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21
악녀는 마리오네트 19장. 성년식(21/33)
19장. 성년식
올리비아는 성년식을 준비하기 위한 리스트를 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가 궁정인을 돌아보았다.
“하녀장님이 또 상의 없이 바꾸셨다고?”
“예, 황녀궁 지시와 다르다고 말씀은 드려 보았지만…….”
궁정인은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꼈다. 올리비아는 짤막하게 한숨을 지었다.
도티 부인은 입궁한 날부터 난데없이 전면적으로 나서며 연회와 사냥 대회 준비에 사사건건 간섭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간섭으로 그쳤다면 다행이었다. 도티 부인은 아예 사전에 협의도 없이 멋대로 장식물을 바꿔 버리거나 휴게실의 위치를 변경하기도 했다. 문제는 키드레이 공작에게 할당할 휴게실이었다. 도티 부인이 그에게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개방된 곳의 휴게실을 배정한 것이다.
‘곤란한데.’
라파엘로 같은 귀족에게는 좀 더 은밀한 위치의 휴게실을 주는 게 일반적이다. 어중이떠중이가 근처에 기웃거리지 못하도록 애초에 접근성을 떨어뜨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올리비아는 하녀장과 굳이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어지간하면 뜻대로 따라 주었지만, 이것만큼은 넘어가기 힘들었다. 이런 기본적인 부분을 챙기지 못하면 황녀궁은 연회를 준비하는 기본기가 없다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 그것은 황녀를 욕보이는 일이었다.
실제로 도티 부인이 그 일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귀족들은 어떻게든 권력자의 행보에서 흠을 잡아내고 싶어 했다. 특히 그것이 카예나처럼 젊고 아름다운 여자라면 더더욱.
올리비아는 결코 카예나에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평가가 붙게 놔둘 수 없었다. 그녀는 도티 부인을 찾아갔다.
“하녀장님을 뵙습니다.”
도티 부인은 눈을 샐쭉하게 뜨고 상대를 보았다.
‘올리비아 그레이스였나?’
한때는 키드레이 공작과 혼담이 오가던 영애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지금은 끈 떨어진 연일뿐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레이스 자작가는 도티 후작가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한미한 가문이다. 그녀는 올리비아를 한껏 얕잡아 보았다.
“황녀 전하의 성년식 연회 준비로 인해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도티 부인은 올리비아가 성년식 문제로 자신을 찾아와 시비를 걸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사전에 계획된 부분 중 일부는 예정대로 진행했으면 합니다. 특히 휴게실 배정과 식자재 추가 구매는 반려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도티 부인이 눈을 뾰족하게 떴다.
“이제 막 황궁 일을 시작한 상급 시녀 주제에 감히 내 말에 토를 다는 거니?”
올리비아는 당혹스러워 눈을 깜빡였다. 도티 부인이 반박할 것은 예상했지만 어디까지나 논리적인 이유로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대뜸 힘으로 찍어 누르려 할 줄이야. 그녀가 가장 혐오하는 귀족 부류였다.
“너, 내가 누군지는 아니? 지금 감히 누구에게 대드는지 아느냐는 말이야!”
황자를 길러 냈다는 자부심이 대단한 도티 부인은 마치 자신이 황후라도 된 것처럼 위세를 부렸다.
올리비아는 그녀의 말에서 오류를 지적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처신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임을 알았다. 상대는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녀는 대화를 포기했다.
“제가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도티 부인은 제 호통에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올리비아를 보고 기가 막혔다. 당장 납작 엎드려 용서를 구해도 모자랄 판에 고상하게 고개 숙여서 하는 사과라니. 자신을 괄시하는 게 아니라면 이따위 태도를 보일 리가 없었다.
“휴게실도 식자재도 내가 다년간의 경험으로 준비했다! 예상 방문객 수가 몇인데 고작 음식을 그 정도만 준비한다는 것이냐?”
사실 연회 음식은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도티 부인은 쓸데없이 음식의 가짓수를 더 늘리는 등, 카예나의 측근들이 실수를 일으키기를 유도하고 있었다. 이것은 황녀궁의 기세를 눌러 버릴 좋은 기회였다.
올리비아는 간신히 성년식 연회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국정 대리인이 된 카예나의 위상 때문에 예상 방문객 수가 지나치게 늘어나서 조율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일하는 주방 하인의 수는 정해져 있는데 어떻게 이 많은 종류를 만들어 내겠어?’
그런데 도티 부인이 쓸데없는 문젯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미 들인 식자재를 멀쩡하게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인력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도티 부인이 픽 하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작년에 열렸던 휘스니아 백작 부인 연회의 음식 가짓수가 몇인지나 아느냐?”
“…….”
“황궁이 고작 백작 부인의 연회에서 준비한 음식 가짓수보다 적게 준비하면 대체 그 치욕은 누가 감당하지?”
성년식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크니 당연히 음식 가짓수를 그 연회만큼 마련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도 어디에 비교해 모자란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도티 부인에게는 이런 것들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짙은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이 연회가 황녀 전하의 성년식이라 할지라도 내명부는 결국 레제프 황자 전하의 소관이지. 그런데 연회가 소박하기라도 하면 그 모든 오욕이 어디로 돌아갈 것 같니?”
도티 부인은 계속해서 뾰족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식자재도 그 많은 양을 발주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걸 감안해서 내가 손수 해결해 줬더니……. 기가 막히는구나!”
하지만 성년식 연회를 위한 식자재 발주는 몇 달 전부터 치밀하게 계산한 일이기도 했다. 도티 부인이 주장하는 말도 맞지만, 그녀가 추가로 주문한 양은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많았다. 이런 사람과 더 대화를 섞어 봐야 설득하지 못한다. 올리비아는 카예나에게 이 일을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심기를 어지럽혀서 죄송합니다.”
올리비아의 말에 그녀가 꼬리를 말았다고 생각한 도티 부인은 그녀를 휙 흘기며 중얼거렸다.
“흥, 볼 것도 없는 가문 출신 주제에…….”
그녀는 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올리비아는 도티 부인의 태도에 환멸이 들었다. 이런 거대한 연회나 사냥 대회는 계획대로 진행해도 변수가 생기는 일이다.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시중 하녀에게 말했다.
“황녀궁으로 가자.”
* * *
카예나는 성년식이 가까워지며 국정 업무는 재상에게 맡겨 버렸다. 성년식도 그렇지만 중앙군을 데리고 토지 개간에 들어갈 준비를 하느라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답지 않게 어딘가 분기탱천한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와 도티 부인에 대해 성토하는 올리비아에게 말했다.
“그냥 놔두어라.”
올리비아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카예나를 보았다.
카예나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맞서다가 괜히 하녀장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말렴. 밉보이면 너만 더 힘들어져. 그냥 다 따라 줘.”
“하지만 전하, 이 성년식은 분명히 역사에 남을 만큼 유례없이 성대한 일이 될 것입니다. 혹시 모를 오명이 전하께 붙도록 놔둘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더더욱 괜찮지.”
카예나가 빙긋 웃었다.
“역사는 최후의 승자에게 유리하게 기록되지 않으냐?”
“그야…….”
그러니 최후에 승리하면 된다.
올리비아는 그녀의 배포에 탄복하면서도 불안했다.
“그리고 키드레이 공작님의 휴게실은 리스트에 기록되지 않은 곳으로 하나 더 배정해 드리면 되지.”
“아……!”
“식자재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여차하면 중앙군 식자재 공급을 중단하고 그것으로 대체해도 되니까.”
“그러면 원래 거래하던 상단 쪽에서 전하께 불만을 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군수 물자를 대는 상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 아느냐? 그들은 불만이 아니라 불안에 떨 것이다.”
카예나는 아직 완전히 감을 잡지 못한 올리비아에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자주 이런 일이 발생하면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겠지. 하지만 이런 어쩔 수 없는 경우에 거래가 중단되면 나보다는 도티 부인에게 화살을 돌릴 거야.”
“그렇겠군요…….”
올리비아는 아까와 달리 이제 완전히 안심한 얼굴을 했다.
카예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들겨 주었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과찬이십니다. 마땅히 해야지요.”
올리비아는 리스트를 뒤적여 보았다.
“그런데 지금 휴게실로 따로 뺄 만한 방이 없습니다. 어찌할까요?”
카예나가 말했다.
“황녀궁에 배정해 드려라.”
“황녀궁에도 휴게실로 쓸 만한 곳은 이미 다 빼 버렸습니다만…….”
“2층이 있잖니.”
원래대로라면 2층은 같은 황족이거나 샤프롱이 아니면 휴게실로 주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카예나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무도 모를 비밀 휴게실인데 뭐 어떠니?”
올리비아는 조금 당황하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카예나와 올리비아가 대화하던 중,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달칵.
올리비아의 시선이 자연스레 문으로 향했다. 익숙한 금발의 여자가 손에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줄리아 양?”
이름이 불리자 줄리아가 멈칫했다. 그녀가 뻣뻣하게 시선을 돌려 올리비아를 힐끔 보았다.
올리비아는 줄리아의 오라비인 제논의 부고를 들어 알고 있었다. 아마 그 슬픔에 저렇게 축 처진 게 아닐까? 그녀는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소식 들었어요. 정말 유감이에요.”
“……네.”
그런데 줄리아의 모습이 평소 보던 것과 상당히 달랐다. 항상 선명한 색을 선호하던 줄리아가 오늘은 옅은 라임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머리카락은 금실로 자수를 놓은 짙은 녹색 리본으로 우아하게 꾸며 놓았다.
‘……이거 전하의 취향 같은데.’
올리비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줄리아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뺨에 붙은 커다란 거즈 때문이었다.
“줄리아! 무슨 일이에요? 다쳤어요?”
올리비아는 마치 자신이 다친 것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 줄리아의 뺨을 들여다보았다.
줄리아는 어쩔 줄 몰랐다. 카예나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 차를 좀 마시면서 이야기할까?”
줄리아는 그 말에 얼른 들고 있던 다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앞으로 두 사람은 함께 일하게 될 거다.”
함께 일하게 된다니?
“줄리아, 앞으로 올리비아에게 전반적인 황궁 예법을 배우도록 해. 사람은 말투와 태도만으로도 얼마든지 인상이 달라 보인단다.”
줄리아는 전과 달리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반면에 올리비아는 상당히 얼떨떨했다. 이건 마치 카예나가 줄리아를 키워 내려고 하는 말 같지 않은가?
“올리비아.”
잠깐 어리둥절하던 올리비아는 카예나의 부름에 얼른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전하.”
“줄리아가 너와 다니기 시작하면 도티 부인이 전처럼 막무가내로 행동하지 못할 거야. 그때 줄리아와 함께 그녀에게 불만을 품은 자들을 모으렴.”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올리비아는 황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더더욱 이상함을 느꼈다. 줄리아는 에반스 가문의 사람이다. 그 말은 즉, 도티 부인처럼 레제프 쪽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카예나는 마치 줄리아가 완전히 자신의 사람이 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설마 저 뺨과 장례 기간에 입궁한 게 관련이 있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제논 에반스의 장례를 치르는 중인데 줄리아가 굳이 황궁에 돌아와서 의아하던 참이었다.
“줄리아는 에반스 후작가의 다음 주인이 될 것이다.”
카예나가 말했다.
“……!”
올리비아는 무심코 탄성을 내뱉을 뻔했다. 어지럽게 널려 있던 퍼즐 조각이 그제야 한순간에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후계자가 되려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니?”
줄리아는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지 세력이 아닐까요?”
“정확해.”
카예나의 말에 줄리아가 활짝 미소 지었다.
“로드릭 후작의 후계자가 아직 갓난아이라 다행이지.”
카예나는 차로 입술을 축였다.
“그 아이가 자라서 펜을 쥐기까지의 시간과 줄리아 네가 혈족들을 설득해 차기 후작이 되는 것, 나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빠르리라고 생각한단다.”
올리비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궁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모습을 에반스 가문의 혈족들에게 보여 주면 그들은 줄리아 양을 의지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게 나중에는 후계자로 삼자는 이야기로 바뀌게 될 테고요.”
그 말에 줄리아가 반문했다.
“하지만 제 가문에서 레제프 황자 전하의 측근으로 새로운 사람을 들이면 끝인 거 아닌가요?”
그것은 타당한 추측이었다. 그러나 카예나는 레제프를 잘 알았다. 회귀 전, 그가 황위에 오를 때 에반스 가문은 제논을 재상으로 만들거나 줄리아를 황후로 세우지 못했다. 레제프가 에반스 가문의 영향력을 더 이상 키우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제프는 에반스 가문의 영향력을 더 키우고 싶어 하지 않겠지. 그래서 도티 부인에게 이만큼 힘을 실어 주는 것일 테고.”
“에반스 가문과 도티 가문의 힘을 균일하게 만들어 서로 물어뜯고 싸우게 할 작정이로군요.”
그 말에 줄리아는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우리 가문의 힘을 키우지 않을 거라면 내가 황후가 될 일은 결코 없겠네.’
레제프가 보여 주었던 그 다정한 모습은 그럼 뭐였지? 줄리아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꼭대기에 앉은 자가 사람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경험해 본 줄리아는 설마 레제프도 그런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아냐, 아닐 거야…….’
하지만 한번 생겨난 의심은 꺼지지 않았다.
‘만약 날 이용하려고 그렇게 다정하셨던 거라면 어떡하지?’
만약 그렇다면 다시는 연하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리라.
줄리아는 울적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 * *
올리비아와 줄리아는 집무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걷다가 맞은편에서 오던 수잔과 마주쳤다.
“어?”
수잔도 줄리아가 입궁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던 모양인지 놀란 표정이었다. 커다란 거즈가 붙은 줄리아의 뺨을 보았을 때는 눈이 더 커지지 못할 정도로 휘둥그렇게 변했다.
‘후작가 영애의 뺨이 왜 저래?’
딱 그런 의미가 담긴 시선이었다.
줄리아는 쭈뼛거리며 수잔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수잔 레폴 양.”
“아…… 네. 에반스 경의 부고 소식 들었어요. 명복을 빌겠습니다.”
그러자 줄리아가 힘없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네.”
뭔가 기색이 심상치 않자 올리비아와 수잔이 시선을 한차례 교환했다.
“혹시 후작가에 무슨 일이 더 있나요?”
“아, 아니요.”
하지만 올리비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기로 한 결심에 어떤 사건이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줄리아.”
올리비아는 단단한 눈으로 줄리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울게요.”
흔들림 없이 고요한 눈동자를 마주치자 줄리아는 마음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을 참기가 어려웠다.
“실은……”
줄리아는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논 오라버니에게 맞은 거예요.”
그러자 격렬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뭐라고요!”
수잔이 가뜩이나 매서운 눈매를 더욱 사납게 치떴다.
“미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여자 뺨을 때려! 그것도 한참 어린 동생에게? 명복을 빈 거 취소할 거야! 지옥에나 떨어져!”
“수, 수잔.”
올리비아는 통로를 휙 둘러보며 곤란한 표정을 했다. 그녀는 얼른 줄리아와 수잔의 손을 붙잡고 휴게실로 데려갔다.
안에는 베라가 서류를 한가득 쌓아 놓고 골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의아하게 고개 들었다.
“……뭐예요, 다들?”
줄리아는 울먹거리며 입술을 꾹 깨물고 있고 수잔은 잔뜩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휴게실 문이 탁하고 닫혔다.
줄리아는 조금도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녀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눈물을 삼키며 있었던 일을 조금씩 풀어놓았다.
“세상에!”
베라는 줄리아를 도구처럼 여긴 제논과 로드릭 후작의 냉혈한 행동에 경악했다.
올리비아는 줄리아를 안아 주었다. 등을 토닥이는 부드러운 손길에 줄리아는 지금껏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설마 같은 핏줄이라고 그대로 둘 건 아니죠? 다 쓸어버려요!”
수잔은 분해서 어쩔 줄 몰랐다.
“수잔,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줄리아가 눈을 부릅떴다.
“그럴 거예요.”
그녀는 말도 안 된다며 제 생각을 비웃음당할지라도 진심을 토로했다.
“제가 에반스 후작이 된다면 그런 이상한 일들을 바로잡을 거예요.”
올리비아는 줄리아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때 수잔이 줄리아에게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네.”
줄리아가 멍한 눈으로 그 손을 보았다.
“뭐 해요? 얼른 잡아요.”
수잔의 말에 줄리아가 얼결에 손을 맞잡았다.
“꼭 당신이 후작이 되어 줘요. 물심양면으로 도울 테니까.”
이야기를 같이 들으며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베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어요. 줄리아 양의 영향력을 키우는 일은 레제프 황자 전하께 반목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유리한 일이니까.”
올리비아가 동조했다.
“황녀 전하께서도 줄리아 양이 후작위를 계승하도록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 말에 수잔이 까르르 웃었다.
“그럼 게임 끝 아니에요?”
“속단할 수는 없죠.”
그렇게 말했지만 다들 자신만만한 얼굴들이었다. 줄리아는 황궁에 온 날 이후로 비어 버린 것처럼 허전했던 마음에 완전히 새로운 충만감이 들었다. 이런 소속감은 난생처음이었다. 이 사람들은 제 오라비들과 달리 자신을 상품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형편없이 굴었는데도…….’
눈가가 시큰해졌다. 이들이 자신의 아군이라는 사실이 더없이 든든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조합, 꽤 멋진데요?”
수잔의 말에 다들 서로를 돌아보았다.
“깽판 치기 좋은 조합이라고요.”
“깽판이라니…….”
그들이 의아해하자 수잔이 씩 웃었다.
“하녀장이 하는 일마다 자꾸 시비여서 짜증 났는데 아주 잘됐어요.”
베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거리는 늘리지 말아요, 수잔 양.”
그러자 수잔이 어깨를 으쓱했다. 베라는 불안감에 짧은 한숨만 내뱉었다.
수잔은 못된 장난을 계획하는 악동의 얼굴을 하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는지 잘 보고 따라 하라고요.”
* * *
레제프는 소파에 몸을 깊이 묻은 채로 테이블에 팔을 걸쳤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은 체스 말로 손장난을 쳤다.
툭, 데구르르-.
의미 없는 손장난을 칠 동안 그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손에 쥔 체스 말, 킹이 판 위에 쓰러졌다. 레제프는 퀸을 노려보았다. 맑고 투명한 옥석으로 된 퀸이 말들이 다 쓰러진 체스판 위에 홀로 고고하게 서 있었다. 머리에 관을 쓰고 드레스 입은 여인처럼 아래가 우아한 모양으로 퍼진 그 체스 말은 마치 카예나처럼 보였다. 대체 누님이 원하는 게 뭘까?
‘진짜 자유라고?’
어째서? 왜? 황궁을 나간다고 진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레제프는 퀸을 손안에 쥐었다. 그 작은 말은 레제프의 커다란 손안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영원히 내 손안에서 춤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퀸을 손에 꽉 쥔 채 주먹을 입술 위로 갖다 대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떨어뜨려 속삭이듯이 말했다.
“당신이 나를 버리려고 하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황궁으로부터 도망친다는 말은 곧 레제프에게서 도망친다는 뜻이다. 그토록 원하는 황위를 계승하는 일에 손을 보태 줄 테니 그거나 먹고 떨어지라며, 매정하게 자신을 내치는 것이다.
누이가, 나를.
“분명 나더러 당신의 하나뿐인 가족이라고 했잖아.”
레제프는 애달프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외톨이가 된 듯 고독감에 휩싸인 슬프고 우울한 얼굴이었다. 나직하게 깔린 목소리가 곧 갈라질 것처럼 힘없이 흘러나왔다.
“나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어? 그는 퀸을 쥔 손을 겹쳐 쥐며 고개를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이마에 퀸을 쥔 주먹을 댄 채로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그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꼭 흐느끼는 소리 같았다. 그러나 그의 어깨가 선명하게 떨리며 곧 광기 어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진짜 나밖에 없으면 되잖아.”
카예나의 주변을 좀 정리할 필요성은 계속해서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졌다.
카예나의 모든 걸 박탈해야겠다. 그녀가 이룰 가정, 그녀의 삶, 친구, 취미, 공간…… 그리고 직위까지. 정말 남은 것이라고는, 제게 손을 뻗어 줄 사람이라고는 동생밖에 없어서 평생 의지해야 하도록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완전한 인형처럼.
그는 기분 좋게 느른한 웃음을 지었다.
달그락.
레제프는 손에 쥔 퀸을 크리스털을 깎아 만든 투명한 잔에 빠뜨렸다. 새하얀 퀸에게 어울리는 아름답고 보기 좋은 감옥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그가 입을 열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그의 비밀 수행원인 자밀이 들어왔다. 그런데 자밀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끌고 온 여자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꺄악!”
여자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안쓰러울 정도로 벌벌 떨고 있었다.
레제프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이름이 도나……라고 했던가?”
황녀궁의 하급 시녀이자 카예나의 측근 중 하나인 도나였다. 도나는 레제프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그녀는 황녀궁의 하급 시녀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황궁에서 지내 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레제프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공간으로 붙들려 와 레제프의 앞에 내팽개쳐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더 잘 알았다. 자신은 오늘 죽는다. 지금까지 모든 이가 그렇게 죽었듯이.
레제프는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도나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어 주었다.
“가엽게도 양친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니. 그간 혼자서 고생이 많았겠네.”
그가 부모를 거론하자 그녀의 안색은 이보다 더 창백해질 수 없을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전하…….”
“저런.”
레제프가 혀를 찼다.
“누가 너를 죽인다고 했나?”
“…….”
도나는 섣불리 입을 열거나 지나치게 두려워하며 실수하는 대신,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계속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레제프는 속으로 비소를 머금었다. 영리한 아이다. 그러니 누님의 측근이 되었겠지. 하지만 레제프는 그녀의 영리함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국정 대리인이 되고서도 계속 불상사와 맞닥뜨리는 누님이 걱정되어 한시도 잠을 이루지 못하겠더군.”
“…….”
“그분을 지켜 내려면 황녀궁에서 내 손과 발처럼 움직여 줄 사람이 필요하지.”
즉, 세작이 되라는 말이었다.
도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건 명백히 카예나를 배신하는 일이다. 하지만 레제프가 괜히 자신의 양친을 거들먹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부모는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협박이었다. 도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잘 생각해 봐.”
그때 그녀의 귓가로 악마의 유혹처럼 달콤하고 나른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도나의 눈이 살며시 열렸다. 레제프의 금빛 머리카락이 사르르 떨어지며 양순해 보이는 눈매가 매혹적으로 휘었다. 위기의 순간에도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찔하게 아름다운 외모였다.
“너는 황궁에서 지낸 지 제법 되었으니 권력이 어떤 것인지 잘 알겠지.”
모를 수가 없다. 권력의 온상지가 바로 이곳 황궁이니까.
“내 여인이 되면 네 위치가 고작 하급 시녀로 끝나진 않겠지.”
도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레제프는 두 손으로 도나의 양 뺨을 쥐었다. 곧 입술이라도 맞출 것처럼 고개가 내려왔다.
“도티 부인을 봐.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지?”
도나는 이 매력적인 악마에게 절대 심장을 내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수무책으로 가슴이 떨렸다.
“그간 힘들었지? 앞으로는 모든 게 쉬울 거야.”
레제프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
“내가 황제가 되면, 더더욱.”
그는 부모를 죽이겠다는 협박과 그녀가 가질 수 있는 권세를 동시에 내밀었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미소까지. 도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남자에게 면역이 없었다. 아니,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는 레제프를 제외하면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도나는 독이 든 성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을 감싸 쥔 그 커다란 손에 이성이 흐릿해져 갔다. 그래, 평민 따위에 불과한 내가 언제 이런 기회를 얻겠어? 이 화려한 황궁과는 조금도 관련 없는, 평범한 남자를 만나 그와 결혼하고 다른 평민들처럼 구질구질하게 살아야겠지. 늘 그랬듯이 약값에, 밥 벌어먹을 일에 전전긍긍하면서.
그런 자신에게 곧 무소불위의 권력을 쥘 사내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입술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성배를 쥐고 기꺼이 입술을 대고 싶었다. 얼른 이 독을 마시지 않고서는 갈증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 남은 카예나에 대한 고마움이, 진심으로 황녀를 존경하게 된 제 충심이 발목을 잡았다.
레제프는 마지막으로 도나의 죄책감을 완전히 흩어 줄 마법 같은 말을 건넸다.
“이 모든 것은 누님을 위해서다.”
도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황녀 전하께 해가 될 일만 하지 않으면 되잖아. 오히려 이 일로 황녀 전하께 쓸 만한 정보를 알려 드릴 수도 있어.’
맞아. 이건 배신이 아니야.
성배의 독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 * *
성년식이 가까워질수록 황성을 방문하는 방문객 수가 어마어마하게 늘기 시작했다. 귀족이라고 해도 아무나 황성에서 머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귀빈만이 황성에 머물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모든 일이 실수 없이 완벽하게 돌아가야만 했다.
도티 부인은 자신이 내명부 영향력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했다. 황녀궁 시녀들이 같잖은 리스트를 들이밀며 딴지를 걸어도 모두 반려해 버렸다. 또한, 그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주며 실수를 유발했는데 그때 그들의 무능함을 꾸짖으며 자신의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상황을 조작했다.
황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능하고 쓸모없으며, 도티 부인이 아니면 황궁은 답도 없는 것처럼 연출하는 셈이었다. 그 묘략은 상당히 성공적인 것 같았다.
“내가 식기를 추가하라고 말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꾸물거리고 있느냐!”
“그게…… 수잔 님이 하녀장님께서 지시하신 일을 수행해야 한다며 인력을 빼 가셨습니다.”
“또 그 건방진 것이……!”
그런데 지금까지 황녀궁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던 수잔이 전면에 나서며 제 핑계를 대고 계속 훼방질이었다.
레폴 백작가는 군사 가문이고 오랜 전통을 가진 명문가라 도티 후작가의 힘으로도 함부로 찍어 누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도티 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신경에 거슬리는 일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줄리아 님이 오셔서 냅킨의 색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고 한바탕 난리를 피우셔서…….”
그때 곁에 있던 다른 하인도 얼른 말했다.
“그래도 하녀장님의 지시 사항이라고 잘 타일러서 보냈습니다.”
그들이 도티 부인의 지시를 크게 벗어나지 않다 보니 섣불리 뭐라고 혼내기 어려웠다.
‘그것들이 가문의 위세를 믿고 이따위 짓을 벌이는 게지!’
그나마 황녀궁의 나머지 시녀 둘은 눈치가 있는 것인지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속이 끓었다.
“하녀장님, 추가로 주문한 식자재가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억지로 노기를 누르며 식자재를 확인했다. 간사한 인상의 행상인이 손바닥을 비비며 그녀를 향해 비굴하게 인사를 올렸다.
“저희 상단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회가 끝나는 날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행상인은 도티 부인을 향해 고급스러운 상자 하나를 은근하게 내밀었다.
그녀는 행상인의 태도에 기분이 좀 풀렸다.
“흐응, 물건들이 꽤 괜찮구나. 계속 이 수준을 유지해서 식자재를 납품하도록 해라.”
“아무렴요. 신경 쓰시지 않게 잘 준비하겠습니다.”
행상인이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 숙였다.
* * *
탁.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요한 집무실에 펜을 내려놓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아무도 없는 이 적막함 속에서 카예나는 짧은 평온함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노란 불빛으로 한껏 달아오른 황성은 아직 축제가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소란스러웠다.
“드디어 내일이네…….”
그녀는 생일을 맞이하는 사람답지 않게 건조한 얼굴로 바깥의 풍경을 구경했다. 딱 자신만 제외하고 들뜬 분위기인 것 같았다.
‘최근 흉흉한 일이 많았으니 이런 축제가 반가울 만하지.’
카예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뻐근한 몸을 풀었다. 금주부터 중앙군을 차출해 토지 개간에 돌입한다. 그것에 관련해서는 방금까지 서류를 모두 정리해 둔 참이었다.
‘한동안 정신없을 테니까.’
카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장식장에 숨겨 둔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달칵.
상자를 열자 작은 유리병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는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더니 테이블에 얌전히 놓였다. 물 주전자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빈 찻잔, 편지 봉투를 뜯을 때 쓰는 나이프도 나란히 옆에 놓였다. 카예나는 마력으로 집무실 바깥에 누가 있는지 더듬어 보았다.
‘애니랑 도나, 호위 기사는 이든, 제다이어…….’
상급 시녀는 아무도 없다. 내일 성년식을 맞이해 그들도 치장해야 하기에 일찌감치 모두 퇴근시켰다. 그녀는 마력을 거두며 다른 방식으로 발현했다.
위이잉!
얇은 막이 집무실을 감쌌다. 그녀는 안에서 나는 소리가 바깥에 들리지 않게끔 했다. 혹시 모르니 문도 잠가 놓았다.
“준비는 다 했어.”
카예나는 오늘 엘릭서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상급 시녀가 모두 궁을 비우는 날을 잡았다.
카예나는 테이블 앞에 앉으며 칼날을 촛불에 달구었다. 물 주전자가 홀로 허공에 떠오르더니 찻잔에 물을 절반쯤 채웠다. 엘릭서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잔에 채운 물의 색이 녹색으로 변할 때까지 마법사의 피를 떨어뜨리면 된다.
‘원작에서 피가 얼마큼 필요한지 정확한 수치도 알려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냥 많은 피가 필요하다는 정도로만 서술되어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카예나는 칼날을 손바닥에 갖다 대었다.
“…….”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고는 해도 몸에 상처를 내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칼날을 손바닥에 푹 찔러 넣었다.
톡, 토독!
카예나의 피가 하얀 찻잔을 채운 물에 떨어져 내렸다. 손바닥을 찌른 정도로는 피가 충분히 흐르지 않자 그녀는 아예 손바닥을 그었다. 그러자 찻잔을 완전히 붉게 물들일 만큼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찻잔에 계속해서 피를 쏟아 냈다. 그러나 물은 좀처럼 녹색으로 변하지 않았다. 엘릭서를 만드는 일은 인고의 싸움이었다.
카예나는 멍하니 찻잔만 바라보았다. 기분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주사기 같은 게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피를 뽑아서 들이부으면 되니 이 얼마나 깔끔하고 인도적인 방식인가.
‘피를 꽤 많이 쏟았나?’
눈앞이 가물거리는 기분이었다. 카예나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유지하려 애썼다. 엘릭서를 만들지 못하면 그녀는 제위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엘릭서는 이를테면 카드 게임의 조커와 같은 역할이었다.
느낌상 상당히 많은 피를 흘린 것 같았다. 다만 물의 양이 조금도 불어나지 않아서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잘 가늠되지 않았다. 그런데 찻잔 안에 든 물이 불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게 엘릭서로 변하려는 신호인가?’
우웅-!
그 때 찻잔 안에 푸르스름한 빛이 맺혔다. 찻잔 안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만들어지더니 온통 붉게 물들었던 물이 점차 색이 바뀌기 시작했다. 마침내 엘릭서가 완성된 것이다.
그녀는 깊은숨을 토해 내며 찻잔을 살짝 흔들어 보았다. 엘릭서는 끈끈한 점액질처럼 움직였다. 병에 엘릭서를 다 쏟아 넣고 나머지 병 하나에 엘릭서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것은 제다이어의 몫이었다.
카예타도 엘릭서를 한 방울 마셨다. 새로운 활력과 함께 손바닥의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걸로 성년식 준비는 끝난 건가?’
그녀는 서둘러 엘릭서를 만든 흔적을 지웠다.
* * *
성년식 당일, 황성 바깥에서부터 오케스트라의 힘찬 연주가 터져 나왔다. 장미가 가장 흐드러지게 핀 봄날, 사교 시즌의 개막을 알리는 공식 연회는 유례없는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전 지역의 귀족을 태운 마차가 쉴 새 없이 황성을 들락거렸다. 그런데 그 마차 중 단연 모든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마차가 한 대 있었다.
누군가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탄성을 내질렀다.
“어머, 로맨틱한 마차네요!”
새하얀 백마가 화려한 양각이 돋보이는 지붕 없는 커다란 사륜 쌍두마차를 끌고 들어왔다. 은빛 바퀴는 햇살에 반짝 빛났다. 그 마차의 특별함은 그런 로맨틱한 생김새가 아니었다. 마차에 사람이 아니라 꽃이 타고 있었다.
“전부 장미인 것 같은데……. 어머, 저런 색으로 개량한 장미도 있었나요?”
사람들은 마차에 실린 다양한 색의 장미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크림색 장미, 분홍색 장미, 붉은색 장미 등으로 화사하게 채워진 꽃마차는 귀족들의 시선을 받으며 로비 앞에 섰다.
궁정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꽃마차를 끌고 온 마부에게 다가갔다.
“어느 가문에서 보낸 것입니까?”
“키드레이 공작님이 황녀 전하께 보내신 선물입니다.”
뒤이어 흑마가 이끄는 웅장한 마차가 멈춰 섰다. 그 안에서 연회복 차림의 라파엘로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의 영애들이 애달픈 한숨을 내쉬었다.
라파엘로의 휴게실 안내 역할을 맡은 궁정인이 얼른 달려 나왔다.
“라파엘로 키드레이 공작님을 뵙습니다. 이곳으로 오시지요.”
라파엘로는 제레미와 바스턴을 대동한 채 휴게실로 향했다. 제레미가 휴게실을 위치를 보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너무 개방된 장소에 휴게실이 있군요. 근처를 더 철저히 단속해야겠습니다.”
라파엘로도 휴게실의 위치가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창을 열고 바깥을 확인할 때 제레미가 미묘한 눈으로 그 행동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설마 창밖으로 뛰어내리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라파엘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을 닫았다.
“그럴 리가.”
바스턴이 호들갑 떨었다.
“딱 봐도 여기서 창밖으로 나가면 걸립니다! 어딘가에 분명 비밀 통로가 있을 거예요. 황녀궁으로 향할……!”
제레미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바스턴을 꾸짖었다.
“너는 제발 그 방정맞은 입부터 단속해야겠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휴게실 문을 두드렸다. 휴게실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애니였다.
“황녀궁 소속 하급 시녀인 애니라고 합니다.”
제레미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공작가에서 심어 두었던 세작이었다. 지금은 세작 일을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데 이곳에 보냈다는 것은…….’
그의 눈빛이 모종의 예감으로 빛났을 때였다.
애니가 공손히 입을 열었다.
“휴게실의 위치가 부적절하여 공작님께 비공식적으로 휴게실을 하나 더 배당하라는 황녀 전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제레미가 바로 되물었다.
“어디인가?”
“황녀궁 2층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황녀궁 2층은 황족이나 샤프롱이 아니라면 휴게실로 머물 수 없는 장소였다.
라파엘로가 말했다.
“그리로 가지.”
“안내하겠습니다.”
애니는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아닌 뒷문을 열었다.
* * *
황녀궁 2층에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의 주인공이 있는 장소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그런데 이 적막한 분위기가 오히려 카예나다웠다.
라파엘로는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을 눈앞에 그려 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카예나에 대한 정보만큼은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애니를 포함한 황녀궁 세작을 모두 외부로 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에 수십 수백 번도 더 그녀가 궁금했다.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너무 무리하고 있지는 않을까? 자신을 생각하기는 할까?
하지만 카예나를 곤란하게 만들기는 싫었다. 또한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성년식에는 그녀를 볼 수 있잖아.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황녀궁을 밟는 순간부터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그녀의 근처로 간다면 그간 자신을 지독하게 괴롭혔던 갈증이 어느 정도는 해소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라파엘로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 어둡게 물들었다.
애니가 멈춰 서서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작은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 벽면을 더듬자 비밀스러운 문이 나타났다.
“이 방 전체가 공작님께 내드리는 휴게실입니다.”
라파엘로는 이 응접실이 아니라 저 벽면의 비밀스러운 장소가 진짜 자신을 위한 공간임을 눈치챘다. 애니가 밖으로 나가자 그는 열린 벽으로 다가갔다. 역시나 안쪽에 문이 또 있었다.
달칵.
그 문을 열자 카예나의 향이 그를 덮쳤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이어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꽃마차를 보냈다던데 정말이에요?”
라파엘로의 시선이 다급하게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그는 곧 연회복을 입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참을 참았던 숨을 토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녀를 불렀다.
“……황녀 전하.”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모를 정도로 표정을 일그러뜨린 그를 향해 카예나가 팔을 뻗었다.
“이리 와요.”
라파엘로는 잠깐 숨을 멈췄다. 그러다 더는 망설일 것도 없다는 듯이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를 향해 몸을 무너뜨렸다.
꽈악-.
그녀의 품에 안겼다. 물론 남들이 본다면 카예나가 그의 품에 갇힌 것처럼 보이겠지만. 카예나는 라파엘로를 끌어안으며 푸스스 웃었다. 자신의 덩치를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얌전히 안기는 게 퍽 귀여웠다. 귀여운 라파엘로라니, 예전에는 마냥 근사하게만 보였던 남자였는데.
라파엘로는 품에 안기는 것뿐만 아니라, 카예나의 목덜미에 제 이마를 비비며 온몸으로 보고 싶었다는 걸 티 냈다. 그가 카예나를 꽉 안은 채 탁하게 잠긴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멜 백작가에서 보고 나서 시간이 꽤 흘렀죠?”
끄덕.
카예나는 저가 비 맞은 강아지라도 된 양 힘없이 애교를 부려오는 라파엘로 때문에 끙, 하고 낮게 탄식했다. 오늘 혹시 작정한 건가…….
카예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며 쓰다듬고 여기저기 쪽쪽 키스해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는 오늘 근사하게 차려입었으며 머리도 예쁘게 모양을 내온 상태였다.
“오늘 멋지네요.”
라파엘로는 고개를 살짝 들어 카예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음에 드십니까?”
예쁘게 보이려고 차려입고 온 게 맞았으니 카예나의 취향에 맞았으면 했다.
“물론 마음에 들어요. 뭐, 덜 입은 모습도 마음에 들 것 같고.”
카예나는 반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으나 라파엘로는 진지했다. 그는 곧바로 손을 내려 재킷 단추를 풀었다.
“……지금은 말고요.”
이 행동력 넘치는 사람아.
카예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의 행동을 저지하며 마치 침대처럼 길고 넓은 소파에 그를 끌어다 눕혔다.
“?”
라파엘로는 눈을 깜빡이며 순순히 그녀가 하는 대로 당했다.
카예나는 뒤로 쿠션에 기대어 비스듬하게 누운 라파엘로의 위로 몸을 겹쳐 기댔다. 라파엘로가 순간 몸을 움찔하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연회장으로 내려가면 많이 바빠질 것 같아서 그 전에 잠깐 이리로 불렀어요.”
카예나는 그저 대화나 하자는 듯이 여상스럽게 말을 걸었다.
라파엘로는 “아…….”하고 얼빠진 목소리를 내며 얼어붙어 있다가 어색하게 카예나의 허리를 안았다.
카예나는 그가 뜻밖에도 놀리는 맛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 얼굴 빨개요.”
“…….”
라파엘로는 난감하게 고개를 돌리며 한 손으로 제 뺨을 슬쩍 쓸었다. 갑자기 카예나가 제게 저돌적으로 접촉해오니…… 솔직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조금, 덥네요.”
“그럼 시원하게 해 줄게요.”
라고 말하며 카예나가 몸을 떨어뜨리려고 하자 라파엘로가 더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아뇨. 덥지 않습니다.”
“흐음?”
카예나의 눈이 가늘어지자 라파엘로는 그녀가 자신을 놀리는 것에 푹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너무 자극하시면 곤란합니다.”
“어째서요?”
라파엘로는 차마 제 몸의 반응을 설명하지 못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하아…….”
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돌연 카예나를 번쩍 안아 눕혔다. 두 사람의 위치가 순식간에 반전된 것이다.
카예나는 깜짝 놀라 짧게 비명 질렀다.
“라파엘로!”
그는 이름을 불리자 “네.”하고 얌전히 대답하며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이렇게 흐트러지면 흐트러지는 대로 아름답구나. 놀라서 크게 뜬 눈도 사랑스럽고, 그러다 흘겨보는 건 귀여웠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웃음이 나와요? 드레스가 다 구겨지게 생겼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웃으면서 하는데 그게 진정성 있는 사과예요, 라파엘로 씨?”
“아니요.”
카예나는 기가 막혔다.
“대답만 꼬박꼬박 한다고 다가 아니에요.”
라파엘로는 그녀가 자신을 혼내는 게 왜 이렇게 좋은지 알 수 없었다.
“네.”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죠?”
라파엘로는 종알종알 저를 혼내는 입술에 쪽 하고 키스했다.
“……입막음이에요?”
“성년식 선물입니다.”
“이게요?”
“네. 꽃마차와 그 안에 든 향수, 그리고 지금 이것.”
이번에는 귀여운 입맞춤이 아니라 혀로 입술 틈을 벌리고 타액을 핥아 올리는 진한 키스였다. 카예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그의 몸은 정말이지 버겁게 안겼다. 완벽하게 타고난 피지컬에 오랜 고강도 훈련까지 축적된 거대한 돌덩이 같은 몸은 가만히 있어도 압도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그런 몸으로 카예나를 완전히 가둬버릴 듯이 안아올 때면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작은 감옥 안에 들어가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옷을 입혀놓았을 때의 근사함은 아마 벗겨놓았을 때만 못하리라. 카예나는 절로 마른침을 삼키게 되었다.
라파엘로는 부드러운 입술을 빨고 삼키며 정신없이 카예나를 탐했다. 그녀가 제 몸을 쓸어 만질 때면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젠장.
너무 참기가 어려워서 이대로 끝까지 일을 치러버릴 것만 같았다.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베고 누운 쿠션 뒤의 소파 팔걸이를 부서뜨릴 듯이 꽉 쥐었다. 그게 거의 마지막 이성이었다. 몸 안 깊숙한 곳부터 헤집고 올라오는 원초적인 욕망이 저를 조종하려 들었다.
카예나가 입은 드레스는 계절에 맞게 꽤 얇았고, 살결을 덮은 레이스는 손가락을 세워 아래로 확 긁어내리면 다 찢어질 것처럼 약해 보였다. 그것도 아니라면 치맛자락을 걷어 다리를 얽거나.
“으음….”
하지만 곧 성년식이 시작된다. 이제 달콤한 시간은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할 때였다.
라파엘로는 달뜬 숨을 내쉬는 카예나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입술에 여러 번, 곱게 화장한 얼굴 대신 붉게 물든 귓바퀴에 또 여러 번, 부드러운 머리칼도 역시, 그렇게 정신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간지러워요.”
카예나는 쿡쿡 웃으며 자신도 화답하듯 라파엘로의 입술에, 콧등에, 이마, 두 뺨 등에 키스해주었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곧 레제프가 올 시간이었다. 레페프는 카예나를 에스코트해서 그랜드 홀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라파엘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미치광이 황자의 손에 카예나를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는 어느덧 소파에서 일어난 카예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이마가 카예나의 납작한 배에 툭 닿았다. 그의 어리광에 카예나가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아직 선물을 덜 드렸는데.”
그의 투정 같은 말에 카예나는 웃고 말았다.
“아, 성년식 선물이요?”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줄 수 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키스는 마음에 들었다.
카예나는 허리를 숙여 짧게 키스하고는 야릇하게 속삭였다.
“마음에 드니까 나중에 더 주세요.”
“…….”
라파엘로는 한 방 먹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카예나는 그의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반쯤 풀어져 내린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꼭 위험한 일을 치르고 난 사람처럼 야해 보였다.
‘으음, 외모가 너무 수려해도 탈이야.’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머리를 깔끔하게 넘겨 주었다. 그의 외모가 다시 반듯해지자 카예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탁탁, 살짝 구김이 간 옷을 털어준 후.
“있다가 봐요.”
산뜻하게 인사했다.
라파엘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카예나의 허리를 안고 달콤한 시선을 떨어뜨렸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시 키스할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분위기에 카예나는 그의 단단한 팔을 잡으며 한숨을 머금었다.
‘정말 곰인지 여우인지…….’
카예나는 그를 원하는 감정에 몸을 맡기고픈 충동을 참았다. 벌써 레제프가 오기로 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갔다.
“그럼 정말 가볼게요. 연회장에서 봐요.”
쪽.
카예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잠시 떨어져 있을 연인이 그러하듯, 사랑스러운 작별 인사였다. 그렇게 카예나를 먼저 떠나보낸 라파엘로는 마른세수하며 잔뜩 달아오른 몸을 식혔다. 이대로 연회장을 갔다가는 카예나의 구둣발 소리만 들어도 발정 난 개처럼 굴 것 같았다.
그는 무책임하게 행동하고 싶었다. 모든 걸 내다 버리고 카예나만을 쫓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키드레이 공작이어야만 카예나를 도울 수 있다.
‘차라리 제위 싸움을 빨리 정리해 버린다면.’
그러면 자신은 황제가 된 카예나의 옆에 설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정말 개새끼라도 될 것 같았으니까.
* * *
카예나는 마력을 일으켜 흐트러진 모습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간단했다. 구겨진 드레스만 시간을 돌리는 것이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모양도 그랬다. 시간 마법을 짧게 사용하면 몸에 큰 무리가 가지 않았다.
카예나는 드레스 룸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이미 애니가 사용인을 모두 내보내 이목을 정리해 놓은 상태였다.
“레제프는 아직 안 왔니?”
“그렇습니다.”
카예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스툴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았다. 막 몸단장을 마친 것처럼 완벽한 모습이었다.
‘라파엘로도 휴게실로 잘 돌아갔겠지?’
카예나는 점점 그와 이별을 맞이하는 게 어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를 향한 마음이 깊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순간에 충실하고 싶다는 감정이 거칠게 충돌했다.
‘……시간은 많아.’
마법 계약으로 수명의 절반을 소모했지만 그래도 제법 긴 시간이 남았으리라.
카예나는 성공적으로 황위를 거머쥐게 된 이후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애초에 황위에 뜻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음 후계자가 황위를 계승할 준비를 마칠 때까지만 왕관의 무게를 견딜 생각이었다. 그렇게 황좌에서 내려왔을 때, 그때라면 라파엘로와 남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그때까지 라파엘로가 내게 마음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의 마음이 한순간 흔들리고 말 일시적인 감정은 아닌 것 같았다. 카예나는 그게 기쁘면서도 안타까웠다. 자신의 수명이 멀쩡했다면, 마냥 기뻤을 텐데.
그때 도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이 어딘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카예나는 마음을 차갑게 식혔다. 이제 연회라는 전장으로 뛰어들 시간이었다.
레제프가 드레스 룸으로 들어왔다. 그는 거울 속의 카예나를 발견했다. 그는 보석으로 된 관을 쓴 채 차분한 눈빛을 한 카예나의 모습이 담긴 거울이 마치 결혼용 초상화처럼 느껴졌다.
기분 더럽네.
그러나 레제프는 카예나를 향해 빙긋 웃었다.
“연회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카예나가 일어나 손을 내밀자 레제프가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오늘도 누님께서 가장 아름다우십니다.”
그 칭찬에 카예나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레제프는 카예나의 곁에 붙어 서서 등허리에 손을 휘감았다. 에스코트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다른 손으로 카예나의 손을 쥐고 극진한 에스코트를 하기 전, 그녀의 귀걸이를 살짝 만지작거렸다. 이건 자신이 선물한 것이었다.
레제프의 입가로 어딘가 만족스러운 기색이 피어올랐을 때, 카예나가 물었다.
“화는 좀 풀렸니?”
멈칫. 레제프는 웃음기가 가신 표정으로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렸다.
“저는 누님과 다투기 싫습니다.”
다투기 싫다. 이 모든 일이 그렇게 귀여운 수준으로 표현될 것들이었나?
카예나는 레제프가 이 관계에서 자신이 확실하게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니 저와의 계약을 그렇게 쉽게 깨뜨리려 드는 것이겠지. 이런 계약은 우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
카예나가 짤막하게 동의했다.
“나도 그래.”
레제프는 누이의 말에서 묘한 건조함을 읽었으나 모르는 척 여상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누님은 결혼할 생각을 바꾸지 않으시겠지요?”
“애초에 그렇게 계약했잖니.”
레제프는 우울한 얼굴을 했다.
“그냥…… 서운해져서요. 누님이 황궁에 계시지 않으면 쓸쓸할 것 같습니다.”
레제프는 이렇게 약한 소리를 아무 의도 없이 늘어놓을 아이가 아니었다.
“제게 유일한 가족은 누님밖에 없잖아요.”
유일한 가족. 그건 늘 카예나가 하던 말이었다. 레제프의 입술에서는 나온 적 없는, 오직 카예나만이 하던 그런 말.
“나도 마찬가지야, 레제프.”
네 말대로 난 그랬단다. 정말로 너밖에 없었단다, 레제프.
카예나는 안개가 자욱하게 낀 듯한 미소로 그의 뺨을 살짝 쓸어 주고는 말없이 먼저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누님.”
레제프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따라붙어 다시 옥죄듯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어 그녀의 손을 잡아채 쥐고 멋대로 달아날 수 없게 제 곁에 묶었다. 그리고 말했다.
“위험합니다.”
대체 무엇이? 카예나는 레제프의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네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 나는 위험하다는 걸까?’
웃기지도 않지.
그들은 그랜드 홀로 향했다. 수십 번도 더 같이 밟았던 이 길이 오늘처럼 서늘했던 적이 있을까?
점점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선명해졌다. 카예나는 얼굴에 미소를 걸치고는 가장 아름다운 모양으로 가다듬었다. 능숙하고 익숙한 작업이었다. 두 사람이 나타나자 궁정인이 음악을 멈추게 하고는 쩌렁쩌렁 외쳤다.
“엘다임 제국 제1 황녀, 카예나 힐 전하께서 드십니다!”
그와 함께 카예나의 등장을 알리는 새로운 연주가 웅장하게 그랜드 홀을 꽉 채웠다. 음악에 맞춰 카예나가 나선형 계단 앞에 서자 열화와 같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매력적인 미소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레제프 역시 기쁜 얼굴로 카예나를 에스코트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들은 홀 중앙까지 걸어 나갔다. 두 사람이 텅 빈 홀 중앙을 차지하자 연주가 멈췄다. 환호와 박수도 멎어 들었다.
레제프가 먼저 카예나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카예나도 드레스 자락을 잡고 춤을 시작할 자세를 잡았다. 그때 카예나의 귓가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눈동자만 살짝 움직여 누구인지 확인해 보았다. 은빛 머리카락을 완전히 뒤로 넘긴 채 의자에 나른하게 앉아 술잔을 든 예이스터가 보였다. 그는 그들을 보며 킬킬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누님.”
레제프는 카예나의 시선이 자신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해 있자 나직하게 주의를 끌었다. 저딴 개새끼에게 누이가 눈길 하나 주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그들은 경쾌하고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완벽한 호흡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작게 속삭였다.
“난 이 곡이 가장 좋더라.”
카예나는 이 곡이 지겨웠다. 자신은 이 박자에 맞춰 물리도록 춤췄었다. 상대는 딱히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그중 전남편도 있었으리라. 춤을 추는 건 이제는 업무에 지나지 않았다.
레제프는 카예나가 기억보다 훨씬 매끄럽게 춤추면서도 조금도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아해졌다. 그는 일부러 카예나의 허리를 휙 당기며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자 인형처럼 무감했던 시선이 의아하게 저를 향했다.
“왜 그러니?”
“……실수했습니다.”
“네가 이런 실수도 하는구나.”
카예나의 웅얼거리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신경을 쿡 찔렀다. 눈에 담고 있어도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카예나를 종잡을 수 없었다. 그게 못내 불안했다.
연주가 끝나고 사람들은 멋진 춤에 환호했다. 카예나는 그저 의무적으로 미소지으며 화답하다가 문득 군중 속에서 라파엘로를 발견했다.
“아.”
그 순간 향기가 훅 끼칠 듯 미소가 꽃처럼 만개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라파엘로 역시 눈매를 사르르 휘며 부드럽게 웃었다.
카예나가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레제프가 손을 탁 쥐었다.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당연히 두 번째 상대와 춤을 춰야 했으니 라파엘로에게 갈 생각이었다. 한데 레제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레제프?”
“라파엘로? 그에게 가려고요?”
“그건…….”
그때였다.
“오오, 고귀하신 황녀 전하!”
오페라 배우처럼 과장되게 드높인 목소리에 그들의 시선이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예이스터 하인리히가 두 팔을 벌린 채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레제프는 싸늘하게 식어있던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 예이스터 하인리히가 감히 존엄하신 국정 대리인, 카예나 힐 전하를 뵙습니다. 무한한 영광이 전하를 비추기를.”
예이스터는 위스키 냄새를 풍기며 지나치게 연극적인 동작으로 예를 갖췄다. 인사받는 사람을 외려 우습게 만드는 짓거리였다. 이건 술주정이 아니라 제정신으로 하는 짓이었다.
카예나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더 늘리며 매끄럽게 웃었다.
“오랜만이군요, 대공자.”
예이스터는 그녀가 공대를 쓴 점에 이채를 띠었다. 원래라면 예이스터가 황족도 아닌 주제에 가당치도 않다며 예에 맞지 않게 말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변했네. 눈빛도, 분위기도…….’
묘한 흥분감이 발끝부터 짜릿하게 퍼졌다. 그는 이 여자가 기대 이상으로 자신을 즐겁게 해 줄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예이스터가 한쪽 입꼬리를 휙 들어 올리며 느른하게 말했다.
“지난번 제게 황족의 피도 흐르지 않는 가짜 주제에 뻔뻔스럽고 염치없다고 말씀하셨던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카예나는 조금도 어긋남 없는 미소를 유지한 채 기억을 더듬었다.
‘……음, 내가 그런 심한 말을 대놓고 했던가?’
기억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물론 비슷한 말을 몇 번 했던 것 같은 기억은 났다. 아무래도 그런 폭언이 일상이었기에 딱히 기억에 남지 않았던 모양이다.
예이스터가 금빛 눈동자에 탐욕을 가득 담아 카예나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하며 말했다.
“이후로 전하를 뵐 날만 고대하였더니 이렇게 눈빛만 마주해도…….”
그곳이 달아오르지 뭡니까? 예이스터는 신사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미소로 뒷말을 삼켰다. 그러나 이미 말투에서부터 낯 뜨거운 뒷말이 이어졌을 것을 예상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아,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때 저는 전혀 기분 상하지 않았거든요.”
낮고 끈적한 음성이 카예나를 휘감아 삼킬 듯했다. 그 묘한 분위기를 바로 곁에 있던 레제프가 모를 수 없었다.
‘이 더러운 새끼가…….’
주제도 모르는 벌레가 감히 카예나와 접촉하고 있는 것도 못 봐주겠는데 감히 카예나를 넘보고 있기까지 했다.
“예를 지키십시오, 대공자.”
레제프가 으르렁거리듯 경계하자 예이스터는 킥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남들은 차마 짝퉁 황족이라도 제 앞에서는 절대 하지 못할 말을 면전에 대고 거침없이 말씀하셨던 그 권력이 탐났을 뿐입니다.”
그러고는 황금으로 만든 반지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었다.
“이건 제가 황녀 전하께 드리는 생신 선물입니다.”
반지를 본 레제프는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그는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며 물었다.
“대공자. 누님께서 왜 그런 반지를 받아야 합니까?”
“‘그런 반지’라니요? 우리 황녀 전하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 디자인입니까?”
반지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누가 보아도 청혼용 반지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카예나는 그에게 붙잡혀 있던 손을 빼내며 물었다.
“우리가 생일 선물로 결혼반지를 주고받을 사이였던가요?”
예이스터는 능청을 떨었다.
“아, 오늘 누가 가장 화려한 반지로 프러포즈하는지 내기하는 연회가 아니었습니까?”
레제프가 그에게 날 선 목소리로 경고하려 했을 때였다.
“푸흣!”
돌연 카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이들을 염탐하고 있던 귀족들도 순간 어리둥절할 정도로 유쾌한 웃음이었다.
예이스터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눈을 치떴다.
“……뭔가 재미있으신가 봅니다, 황녀 전하.”
“아아, 조금.”
카예나는 이런 식으로 제 힘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이를 상대해 본 경험이 상당했다.
부황, 레제프, 헨버튼 길리안, 김 전무, 그리고.
“다 너 때문이야!”
그래.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살해했던 그 남자까지도. 비단 카예나를 힘으로 찍어 누르려 했던 자가 그들로 끝은 아니었다.
참 우스웠다. 이제 그녀에게는 마법이라는 완전한 무력이 있다. 시공간을 지배하는 마법으로 예이스터가 마실 술에 당장 독을 풀어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거기다 엘릭서라는 위기를 대처할 수단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두 번째 삶에서 이미 이런 남자들을 무릎 꿇렸던 경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일까? 이런 식으로 대놓고 하는 겁박은 오히려 재미있기까지 했다. 그녀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재미있는 해석이네요.”
그러고는 중얼거리는 듯한 말투로 덧붙였다.
“역시 하인리히 대공자답다고 해야 할지…….”
바보가 아니고서는 그 말이 비꼬는 것임을 모를 수 없었다. 이번에는 예이스터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카예나 황녀는 변했다. 내로라하는 이들이 하나둘 황녀를 중심으로 발정 난 개새끼처럼 구는 것 같더라니……. 황녀는 정신이 나간 것인지, 아니면 비장의 한 수라도 있는 것인지 감히 자신을 애송이 취급하고 있었다. 뒷목이 뻐근해졌다.
‘아아, 미치겠군. 정말로 재미있잖아?’
언제든 폭력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예이스터를 이루는 근본이었다. 그런데 그 여유가 황녀에게서도 느껴졌다. 이건 진짜 힘을 가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위압감이었다.
예이스터가 비릿하게 웃었다.
“저도 진심으로 재미있어지는군요.”
레제프는 예이스터가 카예나를 상대로 야릇한 긴장감을 끌어 올리는 게 끔찍하게 역겨웠다. 감히 제 누이를 뱀같이 바라보는 예이스터의 노란 눈을 파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것도 아니면 실내 석고 장식에 머리를 찧어 버리든가.
예이스터는 레제프가 은근히 살기를 내보이자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었다. 그는 보란 듯이 레제프의 신경을 제대로 긁어 버리려 과장해서 제 이마를 짚고 말했다.
“이런, 제가 아직도 전하께 춤 신청을 하지 않았군요.”
예이스터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었다.
“부디 이 손을 잡아 주시는 영광을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황녀는 동생과 춤을 겨우 한 번 추었다. 곡이 두어 번 바뀌기 전까지는 댄스 파트너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동안에 춤 신청을 거절하는 것은 상대에게 모욕을 주는 행위였다. 대공자 세력과 대놓고 척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와 춤 한 번 추는 게 딱히 특별한 의미로 해석될 일도 아니었다. 이게 두 번째 춤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카예나는 예이스터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황위 계승권자인 레제프와 춤을 추고 난 직후에 예이스터와 춤을 춘다면 그들을 동급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지.’
카예나는 레제프를 힐끗 보았다. 분노로 돌아 버리기 직전의 눈빛이었다. 거절할 수도 없지만 수락할 수도 없는 댄스 파트너 요청이었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돌려 예이스터를 바라보았다. 예이스터는 카예나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자 다시금 묘한 흥분을 느꼈다.
자, 이제 어떻게 나올 거지? 그는 카예나의 무감한 눈빛이 제게 닿는 느낌을 즐기며 눈매를 야살스럽게 휘며 도발했다.
“어른들끼리 은밀하게 나눌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나직하게 말을 덧붙이는 목소리가 어딘가 음탕하기까지 했다. 레제프는 ‘어른들끼리’라며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예이스터의 작태를 더는 참아 주기가 어려웠다.
“하인리히 대공자.”
그가 삐딱한 시선으로 싸늘하게 예이스터를 불렀다.
“……춤을 신청 중인 신사를 방해하시는 겁니까, 황자 전하?”
당장 드잡이질이라도 할 분위기에 예이스터가 혀로 입술을 쓸었다.
카예나는 지금 레제프의 심기가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을 것이며, 예이스터는 이 상황을 몹시 즐기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대체 여기가 그랜드 홀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이들을 지금 중재하지 않으면 황녀의 성년식 첫날부터 상당히 볼만한 추태가 벌어지리라.
카예나는 혹여라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 봐 미리 조치해 둔 일이 있었다. 그녀가 막 입술을 떨어뜨렸을 때였다.
“샤프롱이 자리를 비웠을 때 춤 신청을 하는 것은 신사가 할 일이 아닌 것 같군요.”
카예나가 뭐라고 말하기 전, 어느 귀부인이 이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뒤를 돌자 상당히 뜻밖의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인?’
라파엘로의 모친, 노아 키드레이 대부인이 냉엄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카예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대부인이 어째서 날 돕는 거지?’
이 연회장에서 예이스터에게 이런 식의 지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지적할 수 있는 극소수 중 하나가 바로 노아 대부인이었다. 그렇다 한들 그녀가 굳이 이 자리에 끼어들어 다른 이들의 시선을 감수하면서 카예나를 도울 이유가 없었다.
노아 대부인은 남들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얼굴로 카예나를 향해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성년을 축하드립니다, 황녀 전하.”
“감사합니다, 대부인.”
레제프도 뜻밖의 인물이 끼어들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노아 대부인은 특유의 서늘하고 건조한 눈빛으로 예이스터를 바라보았다.
“전하의 샤프롱이 자리했을 때 다시 춤을 신청하는 게 좋겠군요, 하인리히 대공자.”
“뭐, 연회는 기니까요.”
예이스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지나가던 시종을 불러 쟁반에 탁 소리가 나게 반지 케이스를 던져 버렸다. 카예나에게 선물하려던 그 반지였다. 상당히 무례하고 오만방자한 태도였으나 카예나는 딱히 문제 삼지 않았다.
예이스터는 순순히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며 카예나를 향해 인사했다.
“그럼 다음번에 저와 춤을 춰 주시길. 전하께 궁금한 게 몹시 많아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거든요.”
예이스터는 카예나를 향해 윙크하고는 미련 없이 몸을 휙 돌렸다. 카예나는 그가 궁금해할 만한 것이 무엇일지 잘 알았다.
‘에반스 가문의 대마초 농장 말고 더 쓸 만한 정보가 있는지 궁금하겠지.’
더 쓸 만한 정보는 있지만, 그에게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카예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예이스터가 완전히 물러나자 노아 대부인의 시선이 이번에는 레제프를 향했다.
“황자 전하께서도 인제 그만 황녀 전하와 따로 행동하시지요.”
“…….”
레제프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대부인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제 할 말만 했다.
“남매간의 우애가 돈독해 보이는 것은 좋으나, 첫 춤도 끝났으니 귀족들의 시선을 분산해 주는 게 황족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그녀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레제프는 느릿하게 카예나를 에스코트하고 있던 손을 떨어뜨렸다. 전혀 내키지 않아 마지못해 한 태도였다.
대부인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연회의 주인공인 카예나를 샤프롱도 아닌 남동생이 단속하려 드는 것은 결코 좋은 그림이 아니었다. 카예나는 예이스터 때문에 예민해졌을 레제프를 달래듯이 온화한 미소로 그를 다독였다.
“오늘같이 보기 어려운 손님들이 많을 때 안면을 터놓는 게 어떻겠니?”
“……알겠습니다.”
레제프까지 자리를 비키자 카예나는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노아 대부인을 향해 인사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대부인.”
그러자 대부인이 말했다.
“도움이랄 것도 없습니다. 샤프롱으로 레이디 카트린을 지정하셨다고 들었는데…….”
노아 대부인의 시선이 주위를 한차례 훑다가 다시 카예나에게 돌아왔다.
“일부러 자리를 비키게 하셨지요?”
카예나는 말없이 웃었다. 노아 대부인의 말대로였다. 지금 카트린은 황제를 알현 중이다. 그 사실은 곧 연회장 내부에 퍼져 나갈 테고 사람들은 뒤늦게 등장하게 될 카트린을 절대 경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여전히 황제의 총애가 정부에게 기울어 있다는 사실에 몸을 사릴 테니까. 그리고 카예나가 그런 정부를 반갑게 맞아 주면 그간의 논란과 불순한 눈빛은 완전히 종식될 것이다. 비공식적인 황족이 탄생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더불어 샤프롱이 없다는 핑계로 예이스터 같은 자의 접근도 차단할 수 있지.’
그 계산을 노아 대부인도 이 짧은 순간에 다 파악하고는 카예나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오늘 성년이 된 젊은 황녀가 보통 깊은 수를 쓰는 게 아니었다. 대부인은 황녀의 눈빛을 포함해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눈앞의 단단해 보이는 황녀와 달리 선황후는 상당히 유약한 사람이었다. 황후가 된 이후로는 항상 표정이 어두웠고 사교 모임도 자주 가지지 않았다. 하멜 영애였던 시절에도 친구가 많은 활달한 성격은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했었다.
‘그런 여자가 설마 그이와 어린 시절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고 지저분하게 이어 갔을 줄은 몰랐지만.’
레오 키드레이, 아니, 레오 프란시스는 이제 이혼하게 되어 자신의 남편이 아니니 제 인생에서 완전히 털어 내 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자식 문제는 그렇지 않다. 노아 대부인은 레제프가 선황후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임을 알고 있었다.
‘레오는 아직도 모르지만.’
대부인은 황가와 지저분하게 얽히는 것은 10년 전으로 족했기에 모르는 척 덮어 버렸다.
“저야 황녀 전하께서 이미 깔아 놓으신 판에 훈수 한 번 두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정녕 도움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 늙은이의 청을 하나 들어주시면 좋겠군요.”
카예나는 노아 대부인의 말에 상당히 놀라고 말았다.
‘별것 아니기는 해도 이런 정도의 저자세조차도 취할 사람이 아닌 걸로 기억하는데.’
“말씀하세요, 대부인.”
“전하의 성년식을 기념하여 장미 농장을 하나 사들였습니다.”
“……네?”
“그 농장의 수익금은 전부 전하의 이름으로 자선 사업에 사용할 예정입니다. 부디 받아 주셨으면 하는군요.”
카예나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청에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차마 장미 농장의 부지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농담으로라도 묻지 못했다.
대부인의 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곳은 새로운 교배종을 만드는 연구도 같이 하는 곳입니다.”
카예나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대부인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덧붙여 설명했다.
“전하의 이름을 딴 새로운 종의 장미를 만들까 해서요.”
“……의미 깊은 성년 선물입니다. 감사합니다, 대부인.”
“별말씀을요. 새로운 장미가 완성되면 전하의 장미로 된 정원도 지을 생각입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의미가 있지요.”
“…….”
‘이 정도면 집안 내력 아니야?’
이쯤 되니 이들 모자의 씀씀이에 질릴 지경이었다.
노아 대부인은 여전히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꽃잎의 색은 어떤 게 좋으신가요?”
카예나는 얼결에 대답했다.
“분홍색이 좋을 것 같아요.”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분홍색 꽃잎의 새로운 장미를 만들도록 하지요.”
카예나는 예상치 못한 선물 공세에 혼란스러웠다가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내게 이러는 이유가 뭐지?’
노아 대부인은 아들이 준비한 성년식 선물인 황립 아카데미 건물 기부에 묻어갈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적당히 생색낼 정도의 예술품이나 보석을 준비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키드레이 공작가에는 그만한 귀중품들은 넘쳐날 테니.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카예나는 이것이 무언가를 위한 서론이 아닐까 의심했다. 예측은 정확했다.
“새로운 장미 품종을 개량하고 자선 사업도 진행해야 하는데, 하다 보니 일의 규모가 꽤 커지더군요.”
사실 작정하고 일을 키운 것이지만 그녀는 아닌 척 능청을 떨었다.
“이 사업을 황실과 저희 공작가에서 공동으로 주관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전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게 바로 노아 대부인이 계획한 진짜 본론이었다. 성년식 선물을 핑계로 황실과 얽히겠다는 선포. 정확히는 카예나와 내밀한 관계를 다지기를 원하는 것이겠지만.
‘황위에 뜻이 있음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이런 제안이라니.’
카예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뜻밖의 제안이라 당혹스럽군요.”
사실 이건 카예나에게 상당히 좋은 제안이었다. 카예나에게는 딱히 인망이랄 것이 없었다. 그간 제국민들을 위한 어떤 외부 활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난 독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그녀의 아름다움이 알려져 흥미를 이끈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간 대부인은 황실과 절대 엮이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변한 이유가 뭐지? 카예나는 그 점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방어적으로 에둘러 말했다.
“제 생각이랄 게 있나요. 저야 폐하를 대신하여 임시로 국정 업무를 도맡고 있을 뿐인걸요.”
대부인이 피식 웃었다.
“그러시다면 더 솔직하게 말하지요. 저는 전하께서 그리는 그림에 키드레이 공작가가 있어야겠다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하께 줄을 대겠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대부인.”
카예나는 재빠르게 마법으로 대화 내용이 다른 이들에게 잘 들리지 않도록 처리했다.
많은 시선이 이곳에 쏠려있었다. 그들은 몹시 흥미로워하며 이곳을 관전 중이었다. 누군가의 돈을 받은 시종이 근처를 지나다니며 말을 전하고 있을 게 뻔했다.
말소리를 아예 차단하는 것은 위화감이 들게 할 수 있다. 이 정도로만 조치해도 시종들에게 둘의 대화 소리가 온전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를 지지하겠다고 이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대부인답지 않은 방식이야.’
은밀히 나누어도 부족할 대화인데 대놓고 접촉하다니. 게다가 카예나와 동등한 입장의 동맹을 제안했다. 그 말은 만약 그 손을 잡는다면 카예나가 레제프와 하인리히 세력에 속하지 않는 제 3의 세력, 즉 중립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었다.
‘누가 황제가 되어도 나로 인해 중립 세력이 안전할 수 있게끔 나를 레제프에게서 독립시킬 생각인 걸까?’
카예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는 아무런 세력도 없습니다. 레제프가 황제가 되어, 황제의 유일한 누이가 되더라도 종이호랑이겠지요. 그런 저에게 줄을 대봤자 본전도 찾지 못할 것 같은데요?”
대부인은 카예나의 가벼운 도발에 피식 웃었다.
“세력 같은 것이야 만들면 그만입니다. 전하께서 그 사실을 모르시지 않을 것 같은데, 제 생각이 틀렸나요?”
대부인은 질질 끌 생각이 없었기에 곧바로 직구를 던졌다.
“전하께서 무엇을 준비하시든 이제는 수면 위로 올라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결코 혼자서 할 수 없지요.”
지금까지 대부인은 레제프의 손도, 하인리히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개인적인 은원도 있었지만, 그들에게서 특별히 미래를 점칠만한 가능성이라고 할만한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황녀가 보이는 행보가 달라졌다. 그리고 아들도 태도가 돌변했다.
‘다음 대 황제는 황녀의 손에 달렸다.’
그녀는 날카로운 직감을 느꼈다.
대부인은 과거에 매여 사는 것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케케묵은 응어리는 이미 전남편과 이혼하며 반쯤 털어냈다. 이제 과거는 완전히 청산하고 현재를 살아야 할 때였다.
‘이미 라파엘로가 잘하고 있는듯하지만, 내가 황녀의 손을 잡는 것은 다른 이야기지.’
“아무리 유능한 사냥꾼이라고 해도 두 마리 토끼는 한 번에 잡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대부인은 혼자서 정계와 사교계를 모두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을 에둘러 말했다.
카예나도 그 점은 인정하는 바였다. 원래는 사교계의 눈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기에 올리비아를 키워줄 생각이었지만….
‘만약 키드레이 대부인이 그녀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사교계를 휘어잡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기는 하지.’
“재미있는 말씀이시군요.”
문득 카예나는 제 주변으로 술잔을 든 시종들이 점점 자주 지나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으로 소리를 흐릿하게 흩트려놓기는 했지만.’
슬슬 대화를 마무리하고 다음을 기약해야 할 때였다. 그녀는 마법을 거두며 지금까지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환하고 맑은 미소로 말했다.
“샤프롱이 없는 동안 저를 보살펴주시다니, 대부인께서는 참 다정한 분이세요.”
카예나는 어떤 종류의 대화가 오갔는지 가늠하지 못하도록 샤프롱을 들먹이며 남들이 둘을 바라보는 시선의 농도를 낮췄다.
노아 대부인은 카예나의 처세에 흡족함이 담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네.’
그녀도 이 근처로 유달리 시종이나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고 있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이 대화를 엿들은 자들은 그제야 황제의 정부가 여태껏 보이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기며 화제를 바꾸게 될 것이다.
‘고작 스물 된 황녀님이 나를 이렇게 감탄케 하다니.’
까다로운 완벽주의자인 노아는 누군가를 한심하게 여기지 않고 이토록 거슬림 없이 대화할 때가 몹시 드물었다.
대부인은 저도 모르게 카예나와의 대화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노아 대부인이 말했다.
“손님도 많은데 제가 전하의 시간을 너무 뺏은 것 같군요.”
“그렇지 않아요. 제게 들려주신 이야기들 모두 재미있었습니다.”
카예나가 넌지시 덧붙였다.
“조만간 공작님께 소식을 알려드리죠.”
대부인과 손을 잡겠다고 말한 것과 다름없었다.
노아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카예나는 별로 긴 시간 대화한 것도 아닌데 진이 빠졌다.
‘예이스터부터 대부인까지, 쉬지 않고 신경 써서 대화하느라 그런가.’
그녀는 이후로도 여러 귀족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하, 혹시 꽃마차는 보셨습니까?”
“아까 장미꽃을 한가득 담은 마차가 들어오던데 어느 가문에서 보냈는지 들으셨나요?”
“황녀 전하, 꽃마차가…….”
카예나는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꽃마차’였다.
심지어 국정 대리인에 대한 것보다도 꽃마차를 보낸 사람이 대체 누구냐는 질문을 훨씬 많이 받았다.
“키드레이 공작가에서 보낸 꽃마차더군요. 향수도 있던데 요즘 유행하는 성년식 선물이라 그렇게 보낸 것 같았어요.”
사람들은 라파엘로가 꽃을 보냈다는 말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라파엘로가 정말 그런 로맨틱한 선물을 했다고?’
라파엘로가 정말 부마 후보로 뛰어들기라도 하려는 걸까?
귀족들은 카예나에게서 사랑에 빠진 여자의 징조 따위를 찾아내려 애썼으나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샤프롱이 보이지 않네요?”
누군가의 물음에 카예나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카트린이 부황을 알현 중임을 이들도 들어서 알고 있을터.’
굳이 대답할 필요 없이 이렇게 미소만 짓고 있어도 그들은 알아서 상상을 키워나갈 것이다.
카예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에게 축하받다가 외숙부인 조나단 경과 맞닥뜨렸다.
“오, 우리 황녀 전하!”
그는 몹시 감격한 얼굴로 외쳤다.
“어서 오세요, 외숙부님.”
“어휴, 가장 먼저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어찌 이리도 사람이 많은지!”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카예나의 유명세가 마치 자신의 자랑인 양 여기는 얼굴이었다.
“전하를 봬야 하는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인사하느라 한세월이 걸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 말은 엄살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랜드 홀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춤출 공간도 협소할 정도였다.
“아직 레이디 카트린이 오지 않았군요?”
조나단은 카트린의 부재를 몹시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
“폐하를 오랜만에 뵙느라 대화가 길어지는 모양이네요.”
“허허,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이렇게 가족이 화목해야 바깥일도 잘 풀리는 법이지요.”
조나단은 그렇게 말하며 이곳으로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레제프를 힐끗 보았다.
카예나도 덩달아 시선을 돌려 떨어진 곳에서 유력 귀족에게 둘러싸인 레제프를 보았다.
레제프는 누이와 눈이 마주치자 천사처럼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카예나도 같이 웃어 보였다.
레제프의 주변에 있던 젊은 남자들이 술렁거렸다. 누군가는 카예나에게 완전히 매료된 것처럼 넋을 잃었고 누군가는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그러자 레제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원래의 레제프라면 이런 반응에 비웃음을 터뜨리며 카예나를 자신이 있는 자리로 불렀을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의 인형이 얼마나 아름답고 멍청한지 과시했겠지. 그러나 지금의 레제프는 카예나를 부르기는커녕 귀족들을 끌고 자리를 옮겨버렸다.
‘결혼을 해도 된다는 건지, 안된다는 건지 확실히 해야 할 텐데.’
레제프는 교활하게 연기를 잘하는 아이지만 아직 감정을 다스리는 일에는 노련하지 못했다. 첫 번째 삶을 떠올려보면 사실 그건 황제가 된 후에도 썩 잘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잘된 일이지. 저렇게 생기지도 않을 부마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세력을 다듬어야 해.’
카예나는 다시 조나단에게 시선을 돌렸다.
“참, 하멜 백작님은 여전하신가요?”
그녀는 일부러 외조부의 안부를 물었다. 조나단이 이런 주제를 원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조나단은 백작가 이야기가 나오자 안색부터 달라졌다. 그는 짐짓 애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병세가 호전되기는 어렵더군요……. 그래도 제가 잘 모시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살짝 헛기침하며 말했다.
“크흠, 그… 백작위 계승은 언제쯤 이뤄지면 좋을지요?”
“아아.”
조나단은 카예나가 썩 흥미롭지 않다는 듯이 반응하자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가문 내에서 이래저래 잡음이 좀 많습니다.”
그간 조나단은 황녀가 어서 자신을 지지해주기를 바라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의 혈족들에게 황녀가 자신의 계승을 지지해주기로 했다며 말해뒀을 게 뻔했다.
‘하지만 백작위 계승권을 지닌 게 조나단만은 아니니까.’
혈족들은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으니 점점 그를 의심하고 추궁하고 있을 거다.
카예나는 상황이 훤히 짐작되었으나 모르는 척 시치미 뗐다.
“어머, 가문 내에서 계승에 대한 의견이 합치되지 않고 있나요?”
조나단이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 쳤다.
“아, 아니, 합치되지 않는다니요! 그게 아니라 그저 다들 가문을 위해 한마디씩 내놓고 있다, 이런 뜻이지요.”
카예나는 마치 농담이라도 건네는 듯한 가벼운 어조로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그랬군요. 저는 또 백작이 되어 차지할 권익에 눈이라도 멀어 혈족끼리 싸우는 줄 알았지 뭐예요.”
“하, 하하…….”
조나단은 억지로 웃고 있었지만, 속이 끓었다.
‘미치겠군. 하나뿐인 외가 친척을 챙겨줘도 모자랄 판에 뭘 뜸 들이는 건지. 가뜩이나 레제프 황자 때문에 골치 아픈데.’
카예나는 날이 흐를수록 더 빠르게 거물이 되고 있었다.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황녀의 총애를 받는 자가 다음 세대의 주인이 된다’는 말도 떠돌았다. 그것은 현 시류를 정확히 읽은 말이었다. 기성세대는 하나같이 늙고 병들었고 젊은 후계자들이 하나씩 가문을 계승 중이었다.
조나단은 이 시기에 하멜 백작가를 계승하지 못하면 그대로 도태될 것을 알았다. 그러니 카예나를 어서 구워삶아 제 옆에 끼고 호가호위해도 모자랄 판국이다. 그런데 카예나와의 대화에서 좀처럼 주도권을 잡을 수가 없었다. 번번이 고작 딸뻘인 그녀에게 말려들기만 했다.
“그래도 외숙부께서 그리 고생하시는데 내부에서 말이 나온다니 제 마음이 편치는 않네요.”
“그, 그렇지요? 역시 이 외숙부를 생각해주는 건 우리 전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외숙부님.”
카예나가 조나단에게 빙긋 웃으며 물었다.
“새롭게 가문을 이어받으실 분께서 설마 ‘약점’까지 그대로 승계하시겠다는 건 아니지요?”
조나단은 그대로 입술을 조개처럼 꽉 다물었다. 카예나가 말한 ‘약점’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는 암시장을 들먹이고 있었다.
“이미 그것은 하멜 백작가의 명확한 약점이 되지 않았나요? 레제프에게 노출된 이상 그것은 계속 족쇄가 될 거예요.”
카예나는 우아하고 품위 있게 돌려 말하며 외숙부를 협박했다.
“제가 타일러보기는 하겠지만, 아시다시피 그 아이가 누구 말을 들을 애도 아니고 워낙 사람을 소모품으로 보잖아요.”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한 소모품이라는 말에 뼈가 있었다. 조나단은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암시장에서 나오는 수수료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그곳의 물품들은 모두 장물이다 보니 일반적인 거래가 불가능했고, 암시장의 주인은 원하는 대로 수수료를 책정했다. 그렇게 챙긴 수수료가 하멜 백작가의 숨겨진 힘인데 내려놔야 한다니.
“하멜 백작가가 레제프나 대공자의 손에서 언제까지 그걸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조나단은 여기서 선택해야 함을 깨달았다. 암시장을 황녀에게 내어주고 백작위를 계승할 것인지, 아니면 억지로 버티며 암시장을 들고 갈 것인지.
‘황녀에게는 군대가 있지. 게다가 장차 황제의 유일한 누이가 될 거고. 만약 이변이 생겨서 하인리히가 황위를 계승하더라도, 정통성 문제 때문에 황녀를 아내로 삼으려 할거야. 그에 비하면 암시장은 레제프 황자에게 노출되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되어버렸고.’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조나단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귀한 조언이십니다. 과연 뛰어난 통찰력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문제는 전하께 맡기면 되겠지요?”
암시장을 넘긴다는 말에 카예나가 부드러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시고 앞으로 하멜 백작가를 잘 이끌어주세요.”
조나단은 몹시 정중한 태도로 카예나에게 예를 갖췄다.
“충심을 다 하겠습니다.”
그 무렵 연회장 안은 새로운 등장인물로 인해 점차 술렁이기 시작했다. 카예나는 굳이 뒤를 돌아 확인하지 않아도 누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녀는 조나단이 붙잡기 전에 자리를 이동했다. 제 샤프롱인 카트린을 맞이하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카트린이 황제의 침실이 있는 방향에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몸에 걸친 드레스나 보석은 전성기 시절과 비교해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원래라면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 카예나보다 늦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흠 잡힐 일이었다.
‘다만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정부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카예나는 오늘 일부러 부황을 찾아가지 않았다.
카트린이 성년식 첫날부터 혼자서 황제를 오랫동안 만나고 왔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서였다.
카예나가 환하게 웃으며 카트린을 맞이했다.
“이야기는 잘 나누셨나요?”
카트린은 말없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착잡함이 깃든 조금도 기쁜 기색이 없는 그런 미소였다.
아마 병든 황제를 보니 제 아들의 안위를 지키기 어렵겠다는 확신이 들었으리라. 카예나는 마음이 복잡할 그녀에게 굳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른 모양인지 카트린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베풀어 주신 것들에 어찌 보답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카트린은 자신에게 해준 일들이 얼마나 이례적이며 또 파격적인 대우인지 잘 알았다.
“보답은요. 가족이잖아요.”
카트린은 작은 가방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이델이 꼭 전하께 전해달라더군요.”
“이델이요?”
보아하니 생일 선물인 모양이었다. 카예나는 의아하게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달 모양 펜던트가 달린 가느다란 팔찌가 들어있었다.
카예나는 사춘기 소년이 고심해서 골랐을 장신구에 웃음 지었다.
“연회가 끝나고 작은 파티가 열릴 때는 이델도 동행해서 와주세요. 그때쯤이면 이델에게 줄 선물도 도착할 것 같네요.”
“그러겠습니다, 전하.”
샤프롱이 등장하니 슬슬 남자 귀족들이 접근하려는 게 느껴졌다. 대외적으로 이 연회는 카예나의 결혼을 위한 연회였으므로 남자들은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두 번째 춤 상대로 라파엘로만큼 적절한 사람이 없는데.’
으레 가족을 제외한 첫 춤 상대와의 결혼 가능성을 좀 더 높게 점친다. 지금까지는 황녀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기에 다들 두 사람의 결혼을 점치기는커녕 우습게 여기고 은근히 조롱했다. 그러나 최근 납치사건이나 오늘 황궁으로 들어왔던 아름다운 꽃마차를 보라.
라파엘로가 카예나의 부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걸 다 떠나서 그가 아니라면 두 번째로 춤추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나도 참 웃기네.’
카예나는 무심코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마법의 힘을 손에 넣고 확실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전이었다면 혹시라도 제어하지 못할 변수를 경계하며 몸을 사렸을 텐데…….’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권력이라는 건가.”
“…?”
곁에 있던 카트린이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예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빙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저는 테라스에서 좀 쉬어야겠어요.”
일단 자신을 귀찮게 할 남자들을 피할 생각이었다.
“동행할까요?”
“아니에요. 어차피 전용 테라스로 갈 거니까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카예나는 황족 전용 테라스로 향했다. 그랜드 홀 가장 안쪽에 있는 그 테라스는 기사들이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었다.
커튼을 걷어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해가 짧아 하늘이 가물가물했다. 수많은 시선과 정치적인 대화들에 예리하게 벼려놓았던 신경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곳은 일부러 접근하지 않는 이상 테라스에 누가 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확인할 수 없는 위치였다. 황족들이 연회 중에 마음에 드는 이를 데려와 비밀리에 정사를 하려고 만들어진 장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폐적인 목적과 달리 은밀하고 아늑했다.
테라스 앞에는 물놀이하며 옷이 젖게 할 수 있는 분수대도 있었고 시야를 차단하는 키가 높은 덤불도 있었다. 문제라면 잘생긴 남자도 하나 있는 게 문제였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