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17
악녀는 마리오네트 16장. 정리와 정립(17/33)
16장. 정리와 정립
레제프는 업무에 정상적으로 복귀하며 처리할 일이 있어서 서재로 향했다.
‘이제 정식으로 하녀장을 선발해야겠어.’
황궁 내에서 카예나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높아지는 건 괜찮지만 제어할 수단은 항상 필요하다.
‘곧 성년식이니까 샤프롱도 필요하고.’
그는 제 유모를 카예나의 샤프롱으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한 통의 편지와 함께 황제에게 상소를 올릴 내용을 작성하던 중 노크가 들렸다.
“들어와.”
황녀궁 시녀, 줄리아였다. 레제프는 줄리아를 발견하고는 펜을 내려놓았다. 줄리아는 레제프를 보더니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며 양순한 자태로 예를 올렸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줄리아 에반스?”
줄리아는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너무 동요하지 않는 척, 간식을 들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황녀 전하께서 보내신 간식입니다.”
레제프는 눈꼬리를 유려하게 접으며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군.”
그 미소를 본 줄리아는 문득 한숨지을 뻔했다. 그러나 얼른 정신 차리며 크리스털로 세공된 잔에 차가운 주스를 따랐다. 레제프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뻗어 줄리아의 손을 잡았다.
“어머!”
그녀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레제프는 자연스럽게 주전자를 빼앗아 들었다.
“네가 들기에는 무거울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 잔을 채웠다. 줄리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준비하느라 고생했구나.”
다정한 관심에 줄리아는 몸을 꼬며 작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전하.”
레제프는 문득 줄리아의 드레스를 보았다. 보석과 레이스가 한가득 달려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제게 잘 보이려고 한껏 꾸민 티가 났다.
“예쁘구나.”
“…!”
그는 피식 웃으며 드레스를 가리켰다.
“드레스가.”
그러자 줄리아의 입술이 살짝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입은 사람은 더 보기 좋고.”
이어진 말에 줄리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서재에서 햇빛을 받으며 업무를 보던 황자가 미소와 함께 자신에게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지금이 어느 소설에서 나오는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마치 사랑이 시작될 것 같은 순간이었다.
“수고했으니 이만 나가보렴.”
줄리아는 아쉬웠으나 레제프가 다시 펜을 들자 드레스 자락을 잡았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전하.”
그녀가 나가고 레제프는 다시 펜을 놓았다. 부드럽게 짓고 있던 미소가 싸늘하게 식었다.
“제 오라비나 동생이나 주제 파악이라고는 조금도 할 줄 모르는군.”
감히 카예나를 넘보며 납치를 사주한 제논을 떠올리면 당장 목을 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줄리아도 사태파악 못 하고 어리석게도 자신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꼴이 우스웠다.
그에 비하면 카예나는 어떠한가. 누이는 험한 꼴을 당했던 사람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담담하다.
그의 시선이 과자가 담긴 접시와 주스에 닿았다.
‘이것도 다 누이가 준비한 것이지.’
카예나는 지금까지 계속 달라진 것 없이 같은 행동을 보였다. 간식을 준비하고 늘 자신에게 신경을 쓰는 등, 헌신적이고 다정한 모습이었다. 그게 보기 좋았다.
레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의 책장 중 하나를 열자 비밀스러운 집무실이 나타났다.
“자밀.”
그가 제 비밀수행원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전에 초상화 건은 어찌 되었느냐?”
“제국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행로의 지역 영주는 모두 포섭했습니다. 거리 화가를 비롯해 조각사가 황녀 전하의 성년식을 기념하는 예술품을 제작해 광장마다 전시할 예정입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카예나를 이곳에 옭아맬 수 있는 완전한 방법이 뭘까?
‘누님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 방법에 뭐가 있을까.’
클로렌스 엘리반이 죽었으니 누이에게는 감정적으로 의지할 사람이 줄어들었다. 그는 줄리아에게 황자비 자리를 약속하는 척 유혹할 생각이었다.
‘베라, 그 시녀는 누님께 넘어간 듯하고.’
수잔은 회유할 수 없을 듯했다. 그녀는 몹시 까다롭고 성질이 나쁘다. 게다가 황가에 그다지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올리비아란 여자는…….’
레제프는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었다.
‘누님과 닮았어…….’
물론 둘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많았다. 그런데 묘하게 닮았다. 그게 레제프의 신경을 건드렸다.
‘거슬리는 여자야.’
올리비아는 레제프에게 두려움이나 경외심, 하다못해 외모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싫다거나 좋다는 느낌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제 누이를 볼 때는 녹색 눈동자에 생기가 피어났다.
“카예나는 내 것인데.”
얼마 전 이델도 그랬다. 그들만이 아니다. 계속해서 카예나를 흠모하고 그녀의 관심을 원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그는 슬슬 카예나의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밀.”
“말씀하십시오.”
“황녀궁 소속 궁정인 중에서 전부터 자리를 보전한 것들이 더 있었지?”
“도나, 애니라는 하녀입니다. 지금은 하급 시녀로 진급했습니다.”
“둘 중에 처지가 더 어려운 자가 누구냐.”
“도나라는 하급 시녀에게 부양할 가족이 있습니다. 양친 모두 병이 있어 황실 의국에서 매번 약재를 받아간다고 합니다.”
레제프가 빙긋 웃었다.
“그쪽이네.”
그 말에 자밀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사라졌다. 레제프는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은밀한 집무실에서 나와 서재로 향했다. 그는 종을 흔들어 하인을 불렀다.
“오늘 티타임은 누님과 가져야겠다. 보양 될 만한 간식을 준비해서 연통하거라.”
“예, 전하.”
요즘 사건도 많고 서로 바빠서 마주할 시간이 적었다. 오히려 누이와 라파엘로가 훨씬 자주 시간을 보냈다고 봐도 무방했다.
‘라파엘로 공작을 만나지 못하게 훼방을 놔야겠는데.’
그는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키드레이 공작가는 섣불리 건드릴 수 없다. 게다가 카예나와 공작이 긴밀한 사이처럼 보이기만 해도 세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요즘 제 누이는 밖을 돌아다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나갈 때마다 사고가 일어나고 파리 떼가 달라붙었다.
“어서 황위를 물려받아야겠는데…….”
언제가 좋을까.
똑똑.
하인이 들어와 아뢰었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황녀 전하께서도 언제든 오라고 하십니다.”
레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황녀궁으로 가자.”
* * *
카예나는 업무를 정리해두고 잠깐 한숨 돌렸다. 국정 대리인이 되어 가지게 된 몇 가지 권한을 정리했다. 그중에는 레제프 세력이 자신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게끔 조치하는 일도 있었다.
‘마법도 연습해야 하는데.’
입술 새로 얕은 숨이 새어나갔다.
“레제프 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눈가를 문지르던 손이 멈칫했다. 유모의 비보를 들은 후로 처음 레제프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고된 일과를 소화해내며 억지로 잊고 있었던 음울한 기분이 슬금슬금 마음에 번져나갔다.
‘미소 지어야 해. 평소처럼 행동해야 해.’
카예나는 자신에게 단단히 일렀다. 레제프는 예민한 아이다. 특히 자신을 향한 감정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들어오라고 하렴.”
문이 열리고 레제프가 들어왔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카예나는 레제프의 말간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제프가 유모를 죽였어.’
레제프는 사람 목숨을 우습게 여긴다. 누군가 죽이는 건 그에게 일도 아니다. 기어오르면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그를 화나게 한 카예나 대신 엘리반 부인을 죽인 것이었다. 카예나가 그녀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은 채. 손끝이 또 차게 식어갔다.
“누님…….”
레제프는 반갑게 웃으며 카예나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나 곧 걸음을 멈췄다. 입가로 지었던 미소가 점차 굳었다.
누이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공허하게 비어버린 눈동자에는 자신을 향한 한 톨의 애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온당히 느껴져야 할 따스하고 다감한 관심이 없었다.
그는 카예나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누이가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였다.
카예나의 그 공허한 표정은 찰나에 사라졌다. 그러나 체감 시간은 상당히 오래된 것 같았다. 누이의 눈매가 예쁜 모양으로 둥글게 휘었다. 입가에는 어느새 익숙해진 미소가 지어졌다.
“바쁠 텐데 쉬지 않고. 몸 상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레제프.”
그녀에게서 평소와 같은 온기가 느껴졌다. 부드럽고 안온한 관심이 쏟아졌다. 잦아들었던 숨이 다시 트였다.
제 착각이었나 보다. 인제 보니 카예나의 얼굴에 피로감이 느껴졌다. 잠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일한다더니 뺨이 조금 수척했다.
“누님이야말로 몸 상하시겠습니다.”
그는 카예나에게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파묻히듯 기대어 있었다. 레제프는 기꺼이 카펫이 깔린 바닥에 앉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다정한 손길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가늘고 곧은 손가락이 그의 찬란한 금빛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었다.
레제프는 비로소 안심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모든 게 평소와 같았다. 자신이 찾아오면 카예나는 곁을 내준다. 보상처럼 애정을 쏟아주었다. 그럼 자신은 그 관심과 애정을 흠뻑 받아먹으며 마음을 수복했다.
레제프는 카예나의 무릎에 이마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걱정했습니다, 누님.”
정말로 걱정했습니다.
빌어먹을 벌레 새끼들이 누이를 데려가 버릴까 봐 수도 전역에 불이라도 질러버릴 뻔했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당신은 여기에 이렇게 있어야 하는데, 다른 누군가를 다정하게 맞이하는 누이라니.
그건 너무나……. 죽여버리고 싶잖아.
레제프는 카예나의 다리를 그러안았다.
“요즘 일이 좀 많았지?”
카예나는 레제프를 달래듯 말했다.
“황궁 밖은 너무 위험한 것 같습니다, 누님.”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황궁 밖은 위험하다. 자꾸만 자신의 것을 가로채려고 하고 위협해댄다. 어서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어야 해.
레제프는 가만히 머물러도 괜찮은 세상을 손에 쥐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위기상황에 탄력적으로 움직일 체계를 세울 필요가 있겠더구나.”
카예나는 방금까지 자신이 해놓은 일을 말했다.
“나 다음의 중앙군 통솔권자로 레제프 너를 지정해두었단다.”
카예나가 군대를 이끌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다음 통솔권자인 레제프가 중앙군을 이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레제프에게 권한을 거저 쥐여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말없이 24시간 동안 사라지면 네게 자동으로 권한이 넘어갈 거야.”
카예나가 사라지면 레제프 세력의 짓이라고 보일 수 있는 장치였다. 레제프는 내포된 정치적 장치가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한 듯 여상스럽게 “그렇군요.” 하고 대답했다.
그때 카예나의 시선이 레제프를 따라 들어온 수행원에게 향했다. 아까부터 수행원이 그의 뒤에서 쟁반을 들고 있었다.
“저건 뭐니?”
그녀의 물음에 레제프가 그제야 무릎에서 얼굴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누님께서 드실 보양식을 준비해왔습니다.”
그는 카예나의 손을 잡고 가느다란 팔을 가리켰다.
“이것 보세요. 너무 마르셨잖…….”
손목이 깨끗하다.
분명 상처가 있지 않았나? 그게 벌써 아무 흔적 없이 다 나을 만큼 시간이 흘렀나?
“왜 그러니?”
카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레제프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다시 빙긋 웃었다.
“너무 마르셨어요, 누님. 진짜 절 생각하신다면 건강도 챙겨주십시오.”
그러자 카예나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내가 이런 잔소리를 듣게 되다니.”
레제프는 작게 웃으며 수행원에게 쟁반을 가져오라고 했다. 덮개를 열자 약재를 넣고 끓인 새고기 요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예나는 입맛이 없었기에 뭔가 먹고 싶진 않았지만, 레제프가 워낙 기대하고 자신을 바라보았기에 한술 크게 떴다. 냄새는 구수하고 좋았다. 그녀는 진한 국물부터 삼켰다.
“음, 맛이 괜찮구나.”
“잠을 못 주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거 다 드시고 한숨…….”
그때 카예나가 입을 다급히 막으며 기침을 토했다.
“쿨럭!”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레제프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이게 뭐야. 왜, 왜 누이가…….
챙그랑! 스푼이 쟁반 위로 떨어졌다.
“누님!”
“황녀 전하!”
카예나와 눈빛이 마주쳤다.
“레제프….”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혼절했다. 레제프는 허물어지는 카예나를 안았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순수한 공포심이 해일처럼 그를 덮쳤다. 레제프는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의원! 의원은 어서 오지 않고 뭘 하느냐!”
의원을 부르러 간 수행원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그녀의 시녀들도 사색이 되어 뛰쳐 들어왔다.
“전하!”
레제프는 긴 소파에 카예나를 눕혔다. 의원은 곧바로 해독제를 황녀의 입에 흘려 넣고 경과를 살폈다.
“누님을 살리지 못하면 누구도 가만두지 않겠다!”
그는 길길이 날뛰며 당장 보양식을 만든 하인을 다 체포하라고 명했다. 그의 수행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하! 주방 하인 중 하나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레제프는 미칠 것 같은 분노에 휩싸였다.
“당장 수도 전역에 병사를 풀어라. 그 자식을 찾아내!”
찾아내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려줄 작정이다. 그자의 일가족을 눈앞에서 하나하나 갈가리 찢어발기고 그의 친구, 연인 모조리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레제프는 분노로 눈앞이 새빨갛게 보일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몸에서 독에 거부반응이 빨리 왔습니다. 최근에 다른 독을 섭취하신 듯한데…….”
“뭐? 다른 독이라고?”
“예. 독의 상성이 맞지 않은 덕에 바로 토해내셨습니다. 곧 정신도 드실 겁니다.”
이젠 분노를 넘어 어이가 없었다.
다른 독이라니. 대체 무슨 독을 어디서 또 먹었단 말인가?
“바로 증상은 나타나지 않으나 몸 내부를 빠른 속도로 쇠약하게 만드는 종류인 것 같습니다.”
“……뭐라고?”
레제프는 그런 독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부황에게 쓰는 독이 아니던가.
“말도 안 돼.”
그걸 카예나가 먹을 일 따위는 없었다. 그간 계속 섭취했을 리도 없었다. 베라라는 시녀가 카예나가 먹는 것을 철저히 관리한다고 했다. 헨버튼 길리안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귓가로 들렸다.
“이건 제가 그런 게 아니라 전하께서 하신 겁니다.”
레제프는 카예나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제가 사라지면 이제 이런 일이 없을 것 같습니까?”
끔찍한 낙인 같은 목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목소리가 정신을 갉아먹어 댔다.
“꽤 소중한 누이 같은데…….”
“아니야…….”
“앞으로 잘 간수하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아니야-!
레제프는 숨을 헐떡였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뭐라도, 뭐라도 당장 부수고 싶었다. 아니면 피를 봐야겠다. 당장.
그는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러나 평소에 늘 차고 다니는 검을 풀어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예나를 만나니까. 그녀가 다칠지도 몰랐기에 검을 풀어두고 온 게 기억났다.
그때 카예나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의원의 말에 시녀들이 카예나에게 다가갔다. 특히 베라는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로 그녀의 곁으로 향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사람으로 된 방벽이 카예나와 레제프 사이를 갈랐다. 그는 얼어붙은 채로 눈뜬 카예나를 바라보았다. 카예나의 고개가 천천히 레제프를 향했다.
“레제프.”
담담한 부름에 레제프는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안도감과 동시에 복잡한 감정이 그를 휘둘렀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알아.”
탁한 목소리였다.
“네가 이럴 리 없지.”
카예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고 말을 이었다.
“나는, 독을 먹은 게 아니다. 보양식을 뒤적인 스푼만 검게 변한 것이다.”
그러자 모두 의아해했다.
“예? 스푼은 은이 아니어서 변색은 없었습니다만…….”
카예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가져와서 만들어라.”
“…예?”
“난 독을 먹지 않았다. 변색 된 은스푼을 보고 놀라서 혼절한 거야. 다들 알아들었느냐?”
그제야 카예나가 레제프 황자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그러는 것임을 이해했다. 베라는 레제프라면 카예나에게 독을 먹이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카예나가 워낙 단호하고 냉엄하게 말했기에 순순히 따랐다.
“명을 받듭니다.”
“어서 처리해라.”
다들 재빠르게 독을 먹은 정황을 지우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에 적신 검은 천으로 얼굴과 손을 닦고 피가 튄 드레스 위에 얇은 겉옷을 입었다. 레제프는 그녀가 피를 토한 흔적도 없이 깨끗해졌을 때 다가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네가 아니란 걸 알아. 그러니 그만 울렴. 얼굴이 짓무르겠어.”
그는 어느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카예나는 한숨을 내쉬며 레제프를 제 옆에 앉혔다. 레제프는 상당히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많이 놀랐나 보구나.”
카예나가 그를 안고 토닥였다. 독을 마신 사람은 카예나인데 그녀가 레제프를 위로하고 있었다.
“어떡해…….”
곁에 있던 줄리아는 레제프가 안타까워 어쩔 줄 몰랐다. 베라는 차갑게 분노했다. 이 모든 사건에 레제프가 연관 있단 사실을 일찍이 눈치챘다.
애초에 레제프만 아니면 카예나가 이런 변고를 계속 당할 이유가 없다. 그런 주제에 카예나에게 위로받고 있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올리비아는 이 광경이 기이하다고 느꼈다. 수잔도 비슷한 감상이었다.
‘너무 이상해.’
다만 올리비아는 더욱 내밀하게 이 상황을 관조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풀 방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엉망으로 뒤엉킨 매듭처럼 보였다. 풀어내려면 끊어버리는 수밖에 없는 그런 매듭이었다.
그게 카예나와 레제프의 관계였다. 이 둘은 풀어낼 수 없는 관계로 느껴졌다. 끊어내야만 하는 그런 관계.
카예나는 레제프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내가 저번에 말했었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
그녀는 남들이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레제프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아래에 있는 것들이 창을 위로 향하게 들고 있음을 잊지 말렴.”
레제프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제논 에반스.’
독을 푼 자가 제논 에반스란 뜻이었다. 눈물은 어느새 멈추었다. 대신 새파란 불길이 일었다.
“몸이 으슬으슬하구나.”
그러자 당장 레제프를 떼어놓고 싶었던 베라가 냉큼 카예나를 부축해왔다.
“쉬셔야 합니다. 어서 침소로 드시지요.”
카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레제프를 보았다.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마. 내가 의지할 이가 너밖에 없다는 거 알잖니?”
“……예, 누님.”
“난 조금 쉬어야겠어.”
레제프는 그녀를 침실 앞까지 안아 들어 옮겼다. 그는 카예나를 내려주고 방에 들어가는 걸 지켜본 후에야 황녀궁을 벗어났다. 당장 쥐새끼를 잡아야 했다.
“전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밖에 의원을 상주시켜 놓겠습니다. 어디 더…….”
“괜찮아.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니 일을 키워서는 안 된다.”
카예나는 시녀들에게 다시 입단속 잘들 하라고 말한 뒤, 뒤처리가 깔끔하게 되는지 확인해보라며 내보냈다. 올리비아만 침실에 남아 카예나를 지켰다.
“잘했다.”
카예나의 말에 올리비아가 고개를 조아렸다.
“주방 하인은 지금쯤 수도를 빠져나갔을 겁니다.”
“그래…….”
카예나는 스스로 독을 먹었다.
얼마 전, 베라와 올리비아가 중앙성 주방을 들쑤신 덕에 그곳을 카예나의 사람으로 채울 수 있었다. 그녀는 레제프가 제게 먹일 음식을 준비할 것을 기다려왔다.
“그 아이가 반드시 한번은 내게 음식을 만들어서 가져오리라고 생각했지.”
카예나가 직접 과자를 구워 계속 보내왔기에 레제프는 은연중에 자신도 그렇게 준비해야겠단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보양식을 떠먹을 스푼은 일부러 은이 아닌 화려한 공예품으로 준비되었다. 보기엔 예쁘지만, 위기상황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런 스푼이었다.
이것은 올리비아를 통해 준비시켜둔 일이기도 했다. 베라는 레제프를 향한 적대감이 선명하다. 레제프처럼 예민한 아이에게 그녀의 감정은 금방 들통날 터였다. 올리비아는 침착하고 담담하다. 또한, 대담하기까지 하다. 여러모로 적임자였다.
“집안에 이상한 빚이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걱정할 것 없어. 다 없어질 테니까.”
카예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눈에 이 상황이 이상해 보일 것을 알아.”
“…….”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라고만 설명해두마.”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올리비아의 대답에 카예나가 엷게 웃었다.
“고마운 말이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아까부터 정말로 몸이 으슬으슬했다.
* * *
황녀를 시해하려는 시도가 또 일어났단 소문은 황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일주일 사이에 대체 이 무슨 난리란 말인가.
게다가 황녀가 막 국정 대리인의 권한을 받고 국무 회의에서 재상과 한차례 마찰을 빚은 뒤였다. 여론은 재상에게 완전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무슨 돼먹지 못한 소리더냐! 내가 황녀 전하를 시해하려 했다니!”
드뷔시 재상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런 헛소문을 낸 자들은 모두 잡아다 경을 칠 줄 알아라!”
“하지만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특히 제드 총기사단장이 황궁 내부를 단단히 조사해봐야 한다며 나서고 있습니다.”
“뭣이?!”
그 말에 재상의 낯빛이 퍼렇게 질렸다.
“당장 진상을 조사해라. 누군지 밝혀내! 내가 아니란 말이다!”
보좌관들에게 소리치던 재상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정말 공교로운 타이밍이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라! 내가 황자 전하께서 준비하신 음식에 독을 풀 리가 없지 않더냐. 그분을 음해하려는 세력에서 꾸며낸 짓이 분명하다!”
이 일은 자연스럽게 하인리히 대공자 측이 연루되지 않았겠냐는 추측도 있었다. 실제로 지금 가장 불리한 압박을 받는 건 하인리히 대공자이기는 했다.
레제프가 자신이 준비한 음식에 대놓고 독을 풀어 그녀를 해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원에서도 이 일이 납치사건과 연관 있을지도 모른다며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재상은 이번 사건에서는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떳떳했으나 다른 부분에서 떳떳한 것은 아니었다. 괜히 엉뚱한 곳에 트집이 잡혀 수세에 몰릴 수 있었다. 재상은 몹시 초조해졌다.
“제논, 제논 경은 어디에 있지?”
시급하게 그와 이 일을 상의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수행원이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제논 경이 최근 두문불출합니다.”
그 말을 들은 재상이 미간을 구겼다. 지금 시기가 어떤 시기인데 황궁을 비우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제논 에반스가 수상한데…….”
지금까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황녀 전하께서 처음으로 납치당하셨던 날에도 황궁을 비웠었지. 최근 황자 전하와 자주 다투기도 했고.”
게다가 황녀를 길들여야 한다며 자신을 부추겨 국무 회의를 긴급 편성하게 했었다. 그 결과, 지금 다시금 독살 사건이 터지며 자신이 연루되었다.
“그자가 설마…….”
드뷔시 재상은 제논 에반스가 내심 재상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마 자신을 실각시키려고 일을 벌인 것인가! 심증에 불과하지만, 얼추 상황이 들어맞았다.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어차피 황궁에 에반스 가문의 수족이 될 대체 인력도 있잖아.’
줄리아 에반스가 있으니 제논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재상님!”
수행원이 낯빛이 굳은 채로 그의 집무실에 허겁지겁 달려왔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헨버튼 길리안의 사교 클럽을 조사하던 중 마약이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근데 그게 왜?”
“그 마약의 출처가 동부 에반스 농장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재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방금 실각시키고자 마음먹은 건 제논이었지 에반스 가문 자체가 아니었다.
“하인리히 대공자 측에서 대마초 농장을 발견했다며 들고 나섰습니다!”
그의 안색이 이젠 거멓게 죽었다.
“황자파 귀족들을 소집해! 당장!”
* * *
날이 밝자 의원이 곧바로 황녀의 용태를 살피고자 침실을 찾아왔다.
“크게 걱정하실 것은 없겠습니다. 약만 잘 챙겨 드시면 됩니다.”
카예나는 의원의 말을 들으며 약을 먹었다.
“줄리아가 바쁜 모양이네.”
원래는 황녀가 먹을 약은 줄리아가 준비해야 했는데, 그녀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지금 에반스 가문에서 마약 유통을 하고 있다고 하인리히 대공자 측에서 증거를 들고 나타났다고 합니다.”
베라가 말했다.
“그래?”
카예나는 모르는 척 말했다.
이번에 레제프가 준비한 보양식에 든 독은 하인리히 대공자 측에서 꾸민 일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생겼다. 그러자 요즘 황녀의 신변을 두고 촉각을 세우던 사원은 하인리히 대공자 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이스터는 납치사건의 진범이기도 했으므로 사원의 관심을 받아서는 곤란했다. 그러니 카예나가 알려준 마약 건을 터뜨려버린 것이다. 에반스 가문에게 모든 시선이 쏠리도록.
카예나는 잠깐 몸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이만하면 일상생활은 가능하겠어.”
그녀가 곧바로 몸을 일으키며 업무를 시작하려고 하자 베라가 경악했다.
“전하, 독을 드신 게 바로 어제 일입니다. 게다가 요즘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잖습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누워있을 수도 없잖니.”
카예나는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 오후 티 타임엔 홍차를 타주겠니?”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홍차는 속을 쓰리게 할 수 있으니 속을 보할 수 있는 허브차를 드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카페인이 필요해서 커피 대신 홍차로 타협한 것인데 올리비아가 칼같이 차단했다.
그녀는 그냥 홍차로 준비해달라고 말하려다 관두었다. 한동안은 먹는 걸 좀 조심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괜히 몸이 아프면 일하기 더 힘들어질 뿐이니 확실히 컨디션을 좀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네 말대로 준비하는 게 좋겠구나.”
베라는 자신이 말하려 했던 것을 대신 짚어준 올리비아에게 고맙다는 듯이 눈짓했다.
카예나는 집무실로 가서 어제 갑작스레 일어난 사건 때문에 정리하지 못한 업무부터 처리했다. 특히 이렇게 정신없을 때 중앙군 처우 개선을 강행할 생각이었다. 또한 성년식에 관련한 문제도 처리해야 했다.
‘레제프가 곧 레르반스 도티를 하녀장으로 불러들이겠지? 성년식에 맞춰 내 샤프롱 자리에 앉히면 단번에 황궁 내 영향력을 다질 수 있으니.’
하지만 절대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다.
“수잔. 하멜 백작가로 편지를 쓸 것이니 준비해두렴.”
“네, 전하.”
다들 업무로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집무실에 남아있던 베라가 안쓰러운 눈으로 카예나를 보았다. 지금이 카예나에게 기회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이렇게 쉬지 않고 일만 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수라도 좀 드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오늘 좀 일찍 잠자리에 들면 되니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베라는 카예나가 말은 이렇게 해도 절대 일찍 잠들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럼 마사지는 어떠신가요? 애니가 향유를 발라 마사지하는 걸 좋아하시잖습니까.”
어떻게든 카예나의 피로가 좀 풀릴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카예나도 그 마음 씀씀이를 알았기에 거절하지 않고 그러라고 했다. 베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공방에서 은스푼이 도착했는데 보여드릴까요?”
“그래.”
드디어 에스테반 황제에게 진상할 진짜 은으로 된 티스푼이 도착했다. 그녀는 은스푼 디자인을 그려놓은 그림과 실물을 확인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그림은 금고에 넣어두렴.”
똑똑.
“전하, 애니입니다.”
애니가 부름을 받고 들어왔다. 그녀는 장미 향유로 손을 흠뻑 적신 뒤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어깨가 뭉치셨어요. 요즘 너무 무리하신 탓인 듯합니다.”
애니의 말에 카예나가 웃으며 핀잔했다.
“너도 베라를 따라 잔소리꾼이 되어가는 모양이구나.”
“전하!”
베라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물들였다. 그녀는 뺨을 식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궁정을 한번 살피고 오겠습니다.”
카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라고 했다. 베라는 일부러 자리를 피했다. 애니가 누구 세작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일부러 둘만 남겼다.
베라가 방에서 나가자 침실엔 카예나와 애니만 남게 되었다. 애니는 카예나의 희고 매끈한 팔을 쭉 밀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납치사건에서 다쳤던 손목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매끄러웠다.
‘벌써 상처가 다 나으셨네.’
애니는 의원 대신 황녀의 손목에 붕대를 감았던 적이 있었다. 분명히 손목에 퍼런 멍이 든 것을 보았었는데.
“애니.”
카예나가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네, 전하.”
“혹시 요즘 어린 남자애들은 뭘 좋아하는지 아니?”
“몇 살 정도를 말씀하시는지요?”
“열세 살.”
구체적인 나이였다. 애니는 누군가를 특정해서 한 질문이란 걸 눈치채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카예나 근처에 13살 된 어린 남자아이가 있던가?
“글쎄요……. 귀족 가 도련님이라면 그 나이대쯤엔 혈통 있는 망아지를 선물 받기도 한다고 들은 적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특별한 장난감이 없었다. 남자 귀족들은 취미로 승마를 많이 타곤 했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서로 누가 더 빠른 말을 소유했는지 가문끼리 내기를 하기도 했다.
‘이델에게 혈통 좋은 서러브레드나 해크니종을 선물하는 게 좋겠네.’
“괜찮은 조언이구나.”
카예나는 테이블에 벗어둔 작은 진주가 달린 반지를 선물로 주었다.
“너무 과분합니다, 전하!”
진주알의 표면이 매끄럽고 광택이 훌륭했다. 최상품이란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네 조언이 적절해서 주는 것이니 받아두렴.”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애니는 감사하게 반지를 받았다.
‘말을 선물할만한 13살짜리 귀족 남자…….’
그녀는 마사지를 계속하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뭔가 번득 떠올랐다.
‘이델 린드버그 영식의 이야기로구나!’
그때 베라가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특별한 소식이라도 있니?”
“레이디 카트린이 하멜 백작가의 수양딸로 공식 입적되었습니다. 하멜 백작가 소유의 저택으로 집도 옮겼다고 합니다.”
레제프가 예전에 카예나가 일러준 대로 처리한 모양이었다.
“이제 그녀가 내 외가 친척이 되었구나. 혈통서가 있는 좋은 말을 좀 알아봐 줄래? 금주 내로 찾아가 인사할 때 선물해야겠다.”
“준비하겠습니다.”
애니는 마사지에만 집중한 척 귀를 열어두었다.
‘역시 이델 린드버그 영식의 이야기였구나. 오늘 키드레이 공작저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
카예나의 업무 지시를 받고 집무실을 나갔던 수잔이 돌아왔다. 편지를 쓸 도구를 가져왔는지 손에 관련 물품을 들고 있었다.
“이쯤이면 되었다.”
카예나가 몸을 일으키며 애니에게 말했다. 카예나는 카트린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 후, 올리비아에게 바로 전달하라고 명했다.
“내일 카트린 하멜을 만나러 갈 것이니 답신을 받아오너라.”
“명을 받듭니다.”
올리비아가 고개를 숙였다.
* * *
대공자 쪽은 화약창고와 황녀 납치 정황을 지우려고 바빴다. 레제프 지지자들은 에반스 가문의 대마초 농장 문제로 발칵 뒤집혔다.
그런데 정작 레제프는 에반스 가문의 문제가 아닌 이유로 두문불출해 보였다. 어쨌든 세상은 카예나와 연계된 문제들로 정신없었다.
그에 비해 카예나는 아침부터 느긋하게 외출을 준비했다. 갓 구워내 쫄깃하게 늘어나는 빵에 수프를 적셔 먹으며 몸단장했다.
“오늘도 줄리아는 보이지 않네.”
베라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갑자기 휴가를 신청했습니다. 전하께 재가받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괜찮다. 황녀궁이야 이제 안정되고 있으니까.”
가문이 뒤집혀서 난리가 났는데 황녀의 시중을 들 정신이 없겠지. 카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울을 보았다.
금실 자수가 놓인 감색의 실크 리본을 머리카락에 엮어 위로 틀어 올렸다. 드레스는 산뜻한 민트색이었다. 귀걸이나 목걸이는 은은한 광택을 내는 진주로 통일했다.
수잔이 옅은 색감으로 된 코르사주를 가져왔다.
“코르사주로 허리를 장식하는 게 어떠세요?”
카예나는 그러라고 했다. 수잔은 드레스에 주름을 잡아 코르사주로 고정했다. 그러자 드레스의 주름이 치마를 더욱 풍성하게 보이면서도 우아한 물결 모양을 냈다.
“코르사주를 이렇게 할 수도 있군요.”
곁에서 보던 올리비아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수잔 양의 안목이 가장 유행하는 의상실 감각 못지않은 것 같네요.”
그러자 수잔이 어깨를 으쓱했다.
“블랑 의상실이요? 괜찮긴 한데 미혼의 영애들이 주 소비자층이라 황실의 위엄과는 거리가 있죠.”
카예나는 자신이 라파엘로의 저택에서 입었던 살구색 드레스를 떠올렸다. 확실히 상큼하고 활기찬 느낌이 강하긴 했다.
베라가 설명했다.
“혼기가 찬 영애들이 결혼 시장에 나설 때 많이 선택하는 곳이라 그런 것 같더군요.”
“아아.”
“황녀 전하의 성년식에 그 의상실 드레스가 꽤 보이겠네요.”
그때 카예나가 피식 웃으며 그들을 보았다.
“그러는 자네들도 미혼이면서. 내 성년식에서 입을 드레스는 미리 준비해두었니?”
그러자 셋 다 표정이 떨떠름했다.
‘줄리아를 제외하면 다들 결혼에 관심이 없었던가.’
어쩌다 이렇게들 모였는지.
카예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카예나는 짐짓 엄하게 말했다.
“그대들 집안으로 패물과 옷감을 넉넉히 보냈으니 꼭 블랑 의상실 못지않은 드레스로 입고 와야 해.”
“……보살핌에 감사합니다, 전하.”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티를 숨기지 못하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들 중 올리비아는 비교적 담담한 편이었다. 카예나가 보낸 하사품이 꼭 필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올리비아의 동생이 올해 내 성년식에서 데뷔탕트를 치른다지? 이름이 엠마였던가.”
“그렇습니다.”
“꼭 즐거운 기억이 되길 바란다고 전해주렴.”
올리비아가 고개 숙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예나는 몸단장을 끝내고 수잔에게 수고했다며 금패를 하나 주었다. 그러자 수잔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황궁 서고를 보고 싶어 했지?”
“네, 전하!”
수잔은 고서나 예술품, 골동품 등에 상당히 조예가 깊고 관심도 많았다. 그녀는 황족의 허가가 없으면 황실에서 보관 중인 예술품을 볼 수 없으니 늘 카예나의 눈치를 살폈었다. 카예나는 그 사실을 알았기에 출입 권한을 증명하는 금패를 수잔에게 주었다.
“얼른 가보고 싶을 텐데 이만 가보렴.”
“감사합니다.”
그 말에 수잔은 얼른 인사를 올리고 드레스 룸에서 나갔다. 베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럴 때는 아닙니다, 전하라고 말하며 사양해야지.’
줄리아나 수잔은 여전히 황녀의 시녀로서 자각이 너무 부족했다.
“아, 이델 선물은 어떻게 되었니?”
베라가 답했다.
“수잔 양이 레폴 백작가에 물어보겠다고 합니다.”
레폴 백작가는 수잔의 가문이니 가장 좋은 망아지를 보내올 것이다. 카예나는 수잔이 자신에게 생각보다 더 호의적이라고 느꼈다.
‘내가 득세하든 말든 제 주관대로 행동할 사람인데.’
나쁘지 않다. 카예나는 괜한 잡음은 없을 것 같아 나름 안심되었다. 그녀는 올리비아에게 마차를 준비하라고 했다. 올리비아까지 나가자 베라가 내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도 애니가 황궁에서 나간 것 같았습니다. 사람을 붙였는데 금방 따돌려졌다고 합니다. 능숙한 아이입니다.”
그녀가 아직 누구의 세작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미끼는 던져두었으니 조만간 꼬리를 밟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베라는 몹시 난감해하는 얼굴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클로렌스 엘리반 남작 부인의 부고 소식이 오늘 전령을 통해 도착했습니다.”
카예나는 이미 그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편지 상자에 유모가 직접 그림을 그린 편지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
“이런 소식을 알려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베라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 숙였다. 카예나는 입술을 잠깐 달싹이다가 가만히 다물었다.
사인을 물어봐야 했다. 유모는 살해당했으나 자결로 위장되었다고 했다. 자결은 명예롭지 못한 죽음이다. 스스로 숨을 끊었다고 되었으니 사원에서 시신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카예나는 숨을 삼키고 입술을 열었다.
“…사인은?”
“자결이라고 판단되었으나 사원에 엘리반 부인이 살해당했단 익명의 제보가 있었다고 합니다.”
‘라파엘로구나.’
카예나는 그 익명의 제보자가 라파엘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래……. 안타까운 일이구나. 엘리반 남작가에 남은 혈족이 있는지 알아보고 안위를 보살펴주렴.”
“예, 전하.”
“그럼 내려가자.”
카예나는 마차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자신의 외척이 된 카트린 하멜을 만나러 갈 참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그런 이유였으나 다른 목적이 있었다.
‘카트린에게 내 샤프롱 자리를 제안할 생각이니까.’
카트린은 끈 떨어진 정부 신세라며 비웃음당했었다. 그런데 모두가 예상치 못하게 하멜 백작가의 수양딸이 되며 사교계가 한차례 들썩였다. 카예나는 거기에 쐐기를 박아줄 참이었다.
황녀의 샤프롱은 상당히 영예로운 자리다. 특히 그것이 국가적인 기념일에 대동하는 샤프롱이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건 카예나가 그녀를 외척 어른으로 여긴다는 것을 단번에 보여줄 수 있는 일이었다. 카예나가 그녀를 챙기려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황위를 쟁탈하든 실패하든 다음 대 황제는 이델이 되어야 해.’
그의 출생, 뒷받침할 가문, 영향력을 지금부터 다져놓아야 한다. 레제프가 또다시 황제가 되어 무고한 이들을 죽이게 할 수 없었다.
“다녀오마.”
카예나는 자신을 보좌할 시녀로 올리비아만 데리고 황성을 떠났다. 마차는 카트린이 이사한 새로운 저택이 아니라 하멜 백작가로 향했다.
그들이 하멜 백작가의 가족이 되었음을 외부에 보여 주어야 했으니 잠깐 머물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카예나는 제 이모가 된 새로운 집안 어른을 뵙겠다는 명목으로 방문을 요청했다.
‘하멜 백작이 쌍수 들고 환영했겠지.’
백작은 그간 황녀와 접촉하지 못해 몸이 달아있었다. 레제프가 정치적인 문제에서 누이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었기 때문이다. 실상은 하멜 백작가에서 허튼수작이라도 부릴까 봐 경계한 것이다.
“하인리히 대공가는 한동안 움직이기 어려울 거야.”
카예나는 올리비아와 단둘만 있는 마차 안에서 입을 열었다. 올리비아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귀를 기울였다.
“대공가와 연계된 상단에서 빚 독촉은 하지 않으면서 액수만 불려가고 있다고 했지? 돈도 더 빌려준다고 하고?”
“그렇습니다.”
“그건 대공자의 수법 중 하나야. 그런 식으로 채권을 넘겨받으면 빚으로 협박하며 가주를 회유하거나 제 사람으로 바꿔치기하지. 그렇게 세력을 불렸어.”
카예나의 설명에 올리비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무도한 자가 어찌…….”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떤 더러운 짓도 서슴없이 하는 인간이 바로 예이스터였다.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폭력을 쓸 인간이야.’
예이스터는 사람의 말로 회유되지 않는다. 오직 돈과 권력으로만 대화가 가능한 자였다.
“도착했습니다, 전하.”
마차는 하멜 백작가에서 멈췄다.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듯이 압도적인 대저택을 오랜만에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예전엔 이 저택이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백작가의 사용인들이 카예나를 발견하더니 예를 올렸다. 한참 전부터 밖에서 카예나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봄볕에 다들 얼굴이 발갛게 익어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하!”
금발에 녹안의 남자가 카예나를 맞이했다. 카예나의 외숙부인 조나단 경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외숙부님.”
그러자 조나단이 활짝 웃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차,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물론이에요.”
“요즘 일이 많아서 외숙부로서 참으로 걱정스러웠습니다. 그토록 찾아뵙고 싶었는데 참…….”
그는 레제프를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지 약간 표정이 굳었다가 다시금 활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백작가에 이렇게 젊은 손님들을 한꺼번에 맞는 것도 오랜만인 듯합니다.”
카예나가 멈칫했다.
‘젊은 손님들?’
하멜 백작은 노쇠하여 거동도 불편한 노인이고 다음 대 하멜 백작이 될 조나단도 중년 신사다. 이런 재미없는 곳에 젊은 사람이라니.
카예나는 모종의 예감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세작을 심은 자일지도 몰라.’
“어머, 다른 손님이 있나요?”
“예, 키드레이 공작님이 방문하셨지 뭡니까.”
“…키드레이 공작님이라고요?”
그 남자가 왜 여기에?
카예나가 의아해하는 사이 응접실 문이 열리며 라파엘로가 걸어 나왔다. 마치 카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애니가 라파엘로의 사람이었구나.’
자신이 하멜 백작가로 가겠다고 말을 흘리자마자 보란 듯이 나타난 것을 보니 이 남자, 일부러 애니가 제 사람이라는 걸 알리려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라파엘로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그녀를 반겼다.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 황녀 전하.”
카예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 지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공작님.”
그러고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입을 벙긋거렸다.
‘있다가 봐요.’
라파엘로는 그녀의 입 모양을 읽어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어 올리비아도 인사했다.
“공작님께 인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올리비아 양.”
그들의 인사는 몹시 담백했다. 두 사람 사이가 마치 지난 생에 다닌 직장에서의 자신과 동기의 관계처럼 보였다. 아는 얼굴이니 그저 인사만 하고 쌩하니 지나치는 그런 관계랄까.
‘라파엘로의 마음이 내게 향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사이가 건조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의아했지만, 차라리 다행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라파엘로는 금방 카예나의 앞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기 위함이었다. 카예나는 눈을 흘기며 손을 내밀었고 라파엘로는 묘한 사인을 보내듯이 깊게 쥐며 손등에 키스했다.
그가 곧 상체를 쭉 펴며 카예나를 제대로 에스코트했다.
“제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짝!
조나단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손뼉을 쳤다.
“그럼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카트린 양을 에스코트해올 테니.”
그는 지금 수도에서 가장 주목받는 두 사람이 자신의 응접실에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즐거워했다. 카트린을 에스코트한다는 명목으로 이 응접실에 자연스럽게 합석할 심산이었다.
조나단이 응접실을 나가자 카예나는 주어를 빼놓고 물었다.
“공작님이셨어요?”
세작을 심은 게 당신이었어?
그러자 라파엘로가 순순히 시인했다.
“네.”
“……제가 뭘 물은 건지는 이해하고 하는 말이죠?”
라파엘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어제 연락을 받고서야 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로 왔습니다.”
카예나는 약간 허탈해졌다.
“그래서 겸사겸사 날 보러왔다는 건가요?”
라파엘로는 엷게 웃으며 카예나의 곁에 앉았다.
“그것도 그렇지만, 실은 이델 하멜 영식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카예나는 가당찮은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이델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
황위 계승권자로 이델을 지지할 결단을 내린 게 아니고서야……. 카예나는 순간 멈칫했다.
“공작님이 왜 이델을 만난다는 건가요?”
“그건….”
똑똑.
그때 응접실 문을 두드리고 사용인들이 들어왔다. 카예나와 라파엘로는 입을 다물었다.
“견과류가 든 것은 없겠지?”
올리비아가 하인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따뜻한 우유도 따로 준비해다오. 전하께서 드시기 편한 부드러운 다과를 더 준비해주고.”
“알겠습니다.”
하인들이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올리비아는 일부러 다과를 까다롭게 점검하며 시선을 끌었다.
곧 응접실로 카트린과 조나단이 나타났다. 그들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카트린이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카예나는 살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이제 제 외가의 어른이시니 너무 그러실 것 없어요.”
그 말에 조나단이 껄껄 웃으며 호방하게 말했다.
“그럼요, 그럼요. 이제 한 가족이 아닙니까!”
카트린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이번엔 라파엘로를 향해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공작님. 카트린 하멜입니다.”
“반갑습니다. 라파엘로 키드레이입니다.”
그들은 한 자리씩 차지하며 앉았다. 언제 또 준비하라고 한 것인지 악단이 들어와 연주를 시작했다. 이 자리가 사전에 계획된 우아한 모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조나단을 비롯한 하멜 백작가의 기대감이 얼핏 읽혔다. 그들은 카예나의 높아진 영향력이 하멜 백작가에 반드시 도움되리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렇게 카트린을 만나러 온 것도 하멜 백작가의 위신을 세우고 권력을 모으기 위함은 아닐지 계산 중이리라.
카예나는 조소를 감췄다. 애석하게도 하멜 백작가는 카예나의 도구로 필요할 뿐이지 특별한 애착은 없다. 애착을 갖기에는 하멜 백작가는 너무 썩어있었다.
그때 카트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최근 전하의 신변을 두고 이런저런 일이 많아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를 찾아와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제 이모시잖아요.”
이제 서류상으로는 그렇지만 굳이 카예나가 그녀를 친근하게 여길 이유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카트린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이델을 만나러 왔다는 라파엘로도 이상했다. 키드레이 공작과 이델의 만남이 새로운 후계자의 등장으로 비칠 수 있으니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을 때 카예나가 운을 뗐다.
“이델은 아직 아카데미에 있나요?”
“네. 아직 수업받을 시간이에요. 곧 돌아오겠군요.”
카트린은 근래 들어서 이델이 카예나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을 들었다. 그녀가 자신과 닮았으며 누님이라고 부르라고 했다는 이야기였다. 또한, 아카데미에서도 이델을 위해 조치해주었다는 것도 알았다.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친절을 베푼 의도는 의심스러웠다. 그들은 결코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특히 레제프가 가운데에 얽혀 있으므로 관계가 더 복잡했다.
카예나는 그녀의 복잡한 생각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실은 이모님께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방문을 요청했어요.”
본격적인 용건이 나오려고 하자 조나단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제게는 어머니도, 유모도 없어서 성년식을 챙겨줄 어른이 부재한 상태예요.”
“그 말씀은…….”
“이모님이 부디 제 샤프롱이 되어주셨으면 해요.”
샤프롱이라는 말에 방의 분위기가 경직되었다.
카트린에게는 지나치게 과분한 자리였다. 사교계의 이목이 카트린에게 집중될 게 뻔했다. 황녀의 샤프롱이 된다면, 그녀는 황실의 어른으로 대우받을 수 있게 될 터였다.
‘하지만 왜?’
카트린이 주저하자 조나단이 불쑥 끼어들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전하. 성년식에는 귀부인의 도움이 꼭 필요한 법이지요. 저는 언제나 그 점이 염려스러웠습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말을 흘렸다.
“제 처가 그 역할을 해도 좋았겠지만…….”
카예나는 조나단의 말을 못 들은 척 말을 돌렸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화목한 가정은 귀족 사회에서는 중요한 일이니까요. 황실에서 그 모범을 보여야지요.”
충분히 납득할 이유였으나 석연찮은 것도 사실이었다. 카트린은 어쨌든 자신과 아들을 보호할 또 다른 방패가 생기는 좋은 기회이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전하께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카예나는 싱긋 웃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 * *
이델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건물 밖으로 달려나갔다. 오늘 하멜 백작가로 카예나가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초조하게 마차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때 휘황찬란한 마차에서 근사하게 차려입은 시종이 내리며 이델에게 인사했다.
“모시러 왔습니다, 도련님.”
이델은 마차를 확인했다.
‘하멜 백작가의 문양이 맞는데…….’
원래는 카트린과 이델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며 튀지 않는 평범한 마차를 보내왔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델을 상당히 대우하는 것처럼 화려한 마차가 오다니.
‘카예나 누님 때문이구나.’
마차와 이델을 힐끗거리는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게 카예나의 힘이자 위상이었다.
“타시지요.”
시종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이델은 머뭇거리다가 마차에 올랐다. 그는 괜히 교복에 구겨진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카예나가 집단 폭행에 연루된 학생들을 강력히 처벌하라고 말한 이후로 이델에게 시비 거는 사람들은 쏙 사라졌다. 그 덕분에 이제 교복이 더러워질 일은 사라졌지만, 그는 습관처럼 옷을 정리했다.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이델은 마른 침을 삼키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누…, 황녀 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이델은 누님이라고 말하려다가 얼른 호칭을 정정했다. 카예나가 누나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지만, 그것이 진심인지 아직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시종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집안 어른들께서 황녀 전하를 응대하고 계십니다.”
“아…….”
빨리 응접실에 들러 카예나를 보고 싶었다. 그간 일이 많으셨는데 괜찮으신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선뜻 응접실에 가보고 싶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집사가 서둘러 1층에 내려오더니 이델을 불렀다.
“도련님!”
그는 전과 달리 몹시 정중한 태도였다.
“황녀 전하께서 도련님의 귀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와 같이 응접실로 가시지요.”
‘나를 기다렸다고?’
이델은 어색한 마음에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는 2층 응접실로 향했다. 기분이 생소했다. 보통 2층의 응접실은 내밀한 관계의 손님이 왔을 때 개방하는 곳이었다.
‘진짜 가족이 된 것 같다.’
마침내 응접실에 도착했다. 이델이 도착한 것을 본 조나단이 친근하게 그를 불렀다.
“오오, 이델. 어서 오려무나!”
카트린은 조나단이 평소와 다르게 행동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며 아들을 반겼다.
“다녀왔니, 이델?”
“네, 다녀왔습…!”
이델은 고개를 꾸벅 숙이다가 멈칫했다. 자신을 바라보던 카예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에게 괜한 걱정을 했다며 나무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카예나의 미소에는 다정한 반가움이 묻어있었다. 이델은 카예나를 향해 마주 웃어주고 싶었으나 굳은 얼굴은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는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네, 이델.”
‘안부를 물어야 하는데…….’
그토록 걱정했었는데 괜찮으냐는 말 한마디 하기가 어려웠다. 쑥스러운 기분에 괜히 재킷 밑단만 만지작거렸다.
“반갑군, 이델 영식.”
이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그제야 카예나의 옆에 앉은 시커먼 남자를 발견했다.
“…키드레이 공작님을 뵙습니다.”
이델은 미간을 찡그렸다. 인정하기 싫었으나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잘 어울렸다.
‘……어디에 앉지?’
카예나는 이델의 고민을 눈치채고 라파엘로에게로 바짝 붙으며 옆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 덕분에 라파엘로는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하마터면 자신에게 불쑥 다가오는 카예나의 허리에 손을 감을 뻔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라파엘로는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손을 그러쥐었다. 자제력을 발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라파엘로의 상태는 짐작도 하지 못한 카예나가 이델을 불렀다.
“이리로 와서 앉으렴.”
이델은 쭈뼛거리며 카예나의 옆으로 다가갔다. 방에 있던 하멜 백작가의 사람들이 입을 떡 벌리며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조나단이 가장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카트린도 제 생각보다 둘이 더 친밀해 보여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예나가 이델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옆에 앉혔다.
“잘 지냈니?”
이델이 카예나를 힐끗 보더니 어렵사리 대답했다.
“……네.”
카예나는 이델의 교복을 살폈다. 생활 구김은 조금 있을지언정 다행히 누군가와 싸우느라 생긴 흔적은 없는 듯했다.
그때 이델이 조금 망설이다가 간신히 용기 내어 물었다.
“전하께서는…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분명 카예나를 다시 만나면 누님이라고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입술에 풀이라도 바른 것처럼 누나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예나는 그런 이델의 망설임을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상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의 은빛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누나는 멀쩡해.”
‘누나’라는 말에 이델이 눈을 크게 뜨고 카예나를 바라보았다.
누나라고 불러도 되는 거야?
그런데 누나라는 말에 주변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심상치 않은 건 한참 전부터 그랬다. 이델은 눈초리가 심상치 않은 조나단을 힐끗 보고는 카예나에게 물었다.
“제가 누나라고 불러도 되는 거예요?”
그러자 카예나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은 모두 가족인걸? 당연히 누나라고 불러야지.”
카예나는 아차, 하고 덧붙였다.
“물론 키드레이 공작님이 가족은 아니지만, 어쨌든 저번에 아카데미에서 너를 위해 공증해주신 분이기도 하잖니.”
“……네, 누님.”
카예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조나단이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그럼! 이제 여기가 네 집이고 외가이니 어려워할 것 없단다, 이델!”
속내가 뻔히 보이는 말이지만 카예나는 뭐라고 덧붙이지 않은 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 카트린에게 샤프롱 제안을 한 김에 하멜 백작가의 문제도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가문 계승 문제였다.
“그런데 외조부님은 건강이 몹시 편찮으신가 봐요?”
하멜 백작은 여든 넘은 노인이었다. 사실 그 정도면 상당히 장수한 편이기는 했다. 그래서 조나단은 나이가 있는 편인데도 가문을 계승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요. 대신 제가 실질적으로 가문을 다 돌보고 있습니다.”
조나단이 은근한 투로 자신의 공로를 말했다. 카예나는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라면 어서 백작가를 계승하셔야죠. 외숙부께서 외조부님의 짐을 덜어주셔야 그분도 편히 쉬실 테니까요.”
그 말에 조나단은 입가로 잠깐 미소를 띄웠다가 얼른 지웠다. 카예나가 하멜 백작가를 조나단이 계승하라고 지지한 것이다.
“저야 백작님께서 편히 쉬셨으면 하는 바람이지요.”
“가신들도 백작님을 위한다면 당연히 외숙부께서 가문을 이어받는 일에 찬성할 거예요.”
조나단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전하께서 가문을 위하는 제 진정을 알아봐 주시니 여한이 없습니다.”
카예나는 빙긋 웃었다.
“가족이잖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이델을 품에 안다시피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귀여운 제 동생도 꼭 잘 보살펴주시고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델은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로 카예나의 손길을 받았다.
“아, 이델. 혹시 승마를 배우고 있니?”
“학교에서 조금…….”
“네 말은 있어?”
“아뇨.”
그러자 조나단이 난처한 표정으로 얼른 끼어들었다.
“이런, 레이디 카트린과 이델이 백작저로 온 게 얼마 되지 않아서 제가 그 부분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델에게 말을 한 마리 선물할까 하는데, 백작가에 있는 동안 승마 연습을 꾸준히 하도록 독려해주세요. 명문가 출신의 영식이 지닐 필수 소양이잖아요?”
“명심하겠습니다.”
이델은 카예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조나단이 옴짝달싹하지 못하며 다 따르는 게 신기했다. 그녀의 말투는 조금도 강압적으로 들리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때 카트린이 말했다.
“이델, 감사드린다고 해야지.”
“감사합니다, ……누님.”
이델이 머뭇거리며 누님이라고 말하자 카예나가 맑게 웃었다. 쭈뼛대며 무뚝뚝하게 누님이라고 하는 게 귀여운 사춘기 소년 그 자체였다.
카예나는 웃으며 몸을 뒤로 젖히다가 라파엘로에게 기대고 말았다. 라파엘로는 카예나를 받쳐주며 양어깨를 살짝 잡았다.
“어머,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그러게 좀 떨어져서 앉으시지.
카예나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으나 라파엘로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살짝 한숨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이델에게 볼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공작님?”
기습적인 물음에도 라파엘로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예, 실은 이델 영식에게 선물을 하나 할까 하여.”
라파엘로가 수행원을 불렀다. 그의 수행원이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어린 이델도 쓸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명검이었다. 검을 본 이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본격적인 용건은 다 정리된 듯하자 조나단은 손뼉을 짝하고 치더니 카예나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외가에 오셨으니 이 근처라도 좀 둘러보시지요. 조경을 새롭게 꾸며놓아서 볼만 할 겁니다. 아, 공작님은 여기에 처음 방문하셨지요?”
라파엘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나단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럼 전하께서 공작님께 이 근처를 안내하시며 같이 산책이라도 즐기시면 어떻겠습니까?”
조나단은 두 사람이 훨씬 가까워지기를 기대하며 말했고 라파엘로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지요.”
라파엘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카예나에게 에스코트를 청했다. 카예나는 아까 하다 만 이야기도 있고 물을 것도 있으니 순순히 그의 팔을 잡고 일어났다. 그때 이델이 벌떡 일어났다.
“저도 안내할 수 있어요.”
왜인지 이델은 도전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라파엘로는 흐음, 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이델을 보았다. 한참 어린 이델이 귀엽기는 해도 카예나와의 시간을 방해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황녀 전하께 안내받겠네. 영식은 이만 교복을 갈아입는 게 좋겠어.”
그 말에 이델은 자기가 아직도 교복 차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어른스러운 차림의 공작과 달리 카예나의 보호나 받아야 할 어린애 같은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 옷부터 갈아입는 게 좋겠다. 아니면 누나가 옷 골라줄까?”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로 자신을 놀리는 걸 깨달은 이델이 얼굴을 붉혔다.
“저 어린애 아니라니까요!”
그의 반응에 다른 이들이 헉하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카예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이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알아. 네가 귀여워서 그랬어.”
“…!”
그 말에 이델은 펑 하고 터져버릴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라 도망치듯이 방으로 갔다.
라파엘로가 말했다.
“이만 가시죠.”
그들은 응접실에서 나왔다. 올리비아는 조용히 카예나의 뒤를 따랐다. 저택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 라파엘로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전하를 잘 보필할 테니 올리비아 양도 조금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카예나도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좀 쉬고 있으렴. 이 근처에서 잠깐 산책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그들은 둘이서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백작가의 산책로는 요즘 유행인 전원풍을 뒤섞어 이리저리 촘촘한 모양새였다. 다시 말해서 꽤 은밀한 산책로였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카예나가 입을 열었다.
“애니, 언제부터였어요?”
그는 어떻게 말을 고를까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10년입니다.”
카예나는 10년이라는 말에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10년 전이라면 레제프가 그녀의 유모를 유배 보내며 황녀궁 소속 궁정인을 모두 물갈이할 때였다.
라파엘로가 말하기를 망설인 것은 카예나가 다시 유모를 떠올리면 마음이 좋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카예나는 라파엘로가 세작을 심은 것에 대해 그다지 유감이 없었다. 자신이라도 당연히 황궁에 세작을 심었을 테니까.
애니라면 구슬려낼 자신이 있었기에 차라리 하인리히나 에반스 후작가 같은 곳의 세작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마저 있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표정을 보더니 불쑥 말했다.
“위험한 생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전혀요. 제가 위험한 생각을 왜 하겠어요?”
“저번에도 그리 말씀하셨죠.”
사원의 납치사건 이야기였다.
‘독을 마신 건 애니가 모르는 일이라서 듣지 못한 모양이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손을 손가락 하나하나 얽어 꽉 맞물리게 잡은 후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다 좋으니 그런 일에는 저를 이용해주십시오.”
그는 요즘 조마조마하다는 심정이 무엇인지 배우고 있었다. 비단 그런 감정만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세상을 마주해 하나씩 배우고 있는 것 같았다. 카예나는 그의 뺨을 쓸어주었다.
그러자 라파엘로가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저는 질투가 많은 것 같습니다. 치졸하게도.”
갑작스러운 고백에 카예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델 영식에게 질투가 납니다.”
“그건 치졸한 게 맞네요.”
“이델 영식은 누님이라고 부르라면서 친근하게 대하시고 저에게는 여전히 공작님이라고 부르시는 것도 서운합니다.”
너무 솔직하게 치졸한 감정을 드러내니 카예나는 오히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게 그렇게 서운할 일인가?
그녀는 어딘가 시무룩한 라파엘로를 툭 불렀다.
“라파엘로.”
“……네.”
라파엘로는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꼬리라도 달려있다면 살랑대며 흔들 것 같았다. 만약 뭐라도 더 허락했다가는 그대로 뛰어들기라도 할 듯이.
‘이건 조금 위험할지도.’
카예나는 어쩐지 여기가 어딘지도 잊어버릴 것 같아 그와 마저 산책하려고 했다. 그때 라파엘로가 카예나를 슬쩍 끌었다.
“혹시 안으면 안 됩니까?”
“…네?”
안고 싶다고?
카예나는 이 남자가 지금 제정신인가 하고 타박하려다가 깨달았다.
‘아, 포옹.’
음. 위험한 생각을 하는 건 확실히 자신인 것 같았다. 카예나는 머쓱해졌으나 겉으로는 도도하게 허락했다.
“그러세요.”
라파엘로가 활짝 피어난 얼굴로 카예나를 품에 감싸 안았다. 가느다란 몸이 품에 들어오자 그는 미약하게나마 안도했다. 그간 별일은 없었을까. 위험한 황궁에 당신을 혼자 두기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몰랐다.
라파엘로는 이 불안을 입에 담지 않았다. 카예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 테니까. 대신 고개를 숙여 장난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쪽 키스했다. 카예나는 기가 막혀서 그를 휙 올려다보았다.
“여기서는 안 돼요.”
시야가 차단된 곳이지만 아직 산책로의 초입이었다. 라파엘로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럼 다른 곳이면 됩니까?”
“공작저라도 가려고요?”
“아뇨. 이쪽으로 가면 화원이 있습니다.”
카예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멜 백작가에 처음 방문해보시는 것 아닌가요?”
“어릴 때 와봤습니다. 조나단 경은 그때 없었기 때문에 모르시지만요.”
그 말인즉슨, 애초에 이걸 예상하고 이 산책로를 들어왔다는 뜻이 되는 게 아닌가?
카예나는 산뜻한 얼굴로 저를 에스코트하는 라파엘로를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로 같은 산책로를 조금 깊이 들어가니 그의 말대로 화원이 드러났다. 메마른 작은 분수대와 나무에 매단 그네가 전부였지만 꽤 고즈넉했다.
라파엘로가 말했다.
“선황후 폐하께서 이 그네를 타셨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게요.”
기억도 거의 없는 모친이지만 어쩐지 기분이 아련해졌다.
“타보시겠습니까?”
카예나는 그네에 앉아 보았다. 살짝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으나 발을 굴러도 멀쩡했다.
“그네를 타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아주 어린 시절, 엘리반 부인과 함께 그네를 탔던 기억이 떠올랐다. 카예나는 순수한 그리움에 젖어 발을 구르는 것도 멈추고 가만히 회상했다.
그사이 라파엘로가 카예나의 앞에 다가서서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낮추었다.
“공작저에도 그네를 달아야겠군요.”
“놀러 오라고 유혹하시는 건가요?”
라파엘로는 담담한 표정에 열기가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 유혹에 넘어와 주시면 기쁠 겁니다.”
그의 손은 그네를 잡고 단단히 고정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뒤집힐까 조용히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쩐지 평범한 연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저 서로 아끼고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관계.
“공작저는 아름다우니 그곳에서 그네를 타면 멋지겠네요.”
내가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지금과는 달랐을지도 모르는데.
“그네는 그만 탈래요.”
괜한 감상에 젖어있는 건 이래서 위험했다. 자꾸 평범해지고 싶어지니까. 그런데…… 그럴 수가 없으니까.
카예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가 순간 현기증에 휘청였다.
“전하!”
라파엘로는 얼른 카예나를 품에 안아 제게 기대게 했다. 카예나는 끙, 소리를 냈다.
“현기증이 좀 나서, 잠깐만 이렇게 있을게요….”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면 저택까지 옮겨드리겠습니다.”
카예나는 힘없이 손을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잠깐 쉬면 돼요. 좀 앉을까요……?”
라파엘로는 그늘에 자리 잡고 제 외투를 바닥에 깔았다. 그러고는 카예나가 자신을 등받이 삼아 편히 앉을 수 있게 했다. 어쩔 줄 모르는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이마를 스쳤다.
카예나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몸이 약해졌다.
‘마법 계약의 후유증이 분명해.’
엘릭서로는 완치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일이었던 모양이다.
‘엘릭서를 마셨는데 이 정도로 몸이 약해지다니…….’
라파엘로에게 기댄 채 조금 쉬니 어지럼이 사라졌다. 카예나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라파엘로가 허리를 깊이 감싸 안았다.
“이대로 도망칠까요?”
“…라파엘로.”
카예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게 겁났다. 그는 매일 새롭게 두렵고 새롭게 안도했다. 카예나는 보고 있노라면 언제든 사라져버릴 물거품 같아서, 그래서 더 불안해졌다.
자신이 이렇게 한심하고 초라한 인간이었나? 그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말투로 입을 열었다.
“……못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카예나가 몸을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저를 찔러왔다.
“당신이 너무 좋아져서… 그래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얌전히 잘 기다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조금, 아니 몹시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냥, 제가 약해빠진 인간이라 그렇습니다.”
그 절절한 고백과 진심에 카예나는 숨이 턱 막혔다. 그의 눈빛이 애끓는 게 이토록 선명히 보였다.
아아, 진작 우리가 이럴 수 있었다면. 내가 좀 더 일찍, 첫 번째 생에서 깨우쳤더라면.
“라파엘로.”
라파엘로는 화답하듯 그녀의 이름을 감히 입에 담았다.
“……네, 카예나.”
그의 눈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잔뜩 찡그린 미간에서 고뇌가 느껴졌다. 카예나는 그를 꽉 끌어안고 말았다.
너무 미안해졌다. 그는 미안할 게 없는 사람인데, 자신이 미안한데…….
라파엘로가 조심스럽게 마주 안아오자 카예나는 더욱 힘주어 그를 안았다. 여기서 나가면 그들은 다시 제국의 황녀로, 공작가의 주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 좋을 텐데.’
그때였다.
톡, 톡, 톡…….
살랑이던 바람이 멈췄다.
“……?”
따뜻하게 내려앉던 숨결, 부드럽게 오가던 고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카예나가 고개를 들어 라파엘로의 품에서 약간 몸을 떨어뜨렸다. 라파엘로가 마치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그녀의 움직임에 밀려났다.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야, 이게…….”
피부가 저릿했다. 이상하고 괴이한 감각이 전신을 조였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신음과 비명의 중간쯤 되는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말도 안 돼.”
눈앞의 온 세상이 멈춰있었다.
* * *
모든 게 멈췄다. 손을 살짝 움직이자 멈춰진 시공간이 찌릿찌릿하게 만져지는 느낌이 들었다. 통제된 시공간에서 움직여 생기는 반발력이었다.
문득 카예나는 시간을 멈춘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공간을 통제하는 마법이구나.’
바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살아온 생에 맞춰 능력이 개화된다고 했었지.’
그 사람이 살아온 생과 마법 재능은 비슷한 편이라고 했다. 얻게 된 마법 능력이 염력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자신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대로 움직이는 삶을 살았으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시공간을 조종하는 능력이라니.
‘하지만 이런 능력은…….’
지나치게 뛰어난 능력이다.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앞으로 그녀에게 위험이라고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방금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랐었지.’
“내가 생각한 대로 시간을 멈출 수 있다니…….”
놀라움을 지나 서서히 희열이 차올랐다.
완벽했다. 이 능력은 그야말로 완벽한 힘이었다. 카예나가 그토록 바란, 절대 무력할 수 없는 그런 마법 능력이었다.
고작 수명 절반을 바쳤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좋은 능력이 개화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장수할 팔자였던가? 그래도 고작 몇십 년 치 생으로 시공간을 통제하는 마법을 손에 넣은 거라면 확실히 남는 장사네.’
이 능력이라면 황좌를 거머쥐는 건 아무것도 아니리라.
레제프에게 소중한, 그가 가장 갈망하는 것을 눈앞에서 빼앗아 카예나가 느낀 절망을 똑같이 느끼게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함부로 뺏고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했다.
그런 관계는 가족이 될 수 없으니까.
그때 날카로운 이명이 들리더니 엄청난 통증이 전신을 꿰뚫을 것처럼 파고들었다.
“-!”
카예나는 저도 모르게 라파엘로의 옷자락을 콱 움켜쥐었다.
분수에 맞지 않은 능력을 과도하게 쓴 탓인가?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외쳤다.
‘그만!’
톡, 톡, 톡.
다시 시간이 움직였다.
꽃향기를 실은 바람과 함께 라파엘로의 따스한 고동이 느껴졌다. 시공간의 반발력으로 저릿하던 살갗이 닿는 공기도 다시금 온화해졌다.
카예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통에 일그러진 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얼굴을 묻었다.
“전하?”
라파엘로는 갑자기 카예나가 자신에게 저돌적으로 안기는 듯해 보여 어리둥절했다. 그는 몸을 움찔 굳혔다가 품에 안긴 카예나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그녀가 작게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역시 의원을 부를까요?”
그의 물음에 카예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안색이 아까보다 더 창백해진 것 같아 라파엘로의 표정이 단숨에 심각해졌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이만 돌아가서 의원에게…….”
“아뇨.”
카예나는 얼른 그를 붙잡았다.
“괜찮아요. 그냥 당신만 여기에 있어 줘요.”
라파엘로는 몸을 벌떡 일으키려다가 순순히 카예나의 말에 따랐다.
어차피 이건 마법을 쓴 후유증 같은 거라, 의원에게 상태를 보인다고 해서 괜찮아지진 않을 것이다.
아쉬웠다. 강한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리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역시 아쉬웠다.
마법을 사용하고 나서 몸이 금방 지치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이래서야 정치 모략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곧 사교 시즌이니 그곳에서는 유용하겠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어떤 수작을 부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능력이다.
그때 카예나를 조심스럽게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녀는 무심결에 피식하고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는 손길에 날카로웠던 신경이 누그러졌다.
카예나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라파엘로. 또 도움을 받았네요.”
“이런 게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기꺼이 밤이 새도록 사냥개처럼 그녀의 곁을 지킬 수도 있었다.
카예나는 착한 아이에게 칭찬하는 것처럼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라파엘로의 표정이 미묘하게 면했다.
“당신께서 제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실 때마다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해요?”
카예나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눈만 깜빡거리자 라파엘로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뭐예요?”
“입 맞춰달라고 바라보시는 줄 알았습니다.”
“…….”
어이가 없어 다시 빤히 바라보았더니 또 라파엘로가 입을 맞췄다. 카예나는 작게 웃었다. 그러자 라파엘로가 입술을 열어 웃음을 삼켰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의 커다란 손이 카예나의 등허리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받쳤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가쁜 숨 사이로 서로를 갈망하는 눈빛이 오갔다. 그의 입술이 점차 입술이 아닌 다른 곳을 찾기 시작했다.
카예나는 이대로 있다가는 걷잡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어하기 어려웠다. 제게 짙은 갈증을 드러내는 라파엘로의 앞에서 조금도 이성적일 수가 없었다.
“누님!”
멀리서 이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예나는 깜짝 놀라서 라파엘로를 밀쳤다. 얼른 몸을 일으켜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자 라파엘로가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게 황급히 일어나시면 현기증이 생기니 조심하십시오.”
귓가에 닿는 숨결에 다시금 저릿한 감각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알았으니까 이거 놔요.”
카예나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그의 팔을 잡고 떼어냈다. 다행히 이델이 나타난 건 그 이후였다.
“날 찾았니?”
이델은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선 카예나와 라파엘로를 한차례 훑어보았다.
“네, 조나단 경이 전하를 저택으로 모셔오는 게 좋겠다고 해서요.”
이델은 못마땅한 기색이 스민 눈빛으로 라파엘로를 보았다. 카예나의 약혼자도 아니면서 어딘가 눈빛이나 분위기가 지나치게 친밀했다.
라파엘로도 달콤한 시간을 방해받았기에 유쾌하지 않은 시선으로 이델을 바라보았다.
“그래. 저택으로 가자.”
카예나의 말에 라파엘로가 에스코트했다.
“아까 현기증도 있으셨으니 이렇게 에스코트하겠습니다.”
그의 변명에 카예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이델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얼른 카예나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팔을 쭉 내밀었다.
“그렇다면 제가 저택까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누님.”
라파엘로가 말했다.
“영식의 몸집으로는 숙녀를 제대로 에스코트하기는 어려울 것 같군. 나중에 나만큼 키가 자란 다음에 그러는 편이 좋겠는데.”
키 이야기가 나오자 이델은 분한 얼굴로 그를 거의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또래와 비교했을 때 자신의 키가 그다지 큰 편이 아니라서 민감하게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예나는 한숨을 삼키며 라파엘로를 살짝 흘겨보고는 이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 손을 좀 잡고 걸어주겠니, 이델?”
이델은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저택에 도착하자 조나단이 부리나케 다가왔다.
“전하! 마침 가장 좋은 방을 전하께서 쓰시기 좋게 꾸며놓았습니다. 오랜만에 오셨으니 하루쯤 묵고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카예나는 조나단의 속내가 뻔한 요청에 응해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여기에 하루 묵었다가 어떤 식으로 포장해서 소문낼지 어떻게 알고?’
그때 라파엘로가 말했다.
“전하께서 방금 산책하시다가 현기증을 느끼셨습니다. 황궁으로 돌아가셔서 의원의 진찰을 받으시고 푹 쉬셔야 할 것 같더군요.”
“아, 그런…….”
조나단은 몹시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녀를 걱정하는 듯한 얼굴로 갈무리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도 휴식은 좀 필요할 것 같네요.”
그사이 올리비아가 카예나가 있는 곳으로 얼른 다가왔다.
“이만 돌아가자꾸나.”
“예, 전하.”
카예나는 하멜 백작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를 기다렸다. 그녀는 자신의 바로 곁에 선 라파엘로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이델과 좀 친하게 지내세요. 싸우지 말고.”
“저는 싸운 적 없습니다만.”
그녀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 정도만 말하고 넘어갔다. 마차가 도착하고 카예나가 안에 타기 전에 라파엘로에게 물었다.
“그런데 공작님은 댁으로 안 돌아가시나요?”
라파엘로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델을 보았다.
“제 용건은 아직 안 끝나서요.”
그 말에 카예나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으나 곧 미소로 표정을 꾸몄다.
“그렇군요. 그럼 나중에 또 뵙지요.”
그녀는 마차에 올랐다. 다시 난장판 속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제논은 황궁에 입궁하는 날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는 자신의 저택에서 초조하게 시간을 죽였다.
“알아봤느냐?”
“예, 이곳은 조디악 백작과 연관 없는 곳입니다.”
예이스터 하인리히의 또 다른 신분, 조디악 백작. 암흑가에서 그가 스스로 붙인 이름이었다.
제논은 예이스터의 손길이 닿지 않은 새로운 청부업체를 찾아내느라 그간 상당히 바쁜 시간을 보냈었다.
‘차라리 황녀를 제거하자. 군대통솔권이 넘어간 상태에서 황제까지 죽여야 해.’
똑똑.
“뭐야?”
제논은 방에 들어온 하인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줄리아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줄리아가 왔다는 말에 제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어찌할까요?”
여기서 동생을 내칠 수도 없었다. 그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고 응접실로 향했다. 줄리아는 제논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오라버니! 이제 어떡해요?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제논은 싸늘한 눈으로 줄리아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마약 농장의 위치를 들키는 바람에 정신이 없는데, 이런 상황에 줄리아는 그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또 징징거리러 찾아온 것이다.
줄리아는 그런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울먹거리며 말했다.
“마약은 범죄잖아요! 그걸 왜 우리 가문에서 재배한다는 거예요?”
황궁에서 자신을 힐끔거리는 궁정인들의 눈빛이 따가웠다. 줄리아는 살면서 그런 위축감을 처음 느껴보았다.
그녀에게 후작가는 언제나 강하고 자랑스러운 곳이었다. 실제로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마약이라니.
“이대로라면 그분께서 제게 실망하실지도 모르잖아요!”
줄리아는 두려웠다. 이제 막 레제프와 어떤 관계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 터져 제 발목을 잡은 셈이다.
귀족 가문에서 대마초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니. 제 오라비들의 허락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사실이 줄리아는 가장 믿기지 않았다.
“이 어리석은 것!”
줄리아는 제논의 호통에 깜짝 놀라 몸을 흠칫 떨었다.
“네가 입고 먹고 놀러 다니던 비용이 어디서 나온 것인 줄 아느냐? 돈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줄 아느냐는 말이다!”
줄리아가 가문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자라 좋은 곳에 시집가는 것뿐이었다. 가문을 위해 이용될 인형 주제에. 제논은 속이 끓어올랐다.
줄리아는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해서 오라버니가 잘한 건 아니잖아요…….”
“뭐?”
“제가 좋은 옷, 좋은 음식을 먹으며 돈을 많이 썼다고 해도 대마초를 재배한 게 정당화되는 게 아니잖아요.”
“정당화!”
그는 기가 막혔다.
감히 정당화를 운운해?
“왜 제 탓을 하세요? 오라버니가 저지른 잘못이잖아요. 게다가 오라버니는 레제프 황자 전하의 부관이면서, 소임을 다 해야 할 분이 그런 짓을……!”
제논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는 제 여동생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꺄악!”
줄리아는 그에게 뺨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녀는 얼얼한 뺨을 감싸 쥐며 제논을 올려다보았다. 제논의 표정은 악귀처럼 무섭게 일그러져있었다.
“그런 짓이라고? 내게 감히 그따위 말을 해?!”
“오, 오라버니……?”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뺨을 맞았는데 그 상대가 제 오라비일 줄이야. 온몸이 덜덜 떨렸다. 두려웠다. 몸이 바닥에 처박혔고 뺨과 입술이 따끔거렸다.
“지금껏 그렇게 호사를 누리게 해주었으면 보은할 줄 알아야지.”
제논의 눈빛에서 자신을 사람으로 보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동생을 한심스럽게 보며 혀를 차더니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시녀가 어쩔 줄 모르며 그녀를 일으키려 했다. 줄리아는 부축받으며 일어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줄리아는 하염없이 울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거니?”
시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시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주인님께서 조금 격해지셨을 뿐이에요.”
시녀는 에둘러 말했지만, 결론은 줄리아의 편을 들지는 않았다.
“나더러 좋은 곳에 시집만 가면 된다고 했잖아.”
그래서 언제나 아름다워 보이게 노력했다. 그것이 가문을 위하는 일이라고 배웠다. 자신이 황자비가 되면 가문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은 괄시당했다.
‘내가 하는 일이랑 오라버니가 하는 일이 뭐가 달라?’
“내 걱정은 가문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뛰어난 아름다움은 자신의 큰 자랑이었다. 절대 훼손되지 못할 권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그때 외부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시녀는 문밖을 살짝 확인해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문을 열어젖히고 예를 갖췄다.
“후작님을 뵙습니다!”
줄리아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줄리아?”
동부의 패자, 로드릭 에반스 후작이 방으로 들어왔다. 로드릭 후작은 바닥에 쓰러져 입술이 터지고 뺨이 부은 채로 눈물을 흘리는 막냇동생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했다.
“아니, 이제 무슨 일이냐?!”
시녀는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실은, 아까 제논 님께서 아가씨께 손찌검하셨습니다….”
그러자 로드릭 후작이 미간을 찡그렸다.
“줄리아에게?”
로드릭 후작이 줄리아의 얼굴을 살폈다. 아름다운 얼굴에 누가 봐도 뺨을 맞은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황녀 전하의 성년식이 얼마 남지 않았거늘. 게다가 황녀궁 시녀인 이 아이의 뺨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오라버니…….”
줄리아가 음울한 목소리로 로드릭 후작을 불렀다.
“그래, 줄리아. 괜찮으냐?”
“대마초 농장, 사실이에요?”
로드릭은 잠깐 멈칫했다. 그러다 애통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이더구나.”
바닥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던 줄리아가 고개를 들어 후작과 눈을 마주쳤다.
“제논에게 상속될 농지가 그런 식으로 운영되고 있을 줄 미처 몰랐지.”
“…….”
줄리아는 로드릭의 눈빛과 말투에서 그것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제논과 합작한 일이면서 꼬리를 자르려는 것이다.
‘다들 도구에 불과하구나.’
자신도 제논도 똑같았다. 가장 꼭대기에 앉은 자들의 도구였다. 이게 당연하고 정상적인 일이었다.
줄리아는 자신이 제논의 말대로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리석지 않은 행동이 무엇인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논 오라버니가 그런 행동을 하시다니, 안타까운 일이네요.”
* * *
제논은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 슬럼가를 걷고 있었다. 벌써 날이 어두워져 주변을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그 때문인지 분위기가 스산했다. 이곳에 예이스터 하인리히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청부업체가 있다고 했다.
‘좀 더 일찍 도착했어야 했는데. 빈민가라 불빛 하나 없군.’
치안이 좋지 않은 이런 동네에서 너무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다. 수행원이 총을 소지하고는 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줄리아가 저택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아까 상황을 다시금 떠올리면 또다시 짜증이 치밀었다.
그것들은 사람이 아니라 도구다. 제논은 그딴 것들이 자신을 이토록 짜증스럽게 만드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일이 자꾸 꼬이기만 했다. 그래, 카예나가 갑자기 돌변한 이후부터였다.
“똑같은 인형 주제에…….”
‘역시 없애는 게 맞아. 황녀는 제어할 수준을 넘어 섰어.’
수행원이 더러운 골목을 가리켰다.
“저곳입니다.”
그는 수행원과 걸음을 옮겼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골목에 들어섰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불렀다.
“어이.”
“…?”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빠악!
바로 옆에서 소름 끼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램프가 바닥에 나뒹굴며 불이 붙었다. 그 불빛에 바닥에 쓰러진 수행원과 괴한의 모습이 비쳤다.
상대는 자신처럼 탁한 색의 로브로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키와 몸집이 제논보다 더 컸다. 단련된 몸을 가진 자였다.
‘수행원에게 총이 있는데…….’
괴한의 손에 둔기가 들려있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누구냐!”
상대는 대답하지 않고 손에 든 둔기를 휘둘렀다.
부웅-!
제논은 얼른 바닥에 몸을 굴리며 피했다. 그러고는 더러운 흙바닥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그만둬라!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말이 많네.”
괴한은 제논의 멱살을 쥐고 낡은 통나무 집 벽에 처박았다.
“크윽-!”
무시무시한 괴력이었다.
‘하인리히 쪽인가? 누구지?’
제논은 상대가 암살자 혹은 고용된 깡패라고 생각했다.
“나는 에반스 후작가의 차남이다! 그쪽이 받은 의뢰비의 열 배를 주지. 그러니까 그만둬!”
그러자 얼굴을 가린 후드 아래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왜?”
낮고 스산한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
목소리가 낯익었다.
괴한은 제논이 미처 뭔가를 더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둔기를 휘둘렀다. 제논은 상대가 미친놈이라는 걸 깨닫고 마차를 대기시켜 놓은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둔기로 등을 얻어맞았다.
“커헉!”
괴한은 바닥에 고꾸라진 제논의 머리를 발로 밟았다. 제논은 허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꾸준히 몸을 단련해왔다. 그런데 괴한의 힘과 속도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괴한이 말했다.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짜증 나게.”
“……?”
땅바닥에 쓰러져 경황없이 살 궁리만 하던 제논이 눈을 부릅떴다. 이제야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황자 전하…?”
괴한의 정체는 레제프였다. 레제프는 제논의 머리통을 발로 후려 차버렸다.
“아악-!”
얼굴을 감싸 쥐며 고통스럽게 신음하던 제논은 램프에서 기름이 새어 나와 커다래진 불길에 비친 구둣발을 보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후드를 벗은 채 얼굴을 훤히 드러내며 싸늘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레제프가 보였다.
제논은 벼락처럼 깨달았다.
들켰다. 납치를 사주한 공범이 자신임을 황자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전하,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오해가…….”
레제프는 더 듣지 않고 제논의 배를 찼다. 늑골이 나갔는지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주제 파악은 어려운 일인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쿨럭…!”
제논은 제어할 수단이 없는 곳에서 미치광이 황자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절절히 깨달았다.
그는 한참 어리지만 185cm에 육박하는 거구에 검술 훈련은 5살 때부터 해왔다. 몸매만 가꾸는 정도로 단련한 제논이 그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정말 쉽거든. 나를 봐, 제논. 내가 주제 파악을 못 했다면 지금까지 그 황궁에서 살아남았을 것 같아?”
제논은 숨을 헐떡이다가 피를 토했다.
살아야 한다. 여기서 벗어나기만 하면 저 잔악무도한 황자를 제어할 수 있으리라! 자신은 제국의 기둥 중 하나인 에반스 가문의 차남이거늘 이따위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레제프는 엉금엉금 기는 제논의 발목을 밟아 부러뜨렸다.
“끄아악!”
“며칠간 네놈을 여기로 불러들이려고 한 고생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레제프는 하인리히 대공자과 연관 없는 청부업체가 있다는 거짓 정보를 제논에게 흘렸고 그는 덥석 물었다.
“많이 초조했던 모양이지? 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바로 달려 나온 걸 보면 말이야.”
퍽! 퍽!
사정없이 내리꽂히는 주먹에 제논의 얼굴이 엉망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왜? 또 누님을 납치하기라도 하려고? 아니면 청부 살인?”
레제프의 눈빛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독살에 실패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커헉-!”
제논은 뭐라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는 두 팔을 들어 얼굴을 막으려 했다.
“하여간 이거나 저거나 왜 이렇게 별것도 아닌 것들이 짜증 나게 하는 걸까. 라파엘로 그 새끼도 그래.”
공작위를 계승하며 더 껄끄러워진 라파엘로가 누이에게 전보다 더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것을 느꼈다. 겉으로는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속이 끓어올랐다. 빨리 황위를 계승해서 카예나가 그와 결합하지 못하도록 조치해야만 했다.
“벌레 따위가 내 것을 탐낸다는 게 참을 수가 없어.”
레제프는 제논을 곤죽으로 만들다가 멱살을 움켜쥐고 불길이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이러고도, 당신이 무사할 것 같습니까…?!”
제논은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표독스럽게 말했다.
“저는… 에반스란 말입니다…!”
레제프는 웃긴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하긴.”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제논을 동정하듯 보았다.
“로드릭 후작이 지금 수도에 온 건 알아? 그와 이미 말을 다 맞춰놨는데.”
“……형님이, 쿨럭!”
제논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다시금 핏덩이를 울컥 토했다.
“후작가의 차남에게 상속된 농가에서 대마초가 재배되고 있었단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뭐…?!”
“너, 꼬리 잘렸다고.”
불길에 비친 제논의 눈동자에 절망감이 어렸다.
설마 진짜 자신을 내친다고? 어째서?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유능하며 실제로 황궁 내의 영향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딴 식으로 최후를 맞이할 인물이 아니었다.
“이것 놔! 반쪽짜리 황자를 거둬줬더니 감히 나를…!”
“그래, 나는 반쪽이지.”
레제프는 불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제논은 발버둥 쳤으나 레제프에게 손쉽게 끌려 올라갔다.
“너도 반쪽으로 만들어 줄게.”
레제프는 제논을 불구덩이에 처박았다.
“아아악-!!”
바닥에 퍼진 기름과 불길이 옮겨붙어 제논이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레제프는 혀를 찼다.
“흠, 절반만 태울 생각이었는데…….”
다 타버리면 어쩔 수 없지.
이내 숨이 멎어버린 제논을 무심히 내려보던 레제프는 어깨를 으쓱하고 걸음을 돌렸다.
* * *
“베라, 애니를 침실로 데려와라.”
카예나는 황녀궁에 도착하자마자 애니를 불러오라고 하고 침실을 비웠다. 그녀는 리본으로 엮어 올린 머리카락을 풀어 내리며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애니의 나이가 여전히 어린데도 10년 동안 세작 일을 들키지 않을 수가 있다니.’
작은 협탁에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던 카예나는 애니를 어떻게 다스릴지 생각해보았다. 처음에는 내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확실히 쓸만한 아이야.”
회귀한 이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침실에다 돈주머니를 마련해놓았다. 카예나는 그것의 위치를 떠올리며 손바닥을 펼쳤다.
툭!
실크로 된 푸른색 주머니가 손바닥에 묵직하게 떨어졌다.
그녀는 점점 제 능력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능력을 훨씬 더 다듬으면 공간이동도 가능할 것 같았다.
‘다만 내 몸이 받쳐줄까, 그게 의문이네.’
시간을 고작 1분쯤 멈췄을 뿐인데도 순간 기절할 뻔했었다. 수명이 긁혀나간 탓에 몸이 약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함부로 펑펑 써댈 능력이 아닌 것 같아.’
똑똑. 마침내 노크 소리가 들리고 애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방 안에는 카예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애니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탁.
침실 문이 닫혔다. 침실 문 바로 앞의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카예나에게서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상한 긴장감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툭!
카예나가 손에 든 주머니를 애니의 앞으로 던졌다.
“……?”
애니의 시선이 바닥의 묵직한 주머니로 향했다. 어쩐지 이게 돈주머니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마침내 카예나가 입술을 열었다.
“가지고 떠나라.”
냉혹한 목소리였다. 애니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뭔가 실수를 저지른 모양이었다. 그녀는 곧장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납작 엎드렸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전하!”
카예나는 애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는 내 사람이 아닌 자를 거둘 마음이 없다.”
‘세작인 걸 들켰구나!’
애니는 이 일에 완전히 능숙한 전문가였다. 절대 꼬리 밟히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대체 어떻게 들킨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최근에 황녀궁 급보가 많이 나와서 너무 활발하게 움직인 모양이로구나.’
그녀는 입술을 짓이기며 제 실책을 탓했다.
카예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변명조차 하지 않는구나.”
애니는 눈을 질끈 감고 생각했다.
이대로 황녀궁을 나갔을 때 어떻게 살아갈지, 여기서 어떤 말을 해야 카예나를 설득할 수 있을지, 수없이 많은 가정을 내려보았다. 키드레이 공작가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가문이다.
그에 비하면 이곳 황궁은 어떠한가?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썩어 문드러져 엉망이었다. 하지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애니는 지금까지 카예나의 측근으로 그녀를 모시며 매번 탄복하고 있었다. 놀라움이 경애의 감정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실 라파엘로의 세작 노릇을 꾸준히 한 것은 악의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게다가 키드레이 공작은 전하께 마음이 있어.’
애니는 확신할 수 있었다.
황녀궁 급보를 나를 때마다 공작가에서 요구하는 정보의 방향이 모두 황녀의 안위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것도 그녀를 지킬 수단에 관한 이야기였다. 공작은 황녀를 지키는 은밀한 기사를 자처하고 있었다.
카예나가 애니에게 말했다.
“고개를 들어 봐.”
애니는 결심이 선 얼굴로 카예나를 마주 보았다. 애니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이 무엇일지 명확히 깨달았다.
“저를 전하의 것으로 써주십시오.”
“흐음.”
카예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를 배신했던 너를 내 것으로 쓰라는 말이더냐?”
“다시는 그럴 일 없으리라고 약속드리겠습니다. 하찮은 목숨이나 제 목을 걸고 맹세합니다.”
애니의 단단한 눈빛을 본 카예나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애니에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 것이 되렴. 단.”
카예나는 냉엄한 표정을 지었다.
“두 번은 없다.”
그 말을 들은 애니가 입술을 꾹 물며 흥분을 삼켰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납작 엎드렸다.
“자비로우신 전하의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