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20
악녀는 마리오네트 18장. 관망(2)(20/33)
18장. 관망(2)
카예나는 황궁으로 돌아가려다가 무심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쩌면 라파엘로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뒤를 따르던 애니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애니는 세작을 관두었고 라파엘로가 이곳에 있을 리도 없었다. 카예나는 스스로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 지었다. 단지 지금 그가 있었으면 해서, 그래서 찾은 것이었다.
‘바보같이.’
카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최근 지나치게 조용한 라파엘로의 행적을 물었다.
“혹시 키드레이 공작가에 대한 소식 들은 것 없니?”
애니가 바로 대답했다.
“일이 생기면 기별하겠다 하셨는데 아직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하인리히 쪽도 사원의 눈치를 보느라 조용한 것 같고.’
황녀의 성년식을 앞두고 모든 세력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친 하인리히는 눈치를 보며 가만히 있을 자가 아니었다.
‘라파엘로라면 대공가에 세작을 심어 두었을 것 같은데.’
요즘 레제프의 심기가 워낙 불편한 상태라 섣불리 라파엘로를 궁으로 불러들이거나 그를 찾아가기가 어려웠다. 레제프가 카예나와 결혼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길 것 같은 모든 남자에게 날을 세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우습지도 않았다. 자신은 누군가가 훔쳐 갈까 봐 금고에 고이 모셔 두고 홀로 꺼내 보는 보석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레제프는 카예나의 자유 의지를 완전히 간과했다.
그건 습관이었다. 사람을 소유물로 여기는, 악랄한 습관. 레제프는 제게 필요 없어지거나 짜증 나게 굴면 없애 버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카예나가 이대로 계속 거슬리게 굴면 어떻게 될까?
‘결혼은 싫다고 했으니 날 죽이려나?’
지금이야 자신이 소중한 인형이라 독을 먹고 쓰러지는 것에 벌벌 떨지만, 그 변덕스러운 측은지심이 과연 언제까지 발휘될까?
‘엘리반 남작가는 확실히 지켜 내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그들을 유모처럼 허망하게 보낼 수는 없다. 카예나는 자신을 더욱 채찍질했다. 엘리반은 가장 낮은 작위인 남작 가문이었지만 제국에서도 손꼽을 만큼 그 명맥을 오래 유지해 온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또한 대대로 황제의 스승이 되었던 현자 가문이기도 하여, 지식인들을 아우르는 힘이 있었다.
‘엘리반 남작가가 나를 따르기로 했으니 힘 있는 인사들도 나를 지지하겠지.’
카예나는 그들에게 가장 나은 선택이 무엇일지 보여 줄 예정이었다. 레제프와 하인리히가 엉망진창의 망나니들이라 참 다행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그들에 비해 딱히 청렴한 사람은 아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고. 다만 그녀는 정의의 편에 선 악인이 되기로 했다. 기꺼이 암흑가를 장악하고 누군가를 이용해서 판도를 휘어잡을 작정이었다.
그녀는 한적한 길을 따라 걷다가 멀리서 검은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에반스 후작가의 사람들이었다.
‘장례를 지나치게 서두르네.’
그녀는 조금 고민했다.
카예나가 공동묘지를 방문했음에도 에반스 가문을 못 본 척 인사도 하지 않고 간다면 이 사실을 꼬투리를 잡아 뒷말을 만들어 낼 게 뻔했다. 줄리아가 자신의 시녀이며 에반스 후작가가 여전히 유력 귀족인 이상 인사는 해야 했다. 결국 그녀는 에반스 후작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이미 제논의 관에 흙을 덮고 있었다. 애니가 그들에게 다가가서 로드릭 후작과 줄리아의 행방을 물어볼 동안 카예나는 뒤편에 서서 기다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카예나가 있는 곳을 한 번씩 힐끗거렸다. 망사로 얼굴을 가린 탓인지 시선이 오래 달라붙지는 않았다. 잠시 뒤에 애니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카예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두 분은 지금 휴게실에 계시다고 합니다. 그곳으로 가시지요.”
카예나는 에반스 후작가가 자신들의 혈족만 이용할 수 있도록 대관한 건물로 향했다. 마침 건물 외부로 로드릭 후작과 줄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카예나는 걸음을 멈췄다. 줄리아가 자신을 붙드는 로드릭 후작의 손을 뿌리쳤다.
“저는 가기 싫어요!”
거친 움직임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줄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뺨에 얼룩덜룩한 피멍이 들어 있었다. 저건 남자의 손찌검 자국이었다. 그것도 체중을 실은 손찌검.
카예나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아직 뺨도 멀쩡하게 돌아오지 않았는데 어찌 황궁에 들어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거야 제논의 짓이니 다들 이해해 줄 거란다.”
저들의 목소리가 작아지자 거리가 멀어서 대화 내용이 들리지 않았다. 카예나는 애니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고 말했다. 저들에게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공간 이동을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마력을 일으켜 자신이 있는 공간을 편집해 건물 뒤편으로 붙여 넣었다.
팟! 순식간에 시야가 뒤바뀌어 있었다. 로드릭 후작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대마초 재배에 자결까지 한 녀석이 제 여동생의 뺨을 때리는 무뢰한인 것은 당연한 일이잖니?”
줄리아는 오라비가 자상하게 말하는 끔찍한 소리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로드릭 후작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황궁에 도티 부인이 하녀장으로 들어가 우리 가문의 영향력을 축소하려 하고 있다. 네가 이렇게 밖에서 있을 때가 아니야.”
그는 줄리아에게 당장 황궁으로 들어가서 도티 부인과 맞서 싸우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줄리아는 비참했다. 역시 자신은 도구에 지나지 않았나. 제논이 죽은 것도 무섭고 끔찍한데 이 상황에서 로드릭은 도티에게 밀리면 안 된다며 줄리아를 설득하고 있었다.
“제논 오라버니가 살해당했다는 거, 저 알아요.”
그녀의 말에 로드릭 후작의 눈빛이 순간 돌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니?”
그는 줄리아가 지나친 생각을 하고 있다며 나무라듯 말했다.
“줄리아, 그건 어디까지나 무뢰배에게 잘못 걸려 당한 사고일 뿐이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면 곤란해.”
줄리아는 이것이 꼬리 자르기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오라비의 뻔한 거짓말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오라버니, 저 그냥 황궁에 안 돌아가면 안 돼요?”
로드릭 후작은 동생의 간절한 부탁에 피식 웃었다. 그의 미소에 섬뜩한 냉기가 어렸다.
“그럼 집에서도 나갈래?”
“……네?”
“네가 싫다면 굳이 황궁에 돌아가지 않아도 돼.”
그의 말투는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아, 휴그렌 백작이 사별한 지도 꽤 되었지. 그의 아내가 된다면 가문에 힘이 될 거다.”
줄리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휴그렌 백작은 곧 일흔이 되어가는 노인이다. 게다가 예전부터 변태 성욕자라는 지저분한 소문도 있었다. 그녀는 제 오라비가 설마 그런 노인에게 자신을 팔아넘기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줄리아는 충격 받은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로드릭 후작은, 자신의 오라버니는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도구로 여긴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했어도 이렇게 가혹하지는 않으리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줄리아는 제 가치가 이 정도라는 사실을 이 순간 절절하게 깨달았다.
“줄리아, 너는 그렇게 노래 부르던 멋진 황궁으로 돌아가서 내부를 정리해 놓으면 된단다. 어차피 그 안에 있는 자들이 알아서 다 처리해 줄 거야.”
로드릭 후작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는 파리해진 안색으로 뒷걸음질 치는 줄리아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 순간 카예나는 마력을 일으켰다.
“윽!”
로드릭 후작은 갑자기 뭔가가 발을 잡아채는 느낌과 동시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상황과 아릿한 통증에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어머나.”
그때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로드릭 후작의 귓가에 들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검은 망사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보였다. 그가 미간을 찡그렸을 때였다.
“제가 좋지 않은 때에 실례한 모양이네요, 후작님. 아, 저는 카예나 힐이에요.”
“……황녀 전하?”
그는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황녀 앞에서 엎어져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러나 카예나는 그가 멀쩡하게 일어나지 못하도록 다시금 마법으로 발을 헛디뎌 넘어지게 했다.
“크윽!”
카예나는 얼굴을 가린 망사를 걷으며 몹시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괜찮으신가요?”
“예, 괜찮……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이 창피했고 화가 났다. 대체 갑자기 왜 넘어진 거야!
카예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닥을 훑었다.
“세상에, 여기 길이 안 좋은가? 하체가 부실한 게 아니라면 넘어질 만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자 로드릭 후작은 파르르 떨었다. 하체 부실이라니?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저, 전하. 그런 게 아니라…….”
카예나는 그의 말을 들을 생각도 않고 빙긋 웃으며 줄리아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보게 될 줄 몰랐네, 줄리아.”
줄리아는 난데없는 상황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깜짝 놀라서 눈물도 쏙 들어가 버렸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줄리아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궁중식 인사를 올리자 카예나가 붙잡아 일으켰다.
“돌아가자.”
줄리아가 흠칫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카예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와 같이 돌아가자.”
줄리아는 멍한 눈으로 카예나를 바라보았다. 카예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눈치를 살피는 중인 로드릭 후작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줄리아는 제 시녀이니 데려가도 괜찮겠죠? 요즘 황녀궁이 좀 바빠서.”
로드릭 후작은 줄리아가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랐으므로 상당히 기꺼워했다. 이렇게 자신을 도와주는 카예나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물론이지요. 이렇게 시녀를 직접 챙겨 주시다니 마음이 흐뭇합니다. 모쪼록 줄리아를 잘 이끌어 주십시오, 전하.”
카예나는 그 말에 어떤 대꾸도 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미소만 지었다.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그녀는 줄리아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
줄리아는 그 손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애니는 카예나와 줄리아를 발견하더니 조용히 마차로 안내했다. 로드릭 후작과 꽤 멀리 떨어졌을 때, 카예나가 말했다.
“너는 황궁에 돌아가도 성년식 준비를 도울 필요는 없다. 그곳에서 좀 쉬렴.”
“……네?”
“뺨이 다 나을 때까지 휴가라는 뜻이야.”
줄리아는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분명히 로드릭 후작은 도티 부인을 견제하라고 그녀를 압박할 것이다.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아 짓눌린 것처럼 답답했다. 줄리아가 흐느끼며 말했다.
“앞으로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명확한 대답을 바란 말은 아니었다. 그냥 지금 뭐라도 말을 내뱉지 않으면 마음이 무거워서 죽을 것 같아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다.
제논은 끔찍한 몰골로 살해당했다. 로드릭 후작은 별다른 조사도 없이 그의 죽음을 자결로 처리해 버렸다. 줄리아는 그 비정함이 두려웠다. 자신도 필요 없어지면 언제든 그런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두려웠다.
‘만약 내가 쓸 만한 혼처에 시집가지 못하면?’
자신을 휴그렌 백작에게 보내 버리지 않을까?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모르겠어요…….”
줄리아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몰랐다. 좋은 드레스, 아름다운 장신구, 유행하는 구두와 모자를 잘 고르는 법은 지금이라도 어떻게 하는지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 나를 지키는 방법? 그런 것들은 모르겠다. 아름다움이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갑자기 현실에 내놓이게 되자 두렵기만 했다. 자신이 알던 것이 모두 누군가가 준, 허상에 가깝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그 무엇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렴. 너는 생각할 줄 모르는 게 아니야. 그러지 못하도록 교육받았을 뿐이지.”
정말 그럴까? 줄리아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마차 앞에 도착했다. 카예나와 줄리아가 마차 안으로 오르자 문이 닫혔다. 말발굽 소리가 나기 시작하며 마차가 출발했다. 줄리아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저는 에반스 후작이 되고 싶어요.”
자신이 더 이상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위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후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허상이 아닐까? 그러나 줄리아는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깨달았다.
‘왜 내가 후작이 되지 못하는데?’
제 오라비들은 사람을 도구 취급하고 마약이나 유통하며 혈족에게 냉혹했다. 그런 인간들보다 자신이 못할 게 뭐란 말인가?
줄리아의 눈빛이 돌변했다. 눈물은 어느새 멈춰 더는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히 결심이 선 얼굴로 카예나에게 말했다.
“제가 에반스 후작이 되겠어요.”
줄리아는 절박했다. 그녀는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카예나가 유일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를 가르쳐 주세요, 전하. 무엇이든 따르겠어요.”
에반스 후작가는 온통 썩어 있었지만, 줄리아는 아직 그 어둠에 물들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줄리아는 에반스 가문의 폭주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카예나는 그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렴.”
해 줄 수 있는 충고 중 무엇보다 중요한 말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을 것. 자신을 길러 낸 세상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일은 보통의 다짐으로는 이루지 못하니까.
“너는 앞으로 로드릭 후작에게 인형이나 도구로서 가치를 다해 기쁘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논 상대가 되어야 한다.”
“아…….”
누군가가 망치로 머리를 거세게 친 것 같았다. 줄리아는 제 가치가 어느 수준인지 명확하게 깨달았다.
“성실하게 끊임없이 지혜를 발휘해 생각하렴. 상대가 미처 짚어 내지 못한 부분을 네가 짚어 냈을 때가 비로소 시작이니까.”
등줄기로 한 줄기 소름이 쭉 끼쳐 올랐다. 조금이나마 황녀가 바라보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엿본 느낌이었다. 갑자기 나약한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난 못 해. 나는 안 될 거야.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잖아…….
콱! 줄리아는 혀 안쪽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정신 차리자.’
스스로 생각하고 정답을 찾아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두렵지만, 극복해야 했다.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
* * *
이델은 아카데미 수업이 끝나는 순간까지 하멜 백작가에 댈 핑계 생각에 골몰했다. 오늘부터 라파엘로에게 교육받기로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로 했기에 변명이 필요했다.
그때 같은 수업을 듣는 소년이 이델에게 다가왔다. 말을 한 번도 섞어 본 적 없는 친구였다.
“안녕, 네가 이델이지?”
“……그런데?”
이델이 눈을 뾰족하게 떴다. 다른 애들처럼 또 무슨 시비를 걸려는 녀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쾌활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세인 마이어스라고 해. 반가워.”
이델은 그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맞잡았다. 그러자 세인이 그에게 몸을 가까이 붙이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
“키드레이 공작님이 너를 도우라고 하셨어. 오늘부터 그분과 만나기로 했잖아.”
“……!”
세인은 다시 친절하게 웃으며 몸을 떨어뜨렸다.
“나랑 같이 재미있는 게임을 하러 가자. 어때?”
“……좋아.”
이델은 세인과 같이 내려갔다. 하멜 백작가의 마차가 보였다. 시종이 마차 문을 열고 그가 올라타기를 기다렸다.
“오늘 얘랑 놀러 갈 거야.”
시종의 시선이 세인에게 향했다.
“마이어스 가문에서 내 친구 이델을 초대해 같이 놀려고 해. 괜찮겠지?”
“그럼 이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세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 가문 마차를 타고 갈 생각이야. 이델이 집에 갈 때도 내가 데려다줄 거고.”
곧 마이어스가의 마차가 도착했다.
“타시지요, 도련님.”
이델이 얼른 말했다.
“놀다가 갈 테니까 먼저 가!”
“……알겠습니다.”
이 나이대의 어린 귀족들이 이런 돌발 행동을 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므로 시종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델은 세인과 같이 마차에 올라탔다. 아카데미 근처가 온통 번화가라서 그런지 마차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수도에 사람이 훨씬 많아진 것 같아. 그렇지?”
세인이 창밖을 보다가 그렇게 말했다. 이델은 이 현상이 카예나의 성년식 때문이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갑자기 누님이 보고 싶었다.
“곧 가문의 문양이 없는 다른 마차로 갈아탈 거야.”
이렇게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이 정도까지 이목을 속일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이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곧 아무런 특징이 없는 마차로 갈아탔다. 이델은 제 옆에 앉은 세인을 힐끗 보다가 물었다.
“너는 공작가의 가신인 거야?”
“키드레이 가문에서 아카데미 학생을 후원하는 거 알지? 난 그분의 후원을 받고 있어.”
마이어스가는 키드레이 공작가의 은밀한 조력 가문이었다. 이내 마차는 마이어스 가문도, 키드레이 별저도 아닌 완전히 다른 장소에 도착했다.
‘……잘못 온 거 아닌가?’
저택 자체는 크지는 않으나 한적한 곳에 있었고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모양새였다. 그가 어리둥절할 때 세인이 마중 나온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바스턴 경!”
“안녕하십니까, 도련님들.”
바스턴이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왔다. 그가 이델에게 말했다.
“저번에 소개를 못 드렸지요? 바스턴 데보라입니다. 공작 각하의 보좌관 겸 호위를 맡고 있죠.”
“아, 안녕하세요, 데보라 경.”
바스턴은 이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바스턴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아, 주인님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이델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바스턴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 저택은 공작님께서 이델 도련님을 교육하기 위해 사용하려고 마련하신 곳입니다. 어디든 편하게 이용하십시오.”
“아…….”
그럼 이 저택을 오직 이델을 위해 마련했다는 뜻이었다. 세인이 곁에서 진심으로 놀라며 부러움을 표시했다.
“좋겠다, 이델! 게다가 공작님의 지도라니, 진짜 부러워.”
“……그런가?”
저택의 건물은 네모 모양이었다. 안쪽의 공간으로 들어가니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연무장으로 쓰는 모양인지 관련 시설물이 가득했다. 모두 최고급품이었다. 바스턴이 연무장에서 다른 기사와 대련 중이던 라파엘로를 불렀다.
“각하! 도련님들 오셨습니다.”
라파엘로는 즉시 대련을 멈추고 검을 내려놓았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그들에게 향했다. 그 시선에는 어딘가 오싹한 집중력이 깃들어 있었다. 이델은 묘한 긴장감에 무심결에 침을 꼴깍 삼켰다.
이내 라파엘로를 두르고 있던 팽팽한 기운이 누그러졌다. 평소보다도 더 나른해 보였으나 이델은 그것이 상대를 겁먹지 않게 하려는 위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게 전쟁을 치러 본 사람의 기운이라는 거구나.’
이델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몸 안에서 작은 호승심이 피어올랐다. 그때 세인이 발그레한 얼굴로 라파엘로에게 다가가 예를 갖췄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세인 마이어스가 인사드립니다.”
라파엘로의 시선이 세인에게 닿았다. 그는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인에게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래.”
세인은 공작이 제 인사에 반응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좋아했다. 이델은 그런 세인이 이상했다. 동경으로 반짝거리는 눈빛과 상대의 관심을 갈구하는 표정이라니.
‘……나도 누님께 저랬나?’
이델은 볼을 긁적이다가 라파엘로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어색하게 라파엘로의 앞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왔군.”
라파엘로는 무심하게 대꾸하고는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차가운 물을 머리에 끼얹었다. 물줄기가 날카로운 턱선을 타고 땀이 배어난 목선, 살짝 벌어진 검은 무복 사이로 흘러내렸다. 햇살이 그의 피부에 맺힌 물방울을 보석처럼 비추었다.
라파엘로는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털었다. 이제야 평정심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 실전처럼 한 대련 때문에 살기가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이런 상태로 아이들을 대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 광경이 다른 이들에게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비쳤다.
“어머…….”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라파엘로의 젖은 모습에 나직한 탄성을 토했다. 바로 앞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스턴은 눈을 홉떴다.
아니, 이 주인님이 대체 또 무슨 짓이람?
‘이건 아이들의 정서 교육상 무척 좋지 않은 광경이야!’
바스턴은 자체적인 심의를 거친 후 미성년자에게 몹시 해로운 광경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얼른 두 소년을 돌려세웠다.
“자자, 이델 도련님은 훈련복으로 갈아입으시고 세인 도련님도 이만 휴게실로 가시지요.”
라파엘로는 그 모습을 힐끔 보더니 마른 천으로 머리카락과 얼굴을 닦았다. 곧 연무장에 제레미가 나타났다. 그는 주변의 사람을 물리고 라파엘로에게 보고를 올렸다.
“대공자 쪽에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에밀 하브론이라는 궁정인이 하인리히의 세작입니다. 그자를 레르반스 도티에게 붙였다고 합니다.”
“목적은?”
“상단을 몇 개 연결해 준 것 같은데 좀 이상합니다. 상단의 흔적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라파엘로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흐트러진 무복을 정갈하게 정리하며 생각도 같이 정리했다.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단과 그 상단을 하녀장에게 연결해 준 하인리히의 세작.
“상단의 종류는?”
“식자재를 전문으로 하는 곳들이랍니다.”
도티 부인은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권위 의식이 강하고 힘을 보여 주기를 좋아했으며 지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입궁한 직후에 열리는 황녀의 성년식에서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며 건재함을 알리려는 생각일 것이다. 에반스 가문이 주춤할 때 그들을 누르고 황자의 최측근 자리를 차지하고 싶을 테고.
“하인리히 대공자가 도티 부인을 이용해서 황궁 내부를 어지럽게 할 생각인 모양이군.”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내려는 게 아닐까? 그런데 왜 그런 일이 필요하지?
제레미가 말했다.
“사냥 대회에서 쓸 투창과 총을 대량으로 구했다고 했습니다. 이미 대공가로 실물도 들어갔다고 합니다.”
“투창과 총이라…….”
“투창을 잘못 사용하면 말들이 놀라서 아비규환이 될 텐데, 그걸 예상하지 못하고 들인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투창은 당연히 화살보다 크고 두껍고 무겁다. 그것이 예이스터의 괴력과 만나게 되면 사냥터의 분위기가 초토화될 것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냥 대회에서 뭔가 획책하는 게 있는 건 분명한데.’
사냥 대회는 하루 만에 끝나는 간단한 게임이 아니었다. 우선 사냥터가 정해지면 전문 사냥꾼들이 그 근방에 사나운 맹수는 없는지 발자국 등을 추적하며 생태를 확인했다. 사냥할 초식 동물의 수가 너무 적지는 않은지, 멧돼지 같은 위험한 동물의 개체 수는 어떤지 등을 파악하고 나면 사냥 포인트를 몇 군데 설정해 놓는다. 그다음에는 사냥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캠프를 쳤다. 무기고, 식량 창고, 귀부인들도 충분히 휴식할 수 있는 임시 거처 등이 마련되면 귀족들이 그 캠프로 이동하게 된다.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귀족들이 준비할 것은 많지 않다. 말, 총, 탄환, 검, 자신의 사냥을 곁에서 도울 기사, 안락한 나들이를 위한 많은 사용인. 사냥 대회는 단순히 가장 훌륭한 사냥 실력을 자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본인이 타는 말의 훌륭한 혈통과 아름다운 외형, 저를 응원하는 연인의 가문과 미모. 거기에 그녀가 입은 드레스와 걸친 장신구의 값 등을 자랑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라파엘로는 참 멍청한 대회라고 생각했다. 원래는 봄철이라 새로운 작물을 심고 기르는 인근 농경지를 습격할 짐승의 개체 수를 조절하는 것이 취지였다. 그러나 작금의 사냥 대회는 귀족들의 재산과 힘자랑에 불과했다.
라파엘로는 사냥 대회에 적극적으로 어울려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그 사냥 대회에서 라파엘로가 토끼 한 마리만 잡아도 누구도 그의 사냥 실력을 의심하지 못할 테니까.
그는 전쟁을 치른 전사였다. 수도의 깍쟁이 같은 신사들은 진짜 전사인 라파엘로 앞에서 장난으로라도 장갑 한 번 던져 보지 못할 것이다.
“황자 측에 사고를 일으킬 생각일 수도 있어. 사냥터 자체를 쑥대밭으로 만들 가능성을 배제하기도 어렵겠군.”
“에반스 가문에서 미리 조치하지 않겠습니까? 그들도 하인리히 측의 이상 행동을 보고받았을 텐데요.”
“글쎄.”
‘성년식에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도티 부인이라면 에반스 가문에서는 조금 위험하더라도 일을 망치는 것을 원하겠지.’
도티 후작가에서는 예이스터의 이상 징후를 예측하고 그것을 막을 만한 능력이 없다. 레제프의 자체적인 위기관리 능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다만 그것이 꼭 레제프의 위기로만 끝날까가 문제였다.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싫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 황녀의 생일을 맞이해 곧 축제가 벌어질 분위기인지, 당장 모진 풍파가 불어닥칠 폭풍 전야인지 알 수 없었다.
‘잘하면 예이스터를 쓸어 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수도에 팔라딘이 주둔하고 있으니 그들의 활동 영역을 좀 넓히면 좋을 것 같은데.”
문제는 사원의 청렴함이었다. 그들 중 에반스 가문이나 하인리히 대공가의 돈을 받지 않은 자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에반스 후작은 도티 부인의 실패를, 하인리히 대공자는 레제프의 파멸을 원하는 상황. 얼결에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으니 사원을 움직이기가 상당히 어려워졌다.
“나를 도와줄 만큼 힘 있는 사원의 고위 사제이면서도 어느 세력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제레미는 주인님이 참 까다로운 주문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열심히 골몰해 보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고위 사제들이 추풍낙엽처럼 삭제되어 갔다.
‘그런 사람이 실존하기는 할까? ……어?’
제레미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데니안 사제!”
“데니안?”
“예, 저번에 갔던 그 사원이요. 아기를 갖게 해 주는!”
“…….”
라파엘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한적한 곳에 지어진 오래된 사원에 견습 사제로 보이는 이도 고작 하나였다. 그런데 사원 내부가 무척 깨끗했고 다이닝 룸의 컨디션도 최상에 가까웠다. 그렇게 관리할 수 있을 정도로 하인을 사용한다는 말이었다. 귀부인 사이에 혼례나 후계자에 관련해서 영험하기로 소문난 곳이면 어마어마한 기부금이 끊이지 않고 들어온다는 뜻. 기부금에 따라 사원의 권위가 정해지니 데니안 사원이라면 그 힘이 절대 적지 않으리라.
“그 사원에 방문 기별을 넣어 두어라. 입궁 전에 알아볼 것이니.”
“예, 주인님.”
그때 이델의 옷을 다 갈아입힌 바스턴이 다가왔다. 이델은 라파엘로가 ‘입궁’이라고 말한 것을 얼핏 들었다.
“……황궁에 가시는 거예요?”
라파엘로가 이델을 내려다보았다.
“성년회 전에 입궁하겠지.”
이델은 아직 연회에 갈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보통 16세에서 17세부터 사교계에 데뷔하니까. 그는 누이의 생일인데도 축하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시무룩해졌다.
바스턴은 그런 이델의 기색은 눈치채지 못하고 라파엘로를 진중하게 바라보았다.
“선물은 준비하셨지요?”
“탄생석으로 된 주얼리 세트를 준비하기는 했다.”
그때 바스턴이 끼어들었다.
“성년식은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모르십니까? 성년식 선물!”
성년식 선물?
라파엘로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스턴을 바라보았다. 이델도 궁금했는지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성년식에 무조건 줘야 하는 선물이 세 가지 있지요.”
“세 가지?”
바스턴은 가슴을 쭉 폈다. 연애 초보자인 라파엘로가 모르는 것을 알려 주게 되어 상당히 거들먹거리는 얼굴이었다.
“바로 장미꽃, 향수, 그리고…… 키스입니-!”
따악!
제레미는 얼른 바스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악! 왜 때리세요!”
“지금 각하 앞에서 그게 무슨 돼먹지 못한 저질스러운 말이냐!”
“아니, 이게 무슨 저질스러운 말입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다 그래요!”
이델은 변태를 보는 불쾌한 눈으로 바스턴을 경멸스럽게 노려보았다. 제레미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무시하려 했다.
“진짜라니까요! 제레미 보좌관님이 서른 중반에 접어드셔서 모르시겠지만, 저는 아직 20대라고요!”
“이놈아, 이제 철 좀 들어라! 그리고 서른세 살이 무슨 중반이야? 초반이지!”
바스턴은 억울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진짜인데……. 다들 젊은이들의 유행을 모르는……”
“그만 구시렁거려. 부끄러운 줄 모르는 놈!”
제레미의 꾸지람에 바스턴은 쳇, 하고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라파엘로가 입가를 쓸었다.
“흐음.”
장미꽃, 향수, 키스라고?
‘장미꽃이랑 향수만 더 준비하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