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22
악녀는 마리오네트 20장. 조력자들(22/33)
20장. 조력자들
라파엘로는 성년식 연회에 참석하기 전날, 신전을 방문했다.
“반갑소. 데니안 사제.”
그의 인사에 데니안 사제는 고요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그들은 스테인글라스에서 빛이 쏟아지는 경건한 예배당으로 갔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이 사원을 이용하는 사람이라고는 허튼 미신을 믿고 오는 자가 전부였기다.
라파엘로는 성호를 긋고 예배당 가장 앞자리로 갔다. 사제도 조그마한 의자를 끌고 와 라파엘로의 앞에 앉았다.
“차라도 대접하고 싶지만 마땅치 않은 장소라 이해해주십시오.”
라파엘로는 상관없다고 말하며 본론부터 이야기했다.
“내게는 어느 세력에도 결탁하지 않은 청렴한 고위 사제의 도움이 필요하오.”
데니안 사제의 둥글게 휜 눈매가 살짝 벌어졌다. 사람 좋은 인상으로 보였던 얼굴에 서늘함이 깃들었다.
아마 웃지 않을 때는 상당히 차갑고 냉혹한 인상이리라.
그래, 이런 알짜배기 사원을 운영하는데도 고위귀족 가문을 뒷배로 둔 다른 사제에게 자리를 빼앗기지 않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데니안 사제가 말했다.
“저는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라파엘로는 ‘저는’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사제의 말은 적절했다. 사원은 이미 중립성을 잃고 수도 정계에 깊이 침투해있었다. 거대한 세력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딜레마였다. 그런 와중에도 청렴함을 잃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사원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끌어들일 생각은 없소. 그저 최근 사원의 뜻과 일치하는 일을 데니안 사제께서 발의해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오.”
“그게 바로 정치적인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었다. 발의하는 것 자체가 정치색을 띠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 사원’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라파엘로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하던 데니안 사제는 작게 웃음을 베어 물었다.
“황녀 전하의 안위를 지켜내려는 일입니까?”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한 사람치고는 상당히 정세에 밝았다.
라파엘로의 눈매가 의혹으로 가늘어졌다.
문득 자신의 보좌관이 데니안 사제를 조사하여 올린 보고 내용이 떠올랐다. 제레미가 조사한 바로는, 이상하게도 대대로 대사제들이 이 사원의 고위 사제에게 꼼짝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거기다 데니안이라는 사제, 조금 이상합니다. 꼭 진짜 사람이 아니라 유령 같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작은 사원에서 안분지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사원에 발길 하지도 않고 파벌도 형성하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이 사원을 맡게 된 모든 사제가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수상한 일을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다고?’
라파엘로는 이 사원에 뭔가가 있다고 확신했다.
“이런 사원을 유지하는 데에는 보통의 노력이 들어가는 게 아닌 줄 알고 있소.”
그는 ‘노력’이 사원에 외부 세력이 개입하지 않도록 하는 일인지, 아니면 사원을 정갈하게 유지하는 일을 뜻하는지 알 수 없도록 모호하게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지난번 납치사건의 여파가 분명히 이 사원에 남았을 것 같은데…….”
라파엘로는 일부러 말을 늘어뜨렸다.
둥글게 곡선을 그리고 있던 데니안 사제의 눈매가 곧게 펴졌다. 미소의 질감도 달라졌다. 한 사원의 고위 사제가 가질 인상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서 거칠고 지독했던 짙은 세월의 흔적이 엿보였다.
“황녀 전하의 방문 이후로 대사원에서 뭔가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들쑤셔댄다고 들었소만.”
“시간이 흐르면 잠잠해질 일입니다.”
“하인리히 대공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그래서 키드레이 공작가가 이 사원의 뒷배가 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조금도 에두르지 않은, 귀족적이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차라리 이런 대화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카예나가 없는 곳에서 시간을 쓰는 건 질색이니까.
“원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지원할 수 있소. 이 사원의 자주성을 지켜주는 대신 단 한 번만 나를 도와주면 되오.”
“일회성에 그칠 협력이라는 것을 제가 어찌 믿을 수 있습니까?”
“원한다면 가문을 걸고 공증하지.”
데니안 사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황녀 전하께 품은 마음을 숨길 의지가 조금도 없는 것 같군요.”
“그 사실을 당신이 알아도 뭔가 할 것 같지는 않아서.”
그때 라파엘로의 뒤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걸로는 부족해.”
뭐지? 인기척은 못 느꼈는데?
라파엘로는 눈을 살짝 치뜬 채 뒤를 돌아보았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에 캐러멜색 눈동자의 반듯한 외모를 지닌 남자가 보였다.
“누구지?”
데니안 사제가 그 낯선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굳이 나오지 않으셔도 괜찮았습니다만, 바옐 님.”
“……바옐?”
라파엘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전에 이 사원에서 카예나와 가상의 남편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나왔던 이름이 아니던가?
‘우연인가?’
그러나 바옐이라는 자가 입은 옷이나, 분위기 등 모든 것이 하나같이 범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 눈동자, 전에 본 적 있는 눈빛인데.’
라파엘로는 허리춤으로 손을 내렸다. 여차하면 총이든 검이든 빼낼 참이었다.
“여기 주인.”
“……뭐?”
“저쪽 사제는 내 바지사장이야.”
바옐의 말에 데니안 사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당히 친밀한 사이로 보였다.
“귀족인가?”
“귀족? 뭐, 원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이 사원의 진짜 주인이지만 사제는 아니고 귀족도 아니라.”
라파엘로는 저 바옐이라는 남자가 이 사원이 수상한 이유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사람도 바로 저 바옐이라는 얘기다.
라파엘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스듬한 자세로 서 있는 바옐에게 다가갔다.
바옐은 제 앞으로 다가오는 라파엘로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넓은 어깨부터 길쭉한 다리까지. 굳이 비율이 좋다고 말할 것도 없을 정도였다.
‘요즘 애들은 키가 왜 이렇게 커?’
그도 180cm로 작지 않은 키였으나 라파엘로를 보려면 시선을 들어올려야 했다. 뭔가 진 기분이었다.
라파엘로가 바옐에게 말했다.
“원하는 게 뭐지?”
‘말하는 것도 재수 없네.’
대뜸 원하는 게 뭐냐니. 카예나 황녀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황녀도 이상했는데 이 남자도 꽤 묘하네.’
보통 바옐이 뭐 하는 사람인지, 이 사원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아내려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그런데 라파엘로는 어디서 본 적도 없는 잘생긴 얼굴로 건조하게 원하는 게 뭐냐고만 묻고 있었다. 어느 소설에 나오는 남자주인공 대사인가 싶었다.
‘아니지, 아니야. 보통 저런 소리는 여자주인공이 들어야 할 말이라고.’
바옐은 잡생각을 털어냈다.
“고위귀족은 파트너를 대동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라파엘로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옐은 황녀에게서 확인해볼 일이 있었다.
‘마법을 사용해서 침입하면 간편하겠지만…….’
카예나가 전에 신전에서 했던 이야기를 그도 들었다는 게 문제였다. 가상의 남편을 만들 생각이라며 제 이름을 말했을 때 당장 그녀의 앞으로 튀어나가 미쳤냐고 말할 뻔했었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바옐은 이왕 라파엘로와 협력하는 김에 카예나의 조력자가 되어줄 생각이었다. 그녀의 기구한 운명에 일말의 동정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바옐은 라파엘로가 해줘야 할 부분을 일러주었다.
“당신은 바옐 크로노스의 친구가 되어주기만 하면 돼.”
“…!”
크로노스는 몰락한 왕국, 마드레나 왕조의 성씨였다. 카예나가 계획했던 것과 뜻이 완전히 일치하는 이름이었다.
“그러면 팔라딘을 움직여주지. 어때?”
라파엘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황녀 전하의 사람인가?”
“일단 그렇다고 해두자고.”
바옐은 라파엘로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그래서 친구 할 거야, 말 거야?”
라파엘로는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결혼하겠다고 말한 이름을 가진 남자와 친구라…….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제거해버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카예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불가항력이었다.
라파엘로가 바옐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지.”
* * *
카예나의 생일은 사교시즌이 시작되고 첫 번째로 열리는 가장 큰 연회이기 때문에 참석자가 언제나 많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번 황녀의 생일 연회에 참석한 사람 수는 지나치게 많았다. 황녀가 성년이 되는 생일이며 그간 온갖 풍문이 수도를 휩쓴 탓인지 그랜드 홀은 북새통이었다.
“오오, 키드레이 공작님. 가문 계승을 축하드립니다!”
라파엘로는 이 연회장에서 아마 카예나만큼 축하받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 전에 가문을 계승했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몇 번째인지 모를 악수를 여러 귀족과 나누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연회장으로 들어오기 전, 카예나와 나눈 온기가 아니었다면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으리라.
라파엘로는 어린 시절부터 지닌 결함으로 인해 연회라면 딱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원래라면 아주 느지막한 때에 연회장에 들어와 최대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한시바삐 카예나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의 숨결을 들이쉬고 온기를 느끼고 여전히 무사함을, 이곳에서 잘 버텨내고 있음을 확인해야만 했다. 덕분에 그는 이른 시간부터 성년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각하.”
연회복을 입은 제레미가 라파엘로의 곁에 다가오더니 차가운 물을 건넸다.
라파엘로는 찬물을 들이켜며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려보려 했다.
“잠깐 나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는 제레미의 제안에도 고개를 내젓고 꾹 참아냈다. 곧 카예나가 등장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음악이 바뀌고 카예나가 레제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계단에서 내려왔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도 상태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이 공간에 카예나가 있다는 사실이 그의 기분을 안정되게 했다.
카예나를 바라보아야 살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꼭 자신의 병증 때문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었구나.”
모친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은 완벽한 연회복 차림의 노아 대부인이 보였다. 참으로 모친다운 모습이었다.
“오셨습니까.”
라파엘로의 건조한 반응에도 노아 대부인은 그러려니 했다. 원래 그들 모자 사이는 늘 그랬다.
“장미 농장은 왜 사들이신 겁니까?”
“몰라서 묻니?”
“어머니께서 아무 이유 없이 황녀 전하의 이름으로 자선 사업을 하실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노아 대부인이 난데없는 아들의 간섭에 코웃음 쳤다.
“네 허락이라도 받고 선물을 준비했어야 했단 말이냐?”
“황녀 전하의 안위에 변화가 있을 일이라면 그렇습니다.”
그의 담담한 대답에 대부인의 한쪽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이 애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관심을 내비치던 때가 있었나?’
라파엘로가 누군가를 바라보거나 입에 담을 때 어떤 온기가 스며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심지어 황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표정이란…….
라파엘로가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샤프롱이 보이지 않는군요.”
“…그렇구나.”
첫 번째 춤을 끝낸 카예나에게 예이스터가 접근하고 있었다.
라파엘로는 무심결에 재킷 안쪽을 더듬었다. 총을 끼워두는 자리였다. 저 쓰레기의 접근은 마땅히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목격하고 있노라니 계책을 짜내는 대신 그냥 머리통을 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카예나가 그리는 그림을 망칠 수는 없었다.
“어렵지 않은 부탁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대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아들이 제게 어떤 부탁을 할지 충분히 짐작되었다.
“저 삼파전에 끼어들어 달라는 말이니?”
“그렇습니다.”
“너는?”
“제가 끼어들 그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노아 대부인도 동감하는 바였다. 카예나와 레제프, 대공자가 각축을 벌이는 저 상황에 라파엘로까지 끼게 되면 명백히 세력 싸움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리하마. 너는 상황을 못 본 척 연회장 밖으로 잠시 나가 있는 게 좋겠구나.”
“…그렇겠지요.”
저런 미친 인간들 사이에 카예나를 두고 떠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카예나가 저들을 충분히 다룰 수 있으리라는 계산은 들었다. 모친의 거침없는 성품에 황자나 대공자에게 질 리도 없었고.
그랜드 홀을 나가자 점차 가물어지는 햇살의 알싸한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연회장에 있는 내내 어쩔 수 없이 느끼고 있던 역겨움이 점차 누그러졌다.
그때 바스턴이 그에게 다가왔다.
“데니안 사제가 대사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상당히 빠르네.’
바옐이라는 남자가 정말로 그 사원의 주인이었던 건가. 라파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 바옐 크로노스의 신분을 보증하고 이목을 끌어 줘라.”
“알겠습니다.”
바옐은 몰락한 왕국의 후손이자 라파엘로의 지인으로 둔갑 될 예정이었다.
‘그자가 정말 황녀의 남편이 되지는 않겠지…….’
생각해보면 영 이상한 소문이 붙은 사원의 주인이기도 했다. 카예나와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은 게 그의 진심이었지만 팔라딘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일은 꼭 필요했다. 그들의 무력을 믿어서가 아니라 사원이라는 집단이 가진 권력 때문이었다.
“저….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바스턴이 답지 않게도 약간 가라앉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레오 님께서 수도로 오셨다고 합니다.”
부친은 평생 수도로는 발길 하지 않을 것처럼 굴던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은 알았다. 죽은 황후가 떠오르는 탓이리라. 왜 하필 이런 시기일까? 왜 부친은 자신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곳으로 온 걸까.
라파엘로는 마른세수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말했다.
“사람을 붙여놓아라.”
“예, 주인님.”
탈력감인지 피로감인지 모를 것이 그를 한바탕 휘저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요에 잠기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나는 외부에서 조금 쉬었다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갈 테니 먼저 들어가 보아라.”
그러자 바스턴이 의아하게 물었다.
“휴게실로 가시지 않고요?”
“어차피 거기는 휴게 기능도 하지 못하지 않느냐.”
“그건 그렇지요. 연회가 한창이니 황녀궁 휴게실로 갈 수도 없고…….”
바스턴은 이내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물러났다.
라파엘로는 사람이 없을 만한 곳을 찾아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는 카예나가 변하기 전에는 이 황궁을 마치 제집처럼 자주 드나들었다. 그녀가 매일같이 황궁으로 불러낸 탓이었다. 그 때문에 연회장 근처로 어떤 공간들이 있는지, 사람이 없는 공간은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잘 알고 있었다.
라파엘로는 황족만이 이용할 수 있는 몇 군데의 테라스 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인, 정사를 나눌 때나 쓰는 테라스 근처로 향했다. 황제나 그의 직계 자손이 아니면 그곳을 이용하지 않는데다가 카예나나 레제프는 지금 바빠서 아무도 오지 않을 확률이 컸다. 아마 지금 이 근처에서 이곳만큼 사람이 없는 조용한 장소가 없으리라.
장소의 특수성답게 정원으로 진입하는 길에 지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연회를 앞두고 관리해놓은 모양인지 분수대가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으며 조경도 정갈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연회장의 소음이 이곳까지 들리기는 했으나 마치 먼 곳의 일처럼 느껴졌다. 점차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러나 카예나와 같이 있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당장 그녀가 보고 싶었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어요?”
“…!”
라파엘로가 테라스 쪽으로 휙 돌아보았다.
이건 환영인가? 카예나가 왜 이 테라스에 있지?
“여기 황족 전용 테라스인 거 알아요?”
카예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라파엘로의 발이 저절로 테라스 난간 쪽으로 향했다.
그녀도 난간으로 다가와 아래로 몸을 숙였다. 금빛 머리카락이 마치 동화 속의 머리카락으로 된 밧줄처럼 사르르 내려왔다.
라파엘로는 손을 쭉 뻗어보았으나 바닥에서 테라스까지 높이가 꽤 되었기에 닿지 않았다. 그는 테라스에서 정원으로 연결된 외부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그사이 카예나는 마력으로 주변에 감각을 흩뿌렸다. 누군가의 접근을 바로 알아차리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이곳의 소리를 다른 이들이 못 듣게 하기 위함이었다.
어쩐지 연회장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니, 여기에 있었을 줄이야. 왜 이곳에 왔는지는 어림짐작 되었다. 그 사람 많은 곳에서 계속 부대끼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라파엘로가 카예나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물었다.
“혼자이십니까?”
반드시 혼자여야 했다. 이 테라스의 퇴폐적인 사용 용도 때문이었다.
카예나는 살짝 한숨을 머금은 채로 그에게 말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의 단호한 말에 카예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고는 짓궂게 말했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네요.”
라파엘로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술에 틈을 만들어 냈을 때 카예나가 산뜻하게 말했다.
“농담이에요.”
“위험한 농담을 하시는군요.”
그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었다. 뺨에 닿을 듯 말 듯 뻗어온 손이 뚝 멈추었다. 그게 되레 카예나의 전신을 묘한 긴장감에 휩싸이게 했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장소 탓이야.’
이곳이 하필이면 그런 퇴폐적인 용도의 테라스라, 그래서 라파엘로의 행동이 유달리 끈적해 보이는 것이리라.
카예나는 시선을 슬쩍 피했다.
“연회 중이에요.”
“입술 색이 예쁩니다.”
“…….”
라파엘로는 엄지를 세워 카예나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붉은 입술에 틈이 벌어지며 새빨간 혀가 시야를 범했다. 열기에 휩싸인 하늘빛 눈동자가 당혹스럽게 저를 향하는 게 이토록 사랑스러울 일이던가?
라파엘로는 당장 이 숨을 가득 삼켜 그녀의 입안을 탐하고 싶은 격렬한 충동에 들끓었다.
카예나는 그가 음탕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과 달리 지나치게 반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이상하게 더 야하게 느껴졌다.
“라파엘로.”
그는 몹시도 진지하게 카예나의 말을 경청했다.
“……손을 좀 떼주시겠어요?”
라파엘로는 입술을 야릇하게 쓸어 만지던 것을 멈추더니 그녀의 머리를 장식한 티아라를 매만졌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관조차도 그녀의 탐스러운 금발에 비하면 가치가 퇴색하는 듯했다. 그러니 치워주어야지.
라파엘로는 그것을 벗겨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카예나는 황당해졌다.
“그걸 왜 벗겨요?”
“무거우실 듯하여.”
사실 머리에 보석이 한가득 박힌 티아라를 쓰고 있는 게 무겁기는 했다.
카예나는 그가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신사다움을 잃지 않고 있자 기분이 묘해졌다. 이 사람은 그저 둘이서 달콤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만 긴장한 건가?’
자신만 이 장소에 걸맞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건가?
카예나는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조금 피곤하기는 하네요. 장신구들이 무겁거든요.”
사실 목에 걸린 흉기에 가까운 커다란 목걸이도 벗어버리고 싶었다. 카예나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자 그가 손을 뻗어와 거침없이 벗겨냈다.
툭.
그것도 테이블에 놓자 차르륵 소리가 나며 수많은 보석이 영롱한 광채를 뿌렸다.
“…당신이 내 포장 리본을 풀었네요.”
결혼 시장에 내놓을 황녀를 예쁘게 포장하는 리본. 그 의미가 담긴 목걸이를 라파엘로가 풀게 될 줄이야.
“그럼 이제 선물을 받아도 되는 겁니까?”
“네? ……흡.”
낮게 끓어오르는 목소리에 반응하기도 전, 입술이 겹쳐지며 지금까지 간신히 참아냈다는 듯이 혀가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서로의 타액이 뒤섞였다. 이미 긴장감과 함께 몸이 달아오르며 아랫배가 꽉 조여들었다.
카예나는 그의 가슴팍을 와락 움켜쥐고 뜨거운 숨을 토했다.
라파엘로는 여전히 입술을 겹쳐 꾹 누르고 간지럽게 스쳐 비비다가 축축하게 빨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들어 훌쩍 안아 올렸다.
“흡-!”
카예나가 놀라 그를 콱 붙들었다. 라파엘로는 긴장할 것 없다는 듯이 완벽한 안정감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입술을 지분거리며 야살스럽게 탐했다.
풀썩!
그들은 곧 소파인 척하는 침대에 몸을 겹쳐 누웠다.
“하아…!”
카예나의 갈급한 손이 그의 몸을 감싼 재킷 단추를 풀어냈다. 라파엘로는 얇은 드레스 아래로 느껴지는 날씬한 몸을 움켜쥐자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아, 이곳이 연회장만 아니었더라면.
라파엘로는 제 장갑을 이로 끝을 물어 휙 던져버렸다. 어느새 카예나의 손에 단추가 다 풀린 재킷도 던졌다. 구김이 가면 바스턴이 잔소리하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카예나를 품에 안고 작게 숨을 토했다. 겨울이었다면 새하얀 숨이 허공을 선명히 채웠다가 흩어졌을 게 분명했다. 울렁거리던 속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멀쩡했다. 오히려 기분 좋은 긴장감에 온몸의 감각이 선명하게 깨어났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대체 감정은 얼마나 솔직해야 하며 그것에 얼마만큼 충실해야 하는가?
‘그러고 보면 참 웃긴 일이군.’
누군가와 접촉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자신이라니…….
그는 확실히 카예나라는 사람에게 깊이 중독되어 있었다. 중독이라는 것이 그렇다. 이제는 그간 해왔던 정도로 결코 만족 되지 않았다. 더 깊이, 더 많이 원했다.
‘만약 이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갈증이 좀 사라질까?’
매일 아침,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 키스로 그녀의 잠을 깨우면 좀 괜찮아질까?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는 그녀를 품에 안아 상체를 일으키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이를 세워 깨문다면. 뭐 하는 거냐며 푸스스 웃느라 품 안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몸을 끌어안고 관자놀이에 입을 맞춘다면. 잘 잤냐고 말하는 입술을 집어삼키고 농밀하게 탐하며 얇은 네글리제 속으로 파고든다면. 일으켜 세운 몸을 다시 침대에 겹쳐 눕는다면.
그러면 갈증이 사라질까? 과연 자신은 그것으로 만족할까?
‘그럴 리가 없지.’
그런 달콤한 아침만으로 그의 욕구가 다 채워질 리가 없었다. 그는 카예나만 보면, 아니 그녀의 몸에서 나는 부드러운 향이 코끝을 스치기라도 하면 잘 훈련받은 개처럼 발정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주제도 모르고 그녀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곳이 침실이든, 다이닝 룸이든, 화원이든, 아니면 이런 색정적인 의미의 테라스든.
그는 목덜미를 정성껏 핥고 어깨를 부드럽게 주무르고 아래는 짙게 겹쳐 누르며 입술로 달콤하게 이름을 속삭였다.
“카예나.”
“으응….”
그녀가 화답하듯 저를 더 강하게 끌어안고 타이를 벗기고 셔츠를 벌렸다. 이성은 전혀 남지 않은 채 오직 본능에만 충실한, 짐승 같은 행동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바지 아래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도 그는 자제했다. 작정하고 자신을 어떻게 하려는 모양인지 야한 숨소리를 참지 않는 카예나를 아래에 두고서도.
“하… 제발….”
인내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는 희미하게 목 안을 긁는 소리를 냈다.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자제하고 싶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정도로 폭력적인 탐욕이 지독하게 자신을 괴롭혀댔다.
자신은 이 순간에도 만족할 줄 몰랐다. 욕심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참을 수밖에.
쪽.
그는 간신히 열기를 수습하며 그녀의 부푼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가 떨어뜨렸다.
“…못됐어요.”
카예나는 지금껏 그에게 정신없이 응했다가 달뜬 숨을 내뱉으며 간신히 진정했다. 이성을 되찾으니 경악스러웠다. 나 설마 이 테라스를 있는 그대로의 용도로 쓰려고 했던 걸까? 이건 방만한 악녀 시절에도 하지 않은 대담한 짓이었다.
그때 라파엘로가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쪽.
그는 저를 탓하는 사랑스러운 입술을 눌렀다가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담담히 죄를 청했다.
“저를 때리셔도 됩니다.”
“……기가 막혀.”
그가 이번에는 귓바퀴를 잘근 깨물었다.
움찔!
“당신…!”
카예나는 눈을 샐쭉하게 뜨며 그의 두 뺨을 붙잡고 저를 바라보게 딱 고정했다.
라파엘로는 퍽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카예나는 한쪽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제 마음에 드는 게요?”
“네. 당신 마음에 드는 게.”
그 얼마나 진지한 발언인지.
카예나는 졌다는 듯이 짧게 한숨짓더니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두근. 두근. 서로의 고동이 전신을 부드럽게 울렸다. 서로의 마음을 질펀하게 확인하고 나른한 한때를 보내는 연인처럼 달콤한 접촉이었다.
“이렇게 있으니 좋네요.”
카예나는 저도 모르게 진심을 입에 담았다.
라파엘로는 옆으로 누우며 카예나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금 짙게 마주쳤다.
“저 역시 이렇게 둘이서 있는 게 좋습니다.”
평생 둘만 있고 싶을 만큼. 다른 방해물을 모조리 쓸어 내 깨끗하게 치워버리고서, 그렇게.
그는 다른 자유로운 손으로 카예나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때때로 키스했다.
카예나가 피식 웃자 라파엘로가 따라 웃었다.
“이제 돌아가야죠?”
카예나는 몰라도 라파엘로는 연회장을 비운 지 꽤 오래되었다. 이만 돌아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라파엘로도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더 욕심내지 않고 카예나의 이마에 입 맞추며 말했다.
“시녀를 불러 다시 채비하셔야겠습니다.”
“알아서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동시에 연회장에 돌아가면 이상하게 볼 테니까.”
라파엘로가 몸을 일으키자 카예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직접 셔츠 깃을 정리해주며 타이에 핀을 채워주었다.
“당신도 꼭 모습을 정리한 후에 들어가도록 해요.”
카예나는 그의 흐트러진 차림새를 가리키며 말했다.
라파엘로는 대답 대신 카예나의 손에 깍지를 끼고 입 맞추었다.
“어서 가봐요.”
카예나는 그의 등을 떠밀었다. 라파엘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짧은 한숨과 함께 테라스에서 내려갔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카예나는 마법으로 낮에 했던 것처럼 몸단장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보석으로 된 관을 다시 썼을 때였다. 뭔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쿨럭!”
장갑이 순식간에 축축해졌다. 바닥에는 검붉은 피가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분명 이정도는 괜찮았는데.’
그사이에 몸이 더 나빠진 걸까? 그녀는 무감한 눈으로 제 손과 바닥을 보았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몸살처럼 둔탁한 통증에 전신이 아릿했다.
카예나는 드레스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녹색의 엘릭서가 담긴 병이었다. 엘릭서를 한 방울 마시자 몸은 금세 멀쩡해졌다. 그 후로 일부 공간의 시간을 돌리며 핏자국을 없앴다. 마치 화면을 되감기라도 한 듯이 붉은 자국이 줄어들어 이내 사라졌다. 어쩐지 피로했다.
“이러다가 금방 죽겠네.”
-그러니까 왜 그렇게 마법을 펑펑 써대?
이질적인 말소리에 카예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사람은 없고, 치즈 고양이 하나가 난간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시간도 멈췄지?
“……바옐?”
고양이는 아예 엉덩이를 난간에 붙이고 앉았다. 목소리가 어딘지 어린 소년의 것과 비슷했다. 소년의 목소리로 말하는 치즈 고양이라니. 저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바옐이 유일했다.
“당신이 여기는 어쩐 일이야? 정말 내 부마라도 되려고 온 거야? 미안하지만 좀 늦었는데.”
-미쳤어?!
바옐이 털을 쭈뼛 세웠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유가 없잖아? 당신, 인간들이랑 얽히는 거 싫어하니까.”
그러자 고양이의 호박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이봐, 황녀. 네 머릿속을 한번 봐도 돼?
카예나는 자신이 놓친 부분은 없는지 몸단장 상태를 확인해보며 여상스럽게 말했다.
“그게 되겠어?”
-흐음.
고양이는 난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카예나는 반사적으로 고양이를 안아 들려 했다.
바옐이 후다닥 물러나며 앙칼지게 외쳤다.
-캭! 무슨 짓이야!
“스스로 사람에게 다가오는 고양이라니, 어쩐지 안아줘야 할 것 같아서.”
-추행범!
카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흉한 늙은이.”
그러자 고양이가 하악질 했다.
-뭐가 어째?!
그녀의 비난에는 근거가 있었다.
“여기서 뭘 훔쳐본 거야?”
-하나도 안 봤거든? 절대!
“아니면 말고.”
그녀가 건성으로 대꾸하자 바옐이 몹시 분한지 바닥을 팡팡 쳤다.
그래 봤자 고양이의 모습이라 귀여워 보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여기는 어쩐 일이야?”
바옐은 도도하게 고개를 휙 쳐들고 말했다.
-새로운 마법사가 사고를 칠 것 같으니 내가 나오지 않고 배기겠어?
“시간을 멈춘 건 어떻게 알았어?”
-같은 마법사에게는 시간 지배가 통하지 않으니까. 너보다 약한 마법사는 시공간의 반발력이 너무 커서 멋대로 움직였다가는 온몸이 찢기겠지만.
시간을 멈추고서 움직였을 때 느껴지던 반발력이 기억났다. 크게 위험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힘이 약한 자가 억지로 움직이면 온몸이 찢어진다니.
‘함부로 시간을 멈추지도 못하겠네.’
어차피 몸에 심한 타격이 와서 거의 봉인하다시피 한 능력이었다.
“마법사가 더 있어?”
-있기야 하지. 아직 살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햇병아리들이야 내가 일일이 알 수도 없고.
바옐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카예나는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자 의자에 앉았다. 바옐은 침대로 폴짝 뛰어 올라갔다.
침대에 고양이 털 다 묻겠네.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시공간 마법은 인제 그만 써. 그 말 하려고 온 거야.
“친절하네. 충고는 고맙게 들을게.”
여차하면 마법은 계속 쓰겠다는 뜻이었다.
-방금 그렇게 검은 피를 토하고도 모르겠어? 시공간을 통제하는 마법은 인간의 몸으로 사용할 수준의 능력이 아니야.
“그런 것 같더라.”
카예나가 건성으로 대답하자 바옐이 한숨처럼 말했다.
-너 이 삶이 첫 번째가 아니지?
“…….”
-천수를 다하지 못한 삶이 더 있어. 그렇지?
“…연회장을 비운 지 오래되어서 이만 가봐야겠어. 고양이도 같이 갈래? 춤은 못 추겠지만.”
-말 돌려봐야 소용없어. 애초에 고작 인간과의 수명거래에서 그만큼 장미가 지고 피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고.
“유달리 장수할 운명이었을 수도 있지.”
-너 그러다가 진짜로 비명횡사할지도 몰라.
그제야 카예나는 입을 다물었다.
바옐은 그녀의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는 것을 보고 침착하게 설명을 이었다.
-네게 몇 번의 삶이 축적되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든 삶을 더한 수명의 절반이 거래됐어. 덕분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능력이 개화되고 말았지.
그렇다고는 해도 시공간을 다스리는 능력이 튀어나오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이것은 카예나가 살아온 삶이 재능으로 개화된 탓이리라.
“그럼 내 모든 생을 통틀어서 수명 절반이 떨어져 나간 거야?”
-그래.
그렇다면 그녀가 아무리 박명하더라도 이생에서 노년기까지는 살다 죽는다는 말이 아닌가? 비록 몸이 약해져서 유병장수할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하겠지만 단명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러나 바옐이 그 희망적인 생각을 깨뜨려버렸다.
-수명 거래가 그런 단순한 계산법으로 되는 일이 아니야. 네 삶 중 어디에서 가장 많은 수명을 떼어갔을지 모른다고.
이번 설명에는 카예나도 마냥 태연할 수 없었다. 그녀는 습관처럼 걸치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그럼 내가 백 년을 살지, 내일 당장 죽을지 모른다는 말이네.”
-…….
바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카예나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역시 피곤한 게 맞나 봐.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눈앞이 어지러울 리가 없잖아. 그녀는 천천히 눈가를 짚었다.
“그래……. 그야말로 시한부가 되어버린 거네?”
이건 계획에 없었다.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는 데까지 해보는 수밖에.
“정말 시간이 없어.”
말 그대로 시간이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유 부린 적 없건만 그 정도로는 어림없게 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서 빨리 누구도 승리하지 못하게 할 생각.”
레제프와 하인리히가 서로를 갉아먹을 동안 카예나는 그들의 비리를 끌어내고 군부를 일으켜 응징할 생각이었다. 그것에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물어뜯고 깎아내려서 충분히 약해질 시간이.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는데 시간이 없다니.’
골치가 아팠다.
-너는 지금 그런 생각이 들어? 제정신이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난 이미 두 번이나 죽었어.”
그것도 타살로.
카예나는 고양이에게 빙긋 웃어주었다.
“이번 죽음은 내가 선택해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아?”
물론 이게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이 선택한 죽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칼에 찔려 죽는 것보다는 좀 더 괜찮은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카예나의 초연함에 바옐은 더 질려버렸다.
-너 정말…!
그때 고양이의 귀가 쫑긋거렸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고양이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카예나는 누군가가 이곳으로 다가오는 중임을 깨달았다. 자신이 쉬고 있는 걸 알면서도 올 만한 사람이 있던가?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레제프는 오지 못할 텐데.’
곧이어 커튼 뒤로 유리로 된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커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황녀 전하, 도나입니다.”
도나라면 그녀의 하급 시녀가 아닌가?
카예나는 의아하게 커튼 쪽을 바라보았다.
“들어오렴.”
커튼을 걷으며 들어오는 도나의 손에 얇은 외투가 들려 있었다. 5월 하순의 저녁이라 크게 춥지는 않았으나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런 은밀한 장소에 불쑥 찾아오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내가 너무 오래 밖에 있었던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혹여 밤바람에 감환이라도 드실까 하여…….”
“고맙구나.”
카예나는 빙긋 웃으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도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도나가 시선을 다급하게 내렸다. 도나는 레제프의 지시로 카예나를 감시하러 온 것이었다.
“슬슬 연회장으로 가봐야겠다. 연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네. 차질없이 연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렵지 않은 질문에 도나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카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떠보았다.
“그렇구나. 아, 레제프는?”
“네?”
도나가 지나치게 당황했다.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얼굴 위로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제법 긴 시간을 궁정 생활을 해본 궁정인답게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렇다 해도 카예나의 시선을 빗겨날 수는 없었다.
“황자 전하께서는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카예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장으로 가야겠다.”
‘애니에게 도나를 감시하라고 해야겠네.’
미소가 건조하게 메말랐다.
* * *
첫날의 연회는 그야말로 성공적이었다. 실내 장식, 요리, 음악 등 모든 게 압도적이었다. 특히 카예나의 위상과 참석한 손님의 수준은 그 어떤 때와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마치 황위 계승식과도 같은 열기였다.
도티 부인은 그러한 수준 높은 연회를 본인 손으로 이끌고 있다는 자부심이 가득한 상태였다. 그녀는 도도하게 콧대를 높이며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으스대듯이 다녔다.
건방진 황녀궁 직속 시녀들이 그간 자신에게 반목하며 살살 신경을 긁어대서 여간 짜증스러운 게 아니었다. 현재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 모든 성년식 준비가 도티 부인의 솜씨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소문이 나도록 수족까지 부려가며 열심히 여론을 조성한 덕분이었다.
도티 부인은 황자를 길러낸 존경받아 마땅한 귀부인다운 화려한 차림으로 내명부를 살짝 둘러보았다.
“오셨습니까, 하녀장님.”
하녀장의 측근 중 하나인 궁정인, 바하일이 깍듯하게 예의를 차려 그녀를 맞이했다.
“오늘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
바하일은 간사하게 웃으며 얼른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하녀장님께서 완벽하게 준비하신 연회인데 문제가 생길 리가 없지요.”
그의 아부에 도티 부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사용인들의 용모 상태나 주력으로 나가게 될 메인 요리의 맛을 보는 등 의례적으로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다 도티 부인이 눈을 치떴다.
“오늘 음식 가짓수가 메인 열 가지를 제외하고 부족해 보이는 것 같은데?”
“아직 추가 식자재가 도착하지 않아서…….”
“뭐야?”
그녀가 바하일을 향해 한소리 퍼부으려 했을 때였다.
시종 하나가 사색이 된 얼굴로 바하일을 찾아왔다.
“바하일 님! 큰일 났습니다!”
도티 부인은 호들갑스럽게 뛰어온 시종을 보며 이상하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얼른 시종을 추궁하듯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마하드 상단에서 식자재 추가분이 도착했습니다만, 오셔서 상태를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하드 상단이라면 젊고 잘생긴 궁정인, 에밀이 연결해 준 상단 중 한 곳이었다.
‘뭐지?’
그녀는 얼른 하역장으로 향했다.
하역장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낡은 옷을 입은 자들이 기사들에게 포박당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저들은 누구지?”
낯선 얼굴들에 도티 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역장에 있던 하인이 대답했다.
“마하드 상단의 노역꾼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노역꾼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들이?”
며칠간 황궁으로 들어온 노역꾼은 좋은 옷을 입고 면도까지 깔끔하게 마친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낡고 해진 옷에 몰골도 추레하기 짝이 없었다. 물건을 실은 수레도 평소와 달리 당장 어디에 내다 버려야 할 수준이었다.
서늘한 예감이 가슴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 그녀가 하역장 하인에게 물었다.
“식자재는? 식자재 상태는 어떻지?”
하인은 참담한 표정으로 수레 덮개를 열었다. 척 보아도 귀족들에게 쓸 수 없는 하품 중 하품의 식자재들이었다. 그런 것이 무려 스무 수레나 들어왔다.
“아아……!”
“하녀장님!”
다들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도티 부인은 눈앞이 아찔해져 자신이 제대로 숨 쉬고는 있는지도 헷갈렸다.
‘내가, 이 내가 사기를 당했다고?’
아니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황자의 유모이자 도티 후작가의 안주인인 자신에게 사기 칠 자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 뭔가 착오가 있었겠지.’
그러나 도티 부인의 날카롭게 곤두선 감이 자신이 모략에 당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 상단을 연결해준 자가 불현듯 떠올랐다. 도티 부인이 창백한 낯빛으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에밀! 에밀 하브론,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이곳에 있던 이들은 그녀가 난데없이 에밀 하브론을 찾아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들은 도티 부인이 요즘 가장 총애하는 궁정인이 보이지 않으니 괜히 짜증을 부리는 것쯤으로 이해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에밀 하브론은 휴가라고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그러자 도티 부인은 기가 막혀서 얼빠진 얼굴을 했다가 버럭 소리 질렀다.
“연회를 앞두고 휴가를 받는 궁정인이 말이나 되니?!”
물론 말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에밀 하브론이 휴가를 받은 증거가 있었다.
“예? 하녀장님께서 승인하신 휴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휴가증도 받아왔는걸요?”
“휴가증이라니? 그런 걸 승인해 준 적이 없는데!”
도티 부인이 좀처럼 믿지 않자 바하일이 직접 하녀장의 직인이 찍힌 휴가증을 들고 왔다.
휴가증을 본 그녀는 반쯤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 이 미친 것이 감히 내 직인을 제멋대로 찍어?!”
그녀는 최근 에밀을 자주 자신의 방으로 초대했다. 또한, 근처에 그가 개인적으로 쓸 방도 주기까지 했다. 에밀이 그녀가 없는 틈을 타 휴가증에 직인을 몰래 찍어 서류를 조작해 제출한 것이다.
“이런 일이 있으면 당장 내게 보고했어야지, 대체 뭘 한 거야!”
“그건…….”
‘보나 마나 예뻐해서 편의를 봐줬다고 생각했지 누가 몰래 그랬다고 생각하겠어?’
바하일은 쩔쩔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불만을 쌓고 있었다.
‘지금 에밀 하브론이 휴가를 간 게 무슨 상관이야? 이 폐기물이나 다름없는 식자재들은 어쩌려고?’
사태 파악이 끝난 도티 부인이 궁정인들을 향해 빽 소리쳤다.
“당장 에밀 그자를 찾아내라!”
“그런데 에밀은 갑자기 왜 찾으십니까?”
“그자가 내게 사기를 쳤다!”
“사기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사기라니? 그것도 감히 도티 후작 부인을 상대로?
“어서 찾아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궁정인들이 헐레벌떡 에밀 하브론을 찾으려 발을 놀렸다. 그러나 작정하고 사기 친 자를 황궁에서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오늘 도착한 노역꾼들도 갑작스레 고용된 판자촌의 천민들이었다. 더 환장할 사실은, 마하드 상단 본점의 간판이 뜯겨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철저히 그녀를 속여넘기려 짜놓은 계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
‘안 돼, 이럴 수 없어! 내가 에반스 가문에서 어떻게 승기를 빼앗아왔는데!’
아찔해졌다. 에반스 가문의 막내, 줄리아가 감히 설쳐대지 못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는데!
‘이 식자재를 다 어쩌지?’
대금은 일찍이 치른 상태였다. 장부를 조작해 돈을 나눠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 형편없는 식자재로 음식을 만들어 내갔다가는 까다로운 귀족들에게 단번에 지적당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황녀궁에 이 모든 책임을 떠넘기면…? 아냐. 이미 이 식자재들 때문에 불가능해.’
그들은 날 때부터 지금까지 늘 최고만 누린 자들이다. 최고의 진미로도 더는 감동을 주기 어려운 그들에게 이런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내갈 수 없었다.
‘숨겨야 해. 이것들을 당장 다 없애버려야 해!’
그런데 어떻게 없앨 수 있지? 식자재가 스무대나 되는 거대한 수레 마차에 한가득 실려 왔다. 이 꼴을 목격한 자의 수는 수레의 수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녀의 안색이 완전히 꺼멓게 죽었을 때였다.
“황녀 전하?!”
“-!”
도티 부인은 지금 이곳에서 절대 들려서는 안 될 호칭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진짜 황녀였다. 정말 카예나 황녀가 연회복을 입은 채 하역장에 나타난 것이다.
하역장에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정중히 예를 갖췄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카예나의 시선이 어수선한 하역장을 한차례 훑었다. 그 무심한 시선에 식은땀이 솟아날 정도였다.
카예나가 도티 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이미 들었네.”
“…….”
차마 입에서 죄송하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서 황자 전하를 불러야 해.’
그럼 레제프 황자는 자신을 키워준 유모이자 가장 큰 우호 세력인 도티 후작가의 안주인인 제 편을 들어줄 것이다.
“내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하녀장, 레르반스 도티.”
카예나가 차갑게 일갈했다.
도티 부인은 새파랗게 어린 황녀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사실에 모멸감이 차올랐다. 이제 자신의 실패를 비웃겠지? 당장 어떻게든 제게 유리하게 판을 돌리려고 이 사실을 귀족들에게 공개해버리겠지!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항상 얕잡아보기만 하던 황녀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는 생각에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오히려 독기가 차올랐다.
‘황녀의 계략이 분명해. 맞아. 저것이 나와 황자 전하께 위해를 끼치려고 이런 추잡한 수를 쓴 게 틀림없어!’
그녀의 눈이 분노로 번들거렸다.
“할 말이 없느냐?”
카예나는 토지 개간 문제 때문에 일찍이 몸단장을 끝내고 제드 단장과 약식으로 회의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중앙성 주방 하역장을 관리하는 자에게서 식자재에 문제가 생겼음을 보고받았다.
그 보고에 카예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도티 부인이 주도하는 연회라면 에반스 측이든 하인리히 측이든 손을 쓰리라고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예나는 식자재 상태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신선하지 않거나 심지어 썩은 부분도 있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지?”
도티 부인은 분노로 딱딱하게 굳은 턱을 억지로 움직여 말을 내뱉었다.
“폐기해야죠. 이 식자재에 사용된 비용은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태도였다.
“오늘 연회에 나갈 음식은 같은 수준으로 준비되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카예나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녀가 천천히 도티 부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도티 부인은 순간 그녀의 기백에 움찔하고 몸을 움츠렸다.
카예나가 고개를 내려 도티 부인에게 말했다.
“나랑 장난해?”
“뭐, 뭣…?!”
카예나는 조금의 온기도 없는 싸늘한 눈으로 도티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방만을 눈감아주니 정말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것 같지?”
황족답지 않은 가벼운 말투였다. 목소리에는 묘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게 이상하리만큼 폭력적이게 느껴졌다. 자신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질 수 있다는 기이한 위압감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도티 부인은 당혹스러워서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녀를 불렀다.
“…전하!”
그러자 여전히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냉엄하게 귓가로 날아들었다.
“그래. 눈앞의 상대가 이제 전하로 보여?”
“…….”
황녀가 마냥 철부지 망나니 같았던 때에도 이런 섬뜩한 눈빛을 하는 걸 본 적 없었다.
이 여자는 분명 철딱서니여야 했다. 그래야 말이 되었다. 레제프보다 못한 누이여야 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무서웠다. 에스테반 황제가 한창때 제국을 호령하던 시절보다도 더.
도티 부인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황녀는 자신이 알던 그 멍청하고 어린 여자애가 아니었다. 그 멍청한 황녀라면 자신을 진심으로 가소롭다는 듯이, 한낱 피라미처럼 바라보는 게 말이 안 됐다. 장갑을 낀 곧은 손이 도티 부인의 몸에 닿았다.
“뭐, 뭐하는…!”
카예나는 여상스럽게 그녀의 흐트러진 옷 장식을 정돈해주었다.
“내가 이렇게 모욕을 주는 걸 다른 사람에게 들켜도 좋아?”
“…!”
그녀의 입가로 나른한 미소가 피었다. 옷을 매만져주는 손길이 피부 위로 칼을 댄 것처럼 저릿했다. 전혀 우악스럽지 않은 고상하고 느긋한 손놀림이었음에도 목이 졸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쳐 날뛰도록 무대를 만들어주었더니 정말 정도를 모르네.”
등줄기로 소름 끼쳤다. 마치 피식자가 된 기분이었다. 황녀의 목소리, 말투, 눈빛까지도 모두 끔찍하고 징그러웠다. 당장이라도 카예나에게 집어 삼켜질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도티 부인은 그녀의 손을 쳐내고 싶었으나 상대가 황족이라 감히 손대지 못했다. 턱이 달달 떨렸다. 상대가 제게 손찌검도 하지 못할 정도로 변변찮은 황녀라는 사실을 아무리 되뇌려고 해도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대신 겁먹지 않은 것처럼 눈을 뾰족하게 치뜨며 날카롭게 말했다.
“황녀 전하라 할지라도 이런 작은 사고 때문에 황자 전하의 오랜 신하인 저를 이리 핍박하실 수 없습니다. 정 저를 욕보이시겠다면 재판을 여십시오!”
누구 좋으라고 재판을 열겠는가? 재판에 들어가면 솜방망이 처벌은커녕 도티 부인만 쏙 빼놓고 다른 이에게 모든 책임이 전가될 것이 뻔하다.
“오해받을 소리를 하네?”
카예나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당신이 곤란을 겪을까 봐 도와주려는 건데. 젊은 남자의 간계 때문에 일어난 가정불화는… 좀 그렇잖아?”
도티 부인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기에 카예나의 손을 떨치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세요!”
그러자 카예나가 퍽 무력하게 한 발짝 떨어졌다.
그녀는 내쳐진 손을 붙잡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내가 이 잘못 발주된 식자재를 백성에게 나눠주겠다는데 무슨 짓인가?”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도티 부인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실망스럽군, 도티 후작 부인. 당신이 그러고도 내명부를 대표하는 하녀장이라는 말인가?”
“……뭐라고요?”
카예나의 말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돌변한 눈빛으로 저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내 생일을 기념하는 명목으로 이 많은 식자재를 빈민가에 베풀고자 했더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이거 다 당신이 꾸민 짓이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이상한 천것을 붙여 이딴 사기를 치도록 유도했음이 틀림없어. 천박한 하인리히 따위에게 빌붙어 황후 자리를 노리는 심산이겠지!”
도티 부인이 이성을 잃고 소리를 빽 지르자 다들 소리 없는 비명을 삼켰다.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사람들의 눈빛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엄중한 잣대로 도티 부인을 날카롭게 훑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믿기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 여러 가지 감정이 혼합되어 끔찍하게 무겁고 냉엄한 분위기가 이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도티 부인은 그 심판대에 올라 단두대에서 칼날이 떨어지기 직전, 군중을 앞에 둔 죄인이 된 듯한 착각을 느꼈다. 절로 뒷걸음질이 쳐졌다. 등 뒤로 무언가 닿았다. 하품의 식자재를 한가득 실은 수레였다.
‘겁먹을 것 없어. 나는 도티 후작가의 안주인이자 황자의 유모다. 내가 황자의 외척처럼 힘을 써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자신이 가진 권력이 누군가가 빌려준 것임을 모르고서 도티 부인은 카예나에게 대놓고 반목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예나가 입술을 떼었다.
“레제프를 지지하는 신하인 자네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정말이지 방만하기 짝이 없구나.”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녀장의 처우에 관련해서는 레제프 황자에게 전적으로 맡기겠다고 전하라.”
“명을 받듭니다.”
그러자 도티 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리석게도.’
그녀는 레제프가 자신을 도와주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에반스 가문이 이 기회를 그냥 넘길 리가 없는데도.’
“레제프 황자의 처분이 떨어질 때까지 하녀장은 근신토록 해라.”
그녀의 명에 기사들이 도티 부인을 연행했다.
카예나는 하역장에서 포박된 채로 있던 노역꾼들을 뒷조사해보라고 명령한 후에 식자재가 가득 실린 수레를 돌아보았다.
“애니.”
그러자 조용히 곁을 지키고 있던 애니가 고개를 조아렸다.
“하명 하십시오, 전하.”
“내 직속 시녀들이 입궁하는 대로 나를 찾아오라고 알려두어라.”
“알겠습니다.”
식재료를 실은 수레가 벌써 스물을 넘어 계속해서 추가되고 있었다.
‘며칠 분 식자재가 한꺼번에 들어오는 건가. 이정도 양이면 중앙군에 배식하는 것만으로는 소화해내기 좀 버겁겠는데…….’
일전에 올리비아에게 설명했던 대로 중앙군에 식재료를 납품하는 업체에 이야기하여 잠깐 중단시키고 이것을 쓸까 했는데.
“어찌 처리할까요?”
바하일이 안절부절못하며 카예나에게 물었다.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을 다 끌어와서 완전히 사용할 수 없는 재료는 폐기하고 나머지는 끓여라.”
“예? 끓이라니…….”
“스튜로 만들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자. 명목은 내 성년식을 기념한 것으로 하면 되겠지.”
그러면 이 사태가 귀족들 사이에 소문이 나더라도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었다. 겸사겸사 제국민 사이에 좋은 이미지로 이름을 각인시킬 수도 있었고.
그녀는 주방 하인들에게 골라낸 식자재로 국물이 있는 음식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아무래도 대량으로 생산하기에는 스튜가 제격일 것 같았다.
궁정인이 그녀의 계획에 난색 했다.
“전하, 연회 준비에도 인력이 꽤 빠듯한지라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스튜를 끓일 인력, 음식을 지정된 장소까지 나르고 근처를 통제할 인력, 배식할 인력 등 사람이 너무나 많이 필요했다.
“제드 총기사단장에게 말해서 토지 개간에 들어갈 인력 중 일부를 빼내야겠다.”
그렇다 해도 너무 많은 인력을 이곳에 투입하기는 어려웠다. 당장 내일부터는 진짜 토지 개간도 시작되니까.
카예나는 정확하고 빠른 판단으로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에 혼선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그래야만 인력을 아낄 수 있었다.
“당장 전령을 차출하여 수도 전역에 알려라. 내일부터 지정된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배식하겠다고.”
“이만한 양을 모두 배식하려면 그릇이 모자랍니다만…….”
“개인 그릇을 들고 오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
“아…!”
그러자 다른 이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그러면 그릇의 모양이 다 제각각이지 않습니까? 양이 다 다르게 될 텐데…….”
“그릇에 양을 맞추는 게 아니라 국자로 두 술 떠주는 식으로 하면 되겠지.”
“오오, 그렇군요!”
이쯤 되니 카예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서 자신의 유능한 전속 시녀들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막 오늘 연회를 위해 귀족들이 입궁을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카예나는 어쩔 수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진두지휘해야 했다.
‘사람이 더 있으면 좋은데. 인력이 너무 부족해…….’
그때 애니가 카예나를 찾아왔다. 시녀들이라도 온 것인가?
“전하, 키드레이 공작님께서 입궁하셨습니다. 지금 휴게실에 계십니다.”
카예나는 애니가 말하는 그 휴게실이 2층 황녀궁 휴게실이라는 것을 알아들었다. 그녀는 걸음을 서둘러 라파엘로에게 배정했던 비밀스러운 휴게실로 향했다.
벌컥!
휴게실 문을 열어젖히자 오늘도 근사한 몸매를 자랑하는 것처럼 선이 딱 떨어지는 연회복을 입은 라파엘로가 보였다.
“…전하?”
카예나가 절절한 진심을 꺼내 보였다.
“너무나 고맙게도 오늘도 일찍 왔네요.”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빠른 속도로 걸어 라파엘로에게 다가갔다.
그는 거의 뛰어들다시피 다가오는 카예나를 향해 자연스럽게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카예나가 마치 품에 안기는 것처럼 그의 양팔 안으로 쏙 들어가 멈춰 섰다.
라파엘로는 어딘가 정신없어 보이는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에요.”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등허리를 커다란 손으로 단단히 받쳤다. 제게 스스로 다가온 그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애정이 담뿍 묻어났다.
그 달콤함을 즐길 새도 없이 카예나가 입을 열었다.
“저를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카예나는 말을 이으려다가 멈칫하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수락하시는 건가요?”
보증이라도 서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럴 리는 없지만, 카예나가 약간 기가 막힌다는 듯이 묻자 라파엘로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불에라도 뛰어들까요?”
“……아니요.”
그녀가 대단히 상식적인 사람임을 믿고 있다는 말을 다소 과격하게 하자 피식 실소가 터졌다.
“불에 뛰어들지는 마시고 사람을 좀 빌려주세요.”
* * *
하역장에서 있었던 일은 바로 레제프에게 보고되었다. 그는 지체할 것도 없이 도티 부인을 곧장 제 궁으로 불렀다.
황실 직속 기사단이 그녀를 연행하기로 했다. 그들은 대부분은 에반스 가문의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세를 놓고 다투는 사이라고 해도 같은 황제파라 그런지 꺼리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도티 후작가에게 밉보일 짓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원래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법이지 않은가.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 역할은 제다이어에게 돌아갔다. 그는 대외적으로 제논 에반스의 입김으로 꽂힌 낙하산이었다. 그런데 제논이 죽어버렸으니 끈 떨어진 연 취급을 당했다. 제다이어는 대수롭지 않게 도티 부인을 황자궁으로 연행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실은 하인리히가 시킨 일이기도 했다.
‘황자궁에 들어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대공자는 이 임무를 완료하는 대로 찾아와 보고하라고 했다.
“모든 건 내 뜻에 따라 진행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인리히 대공자가 어떤 지시를 하든 다 따라줘.”
황녀도 성년식 전에 제다이어에게 미리 일러둔 말이 있었다.
‘그 황녀가 한 일이라면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는 게 분명하지.’
황녀가 계획하는 일은 아마 제다이어를 자연스럽게 궁 밖으로 내보낼 명분을 쥐려는 것이리라.그래야만 본격적으로 암흑가에 뛰어들 수 있었다.
제다이어가 침실 앞에 멈춰 서서 말했다.
“황자 전하께 알리시오.”
조금 기다리자 침실의 문이 열렸다.
“들어가십시오.”
그들은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곳에 레제프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머리를 젖히고 있었다. 뒤에서 시종이 황자의 어깨를 주물렀다.
제다이어는 도티 부인을 앞에 세우고 대각선 뒤로 물러났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던 레제프가 턱을 천천히 당겼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도티 부인에게 닿았다.
“말해봐.”
도티 부인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궁정인들이 작당하고 저를 속였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호소했다.
“궁정인 하나가 제게 연결해준 상단이 유령 상단이었고 당사자는 모습을 감춘 상태입니다.”
“흐음…….”
“전하, 저를 믿으시지요? 일평생 전하를 생모처럼 보필한 제가 그랬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도티 부인은 거의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것은 황자 전하의 세력에 타격을 입히려는 자의 간계입니다! 진범을 색출해야 합니다.”
“진범이 누구인지 아는 것 같은 말투인데. 짐작되는 자가 있는가?”
도티 부인은 아까 제게 모욕을 주었던 카예나를 떠올리며 주먹을 콱 틀어쥐었다.
“황녀 전하이십니다.”
“누님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빈번하게 벌어진 일입니다. 황제를 치마폭에 감싸고 천하를 조종하려, 제 계획에 거슬리는 저를 쳐내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이토록 호소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막말로 재판에 들어가도 금방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황자의 심기만 상하지 않게 잘 구슬리면 되었다. 카예나와 그의 사이를 확실하게 이간질할 필요도 있었다.
“이상하군. 내가 보고받은 것과는 내용이 상당히 다른데.”
“…예?”
“에밀 하브론이라는 자가 에반스 후작에게 가서 자수했다.”
그 말에 도티 부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자가 에반스 후작에게 무엇을 자수한 거지?’
말이 되지 않았다.
‘이게 에반스 가문에서 획책한 계략이 아니고서야…!’
도티 부인은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 이것은 애초에 자신을 밀어내고 황자파 내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에반스 후작의 짓이 분명했다.
‘그래, 줄리아 그 년이 나를 괴롭혀댔던 것만 봐도 뻔하지!’
“그렇다면 이것은 에반스 후작의 계략입니다. 그자가 도티 후작가를 밀어내려고 벌인 짓입니다!”
“아까는 누님이 한 짓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건…!”
“내 누이와 에반스 후작가가 결탁해서 자네를 밀어내려고 했다는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역시, 우리 전하는 참으로 영민하십니다.”
레제프가 몸을 일으켜 천천히 도티 부인에게 다가갔다.
“누님이 왜 자꾸 황궁을 벗어나려고 할까 했더니…….”
레제프가 벽의 장식 고리에 걸린 검을 뽑아 들었다.
“너 같은 것이 문제였구나.”
“저, 전하…!”
레제프는 무심한 얼굴로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꺄악!”
도티 부인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벌벌 떨던 그녀는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자 의아하게 바닥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챙그랑!
레제프는 검을 집어 던졌다.
도티 부인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다가 제 드레스가 형편없이 찢겨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대로 황녀궁 앞으로 가서 누님께서 용서하실 때까지 무릎 꿇고 빌어라.”
그것은 완벽한 서열 정리였다. 앞으로 도티 부인은 사교계에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제게 이러실 수 없습니다, 전하!”
레제프가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제다이어에게 명령했다.
“끌고 나가.”
“어찌 제게 이러십니까? 어찌 이리도 비정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는 자신을 붙드는 도티 부인을 팽개쳤다.
“천한 귀족 따위가 황족 놀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레제프는 신경질적으로 비웃었다.
“내가 허락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 어리석은 여자야. 그간 해왔던 모든 일이 내가 빌려준 권력 덕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겠느냐?”
도티 부인은 그의 냉혹함에 넋을 놓아버렸다. 이 모든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누님께 용서받지 못한다면 에밀 하브론이라는 그자를 도티 후작과 나란히 재판장에 세워주마.”
그렇게 된다면 사교계 퇴출은 물론이거니와 수도에서 도망치듯이 떠나야 할 것이다.
“전하! 황자 전하-!”
도티 부인이 침실에서 끌려나갔다.
* * *
예이스터는 성년회 기간동안 황궁에서 가장 가까운 별저에서 쉬고 있었다. 그가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입술에 물었다. 그러자 바로 곁에 있던 사내가 불을 붙였다. 탁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났다.
똑똑.
문이 열리고 수행원이 말했다.
“제다이어가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예이스터가 담배를 손가락에 끼워 들더니 휴게실에 들어온 남자를 향해 빙긋 웃었다.
“안녕.”
제다이어는 모자를 벗으며 예를 갖췄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널찍한 소파에 홀로 앉아 담배를 태우던 예이스터가 제 맞은편의 일인용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앉아.”
“감사합니다.”
예이스터는 됐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레르반스 도티는 어떻게 됐어?”
“황녀궁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하!”
예이스터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황자는 미쳤군. 제 살을 스스로 도려내는 짓을 하다니.”
그게 썩은 살이기는 했으나 레제프에게 썩은 부위를 치료할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정말로 제 누이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걸까?
‘황녀가 사라지면 군사 통치권이 황자에게 넘어가니까…….’
그것은 레제프를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예이스터도 속박하는 장치였다.
황녀가 하는 일들은 알면 알수록 흥미로웠다. 어서 둘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싶을 만큼 애가 탔다.
예이스터는 담배를 한번 빨아들이더니 소파에 비벼껐다.
제다이어는 귀족들이 사용하는 물건의 값을 세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저 소파가 상당히 고가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슬슬 황녀궁 전속 기사로 들어가는 건 어때?”
제다이어는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어차피 황녀 직속 호위를 맡으려는 기사가 없다고 하던데?”
‘…황녀가 말한 게 이거였나?’
제다이어는 마지못한 것처럼 호위로 들어가겠다고 대답했다.
“좋아. 그럼 금주 안으로 좋은 소식 들려주길 바랄게.”
그렇지 않으면 어떤 호된 꼴을 당할지도 몰라. 제다이어는 뒷말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었다. 대화는 길지 않았다.
“바쁠 텐데 가 봐.”
예이스터의 축객령에 제다이어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제다이어는 응접실에서 나가다가 맞은 편에서 이상한 남자들이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후드가 달린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었다.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그가 걸음을 멈칫하자 보좌관이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목소리에 희미한 경계심이 읽혔다.
“아, 예. 죄송합니다.”
제다이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보좌관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 근처를 스쳐 지나갈 때, 희미한 피 냄새가 났다. 살갗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고작 희미한 피 냄새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인데도 느낌이 더러웠다.
‘새로 고용한 폭력배들인가?’
그런 것치고는 폭력배에게 걸쳐주기에는 로브의 소재가 상등품이었다.
“제다이어 씨?”
“네, 갑니다.”
제다이어는 보좌관이 더 이상하게 생각하기 전에 얼른 그에게 향했다.
‘느낌이 좋지 않네. 황녀에게 말해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