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19
악녀는 마리오네트 18장. 관망(1)(19/33)
18장. 관망(1)
쾅!
묵직한 투창이 과녁을 맞히다 못해 아예 박살을 냈다.
“좋네.”
예이스터 하인리히는 새로운 투창을 또 꺼내 들고 새로운 과녁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콰앙!
또 명중이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이들은 박살이 난 과녁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대공자님이십니다!”
“이토록 뛰어나시니 사냥 대회의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로군요!”
다들 애써 활짝 미소를 지으며 짝짝 박수를 쳤다.
“짐승 사냥은 재미없어. 우승하든 말든.”
예이스터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더니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일은 어떻게 됐어?”
남자는 도티 부인에게 선물을 내밀었던 젊은 남자 궁정인, 에밀 하브론이었다. 그는 예이스터가 심은 첩자이기도 했다.
“그 여자가 이번 성년식과 사냥 대회를 주도할 작정이더군요. 대공자님께서 말씀하신 상단들을 연결해주었습니다.”
“아, 유령 상단들?”
예이스터가 즐겁다는 듯 낄낄 웃었다.
에밀이 연결해주었다는 상단들은 이름만 있지 실체는 없는 유령 상단이었다. 도티 부인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즈음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레르반스 도티가 미쳐 날뛰도록 물심양면 도와줘. 그래야 우리 황녀님의 성년식이 엉망이 될 테니까.”
“예, 대공자님.”
예이스터는 레르반스 도티와 과거에도 여러 번 얽힌 적 있었다. 그녀는 대공의 양자가 되어 레제프의 앞날을 방해하는 예이스터를 끔찍하게 여겼다.
아무리 예이스터가 양자라지만, 고작 후작가의 안주인이 대공자를 업신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도티 부인은 황자의 유모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마치 황후에 필적하는 권한이라도 쥔 듯이 굴었다.
그래서 다루기 쉬운 것도 있었다. 예이스터는 이 때문에 그녀의 비위를 잘 맞추는 젊고 잘생긴 남자를 세작으로 붙였다.
“그 여자는 본인이 황자의 생모인 줄 착각하고 자꾸 권력을 확인하려 든다니까.”
예이스터는 혀를 끌끌 차며 옆에 있는 나무 상자를 열었다. 장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활쏘기로 사냥한다는 건지.”
그는 탄환을 장전하더니 어깨에 걸치고 조준경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내가 황좌에 오르면 당장 총기 합법으로 법부터 뜯어고쳐야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귀족들은 만약 총기가 합법화되어 대놓고 들고 다녀도 되는 세상이 온다면 예이스터의 머리통에 가장 먼저 총알이 박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예이스터는 시시하다는 듯이 총을 상자 안에 휙 던져 넣었다. 총을 치우자 다들 그제야 안심한 얼굴을 했다.
“‘황녀의 생일 선물’들은 어떻게 됐어?”
예이스터의 물음에 보좌관이 대답했다.
“사냥터가 정해지는 대로 초식 동물부터 풀어놓을 생각입니다. 괜찮은 사냥감이 꽤 있다는 생각이 들면 안으로 더 깊이 들어오게 될 겁니다.”
보좌관의 말을 흡족하게 듣던 예이스터가 그의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리고 그때 콱!”
탁!
그가 범의 아가리처럼 손가락을 세워 보좌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진짜 사냥이 시작되는 거지. 초식 동물을 사냥하는 게 뭐가 재밌겠어?”
예이스터는 보좌관의 어깨를 툭툭 털어 주었다.
“인간 사냥이 훨씬 재밌다고.”
보좌관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 숙였다.
“맹수들은 우리에 가둔 채 약을 먹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래, 잘 관리해. 아주 성대하고 화려한 성년식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사용인들이 준비한 테이블로 다가가 앉았다. 테이블에는 차와 술 등 다양한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예이스터는 위스키 병을 집어 마개를 열고 병째로 들이켰다.
귀족들은 슬슬 눈치를 살피며 그의 근처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사용인들이 곁들여 먹을 햄과 치즈 등을 내놓았다.
야외 다과회라도 연 것처럼 평화로워야 할 상황이지만 주최자가 예이스터였기에 그들은 차 한 모금도 편하게 삼키지 못했다.
“아, 지루해.”
그는 고개를 뒤로 휙 젖히며 말했다.
“수도에 돌아다니는 팔라딘들 때문에 눈치 보느라 아무것도 하지를 못해.”
제논 에반스가 황녀 납치 사건의 공범이라는 사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제논 그 새끼가 죽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자결이라고 하는데…….”
그 말에 예이스터가 피식 웃었다. 자결일 리가 있나.
“귀염둥이 황자님이 제 성질머리 못 이기고 죽였으면 죽였지, 절대 자결할 리가 없어.”
“후작가에서 자결은 떳떳하지 못한 죽음이라며 사원에 시신을 보내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장례를 치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에반스라면 돈을 써서라도 사원에 시신을 안치시킬 수 있을 텐데요? 그렇게 순순히 인정하면 가문에 먹칠하는 것 아닙니까?”
“시신을 보여 줄 수 없는 이유가 있는가 보지.”
이렇게 마약 사건도 죽은 사람 탓으로 돌려 처리해 버릴 수도 있으니 얼마나 깔끔한 뒤처리인가?
‘이렇게 시시하게 마무리되다니.’
“에반스 후작가 뒤통수를 더 세게 칠 일이 필요한데…….”
황녀라면 알고 있는 게 더 있지 않을까?
최근 예이스터는 황녀를 생각하면 전신에 짜릿한 흥분감이 감돌았다.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그 여자가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욕심껏 바로 집어삼키면 재미없다. 오랜만에 생긴 재미있는 장난감이니 금방 망가지지 않게 소중히 갖고 놀아 줄 생각이었다.
“우리 황녀님은 주변에 지키는 개새끼들이 많아서인지, 유달리 사나운 개새끼가 바로 옆에 있어서인지 참 뵙기가 어렵네. 그렇지 않아?”
그의 말에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곧 성년식이지 않습니까.”
예이스터는 피식 웃었다.
그 말대로 성년식이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그래. 유례없이 성대하고 화려한 성년식을 만들어 드려야지.”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춤추고, 사냥터에서 사슴이나 잡는 성년회는 생각만 해도 지루했다.
그러니 조금 더 특별한 일이 가득한 연회가 재미있으리라. 가령 사냥 대회에서 누가 불구가 되거나 죽어 나간다든가.
예이스터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다들 손수건이나 넉넉히 준비해 둬. 황녀 전하의 성년식에 근사한 장례식이나 치르자고.”
* * *
제다이어는 황성에 출근한 지 단 사흘 만에 세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 번째는 황실 직속 기사단이 대단한 한직이라 공짜로 돈을 버는 기분이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직속 기사들은 죄다 레제프 사람이라는 점이었고, 세 번째는 카예나의 호위를 맡으려고 하는 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까지야 충분히 이해했다. 황궁은 레제프 세력이 장악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왜 다들 황녀의 호위를 마다하는 걸까?
이든이 제다이어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 두드렸다.
“오늘 호위에 나서 줘서 고맙소, 제다이어 경.”
오늘 황녀는 유모의 최후를 배웅하기 위해 외출을 해야 했다. 제다이어는 오늘이 황녀와 마주칠 기회라고 생각하고 바로 호위를 자처했다.
이든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에반스 가문의 추천을 받은 사람이라 당연히 황녀 전하를 견제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쓸데없이 의심한 것 같소.”
‘내가 진짜 에반스 쪽 사람이 아니니까.’
제다이어는 대충 웃어넘겼다.
‘에반스 후작가의 견제를 떠나서 저번에 황녀를 호위했던 기사들이 다 죽었다고 했나……?’
자신과 사원에서 만났던 그 날, 황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호위 기사 셋이 레제프의 손에 죽었다고 했다.
제다이어는 뺨을 긁었다. 그 납치 사건은 자신과도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황성을 나가 로비 앞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기다리자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여자들이 보였다. 그들 중 온통 새까만 차림을 한 여자가 있었다.
얼굴을 검은 망사로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갈 장소에 맞춰 상복을 입은 사람이라면 뻔했다.
‘저 사람이 황녀겠군. 그럼 마법사는 누구지?’
카예나의 곁에는 상급 시녀를 포함해 하급 시녀, 시중 하녀 등등 여자가 수도 없이 있었다. 제다이어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그때 보았던 마법사와 닮은 이가 누군지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못 보던 기사네?”
어느새 황녀가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예, 며칠 전에 에반스 가문의 추천으로 들어온 신입…… 기사입니다.”
이든은 신입이라고 말하며 조금 민망스러워했다. 보통 신입은 10대 후반이었기 때문이다.
“제다이어 로스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가 예를 갖추자 카예나가 빙긋 웃었다.
“그럼 앞으로 자주 보겠구나. 만나서 반갑네, 제다이어 경.”
“……!”
그녀의 목소리에 제다이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마법사!’
황녀가 바로 그 마법사였다.
* * *
커다란 국화 다발이 카예나가 올라탈 마차에 실렸다. 엘리반 부인의 관에 넣을 꽃이었다.
카예나는 그 생생한 향기에 눈을 잠시 감았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 건조한 마음에 오히려 더 씁쓸해졌다.
“잘 다녀오십시오, 전하.”
베라와 올리비아, 수잔이 그녀를 배웅했다. 그들은 카예나를 따라가고 싶었으나 갑자기 도티 부인이 성년식을 앞두고 딴지를 걸며 난리를 피우는 통에 성을 비울 수 없었다.
카예나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도 했다. 그들이 순순히 명에 따른 것은 순전히 중앙군 기사들 때문이었다.
그녀가 탄 마차 뒤로 제드 단장이 보낸 정예 기사들이 말을 타고 있었다. 중앙군과 직속 기사 두 명이면 호위의 숫자도 넉넉할뿐더러 남들 보기도 좋았다. 애니도 마부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다녀올게.”
마차의 문이 닫혔다. 카예나는 마차의 창문을 훤히 열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갑갑하게 가리고 있던 검은 망사를 모자 위로 걷어 올렸다. 마차 바깥의 풍경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다이어는 자신이 호위하는 방향의 창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자 흠칫 놀랐다. 창문 안으로 보이는 카예나의 얼굴에는 더 놀랐다.
그는 초상화로 황녀의 얼굴을 일찍이 익혀 두었다. 솔직히 초상화를 봤을 때는 하여간 황족 놈들은 미화가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초상화가 실물을 못 따라갈 수가 있구나.’
제다이어는 혀를 내둘렀다.
“잘 찾아왔네.”
“……쿨럭!”
그는 대뜸 말을 거는 카예나 때문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그리 놀랄 것 없어. 어차피 내가 황녀고 마법사라는 사실, 눈치챈 거 아니야?”
“아니, 그걸 이렇게…….”
제다이어는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으로 주변을 슬쩍 살폈다. 그런데 누구도 카예나의 말을 듣지 못한 눈치였다.
“마법으로 말소리를 차단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데니안 사원에서 바옐이 썼던 마법을 카예나 식으로 응용한 것이었다. 시공간을 다룰 수 있으니 공간의 소리도 당연히 다룰 수 있었다.
제다이어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법은 원래 그런 건가? 아는 것이 없으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파악할 능력도 없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게 마법사라는 사실을 이렇게 대놓고 드러내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들통날 일이잖아.”
그건 그랬다. 목소리가 워낙 인상적이라 바로 알아들었으니까.
물론 제다이어가 특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눈썰미가 좋아서 단박에 눈치챈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같은 배를 탈 사이에 신원 파악이 되어야 신뢰도 생기지 않겠어?”
“……그렇습니까.”
제다이어는 줄곧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먼 풍경을 보고 있던 카예나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제가 황실 직속 기사단이 될 것을 어떻게 예측하셨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나는 그냥 황녀이자 마법사일 뿐, 예언가는 아니야.”
그 비슷한 힘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예언가는 아니다.
“하인리히는 사람을 믿지 않아. 돈만 믿거든. 그런 자가 어떻게 당신을 믿겠어? 당연히 사람을 붙이고 감시했겠지.”
제다이어는 미간을 찡그렸다. 하인리히 대극장에서 그를 만나고 나온 직후, 곧바로 따라붙었던 시선이 기억났다.
“그러다 수상한 행동을 할 수 있게끔 황궁에다 그대를 풀어놓으리라고 생각했어.”
그렇다고 해도 하인리히 대공자가 그런 사람이니 그렇게 행동하리라고 판단하고 제다이어를 풀어 줬다고?
어지간한 도박사도 황녀보다 더 배짱 있진 못할 것이다. 과감함과 무모함은 다르다.
카예나를 바라보는 제다이어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제 황궁으로 왔으니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카예나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바로 엘릭서를 내놓으라고 할 줄 알았더니.”
“제가 한 일에 비해서 엘릭서는 수지 타산이 맞지 않으니까요.”
역시 그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눈치도 사고도 모두 빨랐다. 카예나는 입가로 엷게 웃음을 베어 물었다.
“나는 황제가 될 생각이야.”
제다이어는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는 간신히 표정과 자세를 수습했다. 그러나 입술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황제? 머리에 황관 쓰고 황좌에 앉는 그 사람을 말하는 건가?
“그래서 제다이어, 당신의 수완이 필요해.”
자신의 수완이 필요한 일이라면 뻔했다.
“암흑가라도 휘어잡으실 생각입니까?”
“정확해.”
암시장은 하멜 백작가가 꽉 잡고 있었다.
카예나는 제다이어에게 돈을 쏟아부어 그의 세력을 만들게 하고 이른 시일 내로 하임벨 영주를 습격해 서부 공작령에 그 도시를 편입시킬 생각이었다.
제다이어는 카예나의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암시장이 기반 된다면 새로운 세력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협잡배들에게 의리 따위는 없을뿐더러 하인리히 대공자가 보수를 가장 많이 주니까 같이 일하는 거거든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어.”
제다이어도 귀가 있으니 카예나가 국정 대리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가 황실의 국고를 사용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대체 누가 금력으로 황녀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런 압도적인 자금이 제다이어에게 집중된다면 어떨까?
‘……미쳤군.’
그는 자신이 상당히 유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뒤늦게 암흑가에 뛰어들었으나 금방 하인리히의 청부 업체 간부가 될 정도로 수완이 좋았다.
사용할 돈에 제약이 없다면 그가 암흑가의 새로운 거물이 되는 걸 아무도 방해할 수 없으리라.
마차가 멈췄다. 카예나는 마법을 사용하던 것을 멈추고 망사로 얼굴을 가렸다.
곧 마차 문이 열리고 말에서 내린 이든이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카예나는 그 손을 잡고 마차에서 천천히 내렸다. 교외에 있는 공동묘지였다. 그녀는 짤막하게 숨을 한 번 내쉬고 앞으로 걸었다. 애니가 꽃다발을 들고 뒤를 따랐다.
이곳은 돈은 있으나 명예롭지 못한 죽음을 맞이했거나 신분에 문제가 있는 이, 즉 사생아 같은 이들이 묻히는 곳이었다. 사원에서 시신을 받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때 익숙한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천을 덮은 관이 지나갔다.
‘제논 에반스.’
그도 오늘 이곳에 묻히는 모양이었다.
카예나는 모르는 척 그들과 얽히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묘지기가 다가오자 애니가 말했다.
“엘리반 가문에서 오늘 관에 흙을 덮는다고 들었소.”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들은 묘지기를 따라 걸었다. 커다란 공원 같은 곳이라 에반스 가문과 얽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저곳입니다.”
묘지기가 상복을 입은 몇몇 사람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카예나는 그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심장의 메마른 뜀박질이 서서히 귓가를 시끄럽게 울렸다.
엘리반 남작을 포함한 그의 가족들이 조촐하게 모여 있었다. 누구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상한 것처럼, 기이할 정도로 담담해 보였다.
그 순간 카예나는 몹시 죄스러워졌다. 누구도 울지 않는 장례식을 만든 것은 황실이었다. 또한, 자신이었다.
그때 엘리반 남작이 그녀를 발견했다. 세월에 주름진 얼굴이 낯설었다.
‘첫 번째 삶에서도 그의 노년기는 본 적 없었지.’
카예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엘리반 남작이 입가로 조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자신을 보고 웃을 수 있지?
카예나는 되레 마음이 처연해졌다. 엘리반 남작이 다가왔다.
“……황녀 전하, 맞으시지요?”
카예나는 각오처럼 숨을 삼키고 입술을 떼었다.
“유모의 명복을 빌러 왔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이라도 뵈려고요.”
그러자 엘리반 남작이 눈가로 깊은 주름을 만들어 냈다.
“아내가 좋아할 겁니다.”
“…….”
카예나는 차마 동의할 수 없었다. 대나무처럼 꼿꼿하던 유모에 비하면 엘리반 남작은 유들유들한 봄바람 같은 신사였다. 참 묘한 조합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곳이 묘지가 아니라 진짜 어느 산책로인 것처럼 카예나를 안내했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카예나는 어색하게 묘지 앞에 섰다.
깊은 구덩이에 엘리반 남작가의 문양이 그려진 천을 덮은 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흙을 덮기 전, 막 꽃을 던져 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애니에게서 꽃을 건네받았다. 자신은 유모가 좋아하는 꽃이 뭔지 몰랐다. 그랬기에 어쩔 수 없이 흔히들 선택하는 하얀 국화를 한 다발 준비했다.
이제야 당신을 찾은 저를 용서하세요. 저는 당신을 지킬 힘도 없으면서 욕심을 부렸군요.
……죄송해요.
목구멍이 울컥거렸다. 미간은 점점 깊은 골을 만들어 내며 눈가가 뜨거워졌다.
“우리는 항상 이런 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엘리반 남작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카예나를 위로하듯 흘러나왔다.
“그녀는 대쪽 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갑자기 죽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당부했었습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막 꽃을 던지려던 카예나의 손이 멈칫했다.
“죽고 사는 것이 한순간에 결정되는 비정한 세계로 들어가기로 한 이상, 이후에 일어날 일은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고 했지요.”
황궁은 그런 곳이지 않습니까?
남작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어느 날 그러더군요. 황궁에서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고, 아주 작고 연약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카예나는 그 사람이 바로 자신임을 알았다.
“이 죽음은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무언가를 탓하라면, 황궁 그 자체일 것입니다.”
“…….”
“아내는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그리고 저도 그렇습니다.”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엘리반 부인의 친척들인 것 같았다.
카예나는 조금 망설였다. 엘리반 남작은 지금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겠다고, 세력이 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또다시 이들을 끌어들이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클로렌스는 황궁의 희망은 전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내를 믿습니다.”
불충함을 물을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남작은 흔들림 없었다.
“……그럼 제 힘이 되어 주시겠어요?”
엘리반 남작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의 혈족들도 모두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그가 말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대답을 들은 카예나가 관 위로 꽃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