나가 악물고 있던 손을 치웠다.
“젠장.”
그는 정말 싫다는 표정으로 카예나를 노려보더니 옷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병마개를 이로 물어 벗겨내 카예나의 입술에 액체를 흘려 넣었다. 질끈 감은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흐릿했던 총기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이 황녀를 이렇게까지 혹독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거지?’
카예나가 버석 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엘릭서야…?”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타고나기를 마법사였던 것도 아닌 주제에 대체 엘릭서는 어떻게 아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쯤 되니 카예나니까 가능하겠단 생각도 들었다.
카예나는 온몸에 새로운 생기가 피어나는 느낌을 만끽하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마법사의 피로만 만들 수 있는 전설의 영약이 바로 ‘엘릭서’다. 그 귀한 것을 내주다니, 카예나는 생각지 못한 호의에 조금 얼떨떨해졌다.
“고마워. 착한 사람이네, 바옐.”
바옐은 카예나가 마치 사탕을 양보한 아이에게 말하듯 칭찬하자 미간을 와락 구겼다.
“이봐, 내가 당신보다 훨씬 오래 살았어.”
“하지만 나도 살 만큼 살았는걸?”
“아니…….”
바옐은 뭐라고 쏘아붙이려다 하얀 포말처럼 푸스스 웃는 카예나와 시선을 마주하자 말문이 턱 막혔다. 왜 저렇게 웃어서 사람 마음을 약하게 하는지……. 바옐은 시선을 돌렸다.
“…됐어.”
카예나가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거야?”
바옐은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카예나를 포박하듯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이건…!”
그가 불에 덴 듯 손을 떼자 카예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이 완벽히 멀쩡한 건 아니었지만, 아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확실히 괜찮아졌어.”
그때 문득 바옐의 손을 세게 깨문 것이 생각났다. 그의 손을 확인해보니 역시 손에 멍이 들어있었다.
“미안해. 이렇게 세게 깨문 줄 몰랐어.”
바옐은 붙잡힌 손을 슬그머니 빼내며 일부러 핀잔을 주듯 말했다.
“이 정도면 당신 입안의 살점이 다 뜯겼을 거야.”
카예나는 마른 웃음을 지었다.
“황궁에 돌아가면 가장 좋은 연고를 찾아내서 보내줄게.”
카예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습관이었다. 겉으로 뭔가를 드러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구는 게 바옐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소문대로 성질머리 나쁜 악녀였다면 나았을 텐데.
바옐은 괜히 툴툴거렸다.
“당신이 방금 마신 약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카예나는 옷을 제대로 여미고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등에 검은 장미가 있을 텐데 거울이 없으니 확인해 볼 수가 없었다.
바옐이 툭 말했다.
“천천히 감각에 집중해봐. 그럼 낯선 기운이 느껴질 거야.”
그의 말대로 감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대기 중에 생소한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불편하다거나 이질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럽고 편안했다. 물속에 부유할 때 느끼는 안정감과 비슷했다.
“그 기운이 시전자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발현해. 자신이 가진 능력이 뭔지는 사용하면서 깨쳐야 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운을 발현해보려 했다. 불꽃을 피운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파스스.
“으음.”
기운은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더니 힘없이 꺼졌다.
“하루는 지나야 자신이 어떤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느껴질 거야.”
“그렇구나.”
카예나는 별채를 빌려 능력을 확인한 후 황궁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까 상당한 액수를 기부했기에 사원의 별채를 대실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어.”
기도실로 도착 후, 카예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나가기 전, 그녀는 뒤에 선 바옐을 향해 고개를 돌려 빙긋 웃었다.
“또 봐, 바옐.”
바옐은 뭐라고 뾰족한 소리로 대꾸하지도 않고 통로를 닫아버렸다.
기도실 문이 닫히고 나서 카예나는 한걸음 떼자마자 몸을 휘청였다. 아직 회복이 완전하지 못했기에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고 기도실 통로를 벗어났다.
‘아직 긴장을 놓쳐서는 안 돼.’
카예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좁은 기도실 통로에서 벗어나자 시야가 탁 트였다. 스테인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색색의 빛에 눈앞이 살짝 어질했다. 그 빛에 의지해 안경을 쓴 채로 뭔가를 유심히 읽는 고위 사제가 보였다.
카예나는 붉은 입술을 떨어뜨렸다.
“데니안 사제.”
잘 정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제가 은은하게 웃는 낯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가 세례명을 말씀드렸던가요?”
말한 적 없다. 그저 카예나가 소설을 읽었기에 그의 세례명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카예나 역시 엷은 미소를 띠며 데니안 사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내 기부금이 이곳 사원에 도움이 될 정도면 좋겠는데.”
“신의 은총이 전하께 닿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게 내어줄 별채도 준비했다고 봐도 되겠지?”
카예나의 요구에 데니안 사제가 퍽 난처하게 말했다.
“관리가 미흡하여 황녀 전하께 내어드리기가 염려스럽습니다만…….”
‘루든 시종장이든 데니안 사제든 이 동네 영감들은 하나같이 너구리 같군.’
이 사원이 영험하다고 알려진 이후로 귀부인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헌납했겠는가. 그 돈으로 별채를 말끔하게 정돈해놓는 건 일도 아니었을 거다.
그러나 그는 사제나 하인을 아주 최소한만 데리고 있었다. 별채는 아예 이용하겠다는 소리도 나오지 않게 방치했다. 이 사원에 사람이 머물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바옐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면 그래야겠지.’
“내가 사원의 청렴함을 이해하지 못할 이로 보이는가?”
너희 사원에 돈이 없어서 그런 줄로 알고 넘어갈 테니 별채를 내놓으라는 말에 데니안 사제가 입꼬리를 늘렸다. 참으로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이라고 생각하며 카예나 역시 무구하게 웃었다.
“그럼 별채로 모시겠습니다.”
데니안 사제와 함께 걸어나가니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행원들이 뒤를 따랐다. 그녀의 걸음이 마차가 아니라 사원의 별채로 향하자 기사들이 동요했다.
“황궁에 돌아가시는 게 아닙니까?”
카예나는 여상스럽게 말했다.
“고작 하루 정도 기도를 올려서야 신께 내 뜻이 닿겠느냐?”
그들은 상당히 곤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카예나는 자비를 베풀어주는 태도로 말했다.
“황궁에 들러 채비해오너라.”
“감사합니다.”
카예나는 다시 뒤뜰의 별채로 향했다.
“머무시는 동안에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원의 식사가 황족의 성에 찰 리 없다. 황녀라면 한 끼에 금화를 지불하는 레스토랑을 가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원에서 해결하겠네.”
데니안 사제는 예상했던 것과 다른 대답을 들어서인지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무리할 건 없네. 견과류가 든 것만 아니면 되니까.”
“그리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데니안 사제는 별채 입구에 다다르자 공손히 인사하고는 사원으로 되돌아갔다.
하인이 앞장서서 문을 열고 내부를 살피고는 카예나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얀.”
이름을 불린 하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제 이름을 카예나가 알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너는 저 방을 쓰거라. 그리고 난 입맛이 없으니 저녁은 너만 먹도록 해라.”
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내가 너를 부르기 전까진 따로 내 시중을 들 필요 없다.”
혼자 침실에 남게 된 카예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며칠 밤을 지새운 사람처럼 머리가 지끈거리고 피로했다.
옷을 잡아 뜯다시피 하여 벗은 카예나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낯선 기운이 손가락을 타고 넘실거렸다.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이었다.
이게 바로 마법의 힘이다. 카예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대성공이네.”
손이 힘없이 떨어지고 의식이 깊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