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14
악녀는 마리오네트 13장.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의 제안(14/33)
13장.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의 제안
레제프는 무사히 복권했다. 내명부의 권한도 다시 그에게 옮겨갔다. 레제프는 도티 부인에게 언제든 입궁할 준비를 해두라고 명했다.
“날씨가 따사로우니 조금 가볍게 단장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외출을 위해 몸단장 시중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라.”
황금 들녘 같은 머리칼을 단정하게 넘기고 새하얀 실크 셔츠를 입었다. 인물이 워낙 뛰어나고 몸매가 좋으니 조금만 손보아도 근사한 태가 물씬 났다.
시중 하인들은 그의 모습을 힐끔 훔쳐보며 외모 하나는 카예나 못지않게 화려하다고 생각했다. 성격만 좀 더 일반적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황자 전하, 방금 입궁한 전령이 독대를 청합니다.”
“들어오라고 해.”
그는 제게 독대를 요청한 전령만 남기고 하인을 모두 내보냈다.
“보고해.”
호위기사는 레제프의 비밀 수행원이기도 하다. 그는 클로렌스 엘리반을 처리하라는 명을 받고 그 일을 수행하고 온 참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그 여자는 자결한 것으로 위장해 처리했습니다.”
속이 메스꺼워질 정도로 담담한 어조였다. 이런 살인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익숙한 태도였다. 그는 부하의 보고를 받으며 금사로 수놓은 재킷을 착용하며 어울리는 장신구를 찼다.
수행원은 이번에는 조금 경직한 채로 보고를 이었다.
“그런데 일찍이 클로렌스 엘리반을 감시하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현장을 덮치는 바람에 유서 조작은 할 수 없었습니다.”
레제프는 오늘 장신구를 루비로 할지, 페리도트로 할지 고민했다. 루비는 라파엘로의 눈동자가 떠올라 영 재수가 없었다. 페리도트를 착용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들 무리가 저를 뒤쫓았습니다만 다행히 수도에 진입하기 전에 따돌릴 수 있었습니다.”
몸단장을 끝마친 레제프는 거울로 제 모습을 확인해보았다. 아직 앳돼 보이지만 185cm의 큰 키와 꾸준한 훈련으로 단련한 몸 덕분인지 나약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수행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방 카펫이 왜 항상 진한 붉은색 아니면 검은색인 줄 아느냐?”
뜬금없는 말에 수행원이 무심결에 바닥을 보았다. 붉은 바탕에 검은 무늬가 화려하게 들어간 카펫이 눈에 들어왔다.
레제프가 서늘하게 웃었다.
“너 같은 쓸모없는 벌레를 언제든 내 손으로 처리하기 위함이다.”
촤악-!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수행원의 목을 베었다. 피가 카펫을 적셨다. 레제프는 거울을 다시 보았다. 하얀 셔츠에 기어이 붉은 피가 튀었다.
“이래서 내가 흰옷은 잘 안 입는다니까.”
혀를 끌끌 차며 시종들을 불렀다. 그들은 시체를 발견하고 흠칫했으나 능숙하게 카펫으로 그것을 말아 치웠다.
“보좌관을 불러와.”
“예, 전하.”
피가 튄 셔츠를 갈아입을 동안 그의 보좌관이 도착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레제프는 하인들이 시체를 들고 모두 나가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부황의 용태는 어떠하더냐?”
보좌관은 고개를 조아렸다.
“의원의 말로는 급격히 기력이 쇠하셨답니다. 요즘은 눈을 뜨고 있을 때보다 감고 지내는 날이 부쩍 늘었다고도 했습니다.”
“조만간이겠구나.”
그의 여상스러운 대꾸에 보좌관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그런데 누님은 갑자기 사원으로 가셨다고?”
“그렇습니다.”
누이는 라파엘로를 만나고 나서 갑자기 부황을 찾더니 곧장 사원으로 출발해버렸다.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어느 사원으로 가셨느냐?”
“수도 외곽의 판자촌 근처에 있는 오래된 사원이라고 들었습니다.”
“대사원도 아니고 그런 사원에 갈 이유가 뭐지?”
보좌관은 조금 민망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그 사원이 아이를 갖게 해주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레제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보좌관이 덧붙였다.
“좋은 혼처가 들어오게 해주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하.”
그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조금 짜증도 치밀었다. 누이는 결혼에 대한 열망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카예나는 그의 유일한 누이로서 황궁에 머물러 있는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린다.
“알았다. 일단 나가지.”
레제프는 오늘 카트린 린드버그를 만날 생각이었다.
* * *
마차는 린드버그 저택에서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그는 마차에서 내리며 저택의 꼴을 보고 조소했다.
“이게 부황의 정부가 사는 집이라고?”
생각보다 더 형편없었다. 귀족이 아니라 평범한 젠트리 계급이나 살 법한 저택이었다.
‘부황이 병상에 누운 이후로 양측 세력이 착실히 견제한 결과인가.’
분수에 잘 맞는 모습이었다. 저택의 하인이 레제프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인은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레이디 카트린을 만나러 왔다. 안에다 알려라.”
그는 어리둥절했다. 오늘 황자가 이곳으로 방문한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레제프는 하인이 꾸물거리자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인의 목을 칠지 고민할 때였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고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니 수수한 차림의 나이 든 귀부인이 그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칼에 흑요석 같은 눈동자의 미인, 카트린 린드버그였다.
“반갑습니다, 레이디 카트린.”
레제프는 대외적으로는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애라고 불려야 할 그녀를 점잖게 불렀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십시오.”
카트린은 레제프의 나이가 고작 18살에 불과했으나 방심하지 않았다. 그녀의 초빙에 레제프는 당연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거만하게 앉으며 보좌관에게 손짓했다.
“일전에 서신을 하나 보냈는데 답변이 없어서 직접 방문했습니다.”
며칠 전, 레제프에게서 한 통의 서신이 도착했다. 카트린은 서신의 내용을 떠올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신을 하멜 백작가의 수양딸로 입적시키겠다는 서신이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전하.”
“그야 언제까지 아무 힘도 없는 린드버그 가에 매여 있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레제프가 덧붙여 말했다.
“부황께서 계속 당신과 당신 아들을 보호해 주지는 못할 겁니다. 뭐, 지금도 이미 그런 것 같지만요.”
테이블에 서류가 놓였다.
“여기에 서명만 하면 됩니다. 대사원에서 당장 공증해주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으니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아니, 카트린에게는 더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하멜 백작가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다. 그곳은 이델을 보호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델은 항상 엉망이 된 꼴로 집에 돌아왔다. 그는 씩 웃으며 씩씩하게 자신을 귀찮게 구는 녀석들을 손봐주었다고 말했다.
카트린은 그런 아들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좀 더 쓸모있는 어미였다면 그 아이가 그렇게 다칠 일은 없었을 텐데.
누가 뭐래도 이델은 황제의 아들이다. 황제가 제대로 된 영향력을 갖췄던 시절엔 자신도, 아들도 황족처럼 대우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언제 거슬린다고 제거될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제대로 된 대우를 받으며 편안하게 살면 됩니다. 선황후 폐하의 외가는 곧 내 외가이기도 하니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멜 백작가에 복속되지 않으면 문제가 될 거라는 뜻이었다. 카트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선택권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녀가 순순히 서명을 마치자 레제프는 매끄럽게 웃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레이디 카트린 하멜.”
레제프가 데려온 하인들이 줄줄이 패물이 담긴 상자를 내려놓았다.
“이건 제 성의이니 받아두십시오.”
그는 서류를 챙기며 일어났다. 이런 누추한 곳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저택 밖으로 나가자 은빛 머리칼의 어린 소년과 마주쳤다. 누이를 닮은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에스테반 황제를 닮은 얼굴이었다.
이델은 레제프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그의 외모와 차림새, 이끄는 수행원들의 복장을 보고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는 레제프 황자가 왜 자신의 집에서 나오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전에 누님…은 나를 동생으로 인정하셨지. 황실과 정식으로 교류가 시작되려는 걸까?’
모종의 기대감으로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이제 안정된 삶이 시작되려는 걸지도 모른다. 그럼 눈앞의 황자가 제 형님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는 레제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랑 별로 닮진 않았네.’
카예나는 첫눈에도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레제프는 뭔가 이상했다. 그에게도 절반은 같은 피가 흐를 게 분명한데 자신과 닮은 점을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델은 얼마 전 카예나가 납치되었던 사건을 들었던지라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누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누님?”
“아, 네. 카예나 전하 말입니다.”
순간 레제프는 언뜻 보고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카예나가 아카데미에서 이복동생을 감싸주었다는 보고였다.
그는 제 키의 절반만 한 이델을 내려다보며 성큼 다가섰다. 이델은 그에게 위압감을 느끼고 물러나려 했으나 레제프가 더 빨랐다.
레제프는 손을 뻗어 이델의 얼굴을 콱 움켜잡았다.
“으윽!”
멀리서 볼 땐 마냥 선한 인상으로 보였던 황자를 가까이서 보니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이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누님은 참 아름다우시지.”
“…….”
“어질고 다정하고 강인하지.”
양 볼이 그의 손아귀에서 자비 없이 짓눌렸다.
“감히 황자도 아닌 너 따위가 누님이라고 불러도 될 분이 아니란 뜻이다.”
이델은 반발심 가득한 눈빛으로 레제프를 노려보았다. 레제프는 가소롭다는 얼굴로 비웃었다.
“분수에 맞게 행동하거라.”
네가 사는 이 저택처럼.
레제프는 이델을 옆으로 치워버리듯 거칠게 놓고 마차로 향했다. 다음으로 할 일은 부황을 만나는 것이었다.
* * *
“폐하, 레제프 황자 전하께서 알현을 요청하였습니다.”
레제프는 열린 문이 닫히기도 전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힌 소자를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황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레제프를 내려다보았다.
“정녕 참회하였느냐?”
그는 레제프를 잘 알았기에 그가 진심으로 제 잘못을 뉘우쳤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 부족함으로 부황의 옥체를 상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는 처연하게 떨구었던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이 불효를 씻기 위한 방도를 고민해보았습니다. 하여, 레이디 카트린을 하멜 백작가 수양딸로 입적하면 어떨까 합니다.”
그의 수행원이 황제의 시종을 향해 상자를 내밀었다. 루든 시종장이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황제에게 전달했다.
그 안엔 카트린을 하멜 백작가의 수양딸로 들이겠다는 내용이 담긴 서류가 있었다. 황제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하멜 백작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하멜 백작가는 선황후의 친정이었다. 또한 하멜 백작에게는 딸이 죽은 선황후 하나 뿐이었는데, 레제프가 자신의 정부인 카트린을 그 백작가의 양녀로 들인 것이다. 비단 하멜 백작가만이 아니라 레제프의 세력도 원치 않을 결정이다.
‘카예나인가…….’
정황은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제프가 순순히 그 말을 따른 것도 놀랍군.’
그만큼 그에게 카예나가 끼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리라.
‘카예나가 좀 더 일찍 정신 차렸더라면 제왕의 자리는 그 아이의 것이었을 텐데.’
황제는 탄식을 삼켰다. 어차피 모든 것을 어그러뜨리기로 마음먹었으니 후회는 늦었다. 자신은 선황후의 자식이 행복하길 바라지 않았고 그녀의 정부를 처단하고 싶었다. 인제와 돌이킬 수 있는 일은 없다.
레제프는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국의 주인이신 폐하께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일개 신하인 하멜 백작가도 따라야지요.”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로 들어온 진상품들이 있었지. 황자궁으로 보내거라.”
“감사합니다.”
그때 황제가 기침을 토하자 의원이 이만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휴식할 것을 권했다.
“그럼 물러나 보겠습니다.”
레제프는 인사를 올리고 황제의 침소에서 나왔다.
황제가 여전히 카트린을 아끼고 있다는 건 방금의 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누님의 말에도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순순히 물러나는군. 그만큼 정부가 소중하다는 건가.’
굳이 제게 보상을 내린 것은 휴전 협상과 비슷한 의미였다.
“미인을 탐하는 자는 몰락하기 마련이지.”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단 멍청한 말은 대체 누가 만들어줬는지 고마울 지경이었다. 덕분에 레제프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손쉽게 넣을 수 있었다. 그게 땅이든 금이든 혹은 누군가의 목숨이든.
“내가 어서 황위를 물려받아야 할 텐데…….”
그래야 건방지게 제 것을 넘보는 것들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
“헨버튼 길리안은 어떻게 되었지?”
“키드레이 공작가에서 헨버튼을 제적했다고 전달해왔습니다. 길리안 자작가도 진상 조사에 들어가 작위를 몰수할 생각인 듯합니다.”
“군마 사업을 삼키지 못한 건 아깝네…….”
레제프는 혀를 차다가 황녀궁 근처에서 우뚝 멈추었다.
“사원에 따라간 호위 중 말을 옮겨줄 이가 있느냐?”
“염려 마십시오. 모두 저희 쪽 사람입니다.”
보좌관의 장담대로 카예나를 따라갔던 기사 하나가 황궁에 오자마자 상황을 보고했다.
“기도를 올리시고 피곤하신지 바로 잠드셨습니다. 방에 창문은 있으나 내부에서 혼자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나 높이는 아닙니다.”
사원에 기도 올리는 게 핑계에 불과하고 누군가를 만나려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들어보니 진짜 기도를 올리러 간 건가 헷갈렸다.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단순히 기도하러 간 모양새이니 제재할 수도 없었다.
“누구와 접촉하거나 별채를 나가는지 꼼꼼하게 확인하도록 해.”
“명을 받듭니다.”
* * *
카예나가 눈을 뜬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창으로 조용히 햇살이 비치며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세계에 돌아온 후 홀로 맞는 가장 안온한 아침이었다.
‘이제 하인리히의 귀에 내가 이 사원에 머문다는 소식이 들어갔을 테지.’
이 사원 뒤편으로 나가면 판자촌이 나온다. 판자촌으로 들어서기 전에 작은 여관이 있다. 하인리히 대공자가 운영하는 청부업체였다.
‘사원에 침입하는 미친 짓을 할 이는 잘 없지만, 예이스터는 할 수도 있겠지.’
카예나는 오늘도 황궁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부디 날 위험에 빠뜨려줬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얕은 두통이 남아 있었지만, 그럭저럭 무시할 정도였다.
딸랑! 설렁줄을 당기니 곧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렴.”
문이 열리고 얀이 들어와 예를 올렸다. 카예나는 그가 할 일을 지시했다.
“목욕물을 준비해다오. 끝나면 식사도 할 것이다.”
따뜻한 물로 욕조를 채우기까지 기다릴 동안, 카예나는 속 드레스를 벗고 새하얀 나신을 드러냈다. 풍성한 금빛 머리카락을 앞으로 그러모으고 방에 마련된 거울로 다가가 등을 비춰보았다.
등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희고 매끄러웠다. 마법을 쓰면 이 하얀 등에 검은 장미가 피어날 것이다. 카예나는 어제처럼 새로운 기운을 느껴보았다.
‘이걸 마나라고 했던가.’
몸이 살짝 부유하는 느낌이 들면서 곧 부드럽고 청명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카예나는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어제 벗어놓은 드레스를 공중으로 일으켜보았다.
툭. 허공에 살짝 들어 올렸던 옷가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형편없네.”
마법이라고 하여 자신이 불덩이를 쏘거나 눈보라를 일으키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염력이라니. 조금 아쉬운 능력이었다.
‘뭐,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건 천재지변을 일으킬 힘이 아니라 약간의 조작 같은 거니까.’
카예나는 아쉬움을 털어냈다.
마법을 쓰니 등에 선명한 검은 장미 한 송이가 피어났다. 이 세계에서 장미는 ‘위험’을 뜻했다. 어느 소설에서 위기를 암시하는 매개로 보라색, 비를 사용하지 않던가. 이곳에선 위험, 위기를 암시하는 오브젝트가 바로 장미다.
카예나는 항상 장미에 비유되었고 바옐은 검은 장미 정원의 주인이었다. 그들은 여주인공인 올리비아의 죽음에 개입되기도 했다.
“이로써 완전한 위험이 된 건가?”
카예나가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기다리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목욕물이 준비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씻고 젖은 머리칼을 마른 천으로 대충 감싸놓았다. 머리를 말려줄 시중 하녀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시중 없이 혼자서 뭔가를 해결하는 건 오랜만이네.’
방에는 아침 식사가 놓여있었다. 전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쓰러져 누운 뒤 먹는 첫 끼였다.
카예나는 식사를 마치고 홀로 남은 방에서 또다시 마법을 연습했다. 아기가 처음 두 다리로 일어서서 걸음을 떼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이 필요하던가. 마법 훈련이 딱 그러했다.
방 안은 이윽고 여러 가지 물건이 허공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카예나는 벗어놓은 드레스가 사람이 입은 것처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댄스파트너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여자의 모습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써 꽤 능숙하게 힘을 다루는군.”
등 뒤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카예나는 고개만 살짝 돌려 상대를 바라보았다.
“내가 마법을 잘 쓰는지 봐주러 온 거야? 친절도 하여라.”
바옐이 창가로 비쳐드는 햇살 아래에 우뚝 서 있었다. 카예나는 드레스를 빙글빙글 움직여 바옐의 앞에 세웠다. 댄스파트너를 향해 인사하는 것처럼 예를 올리게 했다.
그는 제 앞에서 사람인 척 움직이는 드레스를 보며 말했다.
“이런 걸 이미지화하기가 쉽지 않은데.”
마법은 이미지를 실현해내는 일이라 상상력이 풍부할수록 유리하다. 카예나는 여자일 때 각종 매체를 통해 습득한 것들이 있어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바옐은 귀찮게 치근대는 드레스를 밀치고 카예나가 앉은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말로 운을 뗄까 고민하던 그는 카예나의 차림을 보고 물었다.
“황녀라면서 옷이 왜 그래?”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일국의 황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수수했다.
“황녀가 입는 옷은 보통 시중 없인 입고 벗을 수 없거든.”
그녀는 여벌의 옷으로 블라우스와 롱스커트를 준비했었다. 옷 모양이 단순하고 여밈이 적어 혼자서도 쉽게 입고 벗을 수 있었다.
“아니면 당신이 내 시중을 들어줄래? 미리 신랑수업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내가 왜…!”
“농담이야.”
바옐은 너무나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렸다.
카예나는 그가 기막혀하는 것엔 관심 없었다.
“밖에 내 호위기사들이 있을 텐데 이렇게 소리쳐도 괜찮아? 당신이야 마법으로 도망칠 수 있겠지만 난 꽤 난처해지거든.”
“밖에선 아무 소리도 못 듣게 해놨으니 걱정할 거 없어.”
과연 검은 정원의 주인다운 능력이었다.
“대단하네. 난 수명 절반으로 염력을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인데.”
‘원래라면 이렇게 많은 물건을 단시간에 제각각 움직이지 못한다고.’
물건을 몽땅 들어 올리거나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건 획일적이라 비교적 간단하다. 하지만 이렇게 각자 다르게 움직이게 하는 건 대단한 재능이었다. 특히 그를 귀찮게 했던 드레스는 진짜 사람처럼 섬세하게 움직이기까지 했다.
바옐은 그녀가 참 이상한 황녀라고 생각했다. 황족답지 않은 묘한 소탈함도 이상했다. 검은 정원의 주인에 대해 잘 안다고 해도 황족이라면 그의 방만함에 불만을 품을 수도 있다.
또한, 이 사원을 인질로 잡아 그를 몰아붙여 억지로 무릎을 꿇리려 할 수도 있다. 물론 초월자인 그를 인간이 사로잡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마법사를 숨겨준 사원이니 당장 불타도 할 말이 없지.’
그게 보통의 지배계층이 택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카예나는 달랐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 같잖아.’
무덤덤한 척하지만 처연해 보였다. 그게 신경에 거슬렸다.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젖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카예나에게선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황족은 원래 다 이렇게 생긴 건가.’
희고 매끄러운 피부와 칠하지 않았음에도 보기 좋게 붉은 입술에 바옐은 자꾸 눈으로 그녀를 좇았다. 바옐은 카예나의 중독적인 미모에 혀를 찼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보통 끝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검은 정원의 힘을 원한 건가.’
“몸은 좀 어때?”
카예나는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습관적인 미소를 지었다.
“멀쩡해.”
그럴 리가 없었다. 수명 10년만 줄어도 아주 심한 경우엔 평생 잔병치레를 해야 한다. 카예나는 자그마치 수명 절반이 줄어들었다. 고작 엘릭서 한 방울로는 몸이 받은 타격을 다 회복할 수 없다.
“한순간에 수명이 절반이나 줄었어. 그냥 반쯤 덜 살게 되는 그런 의미가 아니야.”
면역력이든 기력이든 제법 떨어졌을 게 분명하다. 극심한 타격을 입어 쇠약해진 몸은 꽤 오랜 시간을 정양해야 제대로 회복할 터였다. 당장 좀 괜찮아졌다고 해서 진짜 멀쩡해지는 게 아니었다.
“황궁으로 들어오는 온갖 진귀한 게 다 내 것인데 걱정도 많지. 다른 이들보단 훨씬 건강하게 살 거야.”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러나저러나 카예나의 생각은 변함없었다.
‘마법의 힘이 아니면 날 지킬 수단 따윈 없어.’
냉혹할 정도로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카예나의 말에 어린 냉기를 바옐은 알아차렸다. 어제부터 이상하리만큼 카예나가 신경 쓰였다. 억지로 의식을 유지하려 무리하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꼭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처럼 보였다.
“뭔가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모양인데, 당신 정도면 도와줄 사람도 많지 않아?”
도와줄 사람이라.
카예나는 라파엘로를 떠올렸다. 엘리반 부인의 부고를 전하며 자신을 위로했던, 그리고 자신에게 또 손을 내밀었던 그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카예나는 이제 시한부나 다름없다.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른다. 그런 자신이 앞길 창창한 라파엘로의 발목을 붙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황좌를 쟁탈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지저분한 일에 그를 끌어들일 수 없었다.
“글쎄.”
카예나는 대답을 회피하며 괜히 드레스를 움직여 또 바옐을 귀찮게 했다.
바옐은 못마땅한 얼굴로 드레스를 허물어뜨리려 했다. 염력은 낮은 단계의 마법 재능이기에 작은 힘으로 흩어버릴 수 있다. 그런데 드레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살랑거리며 그를 귀찮게 했다.
‘뭐지?’
당혹스러웠다. 그는 염력을 차단해보았다.
염력은 쉽게 말해서 마치 보이지 않는 손으로 꼭두각시를 조종하듯 물건을 들어 올리는 능력이다. 기운을 차단하면 드레스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 움직이지 못해야 한다. 그러나 드레스는 여전히 살랑살랑 움직였다.
‘염력이 아니야?’
염력이 아닌데 지금 이 방의 물건들이 어떻게 다 허공에 떠 있을 수가 있지? 마치 공간에 지배당한 것처럼……!
바옐은 두 눈을 부릅뜨고 카예나를 휙 돌아보았다.
‘설마 공간 지배 마법인가?’
말도 안 된다. 그건 일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공간 지배 마법을 최상으로 발현하면 시간을 멈출 수도 있어.’
가령 뭔가를 잘라내고 다시 붙여넣기를 하는 식으로 공간을 편집하는 것이다.
바옐은 카예나의 정확한 능력을 알아내고자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카예나가 의아하게 돌아보는 순간, 그는 낯선 기척을 느끼고는 문밖을 바라보았다.
“…누가 오고 있어.”
바옐은 카예나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잠시 눈을 깜빡이며 황당해할 때였다.
똑똑.
바옐의 말대로 밖에서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카예나는 순간 표정이 굳었으나 능숙하게 회복했다. 그녀는 마법을 풀어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고 직접 문을 열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키드레이 공작 각하의 보좌관, 제레미입니다.”
이곳에서 마주치리라고 생각지 못한 인물이었다. 제레미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말은 높은 확률로 라파엘로도 왔다는 말이었다.
카예나는 우선 그와 마주 인사해주었다.
“반갑네, 제레미 경.”
“제 주인님께서 이곳 사원을 방문하게 되어 미리 머물고 계시는 황녀 전하께 인사를 드립니다.”
라파엘로가 아기를 갖게 해주는 사원에 방문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하여튼 행동력하고는…….’
그는 결정과 실행의 간극이 거의 없었다. 카예나가 이곳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앞뒤 재지 않고 온 모양이었다.
“아직 정찬 전이시라고 들었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키드레이 가문에서 전하를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그럴듯한 핑계도 미리 준비해오다니, 앞뒤는 재지 않아도 작정은 한 듯했다.
“알겠네.”
“그럼 준비되시면…….”
“바로 나가지.”
제레미는 살짝 당황했다. 카예나의 차림은 아무리 보아도 세도가의 아들을 만날 때 적절한 것은 아니었다.
‘시녀를 다 두고 오신 건가?’
머리카락은 완전히 다 마른 상태도 아니었다. 전국에 있는 모든 아가씨에게 지금 카예나가 한 모습으로 라파엘로를 만나라고 하면 백이면 백 대경실색할 것이다. 물론 카예나는 그런 치장 없이도 정신이 아득해지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별채 문을 열고 나가자 뒤뜰 한가운데에 선 라파엘로의 뒷모습이 보였다. 카예나는 솔직히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동시에 안정감도 느꼈다. 그녀는 인정했다.
라파엘로를 보게 되어 기쁘다.
그가 자신을 찾아왔단 사실이 기쁘다.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인님.”
제레미의 부름에 라파엘로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문학 살롱을 드나드는 귀공자처럼 온화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카예나의 손등에 키스했다. 입술을 떨어뜨린 라파엘로는 퍽 뻔뻔스러운 낯으로 태연하게 인사말을 전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카예나의 얼굴은 단 하루 사이에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척해졌다. 그녀의 호위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라파엘로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전날, 유모의 부고를 알리고 나서 카예나는 멀쩡한 척했지만, 명백히 평소와 달랐다. 게다가 그 소식을 들은 직후 행한 일이 바로 이 사원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사원의 위치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뒤편은 판자촌인 데다가 원래도 치안이 좋지 않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이 사원에 뭐가 있는 건가?’
어쨌든 뭐가 되었든 카예나는 뭔가를 획책하고 있다. 그의 감이 그렇게 말해주었다.
카예나는 놀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간신히 미소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라파엘로는 시선을 돌려 사원을 한번 훑었다.
누가 봐도 이 사원에 관심 있어서 온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예. 이곳이 꽤 영험하다기에 궁금해서 방문해보았습니다.”
그 영험함은 라파엘로와는 관련은 없었다. 카예나는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 사원이 어떤 곳인지 아시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기를 갖게 해주는 사원이라고 들었습니다.”
“쿨럭!”
곁을 지키고 있던 제레미가 라파엘로의 직설적인 발언에 깜짝 놀라 기침을 토했다. 해석에 따라 상당히 야릇한 의미를 내포할 것 같은 말이었다.
“물론 그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결혼을 잘 하게 해주는 것으로도 유명해요.”
결혼이란 말에 라파엘로의 눈이 일순간 가늘어졌다. 그는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호위들의 시선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사원의 다이닝 룸을 빌려두었습니다. 준비를 마쳐두었으니 바로 가셔도 무방합니다.”
라파엘로는 자연스럽게 카예나의 손을 고쳐 쥐었다. 그는 누가 보아도 그녀에게 이성적으로 관심 있는 남자처럼 보였다.
카예나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그 작은 반항을 느끼며 라파엘로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순순히 라파엘로의 에스코트를 따라 사원을 거닐었다.
“수행원의 몫은 따로 준비했습니다.”
카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위기사가 다이닝 룸에 따라오지 못하도록 식사하며 쉬라고 명했다. 그들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가 명대로 떨어졌다.
‘얼른 레제프에게 고해바치고 싶겠지.’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이 데려온 호위기사들이 레제프의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다이닝 룸에 들어서자 그가 데려온 하인들이 접시 덮개를 모두 열었다. 카예나는 라파엘로가 빼준 의자에 앉으며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식기를 들기 전에 물어보고 싶었다.
“곤란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절 이곳에서 찾으셨나요?”
당연한 물음이었다. 결혼할 사이도 아닌 그들이 이런 곳에서 밀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괜찮습니다. 그러는 편이 더 그럴듯해 보이리라고 생각하고 왔으니까요.”
라파엘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전하께서 진짜 기도를 위해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눈치 빠른 자들이라면 뭔가 다른 일이 있다고 여길 겁니다.”
카예나는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러니 저와 이곳에서 데이트라도 즐기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는 게 외부에 더 설득력 있어 보일 겁니다.”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려 일부러 왔다는 말이었다. 대단히 고마운 호의지만, 역시 이건 지나쳤다. 카예나는 자신의 불행에 라파엘로가 휘말리지 않았으면 했다.
그때 라파엘로가 덧붙였다.
“그리고 전하께서 가짜 남편을 만들어달라고 하신 말씀의 구체적인 방안을 들을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카예나는 충분히 납득간다는 표정으로 경계심을 풀었다. 사실 라파엘로는 그녀의 가짜 남편에 대해 조금도 관심 없었다. 이곳을 온 이유는 오로지 카예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 속내를 알게 된다면 매정하게 잘라내겠지.’
그래서 핑계를 댔다. 이렇게 말하면 카예나는 납득하리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알았다.
카예나는 잠깐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자신의 목적이 바뀌었으니 더는 가짜 남편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불을 보고 뛰어드는 어리석은 부나방처럼 불가능할지도 모를 일에 달려들 생각이었다.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운명을 들이받을 작정이었다. 어리석은 인형이 아닌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카예나는 씁쓸한 미소를 베어 물며 말했다.
“서부 공작령의 국경선 너머로는 많은 왕국이 있죠. 바로 옆에는 왕이 없는 도시, 하임벨도 있고요.”
하임벨은 원래 마드레나 왕국의 도시다. 마드레나 왕국은 봉건제도로 영주와 제후를 봉했다. 그러다 왕국의 몰락으로 소속이 모호해졌다. 그 도시의 위치는 마침 엘다임 제국과 율령국을 가르는 양측 국경선과 맞닿아 있었다. 하임벨이 여전히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양측 강대국의 눈치싸움 때문이었다.
“하임벨의 영주는 활개 치는 야만족을 물리치기가 힘겹다고 느꼈을 거예요. 왕이 없는 도시가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요?”
사실 이만큼 버틴 것도 용한 일이었다. 하임벨 영주는 충분히 몸값을 부를 수 있을 때 어디론가 팔아넘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키드레이 공작가의 후계자가 서부 국경선을 단번에 정리해버리는 걸 본 것이다.
“하임벨이 제 영토로 복속되길 원한다고 보십니까?”
“물론이에요.”
“하지만 그 도시는 율령국에서도 탐낼 만큼 먹음직스러운 파이입니다.”
동대륙과 서대륙 사이의 교역 중심지이며, 인구도 많고 조선술도 뛰어나다.
“공작령에서 그 도시를 제값에 사면 파산할 겁니다.”
카예나는 당연히 제값에 사게 할 생각이 없었다.
“살고 싶으면 그저 공작가의 가신으로만 받아달라며 국경선을 뛰어넘을 거예요.”
“…….”
그렇다는 말은, 카예나가 하임벨 영주를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의심할 것 없이 못 이기는 척 그를 받으시면 됩니다.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하임벨을 공짜로 가지게 되었을 때 키드레이 공작가의 손에 떨어질 부와 권리가 대체 어느 정도일까?
가뜩이나 서부 국경선을 방어하느라 키드레이 공작가의 역할은 더없이 중요하다. 그런데 하임벨을 삼키게 되면 율령국과 국경선이 바로 맞닿게 된다.
‘그럼 나와 카예나 황녀가 결혼하는 걸 레제프 황자가 바라마지 않겠지.’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될 키드레이와 혈맹으로 엮여야 황실에 큰 이득이 될 테니까. 어디까지나 정상적으로 일이 진행될 때 말이었다.
‘하지만 전에 본 레제프 황자는…….’
라파엘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단순히 이용가치가 있는 누이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그는 애써 미간을 펴며 약간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에 마드레나 왕국의 자손이 있었다고 꾸며내 전하께서 그 후계자와 결혼하게 되면 황실에서도 섣불리 건드리기가 어렵겠군요.”
“물론 공작님의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에요. 마드레나 왕국의 혈족으로 인정하고 그와 결혼한 저와 황실에 어느 정도의 이권을 양보해주시면 돼요.”
“하임벨 영주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카예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하임벨 영주는 살고 싶다면 가만히 있어야 할 터였다.
‘사람은 청렴결백하게 살아야 해. 아니면 용의주도하든가.’
애석하게도 하임벨 영주는 제법 용의주도했으나 카예나가 소설로 그의 약점을 알았을 뿐이었다.
‘영주민들에게 들키지 않고 야만족에게 어린아이들을 조공했지. 그 대가로 식량은 좀 수탈당할지언정 침략당하지 않았고.’
그러나 언제까지고 들키지 않고 어린아이를 납치해 야만족에게 조공할 수 없었다.
‘일단 하임벨을 키드레이 공작령으로 복속시킨 후에 그의 목을 잘라버리면 될 일.’
카예나는 은으로 된 잔에 채운 도수가 거의 없는 과일주로 입술을 축였다.
그때 라파엘로가 뜬금없는 걸 물었다.
“그럼 가짜 남편 이름은 생각해두셨습니까?”
‘남편 이름?’
이런 걸 물을 줄은 몰랐기에 잠깐 멈칫했다. 어차피 존재하지도 않을 남편, 이름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적당히 생각나는 이름을 말했다.
“……바옐이에요.”
“…꼭 진짜 있는 사람 이름 같군요.”
카예나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가 뭘 알고 한 말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럴듯해야 다들 믿을 테니까요.”
사실 라파엘로는 이름만 있을 뿐인 그 가상의 존재에게 묘한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하임벨을 삼키게 된다면 가상의 남편이 아니라 나와 결혼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
라파엘로는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결혼하기가 끔찍하게 싫었다. 그랬기에 카예나의 협상에 응하기까지 했으니까.
한데 지금은 달랐다. 카예나가 자신을 탐내주었으면 했다. 카예나가 자신과 결혼하는 게 가장 괜찮은 선택지라고 생각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마침내, 자신을 소유하기를 원했다.
라파엘로는 초조함을 숨기며 입술을 떨어뜨렸다.
“말씀대로라면 전하께서 상당히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닙니까?”
“그래서 부탁드리고 싶은 게 더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오늘 밤에 정예 기사만 데리고 몰래 사원 근처로 와줄 수 있을까요?”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뭔가 위험한 일을 하려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카예나는 오해하지 말라며 덧붙였다.
“이 근처 치안이 좋지 않으니 걱정되어서 그런 거예요. 조금 이상한 정황도 있고.”
그녀는 이 사원 뒤편에 하인리히 대공자가 부리는 청부업체가 있다는 말은 일부러 빼놓았다. 그의 눈이 의구심으로 살짝 가늘어졌다.
“그럼 이 근방으로 기사들을 주둔시켜두는 게 낫지 않습니까?”
“사원을 핍박하는 모양새로 보일 텐데 괜찮겠어요?”
“…….”
그건 곤란한 일이었다. 정황도 없이 근처에 기사를 주둔시키면 사원을 압박하려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했다. 그렇게 해석할 자들도 차고 넘쳤다.
“위험한 일은 아닙니까?”
카예나는 당당하게 거짓말했다.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사람마다 위험의 기준은 다르니까.
그녀는 생긋 웃었다.
* * *
하인리히 대극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최근 정계와 사교계가 워낙 심상치 않으니 겉으로 교류하는 척 정보를 공유할 여러 장소가 필요했다.
게다가 하인리히 대극장에는 꼭 들러야 할 이유가 있었다. 새로운 극이 올라온 첫날과 마지막 날엔 예이스터가 꼭 관람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새로운 극이 걸린 날이다. 가장 잘나가는 소프라노가 절정을 노래하고 있었다. 신사들은 소프라노의 목소리보다도 그녀의 얼굴에 관심이 많았다.
“애인으로 삼으면 좋겠는데.”
명문가의 자제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은 VIP석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작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난 약혼자 때문에 안 돼.”
한 녀석은 미간을 찡그리며 툴툴댔다.
“걸리면 바로 파혼당할걸? 자존심만 세서는.”
“그러게 적당한 가문의 영애랑 합치지 그랬어.”
누군가의 철없는 발언에 또 누군가가 타박했다.
“말년을 생각해야지, 이 친구야.”
이들도 연회장에서 만나면 점잖고 멀끔한 신사들이다. 이렇게 남자들만 있는 자리에서는 추잡한 소리를 늘어놓는 머저리들이지만.
예이스터 하인리히는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체리를 꺼내 씹으며 입가에 걸린 비웃음을 애써 삼켰다.
“대공자님은 어떠십니까?”
예이스터는 극장용 망원경으로 주변을 훑더니 말했다.
“난 저 여자가 좋겠어.”
그들은 예이스터의 말에 망원경을 들었다.
“아아, 엠마 그레이스로군요. 그레이스 자작가의 둘째 딸이었던가? 그 집에 자식이 워낙 많아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저 가문에서 VIP석 티켓을 어떻게 구했지?”
그레이스 자작가는 하인리히 대극장의 VIP석 티켓을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지 않다.
한 신사가 망원경으로 보며 말했다.
“가장 언니인 쪽은 대단한 미인이던데. 이름이 올리비아였나. 왜, 이번에 황녀 전하의 시녀가 된 그 여자.”
“언니가 출세했으니 여기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추근거려주길 원하는 것 아니겠어? 여자들 생각이야 뻔해. 머릿속엔 결혼밖에 없으니까.”
“그럼 좀 있다가 말을 걸어볼까? 동생 쪽도 나쁘지 않네.”
예이스터는 유일하게 은도 도자기도 아닌 순도 높은 유리로 된 잔으로 술을 마시다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에 있던 다른 VIP석에도 다 들릴 만큼 큰 웃음이었다.
“…하인리히 대공자님께서는 뭐가 그리 즐거우십니까?”
“아니, 아니.”
그는 술잔에 가득 따른 술을 죄다 흘리며 큭큭 웃었다.
“자네의 추측이 재미있어서.”
신사들은 서로 떨떠름하게 보다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같이 웃기 시작했다. 머저리들의 생각은 항상 놀랍다. 저 여자가 여기에 결혼할 상대를 찾으러 왔다고?
‘정말 머릿속에 결혼 생각뿐인 게 누군데.’
결혼과 정부. 그들의 관심사는 그것이 전부다. 재산은 부모의 것을 물려받으면 되니까.
‘한심한 인간들.’
여긴 온통 상속받을 재산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덜떨어진 것들뿐이다.
엠마가 밀빛 머리칼을 곱게 땋은 채 이곳에 자리한 것은 저 때문이었다. 가문의 빚이 비정상적이란 사실을 아둔한 그레이스 자작과 그의 부인은 몰랐다. 딸 쪽은 꽤 똑똑한 듯했다. 엠마 그레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엠마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절정을 향해 내달리는 소프라노의 연기에 한 번도 집중하지 못했다. 이 극에서 가장 볼만한 장면이었는데도. 계속 예이스터만 힐끗대며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공자님.”
그때 보좌관이 예이스터의 귀에 대고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신사들은 아닌 척하며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몹시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힐끔거렸다.
“잠시 실례하지.”
그는 잘생긴 낯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인리히 대극장에서 오직 주인만 이용할 수 있는 스위트 룸에 도착했다. 하인리히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데니안 사원에 황녀가?”
납치당한 게 고작 며칠 전 일이라 몸 사릴 줄 알았다. 그런데 호위기사를 달랑 셋만 데리고 사원을 방문할 줄이야. 누구도 이런 행보는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그것도 청부업체 지척의 사원이었다.
‘전에 말했던 것과 관련 있는 건가?’
황녀는 은밀한 집단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집단이야 여럿 갖고 있지만 지금 카예나가 너무나 정확한 장소에 머물고 있다는 게 미심쩍었다.
‘이건 도발인가?’
예이스터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카예나 황녀가 상당히 재미있게 변했다. 그의 눈빛이 음험하게 번들거렸다.
“미인의 초대를 거절하면 사내가 아니지.”
* * *
오래된 사원 뒤편에 자리한 아무런 특색 없는 여관 1층. 그곳은 싸구려 초를 태운 탁한 빛으로 내부를 밝혀 술을 팔고 있었다.
“황녀를 몰래 잡아오라고?”
제다이어가 청부업자 일을 시작한 지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온갖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해왔다지만 오늘의 지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지척에 황녀가 있다고 해도 납치고 그 난리를 피운 게 사흘 전 아닌가?’
눈에 보이는 정예 기사는 셋이라고 하지만, 비밀 호위가 있을 것 같단 느낌이 왔다. 그러나 제다이어만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지 다들 속 편하게 생각했다.
“수면향 피워서 기사들 재우면 식은 죽 먹기인데?”
“그렇게 예쁘다고 난리인 황녀 실물이 궁금했는데.”
‘정신 나간 놈들. 이건 함정이야.’
이 일을 지시한 예이스터도 함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기꺼이 미끼를 물어보려는 게 분명했다.
‘젠장.’
하지만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함정이라고 해도 보수는 넉넉히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동생의 약값만 댈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가난한 자에게 불치병이란 재앙이다. 제다이어는 그 재앙에 무력하게 맞서 싸우고 있었다.
“가자.”
그들은 모습을 꼼꼼하게 감추고 사원으로 숨어들었다.
듣던 대로 호위기사는 셋. 그 외에 하급 병사는 다섯이었다. 단 한 사람만 지킨다고 보기엔 조금 과한 수행원이었으나 얼마 전 난리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숫자였다.
그들은 방독면을 쓰고 수면향을 피웠다. 별채 근처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허물어졌다. 실내에도 향을 밀어 넣었다. 이건 인내심 싸움이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니 곧 모든 이가 잠들었다.
청부업자들은 이런 일에 능숙한 전문가였다. 잠긴 문은 순식간에 열렸다. 별채 안으로 들어가 황녀가 머무는 방 앞에 섰다. 팔에 석궁을 장전하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고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아무도 없나?’
내부는 촛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아 깜깜했다. 창도 막은 것 같았다. 그들은 통로의 빛을 이용해 침대 쪽을 보았다. 불룩하게 누군가가 누워있는 게 보였다.
훅-
그때 통로의 촛불이 일제히 꺼졌다.
“!!”
제다이어는 서늘한 감각을 느끼고 곧장 뒤로 빠졌다.
퍽-!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아악-!”
어둠 속으로 뭔가가 날아왔다. 동료 중 누군가가 안으로 석궁을 쏘았으나 고요했다.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뭔가에 얻어맞았다. 대체 얼마나 많은 호위가 안에 숨어있었던 거지? 식은땀이 흘렀다.
“뭐냐! 누구야!”
제다이어는 역시 제 예감이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젠장, 역시 함정이잖아!’
무슨 수법을 부린 거지?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지 못했다.
“으읍!”
동료들의 입이 하나둘씩 틀어막혔다. 제다이어는 간신히 도망쳤다.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여기서 개죽음당할 수 없었다.
탕-!
그가 안을 빠져나오자마자 굉음이 터져 나왔다.
“황녀 전하가 위험하시다!”
바깥에서 기세가 심상치 않은 무장한 기사들이 쳐들어왔다.
‘이런 미친…!’
그들은 키드레이 가문의 인장이 그려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완벽하게 함정에 걸려들었다. 그는 하인리히가 일부러 미끼로 그들을 몇만 차출해 던졌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어쩐지 황녀를 납치하라고 해놓고 고작 다섯만 지원하더라니…….
키드레이 소속 기사들이 근처를 모두 포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기사들의 눈을 피해 도망치려고 했다.
“컥!”
갑자기 누가 뒤에서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는 당장 뒤를 향해 발을 찼다. 그런데 걸리는 느낌이 없었다.
“누구냐!”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었다. 서늘한 밤중인데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때 귀신들린 듯이 드레스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뭐야, 저게!’
비명을 내지르려고 했으나 드레스에 입을 틀어막혔다.
“읍! 으읍-!”
“쉿. 조용히.”
여자 목소리였다.
제다이어는 드레스에 포박당해 바닥에 엎드린 채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마터면 제일 중요한 사람을 놓칠 뻔했네.”
로브로 모습을 감춘 여자였다.
‘설마 황녀?’
그러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알 수 없었다.
“소리치지 마. 공작가의 기사들이 오면 어쩌려고 그래?”
“…….”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는 자신과 거래하려는 듯했다. 그가 조용히 발버둥을 멈추자 드레스가 입을 풀어주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혼자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드레스. 아까 방에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그들을 덮친 이상한 일들.
눈앞의 여자가 한 짓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말투를 공손하게 했다.
“…죽기 전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제다이어는 눈을 감고 집에 있을 동생을 떠올렸다. 언제고 이렇게 개죽음당할 날이 오리라고 생각은 했었다. 침대 아래에 숨겨둔 돈을 동생이 찾아내야 할 텐데.
“당신, 정체가 뭡니까?”
그의 형형한 눈빛이 모습을 가린 카예나를 향했다.
“죽을 일은 없을 테니 그 질문엔 대답하지 않을게, 제다이어.”
제다이어는 자신의 이름을 어째서 낯선 여자가 알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픈 동생을 위해 기사의 긍지를 꺾고 청부업자 노릇이나 하느라 속이 많이 상했을 테지?”
“…정말 정체가 뭡니까?”
“그쪽의 재앙을 이겨내 줄 사람.”
제다이어는 자신의 몸이 누군가가 잡아 일으키는 것처럼 쭉 들어 올려지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뒤엔 사람이 없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카예나는 제다이어의 옷을 잘 펴주었다. 그 또한 마법의 힘이었다.
“엘릭서가 필요하지 않아?”
엘릭서란 말에 제다이어가 반사적으로 눈을 치떴다.
‘역시 마법사였어…!’
설마 했는데 상대는 정말 마법사였다. 그렇단 말은 엘릭서를 만들 수 있는 존재란 뜻이다.
“기쁘지 않아?”
원작에서 제다이어가 마법사에게 가진 집착은 어마어마했다. 동생을 살릴 방법은 엘릭서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그는 오직 마법사만 찾아 헤매었다.
다들 그를 두고 미쳤다고 말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마법사를 찾는 인간은 너뿐일 거라며 미치광이 취급까지 당했다. 하지만 그는 일생일대의 순간에도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당신이 절 도와준단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에게 저 같은 일개 청부업자가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지도 않은데요.”
그녀는 제다이어의 말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객관화를 잘하는 사람은 멍청한 실수를 잘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계획의 변수를 줄여준다.
‘공작가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올리비아를 독살했던 실력자답네. 이 자는 승리할 수 있는 것만 손대지.’
그와 카예나는 구면이다. 그녀는 제다이어를 고용해 올리비아를 독살할 것을 주문하고 어마어마한 재물을 주었다. 갈색 머리칼과 회색 눈동자, 왼쪽 뺨의 긴 상흔까지 기억대로였다.
“난 당신의 약점이 필요해.”
카예나의 얼굴이 달빛에 언뜻 드러났다.
“당신은 내 요구를 무조건 따라야 하고 성실해야 할 이유가 있잖아. 난 그런 절실함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거든.”
제다이어는 노래를 하듯 고운 목소리가 담은 건조한 냉혹함에 갈증을 느꼈다.
모습을 가린 채 달콤한 제안을 하는 이라니…….
꼭 악마 같았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그로서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제다이어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상대는 확실히 마법사였다.
엘릭서를 구할 수 있다. 동생이 살 수 있다.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카예나는 뜸 들이지 않고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는 허공을 날아 제다이어의 앞에서 멈췄다.
“…….”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쥐었다.
“당장 하인리히를 찾아가. 황녀에게 비밀 호위가 있었고 간신히 도망쳤다고 말해. 오늘 청부업체는 사라질 거야.”
“이게 뭡니까…?”
“에반스 가문의 비리. 내용은 숙지하고 종이는 태워.”
봉투는 척 보아도 값비싼 것이었다. 밀봉된 봉투에 찍힌 문양을 발견한 제다이어는 손을 떨었다. 황실의 인장이었다.
‘역시 황녀의 함정이었어.’
자신이 보고 태울 문서에 일부러 황실의 인장을 찍어서 준 것은 의도가 명백했다. 이중간첩을 하라는 뜻이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황녀가 마법사를 거느리고 있었을 줄이야!
제다이어는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려움을 이겨낼 만큼의 간절함이 있었다.
“그럼 저는 엘릭서를 언제 받을 수 있습니까?”
“황궁으로 와.”
“화, 황궁이요…?”
그런 지고한 곳에 평민에 불과한 자신이 들어가게 된다고?
그는 황망한 표정으로 카예나를 보았다.
그녀는 뭐라고 더 말하지 않고 동전이 든 게 분명한 주머니를 그에게 휙 날려 보냈다. 합리적으로 책정한 보수였다. 제다이어는 아까 봉투를 받을 때만큼은 놀라지 않았다.
그때 기사들이 가까운 곳에 있는 모양인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어서 가봐.”
당장은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시급했다. 제다이어는 돈주머니와 봉투를 품에 넣었다.
카예나는 그가 도망치는 것을 바라보다가 로브와 춤추는 드레스를 멀리 날려 보내고 제 머리칼을 헝클었다.
“이제 화약고를 털어볼까.”
그녀의 시선이 여관으로 향했다.
* * *
카예나가 낸 굉음은 총성이었다. 라파엘로가 카예나에게 은밀히 전달한 것이었다. 총성을 듣는 순간 라파엘로는 사원 별채로 달렸다.
‘다 잠들어있어?’
침입자가 있다. 별채 안은 초가 다 꺼져있어 어두컴컴했다. 기사들이 횃불을 켜자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잠들어 쓰러진 호위기사와 온몸이 포박된 네 명의 수상한 자들이 있었다.
“저들을 잡아두어라.”
라파엘로는 그렇게 지시하고 침실로 뛰쳐들어갔다.
“전하!”
그러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또 카예나가 사라져버렸다.
“전하께서 사라지셨다! 찾아라!”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하는데!
일찍이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었다. 카예나가 괜히 여기에 머무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원 근처로 기사들을 주둔시켜놓으면 괜찮으리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멍청했다. 그는 분노와 후회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카예나를 존중한다. 존경하고 경애한다. 자신이 감히 그녀의 영역을 침범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각이 틀렸다.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해야 했다. 설령 버려질지라 해도.
그는 사원 뒤편으로 달렸다. 적에게 당할 수 있다는 계산 따위는 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달빛을 받으며 다시 사원으로 다가오던 카예나를 발견했다. 라파엘로를 발견한 그녀의 얼굴이 반가움에 물들었다.
“아, 공작…!”
하나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라파엘로가 그녀에게 달려가 품에 꽉 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그녀의 등허리를 두 팔로 감쌌다. 카예나의 달콤한 체향이 선명하게 느껴지자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두 사람의 키 차이로 인해 카예나의 발이 허공에 붕 떴다. 몸이 마치 단단한 바위에 휘감긴 듯 완벽한 안정감은 있었으나 카예나는 자연스럽게 라파엘로의 목을 끌어안았다.
라파엘로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놀랐어요? 청부업자랑 아무 일도 없기는 했는데…….”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로 나붓이 스며들자 라파엘로는 긴 숨을 내쉬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카예나의 목덜미에 더욱 깊이 얼굴을 묻었다.
카예나는 차마 이토록 불안해하는 라파엘로를 떨어뜨리지는 못했다. 그의 온기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공작님?”
다만 언제까지 이렇게 안겨있을 수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카예나는 그와 같이 여관을 덮쳐 잔당을 소탕할 생각이었다. 그랬기에 꼼지락거리자 라파엘로가 깊이 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라파엘로는 탁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카예나는 이제 제 전부였다. 숨을 쉬는 이유였다. 카예나가 아니면 세상은 의미가 없었다. 다 불타서 잿더미가 되어버리든, 산산조각이 나버리든 관심 없었다. 이 사람만이 제게 유의미했다.
그래서인지 추한 소유욕과 독점욕이 끓어올랐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감옥을 만들어 둘이서 갇힐 수만 있다면. 그러면 바랄 게 없었다.
라파엘로는 스스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라파엘로는 그녀의 것이 되고 싶었다. 또 그녀가 자신의 것이 되었으면 했다. 완벽한 결속이 필요했다.
“전하께서는 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게 얼마나 저열한 만족감을 주는지 당신은 짐작조차 못 할 것이다. 자신은 이토록 엉망인 인간이었다.
그 사실을 카예나만 모르면, 그러면 괜찮지 않을까?
카예나는 얼떨떨해졌다.
“무슨…….”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던 입술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가 미간을 찡그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순식간에 공기가 야릇하게 변해있었다.
두근. 두근.
서로에게 스며있는 부드러운 달빛, 서늘한 밤공기, 세상에 둘만 남겨진 듯한 풍경.
서로의 얼굴은 더없이 가까워 탁하게 젖은 숨결이 나체를 보이기라도 한 듯이 적나라했다.
숨이 점차 가빠졌다. 이 분위기가 어떤 일이 벌어지기 전의 전조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당장 입술을 물어뜯고 싶어서 안달 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품 안에 끌어안고 있는 주제에.
정말이지, 가증스럽게도.
사냥하기 직전의 맹수처럼 조금의 틈이라도 내보이기를 기다리며, 야릇한 숨을 내뱉었다.
배 속이 꽉 옥죄었다. 살갗이 저릿하게 달아올랐다. 카예나는 나직하게 탄식했다.
아닌 척 외면해왔으나 그녀는 이미 이 남자에게 함락되어 있었다. 원하고 있었다.
카예나가 그의 목덜미를 쓸어올리며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깊숙이 넣어 제게 끌어당겼다.
허락이 떨어진 순간 라파엘로는 갈급하게 카예나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난잡하게 숨결과 타액이 뒤섞였다.
라파엘로는 이성이 아득하게 나간 채 짐승 같은 본능으로만 충실히 움직였다. 카예나는 이런 때에도 여전히 망설이며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말릴까? 떨어뜨릴까? 모르는 척할까?
온갖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으나 라파엘로가 탁한 숨소리를 내뱉는 순간 다시금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목을 더 깊게 끌어안고 갈증을 해소했다.
라파엘로는 이 사람은 어떻게 여기서 더 사랑스러워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짓 하나, 눈빛 하나에 그는 충실히 발정했다.
카예나를 안아 드는 건 고작 한 팔로도 가능했기에 자유로운 손으로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만졌다.
그는 스스로가 웃기지도 않았다. 여유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든 어른스러운 척이라니.
하지만 카예나는 그런 조심스러움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냉혹하면서도 너그러운 여자는 자신이 응석을 부리면 그대로 다 받아줄 게 뻔했다.
라파엘로는 간신히 자신을 억제하며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카예나를 대했다. 사실 그건 썩 어렵지 않았다. 카예나가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 그대로 행동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이러는 도중에 누군가에게 들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같은 건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들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 공식적으로 카예나의 것이 될 테니까.
하나 이 순간은 백일몽과 같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음탕하게 나눠 가지는 행위는 곧 끝나게 될 것이다. 그게 끔찍하게 싫었다.
라파엘로는 손쉽게 어른스러움을 포기했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중요한 건, 제게 완전히 집중한 카예나의 입술이었고 숨결이었다.
말캉한 입술을 몇 번이나 삼켰다. 숨이 모자라 잠깐 떨어지는 것도 못 견디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좇았다.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서로를 탐닉했다.
카예나는 어느새 바닥을 밟은 채로 더욱 깊게 입을 맞추다가 라파엘로의 양 뺨을 쥐고 입술을 떨어뜨렸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 틈으로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숨 막혀요.”
그녀가 짐짓 매섭게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탓했다. 그러자 라파엘로는 말없이 카예나의 두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눈가가 야살스럽게 저를 향하자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카예나가 머뭇거린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곧장 입술을 겹쳤다.
이제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카예나가 그를 다시 밀어냈으나 라파엘로는 손길을 무시하고 다시 입을 맞추려고 했다.
“그만.”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입술에 먼저 입을 맞춰 주며 조용히 그를 달랬다. 그 달콤한 행동과는 다르게 카예나는 차갑게 말했다.
“전 황제가 될 거예요.”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러니 당신의 아내는 될 수 없어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예나는 서서히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건 황위에 뜻이 있어서입니까?”
카예나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 망설임에서 라파엘로는 그녀의 의중을 읽었다. 레제프를 향한 복수란 것을.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라파엘로.”
“뜻대로 하십시오.”
그녀가 돌아보자 라파엘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 가뒀다. 입술을 가볍게 맞댄 채 그가 말했다.
“저도 뜻대로 할 테니.”
선전포고를 끝낸 그가 다시 숨결을 빼앗아갔다.
* * *
관객이 모두 떠난 대극장에서 카예나를 기다리고 있던 예이스터는 야차처럼 표정을 구겼다.
“키드레이 공작가에서 왜 거길 공격했다는 거야!”
빈민가 근처에 만든 청부업소 겸 화약공장이 공격당했다.
“증거는? 나와 접점이 있다는 걸 들킨 건 아니겠지?”
“간부들만 입 다물면 들킬 건 없습니다.”
“그들은 죽였나?”
“암살자를 보냈습니다.”
예이스터는 거기에 쏟아부은 돈을 생각하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대체 왜! 어떻게!”
그는 대극장의 스위트 룸을 한참이나 박살 내다가 간신히 한숨 돌렸다.
“간부 하나가 도망쳐왔다고 했지?”
보좌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 제다이어입니다.”
“들어오라고 해.”
예이스터는 박살 낸 물건이 튀지 않은 의자로 가서 털썩 앉았다.
문이 열리고 왼뺨에 길쭉한 상흔이 있는 30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바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황녀에 대해 보고할 사안이 있다고?”
제다이어는 엉망진창인 방을 힐끔 보고는 입을 열었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에반스 가문이 황실에 신고를 누락시킨 곡창지대가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예이스터는 나른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화약고가 사라졌다는 분노로 얼룩져있던 표정이 한결 맑아져 있었다.
“누락시킨 곡창지대라…….”
그 문자들의 배열과 어감이 주는 달콤함이 마음에 쏙 들었다.
“예. 대마초를 재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전에 황녀를 납치한 헨버튼 길리안의 비밀 사교클럽에도 납품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대마초!”
그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제다이어를 바닥에서 일으켜주었다. 제다이어가 여자였으면 당장 입술에 키스해줬을 것이다.
“이름이 제다이어라고 했지? 새로운 청부업소의 지점장은 당신이야.”
그는 유능한 자를 사랑했다. 제다이어라면 몇 번 일 처리가 깔끔하다고 들은 기억이 있는 자였다.
“감사합니다.”
그는 바로 보좌관을 불러 제다이어에게 하사할 저택을 찾아보라고 했다.
“조금만 기다려봐. 저택 하나 수배하는 것 정도는 얼마 걸리지도 않거든.”
그는 결정된 일이 있으면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결정은 빠르고 행동은 더 빨랐다. 갑자기 방으로 사람이 쏟아져 들어오며 순식간에 어질러진 걸 치웠다.
“새로운 지부를 설립할 동안은 쉬도록 해.”
그 말을 끝으로 제다이어는 스위트 룸에서 나올 수 있었다.
“허.”
제다이어는 자신이 받았던 편지에 적힌 내용대로 모든 상황이 풀리자 더럭 겁이 났다.
아무리 황녀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고?
‘수도에 내 저택이 생길 거라는 건 어떻게 안 거야?’
그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제다이어는 대극장에서 잠깐 서성이다가 묘한 시선을 느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어떤 남자가 자신을 주시하더니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돌렸다.
‘아까 스위트 룸에서 본 사람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천천히 걸었다.
‘착각이 아니군.’
그를 감시하는 눈이 있었다. 그 남자를 붙잡으려고 한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예이스터의 명을 받아 저택을 수배하러 갔던 보좌관이 그를 찾아왔다.
“당장 쓸 수 있는 저택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모실 테니 따라오십시오.”
제다이어는 뒤를 힐끔 보았다. 감시의 눈이 사라져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보좌관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대극장을 벗어났다.
보좌관은 유쾌한 사람이었다. 제다이어가 어떤 사람인지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평범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는 마차가 멈추자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손을 맞잡자 보좌관이 아까와는 달리 묘한 미소를 지었다.
“부디 주인을 배신하지 마십시오.”
“예?”
보좌관은 다시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럼 더 필요하실만한 건 날이 밝는 대로 준비해서 보내겠습니다.”
그는 얼떨떨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저택을 보고 마른 침을 삼켰다.
‘황성 근처다.’
수도의 거의 정중앙에 있는 저택이었다. 아까 그에게 따라붙었던 시선, 보좌관의 말이 이해되었다.
‘날 황녀의 세작이 되었다고 의심하고 있구나.’
예이스터는 그를 믿지 않는다. 입술 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귀족은 다 괴물인가?”
아무래도 자신이 몸 담그고 있던 뒷세계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둡고 음습한 곳에 발을 디디게 된 것 같았다.
* * *
바스턴은 공작가의 정예 기사였기에 오늘의 밀행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라파엘로가 홀로 뛰쳐나가더니 모습이 보이지 않아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각하!”
검은 망토로 몸을 감싼 카예나 황녀를 안은 채 라파엘로가 사원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편에 청부업자의 본거지가 있다. 그곳을 점거하겠다.”
그들은 다시 긴장감 어린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라파엘로는 카예나를 제 마차로 밀어 넣었다. 카예나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분명 제 마차로 가기로 하지 않았나요?”
“제 마차가 더 안전합니다.”
그야 마차 주위로 기사를 여럿 세워둘 테니 안전하겠지. 그건 카예나의 마차에 해도 되는 일이었다. 라파엘로는 뻔뻔스럽게도 대놓고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카예나가 잠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자 라파엘로가 돌연 마차의 발판을 딛고 올라와 상체를 숙였다. 그러고는 이미 짙은 키스로 부풀어있던 입술이 깨물렸다.
“…!”
당황한 카예나가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니 혀가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몸에 남아 있던 열기가 순식간에 불이 붙은 듯 달아올랐다.
시야가 차단되어있다고는 하나 지나치게 대담한 행동이었다. 카예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옷자락을 콱 붙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무슨 소리라도 낼 것 같았다.
온몸이 짜릿한 긴장감으로 조여들었을 때, 입술이 떨어졌다.
쪽.
라파엘로는 몸을 떨어뜨리기 전,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제발 여기서 나가지 말아주십시오.”
당신이 또 보이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미쳐버려서, 하인리히든 뭐든 짓밟아버릴 것 같으니까요.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이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카예나는 그가 평소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느끼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이내 라파엘로가 마차 문을 닫고 나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카예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온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 * *
청부업자들의 본거지인 여관은 일반적인 형태였다. 다만 지하가 문제였다.
“화약이잖아!”
눈을 가린 일꾼들이 지하 창고에 갇혀 화약으로 무기를 제조하고 있었다. 그들 중엔 노인도 있었고 어린아이도 있었다. 그들의 등은 채찍질로 너덜너덜했다.
“누, 누구냐!”
채찍을 든 감시관들이 쳐들어온 기사들에 놀라 소리쳤다.
“모두 체포해!”
바스턴은 심각한 얼굴로 라파엘로에게 보고했다.
“전부 빈민가 사람들입니다.”
지하에 갇혀 화약을 마시며 일하는 이들은 모두 빈민가 사람으로 파악되었다.
‘하인리히 소유의 청부업체라고 했지.’
오늘 카예나를 납치하려고 했던 청부업자도 그의 수하였다. 라파엘로는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반드시 이 화약창고 소유주를 밝혀내라.”
“예, 각하!”
카예나는 정예만 데려오라고 했으나 라파엘로는 더 많은 기사를 근처로 끌고 왔었다. 그가 사원을 떠나고자 기사단을 정비하고 있을 때 고위 사제가 후드로 모습을 가린 수행 사제와 같이 나타났다.
“전하께서 주둔시키고 있던 기사분들이시군요.”
이건 사원에서 문제 삼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데니안 사제는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불온한 무리를 처단하고 전하를 구해내어 다행입니다.”
“양해에 감사하오.”
“쓰러져있던 다른 기사들은 막 정신을 차렸습니다.”
마침 몹시 당황한 듯 보이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이곳으로 달려왔다.
“공작님! 전하께서는 어찌 되셨습니까?!”
“전하께서는 무사하시다. 이 근처의 치안을 살필 겸 기사를 데리고 나왔다가 곧바로 그분을 발견할 수 있었어.”
그들은 바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황실의 은인께 감사드립니다!”
“내 마차에 모셔두었다.”
“그럼 저희가…….”
라파엘로는 냉랭하게 말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 놓고 제대로 주변을 살피지 않았던 자네들이 전하를 보호할 수 있겠는가?”
“…….”
“전하께 변고가 있었던 게 고작 사흘 전인데 주변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했던 모양이군.”
그것이 사실이었으므로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카예나에게 변고가 있든 말든 그들에게는 큰 상관이 없었다. 자신들의 주군은 레제프지, 카예나가 아니다. 라파엘로는 그들에게 카예나를 향한 충성심이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알았다.
“전하는 내가 모시고 가지.”
그는 통보하고 다시 데니안 사제를 바라보았다.
“오늘 협조는 키드레이에서 잊지 않을 것이오.”
“별말씀을요.”
사제에게 묵례하고 고개를 들던 라파엘로는 뒤에 서 있던 수행 사제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황금빛처럼 보일 정도로 밝은 황갈색 눈동자였다.
라파엘로는 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았으나 천천히 시선을 뗐다. 카예나가 있을 마차에 가야 했다.
“그럼 이만.”
그는 마차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그를 기다리는 동안 선잠 든 카예나가 보였다. 시간은 이미 새벽이라 지칠 만도 했다. 노란 불빛이 카예나 얼굴 위를 아른거렸다.
바스턴이 그에게 물었다.
“황궁으로 갈까요?”
과연 이대로 카예나를 황궁으로 보내는 게 괜찮은 선택일까?
그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마차 문을 잡고 말했다.
“저택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