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15
악녀는 마리오네트 14장. 황제의 대리인(15/33)
14장. 황제의 대리인
막 잠에서 깨어난 카예나는 제대로 사고하기까지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낯선 커튼 때문이었다.
늘 보던 짙은 색 염료로 염색된 천에 화려한 자수를 놓은 커튼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복숭아색의 얇은 커튼이 여러 겹으로 고대 신전처럼 침대 기둥을 휘감고 있었다.
카예나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안은 금과 보석으로 만든 선 캐쳐가 곳곳에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나이 어린 영애들이나 쓸법한 사랑스러운 방이었다.
아니, 지금 카예나의 나이에 쓰기 적절한 방인가?
정신과 육체의 심각한 나이 차로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제 몸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마법 계약을 한 후유증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라파엘로의 마차에서 잠들었었나?’
이런 달콤한 분위기는 화려하고 지엄한 황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는 황궁이 아니다. 카예나의 미간이 의아함으로 살짝 찡그려졌을 때였다.
똑똑.
세련된 차림의 시녀들이 여럿 들어왔다. 그들은 일찍이 눈뜬 카예나를 발견하고는 일제히 인사 올렸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카예나가 얇은 커튼을 걷으며 물었다.
“여긴 어디지?”
그러자 시녀들이 당황했다. 설마 주인님이 황녀의 허락도 없이 저택에 데려왔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녀는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키드레이 저택의 손님방입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카예나는 상황을 이해하게 되자 조금 어이가 없었다. 마차에서 그를 기다리다가 잠든 자신도 경계심이 부족했다지만, 설마 집에 데려올 줄이야.
‘내게 더 나빠질 평판이 없다는 게 다행인 걸까.’
급작스럽게 그의 집에서 하루 묵었다고 해도 다른 귀족 영애만큼 타격받을 명예가 없다. 오히려 “황녀가 그럼 그렇지.” 하며 안심할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렇다고 해도 라파엘로가 그럴 사람은 아닌데. 뭔가 다른 조치가 있었나 보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라파엘로는 카예나를 곤란하게 내버려뒀을 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달콤한 이유의 확신이 아니다. 라파엘로가 이런 면에 있어서 철두철미한 성정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몸단장을 돕겠습니다.”
키드레이의 시녀들은 갑작스럽게 황녀의 시중을 들게 되어 꽤 긴장한 상태였다. 그들도 귀가 있으니 황녀가 어떤 사람인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패악무도한 황녀가 혹시라도 수틀려 저들의 목을 뎅강 잘라버리는 건 아닐까?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설마 황녀가 키드레이 공작가의 사용인을 상대로 그러겠느냐만, 그간의 소문이 워낙 좋지 않았다.
“그리하라.”
카예나는 순순히 그들에게 몸을 맡겼다. 어서 몸단장을 마치고 라파엘로에게 자초지종을 들어야 했다.
‘아침부터 그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불현듯 전날 입을 맞췄던 기억이 떠올랐다. 라파엘로가 저택이 아니라 황궁에 데려다줬다면 그대로 모른 척하며 한동안 그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성년식에서나 만나서 모른 척 시치미 뗐다면 좋았을 텐데.’
카예나는 무심결에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녀의 한숨에 움찔한 시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깐 딴생각이 들어서.”
“다른 드레스도 몇 벌 더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살구색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의상실의 드레스를 지난밤 동안 구했을 이들의 노고가 짐작되었다.
“블랑 의상실이면 요즘 가장 인기 있는 곳이잖니. 충분히 마음에 들어. 간밤에 고생했겠구나.”
설마 치하의 말을 듣게 될 줄 몰랐던 사용인들은 멈칫했다. 최근 황녀가 달라졌다는 소문을 귀동냥으로 들었었지만, 키드레이 공작가에서 황녀는 여전히 제멋대로인 이미지였다.
그간 당한 게 있던 그들은 소문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그녀는 정말 다른 영애들보다 까탈스럽거나 하지 않았다.
덜그럭!
그때 막내 시녀가 설탕통 뚜껑이 안에 든 각설탕을 테이블과 바닥에 떨어트렸다. 동시에 방 안 분위기도 싸늘해졌다.
“주, 죽여주십시오, 전하!”
시녀는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엎드렸다. 다른 시녀들도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손님 앞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공작가의 위신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더군다나 황녀의 앞이었다.
그들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고개를 조아렸다. 카예나는 화장대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향과 맛이 좋았다. 게다가 온도도 적절했다.
“설탕이 필요 없을 만큼 맛이 좋네. 누가 끓였지?”
막내 시녀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준비하였습니다…….”
카예나가 괜찮다고 말해도 이 시녀는 문책을 피할 수 없다. 공작의 손님이자 황족 앞에서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고작 설탕통 하나 엎질렀을 뿐이지만, 이 바닥의 생리가 그러했다.
“다음번에도 내가 방문할 일이 있다면 네게 차를 부탁하고 싶구나.”
카예나가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막내 시녀를 잘라내지 못할 것이다. 시녀는 자신이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전하.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시녀들은 너그러운 관용을 보인 카예나에게 내심 경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나이 든 시녀일수록 카예나의 태도에 탄복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주인의 모습이 아닌가.
키드레이 공작부인은 지나치게 완벽주의자라 칭찬에 인색했으며 상보단 벌을 확실히 내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주인에 익숙했던 그들은 카예나의 처사에 얼떨떨했다.
치장을 마친 카예나는 절로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웠다. 풍성한 머리칼을 높게 올려묶으니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커다란 보석이 한가득 엮인 목걸이 대신 분홍색 다이아몬드가 메인인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쳤다.
“전하, 주인님이 다이닝 룸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카예나는 최대한 태연한 모습으로 그리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다이닝 룸으로 가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그냥 새벽이라도 황궁에 데려다 달라고 할 것을.’
그렇게 짙은 감정을 나눈 다음 바로 얼굴을 봐야 한다니.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공작저의 다이닝 룸 문이 열렸다. 분홍빛 꽃잎이 흐드러지게 핀 모란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라파엘로는 편안한 실내복 차림이었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을 차분히 늘어뜨린 채 신문을 읽다가 카예나와 눈이 마주쳤다.
꼭 신혼부부가 아침을 맞이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다시 심장이 간지러웠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는 뻔뻔스럽고도 자연스럽게 카예나를 맞이했다. 카예나는 하마터면 자신이 이곳에 정식으로 초대받은 손님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저를 두 번이나 구해주신 분께서 설마 진짜 납치를 강행하실 줄은 몰랐네요.”
카예나가 빙긋 웃으며 지적했다.
라파엘로는 차분하게 의자를 빼주었다. 그는 남들이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카예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그랬다면 좋았을 겁니다.”
“…!”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불호령을 듣기 전에 몸을 떨어뜨리며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저는 전하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말은 잘하지.’
그들이 착석하자 하인들이 식사를 내왔다. 접시가 하나씩 놓이는 것을 보던 중에 라파엘로가 말했다.
“헨버튼 길리안이 암살당했습니다.”
“공범자가 생각보다 늦게 움직였네요.”
“어제 포로로 잡아온 청부업자도 전부 죽었습니다.”
안에서 시중을 들던 사용인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상쾌한 아침, 분홍빛 모란이 가득한 조찬 자리, 한창때의 선남선녀가 나눌 대화로 보기엔 내용이 조금 살벌했다.
“그럼 필요하시면 불러 주십시오.”
사용인들은 음식을 먹기 좋게 세팅하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라파엘로가 말을 이었다.
“전하의 말씀대로 청부업체가 그의 것이라면 하인리히 대공자의 짓이 명확하군요. 납치 공범도 하인리히 대공자일 테지요.”
카예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씀을 들으니 이로써 명확해졌네요. 공범은 제논 에반스입니다.”
뜬금없는 인물이었다. 라파엘로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카예나는 음식엔 손도 대지 않은 채 음료로 입술만 축였다.
“지난번 납치는 헨버튼과 제논 에반스의 합작이었을 거예요. 다만 그들이 고용한 용병 중 하인리히의 수하가 끼었던 거죠.”
“그걸 어떻게 자신하십니까?”
“제가 그의 청부업체를 겨냥해 없애버릴지도 모른다고 협박했으니까요. 긴가민가하던 차에 제가 그 사원을 방문했으니 미끼인 줄 알면서도 한번 물어봤을 거예요.”
예이스터가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남자라 다행이었다. 제논이었다면 절대 그런 미끼는 물지 않았을 것이다.
“설마 당신이 나서서 지부를 쓸어버리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
라파엘로는 잠깐 이 무모한 황녀를 어떻게 나무라야 할까 고민했다.
“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었습니까?”
“비밀 호위가 있었어요.”
“보지 못했습니다만.”
“비밀 호위니까요.”
흐음……. 라파엘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카예나는 뭐 어쩔 거냐는 듯 태연해 보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제게 마음이 없다는 말씀처럼 그 말을 믿겠습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겠다는 말을 어렵게 돌려 하고 있었다. 말뜻을 정확히 알아들은 카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
왜 이야기가 그리로 튀지?
카예나는 차마 뭐라고 더 반박하지 못하고 뜨끈해진 뺨을 식히느라 애를 썼다. 침착한 머리와 달리 심장이 또 제멋대로 뛰어댔다.
특히, 능구렁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저 남자를 보니 더욱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조금만 덜 잘생겼어도.
카예나는 이토록 손쉽게 다시 사랑에 빠질 줄은 스스로 생각지도 못했었다. 아니, 라파엘로가 제게 마음이 생기게 된 게 더 뜻밖이었다.
카예나는 웅얼거리듯이 작아진 목소리로 툭 말했다.
“틀림없이 당신은 날 싫어한다고 생각했어요.”
라파엘로는 순순히 인정했다.
“과거에는 확실히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보인 게 아니라 그랬던 거겠죠. 카예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잘 처신했나 봐요. 당신이랑은 좋은 친우만 되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라파엘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카예나가 자신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이 견딜 수 없이 기쁘게 들렸다. 그는 기쁨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전하께 과하게 설득된 모양이군요.”
카예나는 제게 반했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는 라파엘로 때문에 마음이 소란스러워졌다. 거의 식어가던 뺨이 또 달아올랐다.
졌다. 완벽하게 졌다.
카예나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런데 저는 왜 저택으로 데리고 오셨나요?”
“황궁에 머물러 계셨다면 지금처럼 쉬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건 그랬다. 지금 카예나가 황궁이었다면 레제프의 세력에게 들들 볶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황녀 전하께서 청부업체의 습격을 받으신 것을 제가 우연히 발견하고 그들의 행적을 좇던 중 지부를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괜찮은 알리바이였다. 어차피 카예나가 황궁에서 데려온 자들은 수면향 때문에 모두 잠들어 있었으니까.
“혹시 상대측에서 보복이 들어올 수도 있으니, 당장 군사를 운용할 수 있는 안전한 제 저택에 모셨다고도 했고요.”
황실을 상대로 감히 안전을 운운하고,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라파엘로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 병중인 황제를 깨울 수 없는 새벽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오늘 황궁으로 대사제가 방문했다고 하니 하인리히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그는 푹 삶은 고기를 작게 썰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연속적으로 사원의 별채를 이용한 범죄가 벌어지자 대사원이 발칵 뒤집혔다. 이것은 사원의 권위를 상당히 실추시키는 일이었다.
게다가 하필 그 범죄 대상이 황녀라니. 자칫하면 황실과 사원이 영원히 척을 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냥 날 데리고 오려고 수작 부린 거 같은데.’
명분은 확실하지만, 자신을 본인의 저택에 재우고 싶어서 일을 꾸몄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가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뜨자 라파엘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대로 전하를 황궁에 보내드렸다면 분명 저를 피하셨겠죠. 그러면 저희는 성년식에나 마주칠 수 있었을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카예나는 깜짝 놀랐다.
“시간도 많이 흘렀을 테니 기억나지 않는 척, 어제 일은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셨겠지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음…….”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추론이었다. 카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파엘로는 접시를 들고 일어나 카예나 앞에 내려놓았다. 아까부터 아무것도 먹지도 않은 채 정성껏 조각낸 고기였다.
“…저는 공작님의 연인이 아니니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면 곤란합니다.”
라파엘로는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왜 저를 뿌리치지 않으셨습니까?”
입맞춤에 대한 이야기였다.
“…낯부끄러운 말을 서슴없이 입에 담으시는군요?”
그녀의 따끔한 지적에 라파엘로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낯부끄러운 짓도 지금 당장 할 용의가 있습니다만.”
‘대체 이 남자를 누가 신사라고 했지?’
어떤 신사가 이렇게 말을 직설적으로 한단 말인가.
아까부터 달아오른 뺨이 좀처럼 식지 않았다. 심장이 자꾸만 부산스럽게 뛰었다.
“공작님.”
“라파엘로.”
그가 허리를 숙이며 카예나와 시선을 가까이 마주쳤다.
“그게 더 듣기 좋습니다.”
“…제가 어떻게 공작님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전엔 라피라고 잘 부르셨던 것 같은데.”
카예나는 제 흑역사를 서슴없이 꺼내는 라파엘로를 살짝 흘겨보았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연인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하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당신도 당신 뜻대로 하고요?”
라파엘로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카예나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손바닥에 쪽쪽 여러 번 키스했다.
“…간지러워요.”
고작 손바닥에 키스하는 것뿐인데 몸이 움찔거렸다. 묘한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들어와 제멋대로 헤집어대는 것 같았다.
라파엘로는 제 뜻대로 하겠다던 선언대로 카예나의 손가락에 모두 입을 맞추고 제 뺨을 비볐다. 제발 어여쁘게 여겨달라는 듯이 유혹하는 행동에 카예나는 기가 막혔다.
어디서 이런 걸 배운 거야?
그러다 문득 의아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라파엘로는 분명 타인과의 접촉을 못 견디는데?
‘설마 미련하게 꾹 참고 있는 거 아니야?’
카예나가 허리를 숙여 라파엘로의 뺨을 쥐고 안색을 살폈다. 라파엘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예나를 보았다.
‘안색은 멀쩡한 것 같은데.’
그래서 더 이상했다.
“괜찮아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속이 울렁거리지 않아요? 지금 이렇게 당신 얼굴을 쥐고 있잖아요.”
라파엘로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카예나는 혹시 모르니 그의 얼굴을 쥐고 있던 손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라파엘로가 그녀의 손이 떠나가지 못하게 맞잡았다.
“어쩐지 저를 지나치게 피하시는 것 같더니, 알고 계셨군요.”
“…어쩌다 눈치챈 것뿐이에요.”
라파엘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일에 능숙했다. 실제로 제레미가 아니면 그의 상태를 알아차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카예나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배려해줬단 사실에 마음이 뭉근해졌다. 동시에 안도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이 카예나이며, 그녀와의 접촉이 아무렇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라파엘로는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전하는 괜찮습니다.”
이번엔 카예나가 놀랐다.
‘원래는 올리비아에게만 멀쩡해야 하는데…….’
이건 옳은 일인가?
카예나는 알 수 없었다. 미약한 죄책감과 이럴 때가 아니라는 자책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라파엘로는 그녀에게서 망설임과 알 수 없는 고뇌를 읽었다. 자꾸 뭔가 참아내려고만 하는 카예나에게는 솔직함을 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는 카예나가 앉은 의자를 드르륵 돌려 제 정면으로 위치를 바꿔버렸다.
카예나는 깜짝 놀라 눈만 휘둥그레 뜨며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라파엘로는 양 팔걸이를 붙잡으며 카예나의 위로 상체를 드리웠다. 카예나는 순식간에 그의 양팔 사이에 갇힌 꼴이 되었다.
“……라파엘로?”
라파엘로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꺼풀에 먼저 입을 맞췄다. 다음은 관자놀이, 다음은 카예나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느라 봉긋해진 광대, 다음은 희고 말랑한 뺨. 짧게 쪽쪽 맞춰대는 키스로 카예나의 머리를 복잡하게 했던 고민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라파엘로는 짤막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렇게 입을 맞추다 보니 자꾸만 수위를 높이고 싶었다. 그는 팔걸이를 부서뜨릴 것처럼 꽉 틀어쥐며 표정은 흐트러짐 없이 담담하게 유지했다.
“제 연심을 드러내봤자 당장은 유리할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엿 같은 일인지 예전에는 전혀 몰랐었다. 누군가를 사랑한 일 자체가 없었으니 알 턱이 없었다. 그는 제 이야기에 집중한 카예나의 이마에 키스했다.
“만일 제 마음을 들키면 레제프 황자 세력을 더 모아주고 결속을 높여줄 수도 있겠지요.”
이건 사랑하는 여자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데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목소리와 달리 그의 입술은 자꾸만 카예나를 지분거렸다.
카예나는 어느새 의자에 등을 완전히 기대며 라파엘로의 키스를 받아내고 있었다. 두 손은 그의 팔을 꽉 쥐고서 밭은 숨을 내쉬었다.
입술을 겹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진이 빠지도록 흠뻑 취한 기분이 들 수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라파엘로는 키스를 멈추고 카예나와 시선을 맞췄다.
“기다리겠습니다.”
카예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망설이다가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라파엘로.”
“네, 전하.”
“…저는 당신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리고요?”
“어쩌면 남들보다 일찍 죽을지도 모르죠.”
‘어쩌면’이 아니라 확실하게 그럴 것이다. 라파엘로는 제위 싸움에서 졌을 경우 맞이할 죽음이라고 이해했다. 물론 그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잘 알겠지만, 전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이 제게 품은 마음을 이용할 거예요.”
“그렇군요.”
카예나는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설마 이렇게 서로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욕심이 생겼다. 그의 마음을 놓칠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이 마음이 한때 지나갈 감정이라도, 그의 마음이 더는 커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딱 이 정도가 좋았다. 자신은 계약으로 인해 수명에 문제가 있었으니까.
그 사실이 조금 애석했다. 그렇다고 마법 계약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것을 후회하기엔 자신의 무력함이 끔찍하게 사무쳤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먼저 죽는 경험 같은 건 절대 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상처가 될 테니까.
카예나는 그를 달래듯 말했다.
“이쯤에서 발을 빼라고 하는 말이에요.”
“전하는 가끔 저를 미숙한 어린애처럼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전에 제게 말씀하셨죠. 불행은 자신의 몫이라고.”
라파엘로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눈으로 카예나를 보았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못 미더우십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럼 됐습니다.”
그는 이번엔 카예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전하께서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저는 성격이 몹시 나쁩니다.”
그 말에 카예나가 짤막하게 한숨지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라파엘로는 그녀의 긍정에 작게 웃었다.
그의 손이 카예나의 보드라운 뺨을 살며시 지분거렸다. 카예나는 손길을 떨쳐내는 대신 어느 정도 받아주었다. 이제 막 피어난 감정을 막기만 하면 오히려 더 애틋하게 여기는 법이었다.
‘만약 이게 라파엘로에게 잠깐 스쳐 지나갈 감정이라면 정리하기도 쉽지 않을까.’
그녀가 가만히 손길을 받아주자 라파엘로는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막 둘의 숨결이 섞이려고 할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란 카예나가 라파엘로를 팍 밀쳤다. 라파엘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카예나에게서 떨어졌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제레미가 들어왔다. 그는 무척 심각한 표정이었다.
“식사 중 죄송합니다만, 황제 폐하께서 위독하시다는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카예나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 황제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질 이유는 많지 않았다.
‘레제프의 짓이다.’
“어떻게 위독하시다는 건가?”
“각혈하셨다고 합니다.”
“……환궁하겠어요.”
부황은 합병증을 앓고 있다. 그 와중에 꾸준히 소량의 독을 섭취하고 있으니 병세는 천천히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레제프는 아주 교묘하게 황제의 상태를 조절해 왔었는데.
‘독의 양을 늘린 건가?’
갑자기 각혈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진 것을 보면 독의 양을 늘린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제논 에반스나 다른 레제프 쪽 세력들이 지금 같은 시기에 황제에게 변고가 생기는 것을 원할 리 없었다.
특히나 최근에는 에반스 가문의 황궁 내 영향력이 줄어들어서 이대로 황제가 죽는다면 예이스터 세력을 누르는 것이 어려울 수 있었다.
‘혼자 결정한 일인가.’
카예나는 빠르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원래 원작에서는 레제프가 유폐된 일이 없었어.’
카예나가 변하며 생긴, 원작에서는 없었던 사건들이 그가 이런 결단을 내리게 한 기폭제가 된 모양이었다.
‘부황은 이렇게 빨리 죽어서는 안 돼.’
카예나는 베라에게 은스푼을 여러 개 만들어 오라고 주문했었다. 부황이 레제프가 원하는 시기에 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레제프와 틀어졌지만, 원래대로라면 제 성년식에 맞춰 황제에게 그것을 선물할 생각이었다.
‘성년식까지는 한 달이나 남았어.’
그녀는 묘한 탈력감을 느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자신은 그동안 과거처럼 흘러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친이 자식을 버리고 학대한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레제프는 그런 부친을 살해하려고 한다. 아니, 회귀 전에는 이미 살해했었지. 그러면 자신은? 자신은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또 똑같이 흘러가는 건가.’
그냥 도망칠까. 문득 카예나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카예나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붙은 수많은 눈을 어떻게 따돌린단 말인가.
‘하녀의 옷을 훔칠까?’
하녀들은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 않는다. 자신의 얼굴을 모르는 궁정인들은 없으니 금방 들키고 말 것이다.
식별이 어려운 밤이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황궁을 나선 후에도 문제였다. 수도에서 카예나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수도를 혼자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후는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황궁 밖의 모든 이에게 그녀는 탐나는 먹이였다. 황궁에 남아서 레제프에게 대항하는 건 지금은 불가능했다.
마법으로 상황을 해결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고작 염력 따위로 정예 기사단이나 총기류에 대항할 수 있을까.
게다가 올리비아와 라파엘로는 어쩌지?
순식간에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뒤덮었다. 그 어느 것 하나 명확한 답이 없는 그런 질문의 연속이었다.
“전하.”
“……!”
카예나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라파엘로가 굳건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던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내가 잠시 나약한 생각을 했구나.’
지금까지 모든 일을 무리 없이 잘 해결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마법도 얻지 않았던가.
황위를 가로챌 싸움은 막 시작했을 뿐이다. 카예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근데 언제 손을 잡았지?’
어느새 라파엘로가 그녀의 손을 또 잡고 있었다. 손 마디가 다 아픈 걸 보니 어지간히도 힘을 준 모양이었다. 그의 손에 빨간 손자국이 남은 게 보였다.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라파엘로는 그녀의 손가락을 살살 쓸어주었다. 괜찮을 거라며 위로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의 손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점점 이성이 돌아왔다.
“마차를 준비시켰습니다.”
“고마워요.”
카예나는 이만 손을 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라파엘로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녀가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괜찮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결국 카예나는 그와 같이 황성으로 향했다. 황성에 가는 동안 마차 안에서 둘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녀는 창밖을 멀거니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 앞으로 할 수 있는 것. 내가 지켜야 할 것. 카예나는 생각을 명확히 정리했다.
마차가 멈추자 황녀궁 시녀들이 그녀를 맞이했다. 베라는 간밤에 또 납치사건이 벌어졌단 말을 듣고 잠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찌 또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베라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카예나를 살폈다.
“난 괜찮아. 미리 이런 일을 대비하고 있기도 했고.”
곁에 있던 올리비아의 얼굴도 영 좋지 않았다. 카예나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정말로 괜찮으니 다들 걱정할 것 없다. 부황께서 각혈하셨다 들었는데 어찌 되었느냐?”
“지금 의원이 방문 중입니다.”
“레제프는?”
“납치사건 수사 때문에 밖에 나가계십니다. 곧 소식을 듣고 입궁하실 겁니다.”
카예나는 머리가 살짝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쉽지 않구나.’
부친의 죽음은 이미 경험해보았다. 두 번의 삶을 축적하는 동안 이런 일에 상당히 무뎌졌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냉정한 이성과는 다르게 몸은 죽음에 다르게 반응했다.
‘이제 헨버튼 길리안도 죽고 없어. 날 위협하는 것들을 차근히 제거해나가면 돼.’
카예나가 시녀들을 향해 말했다.
“내 보좌는 올리비아가 맡도록 하고 다른 시녀들은 베라를 따라 황궁을 단속하라.”
“명을 받듭니다.”
“난 폐하께 가겠다.”
카예나는 서둘러 황제의 처소로 향했다. 라파엘로는 아무 말 않고 카예나를 바래다주었다.
침실 앞에 도착하니 마침 의원이 나오고 있었다. 카예나는 당장 그를 불렀다.
“폐하는 어떠하시지?”
의원은 황녀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약을 드시고 찻물로 입을 헹구시던 중 각혈이 있었습니다. 위독하신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쉬셔야 합니다.”
카예나는 황제의 중독 증상이 깊어진 것임을 알았다.
‘이자도 어차피 레제프의 수하다.’
그녀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의원을 보내주었다.
카예나는 황제의 침실로 들어가기 전에 라파엘로를 돌아보았다. 라파엘로는 카예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저는 여기에 있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카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침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황실의 주축인 두 사람이 있었다. 드뷔시 재상과 제드 총기사단장이었다. 그들은 카예나를 향해 약식으로 예를 올렸다.
황제는 의식이 멀쩡한 상태였다. 그는 황녀까지 침실에 도착한 것을 보고 핀잔하듯 말했다.
“별거 아닌 일에 다들 호들갑이로구나. 게다가 황녀는 공작가에 있다고 들었는데.”
“소식을 듣자마자 왔습니다. 곁을 지키고 있지 못해 죄송합니다.”
황제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그러겠느냐. 저번에 사특한 무리 중 공범 하나를 못 잡았는데도 너를 보낸 짐의 잘못이지.”
카예나가 적은 수의 호위를 데려간 건 아니었다. 게다가 사원의 별채를 습격하는 건 확실히 예이스터의 무리수였다.
이번 일로 단단히 화가 난 사원이 수도 전역을 뒤질 게 뻔했다. 사원의 기사인 팔라딘들이 움직일 명분을 얻었으니 한동안 꽤 소란스러우리라.
그건 레제프를 비롯해 카예나를 공격했다고 의심받을 수 있을만한 귀족들을 위축되게 만들 수 있다. 한동안은 조심스럽게 세력싸움을 할 터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감히 사원 안까지 그렇게 쳐들어올 줄은 몰랐습니다.”
에스테반 황제는 루든 시종장의 부축을 받으며 쿠션에 몸을 받쳤다. 그새 더 늙은 듯한 모습이었다.
재상이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감히 황녀 전하께 위해를 끼쳤으며 사원의 권위를 훼손한 그자는 황자 전하께서 반드시 색출해낼 겁니다. 걱정하지 마소서.”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레제프가 사건을 재수사 중이더냐?”
“그렇습니다.”
카예나는 부황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쥐었다.
원래 이맘때쯤 부황이 어땠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기억이 썩 선명하지 않았다. 그가 죽기 직전에 어떤 표정을 했는지, 주름은 얼마나 져 있었고 은빛 머리카락은 얼마나 탁해졌었는지 잘 모르겠다.
평소 잘 찾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부친이 죽고 잘 가꾼 시신을 사원에 안치한 후 꽃을 놓을 때나 얼굴을 봤던가? 그때도 분위기에 휩쓸려 눈물을 조금 흘렸을 뿐, 시체가 꺼림칙하여 금방 자리를 떴었다.
불효자식이라고 뒤에서 얼마나 욕을 들었는지는 알지도 못했다. 관심도 없었다. 꽤 험난한 삶을 돌아온 뒤라 그런 걸까. 힘없이 침대에 기댄 부친이 전만큼 밉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그때 시종이 조용히 찻물이 담긴 잔을 치우려고 했다. 카예나의 시선이 그곳에 닿았다. 찻잔 안에는 찻물이 거의 그대로 있었다.
저 안에 독이 있다.
그녀는 시종에게 물었다.
“약에는 문제가 없었느냐?”
“예. 약재 배합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찻물에도? 은스푼에도 변색이 없었고?”
“그렇습니다.”
카예나는 속으로 조소했다.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었다.
“고작 그것으로 어찌 알겠느냐? 은스푼이 들지 않는 독이라도 든 것이면 어쩌려고?”
은스푼이 들지 않는 독이 아니라 은스푼이 존재하지를 않는다. 카예나는 시종의 손에서 찻잔을 빼앗았다.
“한사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지.”
그녀는 남은 찻물의 절반을 들이켰다. 그러자 시종이 놀란 듯 흠칫했다.
“저, 전하?”
카예나는 남은 찻물을 확인했다. 그녀는 불안한지 눈동자를 잘게 떠는 시종을 바라보며 잔을 내밀었다.
“혹시 모르니 너도 이걸 마셔보아라.”
“…….”
“마셔보라지를 않느냐.”
시종은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그는 찻물에 독이 있음을 안다.
‘모를 수가 없겠지.’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 마시기 전까지 절대 시선을 떼지 않겠다는 듯이.
시종은 결국 남은 찻물을 마셨다. 낯빛은 당장 쓰러져 죽을 사람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찻잔을 완전히 비운 시종은 삼킨 것을 게워내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카예나는 그를 냉엄한 눈초리로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멀쩡한 걸 보니 괜찮은 모양이구나.”
멀쩡한 게 당연했다. 레제프가 쓴 독은 단번에 사람을 죽이는 독이 아니었다. 서서히 몸을 병들게 하고 이내 생명력이 다해 죽게 하는 독이었다.
“혹시 모르니 약재 배합도 다시 점검해보아라. 차에도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에스테반 황제는 그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는 힘 빠진 손으로 딸의 손등을 톡톡 두들겼다.
“성질이 좀 죽었나 했더니.”
말과는 다르게 결코 탓하는 투가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폐하의 주변을 단속해야지요.”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는 걸 보니 어엿한 황실의 어른이 되었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부황께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래. 열흘간 내명부를 다스려보니 어떻더냐?”
‘……왜 이런 질문을 하시지?’
물론 그녀가 내명부를 쥐자마자 부처를 감찰하며 비리를 잡아 새어나가던 국고를 정비하긴 했다. 그 일이 내명부의 체계를 바로 세우는데 확실히 도움이 되긴 했지만, 이제 내명부는 카예나의 권한이 아니었다. 사실 이건 지금 상황에 꺼낼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처음 하는 일이라 썩 매끄럽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리 겸손할 것 없다. 새어나가던 국고를 재정비한다는 것이 어디 간단한 일이더냐.”
“과찬이세요.”
“짐도 참으로 많이 늙었지.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하루가 다르게 느끼고 있으니.”
“폐하…….”
“그래도 이제 황녀가 황실의 어른으로서 처신을 잘하고 있으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카예나는 대화가 이어질수록 더욱 의아하게 느꼈다. 황제가 뭔가 주려는 게 있는 사람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짐이 황녀의 활약에 그 어떤 보상도 내리지 않았었구나.”
카예나는 조금 놀란 얼굴로 황제를 보았다.
자신은 이미 내명부를 잘 다스린 대가로 라파엘로의 서부 군사통치자 임명서를 받았다. 사실을 아는 자가 거의 없기는 했지만, 이렇게 재상과 총기사단장이 있는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또 무언가 상을 내리려고 하다니.
황제가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카예나 힐 황녀를 짐의 대리인으로서 재상과 같은 권한을 부여하노라.”
그 순간 침실 안에 있던 모든 이가 경악했다.
“폐하!”
카예나는 설마 제게 그런 권한을 주리라고 예상치 못했다. 그녀는 당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거두어주십시오. 폐하께서 제국을 이토록 훌륭히 다스리고 계시는데 제가 어찌 대신하여 통치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말은 그렇게 했으나 속마음은 달랐다.
‘이건 기회다.’
설마 황제가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기회를 잡아야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힘을 손에 넣어서는 안 된다. 카예나는 고개를 더욱 깊이 조아렸다.
“결혼만을 생각해오던 제게 너무 과분한 권리입니다. 그저 지참금으로 쓸 재산과 작위만 주셔도 소녀는 더없이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자 넋을 빼놓고 있던 재상도 얼른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정식 후계자 이외에는 권한이 양도된 사례가 없습니다. 부디 재고하여 주십시오.”
드뷔시 재상은 공식적으로 레제프를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예상치 못한 변수에 얼마나 당혹스럽겠는가? 재상의 속내가 투명하게 보여 하마터면 조소가 흘러나올 뻔했다.
“내가 임시라고 하지 않았느냐?”
방금 각혈했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서슬 퍼런 기백이었다. 이가 빠져도 호랑이는 호랑이였다. 드뷔시 재상은 당혹스러워하는 얼굴로 급히 입을 열었다.
“물론 임시라고는 하셨습니다만…….”
“황녀는 짐의 자식이다.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황손이다. 짐의 말에 틀린 것이 있느냐?”
그는 에스테반 황제의 말에 사색이 되었다.
“그 문제라면 해결방법은 간단하지 않으냐. 짐이 황녀를 황위 계승권자로 인정하면 그만인 것을.”
황제는 제 뜻을 꺾으려 드는 재상을 향해 물었다.
“그것을 바라느냐?”
“…….”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를 한심하게 보더니 루든에게 말했다.
“이 시간 이후로 정식 후계자를 선별하기 전까지 황녀를 황제의 대리인으로 임명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카예나는 아무도 보지 못할 미소를 베어 물었다.
“폐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 *
황제의 침실을 나오는 길에 드뷔시 재상이 그녀를 불렀다.
“황녀 전하.”
카예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재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대리인 권한에 마음이 불편하실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제드 총기사단장도 발걸음을 뚝 멈췄다.
“부황께서 공을 치하하고자 임명하신 일이니 불편할 것까지야.”
드뷔시 재상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조언하는 척했다.
“하지만 전하께서도 말씀하셨듯, 폐하께서 살아계시거늘 정치라는 거친 일을 어찌 아녀자가 다룰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퍽 죄송스럽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저는 혹여라도 전하께 변고라도 있을까 걱정입니다.”
카예나는 저를 위하는 척 적나라하게 무시하는 드뷔시 재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참 우스웠다. 그녀를 무시하면서도 은근히 견제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재상은 마치 내가 변고를 당하길 바라는 것 같군요.”
벌써 두 번이나 납치당할 뻔했던 황녀에게 섣불리 변고를 논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상황은 완벽히 카예나의 편이다. 사원에서도 카예나의 신변에 자꾸 문제가 생기니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여기에 자칫 잘못 휘말리면 끝장이다.
그걸 재상도 알았기에 딱딱하게 굳은 안색으로 얼른 부정했다.
“오해이십니다, 전하. 어찌 소신이 그런 뜻으로 말씀드리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지요. 이 황궁을 지금까지 항상 안전하게 관리해 온 재상의 능력이라면 제게 변고 따위가 생기겠습니까?”
만약 황궁에서 문제가 생기면 당신 책임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카예나의 나이가 어리다 보니 은연중에 얕잡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겁을 먹기는커녕 은근한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는 황녀가 만만치 않은 상대란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차마 정면으로 들이박지는 못하고 말을 돌렸다.
“이렇게 장성하셔서 국가의 중대사를 다루시게 된 전하를 보니 감개무량합니다.”
카예나는 비소하며 드레스 자락을 살짝 쥐고 무릎을 굽혔다.
“그럼 앞으로도 그렇게 지켜봐 주세요.”
“…….”
무슨 말을 해도 이기지를 못하니 재상은 완전히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풉, 크흐흠.”
그 와중에 곁에 서 있던 제드 총기사단장이 무심결에 웃음을 터뜨렸다가 황급히 헛기침으로 무마했다.
“이익…!”
재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예나는 두 사람에게 산뜻하게 통보했다.
“오늘은 각 행정기관에 소식을 알리고 본격적인 조율은 조만간 진행하지요.”
제드 총기사단장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재상은 분통이 터져 주먹을 꾹 쥐었다.
카예나는 도도하게 앞장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라파엘로와 올리비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으나 카예나는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올리비아의 연인을 빼앗은 듯한 죄책감이 들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아직 둘 사이에 어떤 인연이 형성되지 않았단 건 알아. 알지만…….’
차라리 원래 둘이 이어졌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카예나는 죄스러웠다. 게다가 자신은 얼마 살지도 못할 사람이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제게 다가오길 꺼린단 사실을 알아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떠하십니까?”
“각혈하시긴 했지만, 한동안 휴식을 취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곧 재상과 총기사단장도 뒤따라 나왔다. 그들은 라파엘로가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는지 흠칫했다.
“커험!”
재상은 헛기침을 터뜨리며 불편한 얼굴로 자리를 피해버렸다. 카예나가 라파엘로에게 말했다.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배웅해드릴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손을 맞잡았다. 라파엘로는 그녀의 손이 전보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안에 놓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은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들은 나선형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황금빛 성안에서 밝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무도회의 한 장면처럼 어울렸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손이 또 차갑게 식어있음을 깨달았다.
“손이 차갑습니다.”
그에 비해 라파엘로의 손은 상당히 따뜻했다.
“손을 차게 두시면 안 됩니다, 전하.”
라파엘로는 그렇게 말하며 대담하게 카예나의 손을 꽉 잡았다. 카예나는 대체 뭐라고 지적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말했다.
“…공작님은 다정한 분이시군요.”
“별말씀을요.”
카예나는 조금 난감했다. 남들이 보기에 이상함을 느낄 만한 모습은 아니지만, 확실히 친밀한 모습이었다.
그때 카예나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라파엘로가 말했다.
“갑자기 내외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음….”
확실히 그렇다. 지금껏 카예나는 멋대로 그에게 팔짱을 끼거나 연인인 척 행세해왔다.
“취할 이득이 있어서 친밀하게 지내는 척하는 편이 좋습니다.”
카예나가 어찌 그 사실을 모르겠는가. 다만 라파엘로가 먼저 이렇게 행동할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했다.
“저도 알지만, 공작님의 행동에 사심이 느껴지는군요.”
라파엘로는 작게 웃었다.
둘은 천천히 성의 입구를 향해 걸었다. 방금까지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멀게 느껴졌다. 이 안온한 시간에 카예나는 자신이 치유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황께서 저를 임시 국정 대리인으로 임명하셨어요.”
카예나는 방금 있었던 일을 말했다. 라파엘로는 황제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음을 알았다. 그가 제시한 조건이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감축드립니다.”
카예나는 그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냥 축하한다고 넘어갈 일이 아니잖아.’
아무리 감정적 변화가 크지 않은 라파엘로라고 해도 국정 대리인이란 말에 아무런 동요가 없는 건 이상했다. 이건 사실상 후계자로 임명된 거나 마찬가지다. 세력의 판도가 크게 뒤흔들릴 사건이었다.
‘뭐지?’
카예나는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나 상대에게 그걸 티 내지는 않았다.
“한동안 또 바쁘시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죠.”
“보고 싶어도 얌전히 기다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카예나는 순간 주변을 살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미 얌전하지 않으시잖아요.”
“일반적인 기준을 잘 몰라서요.”
원래 이렇게 저돌적인 사람이었나? 카예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황궁 입구까지 나온 카예나는 얼른 그에게서 떨어졌다.
라파엘로는 손에서 빠져나간 온기에 잠깐 주먹을 쥐었다. 아쉬웠다. 카예나와 있으면 순간이 찰나처럼 느껴졌다. 라파엘로는 자신에게 이렇게나 충동적이고 무모한 감정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럼 지난밤 일을 정리하는 대로 찾아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라파엘로는 그녀에게 인사하고 마차에 올랐다. 그를 배웅한 뒤 카예나는 올리비아를 데리고 황녀궁으로 향했다. 올리비아가 조심스럽게 곁으로 바짝 붙으며 말했다.
“감축드립니다, 전하.”
황제의 대리인이 된 건 좋았다. 그러나 안전장치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카예나는 걸음을 멈추고 올리비아에게 말했다.
“안전한 울타리를 제대로 마련해주지 못하고 일이 이렇게 되어 미안하구나.”
“제가 전하를 보필할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고마워.”
부황이 그녀를 정식 후계자로 선언하지는 않았으나 이 일을 새로운 후계자의 탄생으로 점칠 이도 많을 것이다.
‘자칫 부황을 이대로 죽이고 내가 독살한 것으로 꾸며서 날 제거할 수도 있어.’
힘을 소화하지 못해 화를 자초해선 안 된다.
카예나가 황녀궁에 도착해 막 침실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베라를 필두로 황녀궁의 사용인들이 응접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새로운 전속 시녀들도 함께였다.
수잔도 바깥 상황을 모두 들은 모양인지 짙은 호기심을 품고 카예나를 바라보았다. 줄리아는 황녀의 곁에 선 올리비아를 불편하게 여길 뿐, 국정 대리인이 된 카예나의 위상을 제대로 이해 못 한 듯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사용인들이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렸다. 그들이 이렇게 예를 올릴만했다. 이제 카예나가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경하라…….’
그녀는 그저 가짜 남편을 만들어 황궁에서 안전하게 도망치고자 했다. 그것만큼 안전한 울타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레제프를 비롯한 주변인들은 카예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중앙 정계는 약한 자부터 삼켜버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머뭇거림은 사치였다. 틈을 보인 순간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는 아직도 선명했다.
“일어나라.”
그녀는 사용인들을 한번 쭉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 큰 권한을 받았다고는 하나, 나는 후계자가 아니다. 그 점 명심하고 절대 경거망동하는 이 없도록 단속들 잘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황녀궁은 이제 막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되어 당혹스러울 것은 이해해.”
카예나는 자신의 새로운 시녀들과 한 사람씩 눈을 맞추었다. 비교적 가장 가까이서 상황을 다 지켜본 올리비아는 침착한 눈으로 상황을 관조했다.
“특히 새로 온 전속 시녀들은 더욱 분발하여 하루빨리 황궁에 적응하도록 해라.”
“예, 전하!”
그들은 바짝 군기가 든 채로 응접실에서 나갔다. 베라는 유일하게 카예나를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카예나가 물었다.
“은스푼은 어찌 되었지?”
베라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상세 그림 도면까지 해서 이틀 내로 준비될 예정입니다.”
“준비되는 대로 사원에 축성 받을 거야. 기부금도 따로 마련해두렴.”
“예, 전하.”
그리 대답하는 베라의 목소리엔 제법 들뜬 기색이 스며있었다.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야.”
“그러나 국정 대리인입니다, 전하. 세력이라는 것은 힘 아래로 모이는 것이지요.”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세력이 모이기도 전에 제거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이번 일이 레제프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일이 될 수 있어. 혹여 레제프가 나를 믿고 넘어간다 해도 그의 세력은 그렇지 않겠지.”
“황명으로 내려진 일을 어찌할 수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정식도 아니고 임시인걸요.”
카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임시라 해도 권력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단다. 한 번 왔던 권한이 두 번이라고 오지 않을까? 다들 걱정하는 건 그런 거야.”
심지어 국정 대리인이다. 내명부야 황실 안살림이라 그다지 눈에 띌 건 없었다. 문제는 국정 대리인의 권한 중 하나인 군사통치권이었다. 사실상 황제를 진짜 황제로 기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군사통치권이기 때문이다.
레제프의 세력도 하인리히의 세력도 원하지 않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카예나는 자신이 수세에 몰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판도를 거머쥘 자신은 충분했다.
“군법과 관련한 자료를 찾아와 줘.”
평생 자신과 연이 있을까 했던 군법 공부를 하게 될 줄이야.
‘라파엘로와의 결혼을 의심치 않았던 시절에도 군사법은 조금도 공부하지 않았었는데.’
안주인이 꼭 군사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명을 받듭니다.”
베라가 명을 수행하기 위해 침실에서 나가고 카예나만 남게 되었다.
‘국정 대리인이라….’
황제가 미령한 이후로 재상의 권한이 드높아진 상태였다. 그것은 곧 레제프의 권력이기도 했다. 그런데 카예나가 드뷔시 재상을 제치고 제국의 2인자가 되었다.
아예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처리하라 했으니 군권도 포함이었다. 완벽한 신뢰였다. 제 자식이 절대 쿠데타를 일으킬 리 없다는 믿음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고작 이 정도 변화로 나를 이렇게나 신뢰할 이유가 있을까?’
그럼 레제프는 어째서 배제당한 걸까. 카예나는 문득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다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엄습했다.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왜 레제프를 그렇게…….”
‘왜 그렇게까지 냉대하는 거지?’
자신은 최근 행실을 바르게 하고 고작 내명부를 좀 잘 돌보았단 이유로 후계자처럼 권한을 내려주었다. 그것도 뭔가 좀 이상하긴 했다.
‘레제프의 생모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원작에서는 레제프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적혀있지 않았다.
‘생모가 누군지 알아봐야겠네.’
카예나는 작게 한숨지었다. 이런 일 말고도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다.
‘그러고 보니 총기사단장이 레제프를 못마땅하게 여겼지.’
그런 총기사단장을 제 사람으로 만든다면 레제프가 카예나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더욱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제논의 위치가 모호해지게 된다. 제논은 다음 재상 자리만을 바라보고 레제프에게 사활을 걸고 있었는데 갑자기 재상보다 더 영향력을 가진 국정 대리인 역할이 카예나에게 주어졌다.
그는 과연 카예나를 제거하려 들까, 아니면 굴복시키려 들까?
* * *
제논은 황제가 각혈했다는 이야길 전달받고 곧바로 입궁했다. 황제가 마시는 찻물에는 소량의 독을 꾸준히 섞고 있었다. 그것은 단번에 중독시켜 사람을 죽이는 독은 아니었다. 그러나 섭취량이 늘어나면 금방 몸이 안 좋아지는 독은 맞았다.
‘황제가 갑자기 위독하다니.’
그럴 리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됐다.
‘아직 군사통치권을 넘겨받지도 못했는데 황제에게 변고가 생기면 하인리히 측이 움직이기 더 쉬워진다고!’
황제에게 독을 쓰는 것은 아주 극소수만 아는 극비였다. 제논은 레제프가 제 상의 없이 독약 비율을 늘렸단 사실을 눈치챘다.
‘이런 멍청한 짓을!’
이런 일을 벌이려면 먼저 자신과 상의했어야 했다.
그런데 제논을 거치지 않고 이런 중요한 일을 쳐버렸다. 제논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는 최근 레제프과 계속 삐걱거렸다.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레제프와 같이 지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마찰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제 뒤통수를 칠 줄이야.
당장 황자의 세력이 좀 더 크다고 해서 반드시 제위 싸움에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는 예이스터 하인리히다. 그 무뢰배는 귀족 사회의 룰 따윈 가볍게 어겨버리는 개망나니였다.
‘게다가 그 자식…….’
설마 사원에 청부업자를 보내 카예나를 건드리려 하다니. 미친놈이 틀림없다. 그런 놈에게 약점을 잡힌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게다가 황제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레제프는 카예나의 결혼을 완전히 무산시켜버릴 게 뻔했다.
‘그녀를 데리고 이리저리 교섭하느라 바쁘겠지.’
제논은 황제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 재상에게 하인을 보내어 소식을 기다렸다. 안에서 있었던 일을 곧장 보고받기 위함이었다.
레제프의 침실 앞을 지키는 기사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선임 기사가 제논을 발견하고 알은척했다.
“아, 에반스 경. 경도 소식 들으셨습니까?”
그 말에 제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는 안에 계십니까?”
레제프는 간밤에 또 일어났던 납치사건 및 헨버튼 길리안이 암살당한 일로 출타 중이었다. 그리고 환궁 직후 부황을 찾아가 일의 진척을 보고하며 그의 용태를 살피고 돌아온 참이었다.
“전하께서는 방금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오셨습니다.”
제논은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안에 있던 하인들을 향해 말했다.
“먼저 부르기 전까지 누구도 들어오지 마라. 반드시 알려야 할 일이 있으면 귀가 들리지 않는 하인을 들여보내라.”
사용인들은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기만 하는 황자를 힐끗 보며 조용히 물러났다.
제논은 볕 아래의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는 중인 레제프를 보았다. 레제프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제논은 이를 갈며 물었다.
“왜 제게 상의하지 않으셨습니까?”
“고작 독의 양을 좀 늘렸을 뿐이거늘.”
레제프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승리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하인리히 대공자가 얼마나 교활한 인간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황족의 피가 조금도 흐르지 않는 그 벌레 때문에 내가 몸을 사려야 하느냐?”
제논은 잠깐 눈을 꾹 감고 화를 삭였다.
황자는 아둔하지 않다. 멍청하지 않다.
계속 그렇게 되뇌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멈췄다.
황자는 구제불능이다.
절제와 인내를 모르고 폭력적이고 야만스럽다. 대체 신사답지 못하기로 소문난 그 하인리히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이나 그자를 두고 시골 출신의 되먹지 못한 인간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그가 지방에서 그 잘하는 깡패짓으로 긁어모은 폭력배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그자가 거느린 용병대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느냐는 말입니다!”
“그깟 용병이나 협잡배가 설마 중앙군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중앙군은 황제의 군대이지 전하의 군대가 아닙니다!”
레제프는 손에 쥔 잔을 제논에게 집어 던졌다.
“고작 후작가 차남 주제에 나를 가르치려 들어?!”
그는 버럭 외쳤다가 다시 노기를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혀를 끌끌 찼다.
“내가 제위에 오르면 다 해결될 시답잖은 문제들이다. 중앙군만 삼키면 해결될 문제란 말이다. 그도 아니면 군사 가문의 협력이 있으면 되지.”
카예나가 시녀로 변경백 가문의 딸을 발탁했다. 라파엘로와도 원만한 사이를 유지 중이다. 그 사실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제 세력에 도움되는 일이기는 했다.
똑똑.
그때 귀가 들리지 않는 하인이 봉투가 하나 놓인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바깥소식을 적은 것이 분명한 서신이었다. 레제프는 봉투에서 카드를 꺼내 읽고는 제논 앞으로 휙 던졌다.
제논은 그것을 주워들어 읽었다. 글씨체가 드뷔시 재상의 것이었다.
⌜임시이기는 하나, 황녀 전하께서 폐하의 대리인으로 재상과 같은 권한을 받으셨습니다. 속히 다음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황태자가 받아야 할 모든 권리가 카예나에게로 갔단 말이었다.
“이제 나의 재상이 생겼구나, 제논 에반스.”
레제프는 카예나를 향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비죽 웃으며 말했다. 제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누님께서 군사통치권도 쥐셨겠구나. 이참에 총기사단장을 회유하신다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느냐?”
그는 자신이 가진 권력 대부분이 에반스 후작가의 위세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알았다. 동부를 호령하는 것도, 황실의 권력도 포기할 수 없었던 에반스 후작가는 차남을 레제프에게 보냈다.
거기에 줄리아가 황후가 된다면 그들이 힐 황가를 제치고 엘다임 제국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카예나로 인해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내 손에 누이가 있는 한 황위는 아주 안전하게 물려받는 거지.”
‘카예나를 누가 가지느냐가 중요한 게임이 되었다.’
에반스 후작가로서는 그간 제논에게 들였던 공이 날아가 버린 셈이 되었다. 제논은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황제의 찻물에 독을 다량으로 푸는 일을 막기도 모호해졌다.
황제가 죽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야기해 카예나의 권한을 무효로 돌리는 게 그에게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레제프가 한 행동이 정답에 가까웠다. 적어도 제논에게는 말이다.
레제프는 안타까워하는 척 그를 조롱했다.
“다음 재상이 될 사람은 자네인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어떡하나.”
“…….”
카예나가 완전히 레제프의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제논은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황족들. 어차피 씨가 말라가는 콩가루 집안 주제에 중앙군으로 유세나 부리고…!’
군대가 부족하다는 것은 레제프의 사정이지만, 결국 에반스 가문의 사정이기도 했다.
그들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싶어 했다. 사병은 있지만, 어딘가와 영지전을 벌일 수준은 아니었다. 병사가 필요하면 항상 용병을 고용해야 하는데 그 일엔 돈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하인리히 대공자 때문에 섣불리 용병을 고용하기도 어려웠다. 사교계에서 그가 용병대 대부분을 통솔하고 있다고 은밀하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가문에서 추적했을 때 실제로 용병 지부 중 다수가 하인리히 관할이라고 했어.’
거기다 수도의 용병대와 청부업체도 예이스터의 것이다. 자칫 그의 손아귀에 있는 용병대를 고용했다간 뒤통수 맞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에반스 후작가에서는 드뷔시 재상을 포섭했다.
그의 조카, 메릴 윈스턴 자작부인이 노아 키드레이 공작부인과 가장 절친한 친우였기 때문이다. 줄리아를 키드레이 공작가에 팔든 황가에 팔든 어쨌든 군대만 소유하면 되기에 연결고리를 만들어두었다. 이왕이면 황가를 집어삼키는 게 쉽고 이득도 크다.
그런데 카예나가 돌변하면서부터 그들의 행보에 변수가 되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와는 별개로 그는 가까스로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간 들인 세월을 이대로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었다.
“…확실히 황녀 전하께서 지금 가진 권한으로 도와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하인리히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유력한 후계자가 바로 나란 뜻이지.”
“그 말씀이 옳습니다.”
레제프는 탐색하는 눈으로 제논을 잠깐 보다가 피식 웃었다.
“에반스 후작가는 나를 지지하는 든든한 뒷받침이 아니던가. 경의 동생이 누님의 시녀로 들어왔다지?”
“그렇습니다만…….”
제논은 미심쩍게 그를 보았다.
레제프는 다시 앞에 놓인 새로운 책자를 집어 들었다. 서부 여행기였다.
“나도 슬슬 황자비가 될 사람을 살펴볼 때가 되긴 했지.”
“…….”
뜻밖의 말에 제논이 침묵하고 있자 레제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뭐해? 나가보지 않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제논이 침실에서 물러나자 레제프는 평온함을 가장했던 얼굴을 야차처럼 구겼다.
“진실을 알게 되시면 좀 골치 아파지실 텐데요?”
헨버튼 길리안이 암살당하기 전, 그가 갇힌 뇌옥으로 찾아온 레제프를 비웃으며 말했었다.
“저를 돕기로 한 공범은 제논 에반스입니다. 그 자식이 절 배신하고 황녀를 강탈하려고 했습니다.”
“감히…….”
제논이 침실을 들어오던 순간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누르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 뻔했다. 당장 제논의 목을 내리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는 오늘 써야 할 인내를 다 소비했다. 지금은 제논을 건드릴 수 없다.
“날 기만하는 것들은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의 눈이 살기로 번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