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16
악녀는 마리오네트 15장. 국무 회의(16/33)
15장. 국무 회의
카예나는 이상하게 눈이 꽤 뻑뻑하다고 느꼈다. 램프에 의지해 글자를 읽어서 그런가?
그녀는 자료에서 잠깐 시선을 뗐다. 눈꺼풀 위를 손으로 꾹꾹 누르다가 머리도 살짝 눌렀다.
“머리는 또 왜 아픈지…….”
마치 회사에서 프로젝트 준비 때문에 계속 야근하던 때처럼 피곤했다. 목도 좀 잠긴 것 같다.
그녀는 마법의 힘으로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손바닥에 놓았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뜨거웠던 차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어느새 하얀 빛이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밤을 지새운 것이다. 한숨이 나왔다.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렇게 열심히 자료를 뒤적였는데도 봐야 할 게 산더미였다. 새벽 중에 자문을 구한다고 사내를 침실에 들여 군법을 물을 수도 없으니 이해하는 속도가 더뎌 그런 것도 있었다. 대강 어떤 식으로 행정이 돌아가는지는 파악했으나 그게 끝이었다.
‘하루 만에 이걸 다 파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
하지만 드뷔시 재상을 포함해 분명 그녀의 능력 부재를 증명하고자 할 사람이 있을 게 뻔했다. 어쨌든 목표는 총기사단장을 비롯한 행정 관료들에게 ‘어라, 이것 봐라?’ 하는 정도의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카예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가볍게 풀었다.
똑똑. 문이 열리고 베라가 들어왔다.
“일어나셨…… 전하?”
그녀는 평소처럼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가 황급히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곳곳에 놓인 램프들과 테이블 위를 빼곡하게 펼쳐놓은 자료들이 참으로 생소한 광경을 이루고 있었다. 어쨌든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너무나 명확했다.
“설마 한숨도 주무시지 않은 겁니까?”
잔소리가 이어질 타이밍이었다. 카예나가 손을 내저었다.
“아냐. 조금 잤어.”
베라는 침대를 확인했다. 카예나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침대를 향했다. 전날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끔하게 정리해놓은 상태 그대로였다.
‘으음.’
용의주도하지 못했군.
베라는 속상해하는 얼굴로 카예나에게 다가갔다.
“이러시다 몸 상하십니다. 국정 업무야 차근차근히 익혀가셔도 될 텐데요.”
“뭐든 준비할 수 있다면 미리 준비해야지.”
다음 재상 자리를 넘겨받을 준비를 하고 있던 제논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그는 틀림없이 카예나가 방비하지 못하도록 기습적인 행동을 보일 게 분명했다.
카예나는 크게 하품했다. 젊음이 좋다고 해도 밤새는 건 좀 힘들었다. 더군다나 카예나는 체력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사원에서 큰일을 겪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소식을 듣고 졸도할 뻔했습니다.”
“키드레이 공작과 미리 이야기했던 일이었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공작님도 너무하십니다. 어찌 그런 위험한 일을…….”
확실히 제 사람으로 규명한 후의 베라는 카예나에게 상당히 극진해졌다.
“공작님도 잘 몰랐던 일이야. 그래도 내부에 호위를 숨겨두고 있었기에 아무 일도 없었단다.”
베라는 걱정과 불만이 다 가시지는 않았으나 이쯤에서 잔소리를 멈췄다.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전하.”
카예나는 잠옷에서 간편한 실내용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시중을 받던 중 하인이 찾아왔다.
“전하, 중앙행정기구 소속의 관료가 금일 일정에 대해 말을 전하길 청하고 있습니다.”
행정 관료가 찾아왔다는 말에 카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렴.”
그녀는 느긋하게 머리칼을 말리고 치장을 끝낸 뒤에야 응접실로 향했다. 제복을 입은 남자는 카예나를 발견하더니 곧바로 인사를 올렸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그는 어느 정도 기다릴 것을 예상하고 찾아왔는데 생각한 것보다 황녀가 금방 응접실로 와서 놀란 상태였다. 그것도 아침 치장을 완전히 마친 모습이었다. 그는 황녀에게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오후에 긴급 편성된 국무 회의에 전하께서 참석하실 의향이 있으신지 여쭙고자 합니다.”
베라가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나무라듯이 말했다.
“아니, 국정 대리인 권한을 바로 어제 받았는데…….”
카예나는 이미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걸 대비해 벼락치기처럼 중앙행정기구의 업무와 군법에 대해 대강이라도 공부했다.
“참석하겠다고 전하라.”
“그리 알고 물러나겠습니다.”
행정 관료가 자리를 비켜나자 베라가 입술을 잘근 물었다.
저들이 이쪽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너무나 치졸하지 않은가!
그들의 작태에는 화가 치밀었으나 불안하진 않았다. 이상하게도 카예나가 말려들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보라. 카예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태연하게 거울에 비친 얼굴을 확인하고는 “오늘은 화장을 좀 해야겠네.”라고 말할 뿐이었다.
카예나는 분한 얼굴을 한 베라에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런 도발에 일일이 속상할 필요 없어.”
“…전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이럴 리 없지 않습니까.”
“저들도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할지 얼마나 혼란스럽겠니.”
그러니 이런 처사에도 쉽게 동조하며 탐색해보려 드는 거겠지.
카예나는 익숙하게 주방으로 향했다. 반죽을 숙성시켜 놓고 그것으로 빵을 구울 생각이었다. 너무나 평소 같은 모습에 베라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저히 카예나의 담력은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베라는 이제 서로 안면도 트고 익숙해진 주방 식구들과 카예나를 돕다가 작게 말했다.
“그리고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심증입니다만, 애니의 거동이 수상합니다.”
“…그래?”
“네. 어젯밤에 황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듯했습니다.”
애니, 그녀가 누구의 세작인 건가?
그녀는 소설에서 다뤄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측근처럼 데리고 있었으니 황녀궁 소식을 빠르게 접한 누군가 중 하나가 세작의 주인일 터였다. 대부분은 지난번 물갈이하며 정리되었을 텐데.
‘꽤 조심스러운 인물인가. 아니, 조심스럽다기보단 원래 내게서 특별히 기대하는 바가 없었던 인물이겠지. 레제프와 별개의 세력일 가능성이 크고. 하인리히일까?’
그것도 가능성은 떨어졌다. 하인리히는 카예나에게 바랄 명확한 가치가 있었다. 특히 지금은 더욱 그랬다.
‘애니는 꽤 예전부터 있었던 아이인데.’
“너무 감시하지는 말고 적당히 풀어주렴.”
그래야 꼬리를 밟을 수 있다.
“알겠습니다, 전하.”
카예나는 반죽을 모두 준비해두고 손을 털었다. 아직 오후 국무 회의까지 시간은 많이 남은 상태였다.
“그럼 오늘 입을 예복이나 좀 살펴보자꾸나. 첫 국무 회의인데 신경 좀 써야지.”
* * *
“또 주방에나 들어가 있다고?”
드뷔시 재상은 주방 하인이 전달한 정보에 기가 막혔다.
“국무 회의가 어떤 건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군!”
재상의 방에서 같이 정찬을 들고 있던 제논은 과연 그럴까, 하고 의구심이 들었으나 말로 꺼내진 않았다.
“흥, 차라리 잘된 일이지. 국가 운영이 어디 아녀자가 할 일이던가!”
“오늘 국무 회의에 참석해보면 황녀 전하께서도 느끼시는 바가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겠지. 그러라고 만든 자리인데.”
국무 회의를 긴급 편성한 사람은 다름 아닌 드뷔시 재상이었다. 그는 오늘 황녀가 회의장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망신당하게 할 작정이었다.
“내명부 따위야 그냥 살림살이 아닌가! 나라를 다스리는 게 살림과 같지 않거늘.”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크게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황제가 카예나 황녀에게 그런 권한을 덥석 맡긴 거겠지.
“이런 선례가 생기면 곤란해.”
재상은 뒷배도 없는 종이 인형 같은 황녀 주제에 내명부를 좀 잘 다스렸다고 선을 넘는 것이 불쾌했다.
하물며 자신보다 더 높은 권한이라니!
재상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저 역시 동감입니다. 권력이 이렇게 나뉘면 하인리히 측에 먹이만 주는 꼴입니다.”
“오늘 자네도 회의에 참석하는 거겠지?”
제논이 빙긋 웃었다.
“당연하지요.”
* * *
카예나는 국무 회의에 참석하기 전, 꽤 신선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공들여 꾸미는 건 오랜만이네.’
드레스 룸에서 커다란 거울을 앞에 두고 화장대 위에 이것저것 주르르 놓고 치장하는 게 어딘가 생소했다.
베라를 필두로 시중드는 하급 시녀 여럿이 그녀의 치장을 돕는 것도 그랬다. 분명 회귀 전엔 일상이었던 일이다.
손톱은 항상 길게 길러 둥글게 갈아 분홍빛 꽃물을 들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짧고 깨끗하게 관리했다.
옷차림은 더욱 그랬다. 회귀 전에는 하루에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은 있는 옷 중에서 편한 것으로 돌려 입었다.
전과 같은 생활 패턴을 유지했다면 가뜩이나 모자란 시간이 더욱 부족했을 것이다.
‘꾸미는 일엔 확실히 시간이 많이 드니까.’
돈도 시간도 품도 많이 드는 일이다. 무가치한 일은 아니지만 들이는 노력대비 크게 높은 효율을 가진 일도 아니었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제 삶과 목숨을 전혀 보존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꾸미는 일이 회귀 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결국, 이 얼굴 때문에 레제프에게 이용당하기도 했고.’
헨버튼도 자신의 외모를 수집품으로 여겼다.
가만히 두어도 아름다운 카예나가 공들여 꾸미니 그야말로 여신이 강림한 것만 같았다.
풍성한 금빛 머리카락은 컬을 넣고 특별한 치장 대신 진주로 된 서클렛을 썼다. 예복은 차분한 은빛이었고 그 위로 푸른색 망토를 둘렀다. 거기에 화려한 브로치를 달았다.
원래도 도도한 인상이 좀 더 엄격하고 차가워 보였다. 거기다 무척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시중을 들었던 시녀들이 경탄을 금치 못했다.
카예나는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더니 무심한 평가를 내렸다.
“이만하면 다들 차림새로는 입 대지 않겠구나.”
오늘 어떻게든 제 기를 누르려고 작정했을 관료들을 상대로 정신을 쏙 빼놓기도 좋았고.
“전하, 국무 회의에 참석하실 시간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꾸나.”
* * *
회의장에는 이미 대신들이 전원 도착한 상태였다. 황제나 후계자가 앉을 상석만 비운 상태로 드뷔시 재상과 제드 총기사단장, 제논 등이 자리를 자치했다.
제논은 자리에 앉으며 총기사단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살짝 인사하니 총기사단장도 마지못해 고개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쯧.’
제드 총기사단장은 엘리트 무신 집안 출신이다. 게다가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신하이기도 했다. 업무적인 이유를 포함해 드뷔시 재상과는 항상 부딪치기도 하는 인물이었다.
지금은 황제가 미령하고 레제프가 득세 중이라 권력구도에서 좀 밀려났다. 그래도 중앙군을 통솔하는 총기사단장의 힘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에반스 후작가는 그의 힘이 필요했다.
다만 애석하게도 제드는 에반스 후작가와 더불어 레제프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드뷔시 재상이 아직 주인이 오지 않은 상석을 힐끗 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후계자인 줄 착각하는 건지……. 치장하느라 늦으시는 건가. 뭐, 하긴. 무도회가 열리는 날은 내 딸아이도 새벽부터 하루 내내 준비하긴 하더군. 국무 회의에서 왈츠라도 출 일은 없겠지만 말일세.”
회의장엔 드뷔시 재상의 말에 웃는 자가 반, 못 들은 척하는 자가 반이었다. 때마침 문지기가 회의장 문을 활짝 열고 외쳤다.
“카예나 황녀 전하께서 드십니다!”
안을 가득 채웠던 관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안고 입구를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또각, 또각.
바깥에서 구두 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들렸다. 입구에 카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논의 귀에 누군가가 무심결에 낸 침음성이 들렸다.
“으음.”
그건 한사람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마른 침을 삼키거나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제논 역시 잠깐 넋을 잃었다.
드뷔시 재상도 얼빠진 표정을 했다가 표정을 와락 구겼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카예나의 차림새는 흠잡을 곳 하나 없었다.
마치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차가운 색으로 단장한 그녀에게서 빈틈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은빛의 드레스와 푸른 망토, 머리에 쓴 진주 서클렛은 지금 그녀의 위치를 나타내기에 조금도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았다.
카예나는 오연한 태도로 내부를 휙 둘러보았다. 대신들이 자리를 꽉 채운 회의장의 모습에 조금도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모두 도착한 모양이로군요.”
카예나의 등장에 혼을 쏙 빼앗겼던 대신들은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의 기백과 미모에 눌려 누구도 예를 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다급하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카예나는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회의장을 가로질렀다.
황금빛의 옥좌 앞에 선 카예나가 말했다.
“모두 일어나세요.”
그들은 선뜻 무슨 말도 꺼내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며 일어났다. 직전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사라져있었다. 얕잡아보려 탐색하려는 의미의 침묵도 아니었다. 기선 제압당한 것이다.
“앉지 않고 무엇들 하십니까?”
그들은 온실 속 화초를 생각하고 있다가 얼떨떨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국무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
그들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서로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회의야, 뭐.’
지난 생에서 지겹도록 한 게 회의다. 전무, 이사, 부사장, 사장, 심지어 회장까지 참석한 회의도 경험했다. 국무 회의라는 것도 결국은 안건을 놓고 각 행정기구에서 의견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대신들은 곧 분위기를 회복하며 회의를 진행했다.
“그럼 금일 긴급 발의된 안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도 두어 차례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최근 각 행정기구 예산이…….”
카예나는 예산 이야기가 나온 순간 몇몇 사람의 표정이 굳어진 걸 바로 알아차렸다. 카예나는 그들이 회의를 진행하는 걸 잠자코 듣기만 했다.
“수도를 수비하는 병력 대부분이 중앙군인데 그걸 줄이면 방어선이 뚫리도록 내버려 두자는 말인가!”
“지금은 전시 상황도 아니지 않습니까!”
보아하니 오늘 표적이 제드 총기사단장인 모양이었다.
“지난번에도 군 예산을 가장 먼저 줄였으면서 이번에도 또 줄이겠다는 것인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잔뜩 화가 난 제드 총기사단장이 버럭 소리치자 재상이 혀를 끌끌 찼다.
“어허, 거참. 전하께서도 계신 자리에서 말이 너무 거칠잖소.”
그 말에 제드는 드뷔시 재상을 비꼬았다.
“예산 부족은 결국 행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생기는 것 아니오?”
“뭐, 뭐요?!”
재상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책상을 쾅 내리쳤다.
“하는 일도 없는 것들을 먹이고 재워줬더니 이딴 식으로 나와!”
마침내 제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이 완전히 굳은 걸 보니 당장 검이라도 뽑을 것만 같았다.
카예나가 그 불꽃 튀는 침묵에서 툭 말했다.
“그럼 중앙군이 유지될 이유가 있으면 될 게 아닌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모두 그런 표정으로 카예나를 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여기 모인 대신 중 중앙군을 유지하면서도 예산이 덜 소비될 방법에 대해 고민해본 이가 있나요?”
“…….”
그들은 눈만 끔뻑거렸다.
“예산이 많이 든다고 군사유지 비용을 줄이면 국력이 약화 되는데 그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재상?”
그 물음에 드뷔시 재상은 여유로운 미소를 걸치며 하인에게 서류를 하나 건넸다. 카예나에게 전달하라는 뜻이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시상황이 아님에도 불필요하게 군대를 유지하느라 예산이 상당히 많이 들고 있습니다, 전하.”
그런 이유로 중앙군 예산은 계속 삭감되어 왔다. 제드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결정이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그 예산을 모두 충당해야 하는 실정이지요.”
드뷔시 재상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동의를 구하려는 시선이었다. 다들 재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카예나는 드뷔시 재상이 넘긴 서류를 대충 훑어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지난밤 동안 국정 업무를 대비해 어느 정도 자료를 추려 놓았었다. 곁에 서 있던 베라가 서류를 내밀었다. 대신들의 시선이 그 서류에 달라붙었다.
‘어라, 황녀가 뭘 준비했잖아?’
국무 회의는 분명 기습적으로 편성되었다. 안건도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뭔가를 준비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황녀의 차림은 상당한 시간을 들인 게 분명했다. 저렇게 치장하는 일에 쏟은 시간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언제 준비한 거지? 그들은 뭔가 이상하단 사실을 직감했다.
“근 십 년간 수도에는 역병 한번 돌지 않았지요.”
그것은 드뷔시 재상이 재임하는 동안 이뤄낸 가장 큰 성과였다. 어느 대신이 대답했다.
“예. 상하수도를 재정비한 이후로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수도 인구가 지난 세월 동안 세 배는 족히 늘었더군요. 하지만 새로 개간된 토지는 없고 판자촌만 잔뜩 늘었어요.”
카예나는 그렇게 말하며 가져온 자료를 톡톡 두들겼다. 재상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런 식으로 토지대장에 기록되지 않은 가구 수가 늘게 되면 치안은 쉽게 무너지지요. 제 말이 틀렸나요?”
대신들은 얼떨떨해하는 표정으로 긍정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확인해보니 매년 갈수록 도시 치안을 유지하는 데에 중앙군 출동 빈도수가 증가했더군요. 특히 최근 5년 동안 수치가 급격하게 더 늘었어요.”
제드 총 기사단장이 눈에 이채를 띠며 카예나를 보았다. 설마 그것까지 조사해왔을 줄이야.
대신들은 카예나가 말을 꺼내면 꺼낼수록 살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황녀가 오늘 국무 회의를 앞두고 단단히 준비해온 게 티가 났다. 이제 더는 황녀에게 망신주는 자리가 아니었다.
“상하수도를 재정비하는 것 말고는 그간 도시개발이 진행된 부분이 없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 드뷔시 재상?”
그녀의 물음에 재상의 입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꾹 닫혔다.
카예나는 자신이 준비한 서류를 드뷔시 재상에게 넘겼다. 그는 그것에 손댈 생각도 못 하고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려야 했다.
새파란 애송이가 어디서 아는 척 자신을 가르치려 들다니…!
“그걸 보면 알겠지만.”
카예나는 아까 드뷔시 재상이 한 대로 서류를 콕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수도 인구는 늘었는데 토지는 개간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부랑자는 늘었죠.”
그녀는 제드 총기사단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총기사단장. 중앙군 중에서 순수 수도 출신의 비율이 어떻게 되지요?”
제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목소리엔 묘한 희열이 깔려있었다.
“3할 정도입니다.”
그의 대답에 카예나는 대신들을 한심하게 보았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는 이가 있다면 가감 없이 말해보시겠어요?”
“으음…….”
그들은 중앙군을 밑 빠진 독으로만 여겼을 뿐 그 안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평기사 봉급이라고 해봐야 뻔했다. 지방 출신 기사들이 수도에 적을 두려면 땅을 사고 세금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기사들 봉급으로 천정부지로 뛴 수도 집값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그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자연스럽게 기사들 대부분이 황성에 주둔하게 되었다. 하지만 군대를 황성에 주둔시키는 건 지금까지 당연한 일이었고, 그런 그들에게는 예산이 필요했다.
어느 대신 하나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별문제가 없었습니다만…….”
“그야 계속 전쟁을 치렀으니까요.”
전쟁에서 승리하여 배상금으로 늘 해결해왔으니 문제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래서 지금 전쟁을 터뜨려 약소국에서 배상금이라도 강탈하자는 뜻은 아니겠지요?”
드뷔시 재상은 비소를 터뜨렸다. 결국, 이건 문제를 짚어내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해결책이라고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중앙군을 투입해 토지를 개간시키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또 예산이 들잖습니까. 쓸모를 늘리는 건 좋지만, 핵심은 예산 경감입니다.”
카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중앙군에게 봉급 대신 개간한 땅을 주는 겁니다. 이곳에 정착해 결혼하고 살아가게 하면 될 게 아닌가요? 그럼 굳이 황성에 묶어 둘 필요 없이 그들을 출퇴근시키면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수도의 인구는 더욱 안정적으로 늘고 예산은 자연히 줄어들 것이다. 땅이 개간되는 만큼 주거 지역도 늘어난다. 주거 지역이 늘면 새로운 상권이 발생한다. 도시가 더 커진단 말이었다.
“아, 그런……!”
대신들은 입을 떡 벌렸다. 그들은 군대를 항상 주둔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수도 출신의 병사가 그렇게 적은 줄도 몰랐었다.
제논은 카예나를 길들이기 위해 재상을 부추겨 오늘의 국무 회의를 긴급 편성했다. 그런데 카예나의 기를 꺾기는커녕 대활약하게 하고 말았다.
‘황녀……!’
그는 표정을 완전히 일그러뜨린 채로 카예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때 둘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카예나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제논은 굴욕감을 느꼈다.
“그럼 이 안건에 대해 더 할 말이 있는 분 있으신가요?”
“…….”
누구도 여기서 더는 말을 붙이지 못했다. 드뷔시 재상은 설마 황녀가 이런 식으로 대처할 줄은 몰랐기에 이를 악물며 파르르 떨기만 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정리하죠.”
카예나는 빙긋 웃었다.
“…명을 받듭니다.”
황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가 완전히 꺾인 대신들도 따라 일어나서 예를 갖췄다. 그녀는 유유히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다행히 준비한 내용이 쓸모가 있었네.’
그녀는 재상과 총기사단장의 사이가 좋지 않단 사실에 집중했다. 어차피 끌어들여야 할 사람은 총기사단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중앙군에 관련된 자료를 집중적으로 확인했던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황녀 전하!”
그때, 제논이 그녀를 다급히 뒤따라 나왔다.
“무슨 일이지, 에반스 경?”
그는 카예나의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예나는 베라를 포함한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잠깐 다녀오겠다.”
제논은 보는 눈이 없는 곳으로 카예나를 데리고 갔다. 수행원들에게서 어느 정도 떨어졌을 때 제논이 그녀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그는 살기에 가까운 분노로 눈을 번들거렸다.
“무엄하구나.”
카예나는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레제프는 에반스 후작가의 도움 없이는 하인리히를 상대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무의식 중에 황가를 만만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대로 재상이라도 될 계획이십니까? 아니면.”
그는 카예나에게 위협하듯 바짝 다가서며 비릿하게 웃었다.
“진짜 후계자가 되실 생각인 겁니까?”
당장 폭력이라도 쓸 것처럼 위협적인 태도였다. 여차하면 그를 넘어뜨릴 생각으로 마법에 집중했다. 공간이 통제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솔직하게 말씀해보십시오, 전하.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내게 이 모든 건 다 필요 없다고 말하면 믿을 생각인가?”
제논은 표정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저는 말장난이나 하고자 전하를 붙잡은 게 아닙니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겁니까?”
“당신이야말로 사태파악이 안 되나 봐.”
“…뭐라고요?”
카예나는 그를 비웃듯 말했다.
“기껏 내 전속 시녀가 된 동생이나 잘 돌봐주는 게 어떨까?”
갑작스러운 줄리아 이야기에 제논은 기가 찼다.
“지금 그딴 게 중요합니까?”
당연히 중요했다. 역시나 그녀의 생각대로 제논은 줄리아의 존재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유력해진 건 거슬리면서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들일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그게 무슨…!”
카예나는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내가 줄리아를 총애한다면 에반스 가문에서 자네와 줄리아 중 누구를 더 지지하게 될지 정말 계산이 안 서나 봐.”
“…!”
그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제논도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에반스 후작가의 가주는 부친이 아니라 형이다. 에반스 후작은 자신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재상 자리에 동생을 앉히는 것보다는, 쥐고 흔들기 쉬운 어린 여동생이 황후가 되길 바랄 것이다.
제논은 입술을 잘근 물었다. 줄리아를 불러들이는 일에 설마 이런 계산이 깔려있었을 줄은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대체 그 멍청했던 황녀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안타깝게도 경은 날 담을 그릇이 아닌 것 같네.”
카예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두고 수행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게 된 제논은 멍하니 서 있다가 서서히 실소를 흘렸다.
“하, 하하…….”
그러다 얼굴을 감싸 쥐며 신경질적인 광소를 터뜨렸다. 주제도 모르고 자신을 업신여기는 레제프는 차라리 괜찮았다. 후작가의 힘이 아니면 후계자로서 유명무실한 그가 우스웠으니까.
그러나 카예나는 달랐다. 그는 황녀를 두고 제국을 집어삼키면서 겸사겸사 쟁취할 괜찮은 트로피라고 생각했었다. 기꺼이 아내로 맞아들여 충분히 귀여워할 생각이었다. 트로피 주제에 자신에게 발톱을 드러내며 도발하다니.
‘건방지게 감히 나를!’
납치는 실패했고 몸을 사려야 할 때지만 이대로 카예나를 내버려두는 건 더 위험하다.
‘……죽이는 게 낫겠어.’
제논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 * *
카예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공포로 인한 것인가? 그러나 정신은 공포에 오염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 이건 의지와 상관없는 반사적인 증상인 건가?
‘이유를 알 수가 없네. 위협은 느꼈어도 제논이 무섭다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마법의 힘으로 어디까지 가능한지 더 실험해봐야겠지만, 지금까지 사용해본 결과로는 사람을 들어 올릴 수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 처지, 손이 떨리는 이유 등에 대해 건조하게 되짚었다. 이러면 혹시 손 떨림이 멈추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손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설마 이것도 마법 계약의 후유증인가?’
아까 제논을 경계하며 마법의 기운을 끌어올리기만 했다. 그런데 이렇게 손이 떨리는 것이라면 조금 곤란했다.
진짜로 몸이 쇠약해졌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마음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의지로라도 손 떨림을 멈추고자 주먹을 꽉 쥐었을 때였다.
“전하?”
베라가 그녀를 불렀다.
“괜찮으십니까? 혹시 에반스 경이…….”
카예나는 그제야 자신이 무심결에 표정을 그대로 드러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뭔가 더 말이 나오기 전에 원천 차단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국무 회의 안건 때문에 잠시 말을 나눴을 뿐이야.”
“그렇군요…….”
베라는 썩 납득가지 않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을 잠깐 지체한 사이 회의장에 있던 대신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카예나를 발견하고는 예를 갖추고 황급히 사라졌다. 그녀가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오늘 첫 국무 회의에서 단단히 각인시킨 모양이었다.
곧 제드 총기사단장도 회의장을 나왔다. 가볍게 묵례만 하고 황녀궁으로 가려고 했을 때였다.
“황녀 전하.”
카예나는 의아한 표정을 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제드 총기사단장은 카예나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그가 왜 이렇게 정중히 인사하는지 대충은 짐작했다.
계속된 예산 삭감에 중앙군 분위기가 상당히 좋지 않았을 게 뻔했다. 그런 그들에게 제대로 된 권리를 오늘에서야 보장할 수 있게 되었다.
제드는 설마 이런 도움을 황녀에게서 받게 될 줄은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카예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별말씀을요. 아, 말 나온 김에 중앙군에서 시급하게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정리해서 보내주시겠어요? 확인되는 대로 곧장 개선에 들어가죠.”
“예? 이렇게 빨리…….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미 중앙군을 지원하기로 했는데 머뭇거릴 이유가 있나요. 어딘가에서 괜히 책잡으며 귀찮게 하기 전에 실행해야죠.”
제드는 그 책잡을 사람이 드뷔시 재상이리란 것을 제대로 알아듣고 쓰게 웃었다. 그러다 묘하게 감탄한 얼굴로 카예나를 보았다.
처음에 황제가 그녀를 국정 대리인으로 임명했을 때, 내심 우려하긴 했었다. 그런데 오늘 국무 회의 결과를 보라. 카예나의 압승이었다.
게다가 그간 형편없이 삭감되던 예산을 보호해주었다. 사실 그건 제드 총기사단장더러 사퇴하라고 압박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카예나에게 고마웠다.
“그럼 이만.”
카예나는 다시 황녀궁으로 향했다.
‘이만하면 총기사단장이 날 조금은 우호적으로 여기겠지.’
이렇게 신뢰를 쌓아가는 건 상당히 중요하다.
‘레제프가 날 거슬린다고 여겨서 제거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끔 할 방법은 이미 생각해뒀어.’
제드 총기사단장이 카예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면 레제프를 비롯한 그의 세력이 섣불리 행동하진 않을 것이다.
‘제논이 지나치게 초조해 보였지. 날 납치하는 일이 실패하며 느끼는 압박이 상당한 모양이야.’
생각했던 것보다 제논과 훨씬 더 크게 사이가 틀어진 것 같았다. 레제프의 입맛에 잘 맞는 계책을 내는 카예나를 제논보다 더 중용한 탓일 게 분명했다.
‘평소랑 다를 것 없이 과자를 보내는 일로 내 의중을 짐작하겠지.’
피곤하고 바빠도 과자를 만드는 이유는 간단했다. 레제프를 지지한다는 생각에 조금도 변함없다는 듯이 보여야 했다. 단순하고 속 보이는 행동이지만 이런 것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직은 계속 처세해야 할 때였다.
카예나는 황녀궁 주방에 도착했다.
그녀는 빵과 과자를 굽기 전에 베라에게 물었다.
“레제프는?”
“사원에서 팔라딘을 동원해 수도 치안에 관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래. 이런 상황에 중앙군을 더 줄인다면 사원과의 힘 싸움에서 완전히 밀릴 테니 좋은 일이네.”
카예나는 밤샌 탓에 당장 침대에 쓰러져 눕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반죽은?”
“여기 있습니다, 전하.”
주방 하인들은 국정 대리인이 된 카예나가 여전히 간식을 만드는 걸 어리둥절하게 보았다. 카예나의 위세가 대단해진 건지 아닌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황족은 원래 이런 건가?’
심지어 일주일 사이에 벌써 두 번이나 납치를 당할 뻔하기도 했다. 그들은 카예나가 주방에서 평소처럼 요리하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꼈다.
카예나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빵과 과자를 구워냈다. 과일주스도 넉넉히 만들어 차갑게 식혀두라고 말했다.
그 사이 총기사단장의 보좌관이 찾아왔다.
“중앙군 소속, 워렌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카예나는 소매를 걷어붙인 채 오븐에서 과자를 확인하다가 그를 보았다.
“아아. 제드 총기사단장이 보낸 사람인가? 벌써 개선사항을 작성하다니, 빠르네.”
워렌은 오븐을 확인하는 황녀라는 이상한 광경을 입 벌리고 바라보다가 깍듯하게 외쳤다.
“그렇습니다!”
그는 대단한 미모의 황녀에게 주눅 들었다. 여신이 과자를 굽고 있어……. 잠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미안한데 잠깐만 기다려주겠는가?”
“명을 받듭니다!”
카예나는 지나치게 군기가 든 워렌을 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일단 여자가 군 통솔에 손을 댄다며 무시하지 않는 태도는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뒤처리를 주방 하인들에게 맡기고 앞치마를 풀었다.
“여기 보고서입니다.”
카예나는 손을 닦고서 보고서를 들었다. 그간 중앙군이 혹독하게 방치당한 모양인지 필요한 품목이 너무 많았다.
“베라, 황녀궁 예산이 제법 남았지?”
예전에 레제프가 대폭 늘려주었던 예산은 아직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럼 이른 시일 내로 황궁에 방문할 수 있는 포목상인을 수배하도록 해.”
토지 개척사업을 진행하기 전에 겉모습이 떨어져 보이지 않게 해두는 게 좋을 터였다.
“궁내에서 차출할 수 있는 궁정 하인을 모두 동원해 두렴. 중앙군의 위생 개선에 들어가야겠어.”
“준비하겠습니다.”
카예나가 워렌에게 물었다.
“군대는 조리병이 예산과 식단 편성을 조율하던가? 보급행정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말해줄 수 있겠는가?”
워렌은 황녀가 군대에 익숙한 사람처럼 말하자 넋을 놓았다가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렸다.
“말씀대로 조리병이 예산과 식단을 관리합니다. 보급행정병은 따로 있습니다.”
“그럼 새로 편성된 예산으로 식단을 새로 짜라고 전달하게. 조달할 식자재는 상단을 연결해줄 테니까.”
“명을 받듭니다!”
카예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보고서를 쭉 읽어내렸다.
“며칠 무리하면 금주부터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대부분이군. 베라, 조금 수고해야겠구나.”
“염려치 마십시오.”
“황녀궁 예산은 적당히 남겨두고 전부 중앙군으로 옮겨줘.”
지금 대체 무슨 말이 오가고 있는 거지?
워렌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주방 하인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전하, 과자가 다 구워졌습니다. 황자 전하께 보내드릴 양은 평소와 비슷하게 준비하였습니다.”
“잘했다. 이제 말하지 않아도 잘하는구나.”
주방 하인이 그녀의 칭찬에 볼을 발그레 물들였다.
카예나는 조금 큰 바구니를 준비하여 그곳에 붉은색 체크무늬 천을 깔고 과자를 수북하게 담았다. 덮개까지 씌운 카예나가 워렌에게 내밀었다.
“……?”
워렌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히 보았다.
“팔이 아프구나.”
카예나의 말에 워렌이 그제야 부리나케 바구니를 들었다. 과자 양이 상당하여 꽤 묵직했다.
“가져가서 나눠 먹으렴. 양이 많지 않아 미안하구나.”
그 많은 과자를 구운 게 설마 자신들 때문이었다고?
카예나는 만들어둔 주스도 안겨주었다. 워렌은 도무지 믿기지 않아 말까지 더듬었다.
“어어…, 그럼 이건…….”
“중앙군 기사들 먹으라고 좀 넉넉히 구웠다. 아, 설마 과자를 싫어하느냐?”
“그, 그렇지 않습니다!”
워렌은 믿기지 않는 호의가 여전히 얼떨떨했으나 우선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전하!”
카예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보다가 자상하게 눈매를 휘며 작게 웃었다.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가 아니라 감사히 잘 먹겠다니. 그런 종류의 인사는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구나.”
워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