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23
악녀는 마리오네트 21장. 군주의 미덕(23/33)
21장. 군주의 미덕
승기를 뒤집을 수 없을 때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때를 기다려라. 하지만 기회가 오면, 반드시 거세게 밀어붙일 것.
카예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군량을 납품하는 상단에 이곳에 납품하지 못했던 식자재 중 쓸만한 것을 모두 보내라고 요청했다. 아예 수도 전체가 들썩일 만큼 한바탕 휩쓸 계획이었다.
라파엘로가 하역장으로 말을 타고 달려왔다.
“수레의 절반은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윈스턴 자작가에서도 한 손 보태고 싶다더군요.”
“윈스턴 자작가라면, 키드레이 대부인의 입김인가요?”
윈스턴 부인의 집에서 몸을 의탁 중이던 대부인이 제 친우를 찔러 가담시킨 것 같았다.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요. 드뷔시 재상의 뜻은 아닐 테니.”
인력이 충원되니 확실히 숨통이 트였다.
“고마워요.”
성년식 연회만 아니었더라도 이렇게 정신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회는 연회대로 아무런 문제 없이 완벽하게 진행되어야 해.’
이번 일이 잘 마무리가 된다면, 대중들이 카예나를 보는 눈이 완전히 바뀔 것이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와 집무실에서 영수증을 작성했다.
“수레에 실린 식자재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영수증이 없네요. 우선은 이렇게 처리하는 게 좋겠어요.”
카예나가 의자에 앉지도 않고 펜을 들어 약식으로나마 영수증을 작성하는 동안 라파엘로는 뒤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여기에 아무도 없긴 하지만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공작님?”
“이런 일을 예상하고 출입을 통제하신 줄 알았습니다만.”
카예나가 픽 웃었다.
“쓸데없이 눈치만 빠르시네요.”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라파엘로를 돌아보았다.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카예나가 몸을 돌리자 라파엘로는 그녀를 설득하듯 은근한 손길로 지분거렸다.
“내일 당장 빈민가에 인력을 보내야 하는 거 알죠?”
“그래서 물량 공세로 일을 처리한 것입니다. 전하와의 시간을 방해받기 싫어서요.”
그의 말에 카예나의 손이 멈칫했다.
시간이라. 그래. 라파엘로가 현명했다. 그는 모르겠지만, 카예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생각해보면 그를 위한다며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애정을 쏟았다고 믿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건조한 행동인 줄도 모르고. 그래서 라파엘로는 원래 그의 성격으로는 하지 않았을 모습을 카예나에게 보였다.
원작을 떠올려보면 그는 늘 어른스럽고 침착하고 어떤 때는 충분히 온화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지금 라파엘로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에 비하면 더 솔직하고 저돌적이지만 불안해하고 있었다.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카예나는 라파엘로를 돌아보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러고 있을 시간도 얼마 없을지도 몰라.’
카예나는 이 사람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내일 당장 죽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어요?”
참 묘한 질문이었다. 단순히 자신의 진심을 시험하는 말이라고만 해석하기에는 석연찮았다. 꼭 진짜 일어날 일을 가정하는 것처럼 포장해 묻는 것처럼.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사실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그간 보였던 지나치게 초연한 태도가 설명된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자신의 감을 부정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외면했다.
하나,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카예나의 죽음을 막아내리라. 그는 카예나를 절대 놓지 않을 사람처럼 안았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영원히 당신을 그리워할 겁니다.”
그의 대답에 카예나가 어딘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따라 죽지는 않아요? 보통 이럴 때는 따라 죽을 거라고들 하는 것 같던데.”
카예나가 농담처럼 한 말에 라파엘로가 말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이 남자라면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절대 그러지 마요. 꼭 살아요.”
카예나는 절대 그러지 말라며 강조했다.
“저를 두고 떠날 것처럼 말씀하지 마십시오. …두려우니까.”
그가 카예나의 품에 얼굴을 묻고 애처롭게 말했다.
“저를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라파엘로…….”
“더 솔직하게 저를 원하시면 안 되는 겁니까? …아니. 아닙니다. 제가 사랑하겠습니다.”
그가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저는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제 모든 것을 바치거나 버리거나 이용하십시오. 저는 그 기억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럼 당신이 손해 보잖아요.”
“그러니 전하께서 저를 불쌍하게 여겨주십시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입술에 닿을 듯한 거리까지 다가가 그녀가 저를 가엾게 여기도록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저를 안타깝게 여겨주십시오. 그래서 마지못해 동정하듯 눈길 한 자락 주십시오.”
그는 기꺼이 구질구질하게 굴었다. 부끄러움 없이 그녀의 관심을 구걸했다.
“저는 그거면 됩니다.”
카예나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곧 키스할 것만 같은 거리에서 쏟아지는 고백들이 숨결과 함께 제게로 스며들었다.
“불쌍한 척하면서 가증스럽게 저를 뒤흔들려고 하시나요?”
“이렇게 해서 흔들리셨다면 제게는 기쁜 소식이군요.”
“……당신, 정말 낯서네요.”
이렇게 여우 같은 사람인 줄 몰랐는데.
라파엘로는 카예나를 가뿐히 안아 들고 책상 위에 앉혔다. 이어 참아왔던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목을 긁는 야릇한 신음이 섞여들 때쯤 라파엘로가 돌연 입술을 떨어뜨렸다.
“오늘은 저와 첫 번째로 춤춰주셔야 합니다.”
“좋아요.”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 당신의 남자라서 첫 번째로 추는 춤입니다.”
카예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음, 이 남자가 언제부터 나를 이렇게 잘 파악했지.’
그렇지 않아도 그와 첫 번째 춤을 추려고 했다. 민심을 얻기 위해 본격적으로 행동하려는 시기였다. 이때 그 어느 세력보다도 제국민 사이에서 가장 인망이 드높은 키드레이 공작가의 수장과 춤을 추는 황녀라니. 그런데 라파엘로가 카예나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연인으로서 첫 번째 춤을 추겠다고 선언했다.
“어머, 물론이죠.”
그녀의 대답에 라파엘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하지만 이내 웃어버리고는 다시 애정 어린 시선을 나누고 입을 맞췄다.
“자, 이제 다시 일할까요?”
“이렇게 일 중독인 황족은 전하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겁니다.”
“그래서 싫어요?”
“아니요.”
너무 좋아서 탈이지요.
라파엘로는 마지막으로 카예나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 그녀를 내려주었다. 그는 공증이 필요한 부분만 몇 가지 같이 확인하고 자리를 비켰다.
곧 그녀의 시녀들이 소식을 듣고 카예나를 찾아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도티 부인이 한 막말은 이미 이곳으로 오는 동안 다 들었다. 베라는 분노에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조금도 괜찮지 않지.”
카예나가 태연하게 말을 받으며 그들에게 일을 툭툭 넘겨주었다.
“내가 너희에게 너무 익숙해졌는지, 다른 이들에게 일을 시키다가 몸져누울 뻔했지 뭐니.”
그녀의 엄살에 다들 까르르 웃었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면 정말 심각했나 봐요.”
수잔의 말에 카예나는 한숨을 내쉬려다가 참았다.
“지독했지.”
그 말에 다시금 웃음이 터졌다. 식자재를 처리하는 일은 그들이 손을 보태자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줄리아가 입을 열었다.
“참, 어제 에밀 하브론이라는 궁정인이 오라버니를 찾아왔었어요. 도티 부인이 최근 계속 데리고 다녔던 그 남자 궁정인이요.”
카예나의 입가로 설핏 미소가 스쳤다. 그 남자가 하인리히의 세작이라는 것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로드릭 후작이 레제프에게 부리나케 보고했겠네.’
도티 부인은 지금쯤 레제프와 독대 중일 것이다.
똑똑.
애니가 들어왔다.
“키드레이 공작님께서 보내신 추가 인력이 도착했습니다.”
“빠르시기도 하지.”
일을 처리하는 속도가 카예나가 쉴 시간을 만들기 위해 물량 공세를 벌인다는 말이 실감 될 정도였다.
키드레이 공작이라는 말에 줄리아가 눈을 반짝였다.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에 눈이 휘둥그레질 미남이라면 너무나 유명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 근사한 외모에 심지어 딱 4살 차이의 연상이라니.
‘그런데 왜 예전처럼 두근거리지 않지…….’
줄리아는 그런 믿기지 않는 완벽한 조건의 미남을 발견했음에도 레제프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연회장에서 우연히 본 레제프는 여전히 아름답고 화려했다.
‘왜 금방 포기도 못 하게 잘생겨서…….’
어쨌든 이렇게 카예나의 직속 시녀 넷은 연회 중에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었다.
올리비아는 줄리아가 레제프를 힐끗 보더니 묘한 눈빛을 하며 시무룩해 하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맙소사. 올리비아는 깜짝 놀란 얼굴로 얼른 줄리아를 뜯어말렸다.
“저분은 황녀 전하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어요.”
수잔도 거들었다.
“남자는 절대 못 고쳐 써요. 황자에 대한 소문, 알죠?”
줄리아는 알았다며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베라는 이렇게 말했다.
“후작위를 계승해서 잘생긴 남자를 골라 만나면 되잖아요? 에반스 후작이라면 너도나도 몸과 마음을 다 바치려 들 텐데.”
그 말이 맞았다.
‘그래. 정신 차리고 작위를 계승해야지.’
줄리아는 후작위를 계승해야겠다는 목표의식을 한결 더 뚜렷이 했다.
그 순간, 애니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하녀장이 현재 황녀궁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전하께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카예나는 찻잔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쓸었다.
“그런데 드레스는 칼에 찢긴 것 같았고 머리 모양도 묘하게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감히 카예나에게 해악을 끼치는 자라면 제 왼팔이라고 할지언정 가차 없이 잘라 내버리겠다는 레제프의 경고였다.
그는 상당히 자극적인 경고성 메시지를 밖으로 내보였다. 그 도티부인이 엉망인 차림으로 황녀궁 앞에서 용서를 빈다니. 더없이 자극적인 광경이 아니던가. 지금쯤이면 오늘 연회에 참석하는 귀족들에게 이 흥미로운 소식이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로써 레르반스 도티는 완벽하게 정리당했지만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그때 올리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려하듯이 말했다.
“이제 곧 2시가 다 되어갑니다.”
오후 2시부터는 공식적으로 성년식 기념 연회가 진행된다.
“그랜드 홀에 가실 때 하녀장을 지나칠 텐데, 결단을 내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까지 도티 부인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감히 황녀 전하께 그따위로 말한 여자에게 용서라니요. 최소한 작위는 몰수해야죠!”
베라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용서는 저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상하지 않나요? 황자 전하께서 정말 처벌할 생각이었다면 수사권을 요청해 후작가를 뒤집었을 거예요.”
“어찌할까요?”
애니의 물음에 카예나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모르는 척해야지.”
카예나는 알맞게 식은 찻물로 입술을 축였다. 태연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머릿속으로는 이 사태를 부지런히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피식하고 웃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나 영악하달지…….”
고작 18살이 머리를 쓰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악했다. 레제프는 누이의 명예를 지켜내기 위해 제 세력을 모질게 내치는 척하며 실은 카예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든 차기 황제의 누나일 뿐이니 잘 처신하도록 해.’
레제프는 난도질한 사냥감을 카예나의 목전에 들이밀었다. 숨통을 끊어버릴 것인지, 아니면 목숨을 붙여줄 것인지 선택을 종용하면서.
여기서 카예나가 어떤 선택을 해도 레제프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카예나가 이대로 도티 부인을 용서해주면 그녀는 자연스럽게 레제프 아래의 서열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말에서 말로 옮겨진 것뿐이다. 도티 부인이 에밀 하브론에게 사기당한 것은 카예나의 짓으로 꾸며질 수도 있었다. 그자가 예이스터의 세작이라는 증거를 밝혀내기는 요원한 일일 테니까.
게다가 예이스터라면 낄낄대며 장작을 넣어 줄 게 뻔했다. 그는 카예나에게 최대한 많은 흠집을 내고싶어하니 썩 훌륭한 모략이었다. 하지만 잘 짜놓은 모략이라 해도 상대가 걸려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걱정할 것 없어.”
시녀들은 카예나가 다른 설명 없이 걱정할 것 없다고만 했을 뿐인데도 금방 마음이 놓였다.
‘전하께서 저리 말씀하시면 정말로 걱정할 것 없어.’
그간의 학습효과였다.
“너희가 여기에 오래 머물러있으면 황녀궁이 작당하고 도티 부인을 조롱하고 있다고 소문날 수도 있으니 이만 나가보렴.”
“네, 전하.”
시녀들이 나가고 카예나는 홀로 집무실에 남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조용히 인내했다. 레제프는 이 상황에서 연회장으로 나갔을까?
아마 카예나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침실에 처박혀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 뻔했다. 누이를 아끼는 가련한 황자처럼 보이겠지만, 아마 그녀의 매정한 손속이 보이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지.
“설마 내가 자충수를 뒀겠니, 레제프.”
그 아이는 사람이 소모품이 아님을 여전히 모른다.
“수면 위로 올라올 때라……. 확실히 그럴 때가 되었지.”
똑똑.
그때 집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애니가 당황한 기색이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황녀전하, 마일스 도티 후작이 알현을 요청하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렴.”
이내 집무실로 홀쭉 팬 볼에 연약해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도티 후작가의 가주, 마일스였다. 깔끔하게 다듬은 머리와 수염, 얼굴에 툭 걸친 안경, 오래된 느낌을 주는 고풍스러운 모양의 예복은 제 아내인 레르반스 도티와 완전히 달라 보였다.
“마일스 도티가 황녀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카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 앉으시죠.”
그는 풍파에 휩쓸리는 것을 극도로 꺼려 뒷방 늙은이를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남들은 참석하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황궁 연회에도 얼굴만 잠깐 비추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 사람도 가문에 큰 위기가 닥치니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아내 대신 용서를 빌며 일을 무난하게 무마하고자 하지 않았다.
“저는 파벌을 바꾸고 싶습니다.”
마일스 후작이 말했다. 레제프를 버리고 카예나의 편이 되겠다는 뜻이다. 카예나는 마일스 후작의 성격상 그리하지 않을까 예상은 하고 있었다. 모두가 잊고 있었지만, 마일스 후작은 레제프가 자신을 완벽히 도구로서 대하는 것을 참아낼 인사가 아니었다.
“그건 후작님의 누님들을 배반하는 생각일 텐데요?”
후작의 첫째 누이는 체임버드 왕국의 왕태후였다. 둘째 누이는 율령 왕국 황제의 남동생인 히란 대공과 결혼했다. 그 두 국가는 엘다임 제국의 이웃 나라들이며 동맹국들이었는데, 도티 후작가는 그런 왕국들과 혈연을 통해 긴밀한 사이로 이어져있었다.
사실상 제국의 외교관 역할을 하고있는 셈이었다. 대단한 군사 가문도 아니고 가장 큰 곡창지대를 가진 게 아님에도 제국에서 떵떵거릴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누이들은 레제프가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해당 왕국들의 선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파벌을 동맹관계로 여기지 않는 군주는 섬길 수 없습니다.”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군요.”
도티 후작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는 새로운 후계자가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예나는 그것에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레르반스 도티 부인은 어찌 설득할 생각입니까?”
“그 사람은 오랜 황궁 생활과 일련의 사건으로 받은 충격이 클 겁니다. 경치 좋은 곳에서 요양하는 편이 좋겠지요.”
격리 조치이자 유배였다. 사실 카예나가 도티 부인의 목숨을 언급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후작가의 체면을 세워준 것과 진배없다.
“저는 아내를 요양 보낼 것이고 황자 전하의 손을 잡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것은 길가의 돌멩이를 줍는 것과 같습니다.”
도티 후작은 자신을 먼저 발견하고 주워가는 사람이 임자라는 듯이 표현했다. 자신의 성을 부수려는 외부세력이 있다면 새로운 동맹을 맺어 영역을 보호하면 그만이다. 그 행위에 충정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더 깔끔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리라. 납득하고 만족할 이득만 제시하면 되니까. 탐색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레르반스 도티를 데리고 나가세요.”
마일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 * *
마일스 도티 후작이 제 아내를 끌고 나갔다. 그녀는 친정으로 가겠다며 소리 질렀으나 도티 후작은 묵살해 버렸다.
“과중한 업무로 내 아내가 히스테릭해져 안정이 필요하다. 국정 대리인이신 황녀 전하께서도 그녀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는 정양하도록 독려하셨다.”
이 소식은 발 빠르게 퍼졌다. 연회장에 모인 이들이 이 충격적인 소식에 너나 할 것 없이 입방아를 찧어댔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소식에 다들 사기당한 식자재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관심 두지도 않았다.
레제프는 애초에 연회장에 나타나지 않을 계획이었으나 도티 후작의 돌발 행동에 정말로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과연 카예나 황녀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에 대해 주목했다.
황궁이 도티 후작가 문제로 달아오를 즈음, 키드레이 공작가의 마차가 멈춰 섰다. 그 안에서 바옐이 붉은색 실크 타이와 감색 수트를 차려입은 모습으로 내렸다.
“새 친구를 소개하기에 아주 적절한 분위기인데?”
뒤이어 라파엘로가 내렸다. 사람들은 키드레이 공작가의 엠블럼이 양각된 마차에서 낯선 남자와 내린 라파엘로를 연신 힐끔거렸다.
파트너로 남자인 친구를 동반으로 데려가는 일은 사실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사교계에 데뷔한 나이치고 약혼자가 없는 경우가 드물고, 보통 댄스 파트너를 고려해 사전에 짝을 짓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대단한 미남들이 나란히 붙어있어서인지 그들은 연회장에 입장하기 전부터 많은 시선을 모았다.
“뭔가 시선들이 좀 이상한데.”
바옐이 미간을 찡그리며 투덜거리자 라파엘로가 말했다.
“내가 파트너를 동반해서 연회장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니까.”
“그래? 인기 많게 생겼는데 의외네.”
바옐은 낄낄거리다가도 금방 정색했다. 그것만으로는 제게 달라붙는 시선의 끈적함이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 자꾸 너랑 나랑 이상하게 훑잖아. 진짜 뭐야? 너 뭐 사고 쳤어?”
라파엘로는 지금까지 여성 파트너는커녕 가족과도 연회에 참석한 적 없다. 그런데 첫 파트너로 남자라니. 귀족들의 눈초리가 묘해졌다. 대체 저 남자는 누구일까?
라파엘로가 바옐에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당신이 내 친구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거겠지.”
“친구는 맞는데?”
라파엘로의 붉은 눈동자가 바옐과 마주쳤다.
“그러니까 성교가 가능한…….”
“아악!”
바옐은 얼른 제 귀를 틀어막았다. 이 무슨 끔찍한 소리인가!
“너는 그딴 말을 왜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야?!”
바옐이 타박하자 라파엘로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키드레이 가의 공작에게 아무렇지 않게 반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바옐은 라파엘로의 말이 못마땅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법의 힘이라면 이미 나라를 하나 새로 세우고도 남는다. 이 건방진 인간이 내가 얼마나 존엄한 사람인지 깨달아야 하는데.
“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아니다. 말을 말자.”
바옐은 유치하게 굴려다가 그만두었다. 문득 한숨이 튀어나왔다.
‘내 인복의 문제인가? 왜 이상한 애들만 꼬이지?’
끼리끼리라더니, 커플끼리 아주 제 속을 뒤집는 게 비슷했다. 바옐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라파엘로의 곁에 붙는 둥 마는 둥 애매한 거리를 유지했다.
라파엘로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물었다.
“날 의식하는 건가?”
어딘지 부끄러워하는 연인을 대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바옐은 팔뚝에 솟아나는 소름을 박박 쓸며 그에게 버럭거렸다.
“……남들이 들으면 오해한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얘는 화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 그리고 그 화법은 내 울화통을 터뜨려서 죽게 할 거야. 분명해.’
그것에 검은 장미를 세 송이 정도 걸 수도 있었다.
그들은 어느새 연회장으로 입장했다. 라파엘로가 긴 다리로 거침없이 연회장 안을 이동했다. 바옐은 속으로 다리 긴 놈들을 저주하는 말을 퍼부으며 그를 따라갔다. 능숙하게 괜찮은 자리를 잡은 라파엘로가 바옐을 향해 물었다.
“뭐라도 좀 먹겠나?”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 나한테 신경 쓰지 말아줘.”
가뜩이나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연신 흘끔거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라파엘로와 연인처럼 보이는 어떠한 행위도 사양하고 싶었다. 예민해진 바옐과 달리 라파엘로는 여상스럽게 지적했다.
“이제 사람들이 접근할 테니 말투를 바꾸는 게 좋겠군.”
바옐은 괜한 반발심에 뭐라고 톡 쏘아붙이려 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흥미로운 손님이군.”
바옐이 시선을 돌리다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라파엘로보다 조금 더 큰 거구의 은빛 머리 남자가 근처로 다가왔다.
귀족이라기보다는… 글쎄. 조직폭력배 같은 느낌이 났다.
‘이 자가 하인리히 대공자인가?’
예이스터는 마치 상품을 품평하듯 바옐을 쭉 훑었다. 그 불쾌한 시선에 바옐은 기가 찼다. 눈빛이 맛이 간 인간이었다.
‘늘 이런 놈들이 역사에 남을 사고를 치던데.’
라파엘로가 바옐을 자연스럽게 뒤로 끌며 말했다.
“제 친우입니다, 대공자.”
그러니 예의를 갖추라는 뜻이었다. 바옐은 한낱 인간이 자신을 보호해주었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괜히 코를 찡그리며 속으로 한숨을 내지었다.
‘하여간 이런 인간들을 보면 자꾸 도와주게 된다니까.’
이쯤 되니 카예나와 라파엘로가 작정하고 자신을 털어먹으려고 연민을 자극하는 건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그래, 그걸 부부사기단이라고 부르던데.’
예이스터는 라파엘로의 말에 코웃음 쳤다. 씨알도 안 먹힐 성의 없는 변명이었다.
“키드레이 공작님께 이런 친우분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요. 수도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기도 하고.”
바옐은 별것 아니라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아아, 제가 제국인이 아니라서 그럴 겁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율령 왕국이 아니라면 주변의 다른 국가는 비슷한 인종으로 모여 있었다. 외모로 국적을 분별해내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키드레이 공작이 황궁 연회에까지 데려온 외국인이라면 그 신분이 범상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 이 정도 외모를 지닌 주변국 유명인사라면 예이스터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예이스터는 갑자기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런. 제 소개를 드리는 게 늦었군요. 하인리히 대공가의 예이스터라고 합니다.”
‘자, 이제 네 출신을 밝혀.’
예이스터가 비죽 웃으며 바옐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변변찮은 이름이 나올지 벌써 기대되었다. 근처로 몰려들었던 귀족들도 흥미롭게 이 상황을 관전했다.
바옐이 매력적인 미소를 띠며 손을 내밀었다.
“바옐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라는 말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 그게 몰락한 왕국의 성씨라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 왕가의 후손이 난데없이 키드레이 공작의 친구로 등장하다니?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왕가의 씨가 마른 줄 알았는데?’
확실히 놀라운 정체이기는 했다. 그러나 몰락한 왕가라는 점이 애매했다. 왕족은 망해도 3대가 떵떵거리며 산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그것은 재산적인 부분일 뿐 명예는 그렇지 않다. 다스릴 것 없는 지배자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기본적인 문제를 공작이 모르지 않을 텐데 친우로 소개하다니. 무슨 꿍꿍이일까.’
게다가 크로노스 가를 상징하는 어떤 증거를 내놓은 것도 아니다. 지금 당장은 그저 키드레이 공작가가 지닌 이름값이 신원을 보증해주는 것뿐이었다.
예이스터는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다.
“크로노스 가의 후손이셨군요. 이거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바옐이 내민 손은 맞잡지 않았다. 망한 왕조의 후손과는 손을 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예이스터의 무례와 조롱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이제 마드레나 왕국도 없는데 어디에서 지내시는지요? 괜찮으시다면 제 저택에서 머무셔도 됩니다.”
예이스터가 빙글빙글 웃으며 바옐을 집도 없이 떠도는 난민 취급을 했다.
‘마법으로 조금 많이 아프게 하는 정도면 티 안 나지 않을까.’
바옐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라파엘로가 대신해서 말했다.
“하인리히 대공자께서는 왕족을 손님으로 맞아본 경험도 없으실 텐데 무리하실 것 없습니다.”
그는 딱 예이스터가 무례한 만큼 무례하게 말했다.
“……아아.”
예이스터가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수도생활을 하면서 라파엘로와는 지금까지 크게 부딪쳐본 적 없었다. 키드레이 공작가가 강력한 힘을 지닌 중립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게 나오네?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득였을 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 같더니 귀족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파도처럼 갈라졌다.
“저와 춤추기로 하셨던 분이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시나요?”
설익은 복숭아처럼 풋풋한 색에 밝은색의 보석으로 아낌없이 눈부시게 치장한 카예나였다. 그녀가 카트린과 팔짱을 낀 채로 나타나 빙긋 웃고 있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다들 그녀를 향해 예를 갖췄다. 카예나도 샤프롱에게서 살짝 떨어져 드레스 자락을 잡고 간단하게 인사했다.
카예나의 등장에 귀족들의 눈빛이 더욱 심상치 않게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티 부인이 일을 저지르고 마일스 후작에게 끌려간 게 고작 낮의 일이었다. 심지어 레제프를 비롯한 황자파 핵심 인사들이 연회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크로노스 왕가의 후손으로 인해 화제가 조금 뒤섞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여전히 뜨거운 이슈였다.
예이스터가 건들건들한 태도로 카예나에게 말했다.
“키드레이 공작의 친우분과 인사 중이었습니다, 황녀 전하.”
카예나가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라파엘로와 그의 곁에 선 바옐을 번갈아 보았다.
라파엘로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소개했다.
“여기는 바옐 크로노스입니다, 황녀 전하.”
“바옐 크로노스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바옐이 카예나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제대로 예를 갖췄다.
“어머… 크로노스 왕가의 후손이신 모양이네요? 반가워요. 카예나라고 해요.”
카예나는 그렇게 말하며 은밀히 마법으로 바옐의 명치를 가격했다. 그러나 역시 검은 정원의 주인이라는 건지,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막아냈다.
‘아니, 이 황녀가 정말…….’
바옐은 애써 떨떠름해지려는 표정을 수습하며 입을 열었다.
“…과거의 영광일 뿐이죠. 전하께서 환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디 이 연회가 마음에 들었으면 해요.”
“더할 나위 없습니다. 아주 새롭고 신선해서요.”
그들의 대화가 조금 길어지려고 하자 라파엘로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은근한 불만 표시였다. 가상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수상한 자와 친근하게 이야기하는 게 마뜩잖았다.
‘음, 주위를 어떻게 끌지.’
라파엘로가 카예나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 저와 첫 춤을 추기로 하셨지요, 전하.”
“네, 그랬죠. 그래서 파트너를 애타게 찾아다녔더니…….”
그녀가 바옐을 힐끔 보았다. 대체 이 조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도회는 그 연회의 참석자 중 직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 먼저 춤을 추지 않으면 누구도 춤을 출 수 없었다. 아니면 다들 춤을 추라고 허락이라도 내려주어야 했다.
카예나는 오늘 라파엘로와 첫 춤을 출 생각이었기에 따로 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았었다.
“좋아요. 가죠.”
라파엘로가 카예나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고 하자 예이스터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황녀 전하의 춤 파트너가 될 영광은 제게 주시겠습니까?”
이후에 정해진 댄스 파트너는 없었다. 연회 중에 하인리히 대공자와 한차례는 반드시 같이 춤을 춰야 하기는 했다. 피는 조금도 이어져 있지 않지만 어쨌든 가계도 상으로는 친인척 관계이니.
카예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하려 했을 때였다. 그녀의 뒤에서 악에 받친 외침이 들렸다.
“천벌을 받아라, 예이스터!!”
증오로 가득한 목소리였다. 근처에 있던 귀족들도 짧게 비명을 내지르며 분위기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카예나도 마찬가지로 이런 연회에서 들을 일 없는 종류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과 예이스터가 있는 쪽으로 연회복을 입은 남자가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살기로 번득이는 눈빛이다. 카예나는 저런 눈빛을 한 사람이 이후에 어떤 짓을 하는지 잘 알았다. 이미 저런 눈빛을 보았으니까.
총을 발견한 라파엘로가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전하-!”
총을 든 자의 위치가 카예나의 바로 뒤였다.
‘안 돼!’
카예나의 부릅뜬 두 눈과 정면을 향한 총구만이 눈에 들어왔다. 라파엘로가 손을 뻗었다.
탕-!
굉음이 터져 나왔다.
* * *
톡, 톡, 톡…….
소리가 멈췄다. 아비규환으로 뒤덮인 것 같았던 세상도 멈추었다. 카예나가 시간을 멈춘 것이다. 탄환이 가슴께 앞에서 멈춰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카예나는 이 탄환에 맞았을 터였다.
바옐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그 손이 호두라도 바스러뜨리듯이 탄환을 쥐고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적절했네.”
그가 마치 욕설을 뱉는 것처럼 말했다. 표정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카예나는 시선을 돌려 총을 쏜 남자를 보았다. 귀족이 분명한 자였다. 그러나 연회복에 놓인 자수가 요즘 유행하는 모양이 아니다. 돈이 없어서 새로운 연회복을 맞추지 못했거나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최대한 말끔하게 꾸민 것 같지만 묘하게 어수선한 차림새였다. 사용인이 시중을 들어준 모양새가 아니었다. 예이스터가 빚을 지워 몰락시킨 수많은 가문 중 한 곳의 가주인 것 같았다.
바옐이 총을 든 남자에게 다가갔다. 시공간의 반발력에 가벼운 정전기 같은 감각이 살갗을 간지럽게 건드렸다.
“탄환이 하나로 끝이 아닐 테니 연사할 게 뻔해. 내가 제압할 테니까 마법을 풀어.”
카예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멈춘 시간을 다시 움직였다.
“꺄아악!”
다들 바닥에 몸을 다급히 굽히며 소리 질렀다.
탕! 탕! 타앙-!
바옐의 예상대로 남자는 방아쇠를 연속으로 당겼다. 그러나 이미 손을 붙들린 상태로 위로 들어 올려져 있었기에 애꿎은 천장만 쏘아댔다.
“이, 이게 무슨…!”
남자는 분명히 정면으로 겨누고 있던 팔이 들려있음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바옐은 단숨에 총을 빼앗고 남자를 바닥에 포박했다.
어느새 라파엘로는 카예나를 끌어안아 총기 난사범 쪽으로 제 등을 보였다.
총성에 기사들이 연회장으로 들이닥쳤다.
“저자를 당장 체포하여 뇌옥에 가둬라!”
“예, 전하!”
그러자 예이스터가 야차처럼 구긴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저를 죽이려 한 놈입니다! 대공가의 감옥에 가둬 제가 직접 심문할 것입니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에게서 떨어져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예이스터를 바라보았다.
“저자는 대공자에게 원한을 갖고 황궁에서 총을 발포했습니다. 그것도 내 성년회에서.”
“저를 노린 것입니다.”
“대공자를 노리다 황족이 죽을 뻔했지요.”
카예나가 차갑게 일갈했다.
“감히 사사로운 원한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오도록 처신 하나 똑바로 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예이스터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분하지만 카예나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다. 그의 부주의한 행실로 인해 황족이 죽을 뻔했다.
카예나는 그에게 죄를 물을 수 있었다.
“오늘 바옐 크로노스 경이 아니었더라면 난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겁니다.”
“전하.”
“저자가 대공자를 해하려는 척, 실은 나를 공격한 것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이 책임에 대공자가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이 일에서 과연 예이스터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이 일을 사주했다고 누명을 쓰지만 않아도 다행이었다. 카예나는 무서울 정도로 냉혹한 표정으로 그를 다그쳤다.
“그런데 감히 내 앞에서 범인을 데려가겠다고 소리치다니!”
서슬 퍼런 분노에 다들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절로 몸이 움찔하는 기백이었다.
예이스터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가 이내 몸에 힘을 뺐다. 그는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카예나를 향해 엎드렸다.
“소신의 미욱함으로 감히 황녀 전하를 위험에 처하게 하였습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 것입니다.”
귀족들이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황제도 두려워하지 않는 저 개망나니가 누군가에게 저렇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 받은 충격이 너무 커 이대로 연회를 진행하지 못하겠으니 파장하겠습니다. 내일부터는 연회장에 입장하는 이들의 몸수색을 더 철저히 진행할 것이니 다들 그렇게 아십시오.”
귀족들은 이 충격적인 사태에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파장이라니, 아직 파악해내지 못한 일이 많다. 카예나가 앞으로 어떤 정치적인 행보를 보일 것인지, 레제프에게 계승과 관련해서 도움을 줄 생각은 없는지 무엇하나 물어보지 못했다. 난데없는 총기 난사 사건으로 인해.
곁에 같이 서 있었던 카트린이 창백한 낯빛으로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제 본분은 잊지 않았다.
“전하, 황녀궁까지 모시겠습니다.”
카예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이모님도 놀라셨을 텐데 이만 돌아가 보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기사들을 불러 카트린을 호위하도록 했다.
라파엘로가 완전히 굳은 얼굴로 카예나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다행히도 총에 맞지 않았네요.”
위험하긴 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오늘의 공로를 인정해 바옐에게 작위를 수여할 작정이었다.
총을 맞을 뻔한 카예나보다 되레 라파엘로의 안색이 더 창백했다. 그는 정말로 카예나가 총에 맞는 줄 알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아무리 빠르게 달려가도 쏘아진 총알보다 빠를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카예나를 품에 안은 순간까지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 허공을 향해 난사된 총소리만 시끄럽게 귓전을 울려댔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상황이 정리되었다. 바로 옆에 있는 줄 알았던 바옐은 언제 그자를 포박한 거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것을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당장 카예나의 안위가 더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카예나가 바옐에게 눈빛을 보냈다.
“두 사람은 저를 잠시 보고 가시죠.”
그녀는 방금 죽을 뻔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휴게실을 향해 걸어갔다. 라파엘로에게 배당된 곳이었다.
문이 닫히고 삼자대면이 이루어졌다.
카예나가 뒤를 휙 돌아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자, 이제 설명해주시겠어요?”
바옐이 대꾸했다.
“친구 사이야.”
“……?”
라파엘로는 방금까지 총격으로 인한 충격도 잠깐 잊어버릴 만큼 새로운 충격에 휩싸였다. 황녀 전하께 반말을 쓰네?
“내가 알기로는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이유가 없는데?”
카예나의 추궁에 라파엘로가 이실직고했다.
“팔라딘 수색 반경을 넓히려고 데니안 사제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저 남자가 자신이 사원의 주인이라며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라파엘로가 카예나에게 물었다.
“저 남자와는 무슨 사이이십니까?”
“뭐…. 계약 관계?”
실제로 수명으로 마법의 힘을 거래했으니 계약 관계라는 설명이 더없이 적절했다.
‘나도 설마 바옐이 사원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는데. 언젠가 올리비아와 엮일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라파엘로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때 말씀하셨던 가짜 남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계약이라는 게 그렇게 들릴 수도 있군.’
바옐이 바락 소리쳤다.
“아니거든!”
“그럼 뭡니까, 당신은?”
라파엘로는 완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옐을 노려보다시피 했다.
“일단 가짜 남편 후보는 아니니까 표정 풀어요.”
카예나가 아니라고 해명하자 라파엘로의 표정이 금방 풀렸다.
‘은근히 단순하단 말이지…….’
“어쨌든 바옐은 상당히 유능한 조력자예요. 당신과 친구가 되었다는 게 참 뜻밖이지만…. 잘 지내봐요.”
별로 잘 지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카예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싫어. 쟤랑 나랑 무슨 오해를 받은 줄 알아? 쟤 애인 취급을 당했다고!”
그 말에 이번에는 카예나가 떨떠름해졌다. 자신과 라파엘로가 그렇게나 얽혀도 어떤 스캔들 하나 나지 않았는데, 그저 동행했을 뿐인 바옐은…….
‘나랑 라파엘로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뭐야.’
왠지 바옐에게 진 기분이었다.
“……축하해.”
“농담할 기분 아니라고!”
라파엘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사람들은 방금 무슨 일을 겪었는지 까마득하게 잊은 걸까? 이쯤 되니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자신이 이상한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오늘 꼭 의원에게 진찰받으십시오.”
“알았어요.”
“따뜻한 차도 충분히 드십시오. 아니, 제가 기사를 이끌고 근방을 수색하여 다른 위험이 없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얼씨구. 차라리 침실로 가서 지키지그래?”
“그럴 수 있다면 진즉 했겠지.”
바옐은 괜한 말을 했다는 듯이 표정을 와락 구겼다.
“으, 난 나갈래.”
그는 커플 사이에서 더 있기 괴롭다는 얼굴로 휴게실에서 나가버렸다.
카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라파엘로에게 말했다.
“정말 괜찮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게 중앙군 통솔권이 있다는 거, 잊지 않았죠?”
여전히 안심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해야 할 일이 또 많을 것 같으니 이만 자리 정리해야겠어요. 우리 할 일 있잖아요.”
내일부터 빈민촌에 스튜를 배식해야 한다. 오늘 일어난 총기 사건도 심문해야 할 테니 제법 바쁠 터였다. 카예나는 표정이 좋지 않은 라파엘로를 꼭 안아주었다.
“아까는 고마워요.”
라파엘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카예나를 마주 안았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습니다.”
왜 위험한 상황은 이토록 끊이지를 않는지. 그는 카예나가 이대로 계속 황궁 생활을 하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등을 토닥였다. 마법이 있기에 자신의 안전함을 믿을 수 있지만, 라파엘로의 눈에는 이 모든 상황이 얼마나 불안할까?
카예나는 안심시키려는 듯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서 쉬어요.”
라파엘로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었다. 카예나는 휴게실을 나오자마자 호위기사들의 보호를 받았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라파엘로에게 인사했다.
“그럼 이만.”
꼭 떠나가는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 같아서 마음이 좋지는 않았으나 발걸음을 돌렸다.
‘뭔가 확신을 줄 만한 일이 필요한 것 같은데.’
마침내 연회의 주인공까지 그랜드 홀을 떠났다.
* * *
황녀궁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누님!”
총격 사건을 들은 레제프가 카예나를 찾아온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전에 스스로 독을 마셨을 때도 그랬지만, 참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카예나를 이용해 제 잇속을 챙기고자 서슴없이 그녀의 입에 독을 들이부었던 게 고작 얼마 전 일 같은데.
“다행히도 아무 일 없었어.”
레제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카예나의 곁에서 나란히 걸었다.
“의원을 부를까요?”
“총에 스치지도 않았으니 괜찮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어느새 침실 앞에 도착하자 문지기 하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레제프도 안으로 같이 들어갔다.
침실 문이 닫혔다.
탁!
레제프가 카예나의 팔을 붙들고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방금까지 짓고 있던 걱정스러워 하는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랑 어쩌고 싶은 거야, 누나?”
카예나가 무감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너야말로 어쩌고 싶은 거니?”
그들은 눈빛을 날카롭게 맞부딪쳤다.
“나와 결혼하고 싶어서 애가 탄 이들이 네게 아첨하고 난리였을 텐데, 기쁘지 않았어?”
레제프가 신경질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하! 기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겠지.”
그는 카예나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풀어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위로 들어 올렸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무례한 짓이었다.
그러나 카예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도티 후작과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그자가 나를 배신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다고?”
카예나가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아니라 네가 어떻게 한 거잖아.”
“뭐?”
“너는 사람을 도구 취급하는 걸 그만둬야 해. 네가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데 누가 너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겠니.”
카예나의 말에 레제프가 으르렁거리듯이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제 턱을 붙잡은 레제프의 손을 탁 쳐냈다. 오늘 하루 동안 벌어진 일들에 아닌척해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보다는 시간을 멈췄던 탓인지 머리가 쿡쿡 쑤셨다. 그래도 토혈하거나 쓰러지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두통이 조금이나마 완화되지 않을까 하여 머리에 고정해놓았던 장신구를 하나씩 풀어냈다. 금빛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귀족이라는 건 황족을 위한 도구지. 다들 다음 대 황제가 될 후계자를 이루는 부품이 되어 움직이잖아. 안 그래?”
레제프는 누이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걸어 콱 움켜쥐고 말했다.
“그런 도구 따위가 선을 넘으려 들면 주인 된 도리로 당연히 주제 파악을 시켜줘야지.”
탁.
카예나는 마지막 장신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건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내 유모도 죽였니?”
“……뭐?”
그녀는 어느새 장신구를 모두 풀어낸 모습으로 레제프를 돌아보았다. 불빛이 머리카락에 가려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평소에는 시리도록 밝았던 눈동자가 섬뜩하게 어두웠다.
“내가 주제 파악을 못 해서 내 유모를 죽였어?”
“어떻게…….”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 죽였던 수행원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일찍이 클로렌스 엘리반을 감시하고 있던 이들이 있었고 추격당했다고 했지. 그게 카예나의 세력이었다고?
‘누님이 그럴만한 세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을 때니 누가 알려준 거야.’
“너는 어떻게 하면 누이가 말을 잘 듣게 만들 수 있을지만 고민하잖아.”
“그래서 이러는 거야?”
레제프가 비죽 웃었다.
“10년 전에 헤어져서 기억도 가물가물할 그런 여자 때문에 나를 배신하겠다고?”
기가 찼다. 정말이지 어리석은 짓이었다. 진짜 저를 보살펴줄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감히 대들다니.
“현실을 직시해. 그딴 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야. 누님은 황족이잖아.”
“…….”
“피의 무게를 알아야 할 것 아냐!”
그의 다그침에 카예나는 상대할 의지를 잃어버렸다.
이 아이는 정말로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구나. 손끝이 차게 식었다. 마법을 사용한 여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끔찍한 감각이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자신을 좀먹는 게 느껴졌다. 이건 분노나 슬픔처럼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다.
“피곤해. 쉬고 싶어.”
카예나는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
레제프는 뭐라고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만두었다.
“…어리석은 생각은 그만두시길 바랍니다, 누님.”
그는 그렇게 경고하고 침실에서 나갔다.
조금 뒤에 애니를 필두로 하급 시녀들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들은 카예나가 바로 잠자리에 들 수 있도록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피곤하시면 마사지를 좀 해드릴까요?”
애니의 말에 카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탁하마.”
카예나는 애니만 남기고 모두 물렸다.
“도나는 어때?”
그 물음에 애니가 대답했다.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지만, 전과 비교해 확실히 전하의 근처에 머무르려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계속 잘 지켜보렴.”
“예, 전하.”
카예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애니가 마사지해주는 것을 받으며 기분을 침착하게 정리했다. 그녀는 레제프에게서 특별한 인내심을 기대하지 않았다. 자신을 사람처럼 대해주리라는 것도 애초에 포기했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내달려야 한다. 가진 모든 것을 활활 태워서라도 반드시 결승점에 도달할 작정이었다.
그때 라파엘로가 불쑥 떠올랐다.
솔직해지라고 했던가.
“…애니.”
“말씀하십시오.”
“나를 좀 도와야 할 일이 있다.”
도와달라고?
애니가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 * *
“황녀궁 급보입니다.”
비밀통로를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황녀궁?”
늘 황녀궁 급보를 전달했던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통로는 철저히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었기에 아마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세작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급보를 나르던 여자가 계속 오지 않았기에 그 생각에 더욱 확신이 들었다.
그는 로브로 모습을 감춘 여자의 시야를 차단한 채로 정보를 나르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제레미를 호출했다.
제레미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황녀궁 급보라니?”
애니는 세작으로서의 수명이 끝났다. 그녀는 황녀의 사람으로 완전히 돌아섰는데 갑자기 급보라고? 뭔가 이상했다. 함정일 가능성이 있었다.
‘이 비밀통로가 외부에 세어나갔을 가능성은 적은데…….’
제레미는 여차하면 상대를 베어버릴 준비를 했다. 세작이 정보를 전달하는 방으로 내려갔다. 차양 너머에 로브로 모습을 감춘 사람이 보였다.
“얼굴을 드러내라.”
“기사들은 내보내 주시오.”
제레미는 멈칫했다. 어라, 이 목소리 익숙한데? 뭔가 느낌이 묘했다. 그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저질렀다.
“모두 자리를 비켜라.”
방에 제레미만 남고 다들 나갔다. 그러자 여자가 후드를 끌어내렸다. 반투명한 차양에 가려져 있으나 이 천을 뚫고도 느껴지는 저 미모를 모를 수가 없었다.
“화, 황녀 전…!”
“쉿.”
카예나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더니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공작님을 만나고 싶은데.”
제레미는 너무 놀라 벌렁거리는 심장을 붙잡다가 얼른 정신 차렸다.
오늘도 라파엘로는 술을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 들기는 했으나 아직 자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제레미는 몹시 정중하게 카예나를 안내했다. 라파엘로가 사용하는 침실 근처로는 원래 사람이 없다. 그가 주변에 사람이 있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똑똑.
제레미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제레미입니다.”
곧 라파엘로가 바지 위에 상의는 가운만 대충 걸친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제레미는 급한 용건이 아니면 라파엘로가 홀로 있는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찾아왔다는 뜻은 뭔가 중요한 용건이 있다는 말이었다. 제레미는 한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의아하던 찰나에 문에 가려져 있던 곳에서 로브로 모습을 가린 여자가 나타났다.
“내일 오전에 제가 직접 모시러 오겠습니다.”
“뭐?”
그때 모습을 가린 자가 라파엘로의 가슴팍을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라파엘로가 반사적으로 상대를 밀쳐내려 했을 때였다.
“……황녀 전하?”
후드가 걷히자 빙긋 웃는 카예나의 얼굴이 보였다.
라파엘로는 잠깐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이 술을 많이 마셨나? 헛것이라도 본 건가?
카예나가 로브의 여밈을 풀어냈다. 그녀는 잠옷 차림이었다. 무게감 있는 옷감으로 만들어진 그 원피스는 걸음걸이에 따라 그녀의 몸을 휘감으며 실루엣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라파엘로의 앞에 다가선 카예나가 그의 가운을 잡고 제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당신을 원해요, 라파엘로.”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라파엘로는 당장 카예나를 안아 들어 제 침대로 향했다. 숨결이 뜨겁게 얽혀들었다.
* * *
어스름해진 새벽빛이 카예나를 예민하게 건드렸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온기 하나 없는 새파란 바깥을 보니 여명이 비추기까지 시간이 남은 듯했다.
엷은 숨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시야에 닿은 낯선 색의 차양과 조금 다른 이불의 감촉, 등 뒤로 느껴지는 단단한 몸과 허리를 감싼 남자의 팔이 서서히 현실감을 깨웠다. 이 모든 낯선 상황에 대한 생경한 감상보다도 먼저 든 생각이 있었다.
‘오늘도 죽지 않았구나.’
안도인지 뭔지 모를 묘한 기분이었다. 어쨌든 하루는 또 벌었다. 그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그렇다면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카예나는 슬슬 황녀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뒤척였다. 그러나 마치 도망할 걸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라파엘로가 품에 가두다시피 자신을 안고 있었다. 온몸이 뻐근해 몸부림치기도 쉽지 않으니 금방 포기해버렸다.
하품이 새어 나왔다. 늦은 새벽까지 라파엘로에게 안겨 몇 번이고 달아오르기를 반복했다. 분명히 늦지 않은 시간에 온 것 같았는데 잠들기 직전에 보았던 시간이 새벽 3시쯤이었던가…….
카예나는 억지로 몸을 돌려 잠든 라파엘로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짙은 빛이 잠든 라파엘로의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음영을 만들어내는 완벽한 이목구비와 길게 뻗은 속눈썹, 그토록 깨물어댔음에도 야살스럽게 도톰한 입술이 보기 좋았다.
‘흐음.’
이렇게 가만히 누워 라파엘로를 보고 있노라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미남이 복지라고 했던가. 삶의 복지가 제대로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예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그의 턱 끝에 살짝 입 맞췄다.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다. 다른 준비는 필요 없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서 벗어나 잠옷을 다시 걸치고 로브는 손에 들었다. 이 순간에도 라파엘로는 깨지 않았다.
‘최근에 계속 잠을 잘 못 잔 것 같은데.’
혼자서 대체 무슨 고민과 걱정이 그리도 많기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걸까?
카예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이마에 키스했다.
“라파엘로.”
살짝 불러보았음에도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이곳에 방문했다는 사실은 제레미만 알고 있지만, 그가 오전에 오겠다고 말했으니 카예나가 알아서 황녀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어차피 돌아갈 방법은 생각해두었다.
“거리가 좀 먼데 괜찮으려나.”
그녀는 제 침실을 떠올리며 마력을 일으켰다. 공간을 편집해 순간이동 할 생각이었다. 명확한 이미지가 떠올랐을 때, 카예나는 이 공간에서 자신을 잘라내 버렸다. 침실에서 카예나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카예나가 등지고 있던 빛이 라파엘로의 얼굴에 비쳐들었다. 여전히 붉은 기 없이 고요한 두드림이었다. 색색 울려 퍼지던 작은 숨소리가 뚝 멎었다. 기이한 침묵이었다.
“…….”
푸른 새벽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 * *
카예나는 늦지 않은 시점에 저택에서 자취를 감췄다. 공간을 편집해 제 침실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손에 든 로브를 치우고 침대를 적당히 흩트렸다. 혹시 몸에 어떤 흔적이 남았을지도 모르니 엘릭서를 마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연회는 고사하더라도 오늘 일찍부터 확인할 일들이 많았다.
이런 날이면 카예나가 새벽처럼 일어난다는 사실을 시녀들도 이제 잘 알기에 이른 시간에 침실을 찾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 도나를 비롯한 하급 시녀들이 시중 하녀와 함께 들어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전하.”
카예나는 막 일어난 사람처럼 침대 휘장을 걷었다.
“욕조에 물을 받아두었습니다.”
몇 달 전부터 황녀는 시간을 칼같이 썼다. 이미 황녀궁 소속 궁정인들도 그 패턴에 맞춰 아침 단장할 준비를 해놓는 것에 익숙해졌다.
슬리퍼를 신고 일어나자 어깨에 보드라운 담비 털 담요가 덮였다. 자고 일어나 몸이 식었을 황녀가 얇은 잠옷 차림으로 인해 고뿔이라도 들면 큰일이었다.
카예나는 앞을 여미며 드레스 룸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시녀들이 침실로 오기 전에 이미 드레스 룸을 사용할 준비를 마쳐두었는지 안이 환했다. 아직 새벽녘에 가까운 시간이라 빛이 부족하니 램프와 초를 넉넉하게 밝혀놓은 것이다. 폭이 좁고 가로로 긴 테이블에 몸단장할 것들이 차례로 놓였다.
카예나는 환복을 시작할 때, 미리 준비된 연회복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연회복은 필요 없다.”
그녀는 오늘 그랜드 홀에 갈 생각이 없었다. 어제 총격 사건으로 인해 하루쯤 빠져도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평민처럼 보이는 옷과 모습을 감출 로브를 준비해다오.”
뜻밖의 지시에도 하녀들은 당황하지 않고 금방 적당한 옷을 찾아왔다.
도나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이 소식을 어서 황자궁으로 나르고 싶었으나 카예나가 먹을 수프를 준비해야 했다. 눈치가 빠른 제 주인은 조금만 늦어져도 금방 이상함을 알아챌 것이다.
도나는 이만하면 충분히 용의주도하게 잘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크림을 듬뿍 넣은 호박 수프를 받아왔다. 카예나는 그릇을 받아 은스푼으로 수프를 조금씩 떠먹었다.
준비는 더 할 것이 없었다. 카예나는 밤새 심문한 총기 난사범의 정체를 보고받았다.
“케이트 자작이라고, 지방 귀족인데 사병을 꽤 거느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가문이 빚으로 망하고 지금은 조디악 백작이라는 자에게 흡수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조디악 백작은 예이스터의 또다른 암흑세계용 이름이었다. 카예나는 피식 웃었다.
‘나도 암흑가에 진출하려면 그런 별명을 하나 만들어야 하나.’
“그래, 조디악이라는 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조사해보아라.”
그 끝에 예이스터가 나올 테니.
‘조디악 백작이 예이스터라는 사실을 알만한 자는 로드릭 에반스 후작 정도일 텐데…….’
이외에도 오늘 토지 개간에 동원될 중앙군 숫자, 수도 곳곳에 세워질 무료 급식소의 준비 상태 등도 보고받고 있을 때였다.
똑똑.
문이 열리자 황실 직속 기사, 이든이 들어왔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카예나가 로비로 내려가자 기사단 제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제다이어의 모습이 보였다.
마차에 오르고 문이 닫혔을 때 그녀는 곧장 창을 열었다. 역시나 마차 바로 옆에서 제다이어가 말에 올랐다.
“하인리히 대공자가 뭐래?”
제다이어는 흠칫하다가 그녀가 또 마법으로 소리를 차단 시켰으리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금주 내로 어떻게든 황녀궁 기사가 되라고 했습니다.”
제다이어를 황궁에 들여보낸 것부터가 이미 빤한 일이었다.
“흐음, 그래? 그럼 어떻게 황녀궁 기사가 될 작정인데?”
“어제 사건 이후로 황실 직속 기사들이 더욱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 에반스 후작가의 돈을 받고 있더군요.”
“뭐, 손쓸 것도 없이 저절로 황녀궁 소속이 될 예정이었겠네.”
“이대로라면 제가 황궁을 빠져나가기가 요원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황녀궁 소속이 되어 자리를 비우는 때가 생기면 자연히 황녀의 지시를 받아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게 들통난다.
카예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예이스터가 훌륭하게 판을 깔아줘서 다행인걸?”
제다이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카예나가 말을 이었다.
“당신, 누가 봐도 수상하게 황녀궁에 들어가고 싶다고 난리 피워 봐.”
그러면 모든 일이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그러다가 목이 잘리면 어떡합니까?”
추방보다는 수상한 자로 몰려 뇌옥에 갇힐 것 같은데……. 그의 걱정에 카예나가 말했다.
“괜찮아. 당신은 그 자리에서 목이 잘릴 거야.”
“……예?”
“예고했으니까 그때 돼서는 너무 놀라지 마.”
‘아니, 갑자기 내 목이 잘린다는데 어떻게 안 놀라?’
카예나가 웃었다.
“시체는 궁 밖으로 나가잖아. 죽은 사람으로 사는 게 조금 찝찝하겠지만, 어차피 암흑가에서 산사람 호패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예에.”
대충 무슨 계획인지는 알 것 같았다. 수상쩍게 행동하며 난리를 피우는 제다이어를 심하게 몰아붙여 그 자리에서 처결해버리고 시체를 치우는 척 밖으로 빼돌리는 계획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산 사람을…….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동생, 황궁으로 보내줄래?”
“…예?”
“당신이 일을 모두 처리할 동안 동생이 계속 아픈 상태로 숨 붙이고 있는 거, 너무 가혹하잖아. 그래도 내게는 당신이 필요하니 인질은 있어야겠고.”
그래서 제다이어의 동생을 황녀궁 궁정인으로 받을 생각이었다.
“일도 거의 하지 않는 보직에 앉힐 테니 걱정하지 마. 나는 내 사람은 확실히 챙겨주니까.”
제다이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닌척 하고는 있었으나 마음이 상당히 초조했었다. 동생을 예이스터의 눈을 피해 숨겨놓기는 했으나 그것은 완벽한 방어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아이는 상태가 더 나빠지고 있었다.
그런데 카예나가 동생의 병을 고치고 예이스터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황녀궁에 데리고 있어 주겠다고 선언했다. 마치 인질극을 벌이겠노라며 무심하게 포장하면서.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족이 뭐하러 별거 없는 청부업자 하나를 이렇게 살뜰히 보살핀다는 말인가?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나?
제다이어는 코끝이 시큰해져 고삐를 더욱 꽉 틀어쥐었다.
솔직히, 고마웠다. 모든 이해관계를 떠나서 고맙다는 그 말이 제 진심이었다.
“…감사합니다.”
카예나는 그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창밖을 멀거니 보며 툭 말했다.
“인질을 잡겠다는데 감사하다니. 이상한 말이로구나.”
‘아아, 이래서…….’
황녀의 이런 면모로 인해 주변에 계속해서 사람이 모이는 모양이다. 그녀를 믿고 따르는 이들은 특히나 공명심이 있으며 면면이 훌륭한 이들이었다. 제다이어는 이런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떨지 감히 상상해보지 못했다. 이런 지배자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마음이 혹여 나중에 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장 중요한 이슈도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어제 들른 저택에서 이상한 자들을 목격했습니다.”
제다이어에게는 남다른 위기 감지능력이 있었다. 그는 하인리히 대공자가 황성 근처에 마련한 작은 별저에서 본 이상한 무리를 떠올려보았다. 느낌이 상당히 좋지 않다. 황녀는 마법사이니 무슨 일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도 있지 않을까?
제다이어는 자신이 보았던 것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검은 로브를 입은 무리라고?”
애석하게도 그런 자들은 카예나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소설로 보았던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검은 로브를 입은 수상한 무리……. 대공자가 부리는 폭력배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많지 않아.’
그렇다 해도 그런 특이한 자들에 대한 정보가 없는 건 이상한 일이다.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려고 하니 제다이어의 반응이 찜찜했다.
‘미래가 바뀐 걸까?’
바옐이라면 금방 확인해줄 수 있을 텐데. 카예나는 혹시나 하여 마차 안을 확인해보았다. 하지만 그 도도한 마법사는 본인이 원할 때가 아니면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다이어가 말했다.
“다 와 갑니다.”
마차가 목적지에 들어섰다. 카예나는 후드를 깊게 뒤집어썼다.
* * *
수도 엘퀴엠의 이스트 타운. 그러나 사람들은 이곳을 이스트 타운이 아니라 빈민촌이라고 불렀다.
이스트 타운에 오늘 수도 전역에 세워진 무료 급식소 하나가 설치되고 있었다. 빈민가의 사람들은 낯선 천막이 세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 사이에 덥수룩한 머리칼에 수염을 기른 남자가 섞여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발데마르’로, 한때 선황후를 곁에서 보필한 의원이었다. 그녀가 손쓸 틈도 없이 알레르기로 죽기 전까지는.
발데마르는 말과 마차, 기사들과 잡역꾼들을 훑어보았다. 저런 자들이 빈민을 바라보는 시각은 뻔했다. 도시를 갉아먹는 더러운 들쥐. 그런데 가난한 제국민을 위한 무료 급식소라고?
‘그것도 카예나 황녀가?’
어린 시절부터 타고난 성미가 포악하기로 유명한 황녀가 미천한 자에게 음식을 나눠준다는 것을 쉬이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배를 곯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들은 음식을 나눠준다는 말에 경계하면서도 전날 통보받은 장소 근처로 모이게 되었다. 그런데 근처로 다가갈수록 좋은 냄새가 진동했다.
“이곳으로 줄 서도록!”
기사들이 그들이 마구잡이로 달려들지 않도록 통제했다.
가장 먼저 줄을 선 사람은 발데마르였다. 그라면 스튜를 맛보고 안에 이상한 게 있을 시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데마르는 챙겨온 나무그릇에 스튜를 넉넉하게 받았다. 국물은 재료가 제대로 우러나와 짙었다. 그런데 국물 위로 건더기까지 푸짐했다.
발데마르가 스튜를 후루룩 마셔보았다. 입안을 열심히 굴리며 이상한 점을 찾아내려고 했다.
“…괜찮군.”
그의 말에 스튜를 받아온 이들이 그릇에 코를 박고 게눈 감추듯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그제야 황성에서 음식을 나눠준다는 게 실감이 났다.
기사들은 남의 것을 강탈하려는 이가 있을까 하여 약자를 위주로 보호해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여인도 작은 아이들도 제 몫의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있었다.
그릇조차 없는 자들은 황궁에서 준비한 나무그릇에 스튜를 받았고 그릇값을 하기 위해 지역 청결 유지에 동원되었다. 그 행위 하나하나를 지켜보다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단순히 음식을 배분하는 것으로 끝인 게 아니야. 이스트 타운을 개혁하려는 첫걸음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 것. 필요한 것을 받았으면 그 대가를 치르는 것. 사는 지역을 청결히 유지하는 것. 이 모든 게 무엇을 뜻하겠는가.
‘빈민들이 사회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재활 훈련을 하는 거야.’
발데마르는 두 손을 꽉 틀어쥐었다.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역시나. 무료 급식소가 아닌 다른 용도의 천막이 또 세워지고 있었다.
‘의료원이다…!’
들것, 의약품 등이 천막 옆에 쌓이고 있었다. 발데마르는 다급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치료사들이 그가 의약품 앞으로 다가가자 행동을 막아섰다.
“치료가 필요하면 저쪽으로 가시오.”
그는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뒤로 물러났다. 대신 그들에게 조언했다.
“지금 인력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금방 부족해질 겁니다.”
치료사들은 의아하게 발데마르를 보았다. 말투나 행동이 예사롭지 않았다.
“사방이 닫힌 천막으로는 어림도 없을 테니 차라리 빛만 가릴 수 있도록 천장만 가리는 게 나을 겁니다.”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자리를 이동했다.
“이쪽으로 눕혀!”
“여기 공간이 모자라는데?”
곧 발데마르의 조언이 현실이 되었다. 당장 감당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의 사람이 들이닥쳤다.
“여, 여기! 내 아내부터 좀 봐주십시오! 배를 부딪쳤어요!”
사색이 된 남자가 제 아내를 업어 들고 달려왔다. 발데마르는 바로 옆의 냇가로 뛰어들어 차가운 물에 몸을 닦아냈다. 그러고는 천막 근처에 쌓인 소독약을 손에 들이부었다.
“이봐! 무슨 짓이야?!”
치료사들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뛰쳐 왔다.
“저는 의사입니다. 어차피 지금 손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절대 방해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들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발데마르가 환자에게 뛰어가 상태부터 살폈다.
“이봐!”
“비장파열입니다. 이대로 두면 죽습니다. 당장 개복해야 하는데 뭣합니까!”
발데마르의 외침에 압도당한 치료사가 몸을 흠칫 굳혔다. 그의 말대로라면 당장 출혈을 잡아야 했다. 가장 경험이 많은 의원이 안쪽 천막에서 뛰쳐나왔다.
“무슨 짓입니까?! 여기는 수술 도구가 마땅치 않아요!”
“당장 출혈 혈관을 지혈하지 않으면 반드시 죽습니다.”
의원이 곤혹스러워할 때 환자의 남편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싹싹 빌었다.
“아이고, 제발! 뭐든 할 테니까 살려줘요!”
발데마르가 소리쳤다.
“여기에 말도 있고 말을 탈 수 있는 사람도 수두룩한데 뭐가 문제입니까!”
“그래서 뭐가 필요하죠?”
시선이 휙 돌아갔다. 로브로 모습을 가린 여자가 보였다. 치료사들도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그녀가 궁정인임을 증명하는 패를 보였다. 바로 곁에는 황실 직속 기사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바로 카예나였다.
카예나가 말을 이었다.
“당신, 그 환자 살릴 수 있어요?”
“수술 도구와 수혈할 피만 있으면 됩니다. 어시스턴트도요.”
“좋습니다. 당장 마련하죠.”
이스트 타운에 희망의 불씨가 툭하고 떨어졌다.
* * *
급식소가 세워진 지 사흘째. 발데마르는 치료사들을 도와 환자를 보살폈다. 그는 이 의료진들이 키드레이 공작가에서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립파인 키드레이 공작가가 자선 사업으로 황녀와 손을 잡았다면, 황녀가 중립이 되었다는 뜻인가.’
제 동생인 레제프 황자는 어쩌고? 게다가 이 군대들은 뭘까. 황제의 사병을 이끌 수 있는 건 황태자의 권한이다. 그렇다면 황녀가 그에 준하는 권한을 손에 넣었다는 말일까?
‘나랑 무슨 상관이겠어.’
자신은 이제 황궁 사람이 아니다. 그는 생각을 털어냈다.
그때 장정들 사이로 로브를 입은 여인이 눈에 띄었다.
‘궁정인이라고 했던가.’
현장에서 바로 의결할 권한을 지닌 수준의 여자 궁정인이라면 뻔했다.
‘황녀의 직속 시녀겠지.’
그런 사람이 첫날에 그치지 않고 오늘까지도 빈민가에 꼬박꼬박 나오는 것은 뜻밖이었다. 자꾸만 여자가 눈에 밟혀 결국 그녀를 찾아갔다.
카예나가 발데마르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죠?”
“비장 파열 환자를 병원에 보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어서요.”
“사람 살리는 일인데 당연히 해야죠.”
그녀는 빈민을 도시를 갉아먹는 더러운 들쥐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어제 병원에서 극찬을 늘어놓더군요. 조악한 수술장에서 거의 감염도 없이 깔끔하게 수술했다고. 영입 제안까지 하던데요?”
“과찬이십니다. 저 같은 의사는 널렸습니다.”
“전형적인 겸손의 말이네요.”
발데마르는 약간 당황하다가 피식 웃었다.
“저는 발데마르라고 합니다.”
그러자 카예나가 대답했다.
“메데이아라고 해요.”
발데마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의료진들에게 돌아갔다.
제다이어가 말했다.
“메데이아는 뭡니까?”
“외국 신화에서 나오는 마녀의 이름.”
그 외국이 비록 다른 차원에 있지만, 어쨌든 의미상 틀리지는 않으니 상관없지 않을까.
“아버지를 배신한 마녀가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결국 제 아이를 죽여 복수하는 인물이었지.”
제다이어는 괜한 걸 들었다는 듯이 찝찝하다는 표정을 했다.
“오늘도 연회에는 참석하지 않으실 작정입니까?”
“어차피 마지막 날인데 가봐야 무슨 의미겠어.”
황실 무도회는 오늘로 끝이다.
“그보다는, 저 남자 어때?”
카예나가 가리킨 곳에는 발데마르가 있었다.
제다이어는 카예나가 말했던 암흑가에 쓸 의사로 그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뒷세계에서 의사라면 항상 공급이 부족하니 더할 나위는 없습니다만, 하려고 할까요?”
“궁정식 예법을 쓰는 자였어.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 하는 처지인 거지. 세탁할 신분을 주면 꼬여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제다이어는 황녀의 진짜 무서운 면이 바로 이런 점이라고 생각했다.
‘마법보다 저 머리가 더 무섭다니까.’
아군이면 더없이 든든하지만, 만약 적이 된다면 어떨까? 자신이라면 당장 항복을 외칠 것 같았다.
카예나는 직접 빈민가를 둘러보다가 아이들이 타고 올라가는 뚱뚱한 나무를 발견했다.
“여기 그네를 매달면 좋겠네.”
“기사들에게 시키면 이 동네 나무란 나무는 죄다 그네가 생길 겁니다.”
“허풍은.”
카예나가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쿵!
그녀는 거세게 달려오던 아이와 부딪쳐 뒤로 넘어졌다. 후드가 벗겨지고 귀에 걸어놓았던 면사도 한쪽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근처에 있던 빈민가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미인의 모습에 숨을 집어삼켰다. 발라당 넘어진 아이도 멍한 얼굴로 카예나를 바라보았다.
카예나가 넘어진 것을 본 근처의 중앙군 기사들이 경악하여 그녀를 부르려고 했다.
“저, 전…!”
“쉿.”
그녀는 얼른 주변에 입단속을 시켰다. 소란피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카예나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다만 발데마르는 그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화, 황녀잖아?!’
카예나가 말했다.
“이만 가지.”
그녀가 걸음을 떼려다가 다시 뒤를 돌았다.
“저 나무에 그네를 달아줘.”
제다이어가 웃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