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2
악녀는 마리오네트 2장. 죽음을 부르는 아름다움(2/33)
2장. 죽음을 부르는 아름다움
열병은 악몽을 낳았다.
“잘할 수 있지? 정 사원.”
악몽은 뒤죽박죽 섞여 회사와 황실을 번갈아 보여 주었다.
“그러고도 네가 제국의 황녀란 말이냐!”
“다 너 때문이야!”
“……!”
창자를 헤집는 고통과 동시에 눈이 번쩍 뜨였다.
‘……꿈이구나.’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가만히 있다가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흐르는 걸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눈물은 그저 관성적인 것이었다. 새삼 과거의 기억에 슬픔이나 아픔을 느끼기엔 그녀는 무뎌졌다.
“일어나셨습니까?”
베라가 얼른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미지근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눈물에 젖은 얼굴을 닦아 주었다.
‘대체 무슨 악몽을 꾸시기에 매번 이렇게나 눈물을 흘리실까?’
“물을 좀 드셔야겠습니다, 전하.”
베라는 카예나가 레몬수를 충분히 마실 수 있게끔 했다.
레제프와의 대면 이후로 벌써 보름이 흘렀다.
그동안 카예나는 얌전히 있었다. 몸을 회복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레제프의 경계심을 늦추려는 의도도 있었다.
레제프는 악인이다. 필요하다면 누이에게 독을 먹이든 누군가를 가차 없이 죽이든 아무런 가책 없이 저지르는 인물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다른 이의 희생을 가볍게 여겼다. 희생된 인물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카예나였다.
‘내 결혼이 흐름에 영향을 줘서는 안 돼. 누구의 세력에도 포함되기 어려운 위치여야만 해.’
그렇게 되면 자신 하나쯤 빠져도 젠가는 무너지지 않는다. 레제프는 의심이 많다. 그는 끊임없이 카예나를 시험할 것이다.
‘올리비아를 죽이려는 일만큼은 막자.’
레제프에게 속아 올리비아를 독살한 것일지언정, 어쨌든 실행한 사람은 그녀였다. 회귀하여 사라진 일이라 할지라도 죄가 없어지진 않는다. 이제는 무언가에 휘둘리며 사는 게 진절머리 났다. 레제프에게 원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조건으로 내건 것은 진심이었다.
‘내가 결혼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겠지만.’
카예나는 적당히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결혼할 작정이었다.
‘그때까지만 적당히 레제프의 비위를 맞춰주면서 살자.’
“전하, 범인이 검거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실크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으며 여상스럽게 되물었다.
“그래?”
‘내 말대로 했구나.’
카예나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녀는 가만히 때를 기다렸고 레제프는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오늘이 범인의 처형일이라고 합니다. 나가 보시겠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그런 끔찍한 광경을 구경할 이유가 없다. 이곳은 범죄자를 단두대에 세우면 다들 몰려와서 목이 잘리는 걸 구경하는 그런 시대였다. 그게 지금의 그녀에게는 거부감을 일으켰다.
* * *
카예나 황녀를 독살하려고 했던 귀족은 만인이 보는 앞에서 단두대에 서게 되었다.
“너무 사랑해서 그랬습니다! 죽음조차도 그분을 향한 내 마음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범인은 이름 모를 몰락 귀족이었다. 귀족들은 이 뜻밖의 범인에 연회장에 그런 남자가 있었느냐고 떠들썩거렸다.
‘고작 보름 만에 죽음을 결심한 사람을 구하다니.’
귀족들은 황녀의 상태가 심각하단 소문이 돌자 독살 사건을 입에 담길 꺼렸다.
레제프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아직 나이가 어리긴 해도 레제프를 얼른 황태자로 책봉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황위 계승권을 가진 이가 어디 레제프 황자 전하뿐이던가! 그 일은 그렇게 섣불리 정할 수 없네!”
하인리히 대공자에게 줄을 댄 귀족들은 대경실색하며 그 사건을 유야무야하려 했다. 그런데 때마침 어느 가십지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이 불러일으킨 죽음에 대해 다루었다.
‘가십지까지 포섭해서 일을 준비했구나. 꽤 바빴겠네.’
가십이란 게 원래도 사람들의 입에 잘 오르내리지만, 특히나 하인리히 대공의 사람들이 그 관심을 증폭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당장은 하인리히 대공 쪽이 제위 싸움에서 밀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카예나의 아름다움은 폭발적인 관심을 얻게 되었다.
“전하의 아름다움이 갑자기 생겨난 것도 아닌데 꽤 새삼스럽지요?”
베라의 말에 카예나가 피식 웃었다.
카예나가 아름답단 사실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이미 유명했으나 이젠 단순히 아름답다는 표현은 부족했다.
‘죽음을 부르는 아름다움.’
어느 가십지에서는 황녀를 두고 독가시를 품은 장미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소문과 관심은 기름칠이라도 한 듯 참으로 순조롭게 과열되었다.
카예나가 기존에 잡아 둔 모든 파티 스케줄을 취소하자 그 열기는 광기로 변할 정도였다. 이미 황녀를 독살하려 했던 사건은 카예나 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한 부가 설명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벌써 귀족들이 전하의 성년식만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합니다.”
성년식은 유례없을 정도로 성대한 결혼 시장이 되리라.
“곧 전하께서 약혼자를 맞이하실 수도 있겠네요. 상대는 역시 키드레이 경이 좋을까요?”
베라가 그녀를 떠보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질문의 답은 레제프의 귀에 흘러들어 가겠지.’
카예나는 모르는 척 말했다.
“글쎄. 부황께서 원치 않으시니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베라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카예나가 라파엘로 키드레이에 대해 이런 식으로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현 황제와 키드레이 공작가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대체 사이가 왜 나쁜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카예나가 라파엘로에게 매료된 탓에 황제는 속을 썩히곤 했다.
“키드레이 경이 부마까지 된다면 권력 구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상당히 원론적인 말이었으나 지금까지 카예나가 단 한 번도 고려하지 않은 문제였다.
베라는 조용히 차를 더 채우며 카예나의 고요한 옆모습을 힐끔 훔쳐보았다.
카예나는 찻잔으로 잔잔한 미소를 감췄다. 이 자리에 레제프의 귀만 있는 게 아니다. 그녀의 발언은 필시 부황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부황의 큰 뜻을 모르고 지금까지 그토록 억지를 부렸으니 참으로 면목 없구나.”
카예나는 라파엘로를 갈망한 만큼 주변을 괴롭혔다. 그의 집에 쳐들어가기도 했고 황궁에 억지로 소환하기도 했다.
실제로 부황은 카예나의 요청에 따라 라파엘로를 매번 입궁시켰다. 물론 그것은 꼭 카예나를 위함은 아니었고 키드레이 가문의 차기 가주의 기를 꺾어 굴욕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마땅한 일이라 생각하셨으니 청을 들어주셨을 겁니다.”
베라의 말에 카예나는 속으로는 동의했으나 겉으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녀로서 처신이 좋지 못했단 것을 내 어찌 모르겠니? 지금이라도 내가 저지른 일들을 수습해야겠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우선 성년식에 입을 드레스를 다시 손봐야겠어.”
그것은 전혀 연관이 없는 일처럼 보였기에 베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드레스 룸을 열어라.”
곧 황녀의 성년식에 맞춰 연회가 열린다.
그때 입을 드레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기에 다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카예나는 이번 사건을 이용할 수 있도록 콘셉트를 수정하고 싶었다.
“등 쪽을 깊게 파고 어깨도 드러내는 편이 나을까요?”
그녀는 드레스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노출은 없애렴.”
그녀는 줄곧 생각해 둔 이미지가 있었다.
‘마리오네트는 마리오네트답게.’
그녀는 인형들에게 곧잘 입히곤 하는 레이스나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드레스를 원했다. 그녀가 아름다움에만 과하게 신경 쓰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카예나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그랬지만 연회장에서 황녀 전하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없을 거예요!”
주변에선 그녀의 모습을 보고 탄성을 내지르기 바빴다.
그러나 베라는 환복을 도우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다들 전하께서 얌전해졌다고 좋아하지만, 결코 만만해진 게 아니야.’
근래의 황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최근 카예나는 퍽 무르게 행동하고 있으나 누군가에게 곁을 내주지는 않았다. 주도권을 상대에게 쥐여 주는 것 같지만, 어린아이에게 곧 먹어 사라질 과자를 양보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독을 마시고 깨어난 날 이후로 말투도 고아하게 바뀌셨다.’
그 변화를 알아차린 사람은 베라 자신밖에 없는 듯했다.
베라는 조용히, 끊임없이 카예나를 관찰했다.
카예나는 베라가 마음에 동요가 일고 있단 사실을 잘 알았다.
‘베라는 충직하지만, 야심이 있어.’
지금 황녀궁에 있는 시녀 중 쓸 만한 사람은 베라를 제외하면 하나도 없었다. 카예나는 그녀를 회유할 작정이었으므로 자신을 충분히 탐색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카예나는 마지막 드레스를 입어 보았다. 그것은 카예나가 성년식을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드레스였다. 한때 장미를 몹시 사랑했던 카예나는 장미 자수를 놓은 드레스를 즐겨 입었다. 이 드레스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꼭 인형 같으세요!”
시녀들은 하던 대로 능숙하게 호들갑 떨었다. 카예나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칭찬이었기 때문이었다.
베라는 그게 우스워 입안의 살을 깨물어야 했다. 제 주인은 더는 그런 종류의 칭찬에 진심으로 기뻐하지 않는다.
예상대로 카예나는 우쭐하는 기색 없이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정말로 변하셨어.’
베라는 이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했다. 자꾸만 카예나의 진의를 파헤치고 싶었다.
과연 이 사람이 내 주군으로 적합할까?
황실에서 줄을 잘못 대어 가문까지 멸문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베라는 신중해야만 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열악한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언젠가는 레제프가 황제가 되리라고 보았다. 그건 아주 정확한 판단이었다.
베라의 뛰어난 통찰력은 카예나에게 기민하게 발휘되고 있었다.
“장미 자수가 과하지 않으면서도 아주 제대로 사용했네요.”
“이건 이대로 하자꾸나.”
“나머지는 수선실로 보내겠습니다, 전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예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손을 휙 들어 올려 보았다. 마치 줄이 달려 있어 누군가가 그녀를 조종하는 것처럼. 그게 꽤 잘 어울려 보였다.
‘난 평생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면서 살았지.’
자신이 줄에 매달린 누군가의 마리오네트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손에 쥔 권력이 누구의 것인지 몰랐다.
‘한때는 그게 다 내 의지라고 생각했고.’
계속 그 착각 속에서 살아가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카예나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생각이 없었다.
‘나는 나로서 살아갈 것이다.’
그녀는 줄이 끊어진 것처럼 팔을 툭 떨어뜨렸다.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그녀는 드레스를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레제프는?”
“아직 출타 중이십니다.”
그는 최근 후계자 자리를 놓고 하인리히 대공의 아들과 한창 세력 싸움 중이었기에 꽤 바쁜 상태였다.
‘레제프, 내 가치가 올라가는 일이 오롯이 네 권력에 보탬이 되리라고 생각했니?’
잔혹한 폭군 황제가 될 레제프라 할지라도 지금은 고작 열여덟 살짜리 어린애일 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카예나는 어린 소녀의 거죽만 쓰고 있을 뿐, 두 번의 삶을 거쳤다. 지독하리만큼 혹독한 삶들을 경험했던 카예나에게는 그가 어린아이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지금 내게 힘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은 너 말고도 또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구나. 어리석게도.’
카예나가 베라에게 말했다.
“폐하를 알현하러 가야겠다.”
* * *
엘다임 제국의 황제, 에스테반 힐은 침대에 누워 약을 받아 마셨다. 그러고는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생기를 잃은 눈동자로 제 딸, 카예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먼저 짐을 찾아오다니, 별일이구나.”
그의 말에 카예나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예를 갖추어 말했다.
“그간 저지른 불효를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폐하.”
“됐다.”
황제는 그런 말 한마디에 온정을 품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 카예나가 분명히 자존심 상할 것을 알면서도 냉혹하게 말했다.
딸은 어리석다. 도대체 언제쯤 정신을 차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늦었지만 지금에서라도 자식 된 도리를 다하려는 소녀를 부디 어여쁘게 봐 주세요.”
말이 꿀처럼 달았다. 그건 카예나에게서 나올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황제가 의아함으로 눈썹을 휙 들어 올렸을 때였다. 카예나가 황제의 곁으로 다가섰다.
“최근 저 때문에 심려하시지 않았습니까?”
황제가 실제로 심려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카예나가 이런 생각을 할 줄 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지금은 거의 회복했으니 염려하지 마시라고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녀는 시종이 건네려고 하던 찻물이 담긴 그릇을 대신 받았다. 은으로 된 스푼으로 황제의 입에 찻물을 흘려 넣어 주는 태도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최근 카예나 황녀가 독살당할 뻔했던 이후로 태도가 상당히 바뀌었단 사실은 보고받았다. 말과 행동에 자비와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딸의 살가운 행동은 그녀가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부녀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카예나는 황제를 거북해했으며 황제는 카예나를 한심스럽게 여기기에 그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곁에 간이 의자에 앉아 수발을 드는 카예나는 어색해하거나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누구의 작품이지?”
황제는 한평생을 지배자로 살아왔다. 이번 사건은 결코 저절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범인을 색출한 과정과 사건의 여파가 다 조작되었다면 모를까.
‘진짜 범인이 레제프란 사실을 알고 물으시는 건가?’
카예나는 시종에게서 실크 손수건을 받아 황제의 입술을 닦아 주며 자연스럽게 시간을 벌었다.
황제의 질문은 노련한 정치가답게 애매했다. 원래의 카예나라면 분명히 함정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대신 그녀는 의뭉스럽게 말했다.
“귀엽게 봐 주세요.”
답지 않게 퍽 부드러운 어투였다. 거기다 입가에 걸친 여유로운 미소는 이제 막 성년이 될 애송이의 것이 아니어서 황제는 내심 감탄하고 말았다.
‘이 아이가 원래 이렇게 자신을 잘 감추었던가?’
황제는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을 동안 딸에게 대체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건가?’
딸이 변했다.
황제의 눈가에 잠시 이채가 어렸다.
“정녕 진짜 범인을 잡지 않아도 개의치 않겠느냐?”
황제는 카예나가 원한다면 진짜 범인을 색출하는 일에 한손 보태 줄 의향이 있었다. 아직 확실한 정황은 없었으나 레제프가 범인일 가능성이 컸다. 이참에 기를 눌러두는 것도 좋겠지.
‘레제프를 의심하는 건가? 괜히 이 타이밍에 레제프를 불리하게 만들면 내가 이용할 수 없어.’
카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범인은 레제프가 벌할 거예요. 사건의 경중에 비해 파급력도 없으며 귀족들에게 반발심만 심어 줄 바에야 이렇게 처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황제는 작게 감탄했다.
“제법이구나.”
“저의 어리석은 생각이 부황의 심기를 어지럽히지는 않았을까 염려스러울 따름이에요.”
카예나는 자신이 만들어 낸 계략을 드러내면서도 그 공로를 황제에게 돌렸다.
“철부지 딸을 이렇게 믿고 기다려 주셨으니 이제 제 몫을 해내야지요.”
황제는 카예나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제왕의 자식은 제왕의 그릇을 품고 태어나는 모양이었다.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딸에게 어떤 보상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성년식이 얼마 남지 않았지.”
카예나는 굳이 뭔가 말하지 않고 찻물이 담긴 그릇을 시종에게 넘겼다. 그러자 황제가 말했다.
“슬슬 네 혼처를 알아보아야겠구나.”
혼처.
그 말에 카예나는 순간 라파엘로 키드레이를 떠올렸다. 그건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마음의 동요를 눌렀다.
“그러네요. 저도 곧 성년식을 치르니까요.”
첫 번째 삶에서 카예나는 그렇게 수많은 구애를 받았음에도 약혼자 하나 없이 살다가 종국엔 길리안 자작에게 팔려갔다.
황제는 그녀의 혼처에 관심도 없다가 죽었다. 레제프는 부마 자리를 놓고 경쟁을 부추겼다. 아무리 황족이라고는 해도 대체 이걸 두고 누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제가 정녕 당신의 딸이 맞기는 한 건가요?’
카예나는 부친에 대한 싸늘한 감정과는 달리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생각해 둔 가문의 영식이라도 있으신가요?”
황제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으나 놀랐다. 혼처 이야기를 꺼내면 분명 카예나가 라파엘로 키드레이를 언급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 대답했다면 다시 그녀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예나는 키드레이 경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자신의 결혼이 사랑 혹은 욕망으로 소모할 카드가 아니란 사실을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자 부러 물었다.
“라파엘로 키드레이에게 그토록 공을 들였으면서 다른 이와 결혼해도 괜찮다는 뜻이냐?”
그 물음에 카예나는 아득한 첫사랑을 떠올려 보았다.
‘어차피 나는 그의 짝이 아니니까.’
완전히 미련이 없다고 하면 거짓이다.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더라도 그는 정말 괜찮은 신랑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라파엘로는 카예나 황녀라면 질색할 터였다.
그녀는 굳이 자신이 싫다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라파엘로는 그녀와 반드시 친구가 되어 주어야 했다. 그녀의 성공적인 결혼을 위해 그의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키드레이 공작가의 힘이지.’
카예나는 미소를 가다듬으며 차분히 말했다.
“다른 자매도 없는 제가 어찌 한순간의 감정에 휘둘려 이런 중대사를 그르칠 수 있겠어요? 저는 부황의 뜻을 따를 뿐이에요.”
“네가 오늘 짐을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구나.”
황제가 너그럽게 말했다.
“네 짝을 허투루 정할 수는 없지. 시간을 들여 잘 살펴보자꾸나.”
가히 파격적인 말에 주변에 있던 시종들조차 본분을 잊고 입을 떡 벌리거나 숨을 들이켤 정도였다.
‘이제 레제프의 관심만 치워 내면 내가 어떤 사람과 결혼하든 상관없게 된다.’
카예나는 목적하던 것을 이루고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이토록 마음 써 주신 만큼 황가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종장에게 손짓했다. 이만 자리에 누워 쉬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인사를 올리고 제 시녀들을 데리고 침소에서 나갔다.
“나이를 먹더니 정신 차린 모양이구나.”
시종장이 황제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느새 저리도 훌륭히 장성하시다니, 세월이란 게 이리도 야속합니다.”
“말 돌리기는.”
황제는 그 말을 듣고 픽 웃어 버렸다.
* * *
카예나는 황제의 침소를 나오다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그녀의 걸음이 자연스레 멈췄다. 다가오는 시녀들과 주변에 포진한 기사, 시종들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상대는 카예나의 열렬한 짝사랑 상대로 알려진 남자였기 때문이다.
‘라파엘로 키드레이.’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는 키드레이 공작가의 상징이다.
라파엘로는 그 특징을 짙게 타고났다.
온통 색이 옅은 카예나는 그의 선명한 존재감에 매료되었었다. 사실상 이미 세 번째 삶을 살아내는 중인 지금의 노련한 카예나가 보아도 그는 여전히 근사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라파엘로는 또래의 여느 귀공자들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이미 전장을 경험한 자의 무겁고 선득하며 압도적인 분위기는 물론, 타고난 미모와 몸매마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카예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소녀였기에 그의 희소한 매력에 이끌렸었다.
‘첫 번째 삶에선 그저 근사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소설에서 본 라파엘로는 마냥 신사는 아니었다. 그는 인간관계에 결벽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사람들과의 신체적 접촉이나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을 피곤해했다. 원작에서는 올리비아가 그런 라파엘로의 강박과 결벽을 보다듬어 주었고, 라파엘로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었다.
“라파엘로 키드레이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라파엘로가 그녀를 향해 건조한 태도로 예를 올렸다.
문득 카예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생각보다 크게 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라파엘로는 그녀를 귀찮게 여길 뿐, 혐오스러워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녀에게는 과오를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이제 그에게 무례를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 함부로 친근한 척하고 스킨십을 하는 등의 무례한 언행을 조심한다면 전보다는 나은 관계로 지낼 수 있으리라.
어쨌든 첫사랑에게 끔찍한 여자로 기억되는 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일어나라.”
카예나는 결심을 실행했다.
“오랜만이군, 키드레이 경.”
‘……키드레이 경?’
라파엘로는 ‘라피’대신 정중한 호칭으로 불리자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러고 보니 카예나가 자신을 발견했음에도 한달음에 달려와 팔을 껴안지도 않았다.
의아해하는 건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던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카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전하께서 왜 저러시지?’
카예나는 아주 무례하고 안하무인이어야 정상인데?
모두의 혼란 속에서 카예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다른 생각에 잠겼다.
‘라파엘로가 도착했음에도 누구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
이 대목에서 부황이 라파엘로를 견제하고 있단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폐하를 뵈러 온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그의 관심을 받으려 끈질기게 말을 걸었을 카예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잘 알았다.
자신은 악녀지, 여주인공이 아니다.
‘이제야 내 분수를 깨달은 거지.’
카예나는 시종을 불렀다.
“폐하께 키드레이 경이 알현을 요청한다고 말씀드려라.”
시종은 잠깐 머뭇거렸다. 라파엘로의 도착을 알리는 걸 미룬 것은 황제의 뜻이기 때문이다.
“무얼 하느냐?”
카예나가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하게 굴자 시종이 어쩔 수 없이 침실로 들어갔다. 황녀가 감히 제 말을 무시하느냐고 난리를 피우는 것보다 라파엘로가 알현하기를 바란다고 고하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라파엘로는 일련의 과정을 의구심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카예나가 그의 환심을 사려 많은 기행을 벌여 왔으나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뭔가 또 그를 귀찮게 하려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카예나는 그 명령을 내린 이후에도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라파엘로와 눈을 마주치는 것마저 꺼리는 기색이었다. 이상했다. 원래라면 훤히 읽혀야 할 상대에게서 아무런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방금 전 호의에 어떠한 의도도 없었던 것처럼.
“그럼 이만.”
카예나는 제 시녀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라파엘로와 거리를 두는 모습에 모두 의아할 지경이었다.
라파엘로는 하마터면 카예나를 불러세울 뻔했다. 그는 살짝 찡그린 얼굴로 스쳐 지나가는 카예나를 묘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키드레이 경.”
그때 침실에서 나온 시종이 그를 불렀다. 라파엘로는 그제야 카예나가 나간 문에서 시선을 돌렸다.
“폐하께서는 지금 오수 중이셔서 내일 다시 방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종은 썩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라파엘로의 수행원들이 깊은 분노를 드러냈다.
“제대로 전한 게 맞소? 방금 황녀 전하께서 침실을 나오시지 않았소!”
그의 뒤에서 대기 중이던 보좌관들도 주먹을 꽉 쥐고 살기를 드러냈다.
“그만.”
라파엘로가 그들에게 살기를 거둘 것을 명했다.
“황제 폐하의 침소 앞이다. 언성을 높이지 마라.”
“…예.”
전장을 떠돌았다는 것은 살인을 경험했단 뜻이다. 그런 이들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았던 시종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라파엘로가 신사적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근시안적인 착각이었다. 사실 라파엘로는 아쉬울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황위 다툼에는 관심도 없었다.
‘내가 세력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에스테반 황제가 모를 리 없지.’
황제가 언제까지고 이렇게 꼬장꼬장하게 굴 수 없다. 라파엘로는 그저 소란스러운 게 싫어서 관용을 베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다음에 다시 오겠네.”
시종은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부리나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그러십시오.”
라파엘로는 응접실에서 나왔다가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카예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 역시……. 어쩐 일로 그녀가 순순히 물러나는가 싶었다.
“역시나 부황께서 그대를 만나 주시지 않은 모양이네.”
그녀는 독의 여파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터라 안색이 파리한데도 불구하고 라파엘로가 나오길 기다리며 복도에 서 있었다. 참으로 귀족답지 못한 행실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뒤에 있던 시녀들 대부분이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최측근에 있는 단 하나의 시녀만 안색이 멀쩡했다.
라파엘로의 시선이 주변을 한번 훑고 다시 카예나에게로 돌아왔다. 그런데 마주친 그녀의 눈빛이 어쩐지 낯설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차라도 한잔 들고 가지 않겠는가?”
평소였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거절했을 청이었다. 이어진 말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대가 골치를 앓고 있는 일에 대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제가 골치를 앓고 있는 일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카예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로?”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라파엘로의 뒤에 서 있던 보좌관들이 헛기침하거나 넋을 빼놓았다.
“그대가 부황을 뵈려는 이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황제를 알현하려는 이유를 황녀가 안다고?’
라파엘로가 황제를 알현하려는 이유는 2년 전 전쟁에서 세운 공의 대가로 서부의 군사통치권을 이임 받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오직 공작에게만 허락된 권한이다. 라파엘로가 굳이 권한을 이임 받으려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가문의 결혼압박을 피하려고 하는 걸 황녀가 알 리가 없을 텐데.’
세간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키드레이 공작부부는 현재 이혼 소송 중이었다.
그의 모친, 노아 키드레이는 후계자가 아닌 누군가의 아내가 될 준비만 한 여자였다. 오빠가 둘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전대 공작도 그 두 아들이 전쟁에서 모두 죽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급히 레오 프란시스를 데릴사위로 맞이했다.
그런데 레오 프란시스는 라파엘로가 유년기를 지나기도 전에 부정을 저질렀다. 그 뒤로 자존심 강한 노아 공작부인과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라파엘로가 어려서 가주직을 물려줄 수 없는 환경이라 결별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조용히 이혼 소송을 하게 되었다.
모친은 남편에게 어떤 위자료도 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남편의 무능함과 더불어 아들이 당장 가문을 계승해도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가신들에게 동의받으면 그게 가능했다.
그러려면 라파엘로가 만장일치로 가신들에게 다음 대 가주로서 인정받아야 한다.
다만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라파엘로가 다음 후계를 볼 수 없는 성적 취향을 지녔단 소문이 가신들 사이에 은밀하게 맴돈 것이다. 23살이나 되도록 여자 손 한번 잡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를 현혹하고자 했던 귀족들이 침실에 밀어 넣었던 모든 여자를 매정하게 내치기도 했다. 그 소문은 모친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녀는 제 아들에게 붙은 추잡하며 근거도 없는 소문을 없애려 결혼을 추진시키려 했다.
라파엘로는 결혼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터라 공작에게만 허락된 서부 군사통치권을 황제에게 인정 받고자 했다. 그만한 권한을 거머쥐면 가신들이 가주로 인정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카예나가 대체 어떻게 도와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카예나의 파란 눈동자 뒤로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무게감이 느껴졌다.
‘…흥미롭군.’
그는 카예나의 초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렬한 직감을 느꼈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라파엘로는 에스코트를 하기 위해 카예나의 곁으로 다가섰다. 카예나는 그가 내민 팔에 손을 얹었다.
“마침 괜찮은 차가 있어. 그대가 좋아할 거야.”
그녀는 끊임없이 라파엘로에게 말을 걸었고 영양가 있는 질문은 하나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카예나가 또 라파엘로를 꼬여 내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항상 카예나가 하던 대로였다.
그런데 그게 너무 이상했다. 카예나는 종종 말실수를 하곤했다. 예의에 어긋나는 건 십상이었고 민감한 사안을 화두에 자주 올렸다. 그들의 결혼에 대한 가정, 그의 재산 문제 등을 거침없이 묻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오늘의 날씨, 좋은 찻잎의 기준, 심지어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맛있는 타르트를 만드는 법 같은 이야기를 했다.
‘대화의 무게감을 흩트리고 있는건가.’
라파엘로는 시녀들의 느슨해진 태도를 보며 확신했다.
황녀궁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화원에서 카예나가 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볕도 좋으니 화원에서 차를 마시는 게 좋겠어.”
“준비해 오겠습니다.”
카예나는 베라만 빼고 시녀들을 물렸다.
“그럼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지.”
라파엘로는 그게 아까 말했던 그의 고심에 관련한 이야기임을 눈치챘다.
과연 황녀가 어떤 해답을 내놓을까?
카예나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경의 나이도 그만하니, 집안에서 혼사 문제로 떠들썩하겠지?”
라파엘로는 그녀가 또 자신과의 결혼을 망상하여 이야기를 꺼내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개인적으로 결혼을 꺼리는 걸 제외하더라도 황실이나 공작가나 두 사람이 합쳐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권과 패권을 정당히 나누기엔 두 곳 다 너무 힘이 강했다.
“이미 혼담이 오가는 상대가 있을테지?”
“혼담 상대라니요?”
그가 의아하게 반응하자 카예나가 아, 하고 입술을 가렸다.
“아직 모르는 건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예나가 빙긋 웃었다.
“그럼 내가 경의 혼담에 대해 유익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군.”
키드레이 공작가는 서부의 패자였다. 그들은 엘다임 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힐 가문과 힘을 겨룰 수 있는 강력한 군사 가문이기도 했다. 그 가문의 독자인 라파엘로가 얼마나 탐스러운 과실이겠는가?
카예나는 자신의 가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결혼 얘기에 시큰둥해 보이는 라파엘로를 보며 웃었다.
‘남자 주인공답다고 해야 할지.’
그녀는 소설을 읽으며 라파엘로가 그동안 연애 한 번 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도통 누군가에게 애정을 느끼는 일이 없었다. 애착, 애정이란 단어는 그에게 불편하고 귀찮을 뿐이었다. 그런 라파엘로를 두고 사람들은 점잖은 신사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개인의 성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신질환에 가까웠다.
“키드레이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만한 여식이라…….”
카예나는 잠깐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반 백작가의 돌로레스 영애가 있군.”
실제로 소설 속에서 라파엘로의 집안에 초상화를 보낸 영애였다.
“그녀는 피아노를 잘 치고 자수 솜씨도 좋아. 하지만 피만 봐도 기절하는 그 영애가 거친 서부의 땅에서 어찌 지낼까? 그렇다고 안주인이 계속 수도에서만 생활하도록 둘 수도 없는 노릇인데.”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생면부지의 영애를 부인으로 맞이했을 때 벌어질 일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카예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브루킨 자작가의 리타 영애는 그런 면에선 참으로 적합하지. 한때 기사를 준비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 영애는 안타깝게도 지식과 지혜가 몹시 부족하지. 다소 폭력적이기도 하고.”
라파엘로는 그녀가 언급한 두 영애의 공통점을 곧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모두 후계자를 지지하지 않은 수도 출신의 권세가로군요.”
카예나는 빙긋 웃으며 그의 추측을 칭찬했다.
“역시 키드레이 경은 영민하구나.”
“…….”
카예나는 태연하게 자신보다 연상인 라파엘로를 마치 동생처럼 기특하게 여겼다. 모두 할 말을 잃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태도가 잘 어울려 보이니 더욱 이상했다.
“더불어 2년 이내로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 가능한 가문의 여식들이지.”
그는 카예나의 말 중 ‘2년 이내’에 집중했다.
‘황녀의 성년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에게 후보를 추천한다?’
이제 자신과의 결합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라파엘로는 이 대화가 꽤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레이스 자작가의 올리비아 영애가 있군.”
카예나는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 올리비아의 이름을 올렸다.
이번에는 라파엘로도 그레이스 자작가의 이름을 알아들었다. 자신의 가문에서 후원하는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자작가가 셋 중 가문이 가장 한미하긴 하지. 가진 재산도, 권력도 없고. 하지만 키드레이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특이한 이력이 있지.”
라파엘로도 귀가 있으니 카예나가 올리비아를 몹시 싫어한단 걸 알았다. 그런데 카예나가 올리비아를 언급하다니. 대체 무슨 꿍꿍이지?
“개인적으로 나는 키드레이 경이 올리비아 그레이스 양을 만나 보길 권하네.”
“제 혼담 상대로 추천하신다는 말입니까?”
“맞아. 그 아가씨는 영민하고 관찰력이 좋아. 사려 깊은 성격이지만 주체적이고 강단 있지.”
카예나는 협상가처럼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라파엘로는 진의를 알아내기 위해 면밀하게 그녀를 탐색했다. 지금까지의 일을 돌이켜 봤을 때 카예나가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놓고 물었다.
둘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마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 깊고 고요한 시선이었다.
“키드레이 경이라면 이유를 알 것 같은데?”
카예나는 수수께끼처럼 말했다. 정답을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느긋한 태도였다.
‘나와 그 영애의 만남이 황녀에게 득이 된다는 건데. 대체 그 이득이 뭐지?’
라파엘로는 자신이 올리비아와 만나면 카예나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도무지 추측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단 이곳이 소설 속이란 사실을 모르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르고, 카예나의 진짜 목적을 모르기 때문이다.
‘둘은 주인공이니까 내버려 둬도 잘 이어질 거야. 그러니 그 둘의 만남을 내가 주선한 것처럼 생각하게 둬도 괜찮겠지.’
게다가 곧 올리비아를 시녀로 들일테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카예나와 올리비아, 라파엘로는 운명공동체처럼 묶이게 된다.
“시녀들이 오고 있습니다.”
베라가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지금의 대화를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는 뜻이었다.
카예나는 베라가 이미 다른 시녀들과 감정적으로 어느 정도 갈라섰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차를 준비하는 게 좀 늦었구나?”
카예나의 가벼운 질책에 한 시녀가 고개를 슬쩍 숙였다. 보나 마나 황자궁으로 달려가 레제프에게 이 만남을 고해 바쳤으리라. 사실 그러라고 베라를 제외한 시녀들을 모두 내보낸 것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됐다. 차나 어서 준비하렴. 준비는 잘해 왔겠지?”
카예나는 직접 찻잎과 다기의 상태를 확인했다.
“키드레이 경에게는 차를 진하게 우려 우유에 섞어 내어드려라.”
“예, 전하.”
시녀들이 작은 화로에 숯을 넣고 뜨겁게 달구어 그 위로 주전자를 놓았다.
카예나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라파엘로에게 약간의 설명을 곁들였다.
“업무가 바빠 끼니를 거를 때가 많을 것 같아서. 그럴 땐 홍차를 우유에 섞어 마시는 것도 괜찮거든.”
자신이 진하게 우린 차를 좋아했던가. 라파엘로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카예나는 제멋대로 선물을 준비하거나 제 기준에 맞춰 일을 진행하곤 했다. 이것도 그런 일 중 하나이리라.
마침내 그의 앞에 차를 진하게 우려낸 밀크티가 놓였다. 코끝에 닿는 향기가 나쁘지 않았다.
“……!”
티를 한 모금 마신 라파엘로는 기분 좋게 퍼지는 향과 부드러운 목 넘김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거짓말처럼 마음에 들었다.
“어때?”
카예나는 그가 좋아할 걸 확신하고 있는 사람처럼 여유로운 투로 물었다.
“맛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약간 의아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카예나는 자상하고 다감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기쁜 말이네.”
라파엘로는 무심결에 찻잔을 받치고 있던 손으로 하얀 도자기 잔의 표면을 긁어 내렸다. 카예나는 몰랐으나 이것은 라파엘로에게 난생처음 생긴 ‘취향’이었다.
문득 그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더 있는 건 어딘가 위험하게 느껴졌다.
“초봄이라 바람이 차갑구나.”
이만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시녀들은 일사불란하게 도톰한 외투를 카예나의 어깨에 두르며 부축해 일으켰다.
“즐거웠어.”
그녀는 담백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전처럼 그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안달하거나, 다음을 기약하는 말도 없었다.
“참.”
카예나는 자리를 떠나기 전에 뭔가 생각났단 표정을 했다.
“그레이스 영애와 잘된다면 내가 둘의 만남을 가장 먼저 주선했단 사실을 잊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며 걸친 미소가 꽤 짓궂었다. 이런 특혜가 있어야 멀리 돌아서 다시 회귀한 보람이 좀 있지 않겠는가?
“……살펴 들어가십시오, 전하.”
라파엘로는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않고 예를 갖춰 인사할 뿐이었다.
* * *
키드레이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 안은 고요했다. 라파엘로가 뭔가 생각에 잠긴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이상했지요?”
라파엘로의 보좌관, 제레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황녀 전하 말입니다. 평소와 꽤 많이 달라 보이시던데요.”
“평소보다 훨씬 아름다우시던걸요.”
바로 곁에서 걷던 호위 기사, 바스턴이 동의했다.
그러자 제레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핀잔 주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은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분위기가 변했단 말일세.”
“그래서 더 아름다워 보이시더라니까요!”
“…말을 말지.”
제레미가 혀를 끌끌 차자 바스턴이 억울하단 표정을 했다.
그때 라파엘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더군.”
제레미와 바스턴의 말 중 무엇에 대한 동조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그들은 눈만 끔뻑이며 라파엘로의 상념을 더는 방해하지 않았다.
그는 짧은 시간 동안 그 순간을 완전히 장악했던 카예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위압적이지 않았으나 주도권을 확실히 잡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모습은 무엇이고 오늘의 모습은 또 무엇인가?
마차가 별저에 도착해 서서히 멈췄다. 고용인을 포함해 가신 몇몇이 마차를 발견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라파엘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외투를 넘기다가 멈칫했다.
맞은편에 뜻밖의 손님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늦었구나.”
그의 모친, 노아 키드레이 공작 부인이었다.
라파엘로는 오랜만에 마주한 모친을 향해 반가운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서부 공작령에 있어야 할 모친이 어찌 수도의 저택으로 와 있단 말인가?
‘가신들이 어머니의 방문을 내게 숨겼군.’
모친이 이곳으로 방문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몰랐을 리 없다.
“어미에게 차 한 잔조차 내주지 않는거니?”
그는 시녀에게 차를 내오라고 말했다. 그러다 문득 시녀를 다시 불렀다.
“한 잔은 진하게 우려 오너라.”
“예, 주인님.”
그들은 높은 천장까지 길쭉하게 창을 달아 놓은 작은 다이닝 룸으로 갔다. 곧 테이블에 생화와 촛대가 놓였다.
공작부인은 그 꼴을 보더니 작게 혀를 찼다.
“안사람이 없으니 관리가 영 미흡하구나.”
“불필요한 것을 줄였을 뿐입니다.”
“키드레이의 소가주가 남들이 흉보는 일을 사서 해서야.”
라파엘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와서 놀랐니?”
“저는 전달받은 게 없었습니다.”
“그럴 테지. 요란 떨 것 없다고 말해 두었거든.”
일부러 입단속을 시키면서까지 방문을 할 이유가 뭐지?
라파엘로는 모친이 자신이 싫어할 만한 일을 준비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공작부인이 뒤에서 밀랍인형처럼 서 있던 시녀를 불렀다.
“이자벨.”
이자벨이라 불린 시녀가 손에 든 상자를 테이블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라파엘로는 흑단목으로 된 상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게 뭡니까?”
“네 혼처들이다.”
“…….”
타이밍이 참으로 공교로웠다. 그렇지않아도 방금 카예나에게서 제 혼담 상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온 길이다. 모친과 미리 작당한 건 아니겠지? 지나친 상상이기는 하다만, 제 모친은 그럴만한 사람이었다.
“너도 슬슬 약혼자를 두어야지.”
공작부인이 손짓하자 이자벨이 상자를 열고 초상화가 그려진 판화를 꺼냈다.
라파엘로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초상화 밑에는 차례로 돌로레스 에이반, 리타 브루킨, 올리비아 그레이스라고 적혀 있었다. 카예나가 일러주었던 영애들이 순서대로 정확하게 등장했다.
‘…진짜 황녀가 어머니와 미리 상의한 건 아니겠지.’
그는 자신의 가설에 정황까지 보태지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복잡한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모친은 무심히 감상을 전달했다.
“다들 현숙하고 괜찮은 영애들이더구나.”
라파엘로는 진하게 우려낸 차로 입안을 축였다.
‘현숙하고 괜찮은 영애라…….’
그는 카예나가 말했던 결혼 상대의 특징을 떠올려 보았다.
피아노와 자수 솜씨가 좋으나 피를 보면 기절한다는 돌로레스 에이반.
한때 기사를 준비했으나 폭력적인 리타 브루킨.
제 모친이 후원하며 황녀도 추천했던 올리비아 그레이스.
‘……뭔가에 홀린 것 같군.’
황녀는 정말 제게 확실한 정보를 이야기해주었다. 게다가 정말 그녀의 말대로라면…….
‘공작부인으로 적합한 사람들은 아니지. 확실히.’
공작부인은 초상화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중에서 그레이스 자작가의 영애가 어떻겠니? 모난 곳 없고 영리하더구나.”
모친의 말에 그가 대답했다.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어머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모친의 말이 옳다. 가문을 생각했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위치를 견고히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자신을 향한 끈적한 관심, 은밀한 스킨십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났다. 그런데 배우자를 맞이하라고? 식사만 같이하는 정도로 괜찮은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면 진즉 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무언가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모친에게조차 애정을 느껴 본적이 없었다. 제 영역에 뭔가 들어오는 것조차 그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
“설마 그걸 말이라고 내놓은 건 아니겠지. 네가 빨리 혼인하는 것이 네 가문을 위한 일임을 잊지 마라, 라피.”
다정한 애칭에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통첩이었다.
그녀는 제 할 말만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친이 나가고 문이 굳게 닫혔다.
그때 문득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인 판화가 눈에 들어왔다. 라파엘로의 시선은 올리비아라고 적혀있는 판화 위에서 멈췄다. 밀빛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인이다.
카예나 황녀는 어떻게 알았을까. 무슨 수로 정확한 타이밍에 혼담 상대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까.
라파엘로는 다이닝 룸에 들어온 집사를 향해 말했다.
“제레미에게 황녀 전하와 알현 약속을 잡아 놓으라고 전달해라.”
“예, 각하.”
그는 황녀가 궁금해졌다.
* * *
카예나는 황녀궁에 도착하자마자 제 방이 정리되어있지 않단 것을 알아차렸다.
“침실을 정리한 것 같지가 않구나.”
“죄송합니다, 전하!”
침실 정리를 맡았던 어린 시녀가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다음부터는 실수가 없도록 해라.”
“네, 전하!”
그들은 실수를 너그럽게 넘어가는 카예나를 보며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황녀는 확실히 달라졌다. 최근의 그녀는 상당히 무르렀다. 오늘 침실 정리를 잊은 것은 일부러 한 행동이었다. 그들은 카예나를 바로 곁에서 모시다 보니 그녀의 변화를 가장 크게 체감했다.
“이만 쉬고 싶으니 너희도 나가 보렴.”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시녀들은 황녀의 침실에서 나와 그들이 사용하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시중 하녀들이 그들의 휴식 시간에 맞춰 차와 다과를 내놓았다. 전보다 훨씬 고급품들이었다.
“리디아.”
베라는 침실 정리를 하지 않은 시녀, 리디아를 매섭게 불렀다.
“왜 제대로 소임을 다하지 않았니? 네가 그런 실수를 할 하급 시녀도 아닌데.”
그녀의 꾸중에 리디아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도 용서하셨는데 왜 제게 그러세요?”
리디아는 도리어 베라를 나무랐다.
“고작 침실 정리일 뿐이잖아요. 오늘 하루 거른 것 가지고…….”
“뭐?”
베라는 기가 막혔다.
카예나의 성격이 워낙 세서 참고 있었을 뿐, 사실 리디아는 원래도 권문세가의 딸이라 오만방자했다. 그런데 이제 카예나가 만만해 진 것 같으니 금방 제 성격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절 고용하신 분은 카예나 전하가 아니라 레제프 황자 전하시라고요.”
이곳에 모인 이 중 그렇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다들 레제프의 부름을 받고 카예나의 시녀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어차피 레제프 전하께서 지켜 주실 텐데요. 저희 가문의 힘이 필요하실 테니까.”
리디아의 말에 주변의 시녀들도 하나씩 동조하기 시작했다.
“베라야말로 우리의 임무를 잊지 마요. 우린 레제프 전하의 사람이라고요.”
“카예나 전하의 영향력이 강해지면 안 된다는 거 몰라요?”
“…….”
베라는 이 어리석은 대화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건 알면서 자신들이 그분의 시녀가 되었다는 의미는 모르는구나.’
여기에 모인 시녀 중 가장 권세가의 딸이 리디아 벤제만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들은 계륵과도 같은 카드다. 없으면 아쉽지만 있어도 크게 보탬은 없는 카드란 말이었다.
베라는 한 치 앞도 모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그들을 나무랄 마음이 사라졌다.
“왜 나서서 난리람.”
그녀들은 베라를 스쳐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
허탈했다. 그래도 한때는 동료라고 믿었던 이들의 바닥을 보게 되니 탈력감이 밀려들었다.
‘이런 곳에서 내 존재를 어찌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까?’
사실 이곳에 모인 시녀 대부분은 레제프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유일한 황자였고, 선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이 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자신이 그의 구원자가 되어 그 싸늘하고 잔혹한 성정을 녹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어림 없는 소리지.’
베라는 주제를 알았다. 그들 중 누구도 레제프의 짝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쓰임새를 인정받고 싶었다. 그렇게 눈에 뜨인다면 작위를 받거나, 가문의 영향력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오늘 전하께서 자리에 나만 남겨 둔 것도 분명 이유가 있겠지.’
베라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 * *
카예나는 모든 시녀를 물리고 소파에 편안히 기대어 있었다.
‘베라의 성격상 업무 태만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겠지.’
그들 사이의 분열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첫 번째 생에서도 그랬으니까. 원래대로라면 베라가 시녀들의 무능과 태만을 고발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키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결국엔 레제프에게 중요하게 쓰이지 않으리란 걸 스스로 잘 알겠지.’
다만 레제프는 확실한 차기 황제였다. 그게 베라가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녀는 베라의 마음에 혼란을 잠재워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녀의 중얼거림에 시중 하녀들이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침실을 정리했다.
시중 하녀는 시녀와 달리 출신이 한미했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자가 대부분이라 상대적으로 레제프의 시야에서 벗어난 존재들이었다. 그런고로 카예나는 방 안에 시중 하녀들만 남겨 둔 상태였다.
“너무 깨끗하게는 하지 말렴. 마지못해 했다는 느낌이 들도록.”
“예, 전하.”
레제프는 시중 하녀의 관리를 시녀들에게 일임했는데, 오늘 이들을 맡은 시녀가 문제였다.
“너희의 영민함이 자신을 살렸구나.”
시중 하녀, 도나와 애니가 빙긋 웃었다.
그들은 오늘 리디아에게서 침실을 정리하지 말라고 전달받자마자 몰래 카예나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카예나는 리디아가 하녀들 사이에서 상당히 미움 받는 존재임을 알았다.
“내 이름을 대고 필요한 약재를 타 가렴.”
그러자 도나가 바닥에 엎드렸다.
“감사합니다, 전하!”
도나의 양친은 모두 병환이 들었다. 하녀가 받는 봉급으로는 약값을 충당할 수 없었다.
도나는 역시 카예나의 편에 서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이런 건 자신들의 직속 상관인 리디아가 챙겨 줘야 할 부분이었다.
하지만 리디아는 카예나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걸 상당히 싫어했다. 자신이 황후가 될지도 모르는 몸인데 그런 하찮은 부탁을 하기엔 자존심이 상한다는 거였다.
‘부디 리디아가 더욱 방만하고 어리석게 행동해 주었으면.’
첫 번째 삶에서도 리디아는 카예나의 성질머리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제멋대로였다. 레제프에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죄다 고해바치는 것도 그녀의 역할이었다.
‘하루빨리 여기서 나가는 게 너에게도 좋을 거란다.’
리디아는 결국 레제프에 의해 처형당한다. 꼬리를 자르려는 의도였겠으나 지금이라면 처형만큼은 피할 수 있으리라.
‘새로운 인력을 얻었으니 활용해야겠지.’
원작에서는 올리비아와 라파엘로의 혼담이 나오며 원작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시점에 맞춰 준비할 일이 있었다. 올리비아가 황녀궁 시녀로 들어올 시기를 조율하는 일이었다.
자신은 레제프에게 올리비아를 시녀로 들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레제프의 요청’에 따라 올리비아가 황궁에 들어오면 곤란하다. 그녀가 키드레이 공작가의 후원을 받기 때문이다.
‘황제의 교지가 아닌 레제프의 요청으로 시녀가 되면 키드레이 공작가와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그럼 라파엘로와 그녀의 결합에 큰 정치적 난관이 생긴다.
카예나는 둘을 이어주려는 거지, 훼방꾼이 될 마음이 없었다.
“애니, 편지지를 가져와.”
“예, 전하.”
카예나는 구구절절한 서론은 하나도 쓰지 않고 아주 짧고 간략하게 편지를 작성했다.
‘올리비아는 레제프의 입김으로는 움직이지 않을거야. 레제프와 상관없이 내 사람이 될 수 있게 만들어야 해.’
그레이스가는 한미하지만 충성심이 높은 가문이었다. 그들이 후원을 받는 키드레이 공작가를 배신할 리 없었다. 지금은 레제프의 부름을 모른 척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레제프가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업신여김 당하는 것을 싫어하니. 한미한 가문이 감히 자신의 요청을 무시하냐며 벌컥 화를 낼지도 몰랐다.
카예나는 붉은 촛농을 떨어뜨리고 아무런 음각이 없는 매끈한 도장으로 그것을 꾹 눌렀다. 정체를 감춘 은밀한 밀서가 완성되었다.
“애니.”
“예, 전하.”
애니는 같은 유니폼을 입어도 훨씬 맵시 있게 입는다. 그럴듯한 드레스를 입히면 귀족처럼 보일 것이다.
“심부름을 하나 해야겠구나.”
카예나는 애니에게 밀봉한 편지를 내밀었다.
“이걸 로랑스 거리의 마르레뜨 살롱으로 가져가렴.”
그동안 자신은 레제프의 이목을 흩트려야 했다. 카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황자궁으로 가겠다.”
* * *
레제프는 부관의 보고를 들으며 편지를 쓰던 손을 멈췄다.
“황제 폐하께서 황녀 전하가 부마를 직접 고르실 수 있도록 권한을 양도하실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부황이?”
레제프는 그 과정에서 라파엘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진 않았는지 물었다.
부관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라파엘로 경과의 혼인은 원치 않는다고 하셨다 합니다.”
“그래?”
카예나가 원하는 상대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내건 것이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부황이 카예나를 핑계로 라파엘로를 압박하는 것은 레제프에게도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이제 그 명분이 사라진다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을 때였다.
“그런데 황녀 전하께서 알현을 마치고 라파엘로 경과 티타임을 가지셨다고 합니다.”
“……둘이 같이?”
“예. 리디아 양이 차를 준비하러 가는 길에 와서 알렸습니다.”
“라파엘로가 순순히 따라갔다고?”
“예. 카예나 전하께서 고민을 해결해 주겠다며 같이 차를 마시자고 제안하셨다 합니다.”
레제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던 카예나를 떠올렸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베라라는 시녀의 말로는 혼담을 언급하며 다른 가문의 여식들을 흠잡았다고 합니다. 다만 올리비아 그레이스 영애는 칭찬했다고 들었습니다.”
‘올리비아 그레이스를 칭찬했다니. ……황녀궁 시녀가 될 사람이니까? 나를 위해?’
레제프는 도무지 카예나를 종잡을 수 없었다.
요즘의 카예나는 자신이 원래 알던 누이인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알았다. 이만 나가 보아라.”
그는 당장 처리할 일이 많았으므로 신경을 꺼 버렸다. 시해 미수 사건을 뒤집으며 몇 가지 뒤처리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고 하인이 들어와 아뢰었다.
“전하, 제논 에반스가 뵙길 청합니다.”
“들어오라고 해.”
제논 에반스가 서재로 들어와 예를 갖췄다. 레제프는 손을 내저었다.
“됐다. 무슨 일이지?”
잿빛 머리칼의 제논은 손에 서찰이 놓인 은쟁반을 들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저번 하인리히 측과의 회담 이후로 몇몇 귀족의 행보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레제프는 하인리히라는 말에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그 미치광이는 밟아도 밟아도 자꾸만 기어올라 제 속을 긁었다.
“그 벌레 같은 놈이 또 무슨 개수작을 부렸기에?”
이번 카예나의 사건만 해도 그렇다. 황가의 피도 흐르지 않는 천둥벌거숭이가 자신이 황위 계승권자라며 떠들어 대는 걸 보라. 당장 불을 붙인 몽둥이로 그들을 때려눕히고 싶었다.
레제프는 펜을 내려놓고 봉투를 뜯어 편지 내용을 확인했다.
“이 주제도 모르는 잡종 새끼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불같이 화냈다.
제논은 이 상황을 예상했기에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이 머저리 같은 것들이 하인리히에게 넘어갔다고!”
그가 공들였던 지주 몇몇이 하인리히 대공자의 손을 들게 되었다는 서신이었다.
그들은 하인리히 대공자가 황제가 직접 인정한 계승권자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레제프의 역린이기도 했다.
레제프는 황후 소생이 아니라 정부 소생이다. 그를 낳은 생모가 황후로 책봉되지 않는 이상 그는 계속 사생아인 상태로 남는다. 혹은 황제가 그를 선황후 아래에 입적시켜주기만 한다면 정통성을 갖출 수 있다. 사원의 인정을 받은 적법한 후계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황제는 모호하게 행동했다.
대공자 측 사람들은 입양아라 황가의 피가 흐르지 않는 하인리히 대공자나 레제프나 다를 바 없다며 떠들어댔다.
“내가 저들에게 해 준 게 얼마인데 그깟 광산 몇 개 가지고 나를 배신해? 진짜 황족은 그 더러운 가짜 하인리히가 아니라 나라고!”
콰장창!
레제프가 테이블을 엎었다.
“내가 황제가 되면 다 숙청이다! 분수도 모르는 것들!”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레제프가 제논에게 물었다.
“그레이스 자작가는 회신이 없느냐?”
“아직 답변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제논에게 화병을 집어 던졌다. 다행히도 그것은 빗나가 벽에 맞고 산산조각이 났다.
“어째서 아직도 회신을 받질 못했느냐! 네놈들이 그러니 별 같잖은 것들까지 나를 무시하는 것이지!”
그레이스 자작가가 키드레이 공작가 때문에 쉽게 회신을 보내지 못할 것이라는 건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눈이 뒤집힌 레제프에 이런 말을 했다간 목이 날아갈 것이 분명했다.
제논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전하.”
“대체 내 주변엔 하나같이 쓸 만한 것들이 없어! 그러니 하인리히가 그리 설쳐 대는 게지!”
제논이 속으로 망나니로 유명한 하인리히 대공자와 레제프 중 누가 더 개망나니인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저, 전하.”
어딘가 두려운 표정의 시종이 방으로 들어와 레제프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레제프가 살기 어린 눈으로 시종을 쳐다보았을 때였다.
달칵.
“나야, 레제프.”
카예나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제논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는 주먹을 꽉 쥔 채로 애써 분노를 제어하는 중인 레제프를 힐끗 보고는 카예나에게 다가갔다.
“전하, 죄송하지만 나중에 다시 방문하시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그러자 카예나가 서늘한 얼굴로 제논을 바라보았다.
“레제프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이러는가?”
서재를 가득 메우고 있던 불유쾌한 긴장감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흐트러졌다. 마치 이 살벌한 난장판이 어린아이 투정의 흔적이 된 것 같았다.
‘황녀가 언제부터 이렇게 강단 있었지……?’
제논은 그녀의 기백에 뒤로 물러났다.
카예나는 빙긋 웃고는 자연스럽게 그를 지나쳤다.
그녀는 엉망진창이 된 방을 슥 둘러보더니 천천히 레제프를 향해 다가갔다. 바닥엔 깨진 도자기나 유리 같은 게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얇은 가죽 슬리퍼를 신은 채 뭔가 잘못 밟았다간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누님.”
레제프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딱딱하게 말했다.
그러나 카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 바닥도 보지 않고 걸으니 당장 다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레제프는 짜증스럽게 다시 경고했다.
“다가오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하지만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 넌 혼자잖니.”
“뭐……?”
그는 기가 막힌 말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때 카예나가 바닥에 널브러진 장식을 잘못 밟고 중심을 잃었다.
“앗!”
그대로 넘어지면 필시 크게 다칠 터였다.
레제프는 욕설을 삼키며 얼른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러니까 다가오지 말라고……!”
그가 분노를 다 터뜨리기도 전에 카예나가 레제프의 뺨을 살짝 쓸었다.
따끔한 느낌에 레제프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다쳤잖니, 레제프.”
물건을 부수다가 튄 조각에 스쳐 가느다란 상흔이 생겼다.
“잘생긴 얼굴에 이게 뭐니?”
카예나는 소맷자락으로 뺨에 맺힌 피를 닦아 주었다.
레제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도 용암처럼 들끓었던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다. 누이를 보고 화가 풀린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카예나를 안아 들고 방에서 멀쩡한 곳으로 데려갔다. 침대 근처에 있는 길쭉한 소파 자리가 이 난리 통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곳이었다.
“힘이 장사구나!”
카예나는 레제프의 힘에 놀라 탄성을 뱉었다.
카예나가 아무리 가볍다 해도 이렇게 종잇장처럼 들 무게는 아닌데 레제프는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레제프는 이런 카예나의 태도에 어쩐지 기운이 쭉 빠졌다. 갑자기 방금까지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낸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응, 괜찮아.”
그는 카예나의 가죽 슬리퍼를 벗기고 발을 살폈다.
혹시라도 유리 조각을 밟으면 큰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성년식에서 그랜드 홀 중앙에서 춤춰야 했으니까.
“난 됐으니 네 상처부터 보렴.”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아서 그래.”
그렇게 말한 카예나는 하인들에게 어서 방을 치우라고 말했다.
“뺨의 상처를 치료해야겠으니 준비해 오너라.”
하인들은 이틀은 족히 두려움에 벌벌 떨 것을 예상했다가 지금의 상황에 얼떨떨해하는 중이었다. 특히 분위기를 이렇게 누그러뜨린 사람이 카예나라는 사실이 가장 믿기지 않았다.
“……금방 준비해 오겠습니다.”
혹시 레제프가 또 돌변할까 봐 겁이 난 그들은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그럼 저도 나가 보겠습니다.”
제논도 카예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보다가 자리를 비켰다.
카예나는 레제프가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받았을 것을 예상하고 일부러 찾아왔다. 그녀는 레제프가 화를 한참 쏟아 내길 기다렸다가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리라고 명했다. 그건 현명한 판단이었다. 분노를 쏟아 내던 레제프의 정신이 조금 돌아온 때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네가 위험해질 행동은 하지 마. 장차 제국을 물려받을 귀한 몸인데.”
레제프는 그 말에 다시금 서찰의 내용이 생각나 혀를 찼다.
그녀는 레제프가 무엇을 두고 이렇게 화냈는지 밖에서 들었다. 그리고 그건 카예나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번 성년식을 두고 몸이 달은 자들이 많을 거란다.”
카예나는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차분하고 온화한 향기가 레제프의 코끝에 닿았다. 그러고 보니 황녀궁에 피우는 향이 바뀌었는데. 이게 그 향인가?
부드러운 손길 때문인지 그녀에게서 나는 향 때문인지 기분이 차분해졌다. 진짜 보호자의 다독임처럼 다정한 손길이었다.
이상하게도 누이가 한참 어른처럼 느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레제프는 아직 보호자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였다.
카예나는 온정에 굶주린 레제프가 얌전해진 것을 보고 말문을 열었다.
“부황께서 내게 결혼할 상대를 고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단다.”
카예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귀족들에게도 곧 소식이 파다하게 퍼지겠지. 그럼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녀는 눈을 작위적으로 깜빡이며 연기하는 듯한 톤으로 말했다.
“아! 황녀만 구슬리면 내가 부마가 될 수도 있겠구나!”
레제프는 낙관적인 생각이라고 치부하며 피식 웃었다.
“다들 라파엘로가 그 상대라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라파엘로가 약혼이라도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약혼이요?”
라파엘로가 갑자기 약혼이라니? 혼담이 오가는 상대가 있었나.
그때 레제프는 문득 부관이 말했던 보고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카예나가 혼담을 꺼내며 다른 영애들을 헐뜯었다고 했다. 그것과 무슨 연관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너는 곧 황성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릴 귀족들을 모른척 환대해 주면 된다. 그때까지 네 누이는 아플 예정이거든.”
곧 하인이 의약품을 들고 들어왔다.
카예나는 하인을 물리고 직접 레제프의 상처를 돌보았다.
‘그럼 라파엘로를 포기했다는 게 사실인가.’
“…부황이라고 해서 라파엘로 키드레이와 누님을 결혼시키진 못합니다.”
그는 카예나가 황제의 힘을 빌려 그와 결혼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카예나는 빙긋 웃었다.
“내가 키드레이 경을 원했던 건 사실이지. 그러나 지금까지 그랬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럴까?”
레제프는 한 방 먹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녀가 라파엘로를 두고 이렇게 냉정하게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글쎄. 이제 그게 사랑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는구나.”
그녀는 레제프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 주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감정이 어디 있겠니?”
‘그것이 꼭 사랑이 아닐지라도.’
카예나는 레제프의 혼란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